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11장'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7.12.29 :: 예레미야 11장 18절- 12장 6절 말씀 묵상
  2. 2017.12.29 :: 예레미야 11장 9-17절 말씀 묵상
  3. 2017.12.29 :: 예레미야 11장 1-8절 말씀 묵상
예레미야 2017. 12. 29. 12:37

예레미야 11장 18절- 12장 6절 말씀 묵상

18  여호와께서 내게 알게 하셨으므로 내가 그것을 알았나이다 그 때에 주께서 그들의 행위를 내게 보이셨나이다

19  나는 끌려서 도살 당하러 가는 순한 어린 양과 같으므로 그들이 나를 해하려고 꾀하기를 우리가 그 나무와 열매를 함께 박멸하자 그를 살아 있는 자의 땅에서 끊어서 그의 이름이 다시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함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

20  공의로 판단하시며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원통함을 주께 아뢰었사오니 그들에게 대한 주의 보복을 내가 보리이다 하였더니

21  여호와께서 아나돗 사람들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그들이 네 생명을 빼앗으려고 찾아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라 두렵건대 우리 손에 죽을까 하노라 하도다

22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청년들은 칼에 죽으며 자녀들은 기근에 죽고

23  남는 자가 없으리라 내가 아나돗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곧 그들을 벌할 해에니라


예레미야의 질문

1  여호와여 내가 주와 변론할 때에는 주께서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

2  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거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들의 마음은 머니이다

3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아시고 나를 보시며 내 마음이 주를 향하여 어떠함을 감찰하시오니 양을 잡으려고 끌어냄과 같이 그들을 끌어내시되 죽일 날을 위하여 그들을 구별하옵소서

4  언제까지 이 땅이 슬퍼하며 온 지방의 채소가 마르리이까 짐승과 새들도 멸절하게 되었사오니 이는 이 땅 주민이 악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그가 우리의 나중 일을 보지 못하리라 함이니이다

5  만일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 강 물이 넘칠 때에는 어찌하겠느냐

6  네 형제와 아버지의 집이라도 너를 속이며 네 뒤에서 크게 외치나니 그들이 네게 좋은 말을 할지라도 너는 믿지 말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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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고향 사람들에 의한 박해)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받는 일이 없다고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예레미아 선지자도 자신의 고향인 아나돗에서 환영받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박해까지 받고있다.


인간에 구축된 사회적 환경은 배타성과 죄성과 연계될 수 밖에 없다.


고향 사람과 지역주의, 민족주의등 배타적 이기주의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배타성으로 귀결되기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가 없다.


이는 혈연, 학연, 지연에 기반을 둔 교회가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되기도한다.



(22-23, 때가 되면 징벌하시는 하나님)


세상에 기반을 둔 이들은 당시에는 견고한 것 같지만, 이들의 하나님 말씀에 대한 배타성에 대한 결과는, 바로는 아니어도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직접 관여를 하시게 되어있다.


이들의 악함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상대하면서 소모전을 벌일 때 오히려 우리 자신도 그들의 악함에 동참하는 또 다른 악을 낳게 되는 경우를 보게된다.


상대의 악함은 오직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오직 주님을 향하여 열심을 품어야한다.



(2, 거짓된 목자들)


말로만 하나님을 부르며, 마음에서는 먼 사람들...


차라리 불신자라면 몰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에게 핍박을 받는 일은 참으로 힘들고 어렵기만 하다.


이런 이들이 교회를 장악하고 참된 신자들을 쫓아내는 것을 보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러한 상황들을 허락하시는가에 대하여 예레미아와 같은 질문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는 교회 안에서 핍박을 당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질문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악인에 대한 관심보다는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관심이 앞서신다.


악한 이들은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기 마련이다.


우리의 관심사는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보다는, 우리에게 다가 올 일을 걱정하며, 지혜롭게 준비되어지는 자가 되어야한다.


악한 이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께서 행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4-6, 우리의 형평을 아시고 배려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연약함을 아시기에 우리에게 적절한 환경을 허락하신다.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선지자에게는 다행일 수도 있다.


경우에 따라서 세상 사람들과의 친분은 신자에게 환란보다도 더욱 어려운 시험과 유혹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무엇이나 다 감당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우리를 걱정하시며, 가장 가까운 이들도 우리를 속일 수 있음을 경계하게하신다.


의리, 가족애, 친분등 세상적인 관계가 우리에게 가장 치명적인 손상을 입힐 수 있다.


예레미아 선지자가 자신의 고향인 아나돗에서 핍박을 받는 것과 같이, 참된 신앙을 가질 때 세상적으로 가장 가까운 이들이 가장 감당하기 어려운 이들이 될 수가 있다.


고향에 있는 형제와 아버지 집과 함께 하려는 것이, 선지자에게는 말과 경주하는 것이되고, 넘치는 요단 강물이 될 수도 있다.


오랫동안 말씀을 공유 할 수 없었던 혈연, 학연, 지연으로 뭉쳐진 교회가 결국 붕괴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의 세력과 함께 할 수 없음을 경험해본다.



(결론)


신자의 고난은 많은 부분 세상 욕심을 추구하는 이들과의 충돌에서 온다.


유다 백성과 이스라엘 거민들이 하나님의 성전에서 입으로 하나님을 불렀던 것은 한 마디로 기복신앙이었다.


혈연, 학연, 지연에 기반을 둔 교회는 세상에 뿌리박은 기복신앙을 추구할 수 밖에 없다.


기복신앙은 복음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


이 세상에서 참된 신앙을 갖게되면, 이 세상과의 충돌로 인한 손해는 물론이고, 많은 희생을 감당하여야한다.


하지만 세상과 타협하는 교회에서는 종종 예수믿고 어려운 가운데 복을 받았다는 간증들을 많이 하곤 한다.


기복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우상 숭배의 한 가지이다.


참된 간증은 세상 복받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환란 가운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함께 하셨는지에 대한 간증이 되어야한다.


예레미아 선지자는 간접적으로나마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을 환란 중에 건져내시고, 자신을 핍박하는 이들을 벌하시는 것에 대한 간증을 전한다.


참된 간증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경험하는 것에 대한 것이 되어야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기뻐하시는 자를 핍박하는 자들을 결코 가만히 놓아 두시지는 않으신다.


성도의 어려움과 성도가 속해있는 교회와 국가의 어려움에 대하여, 예레미아가 하나님께 질문하였던 것과 같이,  참된 신앙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께 물어보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 안에 거하는 것임을 생각해본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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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2017. 12. 29. 12:36

예레미야 11장 9-17절 말씀 묵상


9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 중에 반역이 있도다

10  그들이 내 말 듣기를 거절한 자기들의 선조의 죄악으로 돌아가서 다른 신들을 따라 섬겼은즉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이 내가 그들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깨뜨렸도다

11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리니 그들이 피할 수 없을 것이라 그들이 내게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할 것인즉

12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주민이 그 분향하는 신들에게 가서 부르짖을지라도 그 신들이 그 고난 가운데에서 절대로 그들을 구원하지 못하리라

13  유다야 네 신들이 네 성읍의 수와 같도다 너희가 예루살렘 거리의 수대로 그 수치스러운 물건의 제단 곧 바알에게 분향하는 제단을 쌓았도다

14  그러므로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거나 구하지 말라 그들이 그 고난으로 말미암아 내게 부르짖을 때에 내가 그들에게서 듣지 아니하리라

15  나의 사랑하는 자가 많은 악한 음모를 꾸미더니 나의 집에서 무엇을 하려느냐 거룩한 제물 고기로 네 재난을 피할 수 있겠느냐 그 때에 네가 기뻐하겠느냐

16  여호와께서는 그의 이름을 일컬어 좋은 열매 맺는 아름다운 푸른 감람나무라 하였었으나 큰 소동 중에 그 위에 불을 피웠고 그 가지는 꺾였도다

17  바알에게 분향함으로 나의 노여움을 일으킨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의 악으로 말미암아 그를 심은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에게 재앙을 선언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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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0, 이스라엘 공동체 가운데 생겨난 반역의 심각성)


이스라엘의 반역은 아담의 범죄의 속성과 맥락을 같이하고있다.


에덴에서 하와에게 틈을 타 들어온 반역은 에덴 공동체를 파괴시켰다.


이스라엘 공동체도 마찬가지로 그들 가운데 들어온 반역이 이스라엘 전체를 파괴시켰다.


이스라엘의 선조는 궁극적으로 아담으로 귀결되며, 아담은 하나님께 반역한 자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단절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반역한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난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키겠다고 맹세한 행위 언약에 대한 결과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반역한 백성을 무조건 용서하신다면 하나님은 더 이상 공의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반역한 이들에게 그에 상응하는 벌을 내리실 때 하나님의 공의가 증명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반역은 이들 가운데 들어온 일부의 반역을 수용한 결과였기에 공동체 안애 들어온 일부의 반역이 전체를 파괴시킨다는 보여준다.



(11, 피할 수 없는 재앙)


사람들은 쉽게 “오 마이 갓”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심지어는 욕을 할 때  “지저스”라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고있다.


현재의 인간들의 상태가 얼마나 보편적으로 타락해 있으며, 현재의 죄악이 유다 백성과 예루살렘 거민 못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자신들의 죄악에 대한 인식이 없이, 재앙이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징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필요할 때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기 위해서 과연 쉽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겠겠는가?


하지만 사람들은 종종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서,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하거나 회개함이 없이,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과의 관계의 개선이 없이, 과연 쉽게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보시기에 좋게 창조하셨다.


아담의 범죄는 나의 범죄가 아니기에 나에게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누구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공동체적 책임을 가지고 있다.


나 자신도 아담을 대표로하는 공동체의 일원이기에, 마찬가지로 동일하게 범죄에 참여하고있는 것이다.


인간은 일차적으로 모든 부정적 상황의 원인이 자신과 관계가 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타락한 아담의 속성을 가지고 있기에, 절대로 자신에게서 문제를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12, 무력한 우상)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민이 그 분향하는 신들에게 가서 부르짖는 것과 같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현대인들은 문제가 생겼을 때 일단 현대 기술을 이용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하는데, 현대인들이 과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재앙을 피할 수 있겠는가?


이는 마치 애굽의 재앙에 맞서서 싸우는 바로와 같이, 현대인들은 기술로 재앙을 이겨내려고하지, 절대로 하나님께 두 손 들고 나아가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유다 성읍과 예루살렘 거민들의 신들이 그 곤액 중에서 절대로 그들을 구원치 못하리라고 하신 것과 같이 인간은 결코 기술로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재앙을 해결 할  수는 없을 것이다.



(13, 우상의 보편성)


마땅히 하나님을 섬겨야 할 백성들이 만든 우상의 수가 얼마나 많은지 보여주고있다.


처음에는 일부였겠지만 이를 용납한 결과가 어떠한 지를 보여주고있다,


일본만 보더라도 우상이 거리 곳곳에 즐비하고 집집마다 가득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우리 나라는 교회가 가득한 나라지만, 일본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늠 것과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는 교회를 섬기고 있는 관계로, 너무도 많은 외형적 교회가 부패한 이스라엘 성전과 같이 우상 숭배의 장소가 되어버린 것이 사실이다.


이것이 이제는 너무도 보편화되었고, 예루살렘 성전과 같이, 외형적 교회 안에 진리와 거짓이 혼잡하게 되었기에, 한국의 많은 교회들이 예루살렘 거리의 수효대로 수치스러운 물건이 가득한 곳이 되어버렸다.



(14, 버림받은 자들)


로마서 1장에서와 같이 내어버려두고, 포기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더 이상 말로 안되는 이들은 직접 재앙을 경험함으로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깨닫게 하는 수밖에 없다.


현대문명의 발전은 마땅히 하나님께 향해야할 인간의 마음을 더욱 강퍅하게 만든다.


문명의 발전 만큼이나 인간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


수없이 말씀하셔도 깨닫지 못하는 이스라엘에게 마지막 방법으로 재앙을 경험하게 할 수 밖에 없었듯이, 현대인들도 현대문명으로 인한 재앙을 경험하기 전까지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깨닫지 못 할 것이다.



(15, 악을 도모하며 기뻐하는 자들)


오늘날의 교회는 교회에 충성 봉사 열심히 하고, 헌금 많이 하면 최고의 교인이 된다.


하지만 교회가 부패하고 잘못될 때 이들이 과연 교회에서 제대로된 역할을 할 수 있겠는가?


열심과 충성 봉사, 그리고 십일조를 강조하는 교회의 모습이 마치 무당이 푸닥거리 하며 돈을 요구하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지는 것이 무리한 생각일까?


교인들은 목회자를 대적하면 벌받는다면서 질질끌려가는 모습이 마치 무당의 협박에 끌려서 돈을 더 얹혀주는 이들을 연상시킨다.


교회에서 진리는 사라지고, 기뻐할 것을 기뻐하지 못하고, 슬퍼할 것을 슬퍼하지 못하는 하나님을 떠난 자들의 계략이, 거룩한 하나님의 성도들을 교회 밖으로 내어쫓고있다.



(16-17, 축복 할 수 없는 이유)


감람나무를 심으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이를 망가뜨렸듯이,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세우신 교회도 마찬가지로, 죄를 용납하는 이들로 인하여, 가지 꺽인  감람나무와 같이 훼손되고있다.


타락한 아담의 후손으로서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보여준 것과 같이, 오늘 우리들의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의 현상들을 본다.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기에,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좋은 것을 주어도 나쁘게 사용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심으신 감람나무도 인간이 누릴 자격이 없음을 증명해주고있을 뿐이다.


인간은 윤리나 도덕으로 변화되거나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것을 변질시켜서 악한 것으로 이용하는 것은, 마음의 할례를 받지 못한 이스라엘은 물론이고 아예 할례를 받지 않은 모든 열방의 백성에게는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인간은 오직 성령세례를 받지 않고는 하나님의 선하신 것을 선하게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새삼 생각해 본다.



(결론)


교회의 문제는 일차적으로 공동체 의식의 결여에서 온다.


교회들 가운데 들어온 일부의 세상적인 방식이 교회 전체를 붕괴시키는 보편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아무리 거룩한 성도라고 할지라도 타락한 아담의 후손으로서의 체질을 갖고있기에, 잘못된 것에 대하여 쉽게 수용을 하고, 이로 인하여 공동체 전체가 파괴되는 결과를 가져오게된다.


율법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이스라엘과 유다 가운데 있는 죄가 고발되고, 들어온 죄로 인하여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의 붕괴가 초래되었듯이, 신약의 교회도 마찬가지로 말씀에 의해서 교회 가운데 들어온 죄가 고발되고,  가만히 들어온 죄로 인하여 교회 공동체 전체가 붕괴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인하여 죄를 용서받았다고 함부로 행동하는 이들은 실상 용서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니며, 이들의 잘못된 행동은 교회 공동체 전체에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죄를 용납하는 행동은 죄에 대한 합리성을 제공해주며, 교회 공동체 전체에 심각한 영향을 준다는 생각을 할 때 간단히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죄를 용서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누구보다도 죄의 심각성을 인식하고서 이를 피하려고 노력해야하며, 바울과 같이 사망의 몸인 육신의 소욕에 대하여 심각하게 경계를 하고 죄를 쉽게 생각하지 말아야한다.


한 가지 예로서, 아무리 유능하고 능력이 있는 신학자라고 하더라도, 그의 생활이 부인과 자녀를 놔두고 수십년을 비서와 동거 생활을 한 사람이었다면, 과연 그 머리에서 나오는 신학 사상이 성령의 간섭하심에 의한 결과물인지에 대하여 의심해 볼  수 밖에 없다.


경건한 하나님의 성도는 자신의 죄를 다윗의 범죄에 빗대어 합리화시키거나, 죄에 대한 핑계를 대지 않는다.


울법 아래에 있었던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자녀로서의 관계가 아니었지만, 참된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더 심각하게 인식을 할 것이다.


교인들의 보편적인 죄악과 무례함과 몰상식은 이들이 얼마나 잘못된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예레미아 선지자와 같은 심정으로 죄가 공동체에 미치는 심각성에 대한 인식을 하며 이 시대를 살아가야 할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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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2017. 12. 29. 12:34

예레미야 11장 1-8절 말씀 묵상

1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이라 이르시되

2  너희는 이 언약의 말을 듣고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말하라

3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 언약의 말을 따르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니라

4  이 언약은 내가 너희 조상들을 쇠풀무 애굽 땅에서 이끌어내던 날에 그들에게 명령한 것이라 곧 내가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순종하고 나의 모든 명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

5  내가 또 너희 조상들에게 한 맹세는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리라 한 언약을 이루리라 한 것인데 오늘이 그것을 증언하느니라 하라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여 이르되 아멘 여호와여 하였노라

6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말로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선포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 언약의 말을 듣고 지키라

7  내가 너희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간절히 경계하며 끊임없이 경계하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순종하라 하였으나

8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각각 그 악한 마음의 완악한 대로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에게 행하라 명령하였어도 그들이 행하지 아니한 이 언약의 모든 규정대로 그들에게 이루게 하였느니라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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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절, 언약의 대상인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의 존재적 삶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 안에서의 삶이다.


이들의 가나안 땅에서의 삶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순종을 조건으로 허락받은 삶이었으며, 불순종에 대해서는 저주가 약속된 행위 언약 안에서의 삶이었다.


이들의 이전 상태는 쇠풀무 애굽 땅에서의  종이었지만, 가나안 땅에서의 현재적 삶은 종에서 해방된 삶으로서, 순종과 명령을 따를 것을 조건으로하는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 있었다.


하지만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무시하였으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배제하는 삶을 살았다.


인간이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무시하고 하나님을 배제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언약에 대한 파기를 의미하지만,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행위 언약에 의해서 그들에게 저주를 선언하실 수 밖에 없으신 것이다.


이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저주는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이 행위 언약 안에 있었던 것을 근거로하는 하나님의 정당한 심판이었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거주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신 것이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여주는 죄성은 인간이 결코 있는 그대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증명해주고있다.


(6-8절, 하나님의 원하심)


하나님께서는 부패할대로 부패한 백성들에게도 예레미아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됨으로서, 유다백성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끝까지 언약의 요구인 순종을 요구하신다.


예레미야로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상기시키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순종하고 명령을 지킬 것을 요구하신다.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주실 저주는 행위 언약을 근거로 한 것이기에, 순종하지도 않고 듣지도 않는 완악한 이들이 자신들에게 임하게 될 저주로 인하여 하나님을 원망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행위 언약을 근거로한 순종에 대한 요구는 결과적으로 모든 이들이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앞으로 임할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이 참여할 자리가 없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임을 증거해주시는 것이다.


아담이 인류를 대표하였듯이 이스라엘은 보편적인 인간의 실상이 어떠한 지를 대표적으로 보여주고있다.

모든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현재적 삶도,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는 삶이기에, 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행위에 대한 심판이 적용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아담의 후손으로서, 하나님과 아담 사이의 행위 언약 관계 아래에서 대표자 아담을 통해서 행위 언약 아래있었다.


아담은, 유다백성과 예루살렘 거민들과 같이, 행위 언약을 근거로 에덴에서 쫓겨난 자이다.


우리는 이미 아담 안에서, 실패한 아담에 의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죽은 상태에 있는 자이다.


이스라엘은, 행위 언약 아래에서, 이미 죽어있는 자들의 실상이 어떠한지를 고발하고있다.


이스라엘을 통하여, 이미 죽어있는 자들이 고발되는 목적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을 성취하시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아담에게 또 하나의 언약(원시복음: 창 3:15)을 세우심으로서, 타락한 아담이 낳은 아들 셋 안에서 여호와를 부를 수가 있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현재적 삶은, 하나님께서 노아와 맺으신 언약 관계로 인하여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노아 언약의 궁극적인 목적은, 일반적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인류 모두는 누구나 다 양심과 같은 자연법을 통하여 자신이 언약 안에서 저주를 받은 아담의 후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원을 위해서는 죄가 고발되어지는 인생을 경험해야만 하는데, 이는 자연법을 통해서 인간의 실상이 고발되어져야만 가능한 것이다.


인간이 누구나 예외없이 죄인이라는 사실은 어느 누가 보아도 알 수 있는 엄연한 사실이며, 이를 설명할 수 있는 근거는, 아담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정하심 이외에는 어떠한 것도 제대로 설명되어질 수 있는 것이 없다.


펠라기우스와 같은 이는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기에 모두 다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고 말하며, 어거스틴은 생물학적인 유전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모든 상황은 하나님의 행위 언약을 근거로한 하나님의 강령이라고 설명할 수 밖에 없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실상이 어떠한 지를 깨달을 때 우리에게 구원의 소망이 주어질 수 있다.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우리는, 행위 언약 안에서 저주받은 자이기에, 더 이상 행위로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


우리의 행위는 단지 고발되어질 뿐이다.


아담의 아들 셋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던 것과 같이, 유다 백성과 예루살렘 거민을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구할 때, 고발되어지는 인생에게 희망이 있는 것이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서부터 오는 것이기에, 인간의 행위는 구원의 공로에 더해질 수가 없는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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