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24. 1. 28. 17:39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 묵상(6- 영광)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모세가 그렇게 보기를 원했던 하나님의 영광)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도 없었고 만약에 볼 수 있다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타락한 인간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않기를 원하고 대신에 자신의 소욕을 채우는데서 만족하면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소욕을 채울 수가 없고 반대로 극한 상황에 내몰리면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이는 타락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능의 양면이다.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울부짖었고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애굽에서 구해주셨지만 인간의 구함은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육신의 필요였던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그들을 구해주셨지만 출애굽이라는 과정은 시작에 불과할 뿐 완성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기 위한 정결이 필요함을 말씀하신다.

하지만 시내산에서의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숨죽이면서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맹세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곧바로 금송아지 앞에서 축제를 벌이는 죄를 범하게 된다.

시내산에서 내려온 모세가 보았던 광경은 출애굽한 백성들이 금송아지 앞에서 벌였던 광란의 축제였다.

다시 애굽 땅에서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이다.

모세는 억장이 무너졌으며  결국 금송아지 앞에서 축제를 벌였던 자신의 백성들을 칼로 멸절하는 과정을 경험하여야만 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목이 곧은 백성들로 인하여 그들을 진멸할까봐 그들과 함께 약속의 땅으로 올라가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하는 것과 같이 모세와 말씀하셨던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간청에 마음을 돌이키시고 친히 같이 올라가시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은총을 입지 않고는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고 하나님을 본 자는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모세는 자신이 은총입은 자임을 확인하기 위해서 주의 영광을 보기를 간청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등만을 보여주셨다.

은혜가 없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가 없는 것이다.

목이 곧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악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에 대한 인식도 없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고자 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출애굽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의다 광야에서 죽어야만 했다.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신자들 가운데 임한 것이다.

요한은 자신들 가운데 거하시는 육신이 되신 말씀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증거하고있다.

모세가 그토록 보기를 원했던 하나님의 영광을 요한은 은혜로 말미암아 진리 안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그 안에 충만한 은혜가 있기 때문이다.

모세가 은혜 입은 자이었음에 대한 증거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를 원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신자에게 보여지는 하나님의 영광은 신자들이 은혜 입은 자라는 사실을 증거해주고있는 것이다.

모세에게 부분적으로 보여주셨던 하나님의 영광은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는 증거의 표시였다.

신자들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은 신자들을 구원의 종착지인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인도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증거이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였던 구름 기둥과 불 기둥과 같이 진리의 말씀은 신자를 인도하는 등이다.

항상 진리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 어둠 가운데 있는 이 땅에서 실족하지 않는 것이다.

진리의 복음은 세상에서의 성공을 위해서 단순히 인간에게 제공되는 서비스의 일종이 아니다.

진리의 복음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거의 다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궁극적인 하나님 나라로의 초대이다.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었던 가나안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쉽게 허락이 안되었던 곳이었음을 생각해보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을 전하는 말씀은 영원으로의 초대라는 감격 자체일 수밖에 없다.

말씀을 거부하는 이들은 세상의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으며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이들은 세상의 부정적인 모습 가운데에서도 희망을 볼 수 있다.

삶의 여정 가운데 접하는 온갖 부정적인 상황들은 신자에게는 구원의 희망을 위한 것이며 불신자에게는 멸망을 위한 것이다.

어두운 상황일수록 빛으로 오신 하나님의 영광은 더욱 빛나게된다.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절망 가운데 희망을 볼 수 있으며 그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게된다.

절망 가운데 경험하는 하나님의 영광은 표면적인 것이 아니라 근원적인 것이다.

절망 가운데 경험하는 하나님의 영광은 이 땅을 사는 동안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경험하는 근원적 절망에 대한 희망을 제시해준다.

세상은 마치 성공한 자들만의 소유물 같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이러한 고정 관념을 무너뜨린다.

하나님의 영광은 신자의 삶에 근원적 혁명을 일으키는 놀라운 능력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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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23. 11. 8. 12:18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 묵상(5- 둘째 아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둘째 아담으로 오신 그리스도)

이 세상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육신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 이 세상을 살아가지만 육신으로는 하나님의 목적을 알 수가 없다.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심은 육신이 하나님의 목적에 종속 되어야함을 선포하시는 것이다.

모든 육신이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이 땅이 하늘과 분리될 이유가 없을 것이다.

하늘과 분리된 땅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부합되지 않기에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다.

창세기 6장에서는 인간이 육신이 됨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심을 후회하셨으며 그들을 물로 멸하셨던 것이다.

육신이 되었다함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이 더 이상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원래의 육신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존재였어야했다.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심은 원래 육신의 목적을 성취하심으로서 실패한 처음 아담의 역할을 대신하신 것이다.

이 창조 세계가 처음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분리를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지만, 말씀이 육신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이 창조 세계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되기 위한 발판이 마련된 것이다.

육신으로 오신 말씀은 처음 아담의 역할을 대신하시기 위한 둘째 아담이시면서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분이시다.

처음 아담은 순종을 통한 하늘과 땅의 연합이라는 과제를 수행하는데 실패했지만, 둘째 아담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처음 아담의 실패한 사역을 대신 하심으로서 하늘과 땅의 연합이라는 사역을 이루신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심은 인간으로부터는 이를 더 이상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기대할 수 없음을 선포하시는 것이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의 역사는 인간으로부터는 어떠한 하나님의 나라도 기대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있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의 실패로 인하여 이제 공은 하나님의 주권적 간섭하심으로 넘어온 것이다.


(이 땅에 실현된 에덴의 목적)

천지, 즉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 불순종한 아담을 대신하여 창조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직접 육신이 되심으로 처음 아담의 역할이 시작된 것이다.

아담이 거하였던 에덴은 성전으로서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곳이었지만 이제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심으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이다.

처음 아담이 있었던 에덴은 없어졌지만,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성전 에덴 대신에 친히 성전이 되신 것이다.

에덴은 우리가 돌아가야할 곳이 아니다.

에덴은 순종이라는 조건이 남아있는 곳이었지만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는 더 이상 순종을 조적적으로 요구하지 않는다.

성전으로서의 에덴은 공간적으로 제한된 곳이었지만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는 더 이상 공간적 제한을 받지 않는다.

공간적 제한을 받는 건물로서의 교회는 성전이 아니다.

건물로서의 교회를 성전이라고 부르는 일들은 세상적 욕심을 가진 사역자들의 거짓일 뿐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셨던 사건은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인하여 우리 가운데 성전으로 세워진 것이다.


(하늘과 땅의 연합)

성전은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곳이다.

그리스도께서 성전이 되심은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중재자가 되심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심은 하나님의 주권적 간섭하심의 출발이며 궁극적으로 처음 창조 목적의 완성, 즉  하늘과 땅의 연합을 위함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심은 하나님으로부터 출발된 하늘과 땅의 연합이 시작되었음을 말해준다.

에덴에서 아담에게 주어졌던 순종의 요구는 궁극적으로 이 땅이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참여되기를 위한 것이었다.

비록 처음 아담은 실패를 하였지만 둘째 아담으로 그리스도께서 이를 실현하고자 직접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처음 아담은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 왕, 선지자, 제사장으로서의 삼중직을 실행하여야만 했다.

에덴은 순종을 통하여 아담의 삼중직이 실현되는 성전이었다.

에덴은 하나님이 거니시던 곳이었으며,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성전으로서, 아담의 직책은 삼중직을 통하여 에덴을 관리함으로서 궁극적으로 에덴의 확장을 통하여 이 땅이 하늘과 연합되도록 하는 것이었지만, 아담의 불순종은 이 땅에서 에덴의 기능을 상실시킨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심은 에덴에서의 하나님의 요구가 이 땅에서 직접적으로 성취되는 사건의 시작이다.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는 첫 창조 주간에 완성되었지만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사람에게도 안식을 요구하는 과제가 주어졌던 것이다.

아담에게 주어진 이러한 과제가 성취될 때 하나님께서 계신 하늘(upper-register)과 사람이 다스리는 땅(lower-register)의 연합이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감추어진 진리)

블순종한 아담의 결과는 목적의 상실 뿐만이 아니라 이성적 논리 마저 손상을 가져왔다.

창조 세계의 신비는 아담 안에 감추어져있기에 인간적인 이성과 과학적인 논리로 접근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또한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진화론으로 설명되어질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이 세계의 기원 문제에 있어서 진화론이 여러가지를 설명하려고하지만 인간의 죄의 문제와 양심, 종교성등 여러가지 내적인 문제들은 진화론으로는 전혀 설명이 안된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창조 세계를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다.

진화론에는 목적과 방향성이 없지만 하나님의 창조에는 목적과 방향성이 있다.

인류의 역사는 궁극적으로 목적과 방향성을 가지고 진전되지만 진화론에는 획득 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는 법칙을 무시하고 양육강식, 적자 생존의 논리만 있을 뿐이다.

진화론의 결론은 인류의 파멸이지만 하나님의 창조는 궁극적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이다.

이 세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 되었으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 창조된 것은 없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된 이 세상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말씀이 육신이 되심은 말씀으로 창조된 세계의 완성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가시적인 하늘과 땅은 종국에는 비가시적인 하늘 나라와 연합을 이룰 것인데 말씀이 육신이 되심으로 인해서 이러한 연합이 시작된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심은 종말에 있을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가 우리 가운데서 시작된 것이기에 그리스도의 오심이라는 사건은 종말에 진입한 사건인 것이다.


(적용-철학적 사고)

이 땅의 하나님 나리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심으로 이 땅에 이미 임하였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임하심은 더 이상 이 땅의 사람들에게 구원을 위한 순종의 역할을 기대할 수 없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인간은 어떠한 철학과 행함과 종교로도 하나님과의 연합을 이룰 수는 없다.

인간은 행함 뿐만이 아니라 인간적인 사고 체계를 통하여 인간 세계를 완성시키고자한다.

실존주의 철학자들도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인간 중심으로 사고한다.

칸트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하나님의 영역에 대한 이해가 불가능하다고 아예  천상의 영역과 지상의 영역을 분리시켜 버렸다.

헤르만 바빙크는 성경 기록에 대한 이해 불가능한 부분들을 해석하기 위해서 성경을 하나님과 인간의 공동 저작물로 해석하면서 이해 안되는 부분을 이해하려고했다.

이는 더 나아가 칼 바르트가 성경 말씀을 인간이 하나님에 대하여 기록한 책으로 보고, 성경을 인본주의적으로 재해석하는데 발판을 제공한 것이 되어버렸다.

인본주의 신학은 아래로부터 출발된 신학이다.

철저한 칼빈주의자였던 바빙크도 자신의 목회 사역 이전에 과정을 밟았던 레이든에서의 5년 간의 자유주의 신학으로 말미암아 인본주의 신학을 정통신학에 접목시키는 오류를 범한 것이다.

이러한 인간적 사고는 결과적으로 바르트의 실존주의적 성경해석에 빌미를 제공해준 것이다.

바르트의 신학은 인간으로부터 출발된 신학의 중심에 서게된다.

참된 신학은 위로부터 시작된 신학이어야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함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며, 위로부터의 신학의 출발점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함은 이 땅이 더 이상 하나님과의 분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 천상의 영역과 세상 사람들이 사는 땅의 영역이 서로 연결되어, 궁극적인 연합을 의한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말해주고 있지만 인본주의 신학은 이를 다시 분리시키는 작업을 하고있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심은 인간 중심의 사고 체계를 무너뜨리고 천상의 영역과 지상의 영역을 연결시키는 인류 역사의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기에 모든 사고체계의 방식은 그리스도께 종속 되어져야하며 성령으로 말미암아야한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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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23. 10. 27. 07:46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 묵상(4-거룩)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변화된 거룩의 문제)

하나님의 임재에는 거룩과 하나님의 나라가 항상 주제가 된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거룩하지 않은 어떠한 것도 거룩에 참여할 수 없다.

인간 또한 거룩한 이들이 아니기에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심에서는 더 이상의 조건적 거룩을 요구하시지 않으시는 임재 방식의 변화를 볼 수 있다.

인간에게서는 더 이상 거룩을 기대할 수 없으시기에 하나님께서 마지막 방법을 사용하신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심은 이전에 요구되었던 거룩함이 더 이상 요구되지 않는 하나님의 새로운 임재 방식이 되었다.

이전의 임재 방식은 철저하게 거룩을 요구하셨다.

시내산에 강림하신 하나님은 회중들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회중 가운데 성막으로 임재하셨던 하나님은 회중 가운데 임재하셨지만 시내산에서와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분리되신 분이셨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지성소에서 철저하게 분리되었으며, 거룩의 문제가 있는 불결한 이들이나 죄를 지은 이들은 철저하게 성소로부터 분리되었다.

하나님께서 거니시던 에덴 또한 순종이라는 조건으로 아담의 거주가 허용되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람들 가운데 거하심은 거룩의 문제를 포기하신 것이 아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심은 범죄한 아담에게 약속하신 구원(창 3:15)을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행동 방식이다.


(삶의 방식의 변화)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심은 하나님의 목적을 하나님께서 직접 이루시기 위함이며, 인간에게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음을 선포하시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심은 택한 이들을 거룩하게 하시고 유기할 이들에게는 심판을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행동 방식이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패와 그리스도의 육신이 되심은 구원을 얻기 위한 인간의 행동 방식과 사고 방식에 대한 종식을 선포하시는 것이다.

구원을 얻기 위한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접근 방식은 더 이상 요구되지 않는다.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육신적 접근방식은 육신으로 오신 그리스도께 종속되어야만 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심은 칸트가 말한 것과 같은 하늘과 땅의 철저한 분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육신으로 오심은 육신에 종속된 우리에게 조건없는 초대장을 주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육신으로 오심은 육신에 종속된 이들에게 안식을 선포하는 것이다.

초대받은 이들은 안식을 누릴 권리가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심은 육신에 대한 생각의 전환을 요구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던 이전의 육신에 종속된 삶의 방식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들은 더 이상 육신의 종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죽음의 문제에서 자유할 수가 있다.

성도에게 육신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수단이기에 성도에게 육신은 더 이상 삶의 목적이 될 수가 없다.

육신은 죽음으로 종식되지만 그 이후에는 영원한 생명의 삶이 이어진다.

성도는 비록 육신에 묶여 범죄한 세상을 살아가지만 이는 예루살렘으로의 귀환을 기다리는 바벨론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의 임시적인 삶과 같은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고 이 세상이 거룩해 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은 변화될 수 없다.

성도는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할 수는 있어도 이 세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는 없다.

문화변혁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라는 신칼빈주의적 사고는 인간의 죄성을 간과한 것이다.

카이퍼와 바빙크는 세상을 변화시켜 하나님 나라를 만들고자 하였지만 그 결과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철저한 파괴였다.

변화되지 않는 세상으로 인하여 바빙크는 좌절한 가운데 우울증을 겪으면서 임종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이 세상은 최후의 심판 때 까지 죄를 지을 수밖에 없지만 성도는 이 세상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께서 주신 방식으로 이 세상에서 구별된 삶을 살아가야할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임하였지만 이 세상은 죄 가운데 운행되며 여전히 변함없이 지속될 것이다.

이 세상은 비록 죄를 짓고 있지만 최후의 심판 때까지는 노아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자연법으로 운행될 것이다.

성도는 이 세상 나라에 속하여 있는 동시에 이 세상에 임한 하나님 나라에 속하여 있는 두 나라 백성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로마카톨릭은 신정체제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려 하였지만 결과는 철저한 부패와 타락이었다.

종교개혁 후에 일부 재세례파의 뮌스터 장악 사건은 이 땅에 외적인 하나님 나라가 세워질 수 없음을 보여주고있다.

가끔 이단 교주들은 자신들만의 동산을 세워 하나님 나라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속이는 거짓일 뿐이다.

인간은 육신적으로 거룩해질 수 없다.

아무리 거룩한 삶을 사는 성도라 할지라도 사망의 몸에서 자유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임재는 더 이상 육신적인 거룩을 요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임재로 세상이 변화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결과적 행동 방식의 변화를 요구한다.

성도는 이 세상을 두 가지 방식으로 살아가야한다.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지만 아직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임하지 않았기에 이 세상의 자연법을 존중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할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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