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018. 1. 14. 01:48

사도행전 7장 1-16절 말씀 묵상


1  대제사장이 이르되 이것이 사실이냐
2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대제사장 앞에서 스데반은 자신의 변론을 듣는 이들에게 부형이라는 말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서 같은 유대인으로서  이스라엘 민족 안에서의 동질감을 근거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스데반이 아브라함부터 논술하고 있는 것은 듣는 이들이 동일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스데반이 우리 이방인들에게 이야기를 하였다면 이러한 방식이 아니라 창세기의 아담의 창조로 부터 시작하였을 것이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성경이 말하는 복음을 아브라함 이후로 부터 한정시키면 안된다는 것이다.

스데반은 복음이 아브라함 이후로부터 시작되었음을 말하기 위해서 아브라함부터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새관점주의자들은 스데반의 논술을 근거로하여 복음을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새관점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담의 범죄에 대하여 아브라함과의 약속을 통하여 일단 해결하신 것으로 간주하지만 스데반은 이러한 의도로 아브라함으로부터 진술하고있는 것은 아니다.


3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하나님의 복음은 거룩, 즉 떠남과 분리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지역은 떠났어도 그의 아버지로 인하여 가나안까지는 가지를 못하였다.

신자들은 자신이 속해있는 가족과 친인척, 그리고 학연과 지연등으로 인하여  발목을 잡힐 경우가 종종 있다.

특히 교회는 혈연, 학연, 지연에 의존하지 말아야한다.


4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인도된 것은 아브라함이 주체가 아닌 하나님이 주체가 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상황과 관계없이 무조건 길을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상황 속에서 자연스럽게 인도하신다.

자연법도 하나님의 법이지만 하나님의 특별법은 자연법을 일방적으로 무시하시지는 않으신다.

사회법을 어기면서까지 건축된 S교회의 건물에 대하여 담임목사가 사회법 위에 영적 제사법이 있다고 변명하는 것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자기 속에 갇혀 있는 목회자들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부끄러운 모습이다.

신자들은 자신의 마음으로 자신의 길을 계획하더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은 사회의 수치가 되는 방식으로 인도하시지는 읺으신다.


5  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 만한 땅도 유업으로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그와 그의 후손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하나님의 약속은 논리적으로 타당성이 있다고 설득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불신자들에게 전도할 때 믿음을 논리로 설득할 수는 없는 것이다.

현대문명은 논리를 근거로하는 과학시대이지만, 성경을 과학적인 논리로 접근함으로서 믿음을 산출해 낼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의 영혼과 생명은 그 사람을 해부한다고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방식으로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의 역사는 깊은 밤중이 지난 후에 오는 새벽녘의 빛과 같다.


6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후손이 다른 땅에서 나그네가 되리니 그 땅 사람들이 종으로 삼아 사백 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후손을 바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자리잡게하지 않으시고 애굽에서의 종살이 과정을 거치게 하셨을까?

이는 왜 아담 가운데 인류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바로 에덴에서 인간을 축복하셔서 천국을 만드시지 않으시고 타락의 과정을 통하여 아담의 후손을 애굽의 종과 같은 생활을 하게 하시는지에 대한 질문과 연관성이 있다.

이는 또한 가나안 땅에 자리잡은 이스라엘을 바로 축복하시고서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시키시지 않으시고 바벨론 포로의 과정을 거치면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드셨어야만 하셨는지에 대한 질문과 연결시킬 수 있다.

이 모든 것에 대한 답은 결국 모든 창조 세계를 그리스도 예수께 귀속시키시기 위한 창세 전 하나님의 구속 언약 가운데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7  또 이르시되 종 삼는 나라를 내가 심판하리니 그 후에 그들이 나와서 이 곳에서 나를 섬기리라 하시고

왜 종 삼는 나라를 심판하실까?

이는 타락한 아담의 후손을 종으로 삼았던 사단의 세력에 대한 심판을 예고하셨던 것이다.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많이 있겠지만 인간적인 관점은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관점이다.

애굽의 심판 후에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겼던 것은 궁극적으로 사단을 심판하신 그리스도를 섬기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을 예표하고 있는 것이다.

가나안에서의 실패는, 에덴에서의 실패와 마찬가지로,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인간의 노력으로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오순절 성령의 역사는 에덴에서의 실패와 가나안에서의 실패를 통하여 인간이 성령에 의지하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며, 스데반은 이를 직접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스데반과 같이 모함을 당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톰 라이트는, 유대적 이스라엘이 자신의 힘으로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으며, 예수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공해주신 분이라고 해석하며, 사도행전은 포로에서 해방된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님 나라 운동을 위한 역사였다고 자의적인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이다.



8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그가 이삭을 낳아 여드레 만에 할례를 행하고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우리 열두 조상을 낳으니라

아브라함에게 할례의 언약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인간이 타락의 구렁텅이에서 빠져 나올 수 없음을 보여주심으로서 하나님의 은혜의 징표로 할례를 행하게 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에 참여된 것이며, 오순절 성령의 역사는 이 땅에 은혜에 의한 새창조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이다.

참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성령의 새창조의 산물이며, 톰 라이트가 말하는 유대적 하나님 나라는 오순절 성령의 역사 이전의 이스라엘로서, 단지 하나님 나라를 예표하는 모형일 뿐이며, 실체가 아니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일반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와는 구별되어야한다.

새관점이 중심이 되어 벌이고있는 유대적 하나님 나라 운동은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근거로하는 하나님 나라 복음과는 다른 것이다.

복음은 행동방식에 의하여 규정되는 운동이 아니다.


9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판 이들은 마치 에덴에서 하와를 유혹하여 시험에 들게한 뱀과 같은 존재이다.

육체적 인간으로서의 아브라함 자손은 사단의 종노릇을 할 수 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참된 아브라함의 자손은 유대적 이스라엘이 아니라 믿음을 통하여 참이스라엘되신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이다.


10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그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통치자로 세웠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행적을 통하여 구원자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계신다.


11  그 때에 애굽과 가나안 온 땅에 흉년이 들어 큰 환난이 있을새 우리 조상들이 양식이 없는지라

하나님께서는 환란 가운데 길을 인도하신다.

인간은 완악한 마음으로 인하여 일단 육체적 충족이 있으면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가 어렵다.

성도의 삶 가운데 걸어야만 하는 수동적인 길은 종종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여야만 하며, 결코 상황에 대한 부정적 사고에 물드는 냉소주의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12  야곱이 애굽에 곡식 있다는 말을 듣고 먼저 우리 조상들을 보내고
13  또 재차 보내매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알려지게 되고 또 요셉의 친족이 바로에게 드러나게 되니라

하나님 안에 있는 자는 결국 하나님의 계획하심 가운데 인도를 받는다.

지혜자는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능동적으로 다가갈 필요가 있다.


14  요셉이 사람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 야곱과 온 친족 일흔다섯 사람을 청하였더니

공동체적 구원은 한 개인을 시작으로 이루어진다.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공동체적인 타락을 경험하였듯이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라는 공동체적 구원이 이루어진다.

신앙 생활은 항상 자신에 의하여 미치게 될 공동체적 영향력을 생각하여야만 한다.


15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 자기와 우리 조상들이 거기서 죽고
16  세겜으로 옮겨져 아브라함이 세겜 하몰의 자손에게서 은으로 값 주고 산 무덤에 장사되니라

인간은 결국에는 세상에서 죽지만 세상에서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결국 하나님의 자손은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야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원한 가나안 땅인 새 하늘과 새 땅으로 가게될 것을 말해주고있다.


(나가는 말)

스데반은 변론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의 무궁하심을 드러낸다.

억울함에 대한 정면 공격은 자신을 변론하기 위한 것이지만 스데반은 자신을 변론하기 위한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

자신을 위한 변론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이들은 결과적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종종 페북에서 자신을 변론하기에 바쁜 이들을 볼 때 오히려 그들의 미숙함을 보게된다.

신자는 대화 중심을 오직 하나님의 영광에 맞출 때, 스데반의 경우와 같이, 자신의 진실성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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