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018. 1. 16. 22:16

사도행전 7장 54절~ 8장 3절 말씀 묵상



54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중국이 지배하는 티벳이 분리 독립이 거의 불가능한 이유 가운데 한 가지는 티벳을 움직이는 티벳 승려들이 대부분 중국과 연계되어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고행과 비움을 최고의 선으로 추구하는 승려들이 가장 부패한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아마 로마 지배하에 있던 대제사장 무리들은 표면적으로만 성직자일 뿐 실제에 있어서는 로마정부와 결탁되어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세력들일 것이다.

이들은 스데반의 설교를 신앙의 관점에서 듣기보다는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에서 들었을 것이다.

현시대에 신앙의 가장 큰 걸림돌이 있다면 각자가 자기의 입장에서 말씀을 대한다는 것이다.

사도행전의 초대교회 교인들은 자신이 처해있는 입장과 환경을 넘어서는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이루면서 교회를 확장시켰다.

이러한 공동체의 확장에 충돌하는 이들은 세상과 결탁되어있는 이기적 무리들일 것이다.

교회공동체는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 다양한 입장에서 공동체를 이루어가지만 각자의 입장과 이권을 넘어서지 못하면 서로 충돌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성도는 세상의 이권과 결탁되어있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설 때 진정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교회공동체를 이루어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성령은 성도를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게 하신다.

신자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다.

궁극적으로 임할 새 하늘과 새 땅은 이 땅과 하늘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 땅이 하늘과 하나가 되기 위한 전제 조건은 거룩이다.

거룩함이 없이는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가 없다.

세상과 결탁 되어있는 자는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가 없다.

성령 충만은 신비적인 개념보다는 거룩함에의 참여다.

성령충만을 강조하는 신비주의자들 가운데는 거룩함에 대한 개념이 없이 신비를 추구하는 이들도 있다.

관상기도를 수단으로 신적 존재를 경험하는 이들에게서 거룩의 개념을 찾아 볼 수가 없다.

관상기도는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의한 거룩함이 아니라, 플라톤의 이원론적 사고에 의한 성과 속의 개념에서 출발된  헬라 철학을 근거로하는 신플라톤주의 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기독교뿐만이 아니라 모든 종교에 관상기도가 있기에 카톨릭은 타종교와의 대화의 수단으로 관상기도를 사용하고있으며, 세계교회협의회 (WCC)에 참여하는 교회들도 관상기도를 수용하면서 이에 동참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스데반이 하늘의 신비를 볼 수 있었던 것은 육적인 신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속죄로 인한 거룩함을 기반으로하는 성령의 역사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57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무엇때문에 이렇게까지 큰 소리를 지르고 귀를 막고 달려들어야만 했는가?

단순한 정죄보다는 자신들의 이권이나 자신들의 자존감이나 철학이 무너지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자신들은 스스로 선하다고 생각했을 것인데 악하다고 하니 이를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은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자신을 악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름대로 단편적인 정의감에 사로잡혀 스스로 의롭다고 여긴다.

이는 특히 성직자들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하나님을 정면으로 대적하는 이들은 인간 중심적인 선을 행하는 이들이다.

특히 인본주의 신학을 하는 이들은 자신의 선에다가 신학이라는 칠을 덧입힘으로서 그럴듯하게 자신들을 포장한다.

이들은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선함을 증명하려한다.

하지만 선을 판단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진정 하나님의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선한 사람은 하나님이 증명해 주실 뿐이다.


스데반은 자신이 선함을 증명하려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의 악함을 드러내면서 진리만을 선포했을 뿐이다.


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이들은 인간이 정작 정죄 할 수 없는 근본적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마치 자신들은 거룩함을 지키는 자들인 것과 같이 스데반을 성밖으로 끌어내지만 정작 거룩하지 못한 자가 거룩한 자를 거룩의 이름으로 돌로치는 악행을 저지른다.

거기에 더하여 거짓 증인까지 합세한다.

신앙의 영역에서 정의를 외치는 이들 가운데 대중의 인기를 힘입어 정의의 이름으로 자기와 다른 이들을 사냥하는 이들이 종종 있다.

이들은 정작 자신이 의롭다고 자기와 다른 이들을 정죄하지만 지극히 인본주의적인 경우가 종종있고 이들은 정죄하면서 자신의 의를 드러내려한다.

하지만 정작 인간은 누구나 전적으로 부패한 아담의 자손으로서 인간에게는 정죄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는 것을 모르고있다.


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스데반은 자신을 박해하는 이들에 대항하지 않는다.

스데반은 자신이 정죄 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서 자기를 박해하는 이들 조차도 용서하지만, 정작 스데반을 박해하는 이들은 자신들이 정죄할 수 없는 죄인임을 알지 못한다.



1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하나님께서는 핍박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도한다.

예루살렘에 임한 핍박이 없었으면 이 땅의 예루살렘이 또 하나의 집단이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복음 전파는 세상적인 규모의 커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게 지은 교회의 명분은 중국에 대한 선교였지만 오히려 사회의 지탄만 받을 뿐이다.

진정한 하나님의 축복은 세상적인 관점에서는 블행인 경우가 종종 있다.

일제시대 평양은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할 정도로 부흥되었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영적으로 황폐해진 곳이 되었다.


평양이 박해를 받아 이북에서 내려온 이들로 인하여 남쪽에 많은 교회들이 세워졌다.

한 가지 예로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영월의 차득련목사는 소천하신지 이제 20년 가까이 되었지만 그가 처 자식을 이북에 남겨두고 강원도에 세운 교회는 무려 20개가 넘었다.

그에게 향한 하나님의 축복은 세상에서의 형통이 아니라 부인과 세명이나 되는 아들의 소식도 모른채 평생을 떨어져 살아야만 했던 고통이었지만 그가 맺은 수많은 생명의 열매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무한한 축복이었다.

하나님의 축복을 외적인 확장으로 생각하면서 교회 건물의 증축에 힘을 다했던 교회들은 그 외적인 규모만큼이나 욕심의 충돌로 인하여 침물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2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posted by Wonho Kim
:
사도행전 2018. 1. 15. 23:34

사도행전 7장 37~53절 말씀 묵상


37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38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스데반은 모세의 권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부터 왔음을 말하고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일을 행하시기에 모세에 대한 거부는 곧 하나님에 대한 거부가 될 수 있다.

모세는 하나님께 특별 은혜의 권위를 입었다면 세상에서의 권위자들은 하나님의 일반 은혜를 입은 것이다.

자연법에 지배되는 일반 은혜의 영역은 하나님의 통치 영역으로서의 하나님 나라이며, 이는 하나님의 구속 영역으로서의 하나님 나라와는 구분된다.

특별 은혜의 하나님 나라에 속하여 있는 신자는 동시에 일반 은혜의 하나님 나라에 속하여있기에, 자연법에 의한 이 세상의 권세자에게도 복종하여야한다.


39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하지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

하나님의 권위를 입은 모세에 대한 복종은 하나님에 대한 복종이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복종하지 않음으로서 하나님을 거부하였다.

이는 단순히 권위에 대한 불복종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거부이면서 동시에 사단의 권세 아래에 있는 애굽에 대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심각한 이유는 일반 은혜를 근거로하는 보편적인 권위가 상실된 시대라는 것이며, 동시에 권위에 대한 도전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이 보편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하고 세상 신에게 속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40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고

이는 이제껏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복종하였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심을 목적으로 하나님을 이용하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우상은 인간의 필요를 채워줄것 같은 허상이지만, 그래도 인간은 자신들의 필요에 의하여 신을 만든다.

시내산에 올라가기 이전의 모세는, 실상은 그들에게 하나님을 대변하는 역할을 못한 것이며, 이제껏 이스라엘 백성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이로 이용 당한 것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로 성도의 필요를 채워주는 방법으로 확장을 하려고 한다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만있는 우상 숭배의 장소가 될 것이다.

기회주의적이고 타협하는 것이 보편화되어있는 현재의 대다수의 교회들은 실상 아론의 송아지와 별다르지 않다.



41  그 때에 그들이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

출애굽의 과정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였던 모습은 어디에서도 발견 할 수가 없다.

그들이 유일하게 기뻐하였던 것은 송아지를 만들었을 때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여준 모습은 인간의 보편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도우심이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42  하나님이 외면하사 그들을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 두셨으니 이는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 바 이스라엘의 집이여 너희가 광야에서 사십 년간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로마서 1장에서도 사람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을 때 그들을 내어버려두심으로 그들이 어떠함을 증거하고있다.

하나님은 마음 중심에서 경배를 받으시길 원하신다.

하지만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인간의 마음을 잡아둘 수가 없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잡아당기시지 않으시면 고무줄과 같이 자신의 죄성이라는 본능으로 다시 돌아가게되어있다.

내버려 둔다는 것은 인간의 원래의 상태가 어떠한지,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어떻게 될지를  스스로 경험을 통해서 깨닫게 하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심판받기에 합당한 모습을 증명해줄 뿐이다.

끝까지 은혜를 거부하는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내버려 둠으로서, 세상은 자신들의 죄악을 스스로 증명함으로서 심판대 앞에 설 수 밖에 없다.



43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으로 옮기리라 함과 같으니라

사람을 제물로 바치게하는 가나안의 신과 토성이라는 별과 관련된 신은 다 아론의 금송아지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만든 신이다.

인간이 만든 신의 모습은 인간의 내적인 상태가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우상 앞에서 행하는 악행들은 전부 다 인간의 마음의 원함을 드러내주고 있는 것이다.



44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이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가 명하사 그가 본 그 양식대로 만들게 하신 것이라

하나님의 장막이 광야에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새 언약 시대인 신약에서는 성령께서 친히 신자 안에 내주하심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신자와 함께 하심을 증명해주고 있다.

성령이 내주하는 신자는, 심각한 갈등이 없이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우상을 만드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갈등은 성령이 신자 안에 내주하고 계심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45  우리 조상들이 그것을 받아 하나님이 그들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인의 땅을 점령할 때에 여호수아와 함께 가지고 들어가서 다윗 때까지 이르니라

광야에서의 증거장막이 가나안 땅에서도 계속적으로 이어짐을 말한다.

이는 한편으로 현재 우리의 삶이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앞으로 임할 영원한 천국에서 영원한 삶으로 계속적으로 이어질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46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하게 하여 달라고 하더니

은혜를 받은 자의 간구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달랐다.

자연인으로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코 하나님의 처소를 간구하지 않았다.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인간은 결코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다.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수 있었던 것은 다윗에게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47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솔로몬은 눈에보이는 성전을 지었지만 그는 자신이 지은 성전으로 말미암아 타락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스도가 손수 지으신 성전은 솔로몬이 지었던 성전과 달리 타락과는 관계가 없었다.

성전으로서의 에덴이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완성될 수가 없었듯이,  타락한 인간은 상실된 성전을 지을 수가 없다.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그리스도만이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상실된 성전을 완성시킬 수가 있으셨다.

성전으로서의 에덴은 그리스도에 의하여 완성되었기에 신자는 더 이상 에덴에서의 명령을 수행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는 완성된 성전으로서 신자에게 안식이 되시기에 신자가 에덴에서의 문화명령, 즉 창조명령 혹은 통치명령을 다시 시작하려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더군다나 다시 제3성전을 지으려는 행위는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이들의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기에, 이를 지지하는 세대주의를 성경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48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가 말한 바

49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50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스데반은 이사야 66장 1~2절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를 인용하여 적용하고있다.

성전되신 그리스도를 위한 비약적인 논리를 전개하지만 결코 괘변이나 억지 주장이 아니라 철저하게 성경을 근거로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유대 성직자들은 성경을 보더라도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본다.

성경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될 때 진리가 상실될 수 밖에 없다.

성경이 어떠한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될 때 제대로된 해석은 불가능하다.

성령은 신자에게 성경 자체를 증거해주고있다.


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담대하게 하나님의 진리를 전한다.

스데반은 기회주의적이지도 않았고, 타협 하지도 않았으며, 이에 따른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성령의 함께 하심은 지식과 능력을 넘어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을 주신다.

결국 그리스도를 거부하였던 유대 지도자들은 출애굽 후에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멸망한 이스라엘과 한 가지라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유대적 이스라엘이 참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라고 말하지만 성령에 의하지 않는 인간은 모두 다 멸망할 수 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참된 하나님 나라 백성은 오직 성령이 내주하시는 이들이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성령이 친히 내주하셔서 함께 하심을 증명해주시지는 않는다.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인정하지 않기에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인본주의적이고 유대적인 나라일 뿐이다.


52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심문하는 이들의 잘못을 정확하게 집어내고있다.

스데반의 말을 듣고있는 이들은 두 가지 가운데 한 가지를 선택 할 수 밖에 없다.

마음에 찔려서 회개하고 그리스도인이 되거나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자가 되거나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여야만 한다.

하지만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이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스데반을 공격한다.

인간에게 중립지대란 없다.

어느 누구나 두 가지 가운데 한 가지를 선택하여야 한다.



53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한다.

이방인인 인간에게도 마음에 새겨진 율법, 즉 자연법이 있다.

인간은 누구나 자연법 앞에서 결단을 요구하는 상황들을 접하게 되어있다.

무엇을 선택 할 것인가는 결국 인간의 몫이다.

posted by Wonho Kim
:
사도행전 2018. 1. 14. 23:58

사도행전 7장 17~36절 말씀 묵상


17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하여 많아졌더니

약속하신 때가 가까왔을 때의 상황은 오히려 절망적으로 치닫는다.

흔히들 무슨 좋은 일이 있으면 사단이 방해한다고 사단과의 싸움에 집중하지만 정작 하나님의 관심은 택한 자들에 대한 거룩과 성결에 있다.

베레아 아카데미나 축귀 사역을 하는 이들이나 세대주의자들은 많이들 사단의 활동에 관심을 기울이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이 다듬어지는 시간인 줄을 깨닫지 못한다.

하나님은 성도를 사용하시기 전에 악을 사용하셔서라도 성도를 깨끗하게 하는 작업을 하시기에 눈 앞에 닥친 어려운 상황에서는 일차적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 앞에서 정금과 같이 깨끗하게 되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하여야한다.



18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애굽 왕위에 오르매

누구나 상황의 혜택을 받는 이들은 자신을 알아주지 못하는 상황에 부딪히게  마련이다.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셉의 이름 덕을 톡톡히 보아왔지만 이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기보다는 세상에 의존하는 삶을 살아왔다.

세상에 의지하는 이들은 세상이 등을 돌릴 때 시험에 들 수 있기에 항상 주를 의지하는 삶을 살아야한다.

하지만 인간은,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기에,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강력하신 간섭이 없이는 적극적으로 세상을 선택하게 되어있다.


19  그가 우리 족속에게 교활한 방법을 써서 조상들을 괴롭게 하여 그 어린 아이들을 내버려 살지 못하게 하려 할새

사단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길 원하지 않아서 끊임없이 방해를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단의 속성을 역이용하셔서 자신의 뜻을 이루신다.

하지만 인간으로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알기 어렵기에 위기의 상황일수록 더욱 기도하면서 믿음 가운데 하나님을 의존하는 삶을 살아야한다.

현재의 대한민국의 긴박한 상황은 김정은이라는 악한 자의 계략을 역이용하셔서  대한민국을 향한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 이루어지는 시간이기에 성도들은 더욱 깨어서, 시험에 들지 않도록,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여야 할 때이다.


20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의 아버지의 집에서 석 달 동안 길리더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때가 가까이 오면서 하나님의 본격적인 개입이 시작된다.

하지만 모세가 태어난 후에 모세는 80세가 지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셨다.

80년이라는 시간은 인간이 한평생을 살아야하는 결코 짧지 않은 기간임에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왔기에 출애굽을 인도할 모세를 태어나게하셨다.

인간이 생각하는 가까움과 하나님께서 보시는 가까움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21  버려진 후에 바로의 딸이 그를 데려다가 자기 아들로 기르매

물에 빠진 요나를 위해서 물고기를 준비하셨듯이 버려진 모세를 위해서 바로의 딸을 준비하시는 하나님….

신자는 비록 자신이 사회로부터 버림받고, 동료로부터 버림을 받고, 심지어는 사랑하는 교회의 성도들에게 버림을 받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계획하신 택한 자의 삶을 위해서 더 좋은 환경을 예비해주신다.

신자는 어떠한 불행한 환경에서도 절망하지 말아야하며, 자신의 삶 가운데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경험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져가야한다.

역경 가운데 택하는 자살의 문제는 자신의 생명에 대한 살인보다도 하나님에 대한 불신에 더욱 큰 죄가 있음을 알아야한다.

자살을 생각하여야 할 정도의 역경이라면 물에 빠진 요나만큼이나 하나님을 경험 할 수 있는 놀라운 시간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22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

모세가 바로의 궁에서 지혜를 배웠던 시간은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장  괴롭히던 악한 시간이었다.

모세는 자신의 백성들이 가장 괴로웠던 시간에 가장 편안한 시간을 보내었다.

모세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할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악한 환경 가운데에서라도 하나님의 일반 은총에 의한 긍휼을 베푸시는 것과 같이 성도는 세상 학문에 대하여 배타적인 태도를 취해서는 않된다.

어떤 이들은 세상에서 배울 것이 없다고 일반 학문에 대하여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지만 일반 학문 가운데에는 하나님의 자연법이 가장 잘 나타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성도는 세상이 악하다는 이분법적인 이원론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연법에 의해서 운영되는 일반 은총의 나라와 하나님의 특별 계시에 의해서 운영되는 특별 은총의 두 나라에서 살고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어느 목사와 같이 사회법 위에 하나님의 영적 제사법이 있다고 사회법을 어겨도 된다는 몰상식의 행동을 하여서는 안될 것이다.



23  나이가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

나이 사십이면 가장 혈기가 왕성한 때이다.

가장 자신이 있는 나이에 가장 조심하여야한다.

사람들은 종종 40대에 들어서서 인생의 하프타임을 경험하게된다.

하프타임은 인생이 좌절되는 시간이다.

인생을 하프타임을 거치고나서 진정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아가게도

어있다.


24  한 사람이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 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 죽이니라

세상에는 정의의 사도처럼 활동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

이들의 행동 원리는 지극히 인간적이다.

블의를 참지 못한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다 옳은 일일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는 오히려 악이 될 수도 있다.

하나님 앞에서 선한 일은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구약에서의 사건들을 인간적인 관점에서 해석할 때 어떤 때는 하나님이 악한 분이 되실 수도 있다.

신자에게 선은 정의의 사도가 되기보다는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25  그는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통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더라

모세의 생각의 미숙함이다.

젊은 이들에게서 종종 발견 할 수 있는 현상이다.

문제는 시간과 상황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자신의 힘으로 하려고했다는 것이다.

신앙 생활하면서 주위에서 알아주지 않고 하나님께서도 함께하시지 않는다는 생각에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낙담되는 시간을 보내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정작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힘이 빠지기를 기다리시고 계신다.

성도는 자신의 힘으로 무엇인가 해보려고 하면서 잘 안될 때는 하나님을 원망하지만, 낙담의 과정을 통하여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하는 성숙된  시간이 될 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26  이튿날 이스라엘 사람끼리 싸울 때에 모세가 와서 화해시키려 하여 이르되 너희는 형제인데 어찌 서로 해치느냐 하니

모세의 생각은 단편적이다.

모세는 단순한 몇 가지 논리를 모든 상황에 적용시키려고한다.

나이든 사람들은 온갖 경험을 통하여 삶의 지혜가 많이 있지만 젊은 이들은 짧은 연륜으로 인하여 상황을 판단하는 논리가 단순할 수 밖에 없다.

특히 현대 사회는 젊은 이들이 자신들의 단편적인 생각으로 연륜이 있으신 분들을 쉽게 판단해버린다.

이는  아담의 후손인 죄인이 자신들의 단편적인 논리로 하나님을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다.

27  그 동무를 해치는 사람이 모세를 밀어뜨려 이르되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

자신의 논리를 모든 이들에게 적용시킬 수는 없다.

하나님의 법이 상실될 사회일수록 각자 자신의 법대로 살아가게된다.

고통 가운데 불의가 팽배했던 애굽의 상황은 심판을 앞둔 마지막 시대의 상황적 특징을 보여준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특징 가운데 한 가지는, 각자 자신이 진리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절대적 진리가 상실되어가는 시대일수록 심판이 가까이 왔음을 볼 수 있다.



28  네가 어제는 애굽 사람을 죽임과 같이 또 나를 죽이려느냐 하니

세상에는 비밀이 없다.

특히 마지막 때 일수록 다른 이들의 잘못을 노출시킨다.

온갖 언론과 SNS등은 다른 이들의 좋은 점보다는 부정적인 가십거리를 논한다.

부정적 정보들은 서로를 낙담시킨다.

마지막 때가 가까올 수록 사랑이 식어지는 이유이다.

하나님의 형상에는 삼위 하나님의 완전한 공동체적 형상이 담겨있지만 인간의 타락과 더불어 시작된 공동체의 파괴는 극단적으로 서로에 대한 공격으로 나타난다.



29  모세가 이 말 때문에 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거기서 아들 둘을 낳으니라

공동체로부터의 이탈은 자신의 선택과 관계없이 불가피한 경우가 있다.

공동체 내부에서 서로에 대한 공격이 있을 때 같은 공동체에서 지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교회 공동체에서의 분열은 종종 성도를 교회 바깥으로 내어 쫒는다.

고통 가운데 있던 애굽의 상황이 모세를 내어쫒았듯이, 진리가 없어질수록 사랑은 식어지고 분열은 증가된다.

이는 현시대에 가나안 성도가 증가하는 주요 요인이기도 하다.

서로에 대한 사랑과 용서와 이해가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때이다.



30  사십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 산 광야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사십이라는 숫자는 상황의 준비를 위해서 더 이상의 숫자를 요구하지 않는 상황의 가득함을 뜻한다.

가나안 입성을 준비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사십 년동안 애굽의 잔재를 털어냈어야했듯이, 모세는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광야에서 사십 년동안 왕족의 잔재를 털어내야만 했다.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을 위해서 사십 일 동안 광야에서 충만하게 금식을 하셨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를 예비하시기 위해서 사십 일 동안 충만하게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일을 말씀하셨다.

모세가 사십 년동안 자신의 혈기를 내어버렸을 때 보았던 가시나무 떨기는 불이 붙었지만 타지 않았다.

마치 알콜 램프의 심지가 알콜을 태우면 심지가 타지 않지만 알콜이 없으면 심지가 타듯이, 사십년 전의 모세는 자신을 태우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사십년을 준비하고서 모세는 자신을 태우지 않는 대신에 하나님을 태우는 법을 배우게 된다.

광야에서의 모세를 통해서 진정으로 사는 길은 자신이 죽는 것임을 보게된다.

신자는 육적인 자아를 죽일 때 진정으로 하나님의 심지가 될 수가 있다.



31  모세가 그 광경을 보고 놀랍게 여겨 알아보려고 가까이 가니 주의 소리가 있어

타지 않는 떨기는 놀랄 수 밖에 없는 현상이다.

모세는 이러한 놀라움을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면서 사십 년 동안 경험하게 된다.

진정으로 육적인 자아가 죽은 성도는 모세와 같이 남아있는 인생을 타지 않는 떨기와 같이 자신을 태우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놀라운 삶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32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신대 모세가 무서워 감히 바라보지 못하더라

무서웠던 하나님이 가장 친근한 하나님으로 바뀌게된다.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친근하게 다가갈 수는 없다.

인간적인 혈기가 다 빠지고서야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다가오셔서 모세와 가장 가까이계신 분이 되셨다.

신자는 인간적인 힘이 다 빠질 때까지 하나님을 두려워 할 수 밖에 없지만 혈기가 다 빠질 때 하나님의 온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33  주께서 이르시되 네 발의 신을 벗으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인간이 버려지거나 떠나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영역도 하나님이 주관하신다.

소외되었다거나 버려졌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 경험할 수 있다.

비록 상황 가운데서는 사회에서나 교회에서 아웃사이더로 있다고 하더라도 그곳이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있는 곳임을 생각하며 좌절하지 말아야한다.



34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음을 내가 확실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그들을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이제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톰 라이트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며 홍해를 건너는 출애굽을 구원으로 보았기에,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며, 이들의 가나안에서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무르는 삶이라고 규정한다.

이러한 논리라면 새관점에서 보는 보냄받은 구원자는 모세가 되어야한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은, 창세기 1~3장에서의 첫 번째 아담이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과 같이,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로, 새 언약의 주체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 안에서, 참이스라엘을 예표하는  모형이 되어야한다.

유대적 이스라엘은 새관점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 나라의 실체적 백성이 아니라 모형적 백성임을 인식하여야한다.



35  그들의 말이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 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으로 관리와 속량하는 자로서 보내셨으니

세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사단은 하나님의 사람을 거부하지만 하나님께서 손수 세우실 때는 아무도 이를 막을 수가 없다.

세움을 받고자 하는 이는 스스로 세움을 받으려고 하지말고 하나님께로부터 세움을 받아야한다.

특히 교회에서 세움을 받으려는 이들은, 젊었을 때의 모세와 같이, 인간적인 방법으로 세움을 받으려고해서는 안된다.


36  이 사람이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사십 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느니라

모세의 성공은 성공이 아니다.

인간에게 성공이라는 것은 없다.

오직 하나님의 쓰임을 받았을 뿐이며, 인간에게는 아무런 공로도 없다.

성공은 목적하는 바를 이룬다는 개념으로 지극히 인간적인 개념이다.

어떤 성도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라는 책을 몇 번씩 읽으면서 이를 신앙생활에 적용하는 이들도 있다.

신자가 성공하는 삶은 살기 위해서는 모세와 같이 광야에서 자신의 인간적 혈기를 완전히 제거하여야만 할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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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18. 1. 14. 01:48

사도행전 7장 1-16절 말씀 묵상


1  대제사장이 이르되 이것이 사실이냐
2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대제사장 앞에서 스데반은 자신의 변론을 듣는 이들에게 부형이라는 말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서 같은 유대인으로서  이스라엘 민족 안에서의 동질감을 근거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스데반이 아브라함부터 논술하고 있는 것은 듣는 이들이 동일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스데반이 우리 이방인들에게 이야기를 하였다면 이러한 방식이 아니라 창세기의 아담의 창조로 부터 시작하였을 것이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성경이 말하는 복음을 아브라함 이후로 부터 한정시키면 안된다는 것이다.

스데반은 복음이 아브라함 이후로부터 시작되었음을 말하기 위해서 아브라함부터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새관점주의자들은 스데반의 논술을 근거로하여 복음을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새관점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담의 범죄에 대하여 아브라함과의 약속을 통하여 일단 해결하신 것으로 간주하지만 스데반은 이러한 의도로 아브라함으로부터 진술하고있는 것은 아니다.


3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하나님의 복음은 거룩, 즉 떠남과 분리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지역은 떠났어도 그의 아버지로 인하여 가나안까지는 가지를 못하였다.

신자들은 자신이 속해있는 가족과 친인척, 그리고 학연과 지연등으로 인하여  발목을 잡힐 경우가 종종 있다.

특히 교회는 혈연, 학연, 지연에 의존하지 말아야한다.


4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인도된 것은 아브라함이 주체가 아닌 하나님이 주체가 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상황과 관계없이 무조건 길을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상황 속에서 자연스럽게 인도하신다.

자연법도 하나님의 법이지만 하나님의 특별법은 자연법을 일방적으로 무시하시지는 않으신다.

사회법을 어기면서까지 건축된 S교회의 건물에 대하여 담임목사가 사회법 위에 영적 제사법이 있다고 변명하는 것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자기 속에 갇혀 있는 목회자들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부끄러운 모습이다.

신자들은 자신의 마음으로 자신의 길을 계획하더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은 사회의 수치가 되는 방식으로 인도하시지는 읺으신다.


5  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 만한 땅도 유업으로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그와 그의 후손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하나님의 약속은 논리적으로 타당성이 있다고 설득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불신자들에게 전도할 때 믿음을 논리로 설득할 수는 없는 것이다.

현대문명은 논리를 근거로하는 과학시대이지만, 성경을 과학적인 논리로 접근함으로서 믿음을 산출해 낼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의 영혼과 생명은 그 사람을 해부한다고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방식으로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의 역사는 깊은 밤중이 지난 후에 오는 새벽녘의 빛과 같다.


6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후손이 다른 땅에서 나그네가 되리니 그 땅 사람들이 종으로 삼아 사백 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후손을 바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자리잡게하지 않으시고 애굽에서의 종살이 과정을 거치게 하셨을까?

이는 왜 아담 가운데 인류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바로 에덴에서 인간을 축복하셔서 천국을 만드시지 않으시고 타락의 과정을 통하여 아담의 후손을 애굽의 종과 같은 생활을 하게 하시는지에 대한 질문과 연관성이 있다.

이는 또한 가나안 땅에 자리잡은 이스라엘을 바로 축복하시고서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시키시지 않으시고 바벨론 포로의 과정을 거치면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드셨어야만 하셨는지에 대한 질문과 연결시킬 수 있다.

이 모든 것에 대한 답은 결국 모든 창조 세계를 그리스도 예수께 귀속시키시기 위한 창세 전 하나님의 구속 언약 가운데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7  또 이르시되 종 삼는 나라를 내가 심판하리니 그 후에 그들이 나와서 이 곳에서 나를 섬기리라 하시고

왜 종 삼는 나라를 심판하실까?

이는 타락한 아담의 후손을 종으로 삼았던 사단의 세력에 대한 심판을 예고하셨던 것이다.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많이 있겠지만 인간적인 관점은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관점이다.

애굽의 심판 후에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겼던 것은 궁극적으로 사단을 심판하신 그리스도를 섬기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을 예표하고 있는 것이다.

가나안에서의 실패는, 에덴에서의 실패와 마찬가지로,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인간의 노력으로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오순절 성령의 역사는 에덴에서의 실패와 가나안에서의 실패를 통하여 인간이 성령에 의지하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며, 스데반은 이를 직접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스데반과 같이 모함을 당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톰 라이트는, 유대적 이스라엘이 자신의 힘으로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으며, 예수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공해주신 분이라고 해석하며, 사도행전은 포로에서 해방된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님 나라 운동을 위한 역사였다고 자의적인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이다.



8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그가 이삭을 낳아 여드레 만에 할례를 행하고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우리 열두 조상을 낳으니라

아브라함에게 할례의 언약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인간이 타락의 구렁텅이에서 빠져 나올 수 없음을 보여주심으로서 하나님의 은혜의 징표로 할례를 행하게 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에 참여된 것이며, 오순절 성령의 역사는 이 땅에 은혜에 의한 새창조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이다.

참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성령의 새창조의 산물이며, 톰 라이트가 말하는 유대적 하나님 나라는 오순절 성령의 역사 이전의 이스라엘로서, 단지 하나님 나라를 예표하는 모형일 뿐이며, 실체가 아니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일반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와는 구별되어야한다.

새관점이 중심이 되어 벌이고있는 유대적 하나님 나라 운동은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근거로하는 하나님 나라 복음과는 다른 것이다.

복음은 행동방식에 의하여 규정되는 운동이 아니다.


9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판 이들은 마치 에덴에서 하와를 유혹하여 시험에 들게한 뱀과 같은 존재이다.

육체적 인간으로서의 아브라함 자손은 사단의 종노릇을 할 수 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참된 아브라함의 자손은 유대적 이스라엘이 아니라 믿음을 통하여 참이스라엘되신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이다.


10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그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통치자로 세웠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행적을 통하여 구원자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계신다.


11  그 때에 애굽과 가나안 온 땅에 흉년이 들어 큰 환난이 있을새 우리 조상들이 양식이 없는지라

하나님께서는 환란 가운데 길을 인도하신다.

인간은 완악한 마음으로 인하여 일단 육체적 충족이 있으면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가 어렵다.

성도의 삶 가운데 걸어야만 하는 수동적인 길은 종종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여야만 하며, 결코 상황에 대한 부정적 사고에 물드는 냉소주의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12  야곱이 애굽에 곡식 있다는 말을 듣고 먼저 우리 조상들을 보내고
13  또 재차 보내매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알려지게 되고 또 요셉의 친족이 바로에게 드러나게 되니라

하나님 안에 있는 자는 결국 하나님의 계획하심 가운데 인도를 받는다.

지혜자는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능동적으로 다가갈 필요가 있다.


14  요셉이 사람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 야곱과 온 친족 일흔다섯 사람을 청하였더니

공동체적 구원은 한 개인을 시작으로 이루어진다.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공동체적인 타락을 경험하였듯이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라는 공동체적 구원이 이루어진다.

신앙 생활은 항상 자신에 의하여 미치게 될 공동체적 영향력을 생각하여야만 한다.


15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 자기와 우리 조상들이 거기서 죽고
16  세겜으로 옮겨져 아브라함이 세겜 하몰의 자손에게서 은으로 값 주고 산 무덤에 장사되니라

인간은 결국에는 세상에서 죽지만 세상에서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결국 하나님의 자손은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야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원한 가나안 땅인 새 하늘과 새 땅으로 가게될 것을 말해주고있다.


(나가는 말)

스데반은 변론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의 무궁하심을 드러낸다.

억울함에 대한 정면 공격은 자신을 변론하기 위한 것이지만 스데반은 자신을 변론하기 위한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

자신을 위한 변론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이들은 결과적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종종 페북에서 자신을 변론하기에 바쁜 이들을 볼 때 오히려 그들의 미숙함을 보게된다.

신자는 대화 중심을 오직 하나님의 영광에 맞출 때, 스데반의 경우와 같이, 자신의 진실성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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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18. 1. 12. 21:34

사도행전 6장 1-15절 말씀 묵상


크리스텐덤 이전의 초대 교회는 건물 위주의 외적인 형태보다는 사람 중심의 생활 공동체로 이루어졌다는데서 현대 교회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

6장 전반부는 크리스텐덤의 산물인 현재의 교회 형태를 넘어서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고하는 선교적 교회를 중심으로 말씀을 적용해보고자한다.



1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어느 조직이나 규모가 커지게되면 여러가지로 문제가 생겨나는 것이 현실이다.

조직은 교회를 위한 말씀과 기도 중심의 교회를 유지하기 위한 이차적으로 필요한 수단이다.

조직은 전적으로 성도를 위해 구성이 되는 것이다.

성도가 조직을 위해서 존재한다면 주객이 전도되는 불행한 현상이 생길 수도 있다.

도시교회들의 조직은 성도를 위하기보다는 교회의 건물이나 예산 문제, 혹은 외형적 규모를 유지하기 위한 부차적인 분야가 비중이 높아지는 현상이 있다.

건물 위주의 교회는 도시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구성원의 헌신이 필요하다.

팀 켈러의 대안적 교회 형태로서의 미셔널 처치는 도시에서의 고비용 저효율의 문제를 극복한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흔히들 팀 켈러의 교회를 미셔널 처치, 혹은 선교적 교회라고 말하지만 이는 단지 외형적인 판단이며, 흩어지는 교회로서의 선교적 교회론과는 달리 전통적 교회론을 근거로한 형태로서만의 미셔널 처치일 뿐이다.

도시 문화의 한 가운데 살아가는 현대인은 초대 교회와 달리 도시화되어가는 세계 속에서 새로운 형태의 대안적 교회의 필요성을 심각하게 고려해보아야하지만 교회론 자체를 바꾸어서는 않된다.

요즘 대안으로 제시되고있는 선교적 교회는 교회론에 있어서 정통 개혁주의와 근본적인 차이를 보이고있다.

단순하게 선교적이라는 용어로 인하여 호감을 갖고 긍정적으로 수용하지만 전통적 교회론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여야한다.

예전에 부산에서 열렸던 세계교회협의회(WCC)를 정통개혁주의 교회들이  반대하였던 이유 가운데 한 가지는, WCC의 교회론이 칼 바르트의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기초로하는 선교적 교회, 즉 미셔널 처치라는 것이었다.

현대를 살아가는 성도에게는 누구나 다 현재의 교회 구조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민하는 가운데 어떠한 형태로 교회 안의 문제를 하나씩 해결해 가야할지  지혜를 모아야 할 때이다.



2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초대교회는 삶과 말씀이 혼재되어있는 생활 공동체의 형태를 띄고 있다.

오늘날의 건물 중심의 교회와는 다소 차이를 보여주고있다.

초대교회는 아직 조직이 제대로 갖추어져있지 않았기에 건물을 가질 수가 없었을 것이다.

체계화된 교회 조직은 콘스탄티누스 이후에 기독교가 국교화Christendom되면서 건물 중심의 교회로 고착화되었다.

현재의 교회를 건물 중심의 교회와 생활 중심의 공동체 가운데 어떠한 형태를 지향하여야 할지는 한 번쯤 심각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출발된 삶 중심의 교회공동체가 선교적 교회, 즉 미셔널 처치이다.

그러면 선교적 교회가 과연 열 두 사도가 고민하였던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집사의 조건으로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을 뽑는 이들은 사도 시대의 제자들이었을 것이다.

이들 제자들은 다같이 성령 충만하여 영적인 분별력이 있었을 것이다.

오늘의 교회에서 안수집사로 뽑히는 이들은 일반적으로 교회에 열심이 있는 이들이다.

안수집사의 기준이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것보다는 교회에 대한 열심이 있는 이들이 선출되는 경우가 많다.



4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기도와 말씀 사역은 교회를 교회답게하기 위해서 가장 기본이되면서 중심이 되어야할 사항이다.

설교를 하는 목회자는 일단 말씀 사역에서 열매를 맺어야한다.

불행하게도 종종 기독교 방송에서 설교하는 목회자들의 설교 수준이 그냥 감동을 유발시키는 웅변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경험한다.

한국 교회 설교의 문제 한 가지를 단적으로 지적하자면 설교에 신학이 없다는 것이다.

개혁주의 교회에서 신정통주의나 새관점, 메노나이트, 세대주의, 신비주의등 종합 선물셋트와 같이 주소가 없다.

신학이 없는 설교는 기술에 불과하며 자기 도취일 뿐이다.

목회자가 테크니션일 경우에는 더 이상 강대상에 올라가면 안된다.

하나님의 영광만 가리울 뿐이다.


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은 말씀 사역자는 아니었지만 그의 설교는 흠잡을 데가 없을 정도이다.

스데반이 이 정도이면 말씀 사역에 전념하였던 사도들의 수준은 어떠할 지를 짐작 할 수 있다.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고 하는 목회자들은 초대 교회의 사역자들과 같이 설교에 뛰어날 준비가 되어있는지 점검해보아야한다.


6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초대교회 공동체와 선교적 교회)

선교적 교회와 마찬가지로 톰 라이트도 사도들의 이러한 조직화를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형성시켜나아가는 새운동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교회는 삶의 형태로서의 새운동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 운동, 혹은 선교적 교회 운동은 삶의 조직으로서의 공동체 운동이지만 이러한 공동체는 교회 공동체와 구별되어야한다.

사도들이 구제의 문제로 집사를 세우는 과정은 신자들로 구성된 공동체 내부의 문제였다.

하지만 선교적 공동체나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는 이들은 성도들로만 구성되어있지 않다.

전통적 교회가 모이는 교회라면, 선교적 교회로서의 미셔널 처치는 흩어지는 교회로서 일종의 생활 공동체이다.

선교적 교회는 삶의 현장에 흩어지는 생활 공동체로서 교회 공동체와는 구별되어야한다.

미셔널 처치로서의 선교적 교회는 초대교회의 구성원들과 달리 불신자를 공동체 내부에 포함시킨다.

공동체 구성 멤버로 볼 때 교회의 범주를 벗어나는 선교를 위한 공동체이다.

이들이 전하는 선교의 내용은 개혁주의에서 전하는 복음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선교적 교회는 불신자들과 삶과 예배를 공유한다.

문제는 교회 구성원을 삶의 현장에 있는 모든 이들을 포함시키며 이들을 예배에 참여시킨다는 것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구별된 곳에서 하나님께 예배하였고, 성도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지체이기에,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교회는 세상과 구별된 세례받은 교인들로 구성되어야한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서 지체의 개념은 세례받은 이들로 한정되어야하며, 불신자들은 예배에 참여하는 업서버일 뿐이다.

삶의 현장에서의 생활 공동체는 그 자체가 교회가 될 수는 없다.

생활 공동체로서의 선교적 교회는 칼 바르트의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을 근거로하며, WCC의 교회론을 근거로하고 있으며, 톰 라이트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개념이 접목되어 발전되고있다.

삶을 변화시키는 운동과 교회를 교회답게하는 복음은 구별되어야한다.

사도들의 교회가 구제 사역과 말씀 사역으로 직분을 나누었던 것은 교회를 교회답게하는 것이었다.

새관점에서는 사도행전을 하나님 나라 운동으로서 사도들의 초창기 새운동으로 보고있다.



8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9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10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11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12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13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14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15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비유와 적용)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되는 곳은 어디에서나 핍박이 있게 마련이다.

마치 전쟁터에서 전투를 통하여 영역을 확대하여가듯이 사단이 자신이 차지했던 영역을 순수하게 내어주지는 않는다.

사단의 기만술 가운데 한 가지는 자신들이 스데반과 같이 순교자들이라는 것이다.

핍박받는 스데반은 핍박받는 이들이 자신에게 잘 사용하는 적용이다.

톰 라이트도 자신을 핍박받는 스데반에 비유한다.

하지만 이러한 자의적 적용은 아무나 사용할 수 있는 적용이기에 이러한 방식으로 자신을 정당화시킬 수 없다.

이러한 적용은 스스로 자신에게 적용하면 안되고 오직 객관적인 신자들의 평가로 이루어져야한다.

스스로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이 정당하다면, 이 세상의 이단들은 모두 다 스데반 집사와 같이 핍박받는 이들이 될 수 있다.

말장난을 하지 말아야한다.

스데반은 분명한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나게 되어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올 때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함으로 인하여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듯이 천사의 얼굴과 같은 스데반의 얼굴은 스데반이 핍박 가운데에서도 얼마나 성령 충만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했는지를 보여준다.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가득하기에 해와 달이 필요없듯이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 세상의 공급과 관계없이 오직 하나님의 영광 한 가지만으로도 충분하다.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였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했다.

스데반은 자신을 공격하는 이들과 정면으로 부딪히기보다는 핍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기회로 사용하였다.

사용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스데반은 사울을 직접 전도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은 스데반을 사용하셔서 사울에게 영향을 미치도록 하셨다.

악한 이들은 악한데로 사용되어질 뿐이다.

신자는 악과 투쟁하기보다는 모든 기회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기회로 사용하여야한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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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18. 1. 11. 22:40

사도행전 5장 27-42절 말씀 묵상

27  그들을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물어 

28  이르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이들은 자신들이 예수를 죽인 것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이다.

예수의 피를 자기들에게로 돌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는 이들이다,.

문제의 해결은 사실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유대 이스라엘도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여야지만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도될 수 있었듯이, 대제사장의 무리들도 자신들이 예수를 죽인 것을 인정하여야 해결책이 있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다.


죄를 인정하길 원치 않는 속성은 아담의 범죄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이는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으로 발전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발전은 결국 그리스도를 죽이는데까지 발전한다.


그리스도를 죽인 대제사장 무리들은 가룟 유다와 같이 스스로 양심의 가책에서 나오는 말을 하고있다.


사실 사도들은 정죄를 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이들은 자신들이 생각하고 싶은 것만으로 판단하고 행동한다.


똑같은 상황도 마음이 강퍅한 이들에게는 부정적이 될 수 밖에 없다.


29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베드로와 사도들은 사사로이 논쟁하는 것보다 원론적인 답변을 한다.


사도들의 원론적인 대답은 이 땅에 대한 사단의 지배권이 상실되었음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성령의 새창조는 사단의 종노릇에서 해방되었음을 선포하는 것이기에 더 이상 사람의 관계성에 묶이지 않음을 보여준다.


성령의 새창조는 창세 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에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의 순종과 아들되심의 선언을 근거로하는 활동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사람에 대한 사단의 지배권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선언하는 것이며, 동시에 더 이상 사단에 종속되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선포되었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말하는 순종을 그리스도의 성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열매이다.


하나님 나라는 순종을 요구한다.


창세 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을 근거로하는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하여, 이 땅에서의 성부 하나님의 왕권이 선언되는 것이다.


사도들이 말하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사도들의 직분을 분명하게 인식하는데는 나온 말이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림받기를 원하는 성도는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통하여서 이 땅에서 살아갈 때 진정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목회자나 성도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은 삼위 하나님의 영원 가운데 약속하신 구속 언약이라는 말씀을 근거로 육신이 되신 것이며,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택한 자를 대신하시는 순종을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순종을 근거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 성도는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오직 말씀을 근거로하는 순종이 동반되는 삶을 살아야만 할 것이다.



30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사도들이 “너희가”라고 지적했듯이 유대인들이 바로 예수를 죽인 자들임을 지적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한 순종은, 성부 하나님께서 창세 전 구속 언약을 통하여 약속하신 성자 예수님의 아들되심이며, 그리스도의 부활은 아들의 순종에 대한 아버지의 응답이었다.


아들을 죽음에 이르게한 이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었기에, 아담의 범죄는 단순한 불순종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었다.


자기 의를 세우려는 유대인의 순종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 아니라 자신을 완성하기 위한 하나님께 대한 대적 행위였다.


전적인 은혜에 의존하지 않고, 공로적 행위 구원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의로 포장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들이다.  


톰 라이트는 예수의 죽음이 로마와의 충돌 방식에 대한 한 가지라고 주장하지만, 예수를 나무에 달게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들은 특정 세력으로서의 로마가 아니라, 아담의 후손으로서의 유대인들이었으며, 유대인들의 대적은 보편적 인간의 모습을 대변해주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사도들의 활동은 창세 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을 근거로하는 것이며, 사도들이 전하는 하나님 나라는 창세 전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약속하신 순종을 통하여 이 땅에 임한 것이며,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는 성부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신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세워지는 것이다.


사도 시대에나 지금 시대에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이들은 한결 같으며, 이들은 하나같이 공로적 자기 의를 추구하는 이들이다.


새관점주의자들과 같이, 이 시대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왜곡시키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전가 교리를 부정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으려는 이들이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부 하나님의 성자 하나님의 아들되심에 대한 선언이며,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택한 자의 죄를 전가받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한 순종에 대한 성부 하나님의 응답이시며, 택한 자의 죄가 사함을 받았다는 선언이다.


전가교리가 없는 새관점이 말하는 부활은, 인간 행위 방식의 정당성만을 제시해주는 자기 의를 위한 것일 뿐이다.



31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제사장의 무리들은 회개와 죄사함이라는 선물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죄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예수를 죽였음을 인정해야한다.


이들은 회칠한 무덤과 같이 포장된 자신들의 껍질이 벗겨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도 예수를 죽이지 읺았다는 이들의 주장을 옹호한다.


32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증인이었어도 성령이 간섭하심이 없었다면 목숨을 걸고서 그리스도를 증거하지 못할 것이다.


이들이 하는 증거는 자신들이 하나님께 사로 잡힌 자들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위협적인 세상에 대하여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신앙인으로서의 삶은 오직 성령의 함께 하심으로만 가능하다.


33  그들이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


이들의 분노는 인간의 죄성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이는 패배한 사단의 대리적 표현이다.


사단이 예수께 대한 태도와 마찬가지의 태도를 사도들에게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 세상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한 사단은 세상에 대한 영향력이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34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율법교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


율법에 정통한 바울의 스승이었던 가말리엘의 모습은 율법이 그리스도를 대적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울법은 자연법과 마찬가지로 구원에는 이르지 못하지만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일반 은총의 영역에 속하여 있는 것이다.


율법에 충실하였던 이들도 하나님의 특별 은혜가 있어야지만 구원에 참여 될 수 있다.


하지만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고자함으로서 율법을  특별 은총의 방식으로 사용한다.


이는 일반 은총의 영역에 속하여있는 자연법을 통하여 구원을 얻고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가말리엘은 율법교사로서 지혜롭게 상황을 대처해나간다.


35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지 조심하라
36  이 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하매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 없어졌고
37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복음은 영원하지만 운동은 시간이 흐르면 사라지는 유행을 따르는 것이다.


드다와 갈리리의 유다가 전하였던 것은 복음이 아니라 운동의 차원이었다.


복음과 운동은 구별되어야한다.


하나님 나라 복음과 하나님 나라 운동은 구분되어야한다.


하나님 나라 복음은 구속사 중심의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이라면 하나님 나라 운동은 인간의 새로운 행동방식에 관한 운동이다.


톰 라이트는 사도들이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면서 핍박을 받았다고 말한다.


톰 라이트는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을 하나님 나라 운동으로 바꾸어버린다.


그는 하나님 나라 운동이, 하늘과 땅이 겹쳐서 새로운 세상으로 이끌어가는 하나님의 새창조로서, 유대교의 전통에 매우 충실한 것이라고 말한다.


유대교의 전통은 행함의 방식으로서 사도들이 전하는 하나님 나라 운동을 전통에 충실한 새로운 방식의 행동 방식으로 규정하고있다.


하지만 복음은 행함의 방식 이전에 생명에 관한 문제를 다룬다.


복음은 아담 안에서 아담의 범죄로 죽었던 인간이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았다는 새생명에 관한 것이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는 아담 안에서 죽어있는 전적으로 부패된 인간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는 인간이 율법을 행하는 윤리적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들은 인간이 아담 안에서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생명을 살리는 구속 사역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38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39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40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핍박은 성도의 거룩함에 대한 증거다.


거룩함은 분리로 인한 깨끗함을 말하며 세상으로부터의 분리를 말한다.


현재의 한국교회가 핍박을 받지 않는 것은 교회가 거룩함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거룩함이 상실된 한국 교회는 핍박이 아니라 비난과 조롱만 받을 뿐이다.


비난과 조롱은 핍박이 아니기에 사도들과 같이 기뻐할 수 없다.


상황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아무 감각없이 지나칠 뿐이다.


42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오직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였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교회는 그리스도가 사라졌고, 윤리의 모델이 되는 왜곡된 그리스도만 남아있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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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18. 1. 10. 23:03

사도행전 5장 12-26절 말씀 묵상

12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13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말미암아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는 것으로서 믿는 사람이 마음을 같이 할 수 있는 것이 중요했다.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의 중심은 그리스도다.


성령의 사역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한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 백성의 확장이다.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은 서로 사랑할 수 있어야한다.


마지막 때에는 사랑이 식어진다.


사랑이 식어졌다는 것은 은혜가 사라졌다는 것이고 성령께서 좀처럼 사도시대와 같이 역사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신사도 운동에서 하는 이들은 사도시대의 성령의 역사를 재현해보려고 하지만 이들이 하는 이상한 행동들은 거의 귀신이 발광하는 모습이다.


이 시대는 하나님의 특별 은혜를 좀처럼 경험하기 어려운 시대이다.


물론 사도 시대는 정경이 정립되기 이전의 특수성이 있지만 지금 시대는


기독교의 세속화로 인한 순수성이 심각하게 결여되어있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교회의 성도가 성도로 보이기보다는 유물론적 효용 가치로 보이는 시대이다.


신학은 그리스도 중심에서 떠나서 인간적 개념의 신론 중심의 신학이 되어버렸다.


신학의 기독론에서 신론으로의 중심 이동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한 왜곡된 결과를 가져왔다.


윤리를 앞세우는 인본주의적 기독교는 오히려 사람의 죄성이 가득하여 사랑이 없는 정죄를 하기에 바쁘다.


많은 발전에도 불구하고 머리만 커진 현대 기독교는 성령의 능력이 상실된 하나의 종교로서의 기독교가 되어버렸다.


14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성령의 역사는 반드시 부흥을 가져온다.


현재의 믿는 자의 감소는 일단 현재 교회에서 성령의 역사가 쇠퇴하고있음을 보여준다.


성령 사역의 감소는 일단 준비되어있지 않은 교회에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


15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의 그림자라도 누구에게 덮일까 바라고


복음 전파를 위해서 일차적으로는 인간적인 필요에 의한 만남이 있더라도  이차적인 열매로서의 믿는 자들이 생기게된다.


교회가 사회의 칭송의 받으면 사람들은 교회로 오게되어있고 이차적으로 이들을 거룩한 성도로 양성을 시켜야한다.


세상에서는 처음부터 액면 그대로의 복음 전파를 기대할 수는 없다.


전도를 위해서 길에서 외치기보다는 삶의 현장에서의 만남을 통한 성령의 간섭하심을 간구해야한다.


16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다 나음을 받을 정도의 강력한 성령의 역사는 사도 시대의 성도의 순수성과 열심을 볼 수도 있겠지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한 초창기의 하나님의 강력한 특별 은혜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 험한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성도는 힘든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더욱 크신 특별 은혜로 간섭하시기를 간구해야한다.


17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시기와 질투는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인간의 높아지고자하는 욕망이 죄절된데서 나온다.


인간은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기에, 사단과 같이 높아지고자하는 욕망이 내면에 깔려있기에, 시기하고 질투하는데서 자유할 수가 없다.


시기와 질투는 인간이 사단의 종노릇하는 통로가 된다.


18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대제사장이 사도를 옥에 가둘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면, 대제사장은 이미 막강한 정치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인류 역사에서 정치적 권력과 믿음이 아무 문제없이 공존되는 역사가 거의 없어기에, 대제사장들의 권력 남용은 신정정치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19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이르되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는 오직 복음 전파를 위한 하나님의 뜻이 중지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약 시대에는 복음 전파가 없는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결코 원하시지 않는다.


20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은 성령의 역사로 인한 전적으로 순전한 것이다.

제대로된 복음 전파는 순수성이 전제가 되어야한다.


이 시대 복음의 왜곡은 순수성이 결여됨으로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고있다.


순수성을 가진 복음이라 하더라도 신학이 왜곡된 순수성은 또 다른 부작용을 낳을 수 밖에 없다.


사도들이 경험했던 기적들과 비슷한 일이 “하늘에 속한 사람”의 저자 윈형제에게도 일어났다고 하지만 상황이 목적을 정당화 할 수는 없다.


윈형제의 목적은 백투예루살렘이라는 세대주의적 행동방식을 위한 간증으로서 신학적 근거가 결핍된 간증이기에 그 위험성을 분별하여야한다.


사도시대의 간증은 정경이 정립되기 이전의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로서, 성경이 정립된 현재에는 성경에 대립되는 유사 간증을 분별해 낼 필요가 있다.


21  그들이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와서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을 다 모으고 사람을 옥에 보내어 사도들을 잡아오라 하니
22  부하들이 가서 옥에서 사도들을 보지 못하고 돌아와
23  이르되 우리가 보니 옥은 든든하게 잠기고 지키는 사람들이 문에 서 있으되 문을 열고 본즉 그 안에는 한 사람도 없더이다 하니


인간의 힘으로는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작정하신 일을 막을 수가 없다.


24  성전 맡은 자와 제사장들이 이 말을 듣고 의혹하여 이 일이 어찌 될까 하더니


성전맡은 자, 제사장들…. 성령의 사역을 방해하는데 주축이 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성직자들이다.


이 시대에도 마찬가지이다.


목회와 신학은 오직 전문가들이 독점하고서 비전문가들이 참여하는 것에 대하여 상당한 거부감을 나타내는 것이 현실이다.


25  사람이 와서 알리되 보소서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더이다 하니
26  성전 맡은 자가 부하들과 같이 가서 그들을 잡아왔으나 강제로 못함은 백성들이 돌로 칠까 두려워함이더라


성전맡은 자에게 부하들이 있다는 것은 이미 이들이 권력자의 대열에 있다는 것이다.


인간 사회에서는 이상적인 신정체제가 불가능함을 보여준다.


그나마 어느 정도 순수성을 지켰던 칼빈마저도 사람들은 마녀 사냥하기에 바빴다.


칼빈을 끝까지 따라다니며 그를 방해했던 세르베투스가 처형을 당하였던 것은 제네바라는 신정체제에 대한 도전이었고 그에 대한 처형이 시의회의 결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칼빈이 사람을 처형했다고 칼빈에 대하여 마녀사냥하기에 바쁘다.


중세 로마카톨릭의 악행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형집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사실을 왜곡시킴으로서 또 다른 악행을 저지르는 것을 볼때 인간의 죄성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 수 있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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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18. 1. 9. 23:41

사도행전 4장 32-5장 11절 말씀 묵상

32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다는 것은 이들이 다 성령에 사로잡힌바되어 자신의 뜻이 아닌 성령의 뜻대로 하나가 되었다는 증거이다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성이 하나로 나타나듯이, 성령의 역사는 성도를 그리스도와 하나로 연합 시킴으로서 처음 아담에게 심겨졌던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공동체성이 이 땅에서 다시 구현되고있는 것이다.


하나되는 공동체성은 성령의 새창조의 특성이다.


이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마음 다짐으로 되지 않는 초자연적인 것이다.


이들이 행하는 공동체적 삶의 형태는 종국적으로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 모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사도 시대 이후에 이 땅에서 이상적인 삶의 공동체가 형성되지 않는 것은 마치 가나안에 들어갔던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죄성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증명해 주고있는 것이다.


현재의 교회 공동체가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은  마치 이스라엘의 바벨론 유수 이전의 부패한 모습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성결의 개념으로 시작된 이스라엘의 가나안 생활과 같이 성령의 강권적 역사로 시작된 사도시대의 교회공동체가, 인간의 죄성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의 부패와 마찬가지의 길을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있다.

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환경적으로 많은 장애를 극복할 수 있는 성령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도 핍박받는 지역에서 성령의 큰 권능을 경험 할 수 있는 것은 환경적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흔히들 복받았다고 간증하는 세상적 축복들은 오히려 타락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는 것이다.


현시대 교회 타락은 환경적 풍요와 무관하지 않다.


기독교의 부패는 콘스탄티노플에 의한 기독교의 국교화로부터 시작되었음을 볼 때 핍박이 없는 교회는 부패될 수 밖에 없음을 보게된다.


교회에 대한 핍박이 없는 현재의 환경은 한국교회의 부패에 가장 큰 기여를 하고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기에 하나님의 큰 은혜는 오직 어려운 환경에서만 가능할뿐이다.


34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중국이 문화대혁명 기간에 하였던 일 가운데 한 가지는 부유한 자들의 집을 압수하고서 그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분배하였던 것이다.


아마 성경을 피상적으로 적용하였던 것 같다.


마르크스와 레닌의 공산주의 이론도 많은 부분 성경을 근거로 하고있다.


하지만 이들이 실패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이들이 인간의 죄성을 간과하였기 때문이다.


사도시대에 재산을 공유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인간의 죄성을 압도하는 성령의 강권적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개인에게 사도 시대에서의 일들을 그대로 적용한다면 개인은 파산될 수 밖에 없다.


가끔 이단들이 재산을 공유하지만 이들의 공유된 재산은 잘못 사용되어질 뿐이다.


M교회와 같이 대형 교회들이 교회의 재정을 잘못 사용하는 것은 그만큼 내부적으로 잘못된 이단성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이다


문제는 인간의 죄성을 충분히 통제할 수 있는 성령의 공동체적 역사가 없이는 개인이 이를 실행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현 시대의 문제는 사도 시대와같은 성령의 초자연적 공동체적 역사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인간의 죄성으로 말미암아 처음의 시작과 다른 이스라엘 공동체의 모습과 유사하다.


부흥은 부흥을 추구한다고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부흥을 추구하면서 일어나는 부흥의 역사들은 부흥주의의 한 현상일 뿐이다.


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재산을 소유할 수 없었던 레위족이 재산을 처분하여 사도들에게 가져간 것은 하나님의 법에서 떠난 이스라엘 가운데 하나님의 법이 다시 살아 역사하고있다는 증거이다.


사도행전에서의 바나바의 선교사역은 죽었던 이스라엘 가운데 성령의 새창조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었으며, 바나바를 통한 성령의 새창조의 역사는 사도행전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가 자신의 재산에 대한 집착을 버림으로서 온전하게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 헌신된 자들은 물질에 대한 욕심이든 명예에 대한 욕심이든 인간적 욕심을 내려놓아야지만 성령께서 크게 사용하실 수 있음을 본다.



1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2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3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5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6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7  세 시간쯤 지나 그의 아내가 그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8  베드로가 이르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이르되 예 이것뿐이라 하더라
9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하니
10  곧 그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의 남편 곁에 장사하니
11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반을 바쳤다는 것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거짓말을 한 것에 문제가 있었다.


거짓은 누룩과 같이 공동체 전체에 쉽게 퍼진다.


사도시대의 초기는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구별된 공동체가 시작될 수 있었다.


이는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거룩이 유지되어야만 했다.


아간의 범죄가 심각하게 다루어졌던 것은 이스라엘을 우상 숭배로 오염시킬 메소포타미아지역의 시날산 물건을 숨겼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성령의 강력한 역사와 더불어 새롭게 시작된 성결된 교회공동체에 거짓을 가지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교회에 들어온 죄는 공동체 전체를 오염시킨다.


현대 교회가 공동체성을 상실한 것은 이미 심각하게 죄로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심각하게 오염된 교회공동체는 심각하게 부패했던 이스라엘과 유사하다.


그리스도의 초림과 더불어 이스라엘의 멸망을 보았듯이 심각하게 오염된 교회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심판을 받을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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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18. 1. 8. 21:48

사도행전 4장 13-31절 말씀 묵상


13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14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사도시대는 초자연적인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던 시대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학문이 없던 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도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이며 관원들은 이를 직접 목격하고있는 것이다.


지금 시대에도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가 있지만 정경이 없던 사도 시대와는 구분이 되어야하며 반드시 학문과 능력을 위한 과정이 필요하다.


학문에 절대권을 부여해서는 안되겠지만 문제는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이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학문에 절대성을 둘 경우에는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이들이 목사 안수를 받음으로 인해서 교회가 혼란스럽게 될 수 있다는 것이 문제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일단 성도가 영적인 분별력을 가져야하겠지만 이 또한 쉽지 않은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어느 시대보다도 영적 분별력이 요구되는 시대다.



15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16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관원들도 성령의 역사를 목도했지만 마음은 이에서 멀었다.


인식하고 안다는 것과 믿으면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차이가 있다.


아는 것은 행동이 뒤따를 의무가 없지만 믿는다면 행동에서 결정이 요구되기에 상황을 부인할 수 없으면서도 믿지 못하는 것이다.


성직자들은 포기하기에는 가진 것이 너무 많다.


희생이 없는 믿음은 없기에 이들은 현재적 자신을 아는 것에만 한정시킨다.


이는 교회에서와 삶의 영역에서 이중적 태도를 취하는 이들과 한 가지일 것이다.


17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18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대제사장들은 증거를 보면서도 마음 문이 열리지 못하는 이들이다.


등잔 밑이 어둡듯이 정작 전문가들이 구약에서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는 것이다.


현재의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의 상태를 보면 이는 현 시대에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참된 신앙은 세상 이권을 넘어서는 것이다.


신앙을 넘어서는 세상 이권이 자기의 힘이 될 때 이는 우상이 되는 것이다.


이에 비추어 보면 교회에서 이권 문제로 세상과 같이 되는 성직자들은 정녕 우상 숭배하고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이는 세상과 타협하느냐 아니면 성경 말씀대로 사는 것이 옳으냐와 같은 말이다.


현 시대의 신앙 생활의 특징은 결단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교회가 요구하는 결단이 비성경적인 부분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사도 시대에는 단순한 결단을 요구했지만 이 시대는 결단을 위해 많은 지혜가 요구되는 시대이다.



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거부 할 수 있는 능력은 오직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는 할 수 없다.


결단을 요구하는 상황은 영적으로 거듭낳는지를 알 수 있는 기회이기도하다.

21  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


세상 사람들의 특징은 다른 이들의 반응에 예민하다는 것이다.


현 시대의 특징은 자신의 행동 기준을  대중의 반응에 둔다는 것이다.


인간이 높아지고자하는 기준은 대중의 인기가 절대적으로 작용된다.


사단도 예수님께 경배를 받기를 원해서 예수를 유혹했지만 실패하였다.


인기를 얻는다는 것과 경배를 받는다는 것은 암묵적인 상관관계가 있다.


대중 인기 가수들이 아이돌인 이유이다.


이들은 항상 대중의 반응에 따라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한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방식은 타락한 아담의 자손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으로 인하여 세상 유혹에서 자유할 수가 없다.


22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사십여세나 되었던 병자였으면 예루살렘이라는 좁은 지역에서 모르는 이들이 없었을 것이다.


특히 예루살렘에 살면서 누구나 다 성전에 올라오면서 보았을 것이기에 이 사람의 치유는 예루살렘의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방법은 인간의 방법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3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료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리니


동료가 있다는 것은 많은 위로가 된다.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을 갈멜산에서  물리치고도 낙담되어 죽기를 간청했던 것과 대조적이다.


이 시대에는 아무 사심이 없이 오직 신앙의 이름으로 동료를 만나기가 쉽지 않은 시대이다.

24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선포하며 치유 역사가 창조주의 행하심임을 나타낸다.


창조주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은 신자에게 커다란 위로가 된다.

25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26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27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예수를 죽인 이들은 유대인뿐만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포함됨으로서 보편적 인간의 공통적인 죄를 고발한다.


현 시대를 사는 우리들도 마찬가지의 죄성을 가지고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면서 또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들이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자신을 죽인 원수를 사랑하는 희생으로서 인간의 생각의 범위를 벗어나는 놀라운 사랑의 행위이다.

28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뜻이 대적들과의 관계 가운데 일어나고 있음을 말한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다.


신앙의 여정은 항상 대적의 위협이 있기 마련이다.


인간은 부패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대적의 위협과 간섭하심이 없으면 쉽게 부패해 버린다.


29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이들의 기도는 자신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복음 전파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것이다.


이 시대는 신앙 안에 있으면서도 대부분이 자신의 이익에서 자유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이들이 원하는 권능은 순수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다.


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사도들과 그 동료들의 기도는 구약의 말씀을 근거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무조건적인 간구보다는 현실적 상황과 당면 과제를 구체적으로 알리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한다.


이에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위로하심으로 인하여 담대히 하나님 말씀을 전할 수가 있었다.


이는 오순절 성령의 역사가 지속적으로 진행되고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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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18. 1. 7. 22:04

사도행전 4장 1-12절 말씀 묵상

1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2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싫어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오히려 부활의 소식에 대하여 기뻐하면서 반겨야하지 않겠는가?


이들 성직이 직업이기에 때문인가?


아니다.


이들은 직업적 이권을 진리 위에 두기 때문이다.


교회도 규모가 커지거나 직업적 이권에 영향력을 미칠 정도가 되면 변질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이유로 교회의 규모를 키우는 것은 스스로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자살 행위이다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교회에서 진리를 위해서 직업적 이권을 포기하거나 양보하는 경우를 별로 보지 못했다.


이들 목회들은, 에서와 같이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파는 어리석은 자들이며, 순간의 이익을 위해서 영원한 것을 팔아먹는 믿음이 없는 자들이다.



3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


베드로와 요한이 갇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자가 급속하게 증가하는 것은 성령이 역사하고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는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5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반발하는 이들은 대부분 기득권자들이다.


기득권자들은 오히려 복음에 걸림돌이 될 수 밖에 없는가보다.



6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대제사장들이 오히려 영적으로 죽어있다는 것이 답답하다.


이들은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기득권이 위협받는다는 사실에서 위기 의식을 느꼈을 것이다.


성직이 직업인 이들은 전적으로 순수하게 진리를 변호하기가 쉽지가 않다.


이 시대에 복음의 진리를 가장 왜곡시키는 사람들이 신학자와 목사이며 또한 복음의 진리를 가장 잘 변호하고 전파할 수 있는 이들이 신학자이면서 목사들이다.


중요한 것은 성도들이 이를 구분할 수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가장 앞장서서 복음의 진리를 왜곡시키는 톰 라이트를 추천하는 신학자들과 목사들을 보면서 아무 생각없이 톰 라이트가 말하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이 슬프기만 하다.


톰 라이트는 그럴듯한 논리로 포장되어있어도,  복음을 유대교의 틀에다 집어넣고서 그리스도를 유대인의 한 사람으로 격하시키며 기독교를 유대교에 접목시키려는 친유대주의 학자이다.



7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권세와 이름은 왕권과 주권을 뜻하며,  하나님의 왕권이 이 땅에서 선포되고있음을 보여준다.


사도들이 행하는 권세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들은 아담이 실패한 이땅에서의 왕권에 대한 회복을 선언하는 것이다.


대제사장들이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알고있었다면 쉽게 이러한 질문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성령의 충만은 베드로가 지혜롭게 말을 하는데 힘을 실어주신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베드로의 입을 통하여 말하는 주체가 성령임을 나타낸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을 통한 성령의 새창조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9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베드로는 병고침과 구원을 동일한 관점에서 언급하고있다.


단순하게 병고침으로만 그친다면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베드로의 말은, 대제사장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자기들이 죽인 사람이 믿음의 대상이 되어야하는 기막한 상황역전을 전하고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름대로 생각이 있고 이유가 있어서 그리스도를 못박았을 것이다.


많은 불신자들이 정의의 이름으로 행하는 행위들이 실상은 하나님의 은혜를 악으로 갚는 경우들이 허다하다.


신자들도 불신자들의 행함에 대해서 문제 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동참하는 경우가 많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자신이 진리이면서 이를 근거로 행하지만 성경은 변치 않는 유일한 진리의 말씀이기에 신자는 자신의 생각을 넘어 진리를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성경 말씀이 기준이 되지 못하는 행함들은 결국 악으로 기울어 질 수 밖에 없다.



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뜻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인간 사회에서는 집단 이익이 곧 진리이기 때문이다


국가도 종종 진리보다는 국가에 이익이 되느냐 아니냐를 행동의 기준으로 삼는다.


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오직 기독교에서의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에 이르는 어떠한 길도 없다.


천주교에서는 다른 종교를 인정하면서 관상 기도를 통해서 타 종교와의 접촉점을 찾으려고하지만 이는 진리를 거역하는 행위이다.


나가는 말- 육체적 질병과 영적인 문


베드로와 요한은 육적인 문제를 통해서 영적인 문제를 해결한다


베드로와 요한은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였던 자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걷게하면서 병자가 병고침을 받는 것과 구원을 받는 것을 동일한 차원에서 설명하고있다.


이는 타락한 인간의 영적인 상태와 육체의 병적인 상태를 동일한 차원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질병의 요인들과 원인들과 특성과 결과들은 영적인 특성들과 밀접하게 비슷한 특징들을 보여주고있다.


질병을 일으키는 요인들로는 환경적인 외부적 요인들과 내적인 요인들이 있겠지만 이러한 요인들은 대부분 아담의 타락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질병의 증상과 특성들은 영적인 속성과 비슷한 속성들을 보여주는 경우를 종종 보게된다.


이러한 질병들은 결과적으로 인간으로하여금 죽음에 이르게 한다.


이는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에게 주어진 영적으로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의 결과일 뿐이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였던 자가 걷게된 것을 구원의 차원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사는 동안 경험하는 것이 결국 영원한 것의 모형이기 때문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함으로서 인간에게 부활의 소망을 갖도록 한 것은 이 땅에서의 경험들이 영원한 것의 모형이기 때문이다.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었고, 영적인 이스라엘은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 있는 참 이스라엘의 모형이었듯이, 삶 가운데 경험하는 현상들은 많은 부분 영원한 실체의 모형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고있다.


질병도 그 가운데 한 가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역 가운데 행한 많은 병고침의 기적들은 그 자체가 실체였다면 허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 병고침을 받았던 이들이나 베드로와 요한에게 병고침을 받았던 이나 결과적으로 죽는 것은 한 가지 이기 때문이다.


사는 동안의 경험이 영원한 것과 아무 상관이 없다면 인생은 모두 다 허무한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사는 동안의 경험이 영원한 것과 연계된다면 이 땅에서의 경험은 매우 귀중한 것이다.


신앙고백을 한 자들이나 불신자들이나 육체가 죽는 것은 매 한가지 이지만 결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신앙인의 일상이나 사회 활동은 복음과 구원의 문제로 연결되는데서 의미를 찾아야한다.


단순하게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선한 일을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구원과는 관계 없는 일반 은총의 영역으로 한정되는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보여준 치유사역은 일반 은총을 특별 은총의 영역으로 연결시키는 좋은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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