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애가 2018. 3. 22. 21:47

예레미야애가 5장 1-10절 말씀 묵상



1  여호와여 우리가 당한 것을 기억하시고 우리가 받은 치욕을 살펴보옵소서

아무리 하나님께서 범죄한 사람과의 관계를 단절하신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하소연 할 수 있는 대상이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다.

만약에 하나님께 하소연 할 수 있는 길이 완전히 막힌다면 이는 지옥이나 다름 없을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상태에서 선지자가 하나님께 하소연 할 수 있다는 것은 아직 완전한 지옥에 이른 상태가 아님을 보여준다.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로 인한 유다 백성을 상태는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마찬가지 상황이다.

이는 인간이 범죄한 아담의 자손으로서, 아직 완전한 지옥에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만약에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의 길 마저도 막힌다면 인간은 완전한 지옥에 이른 것이다.


2  우리의 기업이 외인들에게, 우리의 집들도 이방인들에게 돌아갔나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의 선택과는 관계없이 기업을 얻을 자이며, 거할 집이 주어진다.


이는 인간의 죄성과 죄인으로서의 위치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이미 결정되었음을 의미한다.

자신은 조상의 죄와는 관계없다고 선언할 수는 없다.

죄의 문제는 행위론적 문제이기보다는 존재론적인 문제인 것이다.

성경은 인간이 존재론적으로 죄인임을 보여주려는데 반하여, 인간은 자신들이 행위론적으로만 죄인임을 말하려고 한다.

예수님께서 바리세인의 죄를 심각하게 보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은 행위를 넘어서 존재에 대한 것이기에, 복음은 윤리적으로 접근해서는 않된다.

기독교 윤리는 행위를 넘어서 존재론적인 바탕 위에서 정립되어야하지만, 현대 신학자들은 이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인간의 삶의 환경은 이미 존재론적인 상황에서 기업이 외인에게, 집들이 이방인에게 돌아간 상태이지만, 인간은 자신이 잘못한 것이 없다고 항변하며 이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가 존재론적인 죄인이 아니라면, 우리에게는 태어나면서부터 에덴과 같은 환경에서 주어져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파괴된 예루살렘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접하게되는 에덴의 동쪽은 험난하기만 하다.

신자는 이러한 험난한 환경이, 공동체적 책임을 져야하는 죄인에게 주어진 환경임을 인정하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바라보며,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어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 것이다.


3  우리는 아버지 없는 고아들이오며 우리의 어머니는 과부들 같으니

아담의 범죄의 결과는 아버지의 상실이었다.

아담은 범죄한 이후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가 없었다.

누가는 예수님의 계보가 아담을 거쳐서 하나님까지 올라가고있음을 말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자들의 아버지이시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들에게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격을 주신다.

범죄한 유다는 아버지가 없는 고아였으며, 범죄한 아담은 아버지가 없는 고아가 되었으며, 아담의 후손은 모두가 진정한 아버지가 상실된 고아의 상태이다.

육신의 아버지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림자일 뿐이다.

육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참 이스라엘이 아니라 영적인 자손이 참 이스라엘이듯이, 하나님의 자손인 신자에게는 오직 하나님만이 참 아버지가 되신다.

세상일이 고달파도 참 아버지되신 하나님께 아뢸 때 진정한 평안을 누릴 수 있다.

성도는 오직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야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

참 아들은 신랑되신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의 구성원이 되어야한다.

아담은 그리스도의 표상으로서, 아담이 하와와 합하여 한 몸이 되는 것은 궁극적으로 신부된 교회와 한 몸을 이루실 신랑되신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었다.

성전을 상실한 유다는 타락한 아담과 마찬가지로, 신랑되신 그리스도를 맞이하기까지는 실질적 과부나 마찬가지이다.



4  우리가 은을 주고 물을 마시며 값을 주고 나무들을 가져오며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은 에덴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것으로  풍요를 누릴 수 있었던 에덴과 같다.

불순종하여 바벨론에 잡혀간 유다는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마찬가지로 수고하고 땀을 흘려야 소산을 먹을 수가 있다.

아담의 후손인 인간의 삶은 유다와 마찬가지로, 값을 치루지 않고 공급을 받을 수가 없는, 은혜가 상실된 세상을 살아가고있다.


5  우리를 뒤쫓는 자들이 우리의 목을 눌렀사오니 우리가 기진하여 쉴 수 없나이다

죄의 종노릇하는 인간들은 누구나 수고하다가 결국 죽음으로 종속될 수 밖에 없는 인생들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세상을 이렇게 비참하게 살아가는 것은, 오직 불순종으로 인한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상실 말고는 해석할 길이 없다.



6  우리가 애굽 사람과 앗수르 사람과 악수하고 양식을 얻어 배불리고자 하였나이다

7  우리의 조상들은 범죄하고 없어졌으며 우리는 그들의 죄악을 담당하였나이다

인간이 서로 악수하면서 서로를 돕는 것은 대부분 서로의 이익을 전제로하는 것이다.

원래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을 입은 인간은, 서로의 이익을 위해서 거래하도록 지음을 받지는 않았지만, 이익을 전제로한 거래 관계는 타락 이후에 생긴 현상이다.

타락 이후의 인간은, 예루살렘의 성전이 파괴된 후의 유다가 대적이었던 애굽과 앗수르에 그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손을 벌려야만 했던 것과 같이, 이익을 위해서 공존한다.

이러한 상황이 부적합하다는 것을 인식한 선지자는, 현재의 처지를 하나님께 호소함으로서, 하나님만이 상황을 근본적으로 해결해주실 수 있으신 유일한 분이심을 고백한다.

예루살렘 거민들은 성전의 파괴로 인하여 처참한 상태에 있었으며, 비록 이러한 상황이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손상에서 온 것이지만, 결국 하나님께 도움을 구할 수 밖에 없었다.

현재의 인간이 서로의 이익을 전제로 거래를 하는 상태가 죄악으로 인하여 생긴 불합리한  상황이라는 것을 선지자는 말하고있다.

경제라는 사슬에 얽매여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인생은, 현재의 상황을 당연한 것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선지자와 같이 하나님께 하소연하면서, 상황을 극복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익을 전제로 움직이는 상황은 결국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갈 뿐이다.

비록 이러한 상황이 조상들의 범죄로 인한 것이고, 우리가 그들의 죄악을 담당한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상황의 극복을 위해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간구하며 살아가야한다.

이익이 있는 곳에는 부정한 요구가 따르기에 어느 누구도 부정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을 것이다.

인간은 부정적 상황에서 살면서 자녀들에게도 부정적 상황을 물려줄 뿐이다.

죄가 전가되는 총체적 상황은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것이며, 인간은 본질적으로 죄악을 상황을 벗어날 수가 없다.

오직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지 않고는 깨끗하여질 수가 없다.

인간은 최종적으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이며, 궁극적으로 누구나 다 죽음을 직면하여야만 하며, 죽음을 피할 수 없지만,  인간은 죽음의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구함으로서 오히려 생명의 길로 들어설 수가 있다.



8  종들이 우리를 지배함이여 그들의 손에서 건져낼 자가 없나이다

(다스려야할 자로부터 다스림을 받는 상황)

예루살렘에 성전이 세워지면서 주변의 이방 나라들은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여호와를 경배하여야했으며, 이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부강하게되었다.

성전으로서의 에덴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통치명령(창 1:28), 즉 흔히들 문화명령이라 부르는 지배명령을 말씀하셨다.

창세기 1장 28절에서, 다스릴 대상에는 생물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창세기 3장 1절의 들짐승의 짐승은 생물과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음으로서, 들짐승인 뱀도 아담이 다스려야할 대상에 포함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아담이 다스려야할 대상으로부터 유혹을 받아 다스림을 받게 된 것과 같이, 유다는 주변 이방 나라의 우상을 받아들임으로서, 이방 나라의 다스림을 받게 된 것이다.

현재의 인간의 삶이 죄의 종노릇하면서, 죄에 종속된 것은 본래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서 스스로 화를 자초한 것이다.

아담의 선악과 범죄는, 그 이전에 다스려야 할 대상을 다스리지 않은 일차적 불순종에 의한 결과적 불순종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유혹하는 사단을 꾸짖으심으로서 사단을 다스리셨다.

현재의 성도의 삶은 세상에 종속되는 삶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만 의지하면서, 예수님께서 사단을 꾸짖으신 것과 같이, 세상의 다스림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적인 머리를 써서 인간적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것은 또 다시 하나님의 거룩한 곳을 세상의 다스림에 종속시키는 어리석은 행위이지만, 현재의 교회의 실상이 이러한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세상적 욕심으로 세상에 다스림받은 것에 대한 회개가 있어야 할 것이다.



9  광야에는 칼이 있으므로 죽기를 무릅써야 양식을 얻사오니

타락한 아담은 땅에서 가시와 엉겅퀴로 인하여 고생을 하여야만 했듯이, 타락한 유다는 광야에서 칼을 감당하여야만 했다.

아담의 후손으로 살아가는 우리 인간은, 생존을 위해서 세상의 험악한 상황들을 직면하면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10  굶주림의 열기로 말미암아 우리의 피부가 아궁이처럼 검으니이다

인간의 얼굴은 환경에 따라 변화되기 마련이다.

사람의 변화된 모습은 인간의 삶의 환경이 어떠한 지를 보여준다.

낡아질 헌옷을 입은 인생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새옷을 입는 날을 소망하며 살아갈 뿐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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