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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017. 12. 29. 14:07

시편 96편 말씀 묵상


1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2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의 이름을 송축하며 그의 구원을 날마다 전파할지어다


시편 96편은 예루살렘으로 들어온 언약궤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는 다윗의 시이다.


다윗이 부르는 찬송은 마치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는 장면이 연상된다.


예루살렘 주민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마 21:9)”라고 하면서 주님을 찬송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차이가 있다면, 다윗은 온 우주의 창조주이시며 통치자이신 주님을 찬양하는데 비하여, 예루살렘 주민들은 로마의 압제로부터 자신들을 구출해주실 이스라엘만의 왕으로 제한하여 찬양한 것이다.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들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가 아니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라고 찬양하면서, 찬양해야할 사람들에 이방인이  포함되어있다는 사실을 말한다.


언약궤의 예루살렘 입성과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모두 다 구원을 위한 것이기에, 참이스라엘이며, 참된 예루살렘인 교회의 성도들이 찬양을 하여야 할 이유가 된다.


다윗의 찬양은 이 세상의 악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에 대한 찬양이며, 함께 하심에 대한 감사의 찬양이다.


다윗은 이방 신들을 물리치신 하나님을 인하여,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온 우주의 창조주이시고 옳고 그름을 심판 하시는 분이심에 대하여 찬양한다.


다윗은 자신이 진리에 대한 간절함이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다윗의 옳음을 인정하셨다는 생각에서 더욱 감사드리며 찬양할 수 있었다.


다윗의 찬양은 하나님의 승리이면서 동시에 다윗의 승리다.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 땅에서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가 구체화되고있음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한다.



3  그의 영광을 백성들 가운데에, 그의 기이한 행적을 만민 가운데에 선포할지어다
4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지극히 찬양할 것이요 모든 신들보다 경외할 것임이여
5  만국의 모든 신들은 우상들이지만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6  존귀와 위엄이 그의 앞에 있으며 능력과 아름다움이 그의 성소에 있도다


블레셋 사람들은 여호와의 언약궤로 인하여 자신들의 신상이 목이 잘리고 나뒹구는 일들을 경험하였다.


다윗은 언약궤를 가져오려다가 소 달구지에 실렸던 궤로 인한 웃사의 죽음을 경험해야했다.


이러한 일들을 경험한 다윗은, 이방인들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모든 만민들 가운데 계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선포하고 찬양할 수 밖에 없었다.


다윗이 선포하는 하나님은, 블레셋의 신들과 같이 사람이 만든 신이 아니라, 창조주이시며, 어떠한 우상도 가까이 할 수 없는 존귀와 위엄이 그 앞에 있으며, 어떠한 신들도 감당 할 수 없는 능력과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의 결정체로서 성소에 계신 분이시다.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다윗의 찬양은, 모든 성도들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 가운데 드려져야 할 찬양이다.


신자가 찬양하는 하나님은 이론상의 하나님이시기 이전에, 삶 가운데서 경험되어지고, 많은 연단의 시간을  겪으면서, 위대하심을 고백하는 찬양이 되어져야한다.


성소의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성전으로서의 아름다운 에덴을 회복하시는 분이시며, 에덴에서의 과제를 능력으로 다 이루신 분으로서, 웃사와 같이 자기 방식으로 함부로 가까이 할 수 없는 존귀와 위엄이 있으신 분이시다.


다윗은 삶 전체를 통해서 이러한 하나님을 경험하였기에 찬양을 드릴 수 있었다.


신자의 삶은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지는 거룩한 삶이 되어야하며, 이 세상과의 싸움을 통해서, 진정 다윗과 같은 찬양을 드릴 수 있어야한다.



7  만국의 족속들아 영광과 권능을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8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들고 그의 궁정에 들어갈지어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릴 능력과 지혜가 없다.


타락한 아담의 후손으로서의 모든 인간은 이미 전적으로 부패한 죽은 자이기에,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어떠한 합당한 영광도 나올 수가 없다.


단 한가지 방법은, 자신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음으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된 자신만이 진정한 예물이 될 수가 있다.




9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 것도 있을 수가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산에 강림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서 두려워 떨어야만 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피난처가 될 뿐이다,




10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않으리라 그가 만민을 공평하게 심판하시리라 할지로다


그동안 세계는 불안정하였고, 불공평하였으며, 악이 승리하였었다.


이는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은 것이지만,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악에 의하여 요동치던 세계가 굳건히 서게 될 것이며, 악의 세력에 의하여 더 이상  위태롭게 되지 않을 것이며, 불의가 승리하는 일은 없어질 것이다.


다윗이 찬양한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는 이미 이 땅에 임하였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에, 신자의 삶은 다윗과 같이, 완성될 그 날을 바라보면서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11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며 바다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외치고
12  밭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즐거워할지로다 그 때 숲의 모든 나무들이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노래하리니


태초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늘과 땅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상위 구조로서의 하늘과 눈에 보이는 하위 구조로서의 땅이 창조되었으며, 하위 구조로서의 땅은 아담의 타락과 더불어 고통 가운데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늘의 기쁨은, 하나님의 보좌와 천사들이 거하는 하늘에서의 기쁨이며, 땅의 즐거움은, 아담의 타락과 더불어 가시와 엉겅퀴를 내야만 했던 이 피조 세계의 탄식이 즐거움으로 바뀐 것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에서의 승리를 통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이 약속되었지만, 아직은 완성되지 않았기에, 성도들은 완성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면서 다윗과 같이 소망 가운데 찬양을 해야 할 것이다.


밭과 숲의 모든 나무들도 타락과 더불어 가시와 엉겅퀴로 훼손되었지만, 그 때가 오게되면 하나님의 원래의 창조 목적에 부합된 결실들을 보게 될 것이다.



13  그가 임하시되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라 그가 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


아담에게 맡겨졌던 땅의 세계가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대적하는 길을 걸었지만, 결국 땅은 심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야만 한다.


땅에 거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이 땅에서의 삶은 아무 목적없이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다.


인생들은 자신의 삶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성공이라는 이름하에 최선을 다하지만, 이러한 인생은 나침판이 없이 목적을 상실한체 달려가는 인생이며, 결과적으로는 저주받은 땅에 묻힐 인생밖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비록 현재의 삶이 힘들고 고달프고 무의미해보이더라도, 그리스도인의 삶은 오직 그날을 위해서 준비하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리스도의 의를 옷입은 자들이기에 그리스도의 심판을 기쁨으로 맞이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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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onho Kim
:
시편 2017. 12. 29. 14:06

시편 95편 말씀 묵상


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2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
3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기 때문이로다
4  땅의 깊은 곳이 그의 손 안에 있으며 산들의 높은 곳도 그의 것이로다
5  바다도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
6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7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8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
9  그 때에 너희 조상들이 내가 행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시험하고 조사하였도다
10  내가 사십 년 동안 그 세대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이르기를 그들은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길을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
11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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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찬양 받으실 구원의 반석)


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다윗은 구원의 반석이신 그리스도를 찬양한다.


다윗은 누구보다도 구원에 대하여 갈망을 하였다.


다윗의 구원에 대한 갈망은 자신의 죄에 대한 절망적 인식에서 출발한다.


남들이 보기에는, 세상적인 관점에서 다윗은 왕으로서 부족한 것이 없었던 사람이었다.


만약 이 시대에 다윗 같은 사람이 애절한 마음으로 구원에 대하여 갈급해 한다면, 사람들은 속된말로 “배불러서 고민할게 없어서 그런 고민하냐”고 핀잔을 줄 것이다.


하지만 다윗의 위대함은 인간이 진정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고, 남달리 죄의 심각성을 깊이 인식하였으며, 구원에 대한 갈급함을 어느 누구보다도 애절하게 간구하였던 사람이었다.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은, 이스라엘 역사가 죄에 대하여 증거를 해준 것에 근거를 두고있다.


하나님이 다윗을 기뻐 하셨던 것은 그의 죄에 대한 인식과, 구원에 대한 갈급함과, 이로인한 애절한 기도였다.


구원자이시며 반석이신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것은 다윗의 애절한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인격적인 응답이었다.


아무리 이 세상에서 성공한 삶과 부귀영화를 누리는 삶도,  죄에 대한 인식이 없다면 그의 삶은 실패한 삶이라고 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다윗는 왕의 체면을 무릅쓰고 언약궤가 돌아오는 날 미갈의 비난을 받으면서까지 춤을 추며 즐거워하였다.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는 것은, 지위의 높고 낮음과 체면을 넘어서, 신자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2-3, 크신 하나님을 찬양)


2.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

3.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기 때문이로다 .


다윗은 하나님이 모든 신들보다 크신 하나님이시기에 찬양해야한다.


물론 다른 신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종속시키고 죄에 얽매이게하는 우상들에 대한 것이다.


다윗은 자신이 죄에 종노릇하였던 것 뿐만이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우상과 이들 기반으로한 악한 자들에 대한 승리로 인하여 즐거이 노래하는 것이다.


다윗은 전사로서 항상 싸움 가운데 살아온 사람이다.


다윗은 영적인 싸움에서 수 많은 패배의 쓴 맛을 경험한 사람이었다.


표면적인 육적인 싸움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내면에서의 영적인 싸움에서 수도 없이 눈물을 흘려야만 했던 사람이었다.


다윗의 영적인 패배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경험하게하는 통로가 되었다.


다윗의 즐거운 찬양은 궁극적으로 싸움에서의 승리에 대한 것이었으며, 이는 구원의 반석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된 것이었다.


신자들의 삶도, 다윗과 같이, 끝없는 실패와 좌절과 패배를 맛보는 삶이지만, 이는 구원의 반석이신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발판이 되어준다.


신자가, 다윗과 같이, 고통 가운데 찬양 할 수 있는 것은, 고통을 통해서 구원의 절박함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구원하심을 찬양 할 수 있는 즐거움은, 고통을 경험하지 않고는 누릴 수 없는 즐거움이다.



(4-5, 창조주이신 전능자)


4  땅의 깊은 곳이 그의 손 안에 있으며 산들의 높은 곳도 그의 것이로다

5  바다도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


하나님은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부요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의 부요는 신자를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신자를 위해서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셨다.


이 피조세계는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운영된다.


전능자이시며 창조주이신 하나님만이 우리의 참된 안식이 되실 수 있으시다.


하지만 우상 숭배자들은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과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신자의 삶은 하나님의 주권과 소유권을 인정하고서 이를 누리는 부요한 삶을 살아야한다.


이러한 풍요를 제대로 누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도가 수반되어야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질적 필요보다도 더 중요한 영적인 필요를 공급해 주시기 위해서, 물질적 공급보다는 우리의 성숙에 필요한 고난을 먼저 허락 하실 수도 있다.


물질적 풍요는 자칫 우리의 육적인 죄성의 촉매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윗의 찬양은 왕으로서의 육적인 축복 때문이 아니라, 영적인 패배를 통한 하나님의 승리를 맛보았기 때문이다



(6-7, 목자의 음성에 즉각 반응해야 할 양)


6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7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다윗은 우리의 존재의 위치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며, 그의 양이다.


양은 바로 앞만 보고 움직일 수 밖에 없기에 목자의 인도에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양은 목자의 도움이 없이 스스로 생존할 수 있는 동물이 아니기에,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 움직이지 않으면, 그 결과는 죽음과 직결 될 수 밖에 없다.


인간은 목자의 도움을 받아야만하는 양같은 존재이기에, 잘못된 목자를 선택 한다면 최악의 상황이 전개될 수 밖에 없다.


양은 목자가 부를 때에 응답하고 따라가야 한다.


바로 응답하지 않고 생각을 해 보고 늦게 따라가기로 결정한다면 이미 상황은 심각하게 바뀌었을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죽기 전에 믿어도 되지 않느냐도 말하지만 오늘이라는 시간을 놓친다면 기회가 영원히 오지 않을 수도 있다.


(8, 마음이 완악한 이들)


8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


인생은 광야에서의 삶과 같다.


언제나 오늘로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하고, 언제나 마음 문을 열고서 하나님을 깊이 생각해야한다.


인생의 여정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광야의 삶이다.


성공을 위한 치열한 경쟁과 과도한 자녀교육에는 사실상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 깔려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자들은 마음이 완악한 자들이다.


한국 사람들의 지나친 교육열은 하나님께 대한 완악한 마음의 표현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육신적  자아를 완성하는 수단으로 삼는 이들도 광야에서 멸망한 이들과 같이 완악한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9, 하나님을 시험하는 이들)


9  그 때에 너희 조상들이 내가 행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시험하고 조사하였도다


시험하고 조사하는 것은 어찌보면 과학적으로 옳바른 접근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신뢰할 만큼 충분히 경험하고도 믿지 못하는 마음에서 시험하고 조사한 것이다.


이러한 마음에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을 넘어서, 거부하는 마음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학문은 과학적이어야하며, 검증되어야만 한다.


특히 하나님에 관한 신학적 접근은, 믿음보다는 이성과 논리에 의한 과학적 접근 방식이 요구된다.


만약에 하나님과 말씀을 검증해봐서 믿을 만하다고 생각되어 믿는다면, 이는 더 이상 믿음이 아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11:1-2)라고 기록한다.


믿음은 보이는 현상 안에 감추인 하나님의 손길을 보는 것이다.


믿음은 과학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자는 성경의 증거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어야한다.


성경의 증거는 오직 믿는 자들에게만 보이는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다.


성경의 증거는 믿는 자에게는 구원에 이르게 하고, 믿지 않는 자에게는 심판에 이르게 한다.


(10, 미혹된 마음)


10  내가 사십 년 동안 그 세대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이르기를 그들은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길을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


미혹되었다는 것은, 방황하고 떠돌고, 잘못행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잘못된 마음의 결과물일 뿐이다.


마음이 잘못된 상태에서 아무리 옳은 길을 인도한다고 할지라도 잠시 후면 똑같은 잘못을 저지를 뿐이다.


마치 잘못된 OS가 잘못된  연산을 하는 것과 같다.


미혹된 백성들은 40년 동안 길을 잃고서 방황하고 떠돌고 잘못 길을 가다가 망할 수 밖에 없었다.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잘못된 길을 가면서 방황하고 떠도는 인생들에게 참된 길을 제시하신 것이다.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 된 길임을 알고서 오늘 그의 말씀을 들을 때 더 이상 방황하거나 떠돌지 말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옳바른 길을 가라고 말한다.


짧은 인생 방황하면서 오래살다가 멸망하는 것보다는 짧게 살더라도 그리스도로 더불어 제대로 된 길을 걸어 갈 때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이 잘못된 상태 그대로 예수의 길을 걷는다면 문제만 일으킬 뿐이고, 교회로 하여금 욕을 먹게할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걸어 가려면 거듭난 마음, 즉 잘못된 마음에서 벗어나서 주인되신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을 살아야한다.


바울도 “누가 나를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하고 고백을 하면서 자고하지 않으려고 하나님께서 주신 “육체의 가시”를 받아들였다.


인생은 죄된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잘못된 연산을 하는 마음의 OS로 인하여 끊임없는 싸움을 하여야만 한다.


(11, 안식에 들어오지 못할 이들)


11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안식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안식에 들어올 수 없다.


인간의 죄성은 광야에서 증명되었고, 또한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증명되었다.


다윗은 자신의 죄에 대한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이를 통회하고 기도하면서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을 받았다.


안식은 오직 죄에 대한 깊은 인식과 회개와 구원의 반석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묵상)


현대인은 인터넷의 지식을 쫓아가는 목자를 잃은 광야를 방황하는 인생들이다.


현대인들은 현대 의학의 도움을 받아 오래 살려고 노력하지만, 오래 살아도 생명에 이르지 못한다면 결국은 허무한데 굴복하는 삶이 된다.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에 이르는 길은 오직 생명되신 예수 그리스도뿐이기에 하나님의 말씀만이 참된 생명이 되고 길이 된다.


과학의 발전은 결코 인간에게 길을 제시해줄 수도 없고 생명을 제시해 줄 수도 없다.


하지만 인간들은 끊임없이 과학문명의 발전에 온 힘을 다 쏟아부우며 인류의 새로운 미래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참된 안식은 죄에 대한 깊은 인식과 탄식이 전제되어야하지만 현대 과학은 죄에 대한 개념을 수용할 공간이 없다.


그리스도가 주시는 안식은 오직 광야와 가나안에서 증명된 죄에 대한 인식과 탄식이 근거가 되어야한다.


현대인들은 너무나도 멀리왔다.


현대의 문명에 익숙한 우리들은 죄의 문제와 심각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


이스라엘이 교사로서 그리스도께 죄인을 인도하였듯이, 죄에 대한 인식이 없이는 안식이 있을 수가 없다.


신자의 삶은, 다윗과 같이, 죄에 대한 통회하는 삶 가운데 그리스도가 주시는 안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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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onho Kim
:
시편 2017. 12. 29. 14:05

시편 94편 말씀 묵상


1  여호와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빛을 비추어 주소서

2  세계를 심판하시는 주여 일어나사 교만한 자들에게 마땅한 벌을 주소서

3  여호와여 악인이 언제까지, 악인이 언제까지 개가를 부르리이까

4  그들이 마구 지껄이며 오만하게 떠들며 죄악을 행하는 자들이 다 자만하나이다

5  여호와여 그들이 주의 백성을 짓밟으며 주의 소유를 곤고하게 하며

6  과부와 나그네를 죽이며 고아들을 살해하며

7  말하기를 여호와가 보지 못하며 야곱의 하나님이 알아차리지 못하리라 하나이다

8  백성 중의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생각하라 무지한 자들아 너희가 언제나 지혜로울까

9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

10  뭇 백성을 징벌하시는 이 곧 지식으로 사람을 교훈하시는 이가 징벌하지 아니하시랴

11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

12  여호와여 주로부터 징벌을 받으며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

13  이런 사람에게는 환난의 날을 피하게 하사 악인을 위하여 구덩이를 팔 때까지 평안을 주시리이다

14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며 자기의 소유를 외면하지 아니하시리로다

15  심판이 의로 돌아가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가 다 따르리로다

16  누가 나를 위하여 일어나서 행악자들을 치며 누가 나를 위하여 일어나서 악행하는 자들을 칠까

17  여호와께서 내게 도움이 되지 아니하셨더면 내 영혼이 벌써 침묵 속에 잠겼으리로다

18  여호와여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고 말할 때에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셨사오며

19  내 속에 근심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

20  율례를 빙자하고 재난을 꾸미는 악한 재판장이 어찌 주와 어울리리이까

21  그들이 모여 의인의 영혼을 치려 하며 무죄한 자를 정죄하여 피를 흘리려 하나

22  여호와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하나님은 내가 피할 반석이시라

23  그들의 죄악을 그들에게로 되돌리시며 그들의 악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끊으시리니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 그들을 끊으시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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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복수하시는 하나님)


복수는 개인의 감정적 차원에서의 복수가 아니라 정의가 손상된 것에 대한 공의의 차원의 복수를 말한다.


하나님은 선에 대하여 절대적 기준이신 분이시기에 손상된 정의의 회복을 위해서 복수의 심판을 하실 수 있으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선의 절대적 기준이시다.


인간은 죄인이기에 정죄하거나 심판할 수 있는 자격과 능력이 없다.


다윗이 악에 대한 심판에 관하여 오직 하나님께만 의뢰하는 것은 신자로서의 올바른 행동방식이다.


이 세상이 힘있는 자들만의 세상이라면 이 세상은 절망적이다.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이 세상에 힘있는 어느 누구도 감당할 수 없으신 절대자이시다.


하나님의 공의와 능력은 인격적인 관계하에서 일어난다.


다윗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근거가되기도 한다.


신자의 기도는 하나님의 간섭하심에 합당한 근거를 제공해준다.


하나님은 사람에 대하여 인격적이신 하나님이시기에, 기도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정당한 근거가 되신다.


출애굽도 애굽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탄원이 있었고, 가인에 대한 처벌도  죽은 아벨의 땅에서의 핏소리로 호소함이 있었으며, 다윗은 삶의 여정 전반에 걸쳐서 많은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하였기에, 자손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구속 사역을 할 수가 있으셨다.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것에는 다윗의 애절한 기도가 밑거름이 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신자의 기도를 원하시고, 기도에 응답하는 가운데 역사하시고 간섭하신다.


아무리 하나님에 대하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힘이 되어주시지 않으신다.


신자의 삶이 떳떳하지 못하고, 다른 이들에게 잘못한 일이 있을 때 과연 기도를 제대로 할 수 있겠는가?


새벽기도회가 특징을 이루는 한국교회가 몰락하는 것은, 자신들의 떳떳하지 못하고 많은 잘못에 대한 회개가 없었기에 진정한 기도가 될 수가 없었고, 하나님께서는 형식적인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신 것이다.


진정한 기도는 다윗과 같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회개하는 가운데 드려질 때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역사하심이 이루어진다.


삶의 변화가 수반된 진정한 기도는, 한국 교회에 새로운 희망이 될 것이다.



(3-7, 하나님의 공의에 도전하는 악행)


이들이 자행하는 악행은 일반적인 악행이 아니라 주의 백성에 대한 악행이며, 하나님의 공의를 시험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다.


아담의 후손으로서의 죄인인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하나님을 알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하나님께서도 인간과 분리되시고 인간을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에덴에서 아담의 모든 깊은 것을 아셨듯이, 지금도 인간의 마음 속 가장 깊은 것이라도 정확하고 분명하게 알고 계신다.


인간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아시고 계시는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게 된다면, 인간은 자신의 죄를 감당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죽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속된 말로 “모르는게 약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죄인에게는 하나님께서 모르시겠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약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이는 궁극적으로 인간을 죽이는 독약일 뿐이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것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실 수도 있으신 분이시라면, 하나님은 심판 하실 수 있는 권한이 없으시며, 공의의 하나님이 되실 수도 없다.


다윗의 기도는 단순한 악행에 대한 하소연이 아니라, 전능자이신 하나님의 능력을 격하시키고, 주의 공의를 침범하는 것에 대한 공의의 복수를 간청하는 기도다.


다윗의 기도는 최종적으로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더불어 이 땅에서 응답되었다.



(8-11, 다윗의 논증)


다윗은 창조자의 전능하심을 논리적으로 변증하고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에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이 본능 가운데 존재한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능은 하나님의 능력의 부분일 뿐이다.


인간은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을 생각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진리는 이 세상에 나타난 피조물과 자연법을 통해서도 희미하게나마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연법을 통해서도 이 땅에 정의를 실행하시며, 악인을 심판하시며, 의를 이루어가신다.


하나님께서는 자연법을 통하여 은혜를 주심으로, 궁극적으로 사람들로하여금 진리에 이르도록 하신다,


진리 안에 거하지 못하는 인생은 허무한 인생일 뿐임을 하나님께서는 아신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지만, 인생이 허무한데 굴복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인생은 오직 진리 안에서만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있다.


신자는 하나님과 진리를 알아가는 기쁨을 초월적인 것이나 신비의 영역에서 찾기보다는, 삶의 일반적인 과정 가운데 하나님의 증거를 발견하고, 이를 통해서 말씀과 더불어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는 기쁨을 누려야한다.



(12-13, 악을 선용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궁극적인 관심은 악인에게 있지않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다.


하나님께서 악인들의 악행을 허락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백성을 교훈하시기 위한 것이다.


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현재의 고통은 클지 모르지만, 이는 더 큰 환란을 대비할 수 있는 능력의 밑거름이 된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악은, 회개하는 자에게는 연단과 교훈을 위한 것이지만,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는 심판을 위한 것이다.


우리는 어려운 상황에 부딪힐 때 일차적으로 자신을 돌아보아야한다.


북한 핵문제의 경우도, 결국에는 더 중요한 문제가 우리에게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신자는 삶의 여정 가운데 경험하는 많은 어려움들이, 결과적으로는 신자를 정금같이 단련시키는 과정이었음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한다.



(14-15, 하나님의 열심)


인간은 모두 다 아담의 후손이기에, 그 죄성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환란과 어려움을 통한 연단이 있을 수 밖에 없다.


문제는 문제로 드러나야지만 해결책이 있으며, 덮는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문제 투성이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문제가 문제로 드러나야 한다.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는 인간이 내면에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들을 겉으로 드러내는 과정이었다.


다윗의 삶도 자신의 문제를 드러내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한 갈망으로 삶의 열매를 맺을 수가 있었다.


다윗 성이 있는 예루살렘의 멸망은 육신의 목적하는 바가 결국에는 패망하게되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새예루살렘의 평안이 임해야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다 부정적 상황 가운데 살게 되어있다.


이것은 인간이 누구나 다 아담의 후손으로서의 죄인이라는 것에 대한 증거이며,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부정적 상황을 통해서 역사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다 이러한 부정적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살아야한다.



(16-17, 구원하시는 하나님)


인간이 아담의 후손이라는 것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없이는 멸망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한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이러한 멸망에서 자유 할 수 없을 뿐만이 아니라, 어느 누구도 다른 이들을 멸망에서 구원해 낼 수가 없다.


인간은 누구나 다 죽음을 직면해야하기에, 어느 누구도 부정적 상황에 대해서 자유 할 수 있는 능력이나, 불평할 권리가 없다.


오직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를 해야할 뿐이다.



(18-19, 위험에서 붙드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신자가 실족할 때 잡아주시고 근심할 때 위로가 되신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상황 가운데서 간섭 하셔서 실족하지 않게 인도하시는 것들을 경험한다.


마치 어린 아이가 차도로 갈 때 잡아주는 부모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자녀를 실족치 않게 보호하신다.


부모가 함께 하지 않고서 아이에게 평안을 기대할 수 없듯이, 성도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 가운데 평안과 위로를 경험한다.


아이가 보호받고 위로를 받는 것은 아이의 행함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오직  아이의 신분에 근거한 것이다.


성도는 행함에 관계없이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자녀로 택하시고, 은혜를 베푸신다.


이는 성도가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하나님을 찬양하여야 할 이유 가운데 한 가지다.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간섭하심이 없다면, 인간은 모두 다 멸망의 길로 치달을 뿐이다.



(20-21, 행악자를 심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성숙을 위해서 행악자를 사용하시지만, 그렇다고 행악자들을 기뻐하시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잠시 한시적으로 허용하시지만, 결국 심판대 앞에서 그들을 멸하신다.



(22-23, 안식이 되시는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의 궁극적인 안식이 되신다.


다윗의 삶의 여정 가운데서 경험하는 모든 핍박과 환란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위로와 안식의 근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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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onho Kim
:
시편 2017. 12. 29. 14:04

시편 93편 말씀 묵상


1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능력의 옷을 입으시며 띠를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는도다

2  주의 보좌는 예로부터 견고히 섰으며 주는 영원부터 계셨나이다

3  여호와여 큰 물이 소리를 높였고 큰 물이 그 소리를 높였으니 큰 물이 그 물결을 높이나이다

4  높이 계신 여호와의 능력은 많은 물 소리와 바다의 큰 파도보다 크니이다

5  여호와여 주의 증거들이 매우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니 여호와는 영원무궁하시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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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통치하시는 권위)


다윗은 왕으로서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다윗에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넘어서는 우주적 왕이시다.


다윗은 피조계의 안정이 왕으로서의 하나님의 통치에 의해서 확립된다고 말한다.


세계가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에 의한 간섭하심에 기인하기에, 다윗은 이로 인해서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찬양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내어버려두신다면 이 세상은 불안정해지며,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을 소외시킴으로서 스스로 혼란 가운데 들어간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로 인한 다스림을 받기도 원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은, 세상에서 항상 하나님의 주권을 의식하고 찬양과 감사들 드려야함이 마땅하다.


다스릴 수 없는 권위는 이미 권위가 아니다.


권위는 다스림, 즉 통치를 통해서 나타난다.


다윗은 이 세계의 안정이 하나님의 권위와 통치로부터 온다는 사실로 하나님을 찬양한다.


이 땅에서의 최초의 다스림은 왕으로서의 직분을 가진 아담에게서 시작되었다.


아담의 타락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직접 다스리신다.


하나님께서는 직접적인 다스림을 위해서 이 땅에 이스라엘을 세우신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눈에 보이는 왕을 원하였고,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왕을 허락하셨지만, 동시에 인간의 부패에 대하여 염려하셨고, 경고도하셨다.


하나님의 염려와 경고는 이스라엘의 왕들의 역사가 말해주고있다.


왕들은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서 특별히 구별된 옷을 입었다.


옷은 권위의 상징으로서, 옷의 모양에 걸맞는 능력과 권한을 부여한다.


왕에게 부여된 권위는 백성들에게 안식을 제공해주기 위한 것이다.


권위가 상실되면 안식도 상실된다.


권위는 잘못 사용되는 것도 문제이지만, 권위자가 아닌 이들이 권위자의 옷을 입는 경우도 문제가 된다.


목회자가 강대상에서 걸치는 가운도 권위의 상징으로 볼 수 있지만, 이는 목회자를 타락시키며 우상화하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구별된 제사장이 있었던 구약 시대와 달리 신약의 만인제사장의 개념에서 본다면, 강대상에서 목회자가 입는 가운의 성격은 성경적으로 규명되어야 될 것이다.



(2, 영원부터 계신 보좌)


주의 보좌는 다윗의 왕권과 직결되며, 이는 궁극적으로 이 땅에서 이루어질  그리스도의 왕권으로 귀결된다.


다윗은 자신의 자손으로 오실 그리스도가 영원부터 계신 분이었음을 찬양하며, 이스라엘의 왕권이 지속되기를 원한다.


이 세상은 원래 왕권에 의하여 통치 되는 곳이지만, 사람들은 왕들의 부패로 인하여 왕권을 거부하게 되었다.


다윗은 주변 이방인들의 위협을 목도하였으며, 이 땅에서 불의가 승리하는 것을 보면서 이 땅에서의 왕권의 안정을 하나님의 보좌와 연계시킨다.


다윗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실현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하나님을 찬양한다.



(3, 다윗을 위협하는 세력들)


큰 물은 자신을 위협하는 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다윗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전쟁의 위협 속에서 살아왔다.


다윗은 사는 동안 항상 전사로서, 능력의 옷을 입으시고 띠를 띠신 하나님을 의지하여야만 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다는 것은, 다윗의 존재 자체가 이 세상의 악의 세력과의 싸움 한 가운데 있을 수 밖에 없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다윗을 위협했던 세력들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방해하려는 세력들이었다.


신자는 다윗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이 세상의 악의 세력과 끊임없이 전쟁을 하여야하기에, 다윗의 고백과 찬양이 신자의 고백과 찬양이 되어야 한다.


북한 핵문제와 미국의 전쟁 위협이라는 큰 물결 안에서 어찌 할 줄을 모르는 현재의 상황에서는 다윗과 같이 하나님을 더욱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주권에 의지하면서, 하나님을 더욱 찬양하여야 할 것이다.


축복을 해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며, 악을 일으키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악을 일으키실 때에는 우리에게 그만큼의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인색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모든 도움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4, 악보다도 크신 하나님)


두려움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예외없이 누구나 가지고 있다.


두려움은 아담의 타락과 더불어 이 세상에 들어왔다.


인간에게 두려움이라는 공포가 사라지는 때는,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을 경우 뿐이다.


다윗은 자신에게 엄습해오는 모든 두려움을 하나님의 권세 안에 귀속 시킴으로 하나님 안에서 안식한다.


다윗은 사울왕에게 쫓겨 다니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나중에는 자신의 아들의 위협으로 인해서 도망을 다니기도했다.


두려움은 다윗에게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한 가지였지만, 다윗은 삶의 모든 두려움을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 안에 귀속 시킨다.


이 세상의 어떠한 위협도 하나님의 권세 안에서는 위협이 될 수 없다.


진정한 위협은 우리의 믿음이 부족한 것 뿐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주권과 간섭 하심에 대한 전적인 신뢰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이들에게 반드시 응답해 주신다.


악이 도전해 올 때 하나님께 의지하고 기도하였는데도 이 세상에서 악에게 시험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능력이 없으심이 아니고, 신자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간섭 하심이며,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뜻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신자는 기도하면서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왕되신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서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5, 증거를 보여주시는 하나님)


아담의 타락 이후에, 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과 분리가 되었지만,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간섭 하심과 섭리는 일반 은총이라는 이름으로 계속되고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하나님 자신을 이 세상에 구체화 시키심으로서 특별 은총을 위한 확실한 증거들을 보여주신다.


다윗의 경험은 하나님의 구체화된 증거들을 경험하는 것이며, 이는 자신의 자손으로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확증된다.


다윗은 자신의 삶이 주님의 구원하심에 대한 경험이었으며, 이는 하나님 나라의 영원함에 대한 소망이었기에  하나님을 찬양하게된다.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는,  타락 이후에도, 창세 전에 계획하신 구속 언약을 실천하시기 위해서 신자에게 많은 증거들을 보여주신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신자가 경험하는 증거들은 하나님의 구속하심으로 절정에 이르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증거들은, 우리의 구속을 위한 하나님의 간섭하심임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묵상, 실종된 권위)


다윗이 안식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은 참된 하나님의 권위 아래 복종하는 것이었다.


인간은 스스로는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없다.


참된 안식은 참된 권위자의 보호 아래에서만 가능하다.


자녀가 부모 아래에서 평안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누릴 참된 안식의 모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을 입었기에, 참된 공동체 안에서만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가 있다.


공동체를 통해서 이 땅에서 안식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공동체가 참된 권위자의 통치 아래 있어야 한다.


교회 공동체에서의 안식을 위해서는 공동체가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에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 시대의 특징은 권위자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 가운데 한 가지는, 권위와 권력과 전통의 상실이다.


이 땅에서의 권위는 하나님의 권위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서는 종종 모형과 그림자로서 하나님의 권위와 안식을 설명해준다.


하나님 나라라는 공동체는 민주주의보다는 왕국kingdom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이 땅에서 왕국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은 왕권의 오용과 부작용 때문이었다.


이스라엘의 역사만 보더라도 이 땅에서는 왕이라는 개념이 적합하지 않아보인다.


결국 인간의 죄성과 부패로 말미암아 왕의 통치가 오용됨으로서, 사회 제도가 바뀌게 되었지만, 결과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경험 할 모형과 그림자가 사라지게 된 것이다.


왕들의 부패가 극에 달했던 1789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대혁명은 사람들이  왕으로부터의 자유를 선언한 것이었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통치로부터의 자유를 선언한 사건이었다.


그후로 발전된 민주주의는 자유의 상징으로 여겨지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권위로부터의 자유를 선언한 것이다.


인본주의 신학은 프랑스 대혁명 이후에 급속히 발전되기 시작했으며, 카이퍼는 이에 맞서서 하나님의 주권을 이 땅에 실현시키고자 반혁명당을 중심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주권 회복을 위한 정치 활동을 펼쳤다.


지금 이 시대는 어느 때보다도 인권이 보장되는 자유로운 시대라고 생각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했기에, 자유 의지를 상실한 사단의 좀비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권위의 상실은 교회 지도자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그동안 나름대로 한국교회의 성장에는 목회자들의 헌신과 노력이 있었으며, 목화자라는 이름은 존경과 권위의 상징이었다.


이제는 반대로 한국 교회가 몰락한 원인 한 가운데 목회자들의 부패와 몰상식이 자리잡고 있다.


다윗이 보좌에 계신 하나님의 권세 아래에서 참다운 평안의 안식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왕되신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 시대 문명은 많이 발전되었을지 모르겠지만, 권위가 사라짐으로 인한 안식의 실종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오히려 문명이 퇴보했다고 볼 수 있다.


다윗이 하나님의 권세 아래에서 참된 안식을 누렸듯이, 신자는 참된 권세자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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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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