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애가 4장'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8.03.21 :: 예레미야애가 4장 11-22절 말씀 묵상 1
  2. 2018.03.20 :: 예레미야애가 4장 1-10절 말씀 묵상
예레미야애가 2018. 3. 21. 18:07

예레미야애가 4장 11-22절 말씀 묵상


11  여호와께서 그의 분을 내시며 그의 맹렬한 진노를 쏟으심이여 시온에 불을 지르사 그 터를 사르셨도다

하나님은 인간과 언약 관계에 있기 때문에 인간에 대하여 진노하실수 있는 관계성을 갖고 계신다.

유다는 하나님의 언약, 즉 행위 언약에 대한 책임이 있는 이들이기에, 자신들의 불순종에 대한 책임을 져야만 했다.

인간이 사는 환경 가운데 임하는 모든 재앙은 직간접적으로 인간에게 책임이 있다.

일차적인 책임은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한 것이며, 모든 인간은 아담의 후손으로서 사는 동안 재앙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현대 과학은 모든 재앙의 원인을 현상적이고 자연 과학적으로만 설명하려고 한다.

자연 과학은 그 뒤에 숨겨진 하나님의 손길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과학 맹신주의는 모든 현상을 현상적으로만 설명하기에 사람을 무신론으로 이끌 수 밖에 없다.

과학자들이 보는 성경은 과학이 제공해주는 현상을 넘어서지 못한다.

과학은 천상의 세계Upper-Register에 대하여 아무 말도 할 수 없기에 과학을 근거로 성경을 해석해서는 안된다.

인간이 보기에 이 세상의 어떠한 무익한 일들도 하나님의 섭리 바깥에 있는 것은 없다.

신자는 삶의 모든 현상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항상 의식하여야한다.


12  대적과 원수가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갈 줄은 세상의 모든 왕들과 천하 모든 백성이 믿지 못하였었도다

대적과 원수가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간 것은 에덴에 뱀이 하와를 속여서 아담으로 멸망당하게 한 것과 유사하다.

이는 궁극적으로 성전되신 그리스도의 몸을 십자가에 못박는 행위였으며,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종결 될 수 밖에 없었다.

세상의 교회도 마찬가지로 사단에 의하여 공격을 당하고있다.

사단의 공격이라기 보다도 교인들이 사단에게 문을 활짝 열어주는 행동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뱀에게 책임을 돌리고 있지만 이는 책임지지 않으려는 인간의 죄성에서 나온 것일 뿐, 실상은 당사자에게 책임이 있다.

신학교와 교회가 총체적으로 흔들리고있다.

신학교와 교회에 들어온 적대세력의 문제는 일차적으로 당사자에게 책임이 있다.

여기서 해결책은 책임을 외부에 돌리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 각자가 모두 다 스스로의 책임을 인정하고 회계하며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것 뿐이다.

인간적인 방법은 또 다른 부작용을 낳기에, 인간이 자신의 혈기로 앞서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 보다는, 오직 하나님의 간섭하심 가운데 문제를 풀어나아가야한다.

이를 위해 행동보다도 기도가 앞서야 할 것이다.


13  그의 선지자들의 죄들과 제사장들의 죄악들 때문이니 그들이 성읍 안에서 의인들의 피를 흘렸도다

교회가 내분이 있었을 때, 교단 신학교의 교수로부터 들은 한 마디는, 총회 재판국에 올라오면 돈이 많은 쪽이 이긴다는 것이었다.

교단 재판국의 구성원들이 얼마나 부패되었는지를 보여주는 한마디였다.

왜 성폭력 혐의로 고소된 목사가 총회 재판국에서 징계를 받지 않았는가를 곰곰히 생각해 본다.

이는 목회자들이 유다의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처럼 부패하였다는 증거이다.

이들은 인간 관계 혹은 돈에 의해서 판결을 굽게하거나, 아니면 자신들도 음란의 죄에서 자유하지 못하기에 동료의 음란 죄를 덮어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몇년 전에 새로 부임한 목사는 자신의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서 기존에 자리잡고 있던 성도를 쫓아내는데 온 힘을 쏟아낸다.

대대로 집안에서 교회에 뿌리를 내렸던 많은 성도들이 고통 가운데 교회를 떠나야만 하는 모습들을 봐야만 했으며, 지금도 진행형이다.

아무리 신학교에서 잘 배우고 지식이 많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세력을 굳히기 위해서 정관을 바꾸고,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쫓아내는 목사가 과연 하나님의 사람일 수 있는지 의심이 된다.

이러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해야한다는 것의 고통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유다의 문제는 일차적으로 선지자와 제사장에 있었듯이, 오늘의 교계의 현실에는 목회자들에게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목회자의 모습이 기이할 뿐이다.



14  그들이 거리 거리에서 맹인 같이 방황함이여 그들의 옷들이 피에 더러워졌으므로 그들이 만질 수 없도다


교회가 혼탁해지면서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할 곳이 상실되어가고있다.

진정으로 교회를 나가지 않는 성도들보다도 표면적으로는 교회에 속하여 교회 생활을 하는 이들이 실질적으로는 거리에서 맹인과 같이 방황하는 이들이 될 수도 있다.

교회가 신분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하나님의 자녀는 오직 하나님이 보증해주실 뿐이다.



15  사람들이 그들에게 외쳐 이르기를 저리 가라 부정하다, 저리 가라, 저리 가라, 만지지 말라 하였음이여 그들이 도망하여 방황할 때에 이방인들이 말하기를 그들이 다시는 여기서 살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어느새 목사와 장로라는 명칭은 교회 안에서만 통용될 뿐, 사회에서는 조롱 거리의 명칭이 되어버렸다.

많은 이들이 문화 변혁을 외치면서, 세상을 기독교화하자고 외치지만, 정작 이들은 내부적인 싸움에서 세상 못지않은 추태를 보이는 경우가 너무 많다.

이들은 성령의 사역을 말하지만, 이들이 말하는 성령의 사역은 윤리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성령은 세상을 변화시키기보다는 택한 성도를 변화시키신다.

자연법 아래에 있는 세상은, 율법 아래있는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심판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성령의 사역이 없는 변화는 인본주의적 발상일 뿐이다.

윤리적 기독교는 구약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며, 이방인의 조롱을 받는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세상 사람의 조롱을 받을 뿐이다.

오직 성령으로 거듭난 착한 행실이 세상에 빛을 발할 뿐이다.


16  여호와께서 노하여 그들을 흩으시고 다시는 돌보지 아니하시리니 그들이 제사장들을 높이지 아니하였으며 장로들을 대접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직분자들의 부패로 인하여 더 이상 제사장과 장로들이 존경 받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제사장과 장로들을 존경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도 책임을 물으신다.

바울은 대제사장이 자기의 입을 치라는 것에 대하여 회칠한 담을 비유하면서 하나님이 너를 치리라고 하였지만, 그가 대제사장인 것을 알고는 곧 알지 못했다는 변명을 한다.

아무리 부패한 제사장이나 장로라하더라도 그들에 대한 비방은 삼가야 할 것이다.

교회가 세상의 조롱거리가 된다고 하더라도 교회 자체를 비방해서는 안될 것이다.

교회에 그리스도의 이름이 있듯이, 제사장과 장로의 권위 뒤에는 하나님께서 계심을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17  우리가 헛되이 도움을 바라므로 우리의 눈이 상함이여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나라를 바라보고 바라보았도다

도움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으려는 것이 인생이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마음이 불편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하여 물으시기에, 죄에 대하여 책임을 묻지 않는 이들에게 도움을 바라는 것이 편한 것이 인생이다.

신자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불편하다면, 아직 죄에 대한 문제가 정리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18  그들이 우리의 걸음을 엿보니 우리가 거리마다 다 다닐 수 없음이여 우리의 끝이 가깝고 우리의 날들이 다하였으며 우리의 종말이 이르렀도다

하나님께서는 자유를 주시지만 악의 세력은 자신에게 종속시킨다.

자신의 모든 것이 노출되었을 때는, 자유함이 상실되고 영원히 종속되는 결국 사망에 이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아시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를 것이란 생각으로 자유를 누린다.

진정한 자유는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한 문제를 해결해 주셨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19  우리를 뒤쫓는 자들이 하늘의 독수리들보다 빠름이여 산 꼭대기까지도 뒤쫓으며 광야에서도 우리를 잡으려고 매복하였도다

모든 인간은 아무리 자유를 누리려고해도 대적에게서 피할 수는 없다.

모든 것이 통제받는 시대가 올 것이다.

마지막 때에는 통제가 보편화 될 것이다.



20  우리의 콧김 곧 여호와께서 기름 부으신 자가 그들의 함정에 빠졌음이여 우리가 그를 가리키며 전에 이르기를 우리가 그의 그늘 아래에서 이방인들 중에 살겠다 하던 자로다

주변의 힘있는 존재는 가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장미빛 청사진을 제시하며 다가오기도 하지만 일단 그들 안에 들어가는 것은, 그들에게 자신을 휘두를 수 있는 손잡이를 제공해 주는 것과 같다.

눈에 보이는 화려함 뒤에는 빠뜨릴 함정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21  우스 땅에 사는 딸 에돔아 즐거워하며 기뻐하라 잔이 네게도 이를지니 네가 취하여 벌거벗으리라

무엇이 고통인지를  모르는 이들은 자기에 취해서 스스로 파멸의 길로 갈 수 밖에 없다

세상 사람은 자기의 길로 가면서 즐거워하지만 그 길이 파멸의 길인줄을 알지 못한다.

비록 교회가 세상의 조롱거리가 된다고 하더라도, 교회를 조롱하는 이들도 하나님의 심판에서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22  딸 시온아 네 죄악의 형벌이 다하였으니 주께서 다시는 너로 사로잡혀 가지 아니하게 하시리로다 딸 에돔아 주께서 네 죄악을 벌하시며 네 허물을 드러내시리로다

율법을 받지 않은 이방인들은 자연법을 통해서 죄가 드러난다.

자연법에 비추어 자유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자연법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원의 필요성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율법과 마찬가지의 기능을 하지만, 또한 율법과 마찬가지로 모든 이들을 하나님의 심판의 자리로 나아가게한다.

posted by Wonho Kim
:
예레미야애가 2018. 3. 20. 17:59

예레미야애가 4장 1-10절 말씀 묵상


1  슬프다 어찌 그리 금이 빛을 잃고 순금이 변질하였으며 성소의 돌들이 거리 어귀마다 쏟아졌는고

금은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한다.

성막과 성전의 지성소는 금으로 장식되어있었다.

성전의 지성소가 그 기능을 하지 못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하는 금은 더 이상의 기능을 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진 곳에서는 금이 빛을 잃고 순금이 변질 될 수 밖에 없었다.

예루살렘 성소가 파괴된 것은, 타락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한계를 보여준 것이며, 궁극적으로 참된 성전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육신의 몸은 십자가에서 헐리심으로 참된 영적인 성전을 세우셨다.

그리스도 안에서 세워진 성전은 처음 아담 안에서 파괴되었던 성전이었다.

처음 성전은 행위를 요구하였으나, 마지막 성전은 은혜에 참여되는 것이었다.

예루살렘 성전은 처음 성전을 마지막 성전으로 이끄는 것이었으며, 행위의 요구에서 은혜의 베푸심으로 자리바꿈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인간의 어리석음은 아담과 같이 처음 성전, 즉 행위의 요구를 충족시키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행위의 자리에서 은혜의 자리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을 허락하신 것이었다.

이를 원론적으로 다시 말한다면, 처음 아담은 둘째 아담의 모형이었듯이, 에덴은 그리스도의 성전되심을 예표하는 장소였다.

예루살렘 성전은 에덴의 재현이었으며,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장소였다.

아담의 불순종은 유다의 불순종으로 재연되었으며, 행위 언약으로서의 모세 언약은 행위 언약으로서의 아담 언약이 재현된 것이었다.

아담 언약에는 오직 행위 언약만이 있었지만, 모세 언약에는 표면적인 행위 언약의 밑바탕에,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은혜 언약의 속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본질적으로는 은혜 언약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선지자의 탄식은 단순히 예루살렘의 파괴를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어야 될 존재들의 속성이 어떠하였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2  순금에 비할 만큼 보배로운 시온의 아들들이 어찌 그리 토기장이가 만든 질항아리 같이 여김이 되었는고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었던 유다는, 처음 언약 안에 있었던 에덴에서의 아담과 비교될 수 있다.

원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던 인간은 순금에 비할 만큼 보배로운 인간이었다.

불순종으로 질항아리같이 되어 포로로 잡혀간 유다는, 마치 불순종으로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같았다.

이는 현재의 인간의 상태가 어떠한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타락 한 후의 인간의 속성은 순금이 질항아리로 변질된 만큼이나 변질되었다.



3  들개들도 젖을 주어 그들의 새끼를 먹이나 딸 내 백성은 잔인하여 마치 광야의 타조 같도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상실된 백성은, 그 상실된 만큼이나 자신의 자녀들과의 관계가 상실되었다.

인간이 짐승만도 못한 것은, 짐승은 하나님의 자연법을 거스르지 않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자연법마져도 거스리면서, 심지어는 환경을 파과하면서 살아간다.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나, 불순종한 유다나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형상의 그림자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인간은 외부적 환경을 탓하기 이전에 인간이 어떠한 존재로 변질되었는가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4  젖먹이가 목말라서 혀가 입천장에 붙음이여 어린 아이들이 떡을 구하나 떼어 줄 사람이 없도다

젖먹이는 전적으로 부모에게 의존 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자신의 젖먹이에게 먹을 것을 주지 못함은 자신을 지으신 하나님을 떠난 까닭이다.

현재의 풍요는 우리의 잘남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근거로한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이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가는 생활을 하여야한다.



5  맛있는 음식을 먹던 자들이 외롭게 거리 거리에 있으며 이전에는 붉은 옷을 입고 자라난 자들이 이제는 거름더미를 안았도다

유다 백성들의 변화된 처지는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마찬가지다.

가나안에서 바벨론으로의 변화는 확연하였지만, 가나안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들에게는 실감이 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에덴을 기억하지 못하는 인류는 현재의 처지를 당연한듯이 살아가지만, 원래 하나님의 현상을 입고 에덴에서 살았던 존재인 인간의 존귀함을 알았다면, 현재의 삶의 심각성을 생각할 것이다.

희망을 상실한 인간들은  돈으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려고하지만, 이러한 노력으로는 원래 인간이 누려야할 창조 목적에는 도달되지 못할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은 에덴과 하늘 나라가 어떠한 곳인지를 설명하고있다.

복음을 접한 인간은 바벨론과 같은 현재의 문화를 변화시키기보다는, 현재의 삶을 발판으로 더욱 더 아름다운 하늘 나라를 소망하여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낡아질 헌옷을 갈아입을 새옷을 준비 하셨기에, 새옷을 입기에 합당한 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6  전에 소돔이 사람의 손을 대지 아니하였는데도 순식간에 무너지더니 이제는 딸 내 백성의 죄가 소돔의 죄악보다 무겁도다

사람에 의하여 무너진 것이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무너뜨린 것보다 결코 가볍지 않다.

삶의 환경 가운데 경험하는 여러가지 부정적 상황 가운데에는 직접적인든, 간접적이든, 아니면 나의 죄로 인한 것이든 타인의 죄로 인한 것이든, 우리의 죄를 드러나게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여야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알기를 원하시는 죄는 결코 가볍게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7  전에는 존귀한 자들의 몸이 눈보다 깨끗하고 젖보다 희며 산호들보다 붉어 그들의 윤택함이 갈아서 빛낸 청옥 같더니

8  이제는 그들의 얼굴이 숯보다 검고 그들의 가죽이 뼈들에 붙어 막대기 같이 말랐으니 어느 거리에서든지 알아볼 사람이 없도다

바벨론으로 잡혀간 유다의 모습이 예루살렘에서의 유다의 모습과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보여준다.

이는 타락한 인간의 상태가 지음받은 아담의 상태와 비교하여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선지자의 탄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식이며, 이는 그리스도가 십자가 사역을 통하여 회복시킬 성도의 모습이 어떠하여야하는가를 간접적으로 보여두는 것이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존귀함을 입은 자이기에 성도가 세상의 조롱거리가 된다면, 이는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행위가 될 것이다.

목회자나 신학자, 혹은 성도들의 추잡한 모습들은 그리스도를 얼마나 욕되게 하는 것인지 인식을 하여야 할 것이다.

성도는 자신의 변화될 위치를 분명히 인식하고서 세상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9  칼에 죽은 자들이 주려 죽은 자들보다 나음은 토지 소산이 끊어지므로 그들은 찔림 받은 자들처럼 점점 쇠약하여 감이로다

심판보다도 심판받는 과정의 고통이 얼마나 심각한 지를 말해준다.

이는 이 세상을 고통 가운데 탄식하며 살아가는 인생들의 고달픔을 말해준다.

건강하게 살다가 짧은 기간에 세상을 떠나는 것도 하나님의 축복일 것이다.

현대 의학의 발달은 인간을 자연스럽게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현대 의학은 인간을 건강하게 살도록 해주기도하지만, 약에 의존하면서 고통 가운데 살아가게도한다.

거의 식물 인간이 되기까지 살려놓고서 고생하게 만들기도하는 것이 현대 의학의 부정적인 모습이기도하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식으로 은혜를 누리기도하지만, 지나침으로 인하여 고통 가운데 들어가게도한다.

이는 의학 뿐만이 아니라 모든 문명의 속성이기도하다.

인간이 스스로 높아지려는 문명의 발전은 궁극적으로 고통스러운 심판을 자초하기도한다.



10  딸 내 백성이 멸망할 때에 자비로운 부녀들이 자기들의 손으로 자기들의 자녀들을 삶아 먹었도다

자녀를 삶아 먹는 모습은 극단적인 경우이지만, 이러한 속성은 삶 가운데 비슷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한다.

많은 이들이 자녀 교육에 목을 매지만, 자녀교육의 실상은 대부분이 자녀를 위한 것이 라기보다는 자신을 위한 것이다.

길들여진 자녀들은 표면적으로는 성공하는 것과 같아도 그들은 스스로의 삶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도 않도록 만들어지며, 내적인 능력도 상실되도록 만들어진다.

참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의 행동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살아가는 인간이 되어야한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 스스로가 책임을 지고 하나님을 직면하여야한다.

자녀로하여금 스스로 하나님을 경외하게하는 것만이 자녀를 살리는 행동이다.

부모의 과도한 개입은 자칫 자녀를 하나님 앞에서 가리우는 행동이며, 자녀를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자녀를 죽이는 행동이 될 수 있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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