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21. 9. 22. 21:36

요한복음 1장 9절 말씀묵상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참 빛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를 빛으로 소개하는 것은 어둠에 대한 필요였으며, 그리스도는 어둠의 문제를 해결해주신 분으로 묘사되었다.

참의 뜻은 진짜의, 실제의, 정당한, 신뢰 할 수 있는...등이 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가짜의, 신뢰하지 못할 모양만 빛인 가짜가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전까지의 각 사람을 비추었던 모양만 그럴듯한 거짓 빛은 많은 사람들에게 호소력이 있는 인간적이고 보편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참 빛은 일반적인 사람이 인간적으로는 알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고, 오직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은혜로 알 수가 있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었다.

이들은 자신이 영적으로 어둠 가운데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서 이들은 빛을 마땅히 알아 볼 수가 있다.

그리스도께서 어둠 가운데 빛으로 오셨는데도 빛을 알아보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은 자신들이 어둠 가운데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시적인 빛은 영적인 빛의 모형일 뿐이다.

빛을 인식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빛에 대하여 아무리 설명을 해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빛을 통해서 유형적으로 영적인 빛을 생각해 볼 수 있듯이, 삶 가운데 경험하는 다양한 부정적인 상황을 통해서 어둠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영적인 안목이 있다면, 그리스도께서 왜 이 세상에 빛으로 오셔야만 했는지 상황 가운데 알 수 있을 것이다.

육적인 문제의 근원에는 영적인 어둠의 문제가 있다.

근원적인 접근이 없는 육의 문제만을 위한 빛이라면 그것은 참 빛이 아니며, 신뢰할 수 없는 빛이다.

요한이 그리스도를 참 빛이라고 소개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지 전에 사람들이 육의 문제만을 위한 거짓 빛에 미혹되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말하고 교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활동하는 많은 영역들에서 육적인 문제만을 위한 활동들이 활발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들이 말하는 그리스도는 단지 자신들의 육적인 욕심을 이루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한때 유행하였던 비지니스 차원의 실용주의 교회들은 교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을 교회 성장의 원동력으로 삼았지만, 그 큰 교회들은 사실상 거의 다 실패를 하고 사라져버렸다.

이들은 참 빛이 아닌 세상의 거짓 빛을 따랐던 이들이다.

이러한 문제는 실용주의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 교회의 일반적인 현상이라는데 문제가 있다.

많은 교회가 실용주의적이 되었는데도 이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흔히들 교회는 많은데 나아갈 교회가 없다고 말한다.

이는 대부분의 교회가 참 빛이 아닌 빛의 모양을 한 거짓 것, 즉 영적인 어둠이 아니라 육적인 어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교회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이는 외형적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다.

참 교회인 신자라 할지라도 넘어서기 힘든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참 신자라하더라도 인간적인 연약함으로 인해서 참 빛보다는 세상의 거짓 빛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경우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신자는 이를 정당화시켜서는 안된다.

신뢰할 수 없는 거짓 빛들

인생은 끊임없이 성공을 추구한다.

이에는 살아남기 위한 인간의 본능을 넘어서는 인간의 욕구가 있다.

성, 명예, 권력은 인간이 추구하는 대표적인 것들이지만, 꼭 필요한 필수적인 것들은 아니다.

하지만 이를 쟁취하기 위한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그리스도께서 참 빛으로 오신 것은 이스라엘이 가장 절망적인 상태에 있을 때였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윗과 솔로몬 때에 오시지 않으셨다.

다윗은 자신의 성공 뒤에 숨겨있던 어둠의 문제를 안고서 고통스럽게 씨름을 하였다.

하지만 솔로몬은 자신의 성공을 통해서 이방 여인들과 이방 신들이 이스라엘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결국 세상의 거짓 빛을 따라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가 되고 이방인이 되고 나그네가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들이 어둠 가운데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이 추구했던 영광과 부는 세상의 거짓 빛이었다.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다시 영광과 부라는 거짓 빛을 제공해주시지는 않으셨다.

그리스도의 사역 후에 그들이 붙들고 있었던 세상의 거짓 빛들은 예루살렘의 멸망과 더불어 사라져버렸다.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신자들은 성공이라는 거짓 빛을 쫓아가서는 안 된다.

이것을 쫓아갈 때 교회는 거짓 빛을 추구하는 변질된 곳이 되어버린다.

예전에 어떤 목사는 젊은 이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자신이 속한 분야에서 최고자 되어야한다고 주장하며, 세상에서의 성공을 부추겼다.

수 많은 젊은 이들이 그의 설교에 매료되어 그를 추종하였지만, 그는 결국 성추행 목사의 대명사가 되어버렸다.

그의 성공을 향한 수 많은 설교들은 신뢰할 수 없는 거짓 빛들이었던 것이다.

 

어둠 가운데 만나는 참 빛

사람은 누구나 살면서 깊은 실패와 좌절을 맛보게 된다.

아무리 성공을 추구하고 세상적으로 성공하였다고 하더라도, 이로서는 내면 세계의 결핍을 충족시킬 수가 없다.

실패도 절망적이지만, 영광과 부의 끝도 타락과 절망뿐이다.

이는 인간의 본질인 죄성의 문제로 인한 것이다.

인간의 죄성은 근원적인 어둠의 문제이기에 그리스도의 참 빛이 아니고는 해결될 수가 없다.

하지만 인생의 꼭대기에서나, 혹은 성공을 추구하는데서는, 참 빛을 만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것은 자신들의 바램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자신들이 정치적으로 해방되어, 자신들의 승리를 외칠 수 있는 육적인 시오니즘 때문이다.

인생이 참 빛을 만날 수 있는 시기는 자신들이 절대적인 어둠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안 순간부터이다.

인생에 더 이상의 희망이 없고, 자신에게 재기의 기회가 주어질 가능성도 없고, 자신을 지탱해주었던 명예와 자랑은 다 사라져 버렸을 때 비로소 참 빛에 대하여 반응하게된다.

이는 빛을 알고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빛에 반응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 주셔서 마음의 문을 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육적으로 가장 절망적인 상황이 영적으로는 가장 희망적인 상황이다.

실패와 좌절과 낙망 가운데 경험하는 빛은 인생에 참된 안식을 가져다 준다.

더 이상은 거짓 빛을 추구하려하지 않게된다.

이 때에야 비로소 거듭난 자로서 참 빛 가운데 거하게 되는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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