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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2.18 :: 사도행전 19장 21-41절 말씀 묵상
  2. 2018.02.16 :: 사도행전 18장 24절- 19장 7절 말씀 묵상 1
사도행전 2018. 2. 18. 23:17

사도행전 19장 21-41절 말씀 묵상

21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22  자기를 돕는 사람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마게도냐로 보내고 자기는 아시아에 얼마 동안 더 있으니라
23  그 때쯤 되어 이 도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
24  즉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은으로 아데미의 신상 모형을 만들어 직공들에게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25  그가 그 직공들과 그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풍족한 생활이 이 생업에 있는데
26  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전 아시아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27  우리의 이 영업이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신전도 무시 당하게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
28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분노가 가득하여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니
29  온 시내가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어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가는지라
30  바울이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고자 하나 제자들이 말리고
31  또 아시아 관리 중에 바울의 친구된 어떤 이들이 그에게 통지하여 연극장에 들어가지 말라 권하더라
32  사람들이 외쳐 어떤 이는 이런 말을, 어떤 이는 저런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
33  유대인들이 무리 가운데서 알렉산더를 권하여 앞으로 밀어내니 알렉산더가 손짓하며 백성에게 변명하려 하나
34  그들은 그가 유대인인 줄 알고 다 한 소리로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기를 두 시간이나 하더니
35  서기장이 무리를 진정시키고 이르되 에베소 사람들아 에베소 시가 큰 아데미와 제우스에게서 내려온 우상의 신전지기가 된 줄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36  이 일이 그렇지 않다 할 수 없으니 너희가 가만히 있어서 무엇이든지 경솔히 아니하여야 하리라
37  신전의 물건을 도둑질하지도 아니하였고 우리 여신을 비방하지도 아니한 이 사람들을 너희가 붙잡아 왔으니
38  만일 데메드리오와 그와 함께 있는 직공들이 누구에게 고발할 것이 있으면 재판 날도 있고 총독들도 있으니 피차 고소할 것이요
39  만일 그 외에 무엇을 원하면 정식으로 민회에서 결정할지라
40  오늘 아무 까닭도 없는 이 일에 우리가 소요 사건으로 책망 받을 위험이 있고 우리는 이 불법 집회에 관하여 보고할 자료가 없다 하고
41  이에 그 모임을 흩어지게 하니라


하나님 나라와 세상과의 충돌

유대인들이 에베소에 있었던 동안에는 아데미를 섬기는 이들과 별다른 충돌이 없었다.

바울의 복음 전파 후에 일어난 충돌은 표면적으로는 이권의 문제였지만 근원적으로는 영적인 충돌이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동반하는 것으로서, 에베소에서의 소동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함으로서 생기는 현상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율법 안에 있었던 유대인들 가운데 이미 하나님 나라가 실체적으로 임하였다는 새관점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에베소 사람들이 마술책을 태우는 사건으로 말미암아 신상들로 장사를 하는 이들은 손실을 입을 수 밖에 없었다.

이는 신자들의 세계관의 변화로 인하여 생긴 현상이다.

기독교 세계관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이 땅에서 살아가는 관점에 관한 것으로서 에베소에서의 사건을 통해서 세계관의 변화의 모습을 단적으로 볼 수 있다.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의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신자가 세상의 문화의 구조를 바꾸어야한다고 말하지만, 에베소에서의 사건을 보면, 우선적으로 신자들의 삶이 우상 숭배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으로 전환된 것을 볼 수 있었고, 이러한 변화는 세상 문화를 바꾸기보다는 세상 문화와의 충돌을 경험 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 일어난 에베소에서의  사건은 이 땅의 교회가 어떠해야하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에베소의 굉장함과 이권과 허황됨과 정치적 상황등 모든 면에서 충돌될 수 밖에 없다.

교회는 끊임없이 세상과 충돌하면서 성장 할 수 밖에 없다.

세상과 충돌하지 않는 교회는 이미 교회가 세상과 같이 되어 버렸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굉장함에 사로잡힌 사람들

굉장함은 하나의 집단성을 창출한다.

세상 집단의 상징은 힘과 규모를 자랑하여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께 성전의 규모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였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을 말씀하셨다.

세계 7대 불가사의라고 말할 정도로 규모가 컷던 에베소의 아데미 신전은 에베소에서의 우상 숭배가 얼마나 큰 규모였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에베소 사람들이 연극장에서 두 시간 동안이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라고 외칠 수 있었던 것은 에베소 사람들이 아데미의 크기만큼이나 큰 자부심을 가지고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두 시간이나 외친다는 것은 거의 탈진힐 때까지 외쳤다는 말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는 희생과 초라함과 수치를 보여주는 것이다.

교회가 규모의 크기를 추구한다면 이는 십자가와 조화를 이룰 수가 없다.

한국 교회가 세계에서 제일 큰 규모의 예배당을 자랑하는 것은 바로 세계에서 제일 큰 규모로 교회가 변질되었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가장 큰 수치는 예배당의 크기를 목회 성공의 크기와 연계시키는 것이다.

이들은 참 복음을 모르는 이들이다.


상징적 대표성

어느 단체나 단체를 대표하는 상징을 가지고있다.

상징은 집단의 특성을 대변해 준다.

상징의 몰락은 집단의 몰락을 의미한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과 같이 올림픽 경기에서의 선수들은 나라에 대한 대표성을 가지고있기에 이들의 경기 성적은 나라의 우수성을 대변해주기도한다.

에베소 사람들은 두 시간동안이나 아데미를 불러대며 에베소와 아데미를 연계시킨 것은 자신들이 아데미의 굉장함 만큼이나 굉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자로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자들이다.

신자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값주시고 산 자들이기에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어떠한 대표성을 띤 상징을 사용해서도 안된다.

신자들은 세상의 어떠한 것도 자신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좋은 학벌과 좋은 가문과 재력과 뛰어남을 자랑으로 삼아서도 안된다.

심지어 큰 교회에 다닌다는 자부심으로 자신을 큰 교회 목회자와 연계시켜서도 안된다.

신자는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내기 위해서 세상의 커다란 상징이나, 힘 있는 사람과 연계되어있음을 자랑해서는 안된다.

에베소 사람들이 아데미를 외친 것은 이러한 죄성이 극대화 되어 나타난 한 가지 예라고 할 수 있다.

신자는 오직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침을 받은 자이기에,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스도를 나타내면서,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갈 뿐이다.


이익과 충돌되는 복음

바울이 에베소에 복음을 전하면서 일어난 소동은 이권 문제에서 기인된 것이다.

교회도 이권이 개입되면 싸움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에베소에서의 복음 전파는 비싼 마술 책의 가치를 무너뜨렸으며, 신상을 통한 이익의 상실을 가져왔다.

교회는 가치의 기준을 바꾸어야만 생명이 유지 될 수 있다.

세상적 이권은 교회의 순수성을 파괴시킨다.

세상에서 권력이나 재력을 가진 사람은 교회에서 순수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다.

세상에는 완전하게 순수한 교회가 있을 수가 없으며, 이러한 이들이 교회에 출석하게되면 우선 목회자부터 이들이 가지고 있는 세상적인 메리트를 말씀의 진리 위에 두려고한다.

위생 기구도 지속적으로 소독을 하지 않으면 금방 오염이 되듯이, 성도들은 말씀에 의한 계속적인 정화가 없이는 깨끗함이 지속시키기 어렵다.

교회가 가치 기준을 바꾸지 못한다면, 바로 이 이권이라는 오염 물질이  교회 공동체를 파괴시킬 수 밖에 없다.

이스라엘의 부패와 마찬가지로 교회 공동체도 규모가 커지게되면 복음의 가치가 상실되면서, 세상의 가치 기준인 이권으로 말미암아 부패하게 되어있으며, 부패된 교회의 종국은 아데미를 외치는 에베소 사람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 위에 선 교회는, 세상의 가치를 압도하는 복음의 가치를 선포하면서, 세상적인 이권에 대하여 경계하는 만큼이나 오랫동안 생명력이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복음의 현실성

복음은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세상적인 복과는 구분되어야한다.

에베소에서 사람들이 바울에게 집중될 수 있었던 것은 여러가지 기적으로 말미암은 것도 있다.

세상적인 것은 동기는 될 수 있어도 추구하는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에베소에서의 문제는 처음의 것을 얼마나 지속 시킬 수 있었느냐이다.

에베소 교회는 처음 사랑을 잃어버림으로서 요한의 책망을 받았다.

교회의 지속적인 생명은 현실에서 찾기보다는 소망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바라보면서 처음 사랑을 지속 시킬 수 있어야한다.


복음은 미래적이며 영적이기에,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세상적인 복이 없다고하더라도 복음 안에 담겨있는 숨어있는 가치를 발견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잃지 말아야할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
사도행전 2018. 2. 16. 23:17

사도행전 18장 24절- 19장 7절 말씀 묵상

24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


학문이 발달된 알렉산드리아에서 아무리 예수에 대하여 많이 배웠다고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성령의 강림하심에 대하여는 시간적으로 알 수 있는 상황이 허락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요한의 세례에 대하여, 그리고 예수에 대하여 많은 지식이 있다고하더리도 이 지식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성령의 강림하심으로 이루어지는 완성된 새언약에 까지 이르지 못한 것이다.

25  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요한의 세례를 근거로한 예수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통하여 알게된 주의 도와는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요한의 세례만 알고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지금도 가능한 일이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보는 신약은, 바울을 예수와 대립적인 관계로 보거나, 아니면 공관복음만을 강조하고서 서신서를 최소화시킨다.


바울의 서신서를 공관복음과 대립관계로 보거나 아니면 최소화시켰을 때, 공관복음은 유대교의 연장 선상에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유대 이스라엘의 완성이라는 주제로 해석될 수 있다.


공관복음과 바울의 서신을 대립관계로 보는 불트만 학파의 영향을 받은 톰 라이트는 공관복음을 유대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라 완성을 위한 메시아 예수로 그려낸다.


성령 세례를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배제된 신학은 성경을 하나님 나라 운동을 위한 윤리나 도덕책 정도로 변질시킬 뿐이다.


요한의 세례만을 전하는 복음은 부족한 복음이 아니라 변질된 복음이 될 수 있다.


26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더라


열심은 결과를 도출하기 위한 기본 동력이 된다.


열심으로 나온 결과물은 부족함을 채울 수 있는 동력이 되며, 성숙을 위한 원동력이다.


세상에는 처음부터 완전한 사람은 없다.


베드로나 바울도 나름대로의 열심이 원동력이 되었으며,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열매를 볼 수 있었다.


게으름은 하나님께서 주시고자하는 열매들을 맺기를 거절하는 불순종이 될 수도 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열심 가운데 바을과 같이 사역하는 시간이 많았기에 바울에게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고 시기 적절하게 아볼로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다.


기회가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에 열심 가운데 깨어있을 필요가 있다.


비록 더디지만 성경를 붙들고 씨름하다보면 진보가 있게 마련이다.


성경과 씨름하다보면 하나님의 간섭하심의 섭리에 의해서 만남을 통한 또 다른 열매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인에게는 사람을 직접 만날 수도 있겠지만 책을 통해서나 정보 매체를 통한 만남을 통해서 영적인 진보를 이룰 수 있는 많은 기회들이 주어진 축복이 있다.


현대의 성도들은 페북이나 여러가지 수단을 통해서도 만남이 이루어지면서 영적인 진보의 결실을 볼 수 있기에 사도 시대와는 달리 빠른 속도로 복음이 전파될 수 있다.

27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함으로 형제들이 그를 격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를 써 영접하라 하였더니 그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28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언하여 공중 앞에서 힘있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이러라


예수는 메시아이시다.


복음 전파는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이 되어야한다.


메시아는 유대 이스라엘의 메시아 이전에 모든 인류의 메시아이시다.


복음은 그리스도에 관한 것으로서, 기독론보다는 신론 중심으로 바뀌는 현대 신학이 오히려 복음 전파에 장애가 되고있다.



1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2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3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아볼로와 마찬가지로 에베소에서의 제자들도 바울의 복음 전파가 없었으면 지식으로만의 그리스도를 알았을 것이다.


성령의 능력은 지식의 더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식의 차원을 넘어서는, 위로부터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것이다.

요한의 세례는 성령 세례의 전단계로서 필요하지만 성령 세례로 이어지지 못하는 요한의 세례는 복음이 아니라 울법보다도 더욱 무거운 짐으로 다가올 것이다.


사도시대에는 시간적으로 성령 세례의 필요가 대두되지만 현대에 와서는 인위적으로 성령의 사역을 제한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신학에서의 성령은 주로 회개를 하게하시는 분으로 제한된다.


이는 포스트모더니즘 교회인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나 혹은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이머징미셔널 처치에 많은 영향을 미친 몰트만이나 판넨베르크 신학의 특징은 위로부터의 계시 신학과 대립되는 아래로부터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판넨베르크는 철학과 자연과학과 소통이 가능한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신학을 강조한다.


이성과 논리를 기초로한 신학은 계몽주의에서 태동된 자유주의 신학의 방법론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신학에서의 성령의 역할은 마치 세례 요한이 외쳤던 회개에 초점을 맞춤으로서 기독교를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종교로 만들어 버린다.


아무리 많은 지식을 근거로 한 신학이라고하더라도 하나님의 모든 것을 아시는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단지 인간의 교훈에 그칠 뿐이다.



4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요한의 회개의 세례를 받은 이들은 오실 이, 즉 예수께 인도되어야지만 결실을 보게되듯이, 율법 아래있는 이스라엘도 그리스도께 인도되어야지만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예수는 복음의 본체이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의 문제는, 유대적 이스라엘 자체를 구원의 은혜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본체로 보면서, 그리스도는 단지 하나님 나라로서의  유대적 이스라엘을 완성시키신 수단에 불과한 부차적인 존재로 낮추어버린 것이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의의 근거는 그리스도가 아닌 하나님의 의를 근거로하기에, 새관점에서의 예수는 의를 이루신 분도 아니시며, 삼위 하나님의 신성이 없이도 가능한 선지자 차원의 역할을 하신 분으로 변질되어버렸다.

어떠한 신앙의 유형도 그리스도께 귀결되지 않는 신앙은 잘못된 것이다.


5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7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주 예수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는, 처음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죄에 오염된 인간이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를 전가 받아 깨끗함을 입게된 것이다.


복음은 처음 아담의 타락을 만회시킬 수 있으신 둘째 아담의 개념에서 생각되어져야한다.


처음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분리된 인간은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시 하나님과 연합되어야한다.


성령 세례는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받은 이들이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음을 하나님이 보증하시는 증거이다.


연습을 통한 방언은 마치 크리스마스 트리에 매다는 장식과 같이 나무의 열매는 아니다.


성령 세례의 증거는 선한 행실로 나타나게 되어있다.


도덕 윤리를 통한 선행은 크리스마스 트리의 장식일 따름이며, 오히려 타종교인들이 더 잘 할 수도있고, 공로주의 신학을 가지고있는 천주교가 더 잘할 수도 있다.


성령 세례받은 신자는 도덕 윤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선하신 향기를 발할 뿐이다.

교회가 사회로부터 많은 욕을 먹을 때 성도들은 진정 성령 세례를 받았는지 점검해 보아야한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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