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017. 12. 29. 14:01

예레미야 20장 7-18절 말씀 묵상

7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 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8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됨이니이다

9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10  나는 무리의 비방과 사방이 두려워함을 들었나이다 그들이 이르기를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 하오며 내 친한 벗도 다 내가 실족하기를 기다리며 그가 혹시 유혹을 받게 되면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 하나이다

11  그러하오나 여호와는 두려운 용사 같으시며 나와 함께 하시므로 나를 박해하는 자들이 넘어지고 이기지 못할 것이오며 그들은 지혜롭게 행하지 못하므로 큰 치욕을 당하오리니 그 치욕은 길이 잊지 못할 것이니이다

12  의인을 시험하사 그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사정을 주께 아뢰었사온즉 주께서 그들에게 보복하심을 나에게 보게 하옵소서

13  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음이니라

14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나의 어머니가 나를 낳던 날이 복이 없었더면,

15  나의 아버지에게 소식을 전하여 이르기를 당신이 득남하였다 하여 아버지를 즐겁게 하던 자가 저주를 받았더면,

16  그 사람은 여호와께서 무너뜨리시고 후회하지 아니하신 성읍 같이 되었더면, 그가 아침에는 부르짖는 소리, 낮에는 떠드는 소리를 듣게 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나니

17  이는 그가 나를 태에서 죽이지 아니하셨으며 나의 어머니를 내 무덤이 되지 않게 하셨으며 그의 배가 부른 채로 항상 있지 않게 하신 까닭이로다

18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부끄러움으로 보내는고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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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지쳐만 가는 예레미야)


예레미야는 지쳐만 가고있다.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일을 끝까지 시키시는 하나님께 항복한다.


자신이 당하는 조롱과 핍박을 체념 하듯이 받아들인다.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것은 사람이기를 포기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예레미야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는 아무런 결실을 보지 못했기에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사람은 죄인이기에 아무리 옳은 하나님의 일이라도 죄인의 정서로는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은 공의의 차원에서 일을 하시지만, 사람은 감정의 차원에서 일을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시키시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있기에 반어적으로 자신을 한탄하며 표현할 수 밖에 없다.


죄인으로서 하나님을 일을 감당하는데서 오는 괴리감이 예레미야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이중인격자, 혹은 위선자로 살아가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격적이신 분이시기 때문에 신자로하여금 일방적으로 명령하시지는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인격적이신 분이시기에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마음에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하소연 할 수 있었다.



(9, 피할 수 없는 사역)


예레미야 선지자의 선포가 효과도 없는 것은 둘째치고, 핍박은 늘어가고 자신은 지쳐만 가는데, 예레미야는 이러한 상황을 벗어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진다.


그래도 기도 할 수 있기에 예레미야는 내면에서의 혼란과 내적인 갈등을 하나님께 하소연하듯이 표현한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뜻을 알 것같으면서도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잘 모르는 것으로 인한 답답함으로 인해서 더욱 혼란에 빠지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 가운데서  예레미야가 성숙되어지고, 다듬어져가고 있었다.


비록 열매가 없어도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가 자신의 말에 순종하는 것으로 인해서 기뻐하셨음에 틀림이 없다.


성도는 비록 듣는 이들이 없고 열매가 없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사실에 위로를 받아야 한다.


비록 헌신에는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지만, 성도의 외침은 하나님께서 마음의 소원을 주시고 하시는 하나님의 일이라는 생각을 하여야 할 것이다.



(10, 두려움에 처한 예레미야)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핍박했던 바스훌의 이름을 마골밋사빗, 즉 “사방이 두려워함”으로 바꾸었는데, 이러한 상황이 오히려 자기한테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면서, 예레미야는 극도의 두려움과 고통에 빠져서 혼란스러워한다.


심지어 예레미아는 친한 벗에게서도 핍박을 당한다.


예레미야는 이 세상에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다 없어진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세상 어디에도 마음을 하소연할 곳이 없어진 것이다.


예레미야에게는 오직 하나님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예레미야는 이 세상을 살아가야하는 존재로서, 이 세상을 대적하면서 천상의 삶을 살아가야하는 딜레마에 빠졌다.


이러한 현상은 진리를 선포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공유하다보면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진리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다보면, 가까운 이들과 불편한 관계가 형성되기도 한다.


심지어는 교회 공동체에서 조차도 진리를 말함으로 인해서 오해를 사고, 급기야는 서로가 결별해야하는 상황이 일어나기도 한다.


교회에서조차도 진리를 공유하는 일이 쉽지만 않은 세상이다.



(11, 예레미야의 깨닫음)

예레미야는 매우 힘든 상황이지만, 자신의 대적들이 치욕을 당할 것을 생각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에 감사드리며 힘을 얻는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유다 백성과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들과 싸우고 계신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예레미야에게 고통은 단지 자신의 희생에 대한 것이라고만 할 수가 없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경험했고, 하나님 안에서 이스라엘과 유다가 구원받을 것이라는 사실도 이미 깨달았다.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들의 핍박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핍박과 하나님의 희생으로 이어질 것을 미리 짐작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레미야는 자신과 하나님을 동일시 함으로서 자신이 당하는 고통을 하나님께서도 당하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하나님에게서 볼 수 있는 희망은 바로 하나님 자신의 희생이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는 인간의 반역에 의한 하나님의 희생을 생각하면서 더욱 깊은 고통 가운데 빠져 들어갔다.


예레미야가 반역자들에 관하여 하는 불평은, 자신의 희생에 대한 불평보다는, 하나님께서 그들로 인하여 희생을 당하시는 것보다는 그들을 무찌르시는 것이 낫다는 것에 대한 간접적인 표현이다.



(12, 인격적이신 하나님)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을 믿고서, 자신과 하나님이 하나됨을 경험한다.


하나님의 쌍방 통행적인 인격이 예레미야를 통해서 나타난다.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반복해서 자기 중심적인 기도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만큼 예레미야를 인격적으로 대하시고 계시다는 것이다,


세상의 권위와는 달리 참된 권위는 인격적 관계를 형성하는 가운데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격적이신 분이시며,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사람들에게 인격적으로 관계하시는 분이시다.


인간에게 있는 비인격적인 모습은 전부 아담의 타락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교회 공동체에서 성도 상호간에 인격적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13, 찬양으로 바뀐 예레미야의 기도)


예레미야는 자신을 가난한 자로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한다.


여기서 가난한 자는 물질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핍박을 받는 자를 가리킨다.


세상에서 부자는 자신의 능력과 권력에 의지하려고 하지만, 세상에서 핍박받는 자는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해야하기에 천국을 소유하는 부자가 될 수 있다.



(14-18, 저주가 찬양으로)


예레미야는 또 다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한탄을 하는 것 같지만, 실은 이제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도 자신이 기쁘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하는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예레미야의 반복되는 변덕과 감정은 예레미야가 지극히 변덕스러운 성격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실은 지극히 생각이 깊은 선지자라고도 생각된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깨달았으며, 궁극적으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깨달았기에, 예레미야의 슬픔과 고통은 결국 하나님께서 당하실 고통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유다 백성의 반역은 단순히 반역한 이들의 멸망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이 반역할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며, 이는 결국 하나님의 희생으로 이어질 것이란 깨닫음 때문이 혼란스럽기만 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이러한 서대한 구원 계획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말씀하시지 않으시기에,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마치 속이는 시내와 같이, 이해할 수 없는 분이라고 불평을 할 수 있다고도 생각된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것이라는 엄청난 고통을 보고있는 것이다.


예레미야가 자신의 삶을 저주한 것은, 인간의 본질이 저주 받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후에 전개될 예레미야의 고백을 보면서,  예레미야는 인생의 본질적 죄악으로 인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라는 상상 할 수 없는 현실을 깨닫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모든 고통이 결국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열심임을 보면서, 신자의 삶이 결코 가볍지 않은 인생임을 생각해 본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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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2017. 12. 29. 14:00

예레미야 19장 14절- 20장 6절 말씀 묵상


14  예레미야가 여호와께서 자기를 보내사 예언하게 하신 도벳에서 돌아와 여호와의 집 뜰에 서서 모든 백성에게 말하되

15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이 성읍에 대하여 선언한 모든 재앙을 이 성읍과 그 모든 촌락에 내리리니 이는 그들의 목을 곧게 하여 내 말을 듣지 아니함이라 하시니라

1  임멜의 아들 제사장 바스훌은 여호와의 성전의 총감독이라 그가 예레미야의 이 일 예언함을 들은지라

2  이에 바스훌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때리고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베냐민 문 위층에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으로 채워 두었더니

3  다음날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에서 풀어 주매 예레미야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 이름을 바스훌이라 아니하시고 마골밋사빕이라 하시느니라

4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너로 너와 네 모든 친구에게 두려움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그들의 원수들의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네 눈은 그것을 볼 것이며 내가 온 유다를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기리니 그가 그들을 사로잡아 바벨론으로 옮겨 칼로 죽이리라

5  내가 또 이 성읍의 모든 부와 그 모든 소득과 그 모든 귀중품과 유다 왕들의 모든 보물을 그 원수의 손에 넘기리니 그들이 그것을 탈취하여 바벨론으로 가져가리라

6  바스훌아 너와 네 집에 사는 모든 사람이 포로 되어 옮겨지리니 네가 바벨론에 이르러 거기서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너와 너의 거짓 예언을 들은 네 모든 친구도 그와 같으리라 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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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도벳과 성전의 긴밀성)


유다 백성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은 목이 곧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마음이 완고한 이들이었기에, 예레미야는 현장에서의 실증을 통해서, 그리고 또 예루살렘 성전 뜰에서 반복하여 경고할 수밖에 없었다.


성전은 유다 백성과 예루살렘 주민들의 마지막 보루로서, 이곳은 안전할 것이라는 일말의 생각마져도 예레미야 선지자의 재앙 선포를 통하여 무너진다.


성전에서의 경고는 최후의 보루까지도 안전한 곳이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예루살렘 성전의 종말은, 아담과 이스라엘 백성의 유형적 관계에서 볼 때, 성전으로서의 에덴의 종말이었으며,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생명 나무의 길이 막혔음에 대하느선언이며, 오직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가 아니고서는 인간은 구원의 길을 볼 수가 없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의 종말은 아담의 후손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죄성의 경직성과 하나님을 거부하는 완고함의 실상을 보여줌으로서, 인간에게는 더 이상의 희망을 기대할 수 없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예레미야가, 도벳과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현장에서의 증언을 통한 경고하는 심판은, 유다 백성들에게 도벳의 현장을 통하여, 이들이 얼마나 잘못된 길을 걸어가고있는지를 보여주는 실증적 의미가 있다.


이러한 실증적 예증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모든 인류에게도 전해지고 있다.


역사적 이스라엘은 인류 모두에게,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부패하고 잘못된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실증적 의미가 있다.


도벳을 통하여 유다 백성들에게, 유다가 멸망당하는 것의 정당한 이유를 보여주셨듯이, 역사적 이스라엘의 목이 곧은 인간의 죄성을 보여주심으로서, 마찬가지의 죄성을 가진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들도 얼마나 잘못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심으로서, 이러한 류의 일들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해주고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적 실증은, 궁극적으로 모든 인류에 대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는 것이다.


도벳은 유다 백성들만의 특수한 상황은 아니다.


도벳은 한국교회가 사회로부터 욕을 먹는 현장이 될 수도 있다.


도벳은 부모의 욕심을 위해서 자녀들이 사교육의 현장으로 내몰리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


도벳은 온갖 음란물이 판치는 인터넷 공간이 될 수도 있다.


도벳은 사람이 정당하게 경제 활동을 하는 한 가운데서도 있을 수가 있다.


도벳은 심지어,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교회 공동체 한 가운데가 될 수도 있다.


인간은 모두 다 유다 백성들과 같은 죄성을 가지고있는 아담의 후손이기에,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 끊임없이 사랑해야할 이들을 희생시키면서, 하나님의 공동체를 파괴시키는 행동을 하게 되어있다.



(1-2, 바스훌의 박해)


예레미야의 도벳과 성전 뜰에서의 말씀 선포는 분명 성전의 총감독인 바스훌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였을 것이다.


자신이 총감독을 하고있는 성전에서 이제껏 없던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바스훌은 성전의 책임자였기에, 어떠한 형태로든 반응을 했어야했는데, 결국 대중의 편에 서서 예레미야를 박해한 것이다,


성전의 총감독으로서의 제사장 정도되면, 도벳에서의 행위가 잘못된 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텐데도, 오히려 바른 말을 하는 예레미야를 핍박을 한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대중이 원하는 방향으로 마음이 기운 것이었다.


바스훌의 이와같은 잘못된 행동은  예루살렘 성전의 전반적 상황이 얼마나 부패되고 변질되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성직자가 세상과 타협하게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이들은 이들로부터 핍박을 받게 되어있다.


성직자는 삶의 고달품과 어려움으로 인해서 수동적으로 세상과 타협할 수도 있고, 많은 명예와 권력과 부로 인해서 적극적으로 죄에 참여 할 수도 있다,


성직자라 할지라도 인간은 어느 누구나 아담의 후손이기에, 죄를 짓기 이전에 죄성을 가지고 있다.


성직은 많은 권력과 명예를 제공해주기에 인간에게는 가장 위험한 곳이다.


성직자는 자신의 권력과 명예, 그리고 부에 대한 도전이 올 때, 선택의 갈림길에 설 수 밖에 없다.


성전 총감독으로서의 바스훌과 같이, 자신의 권력과 명예와 부가 클수록 선택이 더욱 어려울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로막는 일들은 단지 성직자의 부패만이 원인이 아니었다.


요나의 외침을 들은 니느웨의 경우는, 하나님을 잘 모르는 이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3일만의 외침으로도 도시 전체가 회개를 하였던 것을 볼 수 있었다.


우상이 가득했던 니느웨성도 회개를 하였는데 유다와 예루살렘의 하나님에 대한 거부는 상식을 넘어선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과 연관이 있는 사람으로부터 간섭을 받기 싫어하는 속성이 있다.


아담은 타락하고서 하나님의 간섭으로부터 피하려고했다.


가인은 범죄하고나서 에녹이라는 이름을 통해서 모든 것을 하나님과 관계없이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선언을 했다.


바벨탑은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독립 선언이었다.


타락한 아담의 후손들은 모두 하나님의 간섭에 대하여 철저한 거부감을 나타낸다.


사람들의 세상적인 결속 매체인 혈연, 학연, 지연은 하나님을 배제한 육적인 공동체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선지자는 이러한 관계성으로 인해서 고향에서 환영받을 수가 없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고향인 아나돗 사람으로부터 예언을 하지말라고 협박을 받았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에게는 이방인이었지만,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의 일원이었기에 더욱 거부를 하였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러한 이유 때문에, 같은 제사장 계통의 바스훌에게서 핍박을 받는다.


교회가 혈연, 학연, 지연을 중심으로 구성된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하게 선포될 수 없다.


교회에서의 선후배 관계나, 세습에 의한 친인척과의 관계등은,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선포되는데 방해가 되며, 심한 경우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것을 막을 수가 있다.


지역 교회에서 온전하게 말씀을 선포했던 부교역자는, 그 다음날 바로 교회 사택에서 쫓겨나야만 했으며, 결국 열악한 환경에서 젊은 나이에 운명을 달리 해야 했던 경우를 두 눈으로 보기도 했다.


성직자나 신학자가 혈연 학연 지연을 넘어선다는 것은 밥줄하고도 연관되기에, 이를 넘어서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성직자가,  복잡한 인간 관계성으로 인해서, 자신을 스스로 속이면서까지 마음에 없는 거짓말을 해야 하는 경우를 종종 보기도 한다.


어느 보수 교단의 경우에는, 재판은 돈 많은 쪽이 이긴다는 것이 정설이 되어있다.


이러한 상황들은 바스훌이, 대중의 편에서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잘못된 결정을 하는 모습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한국 교회들이 예루살렘 성전 못지않게 얼마나 부패해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면들이다.


후배 신학자가 선배 신학자의 생각에 반하여 소신있게 말을 한다면, 그는 당연히 사회에서 매몰 될 것이다.


참된 신학자가 되려면, 이러한 핍박을 각오하면서까지, 자신의 소신을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한국이라는 조그마한 나라의 특성상 많은 지역 교회들이 혈연, 학연, 지연을 중심으로 구성되어있으며, 조그마한 나라에서 신학자들이 서로를 뻔히 알기에, 진리를 선포하지 못하고, 잘못된 것에 대해서도 간섭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처럼 되어있다.


이러한 특성은 이 시대 한국교회의 급속한 쇠퇴의 원인이 되고 있지만, 바스훌과 같이 세상과 타협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3, 하나님께서 지으신 이름  마골밋사빗)


바스홀의 이름은 부흥과 확장의 개념이 들어있는 “증가하고있는 방백" 혹은 “세력을 확장시키는 자"의 뜻을 가지고 있다.


부패한 유다였지만 나름대로 희망적인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바스훌은 예레미야를 박해한 후에 마골밋사빗 즉 “두려움이 모든 것을 둘러싸서 도망 칠 수가 없게 된다"는 뜻을 가진 이름으로 바뀌게 된다.


이름은 지어주는 것은, 지어주는 사람의 주권과 지배권이 행사되는 것이다.


바스훌의 이름이 바뀐 것은 하나님의 뜻이 바뀌었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아담이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준 것은 동물들에 대한 아담의 왕권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뜻을 행하고자 종종 이름을 바꾸어 주시기도한다.


아브라함, 사라, 이스라엘, 바울등등…


이는 하나님의 주체가 되심을 선포하는 주권적 의미도 있다.


바스훌에서 마골밋사빗으로 이름이 바뀐 것은, 앞으로 당하게 될 재앙이 하나님께서 내리신 것임을 선포하는 것이다.



(4, 정죄에서 용서로)


예레미야는 바스훌 앞에서 다시 한번 더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다.


하나님의 권위의 말씀이 인간 관계를 넘어서 선포되는 순간이었다.


예레미야가 모든 인간 관계를 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선포한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더욱 힘을 실어주신다.


처음에는 핍박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불신하기도 했으며, 자신의 고통을 하소연하기도했지만, 예레미야의 성숙된 모습에서 점진적으로 담대해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성도는 처음부터 세상에 대해서 담대해 질 수는 없다.


누구나 다 처음에는 세상의 핍박이 두려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조금씩이라도 세상에 대해서 담대하게 말씀을 선포하는 과정을 밟아 간다면, 하나님과의 동행 과정에서 더욱 더 큰 그릇으로 쓰임을 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예레미야는 세상의 핍박보다도 하나님 말씀의 중요성을 깨달았기 때문에 말씀을 담대하게 선포 할 수 있었다.


신자는 모두다 그리스도께서 회복하신,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직책을 가지고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의 선지자로서의 직책을 가지고 있기에, 세상에 대해서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실제적 과정을 밟아가야할 것이다.


교회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유다 백성들에 대한 재앙의 저주와 같이 정죄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용서를 통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교회공동체는 이스라엘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죄가 드러날 수밖에 없는 곳이지만, 정죄에 대한 것은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종결되었기에, 정죄를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않된다.


이스라엘 공동체에서의 죄는 정죄의 대상이었지만, 교회 공동체에서 드러나는 죄는 용서와 화해의 대상이다.


인간은 누구나 아담의 후손이기에 죄가 드러나지 않을 수는 없다.


교회 공동체는 드러난 죄를 정죄하기보다는 용서하고 화해하는 가운데 이 땅에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을 구현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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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2017. 12. 29. 13:59

예레미야 19장 1-13절 말씀 묵상

1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가서 토기장이의 옹기를 사고 백성의 어른들과 제사장의 어른 몇 사람과

2  하시드 문 어귀 곁에 있는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로 가서 거기에서 내가 네게 이른 말을 선포하여

3  말하기를 너희 유다 왕들과 예루살렘 주민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이 곳에 재앙을 내릴 것이라 그것을 듣는 모든 자의 귀가 떨리니

4  이는 그들이 나를 버리고 이 곳을 불결하게 하며 이 곳에서 자기와 자기 조상들과 유다 왕들이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무죄한 자의 피로 이 곳에 채웠음이며

5  또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산당을 건축하고 자기 아들들을 바알에게 번제로 불살라 드렸나니 이는 내가 명령하거나 말하거나 뜻한 바가 아니니라

6  그러므로 보라 다시는 이 곳을 도벳이나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죽임의 골짜기라 부르는 날이 이를 것이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7  내가 이 곳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계획을 무너뜨려 그들로 그 대적 앞과 생명을 찾는 자의 손의 칼에 엎드러지게 하고 그 시체를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밥이 되게 하며

8  이 성읍으로 놀람과 조롱 거리가 되게 하리니 그 모든 재앙으로 말미암아 지나는 자마다 놀라며 조롱할 것이며

9  그들이 그들의 원수와 그들의 생명을 찾는 자에게 둘러싸여 곤경에 빠질 때에 내가 그들이 그들의 아들의 살, 딸의 살을 먹게 하고 또 각기 친구의 살을 먹게 하리라 하셨다 하고

10  너는 함께 가는 자의 목전에서 그 옹기를 깨뜨리고

11  그들에게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사람이 토기장이의 그릇을 한 번 깨뜨리면 다시 완전하게 할 수 없나니 이와 같이 내가 이 백성과 이 성읍을 무너뜨리리니 도벳에 매장할 자리가 없을 만큼 매장하리라

12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이 곳과 그 가운데 주민에게 이같이 행하여 이 성읍으로 도벳 같게 할 것이라

13  예루살렘 집들과 유다 왕들의 집들이 그 집 위에서 하늘의 만상에 분향하고 다른 신들에게 전제를 부음으로 더러워졌은즉 도벳 땅처럼 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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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실례를 통한 말씀의 선포)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가운데 비유를 사용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의 주요 특징 가운데 한 가지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도 유다 백성들을 이해시키시기 위해서 비유를 사용하신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명하신 토기장이의 옹기를 통한 말씀 선포는, 유다 백성과 예루살렘 주민의 이해력에 눈높이에 맞추신 하나님의 배려하심의 표현이다.


토기장이의 옹기는 이미 결과적으로 모양이 만들어진 상태이며, 결과물이 잘못되었을 경우 수정이 불가능하며 깨뜨려 폐기 할 수밖에 없기에 종종 인용이 되고있다.


옹기는 이스라엘의 결과적 상태로서 이스라엘이  폐기될 수밖에 없는 절망의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을 나타낸다.



(4, 더럽혀진 거룩한 곳)


유다 백성들이 다른 신에게 분향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게한 것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을 떠난 결과물이다.


중립지대에 있는 인간은 없다.


인간이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은 그 신에 대해서 알고서 그 신이 더 좋아서가 아니다.


인간이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떠난 이들에게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 올 때는 가나안 땅이 어느 정도는 깨끗하게 되었지만 인간의 우상에 대한 집착력은 안보이는 것도 찾아 낼 정도로 집요하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은 하나님의 왕권을 이 땅에 선포해야했다.


이스라엘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가나안 땅의 거룩이 전제가 되어야 했다.


거룩한 땅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왕권이 선포되고있다는 것이다.


이 땅을 불결하게 만들며 우상 숭배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왕권이 아닌 다른 신의 지배권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며, 이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며 하나님 나라에 대한 도전이었다.


유다 백성들이 거룩한 땅을 불결하게 만들고, 무죄한 어린 아이의 생명까지도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 피를 흘리게한 것은, 궁극적으로 이 세상을 구원할 여자의 후손의 탄생을 방해하는 것으로서, 사단의 종노릇을 하는 꼴이 되었다.


이러한 유다 백성들의 행위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막고 사단의 세력을 확장시키고 사단의 좀비에 불과했다.



(5. 아들을 바알에게 번제로?)


인간의 욕심이, 아들을 바알에게 번제로 불살라 드릴 정도라면,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쉽게 도덕과 윤리로 교회를 깨끗하게 하려고 많은 말을 하지만, 이는 거대한 탐욕의 불길에 바가지 물을 뿌리는 꼴이다.


바알 산당에서 행하던 음란한 행위는 축복에 대한 욕심에서 나온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들의 축복에 대한 갈증을 해소시켜줄 만큼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교회에서의 교인들의 축복에 대한 욕심도, 같은 인간이기에, 마찬가지 일 것이다.


교회에서 행해지는 축복 대성회, 각종 부흥회, 입시를 위한 기도회 등도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온 가증한 것들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6, 죽임의 골짜기)


자식을 불살라 바알에게 바치면 축복을 받을 것 같았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결코 가만히 놓아 두시지는 않으신다.


결국 예루살렘은 바벨론 군대에 의해서 살육당하고 짓밟혔으며, 결국에는 로마군에 의해서 완전히 폐허가 될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도 예루살렘의 멸망을 슬퍼하셨듯이, 예루살렘에는 100만명이 넘는 인파가 모였던 상황에서 열혈당에 의한 예루살렘 성전을 둘러싼 내분과 예루살렘 주위를 둘러싼 로마군에 의해서 예루살렘은 피비린내나는 처참한 상황 가운데 기근과 더불어 지옥의 상황이 연출되었다.


기근과 핍박으로 인해서 예루살렘 성벽에서 뛰어내린 자들은 뱃속에 금이 감추어져있다고 생각한 로마군에 의해서 전부 배가 갈리면서 살육을 당했고, 성내에서는 내전에 의한 살육과 기근으로 모두가 최악의 비참함을 경험해야만했다.


다윗에 대한 축복과 더불어 시작된 거룩한 시온성인 예루살렘이 왜 이렇게 파멸될 수밖에 없었는지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잘 드러나고 있다.



(7-8, 문제에 대한 근원적 해결책)


유다 백성들은 자신들의 계략도 효과가 없었고, 결과적으로 자신의 주검이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밥이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고 명령하셨는데, 아담의 범죄의 결과가 다스려야할 대상의 밥이 되어버린 것이다.


창 1:28의 생물과 창 3:1의 짐승은 같은 히브리어(חַי  chay)어원을 가지고 있으며 여기에는 뱀, 결국 사단의 존재가 포함되어있었는데, 유다 백성들은 결과적으로 사단의 밥이 되고만 것이었다.


유다와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재앙의 저주를 인간적으로 해결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발생하게된 원인은 무시하고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문제의 원인이 자신들에게 있다는 것을 잘알고 있기 때문이다.


유다와 예루살렘의 상황 뿐만이 아니라, 인간이 일반적으로 삶의 환경에서 접하게되는 많은 부정적 상황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문제에서 생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인간과 인간 사회는 근원적으로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관계성이 파괴되었다.


아담의 타락 이후에 인간의 방향성은, 가인과 같이, 하나님을 등진 방향으로 나아갔으며, 인간은 삶의 환경에서 생기는 모든 문제를, 하나님과 관계없이, 인간 스스로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해결하려고한다.


문명은 문제 해결을 위해서 발전이 되는 것이다.


문명이 발전한다는 것은 그만큼 문제가 많다는 것이다.


현대의 첨단 문명에서는 하나님이 철저히 배제되어있다.


하지만 첨단 문명은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북한의 핵도 제거하실 수 있으시고, 주변의 부정적 상황도 충분히 제거해 주실 수 있지만, 이러한 환경을 허락하신 이유는 우리에게 더 큰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다.


유다와 예루살렘처럼 하나님을 철저히 배제하는 현대 문명 사회의 결국이 어떠할지 심히 염려스럽기만하다.



(9, 심은데로 보응받는 재앙의 저주)


아들과 딸과 친구의 살을 먹어야되는 상황은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이지만 이는 이들이 도벳에서 자신들의 자녀를 바알에게 번제로 드렸던 사건에 비교하면, 마땅히 벌을 받아야만 할 짓을 한 댓가라고 할 수 있다.


아들과 딸과 친구의 살을 먹는다는 것은, 공동체의 가장 기본되는 틀을 파괴하는 행동으로서, 이스라엘 공동체가 완전히 파괴될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실상은 이미 유다 백성들이 자신의 자식을 바알에게 번제로 바침으로서, 스스로 공동체에 대한 파괴적 행동을 하였던 것이다.



(10-11, 이스라엘의 종말을 고함)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종말을 고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함께 시내산에서 언약에 대한 맹세를 하였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종말을 고하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이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 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선택을 하셔서 하나님의 법을 직접 주시고, 친히 나라를 다스리셨는데도, 이러한 결과가 나타나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의 인격적인 다스림으로는, 모든 인류가 아담의 범죄와 같은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인생임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이것이 육적인 인생의 한계이며, 하나님의 최고의 노력하심에도, 모든 인간은 결국  깨뜨려야할 옹기밖에 안되는 인생을 보여준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와 상황은 하나님의 구속사 한 가운데 있다,


이 세상은 그냥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창세 전 하나님의 구속 언약이 실행되는 과정 가운데 운행되고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조 세계에 대한 분명한 방향성을 가지고 계신데 비해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서는 삶의 방향성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모든 상황과 인간의 행적은 하나님의 구속 역사 가운데서 반드시 정리될 것이다.


톰 라이트는 지옥을, 힌놈의 골짜기와 동일시하면서, 하나의 상징이라고 말하지만, 힌놈의 골짜기 도벳은 실제 있는 지옥이라는 실체의 모형과 그림자일 뿐이다.


유다 백성들은 일차적으로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았으며, 그 결과로 바알에게 자신의 자녀들을 번제로 드리는 일을 행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을 삶에서 배제한 현대인들의 삶의 방식도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자녀들을 악에게 내어주는 행동을 하고있다.


현대인은 시대를 결산하는 마음 가짐으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12-13, 우상 숭배의 최후)


유다 백성과 예루살렘의 최후는 자신을 대표하는 선조들이 시내산에서 맹세한 것에 대한 결과이다.


맹세를 자신들이 직접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선조들의 맹세에 절대적으로 귀속된다.


인간은 누구나 다 공동체성과 대표성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다 공동체와의 관계 가운데 공동체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가지고 있다.


공동체를 배제한 개인은 존재할 수가 없다.


인간의 공동체성은,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지음받을 때,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이 인간의 속성 안에 담겨진 것이다.


부모와 자녀는 공동체의 가장 기본이며, 친구는 사회 공동체의 근간이다.


자녀와 친구의 살을 먹는 재앙은 가나안 땅이 더 이상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적 구현이라는 목표가 실현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의 우상 숭배의 죄악은 결과적으로 자녀와 친구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밖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제정하신, 그리스도의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인, 떡과 포도주를 나누는 성만찬은, 더 이상 자녀와 친구의 살을 먹는 악행을 종식시키고, 새로운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이어주는 생명의 매개체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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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2017. 12. 29. 13:57

예레미야 18장 13-23절 말씀 묵상

13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누가 이러한 일을 들었는지 여러 나라 가운데 물어보라 처녀 이스라엘이 심히 가증한 일을 행하였도다

14  레바논의 눈이 어찌 들의 바위를 떠나겠으며 먼 곳에서 흘러내리는 찬물이 어찌 마르겠느냐

15  무릇 내 백성은 나를 잊고 허무한 것에게 분향하거니와 이러한 것들은 그들로 그들의 길 곧 그 옛길에서 넘어지게 하며 곁길 곧 닦지 아니한 길로 행하게 하여

16  그들의 땅으로 두려움과 영원한 웃음 거리가 되게 하리니 그리로 지나는 자마다 놀라서 그의 머리를 흔들리라

17  내가 그들을 그들의 원수 앞에서 흩어 버리기를 동풍으로 함 같이 할 것이며 그들의 재난의 날에는 내가 그들에게 등을 보이고 얼굴을 보이지 아니하리라

18  그들이 말하기를 오라 우리가 꾀를 내어 예레미야를 치자 제사장에게서 율법이, 지혜로운 자에게서 책략이, 선지자에게서 말씀이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니 오라 우리가 혀로 그를 치고 그의 어떤 말에도 주의하지 말자 하나이다

19  여호와여 나를 돌아보사 나와 더불어 다투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 보옵소서

20  어찌 악으로 선을 갚으리이까마는 그들이 나의 생명을 해하려고 구덩이를 팠나이다 내가 주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돌이키려 하고 주의 앞에 서서 그들을 위하여 유익한 말을 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21  그러하온즉 그들의 자녀를 기근에 내어 주시며 그들을 칼의 세력에 넘기시며 그들의 아내들은 자녀를 잃고 과부가 되며 그 장정은 죽음을 당하며 그 청년은 전장에서 칼을 맞게 하시며

22  주께서 군대로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게 하사 그들의 집에서 부르짖음이 들리게 하옵소서 이는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구덩이를 팠고 내 발을 빠뜨리려고 올무를 놓았음이니이다

23  여호와여 그들이 나를 죽이려 하는 계략을 주께서 다 아시오니 그 악을 사하지 마옵시며 그들의 죄를 주의 목전에서 지우지 마시고 그들을 주 앞에 넘어지게 하시되 주께서 노하시는 때에 이같이 그들에게 행하옵소서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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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예레미야를 통해서 기록된 말씀은 하나님과 예레미야와 유다 백성의 서로에 대한 관계성에서 전개되고있다.


유다 백성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탄식과 유다 백성들에게 핍박받는 예레미야의 항변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언약에 대한 공의의 차원에서 유다 백성들의 문제를 접근하셨다면,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들에 대한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차원에서 하나님께 항변을 한다.



(13-16, 하나님의 탄식)


하나님께서는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을 예로 드시면서 이스라엘의 상식 밖의 행동 방식에 대하여 질책을 하신다.


상식은 자연법에 속하여 있는 정상적인 범주의 영역인데 반하여 비상식은 자연법을 벗어나는 비정상의 범주에 속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오죽 답답하셨으면, 유다 백성의 몰상식한 행동을, 이방인들에게 확인을 받으라고 하셨겠는가?


이는 이스라엘의 상황이 이방인들 가운데서는 일반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상식 밖의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을 맘껏 축복 하실 수 없는 이유가 되기도한다.


아담의 후손으로서의 인간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경우, 그 죄성이 더욱 활성화되어,  더 큰 부작용을 낳을 수밖에 없다.


노아 홍수 이전의 급속한 타락도, 하나님께서 주신 환경적 풍요가 더욱 인간의 죄성을 자극하고 촉진시켜서, 인류가 보편적으로 급격하게 타락한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죄인이 교회 안에서 세상적인 축복을 받게되면, 세상의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 필연적으로 나타나게되며, 결과적으로는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 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선택하여 축복을 해 주실 경우, 인간의 타락된 본성은 하나님의 축복을 오용하고, 이로 인하여 교만하여져서,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힐 수밖에 없다.


불신자로서 타락한 인간이라도,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이 아닌 일반은총으로서의 자연법 하에서는, 자연법이라는 상식에 준하는 행동을 하게 되어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특별법이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이들에게 주어질 경우, 이들은 자연법을 무시하고서 하나님이 주신 특별 은혜를 몰상식하게 사용하게 되어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율법이라는 견고한 법을 제어장치로 주셨는데도, 하나님의 축복을 저주로 바꾸어 놓았는데,  하물며 율법을 받지 않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저주로 바꾸어 놓는 일은 당연할 것이다.


교회가 거듭나지 않은 신자들로 넘쳐날 때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은 유다 백성들의 몰상식을 뛰어 넘을 수밖에 없다.


교회의 부패가 일반 상식을 넘어서서, 세상보다도 더욱 부패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인간의 죄성과 결합함으로서 인간의 죄악이 더욱 활성화되는 특수한 상황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세속화된 한국 교회가 사회의 걱정거리가 된 이유인 것이다.


수백억이라는 이월 적립금이 교인도 몰래 관리되고있는 교회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순전하게 선포될 수가 있는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 오늘날 한국 대형 교회들의 현실이다.


교회의 축복에 대한 강조와 급속한 부패는 거의 비례 관계를 가지고 있기에 대형교회에서는 거의 예외없이 이러한 현상들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성도가 아닌 자칭 교인들이 세상적인 축복을 받으려고 교회에 들어올 때, 교회 성직자들은, 아무 위기 의식도 없이, 이들의 장단에 맞춰서 춤을 추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 한국 교회에는 너무도 흔한 일이 되었다.


더 큰 문제 가운데 한 가지는 한국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당하는 어려움을 핍박과 환란이라는 박해 차원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교회가 세상에서 조롱 당하는 모습은 유다 백성들이 당하게될 비웃음과 같은 종류의 비웃음으로서, 핍박이 아니라 수치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수치를 당하면서도 이를 세상의 핍박이라고 생각하면서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이 더욱 안타깝기만 하다.


분명히 고난과 수치는 구별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축복하시길 원하시지만, 인간은 육체의 죄악에서 자유 할 수 없기에, 하나님의 축복을 제한적으로 받을 수밖에 없다,


교회는 육신의 소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곳이 아니기에, 성도는 삶의 중심을 자신에게서 예수 그리스도께로 옮겨가야만 할 것이다.



(17, 재난의 날에 응답 하시지 않으시는 하나님)


재난의 날에 얼굴을 보이시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은 유다 백성을 완전히 버리시겠다는 의미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의 죄악에 대해서는 재난의 날에 완전한 버림을 선택하셨지만,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류의 죄악에 대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완전한 버리심으로 인류의 죄악과 그에 따른 저주를 그리스도께 담당시키셨다.


유다 백성들에 대한 저주는 언약에 근거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었듯이,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류의 죄악을 담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도 아담 안에서 이미 죽은 모든 인류에 대한 언약적 심판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정하지 않고 믿지 않는 이들은, 그리스도가 담당하셨던 죽음을 직접 담당하여야만 하기에, 재난 날에 이들의 기도는, 유다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응답되지 않으며 영원한 죽음에 처해 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18, 유다 백성들의 악행)


유다 백성들이 예레미야에 대하여 꾸미는 계략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것을 싫어하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선지자의 역할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게하려는 계략이다.


진리는 죄인들의 악행을 고발하기에, 불의한 이들은 진리가 선포되는 것을 싫어 할 수 밖에 없다.


교회에서도 진리가 제대로 선포되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한 가지는, 교회 공동체가 떳떳하지 못한 일들로 인하여 마음에 찔림을 받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교회에서 진리가 바로 선포되기 위해서는, 스스로 악하다고 생각되는 일들에 대한 죄의 고백과 회개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19-22, 예레미야의 탄원 기도)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자신이 당하는 억울함을 하소연하면서, 하나님께서 복수해주시기를 간청을 한다.


예레미야의 인간적인 면이 여기서도 어김없이 나타난다.


인간적이라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 이전에는 죄 용서와 불쌍히 여김에 대한 개념이 없었던 것 같다.


그리스도 이전에는 악에 대해서는 악으로 갚는 것만이 정의를 실현하는 유일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예레미야의 또 한 가지 부족한 점은 유다 백성을 향한 극단적인 저주가 자신의 생명에 대한 위기 의식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자신은 정당한데 자신을 대적하는 이들이 부당하다는 것이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감정적이며, 인간적이다.


예레미야의 생각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의 죄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모든 사람이 근본적으로 죄인이며, 의인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며, 예레미야도 예외는 아니기 때문이다.



(묵상)


교회는 하나님의 정의가 이 땅에서 실현되는 곳이다.


하나님의 정의는 언약에 근거하고있으며, 어디까지나 공적인 약속에 근거를 한다.


교회는 예레미야의 항변과 같이 개인적인 감정적 분노를 표출하는 곳이 아니며, 대신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용서가 실현되는 곳이다.


교회 공동체는 개인의 육적인 목적과 욕심을 충족시키는 곳이 아니다.


교회에서 행해지는 입시를 앞둔 기도회의 모습은, 얼마나 교회에 세상적인 관점이 자리를 잡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성도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세상적 도구로 전락시키는 우를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교회 공동체에서는 유다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불의가 드러날 수 밖에 없지만, 교회 공동체는 인간의 정의가 아닌 하나님의 정의가 용서를 통해서 실현되는 곳이다.


교회의 성도들이라고하더라도, 바울이 고백하였던 사망의 몸을 지니고 있는 아담의 후손이기에, 온갖 부정적 상황으로 인하여 육신의 죄에 다시 묶이는 것이 아니라, 용서와 화해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참된 자유가 실천이 되어야만 한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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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2017. 12. 29. 13:03

예레미야 18장 1-12절 말씀 묵상

1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에 이르시되

2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에서 내 말을 네게 들려 주리라 하시기로

3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4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5  그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6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7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부수거나 멸하려 할 때에

8  만일 내가 말한 그 민족이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9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건설하거나 심으려 할 때에

10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하게 하리라고 한 복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

11  그러므로 이제 너는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며 계책을 세워 너희를 치려 하노니 너희는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며 너희의 길과 행위를 아름답게 하라 하셨다 하라

12  그러나 그들이 말하기를 이는 헛되니 우리는 우리의 계획대로 행하며 우리는 각기 악한 마음이 완악한 대로 행하리라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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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인격체로서의 진흙)


토기장이와 진흙과의 관계는 성경에서 많이 등장하는 대표적인 비유 가운데 한 가지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시는 토기장이와 진흙의 관계는 이사야서에서도 비슷한 양상으로 기록되고 있다.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라는 말씀은, 토기장이의 원래부터의 의도가 다른 용도로 만드시려고 한 것이 아니라, 과정 가운데서의 실패로 인해서 토기장이의 1차적인 의도대로 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능력이 없으셔서 진흙이 터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능력이 없으셔서 아담의 범죄를 막지 못하셨다는 것과 같은 말일 것이다.


진흙이 터진 상황은 오직 진흙만의 문제인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진흙이 인격체라는데 있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격체이다.


인격체는 자신의 일에 대하여 스스로 결정할 권리와 책임이 수반되어야만 참된 인격체라고 할 수 있다.


유다 백성은, 비록 타락한 아담의 후손으로서, 거의 사단의 좀비와 같은 인생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에 대하여 끝까지 인격적으로 상대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인격체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수반하기에, 인격체와 맺는 언약은 행위 언약 일 수밖에 없다.


은혜 언약은 일단 제대로된 인격적인 기능이 상실된 경우에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맺으신 언약이 행위 언약이었던 것은 아담이 인격적인 존재였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가나안이 에덴이 유형학적으로 재연된 곳이라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끝까지 인격적으로 상대하고 계신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행위 언약의 근거하에서는 유다 백성들을 재앙의 저주 직전까지도 끝까지 인격적으로 권면하신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은 시내산 언약이 행위 언약이라는 사실은, 아담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격체로 대하시겠다는 하나님의 표현이었다.


일부 신학자들의 주장과 같이 오직 단일한 은혜 언약만을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를 비인격적으로 대하시겠다는 표현이기에, 이러한 적용은 행위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물을 수 없는 비인격적인 개념이다.


아브라함 언약과 그리스도의 새언약이 은혜 언약인 것은, 이미 타락한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류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율법을 이행할 수 없는 전적으로 부패한 비인격적인 존재라는 사실이 결론으로 내려졌기에 나올 수 있는 개념이다.


예레미야를 통해서 표현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인격적인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기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시내산 언약이 비인격적인 은혜 언약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시내산 언약의 본질은 은혜 언약에 속하여 있지만, 표면적인 속성은 행위 언약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행위 언약을 인정하지 않는 신학자들은 모세의 시내산 언약이 이스라엘의 보존을 위한 것이지, 결코 불순종에 따른 심판과 저주를 수반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스라엘이 불순종 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고, 이를 위해 그리스도를 예비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과 예루살렘 거민들에 대해서, 재앙을 내리시기 직전의 마지막까지도 인격적으로 이들이 돌이키고 다시 돌아오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하나님의 예정을 생각할 때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하지만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책임이라는 논리가 대립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는 조화가 될 수 있는 것은 끝까지 인격이라는 개념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신자라고 하더라도, 비록 구원에 있어서는 문제가 없을지는 몰라도, 결코 잘못된 행위를 간과 하시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비록 은혜 언약에 근거하여 구원을 받은 신자라도, 그리스도와 연합된 새로운 피조물로서 그리스도의 인격을 새롭게 부여받은 새로운 창조물이기에, 새로운 인격체로서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는 것이다.


한국 교회에 만연한 비상식적 행동과 부도덕은 하나님의 예정과 인격체로서의 인간의 책임을 잘못 이해한 결과물일 뿐이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유다 백성과 예루살렘 거민들의 죄악을 간과하지 않으셨듯이, 마찬가지로 인격을 새롭게 부여받은 신자들의 잘못된 죄악들에 대하여 어떠한 형태로든 그냥 지나가시지 않으신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5-10, 하나님의 주권)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그릇을 빚어내듯, 이스라엘을 세우신 분도 하나님이시다.


토기장이가 터진 진흙을 자신의 의견에 좋은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듯이, 세우셨던 이스라엘을 무너뜨리는 것도 하나님의 좋으신 뜻대로 행하실 권리가 있으신 것이다.


애초부터 천지를 지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의 주권은 당연한 것이다.


인간의 타락과 구속사는,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을 입은 인간을 인격체로 창조하시기 위해서 값비싼 댓가를 치르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적 주권을 인정하면서도, 끝까지 인간의 행동방식을 인격적으로 존중하신다.


하지만 인간의 행동에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무조건 인간을 받아들여야만 할 의무는 없다.


인간이 인격적 선택권이 있듯이 하나님도 인격적 선택권이 있으신 것이다.


비록 유다 백성이 이제껏 잘못했다고 하더라도 악에서 돌이키면 하나님께서 내리시기로한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실 수가 있고, 유다 백성들이 악한 것을 행하여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면, 하나님도 주실 복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실 수가 있으신 것이다.


신학자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선택에 관한 예정론은 구원 받을 자에 대한 것이며, 여기에서 인격이라는 기본 권리가 배제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생각하는 차원보다도 높은 차원에 계시기에, 모든 부정적 상황도 결과적으로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분이시다.



(11-12, 마지막까지 권면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포기하기 않으시고 유다 백성들에게 돌아오기를 권면하시지만, 유다 백성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하나님께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하여 인간이 한 마디의 항변도 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시면서, 인격적으로 유다 백성들의 선택을 존중하시면서, 끝까지 노력하셨는데도 결국 유다 백성은 최후의 순간까지도 하나님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인간의 입장에서는 더 이상 어떠한 한 마디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재앙의 저주에 대하여 항변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인류가 현재적으로 담고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한 단면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마지막까지 거부하는 것은, 아담의 반역으로 인하여 인류 가운데 심겨진 죄악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유다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들이기에, 오직 은혜가 아니고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에게 주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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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2017. 12. 29. 13:01

예레미야 17장 19-27절 말씀 묵상


19  여호와께서 내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는 가서 유다 왕들이 출입하는 평민의 문과 예루살렘 모든 문에 서서

20  무리에게 이르기를 이 문으로 들어오는 유다 왕들과 유다 모든 백성과 예루살렘 모든 주민인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


21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스스로 삼가서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지 말며

22  안식일에 너희 집에서 짐을 내지 말며 어떤 일이라도 하지 말고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명령함 같이 안식일을 거룩히 할지어다

23  그들은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며 그 목을 곧게 하여 듣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였느니라

2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가 만일 삼가 나를 순종하여 안식일에 짐을 지고 이 성문으로 들어오지 아니하며 안식일을 거룩히 하여 어떤 일이라도 하지 아니하면

25  다윗의 왕위에 앉아 있는 왕들과 고관들이 병거와 말을 타고 이 성문으로 들어오되 그들과 유다 모든 백성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함께 그리할 것이요 이 성은 영원히 있을 것이며

26  사람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에 둘린 곳들과 베냐민 땅과 평지와 산지와 네겝으로부터 와서 번제와 희생과 소제와 유향과 감사제물을 여호와의 성전에 가져오려니와

27  그러나 만일 너희가 나를 순종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거룩되게 아니하여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면 내가 성문에 불을 놓아 예루살렘 궁전을 삼키게 하리니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할지니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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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 안식일을 거부하는 백성들)


이미 보편적으로 율법을 거부한 백성들이기에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이 일반화 되어있음을 볼 수 있다.


포로에서 귀환한 후의 유대인들의 율법에 대한 열심과는 대조적으로 포로로 잡혀가기 이전에 유다 백성들이 율법을 얼마나 등한시 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예레미야가 안식일을 지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느닷없이 기록한 것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신학자들도 있지만,  이미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한 유다 백성들에게는 오직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만이 유일한 희망이었기에, 안식의 주인되신 그리스도를 준비시키는 가장 적절한 시기의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석 할 수 있다.


그래도 끝까지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려는 유다 백성들의 모습에서, 이들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 마저도 쉽게 받아들이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타락한 아담의 자손은 누구나 보편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주실 참된 안식에 대하여 준비가 되어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는 그리스도의 안식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임을 보여주고있다.



(24-27, 안식일 준수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


궁극적으로 새예루살렘에서의 안식은 인간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지해야 하는 것이기에, 예루살렘에 짐을 지고 들어와서 장사를 하려고 한다거나, 어떤 자의적 수고로 자신을 완성하려는 시도는 배제되어야만 한다.


영원한 안식을 예표하는 예루살렘은 다윗의 왕위를 계승한 왕들에게서 희망을 보아야만 했다.


율법의 요구에 대한 불순종만 보여주었던 유다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다윗의 자손에 의하여 안식의 장소가 되어야만 했던 예루살렘은, 이어지는 왕들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결과적으로는 파괴될 수밖에 없었다.


율법에 불순종한 이들이 그리스도께 나아가야했듯이,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했던 다윗의 왕위는 최종적으로 그리스도로 귀결되어야만 했다.


예루살렘은 다윗의 후손인 그리스도에 의해서 완성될 하나님의 도성으로서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이 실현될 새예루살렘의 모형이며 그림자였다.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완성될 안식의 장소인 예루살렘, 즉 교회는, 예루살렘 바깥의 모든 이들인 이방인에게 열려있는 곳이지만, 이곳에 들어오는 이들은 무거운 자신의 짐, 즉 자신의 행위의 공로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순종에 의지하여,  그리스도의 안식에 거룩함으로 참여하여야 할 것이 요구된다.



(묵상)


예레미야는 보좌에 계신 하나님만이 유다의 피난처요, 안식이신 성소임을 찬양한다.


예레미야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을 저주의 재앙에서 구원해 주실 것을 깨닫고나서야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한다.


예레미야의 찬양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응답하심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에게 안식일을 지킬 것을 전하라고 말씀하신다.


얼핏보면 재앙의 저주 후에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이 연결이 안되는 것 같아보이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안식일에 재한 준수는, 유다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율법에 대한 순종이라는 개념보다는, 율법의 종료로서의 안식을 명령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명하신 안식일에 대한 준수는, 율법의 범주에 속하여있으면서도, 이미 유다 백성들에 대한 재앙의 저주를 통해서 언약의 종료를 선언하신 후의 말씀이기에, 율법의 종료와 더불어 제시된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라고 할 수 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는 6일간의 창조 사역을 마치시고 제 7일에 취하신 안식의 개념에서 시작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에서의 아담에게도 마찬가지로 안식을 요구하셨다.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안식은 창 1:28의 창조 명령을 제대로 수행했을 때 기대 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가나안에서는 에덴에서의 상황이 유형학적으로 재연됨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안식이 요구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창1:28의 창조 명령은 율법의 요구와 마찬가지로 능동적 순종의 요구였다고 볼 수 있다.


아담이 에덴에서 능동적 순종이 요구되었던 창 1:28의 창조 명령을 수행하지 못하였던 것과 같이, 이스라엘 유다 백성들도 하나님께서 요구하셨던 능동적 순종으로서의 율법의 요구에 실패하였다.


불순종으로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같이, 이미 율법에 대한 불순종으로 가나안에서 쫓겨날 것이 결정된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안식일에 대한 순종은 더 이상 율법에 대한 순종의 요구는 아니며, 아담의 범죄와 더불어 제시되었던 원시 복음(창 3:15)과 같이, 저주 받은 유다 백성들에게 복음으로  제시된 그리스도의 안식이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안식일에 대한 순종이 나타내는 하나의 의미는, 인간이 더 이상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선언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안식일에 대한 순종은,  궁극적으로 오직 은혜에 의해서만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율법 아래 나신 두 번째 아담으로서, 아담이 실패한 창 1:28의 창조 명령과 율법에 대한 능동적 순종, 그리고 율법의 저주인 십자가에서의 수동적 순종을 통해서 안식을 완성하신 분이시다.


유다 백성들을 통해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인간의 죄성은, 율법에 대한 불순종과 더불어,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안식에 대한 불순종이다.


하라고 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도 죄악이지만, 하지말라는 것을 하는 것도 죄악이다.


유다 백성들은 율법에 대한 요구를 거절하는 것 못지 않게 안식에 대한 요구도 거절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벨론 포로 생활 후의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들은 율법에 대한 요구가 종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율법에 집착하면서, 유다 마카비우스를 비롯한, 열성당원들의 성전 탈환을 위한 끈질긴 활동들을 볼 수 있다.


안식이 요구되었던 유다 백성들에게 성전은 또 하나의 율법이었기에, 유대의 성전은 참 성전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파괴 될 수 밖에 없었다.


이스라엘의 성전에 대한 집착은 안식에 대한 거부였으며,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거부로 나타난다.


최근에 다시 시도되는 제3 성전 건축에 대한 집착은, 예수 그리스도가 성취하신 안식에 대한 집요한 거부라는 의미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고 본다.


제 3성전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또 한 가지의 방법이 아니다.


유대 성전은 인간이 얼마나 죄인인지를 드러내는 것이며, 참 성전되신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모형일 따름이다.


이스라엘의 유대 성전에 대한 집착은, 아담의 후손으로서 가지고 있는 인간의 죄성을 거부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거부하는 것이다.


세대주의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무력화시키며, 창세 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에 반하는 개념이다.


성경은 인간에게 두 가지 방식의 구원을 말하지는 않는다.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이 땅의 어느 영혼도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


2000년 전의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들의 안식에 대한 거부는, 20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모든 인류를 대표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거부를 나타내기에, 2000년 전의 예루살렘의 파괴를 통한 심판과 마찬가지로, 최후의 심판에 대한 도전 이라고 볼 수 있다.


오직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만이 참 된 성전이시고, 교회는 그리스도가 주시는 안식의 장소인 것이다.


오직 교회만이 안식을 경험하는 장소이기에, 교회는 장사를 하려거나, 아니면 자아를  실현하는 장소가 되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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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2017. 12. 29. 13:00

예레미야 7장 12-18절 말씀 묵상

12  영화로우신 보좌여 시작부터 높이 계시며 우리의 성소이시며

13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

14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15  보라 그들이 내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어디 있느냐 이제 임하게 할지어다 하나이다

16  나는 목자의 직분에서 물러가지 아니하고 주를 따랐사오며 재앙의 날도 내가 원하지 아니하였음을 주께서 아시는 바라 내 입술에서 나온 것이 주의 목전에 있나이다

17  주는 내게 두려움이 되지 마옵소서 재앙의 날에 주는 나의 피난처시니이다

18  나를 박해하는 자로 치욕을 당하게 하시고 나로 치욕을 당하게 마옵소서 그들은 놀라게 하시고 나는 놀라게 하지 마시옵소서 재앙의 날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시며 배나 되는 멸망으로 그들을 멸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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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피난처, 성소가 되신 영광스러운 보좌)


예레미야 선지자는 유다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의 재앙 앞에서 혼란스러워하다가, 유다 백성들을 버리시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 구원의 손길을 펴실 것을 깨닫고서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의 저주는,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라, 공의의 하나님이시기에,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언약을 신실하게 이행할 의무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변치 않았으며, 하나님께서 구원의 손길을 예비하고 계심을 깨닫고서, 오직 하나님만이 진정한 안식처가 될 수 있음을 찬양한다.


성소는 피난처, 안식의 개념을 포함하고있다.


태초부터 찬양 받으실 영광스러운 보좌는 유다 백성들을 넘어서, 우리 모두의 피난처, 성소, 안식이 되신다.


이는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통하여 이루어졌기에, 그리스도는 우리의 궁극적인 피난처, 성소, 안식이 되신다.


하지만 인간은 피난처, 성소, 안식이 되신 주님께 나아가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기에 실질적으로 주 안에서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인간은 누구나 죄인이기에, 권위자에 대하여 두려움이 앞설 수 밖에 없다.


권위자에 대한 두려움과 가까이하기 힘든 어려움은 전부 죄로 인하여 왜곡된 부정적 사고에서 나온다.


가까이 하기 힘들고, 어려운 것은, 마치 가인이 범죄하고서 하나님을 멀리 한 것과 같이, 자신의 죄에 대한 부담감에서 나오는 것이다.


권위자는 우리의 참된 안식이 되시며, 우리에게 평안을 제공해주시며, 우리의 위로와 힘이 되신다.


우리가 의지할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받아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두려움 없이 하나님 안에서 평안과 안식을 누리며, 예레미야와 같이 하나님을 찬양 할 수 있다.


하나님께 대하여 부담감을 갖는 것은 결코 좋은 것만은 아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무섭게 권위적으로 다가오시는 분이 아니시다.


우리가 죄인이기에 스스로 두려워 할 뿐이다.


두려움과 불안, 공포, 스트레스, 외로움, 분리, 혼란들은 다 아담의 범죄와 더불어 시작된 것이다.


비록 체질은 아직 죄악된 육신을 가지고 있지만, 신자는 두 번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자녀이기에, 첫 번째 아담으로부터 온 죄의 속성으로부터 자유할 필요가 있다.


두 번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안에서 평안과 안식을 누릴 권리와 자격이 있으며, 예레미야 선지자와 같이 주님을 찬양하면서, 주 안에서 평안과 안식을 누리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13, 흙에 기록된 자들)


인생은 눈에 보기에 아무리 화려한 것 같아도 시간이 지나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다.


인생은 누구나 흙으로 돌아갈 것이며, 그를 기억했던 자들도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주를 떠난 인생들에게는, 사는 동안 품었던 수 많은 알들이 품에서 떠나고 더 이상 품은 자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인생의 참된 가치는 오직 하나님께 기억된 자로서, 영원한 안식이 되시는 하나님의 품에 안길 때만 참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신자에게는 아담에게 순종의 조건으로 약속된 종말론적 축복과 영생을 누릴 자격이 주어진 것이다.


허무한 인생들은 없어질 것을 위해서 살지만, 신자는 영원한 것을 위해서 살아가야할 것이다.


영원한 것은 오직 하나님이 택하신 인생들에게만 주어진 것이다.


문화물의 천국보존을 위해서 문화 변혁 운동을 하며, 이 땅의 구속적 문화 변혁을 위해서 힘쓰는 인생들도, 그 문화가 더 이상 천국에서 보존되지 않는다면, 그 수고는 허무한 것이 될 것이다.


인생이 비록 임시적이고 짧은 기간을 살아가는 것이지만, 삶 가운데 문화물이 천국에서 보존이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문화는 성도를 성화시키는 수단으로서의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데 의미를 두어야 할 것이다.



(14, 구원자께 의뢰하는 삶)


예레미야는 병들어 있는 자신이 치유받기를 하나님께 간구한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몸과 마음이 병들어 있음을 보여주고있다.


인생은 연약하기에 하나님의 일이라고 할지라도 인간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육신은 피폐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더군다나 예레미야는 재앙의 저주를 선포하는 일을 맡았으니, 결코 쉽지않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안식이 없다면, 인생은 결코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안식은 고통을 능가하는 것이기에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서 자신이 고침을 받기를 기도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는 이 세상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다.


고달픈 인생이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안식은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놀라운 것이다.



(15-16,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


예레미야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충실하였지만 이로 인해서 좌절에 빠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위로가 없이는 인간은 낙담하게되어있다.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에게 결코 만만한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기 위한 기도가 반드시 병행되어야만 말씀을 전하고 선포하는 일이 가능할 것이다.



(17-18, 피난처가 되신 하나님)


예레미야의 기도는 마치 전쟁터에서 지원군의 도움을 요청하는 병사의 외침과 같다.


말씀을 소유한 성도는 이 세상과 전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성도의 삶에서 세상과의 싸움이 없다면 이들은 직무를 유기하는 자일 것이다.


모든 성도는 선지자로서의 직분을 가지고 있기에 말씀을 소유해야하고 또한 말씀을 선포해야만 할 것이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말씀을 전달받았지만, 모든 성도는 성령의 내주하심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대위임령(마28:19-20)을 수행할 의무가 있다.


말씀은 세상에 던지는 폭탄과 같아서 반드시 반격이 있게 마련이다.


하나님은 전쟁터에서 군사를 보호해주시는 피난처가 되시며, 적군을 물리쳐주시는 힘이 되신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생각하며, 사는 날 동안 성도로서의 맡은바된 선지자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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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2017. 12. 29. 12:56

예레미야 17장 1-11절 말씀 묵상

1  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그들의 마음 판과 그들의 제단 뿔에 새겨졌거늘

2  그들의 자녀가 높은 언덕 위 푸른 나무 곁에 있는 그 제단들과 아세라들을 생각하도다

3  들에 있는 나의 산아 네 온 영토의 죄로 말미암아 내가 네 재산과 네 모든 보물과 산당들로 노략을 당하게 하리니

4  내가 네게 준 네 기업에서 네 손을 뗄 것이며 또 내가 너로 하여금 너의 알지 못하는 땅에서 네 원수를 섬기게 하리니 이는 너희가 내 노를 맹렬하게 하여 영원히 타는 불을 일으켰음이라

5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6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

7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8  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10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11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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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다의 우상 숭배의 죄)


오늘은 역사를 통해서 확실하게 증명된 유다 백성들의 우상 숭배의 죄에 대한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죄라고 말씀하시는 주된 것은 우상 숭배에 대한 것이다.


우상 숭배는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이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것을 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본다면 유다 백성 못지 않게 우상 숭배를 하는 이들이 현대 사회를 사는 이들이다.


현대 사회는 문명의 발달 만큼이나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며, 사람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고있다.


유다 백성의 역사가 증명해주는 유다 백성들의 우상 숭배 만큼이나, 산업 혁명 이후에 상품을 팔기 위해서 식민지 개척에 열을 올리다가 양대 세계 대전을 일으키는가하면, 모든 선악의 기준을 이익에 두고서 판단하는 시장 경제의 원리는 모든 이들로하여금 보편적으로 하나님을 떠나게 한다.


도시 구조의 특성상 유형적 교회 조차도 생존을 위해서 하나님보다는 교인들을 믿고 의지해야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현대인들의 죄는 도시 문명 가운데 우뚝 세워진 건물들 만큼이나 확고하게 새겨져있다.




(2, 우상 숭배의 결과들)


높은 언덕과 푸른 나무 곁은 가나안에서 풍요를 위한 음란한 제사가 행해지던 곳이다.


이곳에서 드리는 제사로서의 남녀의 성적인 결합은, 마치 하늘과 땅의 만남을 통해 비가내리고 풍요를 맛볼 수 있다는 것으로 해석되며, 이는 단순한 우상 숭배를 넘어서 이스라엘 공동체의 민족적 정체성을 파괴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들의 자녀들은 부정한 우상숭배의 결실들이었으며, 혈연에 의한 언약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 민족적 정체성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3-4, 긴밀한 관계성의 파괴)


유다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정은 마치 자녀나 아내로 부터 당하신 배신과 같을 것이다.


아내를 위해서, 자녀를 위해서 온갖 좋은 것으로 입히고, 마음을 다해서 사랑을 하였지만, 이들은 남편을, 그리고 아버지를 버리고 다른 이들을 열심히 쫓아간 간음한 자이며, 집을 떠난 자들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의 진노이었으며, 진노의 불길은 가히 상상하기가 힘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외적인 징계로는, 돌과 같이 단단한 이들의 마음을 돌이키기가 어려우셨을 것이다.


타락한 인간은 직접 잘못된 결과들을 경험 하기 전까지는 무엇이 문제인지를 깨닫지 못한다.


결국 이들을 내어버림으로서 마음 중심에서 다시 돌이키기까지 기다리는 수 밖에 없으셨을 것이다.


그래도 하나님은 끝까지 사랑하시기에 이들을 위해서 새로운 길을 마련해주신다.



(5-6, 스스로 자초한 저주)


저주는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재앙이라기 보다는 인간이 스스로 자초한 환경으로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거두어 가신 결과들이다.


척박한 사막에서 궁핍한 모습을 드러내는 떨기나무는 에덴에서의 아담에게 주어졌던 풍요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서의 풍요의 종결을 의미한다.


에덴과 가나안은 순종을 전제로 주어진 복된 환경이었기에, 스스로 불순종을 택한 이들에게는 허락될 수가 없는 땅이었다.


현재의 복된 환경은 에덴이나 가나안과는 비교될 수는 없지만, 에덴과 가나안이 순종을 조건으로하는 환경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조건이 주어진 환경이다.


모든 인간의 역사는 삼위 하나님의 창세 전 구속 언약이 실행되는 과정 가운데 있다.


하나님의 구원의 좋은 일은 척박한 땅이 아닌, 일반 은총이라는 좋은 환경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현재의 좋은 환경은  택자를 구속하시기 위한 일반 은총을 근거로 유지되는 환경이다.


일반 은총의 목적은 특별 은총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일반 은총 하에 있는 현재의 환경에서도,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사람이 대부분이다.


현재의 환경은 율법 대신에 자연법의 지배하에 있기에,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사람들의 종국은 버림받은 유다 백성들과 한 가지일 것이다.



(7-8, 복있는 사람)


전자기기도 전원의 공급을 받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이듯이, 하나님께로부터 지음을 받은 인간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뻔할 것이다.


인간의 머릿 속에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개념이 있다면, 인간은 결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소외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피조물로서 가장 근본된 도리인데도, 이를 실행하는 것이 인간의 힘으로 안된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지만, 정작 자기 욕심, 즉 사단의 알을 품는 것을 즐거워하는 이들이다.


유다 백성들이 보여준 하나님을 거부하는 삶은, 아담의 타락의 실상이 어떠한 것인지를 말해주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믿고 의지해야할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다.




(9-10, 부패한 인간의 마음)


부패한 인간의 특징 가운데 한 가지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모른다는 것이다.


인간의 옳고 그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판단하실 수 있다.


인간의 머리로는 상상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판단은 표면적인 것이 아니며,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가장 깊은 것도 다 아신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다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다는 사실을 모를 뿐이다.


인간은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 항복하고서, 자신을 더 이상 믿지 말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아야만 한다.



(11, 남의 알을 품은 인간들)


자고새의 경우는 아니지만, 뻐꾸기는 자기의 알을 직접 품지 않고 오목눈이새의 둥지에 몰래 알을 낳고서, 오목눈이새로 하여금 대신에 알을 품게한다.


오목눈이새의 알보다 알찍 부화된 뻐꾸기의 알은 오목눈이새의 알을 밀쳐내고 둥지를 독차지 한다.


오목눈이새의 둥지에서 어느 정도 자란 뻐꾸기는 제 어미의 울음소리를 듣고서 오목눈이새의 둥지를 떠난다.


오래 전에 EBS에서 방영되었던 잊을 수 없는 영상이었다.


뻐꾸기는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고, 직접 키우지 않는다.


유다 백성들이 높은 언덕과 푸른 나무 곁에서 행하였던 가나안의 풍습은 뻐꾸기 알을 품은 오목눈이새와 다를 바가 없다.


타락한 죄인들이 희망했던 풍요는 재앙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결론)


종교개혁자들은 하나같이 인간의 의지가 노예 의지라고 말하였다.


칼빈은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라고 말했다.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인간은 자유 의지가 있는 존재가 아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로서만이 참 자유가 주어질 뿐이다.


유다 백성들의 역사는 대표적으로 노예 의지를 가진 이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땅을 우상들로 뒤 덮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실상이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다.


인간이 비록 노예 의지를 가지고 사단의 종노릇하는 좀비인생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다.


사단은 인간을 이용만 할 뿐이다.


하지만 인간은 사단의 종 노릇하는 인생에 대한 강한 집착력을 가지고 있다.


좀비 인생은 사단이 심겨놓은 알을 자신의 알인양 열심히 품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품에서 떠난다는 것을 알지 못할 뿐이다.


오직 진리의 말씀만이 부패한 인간을 올바로 인도할 수 있다.


일반 은총을 통해서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자.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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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2017. 12. 29. 12:54

예레미야 16장 14-21절 말씀 묵상

1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보라 날이 이르리니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지 아니하고

15  이스라엘 자손을 북방 땅과 그 쫓겨 났던 모든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리라 내가 그들을 그들의 조상들에게 준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리라

16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많은 어부를 불러다가 그들을 낚게 하며 그 후에 많은 포수를 불러다가 그들을 모든 산과 모든 언덕과 바위 틈에서 사냥하게 하리니

17  이는 내 눈이 그들의 행위를 살펴보므로 그들이 내 얼굴 앞에서 숨기지 못하며 그들의 죄악이 내 목전에서 숨겨지지 못함이라

18  내가 우선 그들의 악과 죄를 배나 갚을 것은 그들이 그 미운 물건의 시체로 내 땅을 더럽히며 그들의 가증한 것으로 내 기업에 가득하게 하였음이라

19  여호와 나의 힘, 나의 요새, 환난날의 피난처시여 민족들이 땅 끝에서 주께 이르러 말하기를 우리 조상들의 계승한 바는 허망하고 거짓되고 무익한 것뿐이라

20  사람이 어찌 신 아닌 것을 자기의 신으로 삼겠나이까 하리이다

2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보라 이번에 그들에게 내 손과 내 능력을 알려서 그들로 내 이름이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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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5, 포로의 귀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애굽에서 구해주신 하나님에서 바벨론 포로에서 구해주신 하나님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는 이스라엘의 존재가 더 이상 시내산 언약과 같은 행위 언약의 요구 아래 있지 않고, 더 이상의 순종의 행위에 대한 요구가 없는, 은혜 언약 아래에 있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스라엘에게 요구되었던 순종은 유다 백성들이 저주의 재앙과 더불어 바베론의 포로로 끌려가면서 종결되었다.


유다 백성들에게 임한 저주의 재앙은 행위 언약으로서의 율법의 요구였기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셨어도 공의의 하나님으로서 마땅히 이스라엘에 대하여 벌을 내리셔야만 했다.


재앙의 저주로 징계를 받고 뿔뿔히 흩어져 가나안을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이스라엘의 상태는,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마찬가지로, 이미 행위 언약이 종결된 상태에 처하게되었다.


유다 백성들이 당해야만하는 재앙과 저주를 말씀하시던 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은, 아담이 범죄했을 때 즉각적으로 구원을 약속한 원시복음(창 3:15)과 맥락을 같이 한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고 하면서도 재앙으로 저주하시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다시 회복을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서야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 할 수가 있었다.


원시 복음은 에덴에서 아담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었다면, 예레미아에게 말씀하신 이스라엘의 귀환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었다.


이와같이 에덴과 가나안의 유형적 동일성은, 에덴에서의 행위 언약에 대한 실패를 가나안에서 시내산 언약을 통하여 재연시킴으로서, 타락한 아담의 후손에 대한 구원을 성취하시고자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귀환은 두 번째 가나안 입성으로서,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를 준비하는 것이다.


맹세의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의 개념이 출애굽의 하나님에서 포로를 귀환시키신 하나님으로 바뀐 것은, 이스라엘에게 더 이상의 순종을 요구하지 않는 새 언약을 위한  과정이었다.


이는 창세 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이 역사 속에서 구체화되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포로의 귀환이 곧바로 구속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는, 제2성전 유대교에서의 1세기 문헌을 연구했을 때,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이 실질적인 바벨론의 포로 상태였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유월절 만찬이 이스라엘에 대한 구속으로서의 해방과 용서를 선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적 이스라엘을 구속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시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역사적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삶의 방식을 본으로 보여주신 사건이라고 해석한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유월절 만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가장 중심되는 사건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단지 부차적인 사건일 뿐이다.


새관점의 주장대로라면 역사적 이스라엘이 실질적으로 구속받은 하나님 나라이며, 교회는 단지 확장된 이스라엘일 뿐이다.


이러한 해석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구속을 부정하는 것이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본받아서 살아야한다는 또 다른 순종을 요구하는 것이다.


새관점은 행위 언약 자체를 부정하지만, 새관점이 말하는 은혜는 최종적 구원을 위해서 행위가 요구되기에, 자체적으로 모순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출애굽에서 포로의 귀환으로 바뀐 것은, 최종적 구원을 위해서 더 이상의 순종의 행위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직 믿음이며, 이는 최종적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현재적 구원의 성취인 것이다.



(16-18, 심판을 통한 희망)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포로의 귀환에 대한 희망을 말씀하시지만, 그렇다고 저주의 재앙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시며, 어느 누구도 예외없이 그 댓가를 치루게 하신다.


이는 심판없는 회복은 있을 수 없음을 의미하시는 것이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누군가 대신 죄의 값를 치르지 않아도 재판장의 일방적 선고에 의해서 죄인이 의인이 될 수가 있다고한다면, 더 이상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필요하지가 않다.


새관점의 논리가 맞다면,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의 죄를 일일이 다 찾아내실 필요가 없이 그냥 용서해주시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으로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행위 언약을 근거로 불순종에 대한 저주를 반드시 이행하셔야 했기에, 구원할 자를 위해서 율법 아래에 나신 그리스도가 대신 율법의 저주를 받으셔야만 했다.


아담의 범죄라는 행위 언약의 결과물을 해결하기 위해서, 은혜 언약은 행위 언약에 대한 정리가 있은 다음에야 이루어 질 수 있었다.


모든 인류는 아담의 후손이기에, 이미 아담 안에서 저주를 받아야만 하는 관계로, 그리스도가 대신 죽으시지 않으신다면, 어느 누구도 살 수가 없으며,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실패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이들은 구원을 위해서 아무 것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최종적 심판에 대한 해결책이 되어야만 삶에 대한 희망이 있는 것이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아담의 범죄와 후손의 불순종에 대한 심판은, 아브라함과의 언약에서 잠정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간주한다.


새관점에서 요구하는 믿음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대신 죽으셨다는 것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약속하신 언약을 신실하게 이행하심으로서 모든 이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살아가야한다는 것에 대한 믿음이다.


새관점은 역사적 이스라엘을 아브라함 언약의 결과물로 보고서, 현재의 교회는 확장된 이스라엘로 보고있다.


새관점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 운동은,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살아가서 최종적 구원에 참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심히 부패한 이스라엘을 통해서 인간이 얼마나 부패하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존재인지에 대한 교훈을 얻지 못한 생각이다.


역사적 이스라엘을 율법 아래 둔것은 ,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인인가를 교훈 삼아서,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없이는 구원받을 자가 하나도 없음을 보여주고자한 것이다,



(19-21, 절망에서 희망으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알게되었다.


하나님께 대한 불신을 토해내던 예레미야 선지자가 다시 하나님을 찬양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안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근본적인 희망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에 임한 저주의 재앙이 오히려 희망의 근거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신앙인들은 삶의 여정에서 만나는 부정적 상황들에 대해서, 인간적으로는 하나님을 원망하려는 마음이 앞서겠지만, 부정적 상황 가운데 담겨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소망을 발견함으로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다 아담의 후손이기에, 죄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이 없이 구원에 참여 할 수 없을 것이다.


참된 복음은 죄와 심판에 대한 인식이 앞서야 할 것이다.


교회가 죄와 심판에 대하여 선포하지 않는다면 참된 복음을 전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
예레미야 2017. 12. 29. 12:53

예레미야 15장 10-21절 말씀 묵상

10  내게 재앙이로다 나의 어머니여 어머니께서 나를 온 세계에 다투는 자와 싸우는 자를 만날 자로 낳으셨도다 내가 꾸어 주지도 아니하였고 사람이 내게 꾸이지도 아니하였건마는 다 나를 저주하는도다

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를 강하게 할 것이요 너에게 복을 받게 할 것이며 내가 진실로 네 원수로 재앙과 환난의 때에 네게 간구하게 하리라

12  누가 능히 철 곧 북방의 철과 놋을 꺾으리요

13  그러나 네 모든 죄로 말미암아 네 국경 안의 모든 재산과 보물로 값 없이 탈취를 당하게 할 것이며

14  네 원수와 함께 네가 알지 못하는 땅에 이르게 하리니 이는 나의 진노의 맹렬한 불이 너희를 사르려 함이라

15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오니 원하건대 주는 나를 기억하시며 돌보시사 나를 박해하는 자에게 보복하시고 주의 오래 참으심으로 말미암아 나로 멸망하지 아니하게 하옵시며 주를 위하여 내가 부끄러움 당하는 줄을 아시옵소서

16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17  내가 기뻐하는 자의 모임 가운데 앉지 아니하며 즐거워하지도 아니하고 주의 손에 붙들려 홀로 앉았사오니 이는 주께서 분노로 내게 채우셨음이니이다

18  나의 고통이 계속하며 상처가 중하여 낫지 아니함은 어찌 됨이니이까 주께서는 내게 대하여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 같으시리이까

19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만일 돌아오면 내가 너를 다시 이끌어 내 앞에 세울 것이며 네가 만일 헛된 것을 버리고 귀한 것을 말한다면 너는 나의 입이 될 것이라 그들은 네게로 돌아오려니와 너는 그들에게로 돌아가지 말지니라

20  내가 너로 이 백성 앞에 견고한 놋 성벽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너를 칠지라도 이기지 못할 것은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하여 건짐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1  내가 너를 악한 자의 손에서 건지며 무서운 자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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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예레미야의 탄식의 기도)


예레미야는 어려운 여건에서도 선지자로서의 역할을 최선을 다해서 감당하였지만, 아무런 보람도 느낄 수가 없었기에  좌절에 빠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심정은 많이 격해져있어서 자신을  낳으신 어머니까지 들먹이고있다.


하나님과 유다 백성의 사이에서 어찌할 줄을 모르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심정은 격혀져가기만 한다.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과의 끊임없는 다툼으로 인하여 지쳐가기만 했을 것이다.


선지자의 직책은 세상과의 싸움이기에 피할 수 없는 상황일 것이다.


모든 산자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그리스도가 회복하신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직책을 가지고 있다.


신자도 선지자로서의 직책을 제대로 감당하려면 세상과의 싸움으로 인해서 쉽지 않은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11, 하나님의 응답)


지쳐가고있는 예레미야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응답이다.


인간은 누구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가져야만 한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맡은 일을 감당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모든 과정이 힘들지만 공동체의 위로를 받기보다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아야 한다.



(12, 북방의 철)


북방의 철과 놋은 유대인의 교만을 깨뜨릴 강력한 금속으로서 깨뜨려져야할  유대인의 완고함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의 완고함을 깨뜨리기 위해서 더 큰 완고함을 사용하신다.


이는 이미 유다의 불순종이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고, 유다 백성이 바벨론의 포로로 붙잡혀 갈 수 밖에 없는 상태인  것을 말씀하신다.


사랑하는 이들을 이방 민족의 포로로 내어주는 것은, 자녀가 말을 듣지 않는다고 다른 사람의 노예로 내어준다는 것과 같기에,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하나님과 언약 관계 가운데 운행되기에, 하나님의 순종에 대한 요구는 창조 세계의 공동체적 질서를 위해서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창조 세계 가운데 한 부분의 무너짐은 모든 창조 세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기에, 창조 세계의 보존을 위해서 불순종을 수용할 수가 없는 것이다.




(13, 예레미야의 죄?)


13절의 뜻이 모호해서, 다시 번역해서 해석해본다.


“너희 나라에 만연한 너희들의 모든 죄악들로 인해서, 너희의 부와 보물들을 아무 값없이 탈취 당하게 할 것이다.-NIV번역)


13절은 예레미야 한 개인의 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레미야가 포함된 공동체적 죄로 인한 유다 백성들에 대한 징계를 말씀하신다.



(14. 원수에게 내어줌)


중립지역은 없다.


어린 자녀가 부모로부터 독립하면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악한 세력에 귀속되듯이, 하나님께서 내어버린 민족은 자유가 아닌 다른 세력에 종속 될 수밖에 없다.


참 자유는 진리 안에서만 가능하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만이 참 지유를 누리는 길이다.



(15-17, 예레미야의 기도)


예레미야 선지자는 완전히 자기 문제에 빠져서 하나님의 응답과  관계없이 계속 자신의 이야기만을 계속 하고있다.


심지어 자신을 위해서 자신을 핍박하는 자에게 보복을 해달라고 외친다.


하지만 이러한 간청은 미움에 의한 간청보다는 유다 백성의 심각한 상황에 대한 답답함을 하나님께 아뢰는 탄식의 기도라고 할 수 있다.



(18, 하나님을 불신?)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 옳다고 하더라도 본인 자신이 고통스러우면 하나님을 원망할 수가 있다.


이러한 심정은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종종 느끼는 감정들이기도하다.


하지만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우리는 이미 체질적으로 손상된 아담의 자손이기에,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가 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육체의 한계를 넘어서야 할 경우들이 있다.


예레미야가 바로 이 경우라고 생각된다.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의 일원으로서 유다 백성들과 같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것을 두려워할 수 있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유다 백성과 다르다는 사실로 하나님께 은혜를 구한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고통을 솔직하게 기도한다.


기도는 잘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아픔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고백하여야한다.


신자의 기도는, 이 세상에서 복받는 것에 대한 것보다는, 이 세상과 구별되게 살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세상은 심판받기에 합당한 방향으로 가고있기에 신자는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세상과는 구별된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



(19, 예레미야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


선지자는, 하나님의 생각이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여야만 한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강요 하시기 보다는 설득 하시고 기다리신다는 것을 볼 수 있다.



(20-21, 마음의 중심을 아시고 위로하시는 하나님)


비록 순간적인 감정에 의해서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항변하였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의 마음의 중심을 아시기에 오히려 예레미야를 위로하시면서 다시금 예레미야를 굳건히 세우신다.


하나님은 단편적이시거나 감정적으로 일을 진행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권위주의자들은 자신에 대한 항변을 견뎌내지 못한다.


세상 권세들은 자신의 지위를 지키고자 항변하는 이들을 어떠한 형태로든 댓가를 치르게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권위는 우리를 두려움으로  경직되게 만들지는 않는다.


참된 권위는 사랑과 위로가 함께 할 때 세워질 수 있음을 본다.



(결론)


신자의 살아가는 것이 고달프다.


교회에서 조차도 환영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공동체적 인간으로 창조하셨기에 신자는 비록 힘이 들더라도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여야 한다.


인간이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처하게되는 공동체적 환경은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이 이 땅에서 구현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선택에 관계없이 공동체적 환경에 대한 책임을 지게되어있다.


하나님의 형상 가운데 담겨있는 공동체성은 아담의 타락 이후에 변질되었기에,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 중심적인 사고를 할 수 밖에 없다.


예레미야의 탄식의 기도는 인간 누구나 가지고 있는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공동체에 대한 피해의식을 나타내는 것이다.


공동체성으로 인하여 가장 피해를 보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아담의 불순종은 하나님의 공동체성을 파괴한 것이며,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류는 자기 이외의 공동체에 대한 파괴적 본능을 나타내고있다.


하나님의 구속 사역은 아담에 의하여 파괴된 공동체의 회복이며, 신자의 신앙생활은 공동체의 회복에 관여되어야만 한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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