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017. 12. 29. 12:54

예레미야 16장 14-21절 말씀 묵상

1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보라 날이 이르리니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지 아니하고

15  이스라엘 자손을 북방 땅과 그 쫓겨 났던 모든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리라 내가 그들을 그들의 조상들에게 준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리라

16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많은 어부를 불러다가 그들을 낚게 하며 그 후에 많은 포수를 불러다가 그들을 모든 산과 모든 언덕과 바위 틈에서 사냥하게 하리니

17  이는 내 눈이 그들의 행위를 살펴보므로 그들이 내 얼굴 앞에서 숨기지 못하며 그들의 죄악이 내 목전에서 숨겨지지 못함이라

18  내가 우선 그들의 악과 죄를 배나 갚을 것은 그들이 그 미운 물건의 시체로 내 땅을 더럽히며 그들의 가증한 것으로 내 기업에 가득하게 하였음이라

19  여호와 나의 힘, 나의 요새, 환난날의 피난처시여 민족들이 땅 끝에서 주께 이르러 말하기를 우리 조상들의 계승한 바는 허망하고 거짓되고 무익한 것뿐이라

20  사람이 어찌 신 아닌 것을 자기의 신으로 삼겠나이까 하리이다

2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보라 이번에 그들에게 내 손과 내 능력을 알려서 그들로 내 이름이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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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5, 포로의 귀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애굽에서 구해주신 하나님에서 바벨론 포로에서 구해주신 하나님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는 이스라엘의 존재가 더 이상 시내산 언약과 같은 행위 언약의 요구 아래 있지 않고, 더 이상의 순종의 행위에 대한 요구가 없는, 은혜 언약 아래에 있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스라엘에게 요구되었던 순종은 유다 백성들이 저주의 재앙과 더불어 바베론의 포로로 끌려가면서 종결되었다.


유다 백성들에게 임한 저주의 재앙은 행위 언약으로서의 율법의 요구였기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셨어도 공의의 하나님으로서 마땅히 이스라엘에 대하여 벌을 내리셔야만 했다.


재앙의 저주로 징계를 받고 뿔뿔히 흩어져 가나안을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이스라엘의 상태는,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마찬가지로, 이미 행위 언약이 종결된 상태에 처하게되었다.


유다 백성들이 당해야만하는 재앙과 저주를 말씀하시던 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은, 아담이 범죄했을 때 즉각적으로 구원을 약속한 원시복음(창 3:15)과 맥락을 같이 한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고 하면서도 재앙으로 저주하시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다시 회복을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서야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 할 수가 있었다.


원시 복음은 에덴에서 아담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었다면, 예레미아에게 말씀하신 이스라엘의 귀환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었다.


이와같이 에덴과 가나안의 유형적 동일성은, 에덴에서의 행위 언약에 대한 실패를 가나안에서 시내산 언약을 통하여 재연시킴으로서, 타락한 아담의 후손에 대한 구원을 성취하시고자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귀환은 두 번째 가나안 입성으로서,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를 준비하는 것이다.


맹세의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의 개념이 출애굽의 하나님에서 포로를 귀환시키신 하나님으로 바뀐 것은, 이스라엘에게 더 이상의 순종을 요구하지 않는 새 언약을 위한  과정이었다.


이는 창세 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이 역사 속에서 구체화되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포로의 귀환이 곧바로 구속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는, 제2성전 유대교에서의 1세기 문헌을 연구했을 때,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이 실질적인 바벨론의 포로 상태였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유월절 만찬이 이스라엘에 대한 구속으로서의 해방과 용서를 선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적 이스라엘을 구속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시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역사적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삶의 방식을 본으로 보여주신 사건이라고 해석한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유월절 만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가장 중심되는 사건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단지 부차적인 사건일 뿐이다.


새관점의 주장대로라면 역사적 이스라엘이 실질적으로 구속받은 하나님 나라이며, 교회는 단지 확장된 이스라엘일 뿐이다.


이러한 해석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구속을 부정하는 것이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본받아서 살아야한다는 또 다른 순종을 요구하는 것이다.


새관점은 행위 언약 자체를 부정하지만, 새관점이 말하는 은혜는 최종적 구원을 위해서 행위가 요구되기에, 자체적으로 모순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출애굽에서 포로의 귀환으로 바뀐 것은, 최종적 구원을 위해서 더 이상의 순종의 행위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직 믿음이며, 이는 최종적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현재적 구원의 성취인 것이다.



(16-18, 심판을 통한 희망)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포로의 귀환에 대한 희망을 말씀하시지만, 그렇다고 저주의 재앙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시며, 어느 누구도 예외없이 그 댓가를 치루게 하신다.


이는 심판없는 회복은 있을 수 없음을 의미하시는 것이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누군가 대신 죄의 값를 치르지 않아도 재판장의 일방적 선고에 의해서 죄인이 의인이 될 수가 있다고한다면, 더 이상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필요하지가 않다.


새관점의 논리가 맞다면,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의 죄를 일일이 다 찾아내실 필요가 없이 그냥 용서해주시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으로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행위 언약을 근거로 불순종에 대한 저주를 반드시 이행하셔야 했기에, 구원할 자를 위해서 율법 아래에 나신 그리스도가 대신 율법의 저주를 받으셔야만 했다.


아담의 범죄라는 행위 언약의 결과물을 해결하기 위해서, 은혜 언약은 행위 언약에 대한 정리가 있은 다음에야 이루어 질 수 있었다.


모든 인류는 아담의 후손이기에, 이미 아담 안에서 저주를 받아야만 하는 관계로, 그리스도가 대신 죽으시지 않으신다면, 어느 누구도 살 수가 없으며,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실패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이들은 구원을 위해서 아무 것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최종적 심판에 대한 해결책이 되어야만 삶에 대한 희망이 있는 것이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아담의 범죄와 후손의 불순종에 대한 심판은, 아브라함과의 언약에서 잠정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간주한다.


새관점에서 요구하는 믿음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대신 죽으셨다는 것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약속하신 언약을 신실하게 이행하심으로서 모든 이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살아가야한다는 것에 대한 믿음이다.


새관점은 역사적 이스라엘을 아브라함 언약의 결과물로 보고서, 현재의 교회는 확장된 이스라엘로 보고있다.


새관점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 운동은,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살아가서 최종적 구원에 참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심히 부패한 이스라엘을 통해서 인간이 얼마나 부패하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존재인지에 대한 교훈을 얻지 못한 생각이다.


역사적 이스라엘을 율법 아래 둔것은 ,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인인가를 교훈 삼아서,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없이는 구원받을 자가 하나도 없음을 보여주고자한 것이다,



(19-21, 절망에서 희망으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알게되었다.


하나님께 대한 불신을 토해내던 예레미야 선지자가 다시 하나님을 찬양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안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근본적인 희망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에 임한 저주의 재앙이 오히려 희망의 근거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신앙인들은 삶의 여정에서 만나는 부정적 상황들에 대해서, 인간적으로는 하나님을 원망하려는 마음이 앞서겠지만, 부정적 상황 가운데 담겨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소망을 발견함으로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다 아담의 후손이기에, 죄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이 없이 구원에 참여 할 수 없을 것이다.


참된 복음은 죄와 심판에 대한 인식이 앞서야 할 것이다.


교회가 죄와 심판에 대하여 선포하지 않는다면 참된 복음을 전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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