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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6.16 :: 신명기 28장 15-35절 말씀 묵상 1
  2. 2018.03.30 :: 히브리서 9장 11-22절 말씀 묵상
히브리서 2018. 6. 16. 23:04

신명기 28장 15-35절 말씀 묵상


15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를 것이니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는 모두 완전하게 지켜 행하여야한다.

부분적인 행함으로는 모든 저주 가운데 들어갈 수 밖에 없다.

인간적으로 볼 때 너무 가혹하고 불가능한 요구이지만, 이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자연계의 질서는 어느 하나 자연의 법칙에서 예외가 되거나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없다.

하지만 누룩과 같이, 인간의 조그마한 범죄는 피조계 전체를 파괴할 수 있다.

하나님의 법은 엄격하고 완벽하다.

하지만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에서는, 이스라엘에게 요구되는 법은 엄격하지도 않았으며, 혹시 법을 어겼을 지라도 성전에서의 제사를 통해서 언제라도 회복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는 제2성전 유대교에서의 유대인들이 무척이나 성실하게 율법을 준수하였으며, 매우 신실한 믿음의 생활을 하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기준은 매우 성실하거나 신실하게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지키는 것이다.

행위 구원론을 말하는 톰 라이트가 이러한 주장을 하는 이유는, 최종적 심판을 위해서 요구되는 인간의 행위가 완전한 율법 준수라면, 어느 누구도 구원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16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성읍은 방어를 위한 곳이지만, 성벽에 의한 방어는 무용지물이 된다.

불순종한 이스라엘에게 성벽은 아무 역할을 하지 못하며, 어느 곳에 있던지 저주를 피할 수가 없을 것이다.

현대인은 자기 방어를 위해서 경제력을 키우고 힘을 키우지만, 그들의 내면의 실상을 보면 문제가 없는 이들이 없다.

겉으로는 평안해 보이지만, 콩가루가 된 집안도 종종 본다.

진정한 안식은 오직 하나님께 의지할 때 오는 것이다.



17  또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먹는 문제는 생존에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문제이다.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아들 여호람 때에, 아람 군대에 둘러싸인 사마리아 성 안에서는 자기의 아들을 쌂아 먹는 일까지도 일어났다.

가나안이 젖과 꿀이 흐르는 은혜와 안식의 땅이었지만,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은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왔다.

현대 사회가 일반 은혜 가운데 어느 정도의 풍요를 누리고있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거두어가시면, 인간은 비극적 재앙 가운데 들어갈 수 밖에 없다.

기상 재해와 메뚜기 때의 출현은 언제라도 인류를 굶주림의 저주 가운데 몰아 넣을 수 있다.


18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소와 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가나안에서 맛보았던 수고의 모든 결실들을 저주 가운데로 들어가게한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불순종과 더불어 모든 것을 다 빼앗길 수 밖에 없었다.


19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


들어와서 안식을 취할 수도 없고, 나가서 수고를 하여도 소용이 없었다.

하나님과 관계가 상실된 상태에서는 수고와 안식이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은혜는 단순히 잘먹고 잘살라고 주시는 것은 아니다.

모든 은혜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회복으로 귀결되어야한다.


20  네가 악을 행하여 그를 잊으므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여호와께서 저주와 혼란과 책망을 내리사 망하며 속히 파멸하게 하실 것이며


하나님을 잊은 악한 행동은 그대로 놓아둘 경우 주변의 이차적인 피해를 야기시킬 것이다.

마치 발사한 미사일이 궤도를 이탈했을 경우에는 중간에 파괴시키지 않으면, 이차적인 피해를 야기하는 것과 같다.

사람은 마땅히 행하여야 할 것이 있으며, 행함의 궤도가 있다.

주의 말씀은 인간이 마땅히 행하여야 할 궤도이기에, 여호와의 명령을 무시하는 행동은 스스로 궤도를 벗어나서 파멸을 자초하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하나님을 잊어버린 사회로서, 어디로 가야할지 궤도를 상실한 사회라고 할 수 있다.


21  여호와께서 네 몸에 염병이 들게 하사 네가 들어가 차지할 땅에서 마침내 너를 멸하실 것이며


다윗은 인구조사라는 불순종의 댓가로 백성들에 염병을 돌게하였다.

불순종과 염병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현대인들의 질병은 대부분 문명의 발달로 인한 후유증과 연관되어있다.

현대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욕심으로 대체시킨다.

현대인이 온갖 질병에 시달리는 것은 불순종이라는 욕심의 결과물들이다.

현대인은 약이라는 수단으로 질병을 통제하고있지만, 모든 약은 이차적인 부작용을 수반하게 되어있다.


22  여호와께서 폐병과 열병과 염증과 학질과 한재와 풍재와 썩는 재앙으로 너를 치시리니 이 재앙들이 너를 따라서 너를 진멸하게 할 것이라

예전에 서울에서의 생활 가운데 차 안에서의 냄새 문제가 해결이안됬는데 지방에서의 생활에서는 차의 냄새가 자연스럽게 해소되었다.

자연에서 발생하는 음이온의 부족으로 정화기능이 떨어진 것이다

도시 문명은 겉으로는 화려해보이지만, 부차적인 욕심을 위해서 인간이 필요로하는 필수적인 요소들을 파괴시킨다.

일반 은혜 시대에 다가오는 저주의 재앙은, 문명의 보편성 만큼이나 보편적으로 다가온다.

질병의 대다수가 인간이 자초한 보편적 저주와 연관되어있다.

현대인은 질병들을 과학적으로 해결하려고하지만, 과학까지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간섭하심에 대해서는 맹인들이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파괴하는 인간을 용납하는 것은 더욱 큰 재앙을 초래하기에, 인간에게 다가오는 질병의 재앙들은 인간의 생태계를 조절하는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23  네 머리 위의 하늘은 놋이 되고 네 아래의 땅은 철이 될 것이며


가나안에서 하늘과 땅이 주는 축복은 은혜에 의한 것이었다.

포괄적 은혜를 거부하는 이들에게 선택적 은혜만을 허락하시지는 않는다.

현대는 일반 은혜의 시대에 보편적인 은혜를 거부를 함으로서 스스로 화를 자초하고있다.

대기 오염은 인간의 욕심의 결과들이다.

중국은 발전과 더불어 대기 오염이 상상을 초월한다.


(미세먼지 분포도)


24  여호와께서 비 대신에 티끌과 모래를 네 땅에 내리시리니 그것들이 하늘에서 네 위에 내려 마침내 너를 멸하리라


비가 내려도 대기 오염으로 인한 산성비가 내린다.

온갖 미세먼지들은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없이 살려는 욕심의 결과물들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라도,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파멸의 길로 걸어가게끔 인도하시는 것이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언 16:9)”

미세먼지의 원인과 대책은 많이 나오지만, 인간은 어떠한 방법을 사용하더라도 상황은 점점 더 나빠질 것이다.

미세 먼지에 대한 대책은 또 다른 이차적 문제를 유발할 것이며, 이미 재앙의 굴레에 빠져들었기에,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는 한에는 재앙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것이다.

사람은 인간의 욕심으로 문제가 생기고 있다는 것은 알지만, 정확하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를 생각하려고 하지 않는다.

근본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단절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내어버리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내어버리신 이유는 심판받기에 합당한 모습이 되게끔 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데후2:11-12)”

현대인이 겪는 환경 재앙은 누구나 다 보편적으로 자신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에 합당한 자라는 것을 말해준다.

이러한 재앙조차도 사람이 스스로 자초한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거두어 가시는 주권적 간섭하심이 있었기에 생기는 현상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기에, 내어버려둠으로서 어떠한 결과가 생기는지 스스로 경험하도록 하신다.

가나안의 이스라엘도, 불순종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은혜를 거두어 가심으로서, 재앙 가운데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야만 했다.


25  여호와께서 네 적군 앞에서 너를 패하게 하시리니 네가 그들을 치러 한 길로 나가서 그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할 것이며 네가 또 땅의 모든 나라 중에 흩어지고


인간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어떠한 승리도 있을 수가 없다.

그리스도께서 사단에 승리를 하였어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이 세상을 이길 수가 없다.

재벌이나 학자들이나 성공한 이들은 승리한 자들이 아니다.

승리는 더 이상 사단의 간섭에 굴복하지 않는 것이다.



26  네 시체가 공중의 모든 새와 땅의 짐승들의 밥이 될 것이나 그것들을 쫓아줄 자가 없을 것이며


악한 이세벨 뿐만이 아니라 불순종한 유다의 멸망때 이러한 결과들을 볼 수 있었다.



27  여호와께서 애굽의 종기와 치질과 괴혈병과 피부병으로 너를 치시리니 네가 치유 받지 못할 것이며


“그 재가 애굽 온 땅의 티끌이 되어 애굽 온 땅의 사람과 짐승에게 붙어서 악성 종기가 생기리라 그들이 화덕의 재를 가지고 바로 앞에 서서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날리니 사람과 짐승에게 붙어 악성 종기가 생기고(출 9:9-10)”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피부병을 일으키셨지만, 일반 은혜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재는 환경 파괴와 면역체계의 약화로 인하여 각종 피부 질환에 노출되고 있다.

표면적 의료 기술의 발달은 임시적일 뿐, 근본적인 대책을 세워주지는 못한다.

이러한 방식의 해결책은 근원적인 문제를 외면하게 해주기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을 수도 있다.



28  여호와께서 또 너를 미치는 것과 눈 머는 것과 정신병으로 치시리니


미치는 것과 정상적인 것의 차이는 기준이 어디에 있느냐에 달려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기준이 되신다.

기준이 없다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판단 할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마음에 새겨넣으신 자연법은 오직 하나님을 기준으로 세워졌지만, 하나님을 멀리하며 기준이 사라진 인간의 마음은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자신이 진리의 기준이 된다.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저주는, 복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마땅한 결과로 인한 것이다.

현대인은 엄밀하게 말해서 정상적인 사람이 없다.

모두가 비정상이며, 정신질환자들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정신질환은 해결책이 있지만, 드러나지 않는 질환은 해결책이 없다.

자신이 정상이 아니지만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주변의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서 도움을 청할 수도 없다.

자신의 문제를 생각하지 못하기에 판단과 정죄를 일삼는다.

서로가 서로에 대하여 공격하는 현상은 공동체의 파괴를 초래한다.

하나님 나라는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성의 구현을 통해서 완성되기에, 서로에 대하여 정죄하기 바쁜 곳에서는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구현할 수가 없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가나안의 이스라엘이 맞이하는 결과들은,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현시대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29  맹인이 어두운 데에서 더듬는 것과 같이 네가 백주에도 더듬고 네 길이 형통하지 못하여 항상 압제와 노략을 당할 뿐이리니 너를 구원할 자가 없을 것이며


오직 하나님만이 빛이 되신다.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상황에서는 눈에 보이는 빛은 있지만, 영적으로 어둠 가운데 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빛이 없기에, 환란 가운데 도움을 청할 수가 없으며,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다.

현대는 문명의 빛은 화려하지만, 영적인 빛은 거의 사라진 시대이다.

하나님을 찾아도 볼 수가 없으며, 도움을 구하여도 도움을 받을 수가 없다.

정의는 사라지고 오직 힘있는 자만이 살아남는 약육강식의 시대가 되었다.

불순종했던 가나안의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현대는 점점 더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어가고있다.

현대는 오직 외적인 빛만 밝힐 뿐 마음에 빛이 비추어지지 않는 시대이다.


30  네가 여자와 약혼하였으나 다른 사람이 그 여자와 같이 동침할 것이요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에 거주하지 못할 것이요 포도원을 심었으나 네가 그 열매를 따지 못할 것이며


가정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사라진다.

사람과 재산을 잃게 됨으로서, 삶의 기반이 상실된다.

출애굽하여 들어간 가나안에서 얻은 모든 것이 다시 상실되는 것이다.

이는 출애굽하여 하나님과 약속하였던 것을 지키지 않음으로서, 더 이상 출애굽한 백성으로서의 의미가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이 모든 것을 회복시켜주신다.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한몸을 이루게 되며, 그리스도께서 마련해주시는 처소가 준비되어있으며,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영적인 양식을 제공해주신다.



31  네 소를 네 목전에서 잡았으나 네가 먹지 못할 것이며 네 나귀를 네 목전에서 빼앗겨도 도로 찾지 못할 것이며 네 양을 원수에게 빼앗길 것이나 너를 도와 줄 자가 없을 것이며


가나안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소산을 하나님께서 정하신 곳에서 형제들과 같이 나누어서 먹으면서, 하나님이 자신들을 어떻게 구원하셨는지 감사하면서, 풍요의 기쁨을 함께 누릴 수 있었다.

가나안 공동체에서는 자신의 재산을 잃었을 때 형제가 이를 찾아주었다.

재판은 공정하였기에, 자신의 재산을 보호할 수가 있었다.

하나님의 은혜가 상실된 가나안 공동체에서 더 이상 이전의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없다.

비록 안식의 땅으로 준비되었지만, 불순종으로 인하여 안식은 상실되었다.

현대 사회는 일반 은혜 가운데 보편적인 풍요를 누리고있지만, 그래도 세상은 힘있는 자에게 의해서 약자들이 희생될 수 밖에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표면적으로는 공정한 사회가 되는 것 같아도  실제적으로 약자는 점점 더 희생될 수 밖에 없다.


32  네 자녀를 다른 민족에게 빼앗기고 종일 생각하고 찾음으로 눈이 피곤하여지나 네 손에 힘이 없을 것이며


인간이 자신의 자녀를 상실해보지 않고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가 없다.

하나님은 자녀를 처음으로 잃어버리셨던 분이었다.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께 등을 돌렸으며, 하나님은 잃어버린 자녀를 찾으시기 위해서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잃는 고통을 당하셔야만 했다.



33  네 토지 소산과 네 수고로 얻은 것을 네가 알지 못하는 민족이 먹겠고 너는 항상 압제와 학대를 받을 뿐이리니


이스라엘은 불순종으로 인하여 바벨론에 모든 것을 빼앗길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이 수고한 것의 소산을 먹는 것은 당연하면서도 축복이다.

식민지배를 당하면 수고의 소산을 빼앗길 수 밖에 없다.

투기나 도박은 뺏고 빼앗기는 하나님을 떠난 방식이다.

주식도 벌은 만큼 손해보는 사람이 있으며, 수고로 얻은 모든 것을 잃는 통로가 되기도한다.

이익을 위해 매진하는 현대 사회는 자신의 수고를 담보로 다른 이들의 수고를 빼앗기도하는 하나님을 떠난 사회이다.



34  이러므로 네 눈에 보이는 일로 말미암아 네가 미치리라


도박이나 투기로 자신이 수고한 것을 다 잃어본 사람은 미치지 않으려고 많은 노력을 하지만, 고통의 시간은 좀처럼 짧지는 않다.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하심과 은혜가 없이는 회복되기 어렵다.

낙담하는 시간과 상실의 시간은 하나님의 구원을 간구하는 은혜의 시간이 될 수 있다.

이스라엘이 미치지 않았더라면, 제 정신으로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리스도의 구속을 기다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에 가장 친근하게 은혜로 다가오신다.



35  여호와께서 네 무릎과 다리를 쳐서 고치지 못할 심한 종기를 생기게 하여 발바닥에서부터 정수리까지 이르게 하시리라


철저하게 비참해진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보다는 자신의 힘을 더 의지하는 이들도 있다.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모르는 자들이다.

아무리 건강해도 몇십년 후에는 예외없이 도움을 받다가 흙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다.

차라리 젊었을 때 무릎과 다리에 고치지 못할 종기가 생긴다면,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는 기회가 있겠지만, 평생을 자신을 믿다가 하나님을 완전히 떠난 사람에게는 희망이없다.

일반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현재의 삶 가운데 당하는 고통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상을 쫓아가는 시대


현시대는 가장 발달된 시대이면서 가장 무지한 시대이다.

불순종한 이스라엘이 당하는 고통은, 교만이 꺽이고 그리스도께 인도되는 축복의 계기가 될 수 있었다.

현대는 교만이 극치를 달리고 있는 시대이다.

현대인들은 모든 문제의 해결을 과학적으로 접근하려고한다.

현대인들은 도덕과 윤리로 사람을 바로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질병은 병원에서 해결하고, 사회 범죄는 언론과 법원의 몫이며, 배고품의 문제는 경제 활동으로 해결한다.

어느 부분에서도 하나님께 도움을 청할 여지가 없다.

가끔 자연 재해를 만나게되면, 인간의 연약함과 창조주의 위대함을 말해보기도하지만, 잠깐 뿐이다.

교만한 현대 문명의 뒤에는 교묘한 속임수가 자리잡고 있다.

질병에 대해서는 원인적 접근보다는 현상적, 즉 증상에 따른 치료만 있을 뿐이다.

인간이 왜 질병에 노출될 수 밖에 없는지 근원적으로 접근하려고 하지 않는다.

질병에 대한 근원적 접근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으로 귀결되며, 인간은 하나님을 떠난 것에 대한 회개와 함께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해야만 한다.

사회 범죄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뉴스를 장식하고 재판이 이루어지지만, 범죄의 총체적 분량은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인간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죄성은 어느 정도 환경만 조성이 되면 활성화된다.

죄악은 죄성이 활성화되어 나타난 것이다.

마치 화산이 내부의 마그마가 활동하면서 폭발하는 것과 같다.

현대 문명은 인간의 죄성을 더욱 자극하는 방향으로 발전된다.

예전에는 청소년이 인터넷의 음란물을 접하지 못하도록 컴퓨터를 거실에 놓아야한다고 대책을 세우기도했지만, 이제 컴퓨터는 손 안으로 들어가서 어린 아이들에게까지 세력을 확장하고있다.


내면의 죄성이 활성화되지 않을 수가 없는 세상이다.


배고픔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시작된 경제 활동은 더 많은 자본과, 더 많은 시간과, 더 많은 노력을 요구한다.


인간에게 주어진 제한된 시간과 공간은 경제의 굴레에 짓밟히며, 하나님께 향하여야하는 모든 시간과 공간을 빼앗아 간다.


현대인의 외적인 화려함과 달리 현대인은 빛을 잃은 눈 먼자가 되어가며, 자신이 어디를 향하여 가고있는지도 모르고 있다.


현대인에게 바쁨과 수고의 결론은 안식이 아니라 죽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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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9장 11-22절 말씀 묵상


11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장래 좋은 일은 천상의 나라, 즉 하나님께서 첫째 날에 지으신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일로서, 처음 창조의 궁극적인 완성을 위한 일이었다.

이는 마지막 그리스도의 재림때 임한 하늘과 땅의 연합에 대한 길을 열어주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창조의 완성을 위한 것으로서, 아담에게 주어졌던 에덴에서의 과제, 즉 흔히들 문화 명령이라고 말하는 통치 명령을 통해서 에덴에서 성취되었어야할  하늘 나라에 단번에 들어가심으로서 에덴에서의 과제를 완성을 시키셨다.

흔히들 말하는 문화 명령은 인간적 관점에서의 잘못된 해석이며, 이는 아담이 에덴에서 수행하였어야할 통치 명령으로서, 그리스도는 둘째 아담으로서 이 통치 명령을 대신 완성시키심으로, 에덴에서의 과제를 완성시키신 것이다.

이 땅에서의 문화 변혁을 위한 문화 명령의 수행은, 그리스도가 완성시키신 안식에 들어가기를 거부하고 다시 에덴에서의 과제를 수행하려는, 카이퍼로부터 시작된,  인간적 발상이다.


(대제사장)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으로 오신 것은 아담이 맡았던 에덴에서의 제사장직에 대한 종결을 선언하는 것이다,

아담의 제사장직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의 모형이었으며,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직은 대제사장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그림자였다.

옛 언약 안에서의 제사장직은 궁극적으로 아담 안에 담겨져있던 제사장직으로까지 올라갈 때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이 성취되는 것이다.


(손으로 짓지 아니한)

이 땅의 외형적 구조는 타락 할 수 밖에 없다.,

교회 건물이 성전으로 불리우는 것은 현 시대 목회자도 이스라엘의 제사장들과 마찬가지로 타락할 수 밖에 없는 아담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외형적인 것을 추구하는 죄성을 가지고 있기에, 거룩함은 인간의 외형적인 것을 넘어서야 할 필요가 있다.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단번에 들어가심으로서 더 이상의 행위가 요구되지 않는다.

더 이상의 제사장의 역할이 요구되지 않은 만큼 성도에게도 더 이상의 행위가 요구되지 않는다.

하지만 교인들 사이에서 생기는 많은 윤리적 문제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은 성경의 근본 교리인 이신칭의의 개념마져 흔들려고한다.

성도들 가운데 행위의 부족함으로 인하여 생기는 문제들은 잘못된 구원론에서 기인된 것이 아니라, 성도라 할지라도 아담의 죄성을 이어받은 육체, 즉 바울이 말하는 사망의 몸을 지니고 있기에, 사는 동안에는 끊임없이 죄를 지으면서, 죄에 대하여 고발을 당하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어떤 이들은 이에 대한 문제를 구원론적 문제로 접근하고 있지만, 이들은 인간이 아담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윤리적으로 해결하려는 이들은 하나같이 최종적 구원을 위해서는 행위와 충성이 요구된다고 말하지만, 이는 그리스도를 또 다시 십자가에 못박으려는 행위나 마찬가지다.


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육체에 대한 정결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존재 자체에 대한 정결로 이어져야한다.

하지만 짐승의 피는 인간의 존재론적인 죄를 해결하지 못한다.

구약의 제사법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일의 표면적인 그림자에 불과하다.

행위로 깨끗해지려는 이들은, 그림자를 실체로 여기면서,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존재로서의 무덤에 회를 칠하려는 이들이다.

요즘 최종적 구원을 위해서 성도에게 행위가 포함된 충성allegiance이 요구된다는 Matthew Bates의 새로운 주장은 톰 라이트의 주장의 또 다른 변형일 뿐이다.

기독교를 유대주의적이고, 윤리적으로 만들려는 톰 라이트나 메튜 베이츠와 같은 이들은 ,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로 깨끗케하신 근원적 해결을 축소시키는 것이며, 이는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육체를 정결케하려는 인간적이고 어리석은 노력일 뿐이다.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그리스도의 피는 표면적인 행실을 깨끗케하는 것보다는 인간의 근원적인 존재론적 죄를 깨끗케하신다.

그리스도의 피는 둘째 아담으로서의 피에 의미가 있다.

아담이 하나님과 행위 언약 관계에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은 하나같이 그리스도의 피를 존재론적이 아닌 표면적이고 윤리적인 정결로 제한시킨다.

그리스도의 피가 존재론적이 아닌 행위론적인 것이었다면, 성도의 부정적 행위는  그리스도의 구원을 무력화시킬 수 있기에, 그리스도의 피는 불완전한 것이 된다.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아 의롭게 된 이가 행위로 인하여 구원이 취소될 수 없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가 존재론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종이 아들로 변화된 것과 같은 신분의 변화를 의미한다.

메튜 베이츠Matthew Bates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의의 전가를 인정하지만, 오직 충성allegiance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구원에서 취소되어 최종적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피를 인간의 근원적 죄가 아닌 행위로서의 죄악에 한정시킴으로서 범하는 실수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피를 존재론적이 아닌 행위론적 관점에서 보았던 오류에 기인한다.

그리스도가 둘째 아담이신 이유는, 그리스도가 인간의 행위 이전에 아담 안에서 생긴 존재론적 죄성의 문제를 해결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15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아담이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는 행위 언약의 개념 안에서만 성립된다.

행위 언약이 없다면 죄가 성립되지 않기에, 행위 언약의 개념은 아담의 죄와 이스라엘의 죄를 규정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개념이다.

모세 언약 안에서 언급된 첫 언약은 근원적으로 아담 언약의 재연republication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여겨진다.

모세 언약은 많은 면에서 아담 언약의 재연republication으로 보아야만, 모세 언약을 충족시키신 예수를 둘째 아담의 개념 안에서 자리매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첫 언약을 아담과 관계없는 언약으로만 제한 한다면 둘째 아담의 개념의 정립에 많은 어려움이 있을 뿐만이 아니라, 모세 언약을 은혜 언약만으로 규정할 경우, 둘째 아담으로서의 역할이 상실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모세 언약이 근본적으로는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은혜 언약적인 역할을 하고 있지만, 모세 언약이 아담 언약과 마찬가지로 행위 언약으로 분류되어야만,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범한 죄가 성립된다.

칼 바르트나 존 머레이와 같이 오직 은혜 언약만을 주장하는 이들은, 아담의 범죄에서 비롯된 인간의 죄성을 약화시키고, 동시에 새 언약의 중보자로서의 둘째 아담의 역할을 약화시킨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새 언약의 중보자로서의 둘째 아담으로서의 죽으심이며, 이는 처음 아담과 맺어진 행위 언약 안에서 성립된 아담의 범죄에 대한 것이었다.

인간의 행위에서 나오는 죄악된 행실은 인간의 근원적 죄성의 표면적 현상일 뿐이다.

그리스도는 죄악된 행실에 대한 해결을 위해서 본을 보여주신 모델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 대한 것이기에, 이는 인간의 본질적 존재에 관한 것이지 결코 행실에 제한된 것은 아니다.

톰 라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둘째 아담으로서의 속죄제에 대한 개념에서가  아니라, 유대 이스라엘이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 삶의 방식의 본을 보여준 희생으로 왜곡시킨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그렇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따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믿음은, 예수 자신의 희생적 죽음이,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께 옳다고 인정받았다는 사실을 믿으라는 이상한 믿음이다.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수의 로마에 대항하는 희생적 죽음이 옳다는 것에 대한 증거라는데 의미를 둔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대로라면, 고난주간과 부활절은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닌 유대교의 절기 행사가 되는 것이다.

신칼빈주의와 신정통주의도 톰 라이트의 새관점과 같이 끊임없는 오류 가운데 헤매는 것은, 이들은 하나같이 아담과 맺어진 언약을 행위 언약으로 보고있지 않음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아담이 실패한 행위의 요구를 충족시키신 둘째 아담으로서의 새 언약의 중보자로 보는데 실패하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진정 성도의 기쁨이 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처음 아담 안에서 죽은 성도를 살리신 분으로서, 앞으로 이루어질 성도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기 때문이다.



16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17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유효한즉 유언한 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효력이 없느니라

유언, 즉 언약이 죽으심과 더불어 성립되는 것은, 아담 언약 안에서 이미 죽으리란 약속이 성립되어 아담과 아담의 후손이 언약 안에서 죽었기에, 구원을 위한 아브라함 언약은 하나님의 죽으심이 필연적으로 담겨있을 수 밖에 없다.

아담의 죽음이 행위 언약에 대한 것이었다면, 아브라함 언약에서의 하나님의 죽으심은 은혜 언약, 즉 새 언약에 대한 약속이었다.

그리스도가 새 언약의 중보자가 되실 수 있었음은 아담의 죽음의 문제를,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가 직접 죽으심으로 해결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톰 라이트는 아브라함 언약 안에서 아담의 범죄의 문제는 이미 해결된 것이라고 말하면서, 아담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단절시키려고하지만 , 이는 하나님께서 아담과 맺으신 언약을 없던 것으로 한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다.

하지만 언약은 취소될 수 없는 것이기에, 아담의 범죄로 인한 죽음의 문제는 없었던 일이 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분명히 아담의 죽음에 대한 것이다.



18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19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두루마리와 온 백성에게 뿌리며
20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모세 언약으로서의 첫 언약은 새 언약의 그림자이며, 또한 새 언약의 모형인 아담 언약을 다시 보여주는 것이었다.

모세 언약은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과의 언약이었기 때문에 죽음을 상징하는 피와 항상 함께 할 수 밖에 없었다.

첫 언약이 아담 언약과 연계되어야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이 아론의 반차를 따른 것이 아니라 멜기세댁의 반차를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톰 라이트는 모세 언약 안에 있던 유대 이스라엘 백성을 실질적인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고 주장하지만, 모세 언약으로서의 첫 언약은 실상으로서의 아담 언약과 실상으로서의 새 언약을 이어주는 허상으로서의 그림자일 뿐이다.

유대 이스라엘은,  아담의 죄의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은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이들이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 백성의 그림자일 뿐이지 실질적 하나님 나라 백성일 수가 없다.

모세가 뿌린 피는 죄를 용서하는 피를 가리킴과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이 죄악을 저지를 수 밖에 없는 존재이며, 이미 죄악으로 죽어있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아담의 범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실질적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될 수 없다.

톰 라이트의 주장은 유대인들의 주장을 대변하는 것이다.



21  또한 이와 같이 피를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피의 장막이 세워진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악을 행하는 것과는 관계없이 이미 존재론적으로 죄악 가운데 있다는 전제에서 세워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악을 행하였을 때에도 속죄제를 위해서 피의 제사를 드려야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존재였기에 장막은 오직 피흘림을 통하여 세워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장막을 중심으로 세워진 이스라엘은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세워질 참이스라엘 백성인 신자들을 예표하는 그림자일 뿐이다.

그림자는 허상일뿐 실상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은, 허상인 이스라엘의 범죄함 이전에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던 아담의 범죄 행위에 대한 죄용서를 위한 실질적 구속 행위였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첫 언약을 아담 언약과 관계 없는 모세 언약으로 제한함으로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모세 언약 아래있던 유대 이스라엘에 대한 구속으로 제한하려는 시도를 한다.

바울이 히브리서 저자라는 명확한 근거는 없지만, 히브리서가 바울의 서신들과 대립되지 않는 것을 볼 때,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는, 바울이 로마서에서 언급한 둘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로 귀결되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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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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