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24. 9. 2. 12:56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 묵상(4-우리 가운데 거하심)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사실은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 세계는 하나님의 거하심과 더불어 시작되었지만 아담의 불순종과 더불어 이 세상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곳이 되었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더 이상 거하시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에덴을 창설하시고 아담과 더불어 에덴에 거하셨던 사실은 에덴이 하나님께서 거하셨던 성전이었음을 보여준 것이다.

불순종과 더불어 범죄한 아담의 후손이 사는 이 세상은 더 이상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이 아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셔서 그들 가운데 거하셨으며 이제 요한은 모든 인류를 대상으로 하는 하나님의 거하심을 선언하는 것이다.

모든 인류를 대상으로하는 하나님의 거하심은 에덴의 확장이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둘째 아담이 되셨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이제 이 땅에 사는 모든 이들은 육신으로 처음 아담의 후손으로 남을 것이냐, 아니면 비록 육신으로는 처음 아담의 후손이지만 영적으로는 둘째 아담의 후손이 될 것이냐에 대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게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거하심은 아담의 범죄와 더불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원시복음(창 3:15)의 성취인 것이다.

하나님의 거하심은 구원과 동시에 심판이 임하였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모든 인류는 에덴에서 아담이 선택의 기로에 놓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둘째 아담의 역할에 의존하여 구원에 이르느냐, 아니면 처음 아담의 후손으로서 영원한 심판 아래에서 저주받읓 존재로 남느냐의 선택의 기로에 서게된 것이다.



(모든 인류의 하나님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말씀이 육신이 되심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더 이상 민족주의적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심을 선언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대상으로 시내산에 강림하셨던 하나님은 이제 모든 인류를 대상으로 육신으로 이 땅에 강림하신 것이다.

이스라엘 가운데 성전에 거하셨던 하나님께서는 이제 말씀으로 모든 인류의 성도들 가운데 거하신다.

성도들 가운데 거하시는 성령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님의 성전은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어서 모든 인류 가운데 확장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대위임령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성전의 확장이며 이는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의 강림과 더불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완성될 것이다.



(종말론적 선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요한의 선언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종말론적 선언이다.

이제 이 땅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완성, 혹은 자아 성취를 위해서 이 땅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서 살아가야하는 사명이 주어진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삶의 목적이 자아의 완성이나 혹은 성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서 이 땅에서 희생되어져 가는 삶을 살아야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왕으로- 승리자의 삶)

그리스도께 헌신하는 삶은 결코 자기 학대나 패배자로서의 삶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거하심은 이 땅의 권세자였던 사탄에게 패배를 안겨주신 것이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

말씀 안에 하는 신자는 이 땅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권세 아래있는 이로서 결코 이 땅의 패배자가 될 수 없다.

말씀 안에 거하는 이들에게는 학위나 성공, 지위나 명예, 돈의 많고 적음이 이 땅에서의 삶의 기준이 될 수 없다.

이 땅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말씀 안에 거하는 이들을 결코 내어버려두시지 않는다.



(근원적 외로움의 종결)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한 가지는 사람과의 관계성이다.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일들 가운데 한 가지는 사람들에게 배척받거나 소외되는 것이다.

인간은 소외되는 것과 배척받는 것이 두려워 세상과 타협하면서 살아가지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근원적인 외로움을 해결해주시는 분이시다.

아담의 후손은 관계성의 왜곡으로 사람들을 집단에 종속시켜왔지만, 이제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거하는 이들은 말씀 안에서 근원적인 관계성을 이루어 나아가야한다.

그리스도의 우리 가운데 거하심은 새로운 코이노니아를 이루어가시며, 인간을 더 이상 육적인 외로움에 종속되어지지 않게 하신다.

성도는 비록 이 땅에서 완전 혼자가 된다 하더라도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더불어 평안 가운데 거할 수 있기에 이 보다 더 큰 영광은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만이 진정한 평안과 안식을 주시는 분이시기에 말씀 안에 거하는 삶이야말로 가장 평안한 삶이 될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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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23. 10. 25. 11:27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 묵상(3-육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육신적 인간)

육신을 입은 인간은 죽음과 절망에서 자유할 수 없다.

구원의 문제는 인류 역사에서나 인간의 철학에서나 항상 가장 큰 과제로 자리잡고 있었다.

육신의 죄성은 인간의 스스로의 구원에 가장 큰 장애물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육신의 본능에 묶여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수도사들은 육신의 본능을 다스리고 육신의 본능을 거스려서 살고자하지만 이는 마치 용수철에 가하는 힘을 빼면 용수철이 다시 제 모양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이 본질이 변화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육신의 본능을 거슬러서 육신의 본능을 다스릴 수 있는 자가 누가 있겠는가.

인간은 죄를 짓기 이전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본질적 죄인이다.

인간은 본질적 죄성으로 인해서 구원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가 없다.

유아세례는 인간이 죄를 짓기 이전에 본질적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심은 자신의 육신의 죄를 씻어내시기 위함이 아니고 처음 아담 안에서 육신이 된 이들과의 연합을 위한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고자 죄성을 가진 육신을 입으신 것과 같이 죄인을 구원하시고 그들이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룰 수 있도록 육신의 세례에 참여하시는 것이다.

죄가 없으신 그리스도께서 죄인들과 마찬가지로 세례를 받으셨다고 육신을 입으신 그리스도께서 죄인이 되신 것은 아니다.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죄성은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의 역사가 증명해 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이라는 육신의 세례를 받고서 광야에서 시험을 감당하고서 나름대로 훈련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라고 불리우는 가나안에 들어갔지만 타락할 수밖에 없었다.

새관점주의자들은 끊임없는 훈련과 연습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인간 육신의 근원적 죄성을 무시하는 주장이다.

죄의 문제는 표면적인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 즉, 육신의 본성 자체에 있다.

육신의 본능을 따를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구원의 문제는 외부의 도움이 없이는 해결할 수 없는 과제인 것이다.

구원의 문제는 인류의 역사에서 항상 중심에 있었다.

인류의 문명은 항상 그 가운데에 종교의 문명이었으며, 어느 곳에서도 신을 섬기지 않는 족속이 없었다.

인간은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종교를 만들어 보기도하고 고행을 하기도하고 금육주의자가 되기도 하며, 선을 행하면서 공덕을 쌓아보기도하지만 그렇다고 사망의 몸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육신의 소욕을 다스리려는 금욕주의적인 삶은 자칫 자기 의를 얻는 방향으로 나아가게되고 이는 율법주의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인류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는 한 가지는 그리스도 말고는 어디에도 구원의 길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육신으로 살아가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실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


(살아있으나 실상은 죽어있는 육신)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께서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서 생령, 즉 살아있는 인간이었던 것이다.

인간이 살아있음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유지되며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사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은 죽음을 의미하며 이러한 육신적인 삶에는 더 이상 생명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고 아담이 범죄한 날 에덴에서 쫓겨남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죽은 존재가 되었다.

육체적 생명과 영적인 생명은 구분되어야한다.

바빙크는 아담이 범죄한 날 죽지 않은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말하지만 여기서 육적인 생명과 영적인 생명은 구분되어야만 했다.

육적인 생명만으로 살아가는 인간, 즉 육신이 된 인간은 영적으로 죽은 존재이며, 결과적으로 육신도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육신의 생명만있는 영적으로 죽은 존재는 결과적으로 총체적 죽음에 이르게되지만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심으로 말미암아서 영적으로 죽은 육신에게 생명의 희망이 생긴 것이다.

생명이 있는 육신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살아가야한다.

창세기 6장 1-3절에서는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라고 기록하고있다.

육신이 되었다함은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을 의미하며, 더 이상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지 않는 것이다.

원래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로 창조되었으며,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야하는데,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인간은 육신이 되었기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삶을 살지 않고 세상적인 삶을 살아가게된 것이다.

육신이 된 인간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신의 육신적인 필요를 위한 것이다.

일단 육신이 된 인간에게는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기에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가족을 제외하고는 모두 홍수로 쓸어버리신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인간적인 삶은 그 자체로 살아있는 것 같이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삶의 가치가 없는 무가치한 삶인 것이다.

인간이 육신이 되었다함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본래의 창조 목적에 부합되지 않는 모습이 된 것이다.


(절망적 육신이 희망적 육신으로)

육신은 절망을 내포하고있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육신의 한계에 묶여있는 존재이다.

육신은 죄의 법을 따를 수밖에 없는 생명이 없는 사망의 몸이다.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라고 고백하고있다.

육신을 입은 인간은 구원을 필요로하지만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이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의 역사는 인간에 의한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면서 구원자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려주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육신적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 하나님을 경외 할 수 있는 길이 생긴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심은 절망에 희망을 선포하는 것이다.

어둠 가운데 휩싸인 육신에 생명의 빛을 비추시는 것이다.

바울이 자신의 사망의 몸을 언급하고있는 것은 바울 자신이 육신에 묶여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희망을 가질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복음은 바로 육신으로는 이룰 수 없는 구원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복된 소식이다.

육신이 되신 말씀이 내포하는 것은 죽음의 문제에 대한 해결이다.

그리스도의 육신이 되심은 마치 헬리곱터에서 구조 대원이 물에 빠진 이를 구하기 위해서 물에 내려오는 모습과 흡사하다.

물에 빠진 이는 구조 대원과 하나가 될 때 구조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육신이 되신 말씀이시기에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지는 것은 궁극적인 구원에 참여되는 것이며, 이는 그리스도께서 보증하시는 것이다.


(죄인과의 연합을 위한 육신)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심은 육신으로 살아가는 죄인과의 연합을 위한 현실적인 방법이다.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시지 않으셨다면 인간은 그리스도와 연합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으로 죄인의 자리에 오심으로 죄인이 감당해야할 모든 순종과 형벌을 대신 담당하심으로서 육신으로 살아가는 인간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심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루신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미 죄인들은 처음 아담의 죄를 전가받아서 처음 아담과 연합을 이룬 죄인이 된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는 더 이상 정죄되지 않는 의인이다.

의인이 되는 것은 구원을 위한 행위가 요구되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따름은 구원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의 열매를 위한 것이다.

하지만 신자는 아직 처음 아담으로 말미암은 사망의 몸으로 살아가면서 동시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생명 안에 거하는 삶을 살아가는 신비한 존재이다.

죽음과 삶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주어지는 것이며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죽음은 첫째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은 것이고 생명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죽음과 생명은 이미 대표성 안에서 결정된 것이다.

육신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처음 아담의 대표성을 대신하시기 위해서 아담의 혈통으로 나셨으나 죄인도 아니시고 죄성도 없으신 분으로서 동정녀 탄생의 신비 가운데 오셨다.

그리스도는 육신으로 오셨지만 그 근원은 말씀이시며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신 분이시기에 죄가 없으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다.

거룩하심은 죄와의 완전한 분리가 요구되지만 말씀이 육신이 되심은 거룩하신 분이 죄로 오염된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셨지만 죄가 없으신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100% 육신을 지니신 사람이셨지만 이미 죄에 오염된 인간과는 속성이 다르신 분이시다.

인간은 그리스도의 대표성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된 존재이다.

인간이 그리스도의 거룩함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은 행함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거룩하신 그리스도는 따름의 대상이기 이전에 믿음의 대상이다.

즉 우리가 처음 아담 안에서 죽은 존재임을 고백하고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소유한 자가 되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신자의 삶의 근거가 오직 말씀이어야만 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그리스도의 대표성 안에서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하기 때문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기에 신자의 육신은 말씀으로 점령되었다.

신자는 삶과 죽음의 문제를 넘어서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나의 삶을 지배하도록 하여야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심은 죽음과 이별의 고통을 넘어서는 사건이다.

인간이 넘어설 수 없는 죽음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주는 인류 최대의 사건이다.

죽음과 생명은 인간의 노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영역이다.

이 모든 것이 대표성 안에서 결정되어진 것이기에 육신이 되신 말씀 안에서의 삶이 신자의 삶을 점령한 것이다.


(적용)

말씀이 육신이 되심은 인간의 육신이 스스로 구원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내포하고있다.

하지만 인간은 스스로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끊임없이 도전한다.

이러한 도전은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하는 타락한 죄성으로 부터 출발된 것이다.

행위구원론은 이러한 타락한 인간의 죄성으로부터 출발된 구원론이다.

행위구원론에는 인간이 이미 아담 안에서 죽었다는 처음 아담의 대표성을 부인한다.

또한 육신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대표성도 부인한다.

인간의 가장 큰 죄악은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대표성과 전가교리가 없이는 그리스도의 대표성을 설명할 수 없다.

톰 라이트를 비롯한 새관점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대표성과 전가교리를 부정하며 그리스도는 단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지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 삶을 본을 보여주신 분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을 왜곡시키고 부정하는 적그리스도적 발상이다.

새관점에서는 반복적인 훈련과 노력을 통해서 구원을 완성시킬 수 있다고하지만 구원은 행위를 통하여 완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과 그리스도의 보증에 힘입어 약속되어지는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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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23. 10. 23. 07:20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 묵상(2-육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육신이 되신 말씀의 새로운 사역-절망에서 희망으로

창조주이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인간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낮아지심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있다.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탄생을 비천한 자리에 오신 하나님의 낮아지심 이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려고 하지만 신자는 그 이상의 의미를 생각하여야만 한다.

상상할 수 없는 지극히 높으시고 거룩하신 분이 인간의 더럽고 누추한 자리에 오신 것만을 생각한다면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단순히 윤리적이고 교훈적인 사건으로 끝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죄로 인하여 거룩하신 하나님과 분리될 수밖에 없는 세상에 하나님께서 직접 오셔서 끊어진 관계를 다시 이어주기 위함이었다.

처음 아담의 에덴에서의 역할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계시는 하늘과 눈에 보이는 가시적 땅을 이어주는 성전에서의 제사장의 역할이었으며,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는 왕의 대리인으로서의 왕이 역할이었으며,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널리 선포하는 선지자로서의 역할을 가지고 있었다.

창세기 1장 1절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고 기록하고있다.

1절에서의 하늘은 하나님과 천사들이 있는 거룩한 곳이었다.

아담은 에덴에서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역할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땅을 다스리고, 거룩하게 하여서, 하나님께 드림으로서 하늘과 땅의 연합을 완성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아담이 순종을 하였다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땅은 하늘과 연합됨으로서 영원한  안식에 참여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처음 아담은 불순종함으로서 하늘과 땅의 연합이라는 안식에 참여할 수가 없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하늘과 땅의 연합을 통한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을 완성하시기 위해서 독생자 그리스도를 둘째 아담으로 보내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과 땅의 연합을 위한 중보자이셨으며, 처음 아담에게 부여되었던 3중직, 즉 왕이요 선지자요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하셨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자리에 오신 것은 불순종하고 하나님께 등돌린 인간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자를 살리기 위해서 무한하신 조물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유한한 인간의 자리에 오셔서 피조물의 형태를 입으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새로운 창조의 시작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이전의 낡은 것을 고쳐쓰시는 리모델링 개념에서의 시작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이전 것을 다시 사용하시지 않으시고 스스로가 새로운 역할을 하심으로서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화란개혁주의에서 시작된 리모델링의 개념, 즉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창조하신 것을 하나도 폐기하지 않으시고 새롭게 변화를 시키신다는 개념에서의 역할이 아니시다.

인간의 도덕적 향상을 통한 세상의 변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백성을 부르셔서 이 세상과 구별된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성도의 거듭남을 위한 것이다.

창조주의 낮아지심은 이 땅의 변화를 통한 새 하늘과 새 땅의 완성이 아니라 처음 아담에게 순종을 전제로 약속되었던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를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단순한 낮아지심과 겸손의 표현이 아니라 처음 아담의 실패를 대신하시기 위함이었기에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 아닌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한 것이 되었다.

인간의 몸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삶의 본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나 따름의 대상으로 보려는 것은 여전히 인간 스스로 처음 아담의 실패를 극복하려고 하는 것이다.

둘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역할은 인간에게 더 이상 순종의 행위를 조건으로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인간에게서는 더 이상의 희망을 볼 수 없다는 선포이며, 이는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위를 통해서 증명되었다.

인간에게 선포된 더 이상의 희망이 없음은 구원을 위한 희망이기에 윤리를 위한 행함까지 무시되어서는 않된다.

그리스도가 따름의 대상이기 이전에 믿음의 대상인 것은 구원의 위한 조건에 한정된 개념이다.

그리스도를 따름은 성도로서 마땅히 행하여야할 성화에 관한 것이고 그리스도를 믿음은 칭의에 대한 것이다.

이미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인간은 구원을 위한 행위가 요구되었던 처음 아담의 자리에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죄가 없으신 그리스도만이 처음 아담의 자리에 서실 수 있으신 것이고 처음 아담의 역할을 대신하기 위해서 오시기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역할은 처음 아담의 역할을 보강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처음 아담의 자손이기에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감으로서 구원을 쟁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톰 라이트를 비롯한 새관점주의자들의 주장은 인간이 최종적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서 삶의 본을 보여주셨다고 주장한다.

이는 인간이 처음 아담 안에서 구원을 얻기에는 완전히 부패한 존재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순종 사역은 처음 아담의 불순종을 대신하시지만, 처음 아담은 오실 자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그리스도는 처음 아담의 실체로서 오신 것이다.

처음 아담에게는 단순한 순종이 요구되었지만, 아담의 실체로 오신 그리스도는 단순한 순종, 즉 율법의 요구를 넘어서 죄의 댓가까지 치르셔야만 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칭의의 조건이며,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 즉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신 능동적 순종의 의와 죄의 형벌을 감당하신 수동적 순종의 의가 신자에게 전가되는 조건이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심은 처음 아담에게 주셨던 언약의 주체가 그 언약을 직접 담당하시기 위함이었다.

요한이 소개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되심은 하나님의 처음 창조의 시간으로 초대함이면서 동시에 말씀으로 완성될 종말론적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다.

창조주가 아니고서는 창조된 인간을 창조주의 영역에 초대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요한은 예수님을 말씀으로 소개함으로서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 사역이 처음 창조와 마찬가지로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있다.

말씀은 피조 세계가 존재하는 근거가 된다.

그리스도는 말씀이시며, 만물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며, 지어진 것이 하나도 그리스도가 없이 된 것이 없다고 요한은 소개하고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였다는 것은 창조주께서 이제 피조물의 자리에서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셨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처음 창조는 피조물의 입장에서 보면 제3자의 창조 사역이었지만, 말씀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창조 사역은 제3자가 아닌 피조물과의 연합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창조 사역이었다.

말씀이 육신으로 오심은 궁극적으로는 신자와의 연합을 위한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의 행동인 것이다.

육신이 되신 말씀은 인간의 자리에서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시고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연합된 신자의 부활을 예표할 수 있으신 것이다.

처음 창조시에는 창조주의 희생이 없이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생령을 만드셨지만, 새 창조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죽음의 권세 아래있는 이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신 것이다.

처음 창조는 모든 피조물을 만드시고 마지막에 아담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지만, 하나님의 새 창조는 신자에게 생명을 주시고 성령의 내주하심과 더불어 종말론적인 새 하늘과 새 땅에 신자를 초대 하실 것이다.

신자들은 아담 안에서 죽었던 자들이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난 자들이기에 그리스도의 새로운 창조의 사역에 참여되는 것이다.

신자들의 새롭게 됨은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의 창조 사역으로 말미암은 것이기에 요한복음은 신자들을 위한 창세기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파국으로 치닫는 암울한 세대를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이 세상은 결코 암울한 세상이 아니며,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하는 귀한 세상인 것이다.

육신은 어떠한 형태로든 죽음을 맞게되지만, 신자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더불어 약속된 부활로 새하늘과 새 땅에서의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걱정하는 고독사의 문제, 희망이 없는 세상, 극단적 절망감, 좌절과 외로움 등등… 그리고 죽음… 이 모든 것은 처음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한  하나님과의 분리의 결과물들이다.

그리스도의 육신으로 오심은 이러한 분리의 종식을 위한 것이다.

세상이 주는 좌절과 절망은 하나님과의 영원한 분리를 향한 것이다.

신자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이들로서, 세상적인 좌절과 절망은 신자에게 더 이상 효력이 없는 것이다.

신자는 더 이상 세상적이고 육신적인 절망과 좌절에 묶여서는 안된다.

신자는 고독의 문제를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풀어나가야한다.

신자는 새 생명을 소유한 자로서 더 이상 죽음의 저주가 붙잡을 수 없는 이들이다.

신자는 이 땅을 사는 동안 모든 이들과 마찬가지로 육신의 연약함 안에 갇혀 있지만, 인간의 연약함을 몸소 체험하신 육신으로 오신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 세상을 이긴 자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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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23. 10. 4. 15:49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 묵상(1-말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 하나님의 자기 계시)

태초에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말씀이라는 방식으로 인간의 인식 체계 안에 들어오신 것은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라고 볼 수 있다.

어떠한 피조물도 누릴 수 없는 말씀에 대한 이해력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에 가능한 것이다.

칸트는 인간의 이성으로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며 철저한 인간 중심의 실존주의 사고를 정립함으로서 인간의 인식체계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배제시켜버렸다.

실존주의적 신학은 철저하게 인간 중심의 사고를 한다.

실존주의 철학자인 칼 바르트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기 보다는 인간이 하나님에 관하여 기록한 인간의 책으로 보고있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요한의 선포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식체계로 구체화시키는 것이 쉽지가 않게된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오심은 인간의 인식 체계로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구속사역에 참여할 수 있음을 증거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인간은  자신의 인식체계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재정립되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말씀 묵상 또한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꼭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역사 가운데 여러번 인간을 찾아 오신다.

인류가 타락한 이후에 하나님의 오심은 인간의 인식체계의 변화를 요구하시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번번이 하나님을 피해서 도망 갈 뿐만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을 소외시키는 삶을 살게된다.

말씀이 육신이 되심은 에덴에서 아담을 찾으셨던 하나님께서 다시 아담의 후손에게 찾아오신 사건인 것이다.

말씀으로 오신 하나님을 외면하고자 하는 인간의 속성은, 범죄한 아담이 나무 뒤에 숨어서 하나님의 낯을 피하였던 것과 같은 속성의 것이다.

하나님을 본능적으로 피하고자하는 인간의 죄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이기에 말씀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여야만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이기에 하나님께서 포기하실 수 없는 존재이며, 또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 만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에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인간의 인식체계 안에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이유로 하나님을 외면할 수 없는 존재이며, 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심판과 구원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영생을 위해서는 육신이 되신 말씀 앞에 반드시 가까이 다가가야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성경을 외면하고 말씀을 외면하면서는 구원에 참여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창조주로서의 말씀)

요한이 소개하는 말씀은 태초에 계신 분이시며, 하나님이시며, 창조주이시다.

말씀은 모든 만물의 근원이 되신다.

태초에 모든 만물은 말씀으로 말미암아 지어진 바 되었다.

구원자로 오신 육신이 되신 말씀은 모든 만물의 창조주이시기에 구원하심의 권위와 능력은 창조주의 권위와 능력이시다.

말씀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세상의 위인 가운데 한 사람이 될 수 없으신 창조주이시다.

구원자로 오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새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다.

말씀을 통하여 구원에 참여하는 신자는 새롭게 창조되는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새사람이다.

성경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수 5:17)"라고 기록하고있다.

신자는 창조주이신 그리스도에 의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다.

성경 말씀은 인간이 접하는 많은 글 가운데 한 가지가 아니라 인간을 전혀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시키는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요한의 선언은 피조 세계 안에 들어오셔서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실 창조주의 현현을 선언하는 것이다.

신자가 말씀을 대하는 일은 피조 세계 안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는 가슴 뜨거운 일인 것이다.

그리스도와 신자의 만남은 시간적 공간적 접촉점을 갖는 것이 아니라 한 몸을 이루는 연합의 사건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심은, 육신에 갇혀서 죄의 법을 쫓던 신자에게 창조주 하나님과 한 몸을 이루는 영광에 참여할 수 있게 해주는 놀라운 축복의 사건인 것이다.


(연합을 위해 육신으로 오신 말씀)

육신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모습이다.

육신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불가능하다.

노아 홍수는 육신이 된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한 실망에서 비롯되었다(창 6:3).

육신으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없다.

아담의 불순종은 하나님과의 분리를 가져왔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여야할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이들을 아내로 삼음으로서 더 이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고 하나님을 외면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육신이 됨은 근본적으로는 아담의 불순종에서 비롯되었지만 성경에서 이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은 창세기 6장, 즉 노아 때였던 것이다.

노아와 그 가족을 제외하고 모든 이들이 수장되었던 것은 그만큼 육신이 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실망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짐작케하는 사건이었다.

육신의 치명적인 문제는 하나님과의 분리이다.

아담의 타락 후에도 아벨은 하나님을 영화롭게하였고 셋의 후손들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지속해왔던 것이다.

하지만 육신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바울은 자신 안에 있는 육신이 죄의 법을 섬기고있음을 고백하면서 이를 사망의 몸이라고 규정하고있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며, 하나님과의 분리는 사망이다.

육신이 되었다함은 하나님과의 분리를 뜻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심은 이러한 근원적 분리의 문제를 해결하시고자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의 몸으로 오신 것이다.

인간의 육신은 죄에 묶인 사망의 몸이지만, 그리스도의 육신은 죄에서 자유케하는  생명의 몸으로 오신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심은 궁극적으로 택한 자와의 연합을 이루심으로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기 위함이다.

죄의 종노릇하는 육신의 세계는 분리로 규정지을 수 있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이며, 이는 연합이 아닌 분리를 가져오는 싸움이다.

전쟁으로 얼룩진 인간의 역사는 서로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에 발생하는 사건들이다.

말씀의 육신이 되심은 인류의 역사의 전환점이 된다.

그리스도의 오심 이후의 인류의 역사는 표면적으로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전쟁을 이어가지만, 내면적으로는 구속사가 진행되고있음을 볼 수 있다.

육신이 된 인간들은 연합을 이룰 수 없지만, 그 가운데 세워져가는 하나님의 나라는 연합이라는 결과물, 즉 교회를 이루어가며, 이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그 날에 완전체로서 하나님 나라를 이룰 것이다.

현재는 살아가는 성도는 바벨론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나그네와 이방인같이 세상과 분리된 자로서 살아가지만,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그 날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본향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모든 성도들과 연합을 이루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하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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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22. 5. 1. 12:40

요한복음 1장 13절 말씀 묵상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요한은 신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선포한다.

영접하고 그 이름을 믿는 이들의 행위는 사람의 뜻으로부터 나온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 의한 은혜로 인한 것임을 말한다.

그렇다면 그 반대의 상황, 즉 그 이름을 믿지 않고 영접하지 않는 것도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이는 인간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할 수 없디 않느냐는 질문이 생기게된다.

하지만 구원의 은혜를 주시지 않는다고 이를 주권자의 책임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혈통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유대인의 혈통에 대한 자부심은 유대주의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사상이다.

요한은 유대인들의 자부심의 근거였던 육신적 혈통에 대한 마침표를 찍는다.

모든 인류는 혈통으로는 처음 아담의 자손이다.

아브라함의 혈통적 자손이라고 하더라도 육신의 혈통으로는 아담의 범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상징으로서 참된 아브라함 자손은 둘째 아담의 자손이다.

육신의 혈통으로는 하나님을 배반한 죄인으로서,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죽을 수밖에 없다.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육신의 혈통에 대한 마침표를 찍으셨다.

요한이 복음서를 기록할 때, 예루살렘과 성전은 로마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육신적 혈통으로서의 아브라함 자손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의 그 임시적 역할이 종료되었다.

요한이 전하는 복음은 더 이상 육에 속하지 않는 것이다.

혈통적 유대주의에 종료를 선언한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결정에 의한 것임을 선포한다.


베드로가 경험한 영적인 혈통

혈통에 대한 종료는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에서도 볼 수 있다.

베드로는 로마 군인인 고넬료를 만나기 전에 비몽사몽간에 네 귀에 매달린 큰 보자기 같은 그릇에 담긴, 베드로가 보기에 속되고 깨끗하지 않은 것들을 잡아먹으라는 음성을 듣게된다.

베드로조차도 이때까지 유대 민족만이 아브라함 혈통의 선민이라는 의식에서 자유하지 못했던 것이다.

정한 동물과 부정한 동물의 폐지는 더 이상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혈통을 소유한 선민이라는 구분을 폐지하는 것이었다.

이는 이방인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되는 특권을 누릴 수 있는 권리를 누리게 함으로서 아브라함의 육신적 혈통의 특권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다.

이제껏 혈통은 유대인 자신들만이 언약백성이라는 자부심을 갖고있던 근거였다.

이러한 혈통에 대한 집착은 아직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있다.

제3성전을 통해서 혈통적 유대인들이 최종적 구원에 참여된다는 주장은 지금도 진행되고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세상 나라로서의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이유로는 그들이 구원을 받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마지막 때에는 어떠한 형태로든 간에 율법을 지키는 육신적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율법으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인간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주어진 율법은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기에 제3성전을 통한 세대주의적 구원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육정human decision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인간의 의지에 의해서 결정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알미니안주의가 칼빈주의와 구분되는 첫 번째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최종적 결정이 하나님께 달려있는가, 아니면 인간의 의지에 의해서 결정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됨은 인간의 결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임을 선포하고있다.

인간은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제대로 알아야한다.

인간은 자신의 하나님의 자녀됨을 결정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삶의 주체가 될 수 없는 피조물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구원 사역을 통하여 최종적으로 완성될 것이다.

구원 사역은 오직 창조주이신 하나님만의 고유한 영역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구원할 자를 미리 정하셨다.

이 또한 하나님의 주권적 영역이다.

인간은 시간 속에서 이 세상이라는 공간을 살아가지만 인간의 존재는 하나님 안에서 감추어진 존재이다.

인간의 존재는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산 자나 죽은 자나 동일하게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 가운데 드러날 것이다.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하나님 안에서 결정되어진 존재일 뿐 스스로 자신의 존재의 위치를 결정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인간의 요구를 충족시켜주는 일로 인한 것을 넘어서야한다.

인간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의 목적이 되어야하며, 인간의 기도와 삶의 방향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방향이 되어야한다.

신자는 자신의 구원이 자신의 뜻과 공로가 아닌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적 선물임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한다.


사람의 뜻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결정의 주체가 되려고한다.

하지만 사람은 자신의 위치를 결정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이미 아담 안에서 하나님께 범죄한 자이기에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범죄한 인간은 스스로 죄의 문제를 넘어설 수 없는 존재이다.

범죄자는 재판관이 될 수 없으며, 자신의 죄를 스스로 용서할 수가 없다.

범죄자에게는 결정권이 없고 오직 재판관에게만 있다.

인간이 범죄한 죄인이며, 이로 인해서 전적으로 부패한 자임을 인정하는 것은 모든 신학적 사고의 출발점이 되어야한다.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나 알미니안주의, 그리고 자유주의자들, 현대에 와서는 바르트주의자들과 새관점주의자들은 자신이 스스로 의사 결정의 주체자이며, 자신의 구원의 문제는 스스로가 결정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하여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아담의 죄의 문제는 이미 끝난 것이며, 이제는 스스로 행함의 주제가 되어서 구원에 참여하여야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아담 안에서 범죄한 자로서의 자신의 신분과 위치를 망각한 교만한 생각이다.

아담 안에서 범죄한 인간은 스스로 삶의 주체가 되려고한다.

하지만 타락한 인간의 위치와 존재는 오직 은혜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인간은 창세 전에 하나님께 택정함을 받지 않고는 스스로 주권자의 영역에 참여할 수가 없다.

오직 주권은 하나님께 있기에 신자의 삶에는 감사만이 있을 뿐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하나님의 구원하심은 창세 전부터 계획된 것이었다.

인간의 의지와 관계없이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범죄한 이후에 바로 구원을 약속하신다(창 3:15).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약속하신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서 아브라함 언약과 모세 언약을 역사 속에서 실행하시고 또한 독생자를 보내셔서 자신이 창세 전에 미리 정하신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주권적으로 구속 사역을 이루어 가신다.

하나님의 약속이 구체적으로 시작된 아브라함 언약도 자신의.계획 안에 있는 이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다.

모세 율법도 아브라함 언약을 이루기 위한 보조적 수단으로서 역사 속에서 주권적으로 실행하신 것이다.

모세 율법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정한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보조적이고 부차적인subservient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모세 율법은 구원을 위해서 주어진 것 아니라 완악한 인간의 죄를 고발함으로서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다.

모세 율법을 통한 죄에 대한 깨달음이 없이는 구원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올 수 없다.

모세 율법 자체가 구원을 위한 것이었다면, 구원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올 수 있게 된다.

하나님께서 모세 율법을 사용하셔서 구원받을 자로 하여금 율법을 지키게한다면 아무도 구원받을 수가 없다.

구원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어야만 하며, 대신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심으로서 이루신 의를 신자에게 전가시키심으로 말미암아 신자가 구원에 참여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심으로서 아담이 이루지 못한 순종의 요구를 충족시키셨으며, 또한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을 통하여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한 죄의 형벌을 대신 충족시키심으로서 자신이 정한 이들에게 구원을 얻게하기 위한 의를 전가시키신 것이다.

범죄한 아담의 자손으로서의 신자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참여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두 가지 역할, 즉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신 능동적 순종과 불순종의 형벌을 대신 받으신 수동적 순종이 전가되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신자에게 구원을 위한 행함이 요구된다면, 이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인간의 공로에 의한 협력적 구원이 된다.

신자에게 요구되는 행함은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열매로서의 성화를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자신의 행위를 자랑할 수가 없으며, 자신에 대한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을 생각하여야한다.

인류의 역사는 결국 구원할 자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역사하심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게된다.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사람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행위나 그 이름을 믿는 행위는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이 부분은 인간적으로는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다.

사람이 자신의 생각으로 자신의 행위를 결정할 수 있겠지만,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행위만은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행위는 자신에 대한 자신의 주권을 포기하는 것이다.

타락한 인간은 자신이 삶의 주체가 되기를 원한다.

인간은 자신이 삶의 주체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어떠한 우연도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없이는 일어날 수가 없다.

사람은 자신의 행동이 잘못된 결과를 가져올 때 남을 탓하거나 환경을 탓하지만 실상은 하나님께서 환경을 허락하신 것이다.

모든 긍정적 결과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당연한 것은 없다.

어둠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빛을 비추지 않으신다고 하나님이 어둠의 세력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이미 아담 안에서 범죄하였기에 죄를 짓는 행위와 관계없이 어둠의 종노릇을 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처음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사망이 왕노릇하는 세상을 살아가는 영적으로 죽은 자이기에,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모든 이들을 위함이 아니다.

이는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이기에 왜그러렇게 하시냐고 하나님께 항의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의 바벨론 유수 후에 오신 것은 죄를 깨닫게 하는 율법의 역할이 있은 후에 오신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죄에 대하여 깨닫는 일이 먼저있어야한다.

죄를 깨닫는 것 조차도 하나님의 전적인 간섭하심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개혁주의 신학은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전제조건으로 하기에 올바르다고할 수 있다.

자신이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은, 인간에게는 어떠한 주권과 권리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기에, 하나님의 주권적 간섭하심과 구원하심에 감사할 수밖에 없다.


(적용) 자녀의 구원의 문제

아브라함의 자녀는 육적인 자녀들과 영적인 자녀로 나눌 수 있는데, 이 땅에서의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중심으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육적인 자손들이다.

유대인들은 혈통적 자녀들이다.

혈통으로는 구원에 참여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적 사역에 의해서만이 구원에 참여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육신의 자녀를 키우는 부모는 자녀들의 구원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만한다.

자녀들의 구원의 문제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척박한 상황은 믿는 자들의 급격한 감소로 이어지기에 많은 기독교 가정에서 자녀들의 일탈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어려운 문제이지만 부모는 자녀들의 구원의 문제를 가지고 평생을 하나님께 간구하면서 하나님의 주권적 간섭하심이라는 은혜를 구해야만 할 것이다.

자녀라는 존재는 탄생 이전부터 하나님 안에서 감추어졌던 존재이기에 자녀에 대한 자신의 소유권을 내려놓아야한다.

자녀에 대한 인간적 집착은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적 간섭하심에 방해가 될 수가 있다.

육신의 부모는 자녀의 모든 문제를 인간적으로 해결해주려고 해서는 안된다.

자녀 스스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도록 양육하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만하도록 올바른 길로 인도해주어야 할 것이다.


(적용)근원적 사고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아래서 인간의 사고 체계는 좀 더 근원적으로 변화되어야한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인간은 자신의 행동방식이 어디로부터 온 것이고, 무엇으로 결정되어지는지를 알지 못한다.

자신이 하는 행동 조차도 자신이 왜 그러한 행동을 하는지 알지를 못할 경우가 많다.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은 인간의 행동 방식을 결정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자는 이 땅의 역사와 자신의 행동 방식에 대하여 좀 더 근원적인 시각으로 접근해보아야한다.

모든 환경의 근원에는 창조주 하나님이 계신다.

신자는 자신의 삶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뜻을 알기 위해서 자신의 행동 방식과 자신의 사고체계를 성경에 비추어보아야한다.

성경은 하나님나라의 실체를 유형적typologically으로 보여주고있다.

성경은 유형적으로 우리의 환경을 해석해준다.

우리는 성경이 제시해주는 유형적 방식으로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역사하심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신자가 성경을 읽어야하는 이유 가운데 한가지는 성경은 우리의 삶이 실체를 드러내기 위한 그림자라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삶이라는 그림자를 보고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생각해볼 수 있다.

그 실체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만 천하에 드러날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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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21. 10. 17. 18:47

요한복음 1장 12절 말씀 묵상(3)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육신의 소욕과 영적인 축복의 이중성

말씀, 생명,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어두움에 갇혀있는 세상과 그리스도께서 창조하신 땅과 그리스도의  백성이 알지도 못하였고 영접하지도 않았다.

만약에 말씀과 생명과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육신의 눈 높이에 맞추어 오셨다면 인간은 그리스도를 알아보았고, 그리스도를 따랐을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목적이 세속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세상의 인간은 영적인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영접하지도 않는다.

세상의 인간과 하나님의 세계와의 분리는 단순한 생각의 차원을 넘어선다.

유대 성전이 세속화되고, 교회가 세속화되는 것은 인간의 뿌리 깊은 육신적 죄성으로 인한 것이다.

인간의 죄성은 나쁜 짓을 한다는 개념이기 이전에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이다.

아무리 선한 일을 하여도 그것이 하나님과의 분리를 추구한다면 그것은 죄악이다.

바벨탑이 인간이 보기에는 선하고 좋을 것일 수도 있었겠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악한 것이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과의 분리를 추구하는 뿌리 깊은 악이 있다.

이는 인간이 의도적으로 하는 짓이라기보다는, 인간 자신에게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편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인간이 의도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자한다면, 이는 지극히 고통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인간의 육신의 원함은 하나님의 뜻과 충돌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육신 안에 갇혀있는 존재이다.

이는 아담의 범죄로 인한 것이다.

인간은 표면적으로는 생명이 있는 존재이지만, 영적으로는 죽은 존재이다.

영적으로 죽은 인간에게 영적인 것은 부담이 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죽음을 고발하는 고통스러운 것이다.

요한이 “그를 믿는 자, 곧 그를 영접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는 선언은 세상적인 사람에게는 별로 놀랍게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은혜는 인간의 체질에 맞지가 않다.

인간은 체질적으로 은혜를 거부한다.

아담은 범죄하고서 수고의 노동을 통하여 소산을 먹어야하는 저주를 받았다.

이는 세상을 보존하고자하는 하나님의 은혜이면서, 범죄한 인간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며 살아가야만하는 저주였다.

이러한 저주에 갇힌 인간은 하나님없이 살아가는 체질이 된 것이다.

모든 족속 가운데 있는 제단에서의 제사 행위는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것보다는 더 이상의 저주를 피하기 위한 것이 되었다. 

이미 영적으로 죽은 인간이지만, 육신의 죽음의 문제를 피할 수 있는 구원을 위한 온갖 방식의 수고를 하지만, 결국 죽음의 문제를 극복할 수는 없다.

그나마 인간에게 익숙한 방식은 공로주의라는 방식의 구원관이다.

선행을 하면 더 나은 방식으로 다시 태어난다든지, 신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 아주 높은 천국에 올라가서 멋진 삶을 살 수 있다든지, 선행을 함으로서 의에 이르려는 행동방식 등은 인간 세계에 보편적이지만,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자녀됨이라는 놀라운 선언에 대해서는 낯설어하거나 실감이 나질 않는다.

율법주의에 갇혀있는 인간

세상에 갇혀있는 인간이 빛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고 자신을 창조하신 분도 거절하는 육신이 된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은 율법주의에 갇혀있는 유대인들에게서 볼 수 있다.

유대인들의 행동 방식은 유대인들만의 독특한 행동 방식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인간의 행동 방식을 대변해주는 것이다. 

요한이 전하는 복음은 공로적 율법주의에 익숙해져있던 유대인들에게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요한은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서론을 장황하게 이어온 것이다.

어두움 가운데 있던 유대인들이 빛을 알지 못하였고 자신들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오셨는데도 이를 알지 못했다.

육체에 갇혀있는 유대인들은 율법의 목적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육신에 갇혀있는 인간은 육신에 대하여 절망하기 전까진 육신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가 없다.

율법은 육신에 죄를 정하고서 육신에 대한 절망을 선언하는 것이었지만, 육신에 갇혀있는 인간은 오히려 율법 안에서 희망을 가지려하는 것이다.

이는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인간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세상은 인간에게 결코 희망을주지는 않는다.

표면적인 희망, 즉 물질의 풍요와 명예와 성공은 결국 육신의 파멸로 이어진다.

세상에서 성공한 이들이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그들에게 성공은 결국 육신의 파멸로 이어질 뿐이다.

하지만 인간은 잠깐이라도 이러한 자들의 부류에 들고 싶어한다.

하지만 성공한 자나 실패한 자나 모두 한 가지로 생을 마감하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하나님 앞에 서는 날 가장 복된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입은 자들이다.

하지만 육신에 갇혀있는 사람들에게 이는 현실적인 것이 아니고 알 수도 없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갖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로 부터 말미암기 때문이다.

자신을 믿는 공로주의에 갇힌 모든 인간은 우상 숭배하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타락의 결과물로 짊어질 수밖에 없는 육신의 수고 안에서 인간에게는 오직 절망밖에 없다.

육신의 한계를 벗어나 영적인 축복에 참여하는 이들은, 이 세상에서의 삶이 있었기에 축복을 받을 기회가 있었던 것이다.

택함받지 못한 이들에게 이 세상은 육신의 소욕만을 체우는 곳이지만, 성도에게 이 세상은 하나님의 영원한 축복에 참여하기 위한 기회인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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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21. 10. 17. 18:40

요한복음 1장 12절 말씀 묵상(2)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육신의 소욕을 쫓아가는 인생

요한이 전하는 파격적인 선언,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인간이 그 이상을 생각할 수 없는 놀라운 사실이지만, 육신적 인간에게는 별로 현실감있게 다가오지 않는다. 

육신을 가진 인간에게는 육신적 소욕이 현실적이다.

돈과 명예와 권력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가치이다.

돈 많은 부자는 모든 사람의 선망의 대상이다.

육신적 인간에게 영적인 것은 막연하고 추상적일 뿐이다.

심지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사실조차도 육신적 인간에게는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육신의 소욕은 쾌감을 주지만 영적인 충족이 주는 기쁨과 평안은 쾌감과는 다른 것이다.

감각적인 자극과 성취감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영적인 충족은 별로 흥미가 없는 것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물질과 부귀 영화와 풍요는 1차적 관심사였고,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을 이어받은 솔로몬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부귀 영화를 위한 이차적인 존재였을 뿐이었다.

솔로몬은 성별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체성을 망각하고, 자신의 육신의 소욕을 충족시키고자 이방 여인들을 정략적으로 데리고 들어왔으며, 그들을 위해서 그들의 신전을 지어주기까지 했다. 

솔로몬이 자신이 데리고 온 여인들을 위해서 이방신전을 지어줄 수 있었던 것은, 솔로몬이 영적인 것보다는 육적인 것을 우선시하였고, 자신이 하나님보다는 육신의 소욕을 쫓았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솔로몬이 지은 거대하고 화려한 성전은 자연스럽게 솔로몬이 했던 것과 같이 육신의 소욕을 위한 우상 숭배의 장소가 되어갔다.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은 우상 숭배의 길을 걸어가게되었고,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쫓아갔던 이스라엘에게 바벨론 유수는 당연한 것이었다.

바벨론 유수와 예루살렘의 멸망은 육신을 쫓아가는 인간들에게 주어질 최후의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어둠 가운데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자기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동 방식은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아담 안에서 타락한 모든 인간이 어떠한 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욕신의 소욕을 쫓아 가게 되어있으며,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의자녀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복된 것인지에 대하여 알 수가 없다.

육신의 소욕을 쫓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이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은혜로 말미암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육신을 쫓아가는 이들에게 영적인 것은 무의미할 뿐이다.

 

죽음의 권세를 넘어선 축복

인간은 육신의 소욕을 쫓아가지만 인간이 아무리 성공을 하였다하더라도 이는 한시적이다.

인간이 한시적 삶을 산다는 자체가 죽음의 형벌이다.

인간에게 영생이 주어진다는 것은 죽음의 권세를 넘어서는 생명으로 옮겨진 것이다.

죽음과 생명은 비교될 수 없는 전혀 다른 것이다.

아무리 건강하고 잘 생기고 물질이 많고 명예가 있다고하더라도, 죽음을 앞두고 초라해지지 않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

죽음을 앞둔 이들에게 물질과 명예는 아무 소용이 없다.

죽음을 앞둔 이에게 가장 큰 축복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을 갖는 것이다.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든 이들은 죽음을 앞둔 이들이다.

한시적 삶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가장 큰 축복은 한시적 삶의 시간 가운데 영원한 것을 소유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다.

이 생의 삶이 없다면 영원한 삶은 어질 수가 없다.

이 생의 삶은 저주이면서 동시에 축복이다.

한시적 삶을 살다가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인생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지고 영생이 보장된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이다.

인간은 죽음보다도 삶이 좋다.

이는 현재의 세상이 그래도 좋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시고자하는 영생의 삶은 이 세상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완전한 환경에서의 삶인 것이다.

다가올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수고하고 땀을 흘리지 않아도 먹는 것으로 인해서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된다.

미움과 다툼이 없고, 가시와 엉겅퀴가 나지 않는 곳이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를 믿는 자들에게 보장된 곳으로서 그리스도인은 그 곳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축복을 누릴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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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21. 10. 17. 18:30

요한복음 1장 12절 말씀 묵상(1)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영접- 관계성의 회복

영접한다는 것은 상대를 피하지 않고 자신의 삶 속에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적대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이는 상대방과의 관계성에 문제가 없다는 표시이다.

사람 사는 세상의 문제는 관계성에서 출발한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이며, 이는 관계성의 파괴로 인한 것이다.

인간들 사이의 관계성의 문제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파괴의 결과물이다.

인간사의 모든 문제의 근원에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문제가 있다.

복음은 아담의 범죄로 파괴된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회복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에게 요구되는 구원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회복에 있다.

인간이 가지고있는 모든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문제에서 출발되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이 부딪치는 삶에 있어서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로 인한 것이다.

인간은 이러한 문제들에 직면하면서도 그 문제의 근원이 되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출발된 이스라엘 백성들 조차도 삶에 있어서 하나님을 외면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이는 인간에게 하나님을 외면하는 본성이 있기 때문이다. 

 

구원의 시간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이스라엘 땅에 오신 것에는 하나님의 오랜 기다리심이 있었다.

만약에 이 시간보다도 이른 시간에 예수님께서 오셨다면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대하여 공감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범죄한 후에 바로 구원 사역을 시작하셨을 수도 있으셨을 것이다.

인간은 자만심, 즉 스스로 높아지고자하는 마음과 스스로 구원의 길을 가려고하기에 경험을 통한 좌절이 없이는 자신의 무능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소망이 없음을 경험하고 이를 인정하기까지는 그 교만한 마음을 내려놓지 못할 것이다. 

2000년 전의 시간은 이스라엘의 패망의 시간이었으며, 이스라엘의 패망은 인간 모두의 패망을 대변해주는 것이었다.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 인간 스스로 구원의 길을 가본 역사가 없었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에도 2000년의 인류 역사는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인간은 완전히 좌절되지 않고는 하나님께 나아올 수가 없는 존재이다.

이스라엘 역사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좌절되는 시간이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하나님의 실패가 아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초대하기 위한 준비의 시간이다.

바벨론 유수와 로마의 통치는 예수님의 초림을 준비하는 시간이었다.

이스라엘 성전은 인간의 육신의 욕심을 채우는 장소가 아니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을 자신들의 육적인 욕심을 채우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성은 보편적 인간의 죄성을 대변해주고있다.

이스라엘 백성에 의하여 인간의 죄성이 고발되지 않았다면, 인간은 자신들의 실패를 환경이나 외부요인들의 탓으로 돌렸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거룩한 백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패망은 원인이 인간의 내부에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오셨듯이, 모든 인간의 실패와 좌절의 시간은 하나님께서 심령 가운데 들어오셔서 하나님을 영접하도록 하는 초대의 시간이다.

이스라엘의 실패가 나의 실패가 될 때 비로서 영생의 길이 열린다.

인생의 좌절의 시간은 절벽 앞에 선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부르심의 시간이다. 



행위에서 믿음으로

행위에 의한 의의 성취는 죄인인 인간이 자신의 죄를 가리기 위한 포장지와 같다고 할 수 있다.

행위에 의한 의를 추구하는 이들은 특히 외식하는데 익숙해져있다.

요한이 소개하는 믿음은 행위에 익숙해져있는 이들에게 낯설기만 한 것이다.

믿음을 위해서는 영접하는 행위가 있어야한다.

믿음의 행위는 수고하는 공로적 행위가 아니다.

영접하는 행위와 믿음의 행위는 몸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논리는 수고하여야만 소산을 먹을 수 있는 저주받은 인생의 논리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논리이다.

하나님의 자녀됨은 인간으로부터 출발된 공로적 행위로는 도달될 수 없는 권세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출발된 은혜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요한이 선포하는 믿음은 공로적 행위의 종식을 선포한다.

인간에게는 자신들에게서 출발된 인본주의적 의를 추구하려는 죄성이 있지만, 이로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인간은 어떠한 공로적 행위로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을 수 없다.

율법은 인간의 죄성을 드러냄으로서 인간에게 항복을 요구한다.

율법을 지킴으로서 의를 이루려는 이스라엘의 행동 방식은 결국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으며, 이는 인간이 하나님께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율법은 스스로 죄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교만한 인간에게 겸손을 요구한다.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영접하는 행위는 쉬운 것이지만, 교만한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것이다.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께 두 손들고 나아갈 수 없는 교만한 존재이다.

영접하는 행위는 하나님께 의존함으로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행위로서, 하나님께 항복을 선언하는 것이다.

아담이 범죄하고서 하나님을 피하여 나무 사이에 숨었듯이,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없이,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의를 이루고자했지만, 구원받기 위한 인간은 어쩔 수 없이 하나님께 나아가야만 함을 선언하고있다.

항복한 인간은 더 이상 자신이 자신의 주체가 될 수 없기에,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주 되심을 인정하여야만 한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존함으로서 자기 의를 포기하는 방식이다.

이 또한 더 이상 자신의 주체가 자신이 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됨

하나님의 아들됨은 아담에게 주어졌던 순종의 요구의 종식이면서 또한 아담에게 주어졌던 저주의 종식이다.

처음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는 아담을 통하여 하나님께 이어진다.

계보상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리스도는 둘째 아담으로서 처음 아담의 실패의 자리에 오셨다.

처음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순종과, 불순종에 대한 저주가 그리스도 안에서 충족되었기에,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리를 갖게되었다.

율법 아래있는 자들에게는 외적인 행위가 요구되었지만,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는 길이 주어진 것이다.

이는 육신적 인간의 부정이며, 사실 인간의 상태가 어떠한지 알았다면 당연한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이 완악한 인간은 스스로 좌절되기 전에는 자신의 죄성을 인정하려하지 않기에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의 실패의 시간에 오신 것이다.

그리고 로마군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종식됨으로서 사실상 이스라엘은 역사 속에 사라져버렸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스라엘만이 진정한 이스라엘로 남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로서,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의 아들됨이라는 지위를 얻게 된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으로 지으신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생각하게해준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는 더 이상 사탄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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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21. 10. 1. 12:26

요한복음 1장 11절 말씀묵상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언약공동체의 부패성

그리스도께서 오신 자기 땅은 세상과 구별되었던 곳으로, 언약 안에 있는 공동체였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언약공동체를 세우시고, 자신이 지은 세계에 대한 주권을 행사하신다.

하나님께서 언약공동체를 통하여 자신이 지으신 세계를 통치하시기에, 언약 공동체는 피조 세계 전체에 대한 대표성을 가지고있다.

언약공동체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성전을 지키고 보존하며,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역할을 하여야만 한다.

에덴이 최초의 언약공동체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은 언약공동체였으며, 아담이 최초의 언약 백성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은 아담의 역할의 역할을 재연하여 순종함으로서 언약공동체를 보존해 나갔어야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에덴을 거니시며 아담과 함께 하셨다.

아담이 범죄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다가오셨듯이, 그리스도는 육신을 입으시고 범죄한 이스라엘에게 다가오셨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땅에 오셨지만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아담이 범죄 후에  하나님을 피하여 숨었던 것과 마찬가지의 행동을 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범죄는 타민족과 달리, 왕으로서, 제사장으로서, 선지자로서의 역할에 대한 거부였다.

하나님께서 자기 땅에 오신 모습은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처음은 에덴에서 범죄한 아담에게 다가오셨지만 아담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는 행동을 하였었다.

두 번째는 시내산에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가 오셔서 처음 아담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언약을 맺으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 아담과 마찬가지로 금송아지를 만들고 우상을 섬기는 일을 하였으며, 이러한 우상 숭배는 가나안에서 생활하는 동안 지속되었다.

세 번째는 구속주로서,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육신을 입고 오셨다.

세번째의 파루시아인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에서 조차도 제사장 나라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정작 섬김의 대상을 영접하지 않는 일을 하였던 것이다.

이는 아담이 하나님의 낯을 피하였던 일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아담이 에덴 성전에서의 역할을 잘못하였듯이, 이스라엘은 성전에는 열심이 있었지만, 참된 성전이 오셨는데도 이를 거부함으로서, 자신들이 이제껏 성전에서 하였던 일들이 거짓된 것이었음을 증명해주었다.

이는 이제껏 자신들이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겼던 것이 아니라 우상을 숭배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처음 두 번과 달리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은 살기등등한 헤롯을 피하여 애굽으로 가셔야만 했다.

헤롯이 죽은 후에, 예수님의 공적인 사역의 시작과 더불어 사탄의 시험을 받으셔야했으며, 유대인들의 거부에 직면하셔야만 했다.

예수님을 받아들인 이들은 주로 연약하고 힘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육신적으로 더 이상의 희망이 없는 이들이 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였다.

예수가 정치적 메시아이기를 원했던 이들도 마찬가지로 예수를 떠나고 대적하였다.

그리스도를 거부한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예수를 육신적인 목적의 수단으로 보았던 것이다.

육신적인 목적이 있는 한 구속주로서의 그리스도를 영접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거부의 밑바탕에는 육신적인 욕심이 깔려있다고 할 수 있다.

육신의 소욕은 사탄으로부터 온 것이다.

높아지고자 하는 욕심, 좀 더 많이 소유하고자 하는 욕심은 우상 숭배로 귀결될 수밖에 없으며, 그리스도는 인간의 육신의 욕심을 채워주시는 분이 아니시기에 거부 당할 수밖에 없으셨다.

그들에게 성전은 여호와를 섬기는 장소가 아니라 인간적인 욕심을 채우는 장소였기에, 참 성전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배척 받으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이다.

디아스포라 언약공동체

교회는 이 땅에서는 핍박을 받는 디아스포라 언약공동체이다.

그리스도가 배척되었듯이 교회는 이 땅에서 배척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 8:20)"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이 땅에 머리 둘 곳이 없는 디아스포라 공동체이다.

자기 백성도 그리스도를 배척하는데 이방인들은 더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초기 기독교가 이방 사회에서 뿌리 내릴 때는 엄청난 핍박을 감당하여야만 했다.

바울의 편지를 받고 바울의 방문으로 더욱 강건하여진 로마교회는 네로의 박해라는 환란을 감당하여야만 했다.

박해를 뚫고 지역사회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교회는 불행하게도 일단 뿌리 내린 후에는 변질의 과정을 거치게된다.

핍박이 없는 교회는 변질 되어질 수밖에 없다.

교회는 사회에 대하여 하나의 세력이 될 수가 없다.

교회가 사회의 중심에 서있던 크리스텐덤의 시기동안 교회는 온갖 악행의 중심세력이 되었다.

교회는 세상의 필요를 채워주는 곳이 아니다

교회의 참된 외침은 세상의 저항을 불러 일으킨다.

개인의 욕심은 세상적이기에 교회가 이를 채워줄 수는 없다.

교회가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자 세상과 개인의 필요를 채워주는 곳이 될 때 교회는 그 수명을 다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 교회의 쇠퇴은 외부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세속화되었기 때문이다.

 

세속화된 한국교회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서 자신이 섬기는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던 사건은, 그리스도가 자신들의 육신적 욕구를 채워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이 성전에 오셔서 보신 성전의 모습은 장사하는 곳이었다.

많은 한국교회들도 마찬가지다.  

특히 메가처치에서는 이러한 모습이 어김없이 나타난다.

돈이 없이는 교회 생활이 거의 불가능하다.

어느새 교회의 중심은 참된 교회인 성도가 아닌, 성전이라 불리우는 건축물이 되어버렸다.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성공의 기준은 성전건축이다.

목회자들의 욕심이 그리스도의 몸된 성전을 화려한 건물로 대체시켜버린 것이다.

성전 건축 후에는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양심의 부끄러움도 없이 거짓말을 하기도한다.

진정한 성전은 그리스도의 몸과 그 지체들인 성도들이다.

교회 건축물은 성전이 아니라 참 성전인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모이는  장소로서의 예배당이다.

성전이라고 전축된 예배당을 건축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하게된다.

이러한 이유로 설교의 많은 부분이 세속적이 되어질 수밖에 없다.

교인들도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자 세속화되었기에, 목사와 교인이 하나같이 세속적이 되어져간다.

욕심을 가진 목회자들은 세속화된 교인들에게 죄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는다

죄에 대하여 설교하면 교인들이 싫어하기 때문이다.

죄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는 은혜와 복음에 대하여 제대로 말할 수 없다.

이미 대부분의 한국교회에서는,  죄에 대하여, 은혜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 것이 관례가 되어 버렸다.

이러한 세속화는 말씀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 행위와 같은 것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반복하고있는 것이다.

교회가 이익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때에만 교회는 죄에 대하여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다.

교회가 욕심에 이끌려 이익의 문제에 얽매이게 될 때 그리스도의 말씀이 제대로 선포되어질 수 없으며, 이는 자기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유대인들의 행동방식과 다를바 없는 것이다.

도시교회는 생존 자체가 쉽지 않은 구조로 되어있기에 더욱 시험에 들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익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한 교회는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주체가 될 것이며, 이는 이미 중세 유럽에서 보편화되었던 현상이었다.

이익의 문제에 묶여있는 로마카톨릭은 말씀을 왜곡하여 해석하고, 하나님의 성도들에 대한 박해도 서슴치 않는다.

진정한 교회는 이 세상에 대하여 디아스포라로 남을 수밖에 없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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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21. 9. 25. 18:04

요한복음 1장 10절 말씀 묵상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두 가지 극단적인 상황

그가 세상에 계셨다함은 세상에 거주하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재하셨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마치 범신론Pantheism과 범재신론Panentheism의 차이처럼 en-의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가 세상에 내재해 계셨다는 것이 범재신론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범재신론은 피조물 자체에 신적인 존재가 내재해 계신다는 유물론적 신관이며, 거룩하지 못한 인간과 거룩하신 하나님의 경계를 없애는 작업이다.

세상에 내재해 계신다는 것은 세상이 그리스도의 주권적 간섭하심의 영역에 있음을 의미하며, 또한 거룩하지 못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볼 수는 없지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신바 될 정도로 우리 가운데,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고 간섭하시고 주관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신다는 이러한 사실은, 거룩하시고 크신 창조주께서 거룩하지 못한 피조물을 사랑하셔서, 아끼시고 간섭하시면서 직접적으로 다가오신 놀라운 사실적 정황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는 창조주이신 그리스도께서 보이지는 않으시지만, 역사의 시간 속에서 자신이 지으신 사람들 가운데 이제껏 함께 계셨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세상은 그리스도께서 만드신 피조 세계로서 그가 세상에 계셨다함은 조물주가 피조 세계에 들어오신 놀라운 사건이다.

거룩하신 높으신 분이 죄악에 물든 가장 낮은 자리에 오신 있을 수 없는 파격적인 상황이다.

이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는 2절의 내용이 10절에서 반복적으로 서술되고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창조주라는 것을 강조하기보다는 자신이 창조하신 세상에  창조주께서 들어와 계신 상황에서의 피조세계의 마땅한 상황을 서술하기 위한 것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피조 세계인 이 세상은 너무도 당연히 요구되었던 것이 이루어지지 않고있다.

바로 이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다는 놀라운 상황이 벌어지고있는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의 놀라운 상황이 이 한 구절에 표현되어있는 것이다.

창조주께서 자신의 피조 세계에 들어와 계신다는 놀라운 상황과 인간이 자신을 창조한 창조주를 알지 못하였다는 또 다른 극단적인 상황이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얼마나 파격적인지 조금이나마 생각해 볼 수 있는 상황이다.

인간은 자신에 대하여 너무 모른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감사할 상황에서도 감사보다는 불만이 가득한 것이 인간이다.

복음은 있을 수 없는 극단적인 상황이 이 땅에서 일어난 것에 대한 것이다.

복음은 자식이 부모를 못 알아보는 상황에서, 부모를 거부하는 상황에서 부모를 죽이는 사건으로 이어지는 것이었지만, 부모는 자식에게 죽임을 당하면서까지 자식을 구해내는 사건에 대한 것이다.

복음은 부모의 놀라운 사랑의 행동과 자식의 악한 모습의 극단적인 대조를 동시에 보여주고있다.

변질된 지식

아담은 에덴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면서 하나님과 함께하였던 경험이 있었고,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알고 있었다.

아담이 범죄하여 에덴에 쫓겨난 다음에도 아담은 자신의 자손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담은 자신의 범죄로 인한 죽음의 문제가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창 3:15)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자손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전달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담이 범죄하고서 하나님을 피하였듯이, 타락한 아담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싶지 않았을 것이고, 하나님에 대하여 올바른 지식을 전달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담의 후손은 어느 누구나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구원에 대한 소망은, 하나님께 대한 왜곡된 지식으로 인해서 다양한 왜곡된 모습으로 나타나고있었다.

지구상의 족속 가운데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족속은 없지만,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지식을 근거로 하는 경우는 없었다.

인간이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는 것은 인간의 본능으로 창조주에 대한 인식에 근거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아담의 자손으로서 조상으로부터 전해들은 구속 사역에 대한 왜곡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타락한 인간은 자신이 편한대로 자신의 방식으로 신을 섬기지만, 족속마다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다양한 방법으로 섬겨왔다.

가나안 족속 가운데에는 자식을 불 가운데 드리는 족속도 있었고, 마야문명이나 잉카문명에서도  인신공양이 뿌리깊게 문화의 중심을 이루고있었다.

이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요구하셨던 방식과도 유사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 중심에 있어서는 구속주를 아는 지식에까지 이르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이 세상은 아담의 원시복음에 대한 기대감으로, 인간이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피의 제사가 요구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속죄양으로 오실 그리스도에 대하여는 알지를 못하였기에, 결론적으로 세상은 그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오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구속을 향한 인간의 자세는, 인간의 죄성으로 말미암아 왜곡된 모습으로 나타나고있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 중심적인 해석을 하기에, 은혜 가운데 구속주로 오신 그리스도를 따름의 대상으로 섬기거나, 기복신앙의 수단으로 이용하기도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한 왜곡은 죄성에 물든 인간이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계속될 것이다.

몰랐다는 핑계

하나님과 구속주에 대하여 몰랐다고 말하는 것은 핑계가 되지 않는다.

이러한 핑계는 인간의 직관적인 감각과 인식에 대한 것보다는 좀 더 근원적인 것이다.

인간의 죄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은 것이었듯이, 구속주에 대한 지식은 이미 원시복음(창 3:15)을 통하여 아담에게 말씀하여주신 것이다..

아담이 지식 전달을 왜곡할 수도있고, 그 후손들이 왜곡시켰을 수도있었겠지만, 결과적으로 그 영향은 현제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속의 언약을 믿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말씀하신 구속의 언약을 모든 사람이 마음에 담고 기다리기를 원하셨지만,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창조주이시며 구속주이신 그리스도를 알지를 못하였고, 마음으로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이들의 알지 못함은 구원을 위한 공로로서의 자기 의에 대한 추구로 이어졌으며, 인간은 자기 의를 추구하는 교만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인간의 비참함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소망을 거부하는 죄악에 있다.

자기 의를 추구하는 인간은 결국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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