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2018. 5. 12. 22:25

신명기 5장 22-33절 말씀 묵상


22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을 산 위 불 가운데, 구름 가운데, 흑암 가운데에서 큰 음성으로 너희 총회에 이르신 후에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그것을 두 돌판에 써서 내게 주셨느니라

23  산이 불에 타며 캄캄한 가운데에서 나오는 그 소리를 너희가 듣고 너희 지파의 수령과 장로들이 내게 나아와

24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영광과 위엄을 우리에게 보이시매 불 가운데에서 나오는 음성을 우리가 들었고 하나님이 사람과 말씀하시되 그 사람이 생존하는 것을 오늘 우리가 보았나이다

캄캄한 가운데서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두려워하였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할 수 없다.

자녀라면 아버지의 음성을 기뻐하였을 것이다.

그나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서도 죽지 않은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라볼 수 있는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아남았다고,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할 수도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자녀이거나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었다면, 하나님께서는 듣는 이들에게 두렵게 다가오시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시내산에 임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연약한 육신을 입으시고, 인간의 무리 가운데서 함께 하시고서, 인간의 죄악의 희생자가 되셔서, 인간의 세상에 교회를 세우시고서, 성도들과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심으로, 인간의 고통을 친히 담당하신 그리스도의 모습과는 대조를 이룬다.

이 두 가지의 대조는,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과 신약의 성도들과의 신분의 대조로 이어진다.

전자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기 위한 조건이 요구되는 백성들이고, 후자는 이미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요구 조건이 충족된 백성들이다.

전자와 후자 사이에는 그리스도의 적극적 순종으로서의 율법의 마침이 되심과, 죄인이 마땅히 받아야했을 형벌을 직접 담당하셨던 수동적 순종의 공로에 의한 것이었다.

전자는 범죄한 타락한 아담의 후손들이었다면, 후자는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공로에 힘입어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인 것이다.

문제는 현대 신학자들이 후자에 속한 성도들을 전자에 속한, 즉 행위가 요구되는 이스라엘 백성의 형태로 되돌리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의 도덕적 부패와 윤리적 삶이 요구되어지는 시대적 상황에 부응하기 위해서, 현대 신학자들은 복음의 속성을 윤리적으로 변질시키고있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최근에 들어서 각광을 받는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윤리적 기독교라는 점에서 관심을 끌고있지만, 이는 후자를 전자로 이동시키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새관점에서는 자녀라는 개념이 없고 오직 백성이라는 개념만이 있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도, 유대주의적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이다.

새관점은 전자와 후자 사이에 놓여있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제거함으로서, 후자를 전자로, 즉 기독교를 유대교로  귀속시키려고한다.

혁명적이고, 변혁적이며, 윤리를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행위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비록 새관점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겠지만, 새관점에서는 성도를 시내산 앞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두려움 가운데 몰아냄으로서, 복음의 핵심을 왜곡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서 경계를 하여야한다.


25  이제 우리가 죽을 까닭이 무엇이니이까 이 큰 불이 우리를 삼킬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다시 들으면 죽을 것이라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것과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면,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다시 들으면 죽을 것이라는 고백을 하면 안된다.

아직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기에,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앞에서 행위 언약으로 주어진 모세 율법으로 인하여, 생과 사의 갈림길에 놓이게 된 것이다.



26  육신을 가진 자로서 우리처럼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불 가운데에서 발함을 듣고 생존한 자가 누구니이까

27  당신은 가까이 나아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시는 말씀을 다 듣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는 것을 다 우리에게 전하소서 우리가 듣고 행하겠나이다 하였느니라

사람은 하나님을 멀리하지만, 가까이 하기에는 자신들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임을 알고있다.

하와이의 폭발하는 용암에 관한 인터넷 기사 하단에 실려있는, 기독교인들은 댓글을 달지 말라는 댓글을 보면서, 사람들의 평안은 하나님의 싸인을 보면서도 기꺼이 하나님을 외면함으로서 평안을 누리려한다.

하지만 인생은 결코 하나님을 외면하는 가운데 평안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생들에게 아담에게 주어졌던 행위 언약 안에서 죽게되든지, 아니면 그리스도 안의 새언약 안에서 살게되든지, 두 가지 가운데 한 가지를 선택하게끔 하신다.

행위 언약 아래에서는 행위가 따르지 않으면 죽을 수 밖에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직면함으로서, 타락한 아담의 후손으로서의 실체가 어떠한지를 드러냄으로서, 그리스도의 구원의 필요성을 제시해주는 역할을 맡은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은,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구원받은 백성이 아니라, 인간의 실체가 어떠한지, 발가벗겨지기 위해서 선택된 민족인 것이다.

이를 위해서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을 대신하여 고발되어지는 역할을 한 것이다.

각 지파의 수령과 장로들이 두려움 가운데 모세에게 약속한 고백은, 후에 심판받을 때 할 말이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28  여호와께서 너희가 내게 말할 때에 너희가 말하는 소리를 들으신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네게 말하는 그 말소리를 내가 들은즉 그 말이 다 옳도다


이스라엘 지파의 수령과 장로들이 모세에 간청하였던 내용도 하나님께서 수긍할 긍정적인 간청이었지만, 이는 상황에 대한 이해일뿐 결코 문제 해결을 위한 답이 될 수가 없다.

근본적인 답은 먼 훗날 그리스도를 직면하고 그와 연합되어야 하기에,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고백을 인정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긍정은 그들이 자신의 실체가 어떠한지를 제대로 인식하고있다는 것에 대한 긍정일 뿐이다.



29  다만 그들이 항상 이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내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의 기준은 결코 변함이 없으시다.

죄인 앞에서나 의인 앞에서나 항상 같으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기준들을 스스로 직접 충족시켜야하지만, 신약의 성도들은 그리스도가 대신 충족시켜주신 것이다.



30  가서 그들에게 각기 장막으로 돌아가라 이르고
31  너는 여기 내 곁에 서 있으라 내가 모든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네게 이르리니 너는 그것을 그들에게 가르쳐서 내가 그들에게 기업으로 주는 땅에서 그들에게 이것을 행하게 하라 하셨나니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행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생존하기 위한 필수적 요구 조건이다.

가나안에서 이러한 조건이 이행이되지 않는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 이상 가나안에 머물 수가 없다.

가나안은 영원한 안식에 대한 그림자이기에, 가나안에서 쫒겨나는 것은 구원에서 탈락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새관점의 언약적 율법주의는 은혜 안에 거하기 위해 공로가 요구되는 모순을 내포하고있다.


32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33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복이 너희에게 있을 것이며 너희가 차지한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리라

(행위가 요구되는 거짓된 은혜와 참된 은혜 안에서의 행위)

새관점은 은혜 안에 거하기 위해서 행위를 요구한다.

새관점이 말하는 복음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희생적 삶을  삶으로서, 과거 유대인의 잘못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방법을 제시해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참된 복음은 사람들로하여금 하나님의 요구 조건을 행할 수 있도록 방법을 제시해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요구 조건을 행할 수 없지만, 그리스도를 통해 이를 해결하는 방법을 제시해주는 것이다.

사람은 종종 복음을 삶의 기준으로 제시하지만, 복음은 인간이 결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삶의 기준에 미칠수 없는 존재임을 말하고있다.

행함이 수반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하지만, 복음은 인간이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온전하게 행할 수 없는 존재임을 말해주고있다.

믿음에 수반될 행위의 요구 기준은 지극히 인간적인 관점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믿음을 가진 인간이라고하더라도, 신자에게서 볼 수 있는 행위는 대부분이 부적격일 수 밖에 없다.

행위에 대한 평가 기준은, 종으로서의 기준이 아니라 자녀로서의 기준이 적용되어야한다.

자녀는 부족함이 문제가 안되지만, 종은 부족함으로 인하여 자격이 박탈 당할 수 있다.

직장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말하면 바로 직장에서 해고될 수 있지만, 교회 공동체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말한다고 교회 공동체에서 제명 당하지는 않는다.

복음에서 말하는 행위는 표면적이고 형식적인 문제가 아니라 중심의 내적인 문제가 기준이 되어야한다.

믿음에 수반되는 행위는, 부족함으로 인한 잘못된 행위로 문제가 되어서는 안된다.

하지만 의도적이고 악의적인 행위는 믿음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신자의 행위에 대하여 문제를 삼을 때 의도적 악행인지, 아니면 인간적 연약함에서 발생한 표면적인 문제인지를 구분하여야한다.

호렙산 앞에 선 이스라엘의 문제는, 하나님의 요구조건을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행위로 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는, 인간은 중심의 변화가 없는 죄인일 뿐이다.

바리세인의 문제는, 중심의 변화가 없는 외적인 행위로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키려고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말씀하신다.

믿음으로 거듭난 성령이 내주하는 신자에게있어서, 중심에서 선행을 하려고해도 자신의 육신은 연약함으로 인하여 죄를 지으려한다는 것이다.

바울도 교만해질까봐 하나님께서 육체의 가시를 허락하셨듯이, 모든 성도는 행위가 온전할 수 없다.

성도는 자신의 부족함을 보면서 지속적으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하면서 나아가는 자이다.

신자의 부족함 가운데 나오는 행위를, 구원의 문제와 연결시켜서는 안된다.

구원에 있어서 행위가 미치는 영향에 대한 논쟁이 끊이지 않지만, 이는 중심에서 나오는 의도적 악행인지, 아니면 인간적인 연약함에서 나오는 표면적인 부족함인지를 구분하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다.

의도적 악행은 구원을 취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가 아님을 증명해줄 뿐이다.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인간의 행위는 구원에 영향을 미칠 영향력 자체가 없는 것이다.

우상은 자기를 위해서 만드는 것이며, 모든 인간은 우상 숭배자이기에, 더 이상 인간에게는 행위를 거론할 자격이 있지가 않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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