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2018. 5. 10. 23:17

신명기 4장 44절- 5장 1-10절 말씀 묵상

44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선포한 율법은 이러하니라

출애굽 세대에게 시내산에서 선포된 율법이 주로 출애굽이라는 사건을 중심으로 선포되었다면, 가나안 입성 직전에 모압의 땅에서 선포된 율법은 가나안에서의 삶을 염구에 두고 선포되는 하나님의 율법이다.


새관점에서는 모압 땅에서 선포된 율법으로서의 모세 언약이 아브라함 언약의 실현이라고 보고있다.

모압 땅에서 선포된 모세 율법이 아브라함 언약의 실현이라면, 아브라함 언약은 모세 언약으로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모세가 모압 땅에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선포하는 율법은 가나안 땅에서 은혜의 삶을 누리라고 주었다고 보기에는, 가나안에서의 삶이 축복과 저주의 갈림길을 결정하는 선택의 장소임을 말하고있다.

모세가 선포하는 십계명은, 은혜를 입은 백성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 주어졌다기보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였을 때 그들이 죄인임을 증명해주는 기준으로 제시되었다고 볼 수 있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이 구속받은 하나님 나라라고한다면, 성경의 중심은 가나안의 이스라엘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아브라함 언약이 모세 언약으로부터 시작되어 새언약으로 이어지면서 완성되는 과정을 생략하는 것이다.

모세가 모압 땅에서 선포하는 십계명을 비롯한 하나님의 율법은 가나안 땅이 최종적 정착지가 될 수 없음을 내포하고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서 범죄하게되면, 이방 나라에 포로로 끌려가게 될 것을 말하고 있다.

이는 가나안 땅에 축복과 저주의 갈림길임을 말하는 것으로서, 모세 언약이 은혜 언약이 아니라 행위 언약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개신교가, 몸통이되는 유대 이스라엘을 생략하고 머리와 꼬리만을 강조한다고 주장하지만, 새관점은 몸통인 그리스도의 새언약을 꼬리로 만들어 버리고서 이러한 주장을 하는 것이다.

모압 땅에서 선포되는 모세 언약은,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이 누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은혜의 선포가 아니라, 유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기 위한 조건에 부합되는 지는 보여주기 위한 기준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45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나온 후에 모세가 증언과 규례와 법도를 선포하였으니

모세의 역할은 율법으로 대변된다.

율법의 궁극적 목적은 죄인의 죄를 드러냄으로서 죄인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영원한 안식처인 참된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시기에, 모세의 역할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까지 인도하지 않고, 그들을 가나안 앞까지만 인도한다.

모압 땅은 가나안 땅이 아니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가나안 입성을 앞둔 모압 땅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인 십계명과 율법을, 자연법이라는 방식을 통하여 전달받고 있다.

모세가 선포하는 증언과 규례와 법도는 모든 이들 앞에 놓여있다. 


46  요단 동쪽 벳브올 맞은편 골짜기에서 그리하였더라 이 땅은 헤스본에 사는 아모리 족속의 왕 시혼에게 속하였더니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나온 후에 그를 쳐서 멸하고

무장도 되어있지 않았고 군사도 정비가 되어있지 않았지만,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이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주권하에 있음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직 여호와 하나님 만을 섬기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강권적 역사하심이다.

성도들도 삶 가운데서 이러한 하나님의 강권적 역사하심이 있다.

신자가 하나님 앞에 서기까지는, 비록 은혜 받을 자격이 없는 자였지만, 하나님의 가즉한 은혜가 함께 했음을 고백할 수 밖에 없다.



47  그 땅을 기업으로 얻었고 또 바산 왕 옥의 땅을 얻었으니 그 두 사람은 아모리 족속의 왕으로서 요단 이쪽 해 돋는 쪽에 살았으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고, 아브라함이 죄 가운데 경험한 아모리 족속의 땅은, 성도가 약속 가운데 경험하는 현재의 삶의 환경과 유사하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살이 한 기간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가득하기까지 였다.

아브라함은 아모리 족속의 마무레 상수리 나무 수풀 근처에서 거하면서 그들의 죄악을 봤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들 가운데 이방인으로 거하였지만, 자신의 자손이 그들을 진멸하고 그 땅을 차지한 것이다.

이는 현재를 살아가는 성도가 비록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지만, 이 땅에 죄악이 가득할 때 하나님의 심판하심으로 이 땅을 새 옷과 같이 변화시켜서 성도들에게 주실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48  그 얻은 땅은 아르논 골짜기 가장자리의 아로엘에서부터 시온 산 곧 헤르몬 산까지요
49  요단 이쪽 곧 그 동쪽 온 아라바니 비스가 기슭 아래 아라바의 바다까지이니라


영원한 가나안을 바라보는 성도는 비록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제한된 삶의 환경 가운데 있지만, 장차 임할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는 제한된 환경을 넘어서는 곳이다.



1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아 오늘 내가 너희의 귀에 말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그것을 배우며 지켜 행하라
2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 산에서 우리와 언약을 세우셨나니
3  이 언약은 여호와께서 우리 조상들과 세우신 것이 아니요 오늘 여기 살아 있는 우리 곧 우리와 세우신 것이라

십계명은 모세 언약의 근간이 된다.

모압에서의 모세 언약은 시내산 언약을 갱신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을 위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 언약을 통하여 이루게될 하나님의 목적을 수행하는 과정 가운데 있다.

십계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머물기 위한 언약이 아니다.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직 아담의 범죄에서 해결받지 못한 백성이기에, 그들에게 주어지는 십계명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의 근거가 된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가 죄로 규정되는 비참한 경험을 할 뿐이다.



4  여호와께서 산 위 불 가운데에서 너희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매

5  그 때에 너희가 불을 두려워하여 산에 오르지 못하므로 내가 여호와와 너희 중간에 서서 여호와의 말씀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6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라

시내산에서 불 가운데 하신 말씀은, 처음 아담에게 하신 선악과 금령의 재연이었다.

에덴에서 마땅히 지켜져야했었지만,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손상된 법을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 번 더 반복하신다.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십계명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 안에 세겨졌던 법을 구체화하신 것이다.

신적 기원을 갖는데서 인간의 마음에 새겨진 자연법과 십계명은 동일한 성격을 가지고있다.

십계명은 자연법을 실체화한 법이며, 율법은 자연법과 십계명을 구체화한 법이다.

인간의 삶 가운데 주어진 자연법과 율법은, 궁극적으로 죄를 드러냄으로서,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위한 기능을 하고있다.

새관점은 율법 자체가 은혜 안에 머물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기에,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그리스도가 없이도 그들은 은혜 안에 머무는 구원받은 백성이 되는 것이다.

율법을 선포한 모세가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데리고 가지 못하였듯이, 율법 자체는 죄인을 영원한 안식처인 영적인 가나안으로 인도힐 수가 없다.


7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

이는 첫번째 계명으로서 가장 우선되는 명령이다.

인류의 역사는 신을 중심으로 이루어져갔다.

인간의 삶의 모든 영역, 즉 시간과 공간의 모든 영역에서 신과 관계없이 살아온 민족이나 부족은 없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신을 섬길 수 밖에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에대하여 분명한 말씀을 하신다.

하지만 인간은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라는 사실로 인하여, 이미 다른 신에게 종속되어있는 존재이기에, 자신의 의지로 이를 실행 할 능력이 없다.


8  너는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밑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형상을 만드는 행위는, 지배하여야할 대상으로부터 지배를 받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이미 지배를 받는 상태에 있기 때문에, 이를 형상화하여 표현하는 것이다.

현대인들도 마찬가지다.

현대인들은 상황이라는 무형의 형상에 종속되어있다.

현대인들은 상황을 만들어감으로서, 그 가운데 자신을 완성시키려한다.

하나님은 상황을 넘어서시는 분이시며, 진리 또한 상황을 넘어서는 것이다.

인간은 상황에 종속되어있다.

성도는 상황에 대한 종속 이전에 말씀을 묵상하며, 상황 가운데, 혹은 상황 위에서 역사하시고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인식하여야만 할것이다.


9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10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는 것은 우선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것이다.

아담이 하나님을 사랑하였다면, 인류는 영원한 은혜 가운데 머물렀을 것이다.

하지만 아담은 범죄함으로서, 하나님을 미워하는 길을 열어주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영원히 저주하지 않으시고, 죄 가운데 구원하시고자, 구속주를 이 땅에 보내셨다.


하나님은 영원한 저주 가운데 있어야 할 죄인을 구원하시는 사랑이시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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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2018. 5. 9. 22:57

신명기 4장 32-43절 말씀 묵상


32  네가 있기 전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에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지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이런 큰 일이 있었느냐 이런 일을 들은 적이 있었느냐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광야의 여정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아담이 타락한 이후에 처음있는 구속사의 시작이다.

출애굽 과정 자체가 구속 사건이었으면, 이후의 일들은 출애굽을 완성하기 위한 역사가 되어야한다.

하지만 출애굽과 광야의 여정은 길고 긴 구속 역사의 서막일 뿐이지 구속사의 결과물은 아니다.

새관점에서는 이러한 큰 일 자체를 구속의 사건으로 보면서, 성경을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구속의 완성을 위한 이야기라는 관점에서 풀어나간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출애굽이 구속 사건 자체라면, 아담의 범죄와 관련된 타락에 대한 이해가 없으며, 그리스도 또한 둘째 아담으로서의 역할이 없는 부차적인 인물일 뿐이다.

새관점이 보는 성경의 중심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출애굽한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일어난 큰 일은 아담의 타락과 관련된 내용이 없기에, 이러한 일이 아담으로 인한 타락의 해결책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진정으로 큰 일은 애굽을 물리치고 시내산에 강림하시고 각가지 이적을 행사하신 것보다도,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구속의 역사이다.

새관점에서는 출애굽을 이스라엘의 구속 사건으로 간주하면서,이스라엘은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이며, 유대인들은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고 주장하지만, 출애굽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예비하는 모형일 뿐이다.

이스라엘은 단지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다.

하나님 나라를 예표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하심으로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다.

은혜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의 구속이다.

하나님의 큰 일을 경험하는 축복을 누린다는 것은 구속을 위한 것이지만,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준비가 되어있지 않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별한 상황을 설명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구속을 위한 일이 시작되었음을 말하는 것으로서, 구속이 성취되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출애굽의 과정은 목적을 위한 과정이었지, 출애굽을 하였다고 구속이라는 목적이 달성된 것은 아니다.

톰 라이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를 건너는 출애굽 자체로 인해서 구원받은 민족으로 여기고서, 모세 율법은 구원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구원의 은혜 안에 머물기 위해서 주어진 것으로 본다.

모세의 시내산 언약은 행위 언약으로서 출애굽 이후에 주어진 것이다.

홍해를 건넌 사건이 구원받은 사건이면, 더 이상 행위 언약이 주어지면 안되기에, 톰 라이트는 행위 언약으로서의 시내산 언약을 인정하지 않는다.

모세는 행위 언약의 속성을 지닌, 시내산 언약과 모압에서의 언약을 강론함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받기 위한 자리에 초대된 것으로 여기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순종과 불순종에 대하여 선포하는 것이지, 구원에 머물라고 강론하는 것은 아니었다.


모세는 어디에도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과 더불어 이미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고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33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느냐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다는 것은 아담의 후손에게는 특별한 은혜가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범죄한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기에, 하나님의 임재는 바로 심판을 의미하였다.

인간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살아있음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노의 대상에서 구속의 대상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34  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낸 일이 있느냐 이는 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의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라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큰 일을 실감하기 위해서는 어려움이 있는 상황 가운데 선택함을 받아야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특별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어려움 가운데 택함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이다.

이스라엘은 택함을 받기 위해서 애굽의 종으로 있었다.

만약에 핍박받는 상태가 아닌 풍요한 상태에서 택함을 받았다면, 이들에게 하나님은 별로 관심의 대상이 되실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에게 다가오시기 위해서, 삶에 어려운 환경을 허락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도 이스라엘이 로마의 압제하에 있었기에 호소력이 있었다.

어려움은 하나님께서 다가오시기 위한 적절한 환경이기도하지만, 실제 인간의 상태가 종의 상태임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

인간은 어려움을 통하여 자신의 상태가 어떠한 상태인지를 깨닫고서 진실되게 하나님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손길을 펴신다.


35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모세가 이를 설명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은 이제껏 본능적으로 섬겼던 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타락한 인간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는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최우선적으로, 인간이 섬겨야할 신은 오직 한분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신다.

하지만 인간이 여호와 하나님을 거부하는 정도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본질적인 것이다.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을 설명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몰라서 안믿은 것이 아니라, 알아도 믿지 않을 것을 알고서 설명하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이러한 백성을 구원받은 백성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받은 백성이라고 말하기에는, 이들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거의 정립되어있지도 않았다.

모세는 처음부터 철저하게 하나님을 설명하고있지만, 인간은 결코 스스로 자원해서 하나님을 알려고하지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것은 본능에 의한 것이었지 결코 하나님에 대한 제대로된 인식을 근거로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구원 사역을 시작하셨지만, 정작 기도 응답을 받은 백성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참여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인간이 본능적으로 생각하는 하나님과 실제 하나님과는 차이가 많다.

인간이 본능적으로 찾는 신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다.

인간의 본능적 종교심은 오히려 이방신의 모습에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종교심에서 나온 교회 생활도 자칫 진정한 하나님과는 다른 신을 섬기는 생활이 될 수 있다.

대부분의 종교심은 결국 우상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는데, 이스라엘의 역사가 이를 증명해주고있다.


36  여호와께서 너를 교훈하시려고 하늘에서부터 그의 음성을 네게 듣게 하시며 땅에서는 그의 큰 불을 네게 보이시고 네가 불 가운데서 나오는 그의 말씀을 듣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겠다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토록 간절히 원하였던 하나님을 경험하였는데도 하나님을 외면하였다.

이는 인간의 뜻, 즉 욕심이 하나님의 뜻과 부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께 나아갈 때 자신의 욕심이나,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서 나아가면 안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으로 믿을 만한 분이시기에 믿을 수는 없는 것이다.

광야의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눈으로 직접보고 듣고 하였어도, 인간이 하나님을 뵐 준비가 되어있지 않음을 보여줄 뿐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을 뵐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에 자신을 직접 보여주시지 않는다.

이는 모세도 마찬가지이다.


37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을 사랑하신 고로 그 후손인 너를 택하시고 큰 권능으로 친히 인도하여 애굽에서 나오게 하시며

인간은 공동체적 관계 가운데 존재할 수 있다.

인간의 존재를 구성하는 공동체는 수직적 공동체와 수평적 공동체가 있다.

인간은 사회생활을 통하여 수평적 공동체를 형성해나아가지만, 이는 수직적 공동체와 긴밀히 연결되어있다.

인간은 누구나 조상이 있으며, 조상의 영향하에 존재한다.

또한 자신의 삶이 자손에게 영향을 미치기에 수직적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에서는 수직적 공동체와 수평적 공동체가 상호 어떠한 관계를 이루어가면서 영향을 미치고있는가를 보여주고있다.


38  너보다 강대한 여러 민족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 너를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네게 기업으로 주려 하심이 오늘과 같으니라

39  그런즉 너는 오늘 위로 하늘에나 아래로 땅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기업으로 주시려고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실 구원의 안식을 예표하기 위한 것이다.

영원한 안식으로의 초대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으로만 가능하다.

인간이 사는 삶은 궁극적으로 구원의 안식을 향하여야한다.

인생에게 주어진 삶의 의미와 목표는 오직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참여하는 것이다.

인간이 아무 생각이 없이 습관적으로 자기 욕심을 위해서 사는 것은, 실은 아무 욕심과 목적이 없는 삶이 아니라, 자신의 뜻이라는 육적인 욕심이 깔려있는 것이다.

인생의 삶이 진정으로 의미 있는 삶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육적인 욕심을 그리스도께 종속시킴으로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참여하는 것이며, 인생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인생임을 깨닫고서, 자기 비하나 낮은 자존감으로 인한 파멸의 길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과정은 결코 쉽지도 않으며, 무기력한 삶을 살아서도 안된다.

인생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을 존재이다.

인생의 목적이 집을 장만하는 것이나, 자녀의 성공을 위한 것이나, 좋은 차를 사는 것이나, 비싼 음식을 맛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육적인 욕심을 하나님께 복종 시켜서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림으로서 하나님께서 주실 영원한 기업을 받는 자가 되어야할 것이다.


40  오늘 내가 네게 명령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받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한 없이 오래 살리라

축복을 위해서 요구되는 외적인 행위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는 한도로 제한되어있다.

그리스도의 영원한 안식에 이르기 위해서 행위가 요구된다면, 인간이 이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안식은 인간의 행위를 근거로하지 않기에 더 이상의 조건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구원을 위해서 믿음에 행위를 더하는 이들이나, 혹은 오직 충성을 말하는 이들은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관점에서 주장하는 것이지만, 이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불완전한 사역으로 만들뿐이다.


41  그 때에 모세가 요단 이쪽 해 돋는 쪽에서 세 성읍을 구별하였으니
42  이는 과거에 원한이 없이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그 곳으로 도피하게 하기 위함이며 그 중 한 성읍으로 도피한 자가 그의 생명을 보전하게 하기 위함이라
43  하나는 광야 평원에 있는 베셀이라 르우벤 지파를 위한 것이요 하나는 길르앗 라못이라 갓 지파를 위한 것이요 하나는 바산 골란이라 므낫세 지파를 위한 것이었더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도와 관계없는 살인은 보호받아야한다.

아담의 후손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범죄한 이들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는 과정은 궁극적으로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영원한 도피성을 마련하시기 위함이었다.

도피성은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역할을 한다.

인간은 죄인이지만, 저지른 죄악들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사단의 종노릇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아담이 타락한 이후에는 인간에게있는 의지는 노예 의지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이들이, 자신이 하는 일이 어떠한 일인지 모르고 한다고 말씀하신다.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은, 자신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면서,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저지르는 일들이다.

인간의 죄악은 노예 의지에서 나온 죄악들이기에, 도피성이 되신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으로 말미암아 죄악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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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2018. 5. 8. 22:29

신명기 4장 15-31절 말씀 묵상

15  여호와께서 호렙 산 불길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어떤 형상도 보지 못하였은즉 너희는 깊이 삼가라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한계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 제한되어있다.

호렙산에 불길 가운데 임재하신 하나님을 알 수가 없으며, 오직 불길 가운데 말씀하시는 하나님만을 경험할 수 있었다.

불길은 눈에는 보이지만, 하나님의 형상이 손상되고 왜곡된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실재의 모습을 담아낼 능력이 없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지만, 내적인 거룩한 능력이 상실됨으로서, 남아있는 외적인 형태의 왜곡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인간의 눈은 아담의 범죄와 더불어 보는 방식이 달라졌다.

아담은 범죄하기 전에 자신들이 벗은 줄을 몰랐다.

이는 범죄하기 전에 눈이 어두웠다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거룩한 본질이 상실됨으로 인해서 남아있는 외적인 형태가 수치로 드러날 수 밖에 없게된 것이다.

인간은 내적인 거룩한 본질을 보지 못함으로 인해서, 남아있는 외적인 형상만을 추구할 수 밖에 없게된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은 하나님의 내적인 속성를 입어서, 하나님을 내적으로 알고, 하나님은 물론 뱀하고도 내적인 교통을 할 수 있었으나, 일단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면서, 내적인 본질의 상실과 외적인 껍데기만 보이는 저주를 받은 것이다.

내적인 시야가 상실된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을 의지하거나, 하나님과 교통도 불가능하기에, 무엇인가 보이는 외적인 것으로만 자신의 필요를 채울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외적인 형상에 대한 추구는 부패한 마음이 원하는 바를 충족시키기 위한 방법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도성의 모형인 가나안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곳이되어야함에도, 이미 아담 안에서 손상된 인간은 거룩에 참여할 수 없는 존재임을 드러낼 뿐이다.

16  그리하여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해 어떤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지 말라 남자의 형상이든지, 여자의 형상이든지,

아담의 불순종과 더불어 눈이 밝아진 인간이 보는 인간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상실된 왜곡된 모습일 뿐이다.

불순종한 인간의 형상은 불순종과 타락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인간은 의지할 대상이 아니다.

아담의 타락은 왕에서 종으로의 신분의 변화를 가져왔다.

그리스도의 모형인 아담은 에덴에서 그리스도의 삼중직, 즉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직책을 가지고있었다.

타락한 아담은 더 이상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사단의 종노릇하는 종의 형상으로 변질된 것이다.

불안한 인간은 어떠한 형태로든지간에 의지할 대상을 만들게 되어있지만, 인간이 만든 인간의 형상은 더 이상 하나님의 왕권을 표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종의 모양일 뿐이다.

17  땅 위에 있는 어떤 짐승의 형상이든지, 하늘을 나는 날개 가진 어떤 새의 형상이든지,

18  땅 위에 기는 어떤 곤충의 형상이든지,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어족의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

짐승은 종종 힘과 강인함을 상징한다.

각종 짐승들은 저마다의 특징적 강점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이러한 짐승들을 자신의 상징으로 표현함으로서 자신의 강인함을 나타내고자한다.

하지만 타락 이전에는 아담이 이러한 짐승들의 이름을 지음으로서 이러한 짐승들이 인간의 권한에 종속되었던 존재들임을 보여주고있다.

또한 자신을 위해서 이러한 형상을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왜곡시키고있다.

하나님의 창조 원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인간에게만 제한 시켜서, 인간으로하여금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하셨다.

인간이 자신을 위해서 각종 짐승이나 곤충의 형상을 만드는 행위는, 자신의 형상을 동물이나 곤충과 공유하는 행위로서, 원래 거룩하게 창조된 하나님의 형상이 담겨있는 인간을, 동물에 귀속되도록 하는 행위이다.

창세기 1장 28절에서 다스림의 대상에 포함된 짐승과, 창세기 3장 1절의 들짐승은 동일한 어원을 가지고있음을 봄으로서, 뱀은 아담이  다스려야할 대상이었지만, 유혹을 당하여 다스림을 받게 된 것이다.

뱀은 아담으로부터 다스림을 받아야했던 들짐승 가운데 가장 간교한 자였지만, 타락 이후에 이들의 형상을 만드는 행위는, 더 이상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사단을 섬기겠다는 인간의 의사표시인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형상이 담겨있던 인간을 동물이나 곤충에 귀속시키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통치 명령(창 1:28)을 통해서 각종 짐승을 다스리도록 하셨다.

이는 하나님의 왕권의 표현이었다.

가나안은 하나님의 왕권이 표현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는 곳이기에, 짐승의 형상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손상시키는 행위가 허락되지 않는다.

종종 창세기 1장 28절을 문화 명령으로 해석하기도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아담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통치권에 대한 의미를 찾을 수가 없다.

창세기 1장 28절을 문화 명령으로 해석하게되면, 신명기에서 말씀하시는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말씀이 아담에게 주어졌던 명령을 상기시키고 있음을 발견 할 수가 없다.

짐승을 형상을 만들고 이를 숭배하는 것은, 통치하여야할 대상으로부터 통치를 받는 어리석은 행위이다

아담의 타락은 다스려야할 대상으로부터 다스림을 받게된 결과를 가져왔으며, 이는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하여 증명되고있다.

각종 형상들을 만드는 행위는, 자신이 이러한 형상들에 종속되어있음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 안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왕권을 짐승에게 내어주고, 짐승에게 종속되는 행위로서, 하나님께 모욕을 주는 행위이다.

미션 스쿨에서조차도 짐승을 학교의 싱징으로 표현하는 행위는, 학교가 미션스쿨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19  또 그리하여 네가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해와 달과 별들, 하늘 위의 모든 천체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천하 만민을 위하여 배정하신 것을 보고 미혹하여 그것에 경배하며 섬기지 말라

일월성신을 섬기는 행위는 신앙의 본질을 하나님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바꾸는 행위이다.

하나님 중심의 신앙은 인간의 존재에 관한 것이라면, 사람 중심의 신앙은 인간의 외적인 필요를 채우는 현상적인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일월성신을 섬기면서, 하나님의 성전을 인간의 필요를 채워주는 곳으로 바꾸어버렸다.

이는 하나님과 우상을 동시에 섬기는 행위였다.

성전에서 인간의 필요가 하나님으로만은 부족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인간은 성전을 자신들의 필요를 채우는 장소로 삼으려고한다.

성전은 존재론적인 문제를 다루는 곳이지만, 인간은 이를 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곳으로 바꾸어버렸다.

성전은 인간의 필요를 채워주는 곳이 아니다.

윌로우크릭 교회를 비롯하여, 목적이 이끄는 삶의 형태로, 한때 유행하였던 많은 비지니스 유형의 교회들이, 인간의 필요를 채워주는 방향으로 초점을 맞추어 운영되기도 하였지만, 이러한 교회들은 거의 다 실패를 하였던 것을 본다.

타락한 인간은 유물론적 사고를 가짐으로서, 모든 대상을 실용적 가치의 관점에서 판단하고 접근하려고한다.

교회는 교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곳으로 변질되어가고있다.

성전에서 일월성전을 섬기는 행위나 교회에서 주로 세상사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것은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에서 주로 세상사가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교회의 본래의 의미와 기능이 변질되고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일월성신에 묶여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행위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거부하는 행위로서, 교회에서 세상의 필요를 채우려는 교인들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보다는 자신이 주체가 되어 자아를 완성시키려고한다.

교회는 성전과 마찬가지로 존재론적인 문제를 다루는 곳이 되어야하기에, 교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외적인 필요를 채우려고해서는 안된다.


20  여호와께서 너희를 택하시고 너희를 쇠 풀무불 곧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사 자기 기업의 백성을 삼으신 것이 오늘과 같아도

선택받은 인간에게는 오직 순종만이 요구된다.

선택받은 자는 선택하신 분과 동일한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를 위해 선택받은 자는 선택하신 분의 요구에 순응할 의무가 있다.

선택받은 자에게 요구되는 순종은 선택하신 분의 은혜를 누리기 위한 마땅한 조건이다.

순종이 없이는 은혜를 누릴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순종은, 하나님께서 주시고자하는 은혜의 선물을 누리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이다.

타락한 인간은 이러한 하나님의 깊으신 배려와 사랑조차도 누릴 수 있는 능력조차없는 구제불능의 인간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사는 이러한 구제불능의 인간에 대한 구속사이다.

21  여호와께서 너희로 말미암아 내게 진노하사 내게 요단을 건너지 못하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그 아름다운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리라고 맹세하셨은즉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의 일차적인 원인은 백성들의 불순종으로 인한 것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면, 모세는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

가나안은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다.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는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기에, 모세는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이 아니었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데리고 들어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22  나는 이 땅에서 죽고 요단을 건너지 못하려니와 너희는 건너가서 그 아름다운 땅을 얻으리니

모세의 역할은 율법의 역할에 유형적으로 대비시킬 수 있다.

율법의 역할은 죄인의 죄를 드러냄으로서, 죄인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교사로서의 역할이다.

모세 언약으로 표현되는 율법은 새언약의 주체이신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만 그 기능을 하는 것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으로 입성할 수 있도록, 가나안 입성 직전에 그 역할을 다함으로서, 율법의 역할과 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사역에 실패한 것은 아니다.

율법은 그 역할을 다함으로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되었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앞에까지 인도한 모세는 여호수아가 모세의 역할을 이어 받음으로써, 모세 자신의 역할을 완성시킨 것이다.


23  너희는 스스로 삼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을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금하신 어떤 형상의 우상도 조각하지 말라

언약과 우상 숭배는 밀접하게 대립되어있다.

하나님의 언약을 깨뜨리는 방법은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다.

언약은 무엇보다도 우상 숭배에 대한 경계를 최우선으로 하고있다.

우상 숭배는 하나님의 언약을 깨뜨리는 것이기에, 모세 언약은 행위를 요구하는 행위 언약의 속성을 가지고있다.

우상을 조각하는 것은 우상을 만드는 행위로서 하나님을 거부하는 행위이기에, 하나님을 거부하는 불순종의 표현이다.

모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하는 우상 숭배하는 자들이기에, 그리스도없이는 하나님의 행위 언약의 진노를  피할 길이 없다.


24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질투하시는 하나님의 다른 표현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율법을 통한 요구는, 메마른 이분적적인 상벌이 아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상과 벌은, 죄성을 가진 인간의 메마른 표현이다.

인간은 죄인이기에, 하나님을 본능적으로 두려워하지만,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있다.

하지만 끝까지 하나님을 거부하는 이에게는 행위 언약에 근거한 심판이 있을 뿐이다.


25  네가 그 땅에서 아들을 낳고 손자를 얻으며 오래 살 때에 만일 스스로 부패하여 무슨 형상의 우상이든지 조각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함으로 그의 노를 일으키면

26  내가 오늘 천지를 불러 증거를 삼노니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는 땅에서 속히 망할 것이라 너희가 거기서 너희의 날이 길지 못하고 전멸될 것이니라

미리 경고를 하였는데도 그렇게 한다면, 책임은 전적으로 악을 행한 자에게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어떠할지를 미리 아시고 경고하시지만, 책임은 전적으로 이스라엘에게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경고하시고 벌하시는 것은,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시지 않으신다면, 경고하실 필요가 없으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종국이 어떠할 지를 아신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아니라 이미 사단의 종노릇하는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 안에 머물기 위해서 율법을 받았다는 새관점주의자들의 주장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담의 후손으로서 타락한 죄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무시하는 개념이다.


27  여호와께서 너희를 여러 민족 중에 흩으실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쫓아 보내실 그 여러 민족 중에 너희의 남은 수가 많지 못할 것이며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기에 어쩔 수 없는 결과이지만,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인간 스스로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인류의 마지막도 이스라엘과 유사할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유토피아적인 나라를 건설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지만, 이제 더 이상 유토피아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다.

인간이 스스로 잘못된 길로 걸어가고있다는 것을 인간 스스로 잘 알고 있다.

인간의 종말의 처지가 이스라엘과 유사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자신들이 스스로 잘할 수 있었다고 하나님의 심판에 항의를 할 것이다.

마지막의 재앙은 인간 스스로가 자초한 인재가 될 것이다.

마지막에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고 항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28  너희는 거기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바 보지도 못하며 듣지도 못하며 먹지도 못하며 냄새도 맡지 못하는 목석의 신들을 섬기리라

이는 아직 범죄하지도 않은 이들을 이미 범죄한 이들로 여기는 말씀이다.

이는 이미 인간이 아담 안에서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임을 보여주시는 말씀이다.

인간의 범죄 행위는 인간이 죄인임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의 범죄행위 이전에 인간의 존재론적인 죄성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다.

기독교는 표면적인 행위론적인 문제보다도 더 나아가 근본적인  존재론적인 문제에 대한 것이다.

바리세인의 문제는 죄를 존재론적이 아닌 행위론적인 관점에서 보았기 때문에 문제의 심각함이 있었던 것이다.

기독교를 윤리적으로 접근할 때는 항상 존재론적인 접근이 선행 되어야 할 것이다.


29  그러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그를 찾으면 만나리라

30  이 모든 일이 네게 임하여 환난을 당하다가 끝날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그의 말씀을 청종하리니

31  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이라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

인간은 죄가 가득 드러나기 전까지는 자신의 죄성을 인정하려하지 않기에, 죄로 인하여 극단적인 불행의 상태가 되어야만 회개하고 돌아온다.

죄가 가득 드러났을 때 길을 열어주시는 것은, 인간의 강퍅한 마음을 아시고,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다.

인간은 죄를 지어야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죄인이기에 죄를 짓는다는 사실을 아신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단계에서 기다리시는 것은, 죄의 행위 이전에 본질적 죄에 대한 해결을 위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생에서의 실패는 하나님을 깊이 만날 수 있는 기회이기도하다.

posted by Wonho Kim
:
신명기 2018. 5. 7. 22:44

신명기 4장 1-14절 말씀 묵상

1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게 되리라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준행하라고 들려주는 규례와 법도는, 가나안에서의 생존과 존속을 위한 조건적 성격을 가지고있다.

하나님의 법도와 규례를 지키는 것은 자연법적 생존 원리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건들이다.

이는 에덴에서 아담이 생존하기 위해서 제시된 명령과 유사한 형태를 띄우고 있다.

아담과 이스라엘은 동일하게 하나님과의 행위 언약 관계에 있으면서도, 행위 언약을 맺은 시기가 아담은 범죄하기 이전이었지만, 이스라엘은 이미 범죄한 아담의 후손이었다는 점에서, 구원을 위한 은혜 언약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행위 언약으로서의 규례와 법도는 자연법의 모체가 되기에, 일반 은총의 영역과 특별 은총의 영역이 혼재되어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모세 언약은, 본질적으로는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교사로서의 은혜 언약의 속성을 지니고있지만, 가나안에서의 생존을 위한 조건적 언약의 성격을 가지고 있음으로 인해서, 행위 언약의 속성을 지니고있다고 할 수 있다.


2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

타락하기 전의 하와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였는데,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타락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였을 뿐만 아니라, 상황에 대한 해석도 자기 중심적으로 한다.

하나님을 말씀을 가감하는 것은 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방식에서 나타난다.

개혁주의에서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는데 반하여,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에서는 성경을, 하나님에 관하여 인간이 기록한 책으로 보고있다.

자유주의 신학은, 타락한 인간이 성경을 이해하는데 한계가 있음으로 인하여, 성경은 인간적으로 해석하면서 나타나게되었으며,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는 성경을 “역사적 예수 탐구”라는 방식에 비추어 새롭게 해석함으로서, 옛 뱀의 유혹을 재연시키고 있다.

인간은 이미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

죄인인 인간은 하나님을 볼 수가 없고, 또한 시내산 앞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하나님을 대면할 수가 없기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데 어려움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인간은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오순절 성령이 임하시고서, 비로소 사도들이 복음을 깨닫고서 그리스도를 전파할 수 있었던 것과 같이,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가 없다.


3  여호와께서 바알브올의 일로 말미암아 행하신 바를 너희가 눈으로 보았거니와 바알브올을 따른 모든 사람을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에서 멸망시키셨으되

불순종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보다는 대부분 유혹에 의한 분별력 상실로 말미암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압의 여인들에 이끌려 그들의 신에 분향하게된다.

모세가 언급하는 불순종은 단순히 말을 듣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신을 좇는 것을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되는 순종은, 에덴에서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순종의 재연republication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에게 주어진 권위는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님의 권위까지 올라갈 수 있기에, 권위에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의미가 담겨있지만, 순종을 위해서는 분별의 지혜가 필요하다.

권위자의 명령은 하나님의 명령의 모형과 그림자로서의 성격도 가지고있고, 하나님의 권위를 입은 모세가 자신의 역할을 분산시켜 위임시킨 것과 같이, 하나님의 권위를 대변하기도한다.

순종은 단순히 권위자의 말을 듣는 것에서부터 하나님을 따르는 것까지 광범위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권위자에게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의미가 부여되기도 하지만, 타락한 시대에  이를 동일하게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따르기 마련이다.

목회자는 성도들에게 순종을 요구할 때, 자기의 말에 순종하라고 요구해서는 안된다.

목회자의 요구가 하나님의 뜻과 상반될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자기에게 순종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자칫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도 자기를 섬길 것을 요구하는 무서운 말이 될 수도 있다.

권위에 대한 순종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동일한 성격으로 규정하고 이를 남용해서는 안된다.

민수기 25장에서 보여주는 이스라엘의 바알브올을 섬기는 것은, 행위 언약을 어긴다는 관점에서, 성격상 에덴에서의 유혹에 의한 반역과 같은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4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붙어 떠나지 않은 너희는 오늘까지 다 생존하였느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것이 생존의 조건이다.

너무나도 보편화되어있는, 하나님을 배제하는 현대인들의 삶은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님을 의식할 필요가 있다.

모든 이들에게 베푸시는 일반 은혜는 구원의 특별 은혜를 위한 한시적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외면한다고, 생존의 조건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관한 것은 아니다.

5  내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규례와 법도를 너희에게 가르쳤나니 이는 너희가 들어가서 기업으로 차지할 땅에서 그대로 행하게 하려 함인즉

가나안에서의 삶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생존의 조건이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규례와 법도를 지켜야한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타락한 아담의 후손인 인간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킬 능력이 없음을 증명해주고있을 뿐이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러한 규례와 법도를 지킬 능력이 있었으며, 실제로 이러한 규례와 법도를 매우 잘 지키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는, 인간이 타락한 아담의 자손이기에, 전적으로 부패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톰 라이트뿐만이 아니라 많은 현대 신학자들이,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기독교를 윤리적 종교로 만들려고 한다.

윤리적 기독교는 다시 가나안의 이스라엘로 돌아가려는 속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는 기독교를 유대교로 편입시키려는 유대인들의 계략에 말려드는 현상이다.

이는 새관점을 배우는 많은 이들이 유대인의 장학금에서 자유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6  너희는 지켜 행하라 이것이 여러 민족 앞에서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

여호와의 규례와 법도를 지킴으로 누리는 풍요는, 하나님의 공급 하심에 의한 것이다.

단순한 삶의 원리라면,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아도 기계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공급하심으로 누리는 풍요는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섭리에 의한 것이기에, 성도는 풍요 가운데 하나님을 경험해 나아가야한다.

신앙 생활을 하면서 성도가 누리는 풍요는 단순한 형식적인 삶의 원리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동행이라는 관계성에서 나타나는 외적인 증거들이다.

성도의 풍요는 물질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상황에 자족하면서 누리는 평안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이다.

성도는 삶 가운데 누리는 평안으로 인하여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한다.

현재 기독교가 욕을 먹는 것은 분명 교인들의 삶이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에 있지 않음을 보여주고있는 것이다.


7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이 가까이 함을 얻은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가까이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격적으로 존중해주신다는 것이다.

출애굽 여정은 단순한 애굽에서의 탈출을 넘어서,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광야에서의 여정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여정이었다.

신자의 삶도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통해서 풍성해진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성도의 기도를 무시하지 않으신다.

타락은 인격의 손상을 가져왔으며, 구속은 인격의 회복을 가져온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는 인격적 관계에 있다.

인격은 서로를 존중해주는 것에서부터 출발된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인격적으로 자신의 행동 방식을 존중하셨기 때문에, 선악과를 먹는 잘못된 결정도 존중되었던 것이다.

인격적 관계는 서로를 존중하기에,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신자의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존종해주시고 응답해주시는 것이다.

신자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누리는 삶의 기쁨을 경험할 특권이 있다.


8  오늘 내가 너희에게 선포하는 이 율법과 같이 그 규례와 법도가 공의로운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율법은 하나님의 공의의 표현이다.

자연법의 모체가 되는 십계명이 하나님의 공의의 표현인 것과 같이, 유대인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자연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공의에 근거하여 심판을 받게 되어있다.

공의는 이 세상을 지탱해주는 하나님의 은혜이면서, 동시에 모든 인간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하는 하나님의 표현이다.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이 없으시다면, 이 세상에서는 희망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의 공의가 어떻게 적용이 되고, 또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공의의 표현인 율법 앞에서 어떻게 불의한 존재로 드러나는가를 보여주고있다.

이스라엘은 모든 인간을 대표하고있기에,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은 모든 인간들에 대한 심판을 예표하고있다.


9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그리하여 네가 눈으로 본 그 일을 잊어버리지 말라 네가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조심하라 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

성경의 진리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확증된다.

전통적 역사에는 진리와 교훈이 담겨있다.

해체와 재건이라는 포스트모더니즘은 현대인들의 삶의 방식이다.

전통을 거부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사는 현대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을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현대인들에게 진리는 역사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주관적 판단이 진리의 기준이 된다.

현대인들은 만물보다 부패된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있다.


10  네가 호렙 산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섰던 날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나에게 백성을 모으라 내가 그들에게 내 말을 들려주어 그들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나를 경외함을 배우게 하며 그 자녀에게 가르치게 하리라 하시매

인간의 존재는 역사 속에서 의미가 부여된다.

하나님께서 호렙산에서 말씀하신 것을 자손들에게 가르쳐야하듯이,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타락 하였으며, 오직 그리스도만이 구속주이심을 가르쳐야한다.

인간이 자신의 존재와 삶의 의미를 역사의 가르침 가운데 알게될 때, 지금과 같이 무의미하고 허무한 인생들을 살지는 않을 것이다.

현대인들은 넘치는 인터넷 정보의 한 가운데 살고있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찾아보기는 쉽지가 않다.

첨단 문명일수록, 하나님의 가르침이 배제되는 길로 달려가기에, 심판의 시기를 더욱 앞당기고있다.

찬란한 첨단 문명이 진리의 암흑시대로 사람들을 이끌고 가고 있는 것이다.


11  너희가 가까이 나아와서 산 아래에 서니 그 산에 불이 붙어 불길이 충천하고 어둠과 구름과 흑암이 덮였는데

에덴에서 아담은 하나님의 거느심을 자연스럽게 경험할 수 있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기에, 극도의 두렵고 떨림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만을 들어야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타나심인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불길과 어둠과 흑암 가운데 호렙산에 임하셨던 여호와 하나님과는 대조를 이룬다.

호렙산에 임하신 하나님의 모형으로 이루어진 성막과 지성소는 두렵고 떨림으로 다가가야했지만,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이 땅에 세워진 성전되신 그리스도는 교회라는 형식을 통하여 기쁘고 평안함으로 즐겁게 다가갈 수 있다.

하나님은 죄인에게는 심판하시는 두려우신 분이시지만, 그리스도의 의를 입은 성도에게는 기쁘게 다가갈 수 있는 간절한 사모의 대상이 되신다.

이는 행위 언약 안에 있는 이스라엘과 새언약 안에 있는 성도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다.


12  여호와께서 불길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되 음성뿐이므로 너희가 그 말소리만 듣고 형상은 보지 못하였느니라

가까이 다가오시지만 가까이 할 수 없으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새관점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언약 백성이라고 말하지만, 이스라엘의 모든 상황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인임을 증명해주고있다.

참된 하나님 나라 백성은 오직 새언약 안에 있는 성도들뿐이다.


13  여호와께서 그의 언약을 너희에게 반포하시고 너희에게 지키라 명령하셨으니 곧 십계명이며 두 돌판에 친히 쓰신 것이라

십계명은 하나님의 명령으로서 자연법의 모체가 된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이 주어졌듯이, 자연법 아래에 있는 모든 인류는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응할 의무가 있다.


14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명령하사 너희에게 규례와 법도를 교훈하게 하셨나니 이는 너희가 거기로 건너가 받을 땅에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가나안이라는 특수 상황은 궁극적으로 성도가 바라보아야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예표하는 곳이다.

가나안에서의 조건은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킴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상태가 유지되어야만 한다.

이스라엘이 보여주는 가나안에서의 부패한 모습은, 인간은 아무리 깨끗하게 정화되어 가나안에 들어간다고하더라도, 인간은 가나안에서 살 자격이 없는 죄성을 가진 본질적 죄인이라는 것이다.

인간에게서는 아무런 희망을 찾아 볼 수 없기에, 인간은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안식을 누릴 수가 없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안식의 주인이 되신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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