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018. 2. 22. 20:46

사도행전 21장 1-16절 말씀 묵상



1  우리가 그들을 작별하고 배를 타고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2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3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항해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의 짐을 풀려 함이러라


바울의 에베소에서의 사역은 대성공이었고 이쯤되면 에베소에 선교 본부를 세울 법도한데, 바울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더 큰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불사르는 순교자의 길을 나선다.

이는 바울이 소망하였던 천상의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구체화하는 행동이었다.

바울이 보여주는 순교자의 여정은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가 가져야할 소망이 어떠한 지를 보여주는 행동으로서의 서신이다.

흔히들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의 사명을 문화물의 천국보존을 위한 문화변혁을 이야기하지만, 바울이 보여준 성도로서의 행동 방식은 자신을 지배하고있던 세상적인 세계관을 변화시켜, 온전히 천상의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서 확장되도록 자신을 천상의 하나님 나라로 귀속시키는 행동이었다.



4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을 권고하였던 것은 베드로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하리라는 것에 대하여 반대 의견을 내었던 것(마 16:22)과는 성격이 다르다.

어떤 이들은 제자들이 받은 성령의 감동이 거짓된 영에 의한 것이기에, 영적 분별이 필요하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이는 자칫 성경의 기록에 대한 불신을 조장할 수 있다.

이들의 권고 자체가 틀렸다고 말하면서 영적 분별력의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시기에 관한 문제나 혹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이들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적인 연약함에서 비롯된 권고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이 제자들이 거짓 영을 받은 이였다면 바울과 여러 날을 교제하면서 그토록 이별의 아쉬움을 표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도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셨듯이, 바울도 결국 예루살렘에 올라가지만 좀 더 성도들과 교제를 나누다가 적절한 시기에 올라가게되었다는 해석을 함으로서 성령의 간섭하심에 대한 충돌의 문제를 이해 할 수도 있다.

제자들의 권고는 바울이 자신의 사명에 대하여 가지는 불확실성을 없애고 좀 더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예루살렘에서의 어려움에 대한 강인한 마음을 준비시켜주는 역할도 한다.


5  이 여러 날을 지낸 후 우리가 떠나갈새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성문 밖까지 전송하며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두로에서의 성도의 교제는 여러 날을 지내는 동안 이들이 얼마나 친밀한 관계를 유지 할 수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성령의 간섭하심이 아니고는 이 땅에서 경험할 수 없는 것이기에 이들이 거짓 영에 의해서 바울의 여정을 막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세상은 주로 이해 관계로 만나게 되지만 성도의 만남은 이해 관계를 넘어서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성을 경험하는 만남이 된다.

며칠 동안의 친밀한 성도의 교제는 같은 영 안에 있는 이들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만남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궁극적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복음 전파를 통한 하나님 나라는 궁극적으로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성이 이 땅에 구현되는 것이다.



6  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니라
7  두로를 떠나 항해를 다 마치고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8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9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예언하는 처녀가 주는 의미는 사뭇 신선하기도하지만 한편으론 당혹스럽기도하다.

예언을 한다는 것은 사도 시대 선지자들의 역할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다.

여자가 교회에서 잠잠해야 할 것을 전하는 바울의 입장에서 이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입장 표명이 있었으면 좋으련만, 신약에서 성령의 간섭하심이 광범위하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10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11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아가보 선지자가 바울 뿐만이 아니라 그와 함께한 여러 사람 앞에서 바울의 띠를 가지고 예언을 한 것은 상황에 대한 공동체적 인식을 위한 것이다.

성령께서 직접 말씀하실 수도 있으신데도 아가보 선지자를 통하여 부여주신 것은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성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미 이러한 일이 있을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공동체적 상황 인식은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성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일원은 상황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상황에 대한 부담감을 가져야만 한다.

신앙 생활은 혼자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공동체의 회복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이와같은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성을 경험 할 수 없다면 그 교회는 이미 생명이 상실된 사망 상태에 있다는 증거가 된다.



12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선지자 아가보의 예언으로 인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권하였듯이 두로에서 성령의 감동을 받은 제자들의 권유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는 성도들의 권고는 바울의 생각과도 다르며, 하나님의 뜻도 아닌 인간적인 권고다.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는 끊임없이 육신의 평안과 영적인 부르심 사이에서 고민을 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교회 안에서도 인간적인 권고가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교회 안에서 영적인 긴장이 없다면 인간적인 방식으로 기울기 십상이다.

교회 안에서 말씀의 기준이 없어진 세상적 대화는 자칫 교회를 세속화 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줄 수 있다.

교회가 교회답게되기 위해서는 교회에서의 성도의 대화가 세상과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13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14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예수를 위하여 죽고 자하는 바울이나 주의 뜻에 순응하는 제자들이나 한 성령 안에 있었기에 한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바울이 세상적인, 혹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다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할 각오를 하였던 것은 성령과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행동이다.

복음의 전파는 인간적이거나 세상적인 방법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역사하심에 자신을 맡길 때 이루어질 수 있음을 본다.

복음 전파를 위해서 세우는 교회의 외적인 확장이 인간적인 방식이 될 때에는 교회의 외적 형태가 오히려 복음 전파에 방해가 될 수도 있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15  이 여러 날 후에 여장을 꾸려 예루살렘으로 올라갈새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바울은 여러날을 지체하면서 여러가지 만류를 통해서 더욱 견고해질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종종 상황의 더딤이나 반대 상황들은 외부의 문제이기보다는 내면의 세계를 더욱 견고히 하기 위한 하나님의 간섭하심일 경우가 있다.

바울이 제자들과 지냈던 여러 날은 바울의 가장 담대하고 확신에 가득한 모습을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이었기에, 바울이나 제자들에게는 앞으로 다가올 환란을 대비하는 너무도 소중한 시간이었으며, 이는 유대 땅에서 복음이 확실하게 전파될 수 있는 굳건한 터전을 마련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준비가 덜 된 바울에게, 두로에서 제자들을 통하여 성령의 감동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한 구절이 충분한 타당성이 있다.

종종 성도들이 경험하는 어려운 환경이나 반대 세력들은 성도를 견고하게하는 하나님의 배려하심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서의 경험하는 방해들을 사단의 계략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과정들은 앞으로 감당할  어려운 상황을 이겨나갈 수 있는 강인함을 길러준다.

가끔 반대 세력들에 대하여 너무 전투적으로 대적하는 경우가 있다.

땅 밟기나 축귀 사역등은 자칫 문제의 본질을 왜곡시킬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관심은 성도에게 향하여있다.

너무 반대 세력에 집중하여 그들과 싸우는데 집중을 하다보면 정작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세상을 너무 이분법적으로 보다보면 자신은 선하고 외부는 악하다고보거나 아니면 관상 기도등을 통해서 이분법적 선을 추구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성도를 세우기 위한 일을 하시기에 성도는 외부의 환경보다는 자신을 돌아보는 일에 우선 순위를 두어야 할 것이다.



16  가이사랴의 몇 제자가 함께 가며 한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니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머물려 함이라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동안 만났던 제자들의 모습은 이제껏 바울이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결산의 시간이었다.

성도는 비록 세상에서는 핍박을 받지만 성도들 간에는 기쁨의 대상이 되어야한다.

성도들 간의 만남의 기쁨은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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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18. 2. 21. 22:51

사도행전 20장 28-38절 말씀 묵상


28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

교회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의 피로 사신 삼위일체 하나님께 속하여 있는 교회로서, 성령이 감독자를 임명하여 양 떼를 맡기신 것이다.

목회자는 교회를 보살피는 감독자로서 하나님의 교회를 위임받아 잠시 관리하는 사람일 뿐이다.

감독자는 양 떼를 위하여, 혹은 양 떼를 위하여 근신하면서 자신을 관리할 의무가 있다.

일반 성도들은 목회자의 양이 아니라 주님께서 피값으로 사신 주의 양들이다.

목회자는 잠시 주의 양을 맡아 관리하는 위임받은 자일 뿐이다.

오직 그리스도만 목자가 되신다.

교회는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적인 작품이며,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성이 나타나야한다.

하지만 현재의 교회는 정체성을 상실해가고있으며, 바울이 염려하였던 사나운 이리가 활개를 치는 광야가 되어가고있다.

자유주의 신학의 출현은 교회의 속성 마져도 변질시켜가고있다.

교회는 유대 이스라엘의 확장이 아니다.

톰 라이트는 신약의 교회를 유대 이스라엘의 확장이라고 주장하지만, 유대 이스라엘은 주께서 피값으로 사시지 않으셨다.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 나라는 주님께서 피값으로 이 땅에 세우신 나라이다.

톰 라이트는 유대 이스라엘을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실체로 보고있으며, 교회를 확장된 하나님 나라라고 말하지만 이는 개혁주의에서 보는 입장과는 전혀 다른 주장이다.



29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30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사나운 이리)

이리들은 자신의 먹잇감을 찾아다닌다.

참 목자가 지나간 자리에는 어김없이 이리가 가만히 들어온다.

양은 이리의 좋은 먹잇감이다.

양은 전혀 방어할 능력이 없다.

오직 목자만이 양을 지킬 수 있기에 양을 지키라고 위임받은 감독자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감독자가 이리라면 양에게는 치명적이다.

하지만 이리가 양의 탈을 쓰면 양은 이리를 분별하기가 쉽지않다.

이러한 경우가 오늘날에는 너무 많아서 진짜 이리가 참된 감독자와 구분이 되지 않는 것이 문제다.

이리의 특징은 양들을 참 목자되신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집중시켜 자기를 따르게한다.

교회에서도 파당을 조성하여 자기를 따르는 자들 중심으로 자신을 따르지 않는 이들을 쫓아내기도한다.

이들은 표면적으로는 목회자이지만 실상은 이단 교주와 별 다른 바가 없다.

이러한 못된 짓은 목회 성공을 위해서 훈련 코스로 각광받기도한다.

목회자가 두 날개 훈련을 받고나면, 성도를 자신에게 집중시키면서, 바울이 경고한 바와같이,자기를 따르게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한다.

바울이 경고한 이단성을 가진 사나운 이리를 양육시키는 과정이 교단 안에 아무 문제 없듯이 광고까지 하고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이제는 일반 성도가 깨어서 분별하지 못하면 이리에게 먹히기 십상이다.


31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바울이 어떠한 사도였는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말이다.

누가 성도를 위해서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할 수 있겠는가?

사랑과 눈물이 없는 훈계는 성도들의 마음을 난도질 하여 상처를 주기에 십상이다.

대제사장도 거룩한 지성소에 들어갈 때 끈을 매고 들어갔는데, 하나님께서 피값으로 사신 하나님의 성도들을 아무 두려움도 없이 너무 쉽게 볶아댄다.

바울의 말로 훈계하면서 바울의 마음을 가지지 못하고있다.

목회자들 사이에서 성도를 볶는 노하우는 자랑스럽게 공유되는 것이 현실이다.

가슴 아프고 통회해야만 할 일이다.

바울의 에베소에서의 삼년의 목회는 아데미의 위상을 흔들 정도였지만, 오늘의 많은 감독자들은 성추문부터 시작하여 온갖 불미스러운 일들의 총집합을 이루면서 사회의 걱정이 되고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상황의 심각함에도 심각하게 느끼지 못하는 것이 더욱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2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33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34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35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바울은 자족하면서 목회를 하였다)

바울은 어디에서도 십일조를 언급하지 않았다.

목회를 소득과 연계시킬 때 진실된 목회를 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

이는 전임 목회자 제도가 가지는 많은 장점을 깍아먹는 치명적 약점이다.

소독의 영역과 목회의 영역이 중첩되는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는 것이 개신교가 로마카톨릭의 구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가장 큰 약점이다.


(약한 자를 돕는 것)

바울은 자족할 수 있었기에 약한 자를 돌 볼 수 있었다.

일단 연보는 자신의 영역의 확장하기보다는 연약한 이들을 돕는 용도로 사용되어야한다.

바울은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서 따로 외적인 활동을 하지 않았기에 온전하게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전년 할 수 있었다.


(헌금을 강조할 수 밖에 없는 교회 구조)

전임 사역과 건물 중심의 교회 구조는 많은 고정 비용이 소요될 수 밖에 없다.

외적 형태를 가진 교회 구조는, 병원이나 학교처럼, 세상적인 경영 원리를 따를 수 밖에 없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외적인 성전 만큼이나 외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었으며, 소유가 허락되지 않는 레위인을 위해서 십일조등 많은 비율의 헌금이 필요하였다.

교회 구조가 성던의 구조를 갖게되면 구약의 이스라엘과 같이 십일조등 많은 헌금을 요구하게되어있다.

이러한 형태는 중세의 로마카톨릭도 마찬가지였다.

종교개혁은 초대교회를 본받아서 중세 로마 카톨릭의 외형을 벗어버리는 열매를 맺어야하는데 현재의 개신교의 모습은 구약의 이스라엘, 혹은 중세 로마카톨릭의 외형을 따라가고있다.

여기에는 구조적으로 많은 비용이 요구되기에 참된 교회는 이러한 구조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바울 서신서 어디에도 외적인 구조로서의 교회 건물을 요구하는 내용이 없다.

외적 구조를 최소화했던 바울의 지혜를 본받을 필요가 있다.


(십일조를 강조하는 교단)

교단 차원에서 십일조를 교인의 의무로 규정하는 것은, 신약 성경에서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외적인 교회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오용되고있다.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아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이다.

십일조가 성도의 자격은 아니다.

성도와 교인은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야함에도 불구하고 십일조는 성도와 교인을 구분하는 수단이 되고있다.

교인이 되기 위해서 십일조를 교인의 의무 사항으로 규정한다면, 성도의 개념과 교인의 개념에 대한 차이는 더욱 확연해지게된다.

교인과 성도를 구분하는 것으로서 성경적은 아니다.

십일조에 대하여 강요하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의 피로 사신 교회에서,  사나운 이리와 같이 어그러진 말을 하는 것으로서 교회의 본질을 손상시키고 성도를 교회 바깥으로 내어 쫓는 행위이다.

이는 교회 밖에 구원이 없다면서 교회 중심적이었던 로마카톨릭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바울 서신 어디에도 직접 십일조에 대한 말을 하였다는 기록이 없으며, 바울은 에베소의 제자들에게 자족하면서 약한자를 돕는 자기를 본받으라고 말한다.

교회는 정작 십일조는 강조하면서도, 교회 예산의 대부분을 교회 운영비로 사용하면서 약한 자를 돕는데는 인색하기만하다.

교단이 십일조를 강제한다면, 차라리 교회 예산의 십일조를 바깥으로 돌리지 않는 교회는 교단에서 제명하여야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을 것 같다.


36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
37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38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함께하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

인간은 서로 사랑 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

사랑하는 자가 있다는 사실은 인간을 행복하게 만든다.

가장 불행한 사람은 사랑할 대상이 없는 사람이다.

지옥이 불행한 이유 가운데 한 가지는 사랑할 대상이 없다는 것이며, 천국이 행복한 이유는 사랑의 대상이 있다는 것이다.

바울의 에베소에서의 3년간의 목회는 이별의 고통을 감당해야만하는 함께함의 행복이 있었다.

혼자 사는 자는 주를 위해서 살아야만 행복할 수 있다.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더라도 자기를 위해서 혼자 사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자녀가 주는 축복 가운데 한 가지는 자녀가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나마 혈육에서 가질 수 있는 사랑은 인간이 죄인임에도 그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있다는 증거다.

성도는 일그러진 하나님의 형상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회복된 자들이다.

사랑을 통한 공동체의 회복은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성의 표현이다.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성도들은 다른 성도들을 사랑할 수 있어야한다.

미움을 조장하는 파벌이나, 집단이기주의는 다시 회복되는 하나님의 형상을 일그러뜨리는 행위이기에, 특히 교회 공동체에서 금해야할 사항들이다.

복있는 자는 서로 미워하지 않으며, 파당을 짓지 않으며, 고소하지 않으며, 이웃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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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18. 2. 18. 23:17

사도행전 19장 21-41절 말씀 묵상

21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22  자기를 돕는 사람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마게도냐로 보내고 자기는 아시아에 얼마 동안 더 있으니라
23  그 때쯤 되어 이 도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
24  즉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은으로 아데미의 신상 모형을 만들어 직공들에게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25  그가 그 직공들과 그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풍족한 생활이 이 생업에 있는데
26  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전 아시아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27  우리의 이 영업이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신전도 무시 당하게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
28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분노가 가득하여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니
29  온 시내가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어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가는지라
30  바울이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고자 하나 제자들이 말리고
31  또 아시아 관리 중에 바울의 친구된 어떤 이들이 그에게 통지하여 연극장에 들어가지 말라 권하더라
32  사람들이 외쳐 어떤 이는 이런 말을, 어떤 이는 저런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
33  유대인들이 무리 가운데서 알렉산더를 권하여 앞으로 밀어내니 알렉산더가 손짓하며 백성에게 변명하려 하나
34  그들은 그가 유대인인 줄 알고 다 한 소리로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기를 두 시간이나 하더니
35  서기장이 무리를 진정시키고 이르되 에베소 사람들아 에베소 시가 큰 아데미와 제우스에게서 내려온 우상의 신전지기가 된 줄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36  이 일이 그렇지 않다 할 수 없으니 너희가 가만히 있어서 무엇이든지 경솔히 아니하여야 하리라
37  신전의 물건을 도둑질하지도 아니하였고 우리 여신을 비방하지도 아니한 이 사람들을 너희가 붙잡아 왔으니
38  만일 데메드리오와 그와 함께 있는 직공들이 누구에게 고발할 것이 있으면 재판 날도 있고 총독들도 있으니 피차 고소할 것이요
39  만일 그 외에 무엇을 원하면 정식으로 민회에서 결정할지라
40  오늘 아무 까닭도 없는 이 일에 우리가 소요 사건으로 책망 받을 위험이 있고 우리는 이 불법 집회에 관하여 보고할 자료가 없다 하고
41  이에 그 모임을 흩어지게 하니라


하나님 나라와 세상과의 충돌

유대인들이 에베소에 있었던 동안에는 아데미를 섬기는 이들과 별다른 충돌이 없었다.

바울의 복음 전파 후에 일어난 충돌은 표면적으로는 이권의 문제였지만 근원적으로는 영적인 충돌이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동반하는 것으로서, 에베소에서의 소동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함으로서 생기는 현상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율법 안에 있었던 유대인들 가운데 이미 하나님 나라가 실체적으로 임하였다는 새관점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에베소 사람들이 마술책을 태우는 사건으로 말미암아 신상들로 장사를 하는 이들은 손실을 입을 수 밖에 없었다.

이는 신자들의 세계관의 변화로 인하여 생긴 현상이다.

기독교 세계관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이 땅에서 살아가는 관점에 관한 것으로서 에베소에서의 사건을 통해서 세계관의 변화의 모습을 단적으로 볼 수 있다.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의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신자가 세상의 문화의 구조를 바꾸어야한다고 말하지만, 에베소에서의 사건을 보면, 우선적으로 신자들의 삶이 우상 숭배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으로 전환된 것을 볼 수 있었고, 이러한 변화는 세상 문화를 바꾸기보다는 세상 문화와의 충돌을 경험 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 일어난 에베소에서의  사건은 이 땅의 교회가 어떠해야하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에베소의 굉장함과 이권과 허황됨과 정치적 상황등 모든 면에서 충돌될 수 밖에 없다.

교회는 끊임없이 세상과 충돌하면서 성장 할 수 밖에 없다.

세상과 충돌하지 않는 교회는 이미 교회가 세상과 같이 되어 버렸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굉장함에 사로잡힌 사람들

굉장함은 하나의 집단성을 창출한다.

세상 집단의 상징은 힘과 규모를 자랑하여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께 성전의 규모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였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을 말씀하셨다.

세계 7대 불가사의라고 말할 정도로 규모가 컷던 에베소의 아데미 신전은 에베소에서의 우상 숭배가 얼마나 큰 규모였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에베소 사람들이 연극장에서 두 시간 동안이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라고 외칠 수 있었던 것은 에베소 사람들이 아데미의 크기만큼이나 큰 자부심을 가지고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두 시간이나 외친다는 것은 거의 탈진힐 때까지 외쳤다는 말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는 희생과 초라함과 수치를 보여주는 것이다.

교회가 규모의 크기를 추구한다면 이는 십자가와 조화를 이룰 수가 없다.

한국 교회가 세계에서 제일 큰 규모의 예배당을 자랑하는 것은 바로 세계에서 제일 큰 규모로 교회가 변질되었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가장 큰 수치는 예배당의 크기를 목회 성공의 크기와 연계시키는 것이다.

이들은 참 복음을 모르는 이들이다.


상징적 대표성

어느 단체나 단체를 대표하는 상징을 가지고있다.

상징은 집단의 특성을 대변해 준다.

상징의 몰락은 집단의 몰락을 의미한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과 같이 올림픽 경기에서의 선수들은 나라에 대한 대표성을 가지고있기에 이들의 경기 성적은 나라의 우수성을 대변해주기도한다.

에베소 사람들은 두 시간동안이나 아데미를 불러대며 에베소와 아데미를 연계시킨 것은 자신들이 아데미의 굉장함 만큼이나 굉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자로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자들이다.

신자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값주시고 산 자들이기에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어떠한 대표성을 띤 상징을 사용해서도 안된다.

신자들은 세상의 어떠한 것도 자신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좋은 학벌과 좋은 가문과 재력과 뛰어남을 자랑으로 삼아서도 안된다.

심지어 큰 교회에 다닌다는 자부심으로 자신을 큰 교회 목회자와 연계시켜서도 안된다.

신자는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내기 위해서 세상의 커다란 상징이나, 힘 있는 사람과 연계되어있음을 자랑해서는 안된다.

에베소 사람들이 아데미를 외친 것은 이러한 죄성이 극대화 되어 나타난 한 가지 예라고 할 수 있다.

신자는 오직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침을 받은 자이기에,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스도를 나타내면서,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갈 뿐이다.


이익과 충돌되는 복음

바울이 에베소에 복음을 전하면서 일어난 소동은 이권 문제에서 기인된 것이다.

교회도 이권이 개입되면 싸움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에베소에서의 복음 전파는 비싼 마술 책의 가치를 무너뜨렸으며, 신상을 통한 이익의 상실을 가져왔다.

교회는 가치의 기준을 바꾸어야만 생명이 유지 될 수 있다.

세상적 이권은 교회의 순수성을 파괴시킨다.

세상에서 권력이나 재력을 가진 사람은 교회에서 순수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다.

세상에는 완전하게 순수한 교회가 있을 수가 없으며, 이러한 이들이 교회에 출석하게되면 우선 목회자부터 이들이 가지고 있는 세상적인 메리트를 말씀의 진리 위에 두려고한다.

위생 기구도 지속적으로 소독을 하지 않으면 금방 오염이 되듯이, 성도들은 말씀에 의한 계속적인 정화가 없이는 깨끗함이 지속시키기 어렵다.

교회가 가치 기준을 바꾸지 못한다면, 바로 이 이권이라는 오염 물질이  교회 공동체를 파괴시킬 수 밖에 없다.

이스라엘의 부패와 마찬가지로 교회 공동체도 규모가 커지게되면 복음의 가치가 상실되면서, 세상의 가치 기준인 이권으로 말미암아 부패하게 되어있으며, 부패된 교회의 종국은 아데미를 외치는 에베소 사람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 위에 선 교회는, 세상의 가치를 압도하는 복음의 가치를 선포하면서, 세상적인 이권에 대하여 경계하는 만큼이나 오랫동안 생명력이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복음의 현실성

복음은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세상적인 복과는 구분되어야한다.

에베소에서 사람들이 바울에게 집중될 수 있었던 것은 여러가지 기적으로 말미암은 것도 있다.

세상적인 것은 동기는 될 수 있어도 추구하는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에베소에서의 문제는 처음의 것을 얼마나 지속 시킬 수 있었느냐이다.

에베소 교회는 처음 사랑을 잃어버림으로서 요한의 책망을 받았다.

교회의 지속적인 생명은 현실에서 찾기보다는 소망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바라보면서 처음 사랑을 지속 시킬 수 있어야한다.


복음은 미래적이며 영적이기에,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세상적인 복이 없다고하더라도 복음 안에 담겨있는 숨어있는 가치를 발견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잃지 말아야할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
사도행전 2018. 2. 17. 23:00

사도행전 19장 8-20절 말씀 묵상


8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에 40일 동안의 지상 사역 가운데 하신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일을 말씀하신 것이다.(행 1:3)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해서 이 땅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하나님 나라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시작된 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이루신 의를 근거로 하고있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 나라 백성에 참여되기 위한 조건이 그리스도의 의를 근거로하고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새관점에서 말하듯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의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케제만이 제창한 “하나님의 의”를 근거로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아볼로나 에베소 사람들이 알고 있었던 요한의 세례만으로는 이 땅에 온전하게 임할 수가 없다.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 나라는 성령에 의하여 전파되는 나라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성령 세례는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경험한 사건은 자신의 유대주의적 사고에 대한 전환을 가져왔으며, 이는 바울이 회심 전에 생각하였던 유대주의적 하나님 나라에서 새언약을 근거로하는 하나님 나라로의 전환을 가져왔다.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은 윤리나 도덕적 접근 방식이 아니었다.

성령 세례를 받고 변한 이들의 삶의 방식은 공동체적 하나님 나라 백성의 모습을 지닌 것이었다.

이는 사람의 도에 의한 윤리나 도덕적인 나라와는 구별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사람의 행위로 확장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사역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바울이 요한의 세례만 알던 에베소에서 성령 세례를 행하고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한 것은 성령 세례와 하나님 나라는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유대주의적 하나님 나라는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 나라와는 다르다.

역사적 이스라엘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모형일뿐 실체는 아니다.


새관점에서는 신약을 유대주의적 하나님 나라의 완성으로 보고있지만,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 나라는 유대주의적 하나님 나라와 병행 관계가 아니라 전환을 통한 대립 관계에 있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유대주의적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공로를 기초로하는 인본주의적이며, 공로주의적인 나라이기에, 은혜를 근거로하는 새언약에서의 하나님 나라와는 대립관계에 있다.

톰 라이트가 전하는 하나님 나라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이 중심이 되어 예수의 혁명적 행동을 따르는 이들로 구성된 하나님 나라를 말한다.

새관점에서의 하나님 나라에는 그리스도의 의도 필요로하지 않으며, 성령 세례도 필요로하지 않는다.



9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성도는 떠남의 지혜가 필요하다.

부딪히고 비방하는 이들과 변론하는 것은 아무 열매가 없을 수가 있다.

부딪힘은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이 될 수도 있겠지만 원론적이 될 수도 있다.

최근에 뜨거운 이슈가 되었던 창조론자들과 유신론적 진화론자들과의 논쟁에 끼어드는 것은 무의미하다.

창세기 1-3장은 창조과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본체인 둘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예비하는 모형으로서의 첫째 아담이라는 관점에서 해석되어져야함에도 불구하고 불필요한 논쟁으로 성경의 본질을 훼손시키고있다.

(이에 관해서는 John Fesko의 “last things first”에 잘 설명되어 있으며, 이를 요약한 여기를 참조하면된다.)



10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두 해 동안의 바울 사역은 이방인 지역이 복음화되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다.

만약에 바울이 오늘날 이 시대에 살아서 설교를 하였다면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우선 바울은 신학학위도 없는 자격이 미달된 자이다.

신학과정도 밟지 않은 바울이 두 해 동안 강의를 하려면 엄청나게 많은 책들을 참조하여야했을텐데 여행을 자주하는 바울이 과연 얼마나 많은 책들을 소지하고 다녔을까?

반면에 신학자들이 많은 학문의 과정에도 불구하고 열매를 맺기 힘든 것은 성령의 도우심보다는 주로 자신의 지식에 의존하기 때문일 것이다.



11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다.

현대인에게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그만큼 이 시대가 은혜 안에 거하기 어려운 시대임을 말해준다.

신학이 고도화된 이 시대에는 많은 경우 철학이나 역사적 예수 탐구와 같은 역사비평이나, 혹은 도덕과 윤리로 예수를 증거하려고 하지만 단지 무능력함 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의 쇠퇴를 가져오기도 한다.



12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복음 전파의 긴박성 만큼이나 하나님께서 바울을 사용하시고 계심을 볼 수 있다.

지금 시대에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면 아마 엄청난 부작용이 생겼을 것이다.

지금 시대는 성경이 바울을 대체하고있기에 오직 성경을 통해서 성숙된 자녀로서 하나님을 경험 할 수 있을 것이다.



13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더라

어디나 가짜가 있게 마련이다.

유독 기독교에 이단이 많은 것은 역으로 기독교만이 참 진리임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14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15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16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귀신같이 안다는 말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 이미 많은 이들의 경험을 통해서 나온 것이다.

성도는 귀신같이 아는 귀신에게 틈을 보이지 않도록 조심해야한다.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이길 수가 없다.

17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18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며

오직 주 예수만이 귀신의 권세를 이길 수 있기에 성도는 세상을 이긴 자에 속한다.

에베소는 바울이 오기 전에 요한의 세례만 알던 곳이었고, 우상 숭배의  악이 가득한 곳이었지만 바울의 3년 가까운 사역 동안에 많은 변화의 축복을 경험 할 수 있었던 곳이다.

이는 오직 성령의 열매일 뿐이다.

대한민국의 발전 속도는 세계에서 금메달 감이지만, 교회의 확장과 쇠퇴 또한 세계 금메달 감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교만을 질책하셨듯이, 교회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의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교만했던 것에 대하여 반드시 회개할 필요가 있다.



19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에베소 사람들은 인간적인 욕심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된 사람으로서의 행동을 하였다.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 앞에서 세상적인 가치는 무의미한 것이다.

인간이 쌓는 많은 재력은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참된 축복은 인간의 욕심이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되는 것이다.


20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주의 말씀은 세상을 이기는 능력이 있다.

세상에 함몰되어가고있음을 보여주는 교회의 부패는 복음의 능력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잘못 이해하고 잘못 사용하는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대대적 점검이 필요한 때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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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18. 2. 16. 23:17

사도행전 18장 24절- 19장 7절 말씀 묵상

24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


학문이 발달된 알렉산드리아에서 아무리 예수에 대하여 많이 배웠다고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성령의 강림하심에 대하여는 시간적으로 알 수 있는 상황이 허락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요한의 세례에 대하여, 그리고 예수에 대하여 많은 지식이 있다고하더리도 이 지식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성령의 강림하심으로 이루어지는 완성된 새언약에 까지 이르지 못한 것이다.

25  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요한의 세례를 근거로한 예수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통하여 알게된 주의 도와는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요한의 세례만 알고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지금도 가능한 일이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보는 신약은, 바울을 예수와 대립적인 관계로 보거나, 아니면 공관복음만을 강조하고서 서신서를 최소화시킨다.


바울의 서신서를 공관복음과 대립관계로 보거나 아니면 최소화시켰을 때, 공관복음은 유대교의 연장 선상에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유대 이스라엘의 완성이라는 주제로 해석될 수 있다.


공관복음과 바울의 서신을 대립관계로 보는 불트만 학파의 영향을 받은 톰 라이트는 공관복음을 유대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라 완성을 위한 메시아 예수로 그려낸다.


성령 세례를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배제된 신학은 성경을 하나님 나라 운동을 위한 윤리나 도덕책 정도로 변질시킬 뿐이다.


요한의 세례만을 전하는 복음은 부족한 복음이 아니라 변질된 복음이 될 수 있다.


26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더라


열심은 결과를 도출하기 위한 기본 동력이 된다.


열심으로 나온 결과물은 부족함을 채울 수 있는 동력이 되며, 성숙을 위한 원동력이다.


세상에는 처음부터 완전한 사람은 없다.


베드로나 바울도 나름대로의 열심이 원동력이 되었으며,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열매를 볼 수 있었다.


게으름은 하나님께서 주시고자하는 열매들을 맺기를 거절하는 불순종이 될 수도 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열심 가운데 바을과 같이 사역하는 시간이 많았기에 바울에게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고 시기 적절하게 아볼로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다.


기회가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에 열심 가운데 깨어있을 필요가 있다.


비록 더디지만 성경를 붙들고 씨름하다보면 진보가 있게 마련이다.


성경과 씨름하다보면 하나님의 간섭하심의 섭리에 의해서 만남을 통한 또 다른 열매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인에게는 사람을 직접 만날 수도 있겠지만 책을 통해서나 정보 매체를 통한 만남을 통해서 영적인 진보를 이룰 수 있는 많은 기회들이 주어진 축복이 있다.


현대의 성도들은 페북이나 여러가지 수단을 통해서도 만남이 이루어지면서 영적인 진보의 결실을 볼 수 있기에 사도 시대와는 달리 빠른 속도로 복음이 전파될 수 있다.

27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함으로 형제들이 그를 격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를 써 영접하라 하였더니 그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28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언하여 공중 앞에서 힘있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이러라


예수는 메시아이시다.


복음 전파는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이 되어야한다.


메시아는 유대 이스라엘의 메시아 이전에 모든 인류의 메시아이시다.


복음은 그리스도에 관한 것으로서, 기독론보다는 신론 중심으로 바뀌는 현대 신학이 오히려 복음 전파에 장애가 되고있다.



1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2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3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아볼로와 마찬가지로 에베소에서의 제자들도 바울의 복음 전파가 없었으면 지식으로만의 그리스도를 알았을 것이다.


성령의 능력은 지식의 더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식의 차원을 넘어서는, 위로부터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것이다.

요한의 세례는 성령 세례의 전단계로서 필요하지만 성령 세례로 이어지지 못하는 요한의 세례는 복음이 아니라 울법보다도 더욱 무거운 짐으로 다가올 것이다.


사도시대에는 시간적으로 성령 세례의 필요가 대두되지만 현대에 와서는 인위적으로 성령의 사역을 제한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신학에서의 성령은 주로 회개를 하게하시는 분으로 제한된다.


이는 포스트모더니즘 교회인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나 혹은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이머징미셔널 처치에 많은 영향을 미친 몰트만이나 판넨베르크 신학의 특징은 위로부터의 계시 신학과 대립되는 아래로부터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판넨베르크는 철학과 자연과학과 소통이 가능한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신학을 강조한다.


이성과 논리를 기초로한 신학은 계몽주의에서 태동된 자유주의 신학의 방법론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신학에서의 성령의 역할은 마치 세례 요한이 외쳤던 회개에 초점을 맞춤으로서 기독교를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종교로 만들어 버린다.


아무리 많은 지식을 근거로 한 신학이라고하더라도 하나님의 모든 것을 아시는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단지 인간의 교훈에 그칠 뿐이다.



4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요한의 회개의 세례를 받은 이들은 오실 이, 즉 예수께 인도되어야지만 결실을 보게되듯이, 율법 아래있는 이스라엘도 그리스도께 인도되어야지만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예수는 복음의 본체이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의 문제는, 유대적 이스라엘 자체를 구원의 은혜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본체로 보면서, 그리스도는 단지 하나님 나라로서의  유대적 이스라엘을 완성시키신 수단에 불과한 부차적인 존재로 낮추어버린 것이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의의 근거는 그리스도가 아닌 하나님의 의를 근거로하기에, 새관점에서의 예수는 의를 이루신 분도 아니시며, 삼위 하나님의 신성이 없이도 가능한 선지자 차원의 역할을 하신 분으로 변질되어버렸다.

어떠한 신앙의 유형도 그리스도께 귀결되지 않는 신앙은 잘못된 것이다.


5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7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주 예수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는, 처음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죄에 오염된 인간이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를 전가 받아 깨끗함을 입게된 것이다.


복음은 처음 아담의 타락을 만회시킬 수 있으신 둘째 아담의 개념에서 생각되어져야한다.


처음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분리된 인간은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시 하나님과 연합되어야한다.


성령 세례는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받은 이들이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음을 하나님이 보증하시는 증거이다.


연습을 통한 방언은 마치 크리스마스 트리에 매다는 장식과 같이 나무의 열매는 아니다.


성령 세례의 증거는 선한 행실로 나타나게 되어있다.


도덕 윤리를 통한 선행은 크리스마스 트리의 장식일 따름이며, 오히려 타종교인들이 더 잘 할 수도있고, 공로주의 신학을 가지고있는 천주교가 더 잘할 수도 있다.


성령 세례받은 신자는 도덕 윤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선하신 향기를 발할 뿐이다.

교회가 사회로부터 많은 욕을 먹을 때 성도들은 진정 성령 세례를 받았는지 점검해 보아야한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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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18. 2. 2. 19:46

사도행전 13장 32-43절 말씀 묵상


32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구약을 근거로 하고 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구약에서의 약속의 성취이기에 구약의 약속을 믿고있던 이들에게는 좋은 소식이다.

이는 구약 시대에도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을 믿었던 이들이 구원에 참여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복음은 율법이 가지고 있는 행위 언약적인 면에서는 대립적이면서 불연속적이지만, 율법이 가지고 있는 은혜 언약의 속성에서는 율법의 완성이면서 연속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이기에 유대교에 들어온 경건한 이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33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그리스도의 부활은 약속의 성취이다.

낳았다는 말은 부활을 지칭을 지칭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냐(히1:5)”라고 기록하고있다.

5장에서는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히5:5)” 기록함으로서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분이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은 것을 보게된다.

그리스도는 부활을 통하여 새롭게 태어난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새이스라엘이 되신다.

성도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로서 대제사장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로마서에서는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4)”라고 기록함으로서 하나님의 아들되심의 근거를 부활에 두고 있다.

그리스도의 메시아되심은 부활을 떼어놓고서 생각할 수 없다.

새이스라엘로서의 그리스도는 성도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초대하셨으며, 혈통으로난 유대적 이스라엘이 아닌, 믿음을 근거로한 새로운 이스라엘로서의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된 것이다.

이러한 예수를 일으켜 아들 삼으신 것은 구약의 약속을 근거로 한 것이며, 그리스도는 부활로 인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디심으로서 모든 믿는 자의 맏형이 되셨다.

바울이 전하는 그리스도는 새로운 하나님 나라 백성의 탄생을 대표하는 그리스도이시다.


34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이르시되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며

썩음은 아담의 범죄로 부터 들어온 것이다.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은 썩어짐의 종노릇한데서 해방되었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는 더 이상 썩어짐의 종노릇하지 않고 부활의 능력을 공유하는 것이다.


35  또 다른 시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베드로도 바울과 마찬가지로 다윗의 시편을 인용하면서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라고 전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썩어짐에서의 해방을 말한다.

바울과 베드로가 전하는 복음은 아담의 범죄와 더불어 시작된 죄로 인한 썩어짐이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썩어짐에서의 해방을 말함으로서 베드로와 바울은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의 대조법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에서는 어디에서도 둘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역할은 없으며, 톰 라이트가 전하는 그리스도는 유대적 이스라엘을 해방시킨 유대주의의 메시아이다.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 기독교 세계관도 마찬가지로 둘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역할에 대하여는 전혀 논하지 않고 있기에 자연스럽게 톰 라이트의 새관점을 수용하여 개정판을 낼 수 있었던 것이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썩어짐에서 해방시키신 둘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하여 전해져야한다.


36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37  하나님께서 살리신 이는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

다윗을 특별히 그리스도와 연결시키는 것은 다윗이 사울왕과는 달리 하나님의 왕권을 이 땅에 선포한 왕이었기 때문이다.

다윗이 왕으로 있던 다윗 왕국은  이 땅에 대한 그리스도의 나라를 예표하였다.

아담은 왕으로서 피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여야 했었는데, 아담의 범죄는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왕권에  반기를 든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하여 이 땅에서 직접 왕으로서 통치권을 행사하시고자 하셨는데, 백성들은 눈에 보이는 왕을 원하였고, 이는 결과적으로 사울왕의 타락으로 연결되었다.

하나님께서 다윗왕을 기뻐하셨던 것은 다윗 왕국이 궁극적으로 그리스도가 왕되신 하나님 나라를 예표하였기 때문이었다.

다윗 왕을 통하여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왕권이 선포됨으로서 그리스도는 참이스라엘이 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낳으신 참이스라엘이신 아들은 다윗왕과 더불어 유대 이스라엘 가운데 잉태되었었다.

아담은 범죄함으로 하나님에게서 떠난 자였으며, 사울은 아담의 범죄와 같이 자신에게 향한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지 못했지만, 다윗은 하나님께 향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다.

다윗이 선포하는 하나님의 왕권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땅에 선포할 하나님의 왕권을 예표하였기에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어도 하나님께서 살리신 것이다


38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썩지 않음의 근거는 죄사함이다.

죄는 아담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사함을 위한 것이다.

톰 라이트는 예수가 로마에 대한 이스라엘의 잘못된 행동방식을 수정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본을 보여주었다고 말하지만 이는 지극히 유대주의적 발상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속죄 사역을 부인하는 다른 복음을 말하는 것이다.


39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얻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근거로 한다.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를 근거로하는 의는 모세의 율법으로 의롭다하려고 하는 것에 대하여 대조를 이룬다.

이는 율법이 의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잘못 사용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에 반해 톰 라이트는 율법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무르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는 언약적 율법주의를 주장함으로서 바울과 상반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톰 라이트는 죄사함을 없애고 그 자리에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 중심의 하나님 나라라는 이스라엘의 새로운 탄생을 집어넣었다.



40  그런즉 너희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 너희에게 미칠까 삼가라
41  일렀으되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멸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희에게 일러줄지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 하였느니라 하니라

42  그들이 나갈새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

43  회당의 모임이 끝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복음이 거부하는 이들에게는 두려운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 앞에 모인 이들은 자연스럽게 복음을 받아들일 수가 있었다.

이는 바울의 설교가 논리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바울도 베드로나 스데반과 같이 유대 이스라엘에 기반을 둔 유대교에 뿌리를 두고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

이는 유대교의 궁극적인 목표가 그리스도께 귀결되어야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복음은 유대인과 유대교와 대립적이면서도 완성적인 면이 있다.

이는 복음이 율법과 가지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두 가지 면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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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18. 1. 30. 20:39

 사도행전 12장 18-25절 말씀 묵상


18  날이 새매 군인들은 베드로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여 적지 않게 소동하니
19  헤롯이 그를 찾아도 보지 못하매 파수꾼들을 심문하고 죽이라 명하니라 헤롯이 유대를 떠나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머무니라


구겨진 헤롯의 명성보다도 더 심각했던 것은 파수꾼들의 죽음이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사실 파수꾼이 잘못한 것은 없었으며, 천사들로 인해서 억울한 죽음을 당한 것이다.


그렇다면 마치 뺑소니 교통사고와 같이 천사들이 책임을 회피하고 잠적했다고 볼 수 있을까?


같은 경우는 아니지만 종종 사람들은 무죄한 자의 죽음에 대하여 애통해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불행은 불행이라기 보다는 일반인들이 은혜 가운데 있음으로 인한 상대적인 불행이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거두어 가신다고 하나님을 원망 할 수는 없다.


인간이 사는 세상에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진 곳은 지옥과 다를바가 없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일반 은혜는 궁극적으로 구원의 특별 은혜를 위한 것이다.


이미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죽은 자이지만 하나님의 일반 은혜에 의하여 삶을 유지하는 상태이다.


은혜를 거두어 가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며 은혜를 거두어 가신 것에 대하여 인간은 항의할 자격이 없다.


하나님의 은혜는 당연한 것이 아니기에 감사하는 생활을 하여야한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이들은 은혜 가운데서 감사할 줄을 모르는 이들이다.


인간의 존재와 삶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근거로 하고있기에 감사는 마땅한 것이다.


사람들이 주장하는 인권은 하나님의 일반 은혜가 주어진 상태를 조건으로 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진 장소에서 인권을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20  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대단히 노여워하니 그들의 지방이 왕국에서 나는 양식을 먹는 까닭에 한마음으로 그에게 나아와 왕의 침소 맡은 신하 블라스도를 설득하여 화목하기를 청한지라


필요에 의한 화목은 서로의 필요성이 상실되면 불화로 바뀔 수 밖에 없다.


세상은 필요에 의해서 서로의 관계가 유지된다.


아픈 사람이 회사에서 아프다는 이야기를 하면 위로를 받기보다는 더 이상 일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을 것이다.


하지만 성도들의 모임에서의 고백은 서로 위로를 해 주고 힘이 될 수 있다.


궁극적으로 교회 공동체는 서로에 대한 계산에 의한 만남으로 이루어지면 안된다.



21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단상에 앉아 백성에게 연설하니
22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하거늘


아부하는 자도 문제이지만 아부에 스스로 교만해지는 자도 문제이다.


인간이 높아지고자하는 욕망은 사단의 속성을 이어받은 것이다.


궁극적으로 스스로 높아진 자는 사단의 대리자로서의 역할을 할 것이다.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있던 사도시대에 성령은 신자들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신자를 박해하는 자도 멸하심으로서 복음 전파에 더욱 힘을 가해주신다.


23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



헤롯은 성도들을 픽박하였던 것은 물론이고 겸손했던 사도들과는 대조적으로 스스로 높아지려는 자였다.


구약 시대의 악한 이들과 현대 사회의 악한 이들에 대한 간섭하심은 오래참으심 가운데 이루어지지만 사도 시대는 하나님의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간섭하심이 있었다.


교만했던 헤롯에 대한 심판은 오직 영광받으실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심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신다.



24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사도시대는 성경이 없던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간섭하심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 할 수 있었다.


현대 사회는 성경도 있고 많은 지식도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힘은 잃은 것은 성령의 함께 하심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지식이 많고 능력이 많은 학자나 목회자라 할지라도 성령이 함께 하시지 않으시면 말씀은 자신을 치장하는 지식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현대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많은 지식으로 인한 교만해진 마음이다.


현대 사회는 스스로를 높이면서 각종 매체를 통해서 자기 선전을 해야만 출세 할 수 있는 시대이기에, 헤롯과 같이 스스로 영광을 취하는 이들에게 성령의 함께 하심은 기대할 수가 없을 것이다.


25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하는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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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18. 1. 29. 23:12

사도행전 12장 1-17절 말씀 묵상

1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2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야고보의 순교)

야고보는 형제 요한과 함께, 주의 우편에 앉고 싶은 욕심에서, 그리스도께서 마시는 잔과 그리스도께서 받으실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말했었다.

야고보는 자신이 말한대로 일찍, 그것도 사도들 가운데 첫 번째로, 순교를 당했다.

야고보는 그 잔의 의미를 잘 모르고 한 대답이었지만, 말한대로 된 것이고 또한 그리스도께서 예언하신대로 된 것이다.

물론 야고보의 순교는 교회를 더욱 든든히 세워주는 역할을 하였지만, 성도는 특히나 말하는데 있어서 조심해야한다.

잘 알지도 못하거나, 아니면 자존감에서 서원이나 장담을 하는 경우가 있지만, 성도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격체로서 말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만 하는 인격체라는 것을 생각하여야한다.

성도가 되었다는 것은, 삼위 하나님의 형상 안에 담겨진 인격이 회복된 존재로서, 자신의 말과 행동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인격체라는 사실을 알아야만한다.



3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 기간이라

헤롯의 박해는 인기를 얻기 위한 얄팍한 행동 방식에서 나온 것이다.

성전을 확장한 것도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한 것이지 결코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한 것이 아니다.

헤롯은 유대인들이 기뻐하는 것을 보고서 베드로를 가두었지만, 헤롯의 악한 행동 뒤에는 유대인들이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다고 하더라도 그 책임이 유대인들에게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대중의 인기를 얻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카이퍼와는 달리, 자크 엘룰은 그리스도인이 하지 말아야 할 첫 번째 직업으로 정치를 말한다.

이는 아마도 정치하는 이들의  부패성도 문제이겠지만, 이들이 대중의 지지를 기반으로하기에 하나님의 뜻대로 정치를 하기가 쉽지 않다는데 이유가 있을 것이다.

세상은 보이지 않는 이권에 따라 움직일 수 밖에 없지만 교회는 세상과는 구별되어야한다.

만약에 목회자가 교회의 확장을 위해서 사람들의 인기에 영합한다면, 더 이상의 참된 목회는 불가능할 것이며, 확장된 교회는 온갖 이권이 작용되는 세력들의 규합에 의해서, 규합된 세력의 힘을 바탕으로 움직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신학교나 교단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십자가의 길은 세상에서는 외롭고 힘든 길이지만, 그리스도의 평안이 함께 하는 가운데 베드로가 감옥에서 누렸던 평안을 맛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4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인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 내고자 하더라
5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6  헤롯이 잡아 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인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수꾼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인간의 완벽한 방어도 넘어서시는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본다.

인간이 아무리 완벽하게 준비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시면 헛점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제공되는 최첨단 기술도 결코 인간을 완벽하게 보호해주지는 못한다.

헤롯과 유대인이 베드로를 결박하려는 것이나, 현대인들이 하나님을 배제하려는 것이나, 본질에 있어서는 같을 것이다.

하나님을 떠나 인간이 스스로 독립하려는 인간 문명은, 아무리 발전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려는 마음이 없다면, 붕괴될 수 밖에 없다.

현대 사회의 고도의 발전된 기술과 뛰어난 과학에도 불구하고, 인간 사회가 점점 더 많은 문제와 재난에 노출 될 수밖에 없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배제하고 스스로 완벽해지려고 하는 것은 마치 헤롯이 베드로를 결박하려는 것과 같이 허사가 될것이다.



7  홀연히 주의 사자가 나타나매 옥중에 광채가 빛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이르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8  천사가 이르되 띠를 띠고 신을 신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이르되 겉옷을 입고 따라오라 한대
9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새 천사가 하는 것이 생시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

10  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시내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저절로 열리는지라 나와서 한 거리를 지나매 천사가 곧 떠나더라

이적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지만 이적을 경험했다고 해서 행동의 모든 것이 정당화 될 수는 없다.

하늘의 신비를 종종 경험하는 사도시대의 이적들은 성경이 정립된 오늘 우리가 추구하는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성경은 교리로 체계화되어야만 하지만, 정경이 갖추어져있지 않았던 사도시대에는 교리가 정립 될 수가 없었기에, 성령의 초자연적인 간섭하심이 많을 수 밖에 없었다.

정경을 통해서 교리가 정립된 이후에 경험하는 기적들은 종종 여러가지 혼란을 가져다 주기도한다.

한 가지 예로, 예전에 중국의 가정교회 지도자였던 윈형제의 간증집 “하늘에 속한 사람”의 경우가 바로 그렇다.

그도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몇겹이나 잠겨져있던 감옥에서 아무 간섭과 방해 없이 걸어나올 수 있었다.

어디까지 진실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그가 한국에 와서 강의했던 내용 가운데에는 교리적인 체계를 전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자신의 경험과 개인적 확신이 교리를 대체하고있었으며, 그 결과물이 백투예루살렘이었다.

이는 언약신학과 대립되는 세대주의적 구도 가운데서 나온 것이다.

그가 과연 걸어서 감옥을 나올 수 있었다면 그 이후의 계속적인 활동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의문이 든다.

일종의 탈옥수로서 우리나라에 올 수도 없었을 것이다.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집단들, 다윗의 장막이나 신사도 운동, 24시 기도의 집등의 집회에서의 강의들을 들어보면, 대부분이 자신이 경험한 신비한 일들을 전하는 것이었으며, 그 가운데서 교리적 접근 방식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이미 정경이 갖추어져있는 이 시대에 신앙의 기반을 신비에 두는 것은, 나침반이 없이 직감에 의해 항해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11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들어 이르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 하여

너무나도 여유있게 변한 베드로의 모습은 제정신이 아닌지, 아니면 너무나도 평안한 모습이 성령 충만함에서 나온 것인지 구별이 되지 않지만, 분명 이전의 모습과는 차이가 많았다.

상황의 긴박감 가운데에서도 베드로의 진지하지 못한 모습이 너무나도 여유를 부리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옥에 갇힌 첫날 밤은 여러가지 긴장감과 스트레스로 인해서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을 것이고, 자신을 위해서 밤새 기도하는 무리들의 긴장감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모습이었다.

이는 마치 시편 기자가 기록한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편 127:2)”의 말씀을 연상시킨다.

단순한 잠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안으로 인한 잠이다.

베드로는 이 세상의 어느 누구하고도 비교될 수 없는 창조주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할 수 있었기에 평안을 누릴 수도 있었겠지만, 지식은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능력이 될 수 없기에, 베드로가 누리는 평안은 성령의 능력에 의한 열매라고 할 수 있다.

성경 말씀은 어느 누구나 읽고서 자신에게 적용할 수도 있지만,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한낱 능력없는 교훈에 그칠 수 밖에 없다.



12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

성도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은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이 성도들 가운데  회복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 가운데 한 가지이다.

구약시대에는 개인적인 기도는 있었지만, 무리가 모여서 공동체적으로 하는 기도는 없었다.

공동체적 기도를 통해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이 이 땅위에 구현되고있다.

하나님의 형상이 일그러진 타락한 사회에서는 외침이나 요구가 무시되거나 거절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성도의 기도는 성도 가운데 회복된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의 표현이기에,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기도를 무시하거나 거절하시지는 않으시고 인격적으로 대하신다.

대부분의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하는 경우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기도하지 않거나 자신의 육신의 욕심에 의한 것이다.



13  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린대 로데라 하는 여자 아이가 영접하러 나왔다가
14  베드로의 음성인 줄 알고 기뻐하여 문을 미처 열지 못하고 달려 들어가 말하되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 하니
15  그들이 말하되 네가 미쳤다 하나 여자 아이는 힘써 말하되 참말이라 하니 그들이 말하되 그러면 그의 천사라 하더라
16  베드로가 문 두드리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그들이 문을 열어 베드로를 보고 놀라는지라
17  베드로가 그들에게 손짓하여 조용하게 하고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하고 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


위기에서 경험하는 초자연적인 역사는 위기 가운데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커다란 위로와 힘이 된다.

평온한 시대에는 육신의 평안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견디기 힘든 무력감에 사로 잡히기도하지만,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 긴장감 가운데서는 오히려 생의 활력을 경험하게된다.

수십년 전의 이야기지만, 스위스는 한때 세계에서 가장 국민 소득이 높은 나라였으면서도 높은 자살율과 마약 중독이 큰 문제였다.

중립국이라는 위치로 인하여 많은 국제회의가 열렸었고, 비자금의 도피처가 되었으며, 풍부한 관광자원으로 국민들은 풍요 가운데 살았지만 이러한 풍요가 오히려 독이 되었다.

무료해진 사람들은 모험을 즐기거나 마약을 하거나 아니면 우울증등으로 삶을 마감하는 이들이 많았다.

이는 인간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죄성이 풍요로 말미암아 왜곡되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모든 것이 풍요로운 성장한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인간의 죄성이 왜곡되게 나타난다.

이는 교회의 부패와 변질로 나타날 수 밖에 없다.

인간 사회나 교회나 긴장감은 꼭 필요하다.

긴장감과 위기감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다.

긴장감과 어려움이 없이는 하나님을 경험하기 어렵다.

초대 교회의 성장의 이면에는 박해라는 부정적 상황이 큰 역할을 하였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또 긴장감들은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또 다른 통로가 될 때, 우리를 감싸는 부정적 상황은 긍정적 상황으로 바뀔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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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18. 1. 28. 20:00

사도행전 11장 19-30절 말씀 묵상



19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환란으로 흩어진 자들은 사마리아뿐만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예루살렘으로부터 먼 거리에 있는 지역까지 흩어지면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말씀을 전하는 사역을 담당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을 핍박한 주체가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유대인들과 대립 관계에 있던 이들에게 다가 갈 수 있었고 이방인들도 이들에게 호의적으로 다가 갈 수 있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생명력은 환란과 핍박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에 어딘 가의 다른 곳에서 꽃을 피우게 된다.

현재의 많은 교회들의 성장의 배경에는 이북이 공산화되면서 내려왔던 이북 5도 출신들의 실향민들이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핍박과 분열을 통한 성장)

사울의 경우와 달리 흩어진 자들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자연스럽게 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지시가 없이도 가능했는데, 이는 이들이 유대인들의 박해를 피해서 왔기에 더 이상 유대주의에 대한 애착을 가질 필요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또 다른 방식의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하심이었다.

사울은 핍박하는 자의 중심에 있던 자였기에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하심이 있었지만, 핍박을 받는 자들이나 아웃사이더들은 자연스럽게 기존의 틀을 벗어나면서  준비가 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집단들은 이기적이기에 이권 문제와 관련되어 집단에서의 핍박이나 따돌림을 받는 이들은 이기적 집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준비가 된 자들이다.

외적으로 규모가 커진 교회들은 반드시 내적인 부패로 말미암아 분열을 겪을 수 밖에 없으며, 기존 세력에서 밀려난 이들은 자연스럽게 외부에 새롭게 조직을 만들게되며,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시작하면서 교회의 발전과 성장이 이루어진다.

외적인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이 변화될 수 없었듯이 어느 정도의 외적인 규모를 갖춘 교회가 변화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부패한 예루살렘이 멸망되었듯이 부패한 교회는 망할 수 밖에 없다.

부패한 교회를 개혁시키려고 서로 다투기보다는 차라리 분리되어 다른 길을 걸어가는 것이 성경적 교회 성장의 원리라고 볼 수 있다.



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인간적 노력과 성령의 역사는 차원이 다르다.

성령은 주로 핍박 가운데 축복으로 역사하신다.

핍박과 환난은 성장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인간의 노력은 외적으로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며 선행으로 모양을 만들려고하지만 성령의 역사는 주로 환란과 어려운 환경에서 일어난다.

한때 교회 성장을 위해서 교회에 오는 교인들의 필요를 채워주려는 비지니스처치가 흥행하였지만, 대표적인 비지니스처치인 윌로우 크릭 교회는 실패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사람의 필요를 채워 주면서 성장하려는 교회는 인간들의 작품일  뿐이다.

교회의 성장은 주로 핍박과 더불어 오며 교회는 풍요와 더불어 부패한다.

한국교회의 부패의 주요원인은 일차적으로 외적인 풍요라고 할 수 있다.

안디옥이라는 지역은 교통의 중심지였으며, 이방 문화가 꽃피운 곳이었지만 그리스도인으로 불리우는 일은 문화적으로 그들과 하나가 되지 못한 분리를 뜻하였다.

안디옥 교회의 성장은 이방 문화로부터의 따돌림과 더불어 성령께서 주시는 평안을 경험하였기에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환란과 핍박은 지역 텃세를 순화시킴으로서 지역의 배타성을 상실시키는 기능이 있다.

한국전쟁은 결코 미화될 수 없는 불행이었지만 이로 인하여 남쪽의 각 지역이 지역 텃세를 넘어서 복음화될 수 있었다.

그나마 지역 텃세가 남아있던 강릉이나 경주, 제주가 가장 복음화율이 낮은 것을 보면 환난의 순기능을 알수 있다.



22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예루살렘 교회에 있는 할례받은 유대 성도들은 이미 베드로를 통해서 이방인의 구원의 소식을 들었지만, 안디옥에서의 이방인들의 복음화는 예루살렘과 공식적인 관계가 없이 발생한 일이었기에, 이방인이 구원받은 사실을 직접 확인해야만 했다.

더욱이 사도가 아닌 바나바가 안디옥에 보내졌었기에, 이미 예루살렘에서 사울에 대하여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바나바가 다소로 사울을 찾으러가서 사울과 함께 안디옥에서 사역을 할 수 있었다.

체계적이지 못한 복음 전파 같이 보였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상황을 체계적으로 운행하신다는 사실을 보게된다.



23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바나바는 안디옥의 성도들을 더욱 굳건하게 해준다.

이방인들이 모여있던 안디옥에서의 부흥은 예루살렘의 할례파 유대인 성도들에게는 경계의 대상이 될 수도 있었으며, 유대 전통에 익숙했던 이들은 여러가지로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도 있었을 것이다.

자칫 예루살렘과 서로 주도권을 가지고 분파가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바나바는 오직 하나님께 집중된 사람이었기에 안디옥에서의 부흥을 기뻐 하고 그들을 격려할 수 있었다.

성도는 교회 조직의 일원이기에 앞서서 하나님의 백성이다.

부흥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조직의 확장으로 이용되어서는 안된다.

1950년대 빌리그레함이 자신의 조직의 세력을 키울 수 있었던 방법 가운데 한 가지는, 부흥 집회 후에 결신자들을 앞으로 나오게 하고서 이들을 주변의 교회에 연결 시켜주었다.

표면적으로 보면 좋은 일이었지만 빌리그레함의 조직을 후원하는 교회에만 연결시켜 줌으로서, 지역에서 빌리그레함 부흥 집회가 있게되면 교단에 관계없이 주변 교회들이 빌리 그리함 조직에 가입하게되었으며,  빌리그레함의 부흥집회는 자신의 조직을 키우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빌리그레함은 노년에 다른 종교에도 구원의 길이 있을 수 있다는 발언을 함으로서 그의 조직의 안좋은 결과를 보게된다.

(이안 머리의 “분열된 복음주의”에 자세히 나와있다)

성령이 함께 하시는 부흥은 조직 확장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


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바나바는 비록 나중에 바울과 심하게 다툰 일이 있었지만 그래도 처음에는 하나님께 집중된 열심으로 사역을 같이 담당 할 수가 있었다.

진심으로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가장 잘 아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축복이다.

사람은 스스로 나서는 것보다 누군가의 추천과 소개로 나서는 것이 좀 더 자연스럽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에 대하여 충실할 필요도 있겠지만 누군가의 진실된 친구가 된다는 것도 중요한 사역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복잡하게 얽혀있는 현대 사회의 구조상 서로에 대한 이권이 개입되지 않고 친구가 되기가 쉽지 않은 불행한 시대를 살아가야만 한다.


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그만큼 안디옥이라는 사회에서 연향을 끼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향력의 한 가운데에는 사울과 바나바가 있었다.

사울은 안디옥에 있는 이방인의 교회에서 처음으로 공식적인 사역을 시작함으로서 사울의 전도 여행의 근거지가 마련될 수 있었다.

안디옥과 예루살렘의 관계는 긴밀하면서도 다른 문화를 서로 인정하면서 성장할 수 있었다.

사울과 바나바는 모두 다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지만 같이 사역 할 때가 있었고 또 서로 갈라서야만 할 때도 있었다.

이는 서로의 특성을 살리는 다름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면이 있기에 성도는 서로 다른 가운데 협력하여 선을 이루어야 한다.

그렇지만 서로의 다름이 서로를 죽이는 분열로 나타날 때는 선 대신에 악이 드러날 수 밖에 없다.


요즘의 교인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 대신에 다양한 좋지 못한 이름들로 불리워지고 있다.

이러한 호칭은 현재의 교인들의 현주소를 말해주는 것이며, 그 한 가운데에는 목회자가 있다는 사실이 불행한 일이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 반드시 결산할 문제이기에 두렵고 떨림으로 오늘을 살아야만 할 것이다.


27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28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선지자는 구약에서 뿐만이 아니라 초대 교회에도 있었다.

여기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보다는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예언을 하였다.

정경이 갖추어지지 않은 시대에는 신약 시대라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사용하셔서 말씀하신 것을 보게된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시대에서든지 항상 말씀하시기를 원하시지만, 지금 시대에는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신다.

성도는 성경 말씀을 선지자들의 선포 못지 않게 깊이 묵상하면서 하나님께 귀를 기울여야한다.



29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30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안디옥 교회가 빠르게 독자적으로 자립하면서 오히려 예루살렘 교회를 도왔다는 것을 본다.

그들이 사울과 바나바를 보냄으로서 예루살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본다.

친밀한 관계에서는 서로의 필요를 돌아보아야만 한다.

그들이 보낸 부조는 절대로 뇌물이 아니었을 것이다.

성도간의 관계는 서로를 돌아보면서도 순수성을 잃지 말아야만 한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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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18. 1. 27. 23:03

사도행전 11장 1-18절 말씀 묵상

1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부분적인 사실의 위험성)

부분적인 사실은 종종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베드로가 경험한 고넬료 집에서의 모든 상황을 객관적으로 전달하였으면 예루살렘에서 할례자들이 베드로를 바로 비난하지는 않았을 것이며, 베드로도 비난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안디옥에서 베드로가 야고보에서 온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서 이방인과 식사를 하다가 할례자들이 왔을 때 두려워서 떠나 물러간 사건은 바울의 책망 거리였고, 베드로의 결정적 흠이 되었으며, 남은 유대인들과 바나바도 베드로의 외식에 유혹되는 일이있었지만, 이는 아마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할례자들에게 비난을 받으면서 마음의 상처를 받았었기에 할례자들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객관적인 전달을 위해서는 항상 모든 면이 다 전달되어야 하지만 일상에서 접하는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단편적이기에 서로간에 오해가 생길 수 밖에 없으며, 사랑이 식어지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는 자기가 말하고 싶어하는 부분만 말하고 듣고 싶어하는 부분만 듣는 인간의 죄성에서 기인된 것이다.

성경은 이러한 면에서 총체적이고 객관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

톰 라이트의 성경에 대한 해석은 대부분 이야기 방식이고 메가스토리이다.

하지만 성경에는 이야기 외에도 하나님의 명령과 지혜가 있으며,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많은 명제적 진리들을 제공하며, 천상의 메타스토리도 포함되어있다.

항상 비유를 곁들여서 자신의 생각을 펼치는 톰 라이트의 뛰어난 언변은 단편적이고 객관적이지 못하며, 부분만으로 전체를 뒤집어 버린다.

톰 라이트의 책을 읽는 사람들은 마치 췌면술에 걸린 것처럼 그의 이야기에 빨려 들어가지만 과연 그는 총체적이고 객관적인 지식을 전달하고있는지 의심해 보아야한다.

모든 이단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부분만으로 자신들의 논리를 정당화 시킨다는 것이다.

아담의 타락과 더불어 시작된 편협되고 부분만을 주장하는 습성은 종종 인간 사회의 분열과 싸움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곤한다.


2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그래도 성령 안에 있던 초대 교회의 할례자들이었지만, 문제가 있을 땐 먼저 당사자에게 들어보아야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비난을 먼저하였다.

한 템포 늦추어서 듣는 것을 먼저하였다면 서로 간에 상처를 주지 않고 문제가 잘 해결될 수도 있었는데 그렇지 못함으로서 서로간에 상처를 주게 된다.

문제가 있을 때는 먼저 듣는 자세가 필요하며, 대부분의 문제는 먼저 들음으로서 해결될 수 있기에 불필요하게 얼굴을 붉히는 일을 없었을 것이다.


3  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유대교의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한 초대 기독교)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아직 정경이 기록되지 않은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 대하여 정립되지 않았을 것이다.

초대 교회의 유대인들의 할례에 대한 집착은 이들이 아직 유대 율법에서 자유하지 못한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비록 바울은 베드로가 할례받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이방인과의 식사 자리에서 물러 갈 수 밖에 없었지만, 바울이 서신서를 통해서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 대하여 제대로 정립하기 전까지는 대부분의 성도들이 율법에서 자유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이 성령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수용하기는 쉽지가 않았지만, 베드로의 증거와 이를 직접 보았던 여섯 형제들이 증인이었기에 베드로의 말을 거부하거나 부정 할 수가 없었다,

이방인에 대한 복음 전파가 없었다면 기독교는 톰 라이트가 보는 것과 같이 유대적인 기독교가 되었을 것이다.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새관점의 근거가되는 ‘역사적 예수 탐구’라는 ‘1세기 제2성전 유대교’의 문헌들은 다분히 지금 할례받은 유대인들이 취하였던 유대주의적 요소들이 섞여있을 수 밖에 없었다.

톰 라이트는 이러한 할례파 유대인들의 상황을 근거로 오늘날의 기독교의 근본 개념들을 바꾸려고 하고 있다.

어거스틴 이전의 초대 교회는 교리에 대하여 제대로 정립이 된 상태가 아니었기에 오늘날 기독교의 기준이 될 수가 없다.

하지만 새관점을 주장하는 톰 라이트는 어거스틴부터 기독교가 잘못되기 시작했다고 어거스틴을 비난하며 초대 교회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고있다.


4  베드로가 그들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5  이르되 내가 욥바 시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환상을 보니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네 귀에 매어 하늘로부터 내리어 내 앞에까지 드리워지거늘
6  이것을 주목하여 보니 땅에 네 발 가진 것과 들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보이더라
7  또 들으니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8  내가 이르되 주님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거나 깨끗하지 아니한 것은 결코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 하니
9  또 하늘로부터 두 번째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 하더라
10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에 모든 것이 다시 하늘로 끌려 올라가더라
11  마침 세 사람이 내가 유숙한 집 앞에 서 있으니 가이사랴에서 내게로 보낸 사람이라
12  성령이 내게 명하사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 하시매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가서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13  그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천사가 내 집에 서서 말하되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14  그가 너와 네 온 집이 구원 받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
15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16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17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베드로의 간증)

같이 있던 할례받은 형제들이 있었기에 베드로의 증언에 대하여 아무 말도 못하였을 것이다.


사도들은 항상 같이 다니는 이들이 있었기에 공동체적 구원을 확장 시킬 수가 있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증언이 있었기에 계속된 이방인의 구원 소식에 대하여 예루살렘의 성도들이 이에 대한 준비를 할 수 있었다.

베드로의 예루살렘에서의 증언은 앞으로 예루살렘이 복음의 중심에있지 못하게 되리라는 생각이 없이 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전체 계획 가운데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본다.

하나님의 복음은 지역적으로 제한되거나 집단적 이기주의의 수단이 될 수가 없다.

자기 교회만을 주장하거나 자기 교단만을 주장하는 폐쇄성은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으신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회심과 그의 열심은 좋았으나 결과적으로는 집단 이기주의의 온상이 된 것에 대하여 생각해보아야 한다.

인간의 안주하려는 죄성은 항상 복음 전파의 걸림돌이 되기에 성도는 항상 떠남에 대한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18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하나님은 어느 누구도 독점 할 수가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들만의 하나님으로 독점하길 원한다.

더군다나 사람들은 자신들이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이들의 하나님이시기를 바라지 않는다.

할례받은 유대성도들은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난감한 입장이었던 것 같다.

자신들만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방인들의 하나님도 되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동안 자신들만이 가지고있었던 특권의식과 교만이 무너지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납득할 수 없는 신앙의 유형을 가진 이들 가운데서도 함께하신다는 것을 종종 경험한다.

특정 집단이나 특정 교단만이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증명된다면 그 집단이나 교단이 타락하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하나님은 모두를 사랑하시기에 나만의 하나님, 혹은 우리만의 하나님이라는 이기적 생각을 내려놓을 필요가 없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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