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4장'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8.01.09 :: 사도행전 4장 32-5장 11절 말씀 묵상
  2. 2018.01.08 :: 사도행전 4장 13-31절 말씀 묵상
  3. 2018.01.07 :: 사도행전 4장 1-12절 말씀 묵상
사도행전 2018. 1. 9. 23:41

사도행전 4장 32-5장 11절 말씀 묵상

32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다는 것은 이들이 다 성령에 사로잡힌바되어 자신의 뜻이 아닌 성령의 뜻대로 하나가 되었다는 증거이다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성이 하나로 나타나듯이, 성령의 역사는 성도를 그리스도와 하나로 연합 시킴으로서 처음 아담에게 심겨졌던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공동체성이 이 땅에서 다시 구현되고있는 것이다.


하나되는 공동체성은 성령의 새창조의 특성이다.


이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마음 다짐으로 되지 않는 초자연적인 것이다.


이들이 행하는 공동체적 삶의 형태는 종국적으로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 모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사도 시대 이후에 이 땅에서 이상적인 삶의 공동체가 형성되지 않는 것은 마치 가나안에 들어갔던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죄성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증명해 주고있는 것이다.


현재의 교회 공동체가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은  마치 이스라엘의 바벨론 유수 이전의 부패한 모습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성결의 개념으로 시작된 이스라엘의 가나안 생활과 같이 성령의 강권적 역사로 시작된 사도시대의 교회공동체가, 인간의 죄성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의 부패와 마찬가지의 길을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있다.

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환경적으로 많은 장애를 극복할 수 있는 성령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도 핍박받는 지역에서 성령의 큰 권능을 경험 할 수 있는 것은 환경적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흔히들 복받았다고 간증하는 세상적 축복들은 오히려 타락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는 것이다.


현시대 교회 타락은 환경적 풍요와 무관하지 않다.


기독교의 부패는 콘스탄티노플에 의한 기독교의 국교화로부터 시작되었음을 볼 때 핍박이 없는 교회는 부패될 수 밖에 없음을 보게된다.


교회에 대한 핍박이 없는 현재의 환경은 한국교회의 부패에 가장 큰 기여를 하고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기에 하나님의 큰 은혜는 오직 어려운 환경에서만 가능할뿐이다.


34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중국이 문화대혁명 기간에 하였던 일 가운데 한 가지는 부유한 자들의 집을 압수하고서 그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분배하였던 것이다.


아마 성경을 피상적으로 적용하였던 것 같다.


마르크스와 레닌의 공산주의 이론도 많은 부분 성경을 근거로 하고있다.


하지만 이들이 실패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이들이 인간의 죄성을 간과하였기 때문이다.


사도시대에 재산을 공유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인간의 죄성을 압도하는 성령의 강권적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개인에게 사도 시대에서의 일들을 그대로 적용한다면 개인은 파산될 수 밖에 없다.


가끔 이단들이 재산을 공유하지만 이들의 공유된 재산은 잘못 사용되어질 뿐이다.


M교회와 같이 대형 교회들이 교회의 재정을 잘못 사용하는 것은 그만큼 내부적으로 잘못된 이단성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이다


문제는 인간의 죄성을 충분히 통제할 수 있는 성령의 공동체적 역사가 없이는 개인이 이를 실행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현 시대의 문제는 사도 시대와같은 성령의 초자연적 공동체적 역사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인간의 죄성으로 말미암아 처음의 시작과 다른 이스라엘 공동체의 모습과 유사하다.


부흥은 부흥을 추구한다고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부흥을 추구하면서 일어나는 부흥의 역사들은 부흥주의의 한 현상일 뿐이다.


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재산을 소유할 수 없었던 레위족이 재산을 처분하여 사도들에게 가져간 것은 하나님의 법에서 떠난 이스라엘 가운데 하나님의 법이 다시 살아 역사하고있다는 증거이다.


사도행전에서의 바나바의 선교사역은 죽었던 이스라엘 가운데 성령의 새창조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었으며, 바나바를 통한 성령의 새창조의 역사는 사도행전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가 자신의 재산에 대한 집착을 버림으로서 온전하게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 헌신된 자들은 물질에 대한 욕심이든 명예에 대한 욕심이든 인간적 욕심을 내려놓아야지만 성령께서 크게 사용하실 수 있음을 본다.



1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2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3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5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6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7  세 시간쯤 지나 그의 아내가 그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8  베드로가 이르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이르되 예 이것뿐이라 하더라
9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하니
10  곧 그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의 남편 곁에 장사하니
11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반을 바쳤다는 것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거짓말을 한 것에 문제가 있었다.


거짓은 누룩과 같이 공동체 전체에 쉽게 퍼진다.


사도시대의 초기는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구별된 공동체가 시작될 수 있었다.


이는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거룩이 유지되어야만 했다.


아간의 범죄가 심각하게 다루어졌던 것은 이스라엘을 우상 숭배로 오염시킬 메소포타미아지역의 시날산 물건을 숨겼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성령의 강력한 역사와 더불어 새롭게 시작된 성결된 교회공동체에 거짓을 가지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교회에 들어온 죄는 공동체 전체를 오염시킨다.


현대 교회가 공동체성을 상실한 것은 이미 심각하게 죄로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심각하게 오염된 교회공동체는 심각하게 부패했던 이스라엘과 유사하다.


그리스도의 초림과 더불어 이스라엘의 멸망을 보았듯이 심각하게 오염된 교회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심판을 받을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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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18. 1. 8. 21:48

사도행전 4장 13-31절 말씀 묵상


13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14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사도시대는 초자연적인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던 시대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학문이 없던 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도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이며 관원들은 이를 직접 목격하고있는 것이다.


지금 시대에도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가 있지만 정경이 없던 사도 시대와는 구분이 되어야하며 반드시 학문과 능력을 위한 과정이 필요하다.


학문에 절대권을 부여해서는 안되겠지만 문제는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이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학문에 절대성을 둘 경우에는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이들이 목사 안수를 받음으로 인해서 교회가 혼란스럽게 될 수 있다는 것이 문제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일단 성도가 영적인 분별력을 가져야하겠지만 이 또한 쉽지 않은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어느 시대보다도 영적 분별력이 요구되는 시대다.



15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16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관원들도 성령의 역사를 목도했지만 마음은 이에서 멀었다.


인식하고 안다는 것과 믿으면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차이가 있다.


아는 것은 행동이 뒤따를 의무가 없지만 믿는다면 행동에서 결정이 요구되기에 상황을 부인할 수 없으면서도 믿지 못하는 것이다.


성직자들은 포기하기에는 가진 것이 너무 많다.


희생이 없는 믿음은 없기에 이들은 현재적 자신을 아는 것에만 한정시킨다.


이는 교회에서와 삶의 영역에서 이중적 태도를 취하는 이들과 한 가지일 것이다.


17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18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대제사장들은 증거를 보면서도 마음 문이 열리지 못하는 이들이다.


등잔 밑이 어둡듯이 정작 전문가들이 구약에서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는 것이다.


현재의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의 상태를 보면 이는 현 시대에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참된 신앙은 세상 이권을 넘어서는 것이다.


신앙을 넘어서는 세상 이권이 자기의 힘이 될 때 이는 우상이 되는 것이다.


이에 비추어 보면 교회에서 이권 문제로 세상과 같이 되는 성직자들은 정녕 우상 숭배하고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이는 세상과 타협하느냐 아니면 성경 말씀대로 사는 것이 옳으냐와 같은 말이다.


현 시대의 신앙 생활의 특징은 결단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교회가 요구하는 결단이 비성경적인 부분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사도 시대에는 단순한 결단을 요구했지만 이 시대는 결단을 위해 많은 지혜가 요구되는 시대이다.



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거부 할 수 있는 능력은 오직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는 할 수 없다.


결단을 요구하는 상황은 영적으로 거듭낳는지를 알 수 있는 기회이기도하다.

21  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


세상 사람들의 특징은 다른 이들의 반응에 예민하다는 것이다.


현 시대의 특징은 자신의 행동 기준을  대중의 반응에 둔다는 것이다.


인간이 높아지고자하는 기준은 대중의 인기가 절대적으로 작용된다.


사단도 예수님께 경배를 받기를 원해서 예수를 유혹했지만 실패하였다.


인기를 얻는다는 것과 경배를 받는다는 것은 암묵적인 상관관계가 있다.


대중 인기 가수들이 아이돌인 이유이다.


이들은 항상 대중의 반응에 따라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한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방식은 타락한 아담의 자손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으로 인하여 세상 유혹에서 자유할 수가 없다.


22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사십여세나 되었던 병자였으면 예루살렘이라는 좁은 지역에서 모르는 이들이 없었을 것이다.


특히 예루살렘에 살면서 누구나 다 성전에 올라오면서 보았을 것이기에 이 사람의 치유는 예루살렘의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방법은 인간의 방법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3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료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리니


동료가 있다는 것은 많은 위로가 된다.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을 갈멜산에서  물리치고도 낙담되어 죽기를 간청했던 것과 대조적이다.


이 시대에는 아무 사심이 없이 오직 신앙의 이름으로 동료를 만나기가 쉽지 않은 시대이다.

24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선포하며 치유 역사가 창조주의 행하심임을 나타낸다.


창조주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은 신자에게 커다란 위로가 된다.

25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26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27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예수를 죽인 이들은 유대인뿐만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포함됨으로서 보편적 인간의 공통적인 죄를 고발한다.


현 시대를 사는 우리들도 마찬가지의 죄성을 가지고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면서 또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들이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자신을 죽인 원수를 사랑하는 희생으로서 인간의 생각의 범위를 벗어나는 놀라운 사랑의 행위이다.

28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뜻이 대적들과의 관계 가운데 일어나고 있음을 말한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다.


신앙의 여정은 항상 대적의 위협이 있기 마련이다.


인간은 부패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대적의 위협과 간섭하심이 없으면 쉽게 부패해 버린다.


29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이들의 기도는 자신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복음 전파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것이다.


이 시대는 신앙 안에 있으면서도 대부분이 자신의 이익에서 자유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이들이 원하는 권능은 순수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다.


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사도들과 그 동료들의 기도는 구약의 말씀을 근거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무조건적인 간구보다는 현실적 상황과 당면 과제를 구체적으로 알리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한다.


이에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위로하심으로 인하여 담대히 하나님 말씀을 전할 수가 있었다.


이는 오순절 성령의 역사가 지속적으로 진행되고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posted by Wonho Kim
:
사도행전 2018. 1. 7. 22:04

사도행전 4장 1-12절 말씀 묵상

1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2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싫어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오히려 부활의 소식에 대하여 기뻐하면서 반겨야하지 않겠는가?


이들 성직이 직업이기에 때문인가?


아니다.


이들은 직업적 이권을 진리 위에 두기 때문이다.


교회도 규모가 커지거나 직업적 이권에 영향력을 미칠 정도가 되면 변질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이유로 교회의 규모를 키우는 것은 스스로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자살 행위이다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교회에서 진리를 위해서 직업적 이권을 포기하거나 양보하는 경우를 별로 보지 못했다.


이들 목회들은, 에서와 같이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파는 어리석은 자들이며, 순간의 이익을 위해서 영원한 것을 팔아먹는 믿음이 없는 자들이다.



3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


베드로와 요한이 갇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자가 급속하게 증가하는 것은 성령이 역사하고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는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5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반발하는 이들은 대부분 기득권자들이다.


기득권자들은 오히려 복음에 걸림돌이 될 수 밖에 없는가보다.



6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대제사장들이 오히려 영적으로 죽어있다는 것이 답답하다.


이들은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기득권이 위협받는다는 사실에서 위기 의식을 느꼈을 것이다.


성직이 직업인 이들은 전적으로 순수하게 진리를 변호하기가 쉽지가 않다.


이 시대에 복음의 진리를 가장 왜곡시키는 사람들이 신학자와 목사이며 또한 복음의 진리를 가장 잘 변호하고 전파할 수 있는 이들이 신학자이면서 목사들이다.


중요한 것은 성도들이 이를 구분할 수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가장 앞장서서 복음의 진리를 왜곡시키는 톰 라이트를 추천하는 신학자들과 목사들을 보면서 아무 생각없이 톰 라이트가 말하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이 슬프기만 하다.


톰 라이트는 그럴듯한 논리로 포장되어있어도,  복음을 유대교의 틀에다 집어넣고서 그리스도를 유대인의 한 사람으로 격하시키며 기독교를 유대교에 접목시키려는 친유대주의 학자이다.



7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권세와 이름은 왕권과 주권을 뜻하며,  하나님의 왕권이 이 땅에서 선포되고있음을 보여준다.


사도들이 행하는 권세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들은 아담이 실패한 이땅에서의 왕권에 대한 회복을 선언하는 것이다.


대제사장들이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알고있었다면 쉽게 이러한 질문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성령의 충만은 베드로가 지혜롭게 말을 하는데 힘을 실어주신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베드로의 입을 통하여 말하는 주체가 성령임을 나타낸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을 통한 성령의 새창조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9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베드로는 병고침과 구원을 동일한 관점에서 언급하고있다.


단순하게 병고침으로만 그친다면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베드로의 말은, 대제사장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자기들이 죽인 사람이 믿음의 대상이 되어야하는 기막한 상황역전을 전하고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름대로 생각이 있고 이유가 있어서 그리스도를 못박았을 것이다.


많은 불신자들이 정의의 이름으로 행하는 행위들이 실상은 하나님의 은혜를 악으로 갚는 경우들이 허다하다.


신자들도 불신자들의 행함에 대해서 문제 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동참하는 경우가 많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자신이 진리이면서 이를 근거로 행하지만 성경은 변치 않는 유일한 진리의 말씀이기에 신자는 자신의 생각을 넘어 진리를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성경 말씀이 기준이 되지 못하는 행함들은 결국 악으로 기울어 질 수 밖에 없다.



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뜻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인간 사회에서는 집단 이익이 곧 진리이기 때문이다


국가도 종종 진리보다는 국가에 이익이 되느냐 아니냐를 행동의 기준으로 삼는다.


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오직 기독교에서의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에 이르는 어떠한 길도 없다.


천주교에서는 다른 종교를 인정하면서 관상 기도를 통해서 타 종교와의 접촉점을 찾으려고하지만 이는 진리를 거역하는 행위이다.


나가는 말- 육체적 질병과 영적인 문


베드로와 요한은 육적인 문제를 통해서 영적인 문제를 해결한다


베드로와 요한은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였던 자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걷게하면서 병자가 병고침을 받는 것과 구원을 받는 것을 동일한 차원에서 설명하고있다.


이는 타락한 인간의 영적인 상태와 육체의 병적인 상태를 동일한 차원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질병의 요인들과 원인들과 특성과 결과들은 영적인 특성들과 밀접하게 비슷한 특징들을 보여주고있다.


질병을 일으키는 요인들로는 환경적인 외부적 요인들과 내적인 요인들이 있겠지만 이러한 요인들은 대부분 아담의 타락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질병의 증상과 특성들은 영적인 속성과 비슷한 속성들을 보여주는 경우를 종종 보게된다.


이러한 질병들은 결과적으로 인간으로하여금 죽음에 이르게 한다.


이는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에게 주어진 영적으로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의 결과일 뿐이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였던 자가 걷게된 것을 구원의 차원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사는 동안 경험하는 것이 결국 영원한 것의 모형이기 때문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함으로서 인간에게 부활의 소망을 갖도록 한 것은 이 땅에서의 경험들이 영원한 것의 모형이기 때문이다.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었고, 영적인 이스라엘은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 있는 참 이스라엘의 모형이었듯이, 삶 가운데 경험하는 현상들은 많은 부분 영원한 실체의 모형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고있다.


질병도 그 가운데 한 가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역 가운데 행한 많은 병고침의 기적들은 그 자체가 실체였다면 허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 병고침을 받았던 이들이나 베드로와 요한에게 병고침을 받았던 이나 결과적으로 죽는 것은 한 가지 이기 때문이다.


사는 동안의 경험이 영원한 것과 아무 상관이 없다면 인생은 모두 다 허무한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사는 동안의 경험이 영원한 것과 연계된다면 이 땅에서의 경험은 매우 귀중한 것이다.


신앙고백을 한 자들이나 불신자들이나 육체가 죽는 것은 매 한가지 이지만 결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신앙인의 일상이나 사회 활동은 복음과 구원의 문제로 연결되는데서 의미를 찾아야한다.


단순하게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선한 일을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구원과는 관계 없는 일반 은총의 영역으로 한정되는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보여준 치유사역은 일반 은총을 특별 은총의 영역으로 연결시키는 좋은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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