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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6.17 :: 신명기 28장 36-57절 말씀 묵상
- 2018.06.16 :: 신명기 28장 15-35절 말씀 묵상 1
- 2018.06.15 :: 신명기 28장 1-14절 말씀 묵상
신명기 28장 58-68절 말씀 묵상
58 네가 만일 이 책에 기록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라 하는 영화롭고 두려운 이름을 경외하지 아니하면
59 여호와께서 네 재앙과 네 자손의 재앙을 극렬하게 하시리니 그 재앙이 크고 오래고 그 질병이 중하고 오랠 것이라
아직 가나안에 입성하지도 않은 이스라엘 백성이지만, 모세를 통해서 전달되는 하나님의 명령은 완전한 것을 요구한다.
모든 말씀을 지키라는 반복적인 강조는 듣는 이들에게 심히 마음에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선택의 기로에 선 이스라엘에게 모세 언약은 은혜 언약이 아니라 행위 언약이었다.
명령에 대한 실행 여부에 따른 축복과 저주는 행위 언약의 전형적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에덴에서의 아담 언약이 그대로 재연republication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담의 행위 언약이 반복되는 면이 있지만,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의 위치와 성격은 에덴에서의 아담의 위치와 성격과는 일치하지는 않는다.
가나안에서의 모세 언약이 에덴에서의 아담 언약의 재연republication인가에 대해서는 아랫부분에 따로 정리해본다)
60 여호와께서 네가 두려워하던 애굽의 모든 질병을 네게로 가져다가 네 몸에 들어붙게 하실 것이며
61 또 이 율법책에 기록하지 아니한 모든 질병과 모든 재앙을 네가 멸망하기까지 여호와께서 네게 내리실 것이니
62 너희가 하늘의 별 같이 많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지 아니하므로 남는 자가 얼마 되지 못할 것이라
이스라엘의 나중 상태는 출애굽 이전의 처음 상태보다도 더욱 안좋아진 상태가 된다.
선택받아 누렸던 모든 축복은 사라지고, 오히려 선택받기 이전 만도 못한 상태가 된다.
저주를 받을 거라면, 차라리 출애굽을 안하는 것이 좋았을 뻔 하였다.
선택받았다는 자체가 축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되는 하나님의 명령은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선포되는 말씀이다.
현대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시험대에 선 가나안에 임시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였듯이, 선택의 기로에 선 현대인들에게도 하나님의 일반 은혜라는 축복이 임하고 있다.
가나안에서의 축복이 선택을 위한 기회로 한시적으로 주어졌듯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일반 은혜의 축복은, 그냥 세상적인 복을 위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의 이스라엘에게 선택의 기회를 허락하였듯이, 현대인에게도 선택의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 한시적으로 은혜를 베푸신다.
하나님의 일반 은혜 아래서 인류가 누리는 문명의 기술은 인간의 외적인 삶에 풍요를 가져다 주지만, 가나안의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무한정 주시는 풍요가 아니다.
불순종한 가나안의 이스라엘에게 질병과 재앙이 임하였듯이, 현대인에게도 마찬가지로 질병과 재앙이 임할 수 있고, 또 임하고 있다.
현대인의 막강한 기술력과 능력도 무력화되는 것은 순간이다.
현대인은 문명의 기술이 인간을 구원해주리라는 자기 착각에 빠져있다.
현대 의학의 발전 못지 않게 질병의 가지수는 최대치를 기록하고있다.
현대 의학으로 누리는 장수는, 약으로 버티는 수명의 연장이지 결코 건강 수명은 아니다.
인간의 굉장함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 의미없다.
인간은 자신의 외적인 재력이나 능력, 규모등이 커지면, 하나님을 의지하려하지 않고, 자신을 신뢰하게된다.
자기 신뢰는 교만으로 이어지며, 교만과 자기 신뢰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으로 이어진다.
모압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는 하나님의 명령은,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명령에 대한 순종과 불순종은, 그리스도를 믿느냐, 아니냐로 대체되었을 뿐이다.
63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선을 행하시고 너희를 번성하게 하시기를 기뻐하시던 것 같이 이제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망하게 하시며 멸하시기를 기뻐하시리니 너희가 들어가 차지할 땅에서 뽑힐 것이요
64 여호와께서 너를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만민 중에 흩으시리니 네가 그 곳에서 너와 네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목석 우상을 섬길 것이라
출애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선을 행하시고 번성하게 하기를 기뻐하시면서 일을 이루셨지만, 가나안에서의 멸망은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시며 멸하시기를 기뻐하시면서 행하셨다.
출애굽과 더불어 하나님 여호와만 섬기던 백성은, 만민 중에 흩어지면서 목석우상을 섬기게 된다.
모든 것이 정반대 상황으로 바뀌어버린다.
출애굽에서의 희망은 절망을 바뀌어버렸지만, 가나안에서의 절망은 희망으로 바뀌게 된다.
출애굽 직전의 애굽에서의 상황은 가나안에서의 마지막 상황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애굽에서의 고통은 출애굽으로 이어졌지만, 가나안에서의 고통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으로 이어졌다.
애굽에서나 가나안에서나 고통은 동일하였지만, 이어지는 희망은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애굽에서의 고통은 외적인 환경의 변화만을 가져왔지만, 가나안에서의 고통은 내적인 환경의 변화를 가져왔다.
출애굽이 육적인 구속이었다면,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은 영적인 구속이었다.
출애굽에서의 유월절은 실체로 오신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이어졌다.
그리스도의 구속에 이르기 위해서는 누구나 다 이러한 두 가지 단계의 과정을 거쳐야한다.
우선은 삶의 고통 가운데 구원을 위한 몸부림이 있어야하며, 그 다음은 자신이 얼마나 부패한 존재인지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한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한가지 과정만 있다.
새관점은 인간이 얼마나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인지에 대한 안식이 생략되어있기에, 구원의 속성이 다르며, 그리스도의 역할 또한 달리 해석한다.
실제적으로 자신을 압제하는 세력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세계에 있다.
내면의 세계로부터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이 얼마나 부패한 존재인지, 또한 자신이 가나안의 이스라엘과 같이 하나님을 의지하려고 하지 않는 존재인지를 인식하는데서부터 출발된다.
인간은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인식할 때 가장 고통스럽다.
끊임없이 외부 환경에 대해서는 비난을 서슴치 않아도 정작 자신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사람은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에게 다가온 절망적인 상황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점검해 보는 것으로 이어질 때, 새로운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65 그 여러 민족 중에서 네가 평안함을 얻지 못하며 네 발바닥이 쉴 곳도 얻지 못하고 여호와께서 거기에서 네 마음을 떨게 하고 눈을 쇠하게 하고 정신을 산란하게 하시리니
66 네 생명이 위험에 처하고 주야로 두려워하며 네 생명을 확신할 수 없을 것이라
67 네 마음의 두려움과 눈이 보는 것으로 말미암아 아침에는 이르기를 아하 저녁이 되었으면 좋겠다 할 것이요 저녁에는 이르기를 아하 아침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리라
선택받은 민족으로서의 모든 혜택이 사라진다.
선택받았다는 자체가 은혜라고 할 수 있느냐에 대한 의문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선택받았다는 것은 축복과 저주의 기로에 세워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주에 담겨있는 더 깊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한다면, 선택받았다는 자체가 은혜는 아니지만, 은혜의 문턱에 놓여져있다는 것이다
비록 육적인 생명은 위험에 처해있더라도, 영적인 생명은 새롭게 열리는 희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상황이다.
모든 희망이 사라진 상태에서 새로운 희망이 싹트는 것이다.
인간이 가져야 할 참된 희망은 하나님과 단절된 육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회복된 존재 자체에 있는 것이다.
68 여호와께서 너를 배에 싣고 전에 네게 말씀하여 이르시기를 네가 다시는 그 길을 보지 아니하리라 하시던 그 길로 너를 애굽으로 끌어 가실 것이라 거기서 너희가 너희 몸을 적군에게 남녀 종으로 팔려 하나 너희를 살 자가 없으리라
출애굽 이전의 애굽에서의 상황보다도 악화될 것이다.
가나안에서의 멸망은 이전에 애굽에서 하나님께 간구하던 구원을 반복할 수도 없을 것이다.
애굽에서 간절히 바라던 구원에 대한 간구와는 다른 더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간구를 하게 될 것이다.
출애굽은 애굽에서의 이스라엘의 백성의 간구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지만, 그리스도의 오심은 가나안의 멸망과 더불어 더욱 겸손해진 이스라엘 백성의 차원이 다른 간구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다.
모세 언약은 아담 언약이 재연된 행위 언약인가?
신명기 28장은 축복과 저주라는 갈림길에선 이스라엘의 모습이 에덴에서 아담에게 주어졌던 행위 언약의 재연republication이라고 주장한다.
대표적으로 에스콘디도Escondido신학자들을 중심으로 제기되었다.
재연 교리를 주장하는 대표적인 인물로는 메러디스 클라인Meredith Kline이 있으며, 재연 교리는 그의 후예들, 즉 존 페스코J. V. Fesko나 반드루넨David VanDrunen등, 웨스트민스터신학교WSCal의 교수들이 중심이 되어 집필된 The Law is Not Of Faith라는 책을 통하여 다시 제기된 주장이었다.
재연 교리republication doctrine는 모세 언약을 은혜 언약으로 보는 이들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왔으며, 정통장로교회OPC 소속의 일부 목회자들이 모여서 Merit and Mose라는 책을 통해 재연 교리에 대한 반론을 집중적으로 제기하였다.
이러한 논쟁은 모압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이 여러가지 면에서 아담에게 주어졌던 명령과 비슷하면서도 다르기 때문이었지만, 모세 언약을 어떠한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성경 전체에 대한 해석이 달라진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라고 할 수 있다.
가나안에서의 상황은 여러가지 면에서 에덴과는 다르기에, 단순히 행위 언약의 재연이라는 주장은 여러가지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메러디스 클라인은 모세 언약이 표면적으로는 행위 언약이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은혜 언약에 속하여있다고 본다.
그런데도 메러디스 클라인의 재연 교리에 대한 반발이 줄지 않는 것은, 모세 언약을 아담 언약이 유형학적typological으로 재연된 행위 언약이라는 주장 때문이다.
하지만 모세 언약을 아담 언약의 유형학적 재연으로 보는 것은, 여러가지 유익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한 번쯤은 깊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만약에 모세 언약에서 행위 언약의 속성이 제거되고 오직 은혜 언약만으로 해석된다면, 그리스도의 순종과 구속의 의미는 축소되거나 소멸되며, 성경의 중심이 신약의 교회보다는 구약의 이스라엘로 이동된다는 점에서 행위 언약의 개념은 무척이나 중요하다고 생각 된다.
칼 바르트는 오직 단일한 은혜 언약만을 주장했다.
또한 존 머리John Murrey도 마찬가지로 은혜 언약만을 주장하였다.
존 머리의 영향을 받은 노먼 쉐퍼드Norman Shepherd의 후예들로 구성된 페더럴비전Federal Vision은 결국 톰 라이트의 새관점과 유사한 모습을 갖추게된다.
비록 체계적이지는 않지만 간단하게나마 아담 언약과 모세 언약을 비교하면서 개인적인 관점을 소개하고자한다.
먼저 아담 언약과 모세 언약의 비슷한 점들을 살펴본다.
비슷한 점들
●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의 땅이다.
에덴은 아직 타락 이전이었기에,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나지 않은 풍요로운 곳이었다.
● 축복과 저주의 갈림길에 놓여있다.
아담에게 요구되었된 선악과 금령은 축복과 저주의 갈림길에 놓여있던 것이었으며, 시내산과 모압 땅에서 이스라엘에게 요구되었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은 축복과 저주의 갈림길을 제시한 것이었다.
●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원시복음이 제시되었다.
에덴에서 쫓겨난 후에 둘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가 여자의 후손으로 제시되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리라고 말씀하시면서 구원이 제시된다.
이스라엘에게는 바벨론에서 돌아온 후에 구원자가 오실 것을 말씀하신다.
● 실행의 능력의 유무에 관계없이 명령에 따른 축복과 저주가 제시되었다.
● 가나안은 에덴과 마찬가지로 검증을 요구하는 곳이다.
다른 점들
●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안식의 땅이지만, 에덴은 아직 안식에 이르지 못한 땅이었다.
에덴도 풍요로운 땅이었지만, 가나안의 풍요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공급하심에 의한 풍요였다.
● 에덴에서의 순종에 따른 축복은 종말론적 약속이었지만, 가나안에서의 축복은 한시적인 현재적 삶이었다.
● 가나안은 영원한 가나안의 모형으로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예표하는 곳이었지만, 에덴은 영원한 가나안인 새 하늘과 새 땅을 예표하지는 않는다.
● 아담은 타락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기에,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이미 범죄한 아담의 후손이었기에, 명령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 아담 언약에서는 은혜의 요소가 내포되어있지 않지만, 모세 언약은 은혜의 요소를 직접적으로 내포한다.
결론적 생각들
● 가나안은 에덴보다도 한 단계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에 가까웠으며,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전단계라고 할 수 있다.
타락 이전의 아담에게는 타락 이전의 상태라서, 은혜가 직접적으로 요구되지 않았지만, 이미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은혜가 임함으로서 가나안이라는 안식의 땅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새관점의 주장과 같이, 가나안이 하나님의 안식의 땅이고 하나님의 은혜로 거할 수 있었다고 가나안의 이스라엘을 하나님 나라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앞서 나간 것이다.
가나안은 안식의 땅으로 주어졌지만,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안식을 누릴 수 있는 준비된 백성이 아니었다.
이에 대하여 모세는 “그들이 여호와를 향하여 악을 행하니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흠이 있고 삐뚤어진 세대로다(신32:5)”고 말한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부족한 점과 문제점을 노출시켜서, 그 부분을 채우실 수 있는 그리스도를 예비해주는 역할을 한다.
가나안의 이스라엘 백성이라도, 구원자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구원에 참여될 수 있었다.
● 가나안은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톰 라이트의 말을 빌리자면, 개신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몸통으로 보지만, 새관점에서는 유대 이스라엘을 몸통으로 본다.
새관점에서 보는 예수 그리스도는 꼬리에 불과하다.
하지만 구약의 모든 역사와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둘째 아담으로서, 처음 아담의 타락으로 인한 문제를 해결하신 분이시다.
성경의 핵심은 처음 아담과 둘째 아담이지만, 새관점에서는 처음 아담을 논하지 않기에, 둘째 아담의 개념이 상실되어있다.
● 가나안에서의 축복이 한시적이었던 것은, 가나안 자체가 안식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가나안에서 순종에 따른 또 다른 종말론적 안식의 땅이 제시된다면, 가나안은 안식의 땅이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가나안의 안식은 종말론적 안식을 예표할 뿐이다.
새관점에서는 가나안을 이 땅에 실현된 실질적 안식의 땅으로보며, 종말론적 가나안을 현재적 안식의 땅과 동일시한다.
새관점에서는 가나안의 이스라엘을 이 땅에 실현된 하나님 나라로 본다.
새관점에서 보는 예수는, 유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저주를 감당하심으로 유대 이스라엘이 이방인들에게 확장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분이시다.
새관점에서보는 교회는 확장된 유대 이스라엘이다.
● 모세 언약은 은혜 언약의 속성을 내포한 행위 언약이다.
모세 언약을 은혜 언약만으로 보기에는 조건적 행위가 분명하게 담겨있다.
모세 언약을 단일한 은혜 언약으로 보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완성으로 귀결되는 모세 언약이라는 점을 들지만, 모세 언약 자체는 표면적으로는 분명하게 행위 언약에 속하여있다고 할 수 있다.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은 모세 언약을 지킬 수 없었기에, 즉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기에, 실질적으로 모세 언약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고, 결국에는 그리스도의 새 언약으로 귀결되는 면에서 모세 언약이 은혜 언약이라고 말하는 점은 맞지만, 그리스도께 인도되지 못하는 이들은 모세 언약 안에서 저주를 받아야만 했기에 모세 언약은 본질에 있어서는 은혜의 속성을 가지고있다고하더라도, 표면적 속성에 있어서는 행위 언약의 속성을 가지고있다고 보아야한다.
모세 언약을 단일한 은혜 언약으로보는 이들은, 존 머레이를 비롯하여, 그의 제자였던 노먼 쉐퍼드와 그의 후예들로 구성된 페더럴 비전과 톰 라이트의 새관점주의,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 카이퍼의 신칼빈주의가 여기에 속하여있다고 볼 수 있다.
모세 언약의 행위 언약으로서의 속성은, 모세 언약이 아담 언약을 재연시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로 대표되는 모든 인류가 아담 안에서 타락하였기에, 모든 인간은 그리스도의 은혜없이는 행위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음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모세 언약의 행위 언약적 속성을 간과하는 이들은, 인간의 전적인 부패라는 종교 개혁자들의 사상을 배제함으로서, 이들의 신학 사상에는 결과적으로는 인본주의적 속성을 내포할 수 밖에 없다.
새관점에서 주장하는 율법은 복과 저주의 갈림길인 행위 언약의 근거가 아니다.
이들은 모세 언약을 오직 은혜 언약의 속성만을 갖고 있는 언약적 율법주의로 본으로서, 율법을 일종의 생활 규법으로 격하시킨다.
이는 기독교를 윤리적으로 접근하는 이들에게서도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기독교는 윤리를 넘어서는 복음이며, 복음은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전제로 한다.
복음은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를 근거로하기에 인간의 행위에 대한 관점은 열매로서만 접근되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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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28장 36-57절 말씀 묵상
36 여호와께서 너와 네가 세울 네 임금을 너와 네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나라로 끌어 가시리니 네가 거기서 목석으로 만든 다른 신들을 섬길 것이며
명령이라기보다는 예언의 말씀이다.
실제적으로 일어날 일로서, 불순종은 이미 예고된 일이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선택받은 민족이었다고 하더라도, 직접적으로 은혜의 자리에 선택된 것은 아니다.
타락한 아담의 후손은 타락에 대한 문제 해결없이 직접적으로 은혜의 자리에 참여될 수 없다.
새관점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담의 문제와 관계없이 직접적으로 은혜의 자리에 참여된 것으로 본다.
새관점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모세 율법은 은혜를 유지하기 위한 삶의 지침이라고 본다.
이러한 관점을 언약적 율법주의, 혹은 신율주의라고 말한다.
하지만 율법에 대한 불순종의 결과는 참혹하기만 한데, 이를 삶의 지침에 대한 불순종의 결과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아담의 범죄는 잠정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아직 아담의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아담의 타락의 영향을 그대로 나타내고있다.
가나안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곳이라기 보다는, 구원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문제점들을 노출시킴으로서, 이차적으로 구속사가 이루질 수 있도록 준비되어지는 곳이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의 문제는 모든 사람의 문제이며, 가나안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일 때에만,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이 자신에게 다가 올 수 있는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임하는 일반 은혜는 구원으로의 초대를 위한 것이다.
보편적 평안 가운데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다면, 이들의 최후는 가나안의 이스라엘 못지 않을 것이다.
37 여호와께서 너를 끌어 가시는 모든 민족 중에서 네가 놀람과 속담과 비방거리가 될 것이라
원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비방거리로 만들기 위함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모욕을 주기 위해서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문제를 있는 그대로 노출시킴으로서, 문제 해결을 위한 것이었다.
사람은 하나님께 구원을 간구하지만 자신들의 실상이 어떠한지를 모를 뿐이다.
구원받기 위해서는 자신의 실상이 드러나야만 한다.
인생의 삶 가운데 당하는 수치와 비난은, 비록 고통스럽지만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냄으로서,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되는 귀한 기회가 될 것이다.
38 네가 많은 종자를 들에 뿌릴지라도 메뚜기가 먹으므로 거둘 것이 적을 것이며
39 네가 포도원을 심고 가꿀지라도 벌레가 먹으므로 포도를 따지 못하고 포도주를 마시지 못할 것이며
40 네 모든 경내에 감람나무가 있을지라도 그 열매가 떨어지므로 그 기름을 네 몸에 바르지 못할 것이며
41 네가 자녀를 낳을지라도 그들이 포로가 되므로 너와 함께 있지 못할 것이며
42 네 모든 나무와 토지 소산은 메뚜기가 먹을 것이며
43 너의 중에 우거하는 이방인은 점점 높아져서 네 위에 뛰어나고 너는 점점 낮아질 것이며
44 그는 네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그에게 꾸어주지 못하리니 그는 머리가 되고 너는 꼬리가 될 것이라
가나안에 들어갈 때와는 달리 반대의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축복이 저주로 바뀌는 것이다.
만약에 불순종하여도 처음의 축복이 지속된다면, 이들의 불순종은 끝을 모르고 심화될 것이다.
모든 축복은 순종을 전제로 한다.
저주받는 상황에서는 차라리 시작을 하지 말았으면 좋았으리란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유익의 기준이 틀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절대로 선택할 수는 없겠지만, 이러한 상황이 실제적으로 자신의 삶 가운데 주어졌다면, 이 시간은 인생의 가장 값진 시간이 될 것이다.
고통 가운데 얻는 유익은, 평안 가운데 얻는 유익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고통 가운데 얻는 유익이 진정한 축복이다.
세상적인 축복을 원하며 이를 간증하거나 자랑하는 신앙은 항상 위험을 내포한다.
행위 언약의 형식을 가진 모세 율법의 본질이 은혜 언약이듯이, 영원한 죽음에 이르지 않는 한 에발산에서의 저주의 본질은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인들은, 삶의 여정 가운데 생기는 모든 문제를 경제 원리, 혹은 과학이나 정치로 해결하려고하지만, 이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구속의 기회를 흘려보내는 불행한 방식이다.
성도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부정적 상황을,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가운데 유익한 상황으로 전환시켜야 할 것이다.
45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지 아니하고 네게 명령하신 그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므로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와서 너를 따르고 네게 이르러 마침내 너를 멸하리니
46 이 모든 저주가 너와 네 자손에게 영원히 있어서 표징과 훈계가 되리라
가나안에서는 순종이 철저하게 요구되며,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지 않는 불순종에는 반드시 저주가 임할 것이다.
가나안은 일차적으로는 심판의 장소이다.
심판은 철저하게 인간의 순종이라는 공로를 기준으로 한다.
하지만 심판의 두 번째 단계는 은혜의 과정이다.
문제를 노출시키고 이러한 문제에 대한 직접적 해결이 없이는 진정한 은혜라고 할 수 없다.
은혜는 문제를 문제로 노출시킬 때에만 다가 올 수 있는 것이다.
새관점에서 가나안을 은혜의 장소라고 주장하는 것은 일차적인 단계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새관점주의자들은 유대 이스라엘을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고 말한다.
새관점주의자들에게,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두 번째 단계는 일차적 단계의 단점을 보강하는 부차적인 단계이며, 그들에게 그리스도는 유대 이스라엘을 완성시키기 위한 부차적인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속죄가 없는 가나안은 심판과 저주만 있을 뿐이다.
가나안에 임한 저주는 그리스도의 속죄에 참여될 때에만 진정한 은혜가 있는 것이다.
47 네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48 네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모든 것이 부족한 중에서 여호와께서 보내사 너를 치게 하실 적군을 섬기게 될 것이니 그가 철 멍에를 네 목에 메워 마침내 너를 멸할 것이라
적군을 섬기는 것은 불순종으로 말미암은 것이지만, 이미 불순종한 아담의 후손들은 실질적으로 이미 사단을 섬기고있었다.
뱀을 미화시킨 가상 동물인 용은 인간이 직접적으로 보지 않았어도 전 세계적으로 비슷한 모습으로 그려지고있다.
남미의 고대문명의 유적에서 발견되는 용이나 중국에서의 용이나, 서로의 직접적인 교류가 없었을 텐데도 너무나도 유사하다.
용은 남미나 중국 대륙이나 세계 각국에서 공통적으로 섬기는 짐승이지만, 신기한 것은 용을 본 사람이 없어도 비슷한 모양으로 세계 각국에서 제각기 용의 모양을 섬긴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이미 자유 의지가 박탈되어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은 섬김의 대상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는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는 것으로 귀결되어야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일반 은혜는 구원의 특별 은혜로 연결되는 수단과 통로가 되어야한다.
인간에게는 스스로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격도 없으며 통로도 없다.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인간은, 이미 사단의 권세 아래있기에, 자유 의지가 있을 수가 없다.
인간의 의지는 노예 의지이면서 전적인 부패해 있을 뿐이다.
인간의 노예 의지와 전적인 부패는 새관점주의자들이 무척이나 싫어하는 개념이다.
노예 의지 개념은, 새관점주의자들의 최종적 구원을 위한 공로 주장을 무력화시키기 때문이다
49 곧 여호와께서 멀리 땅 끝에서 한 민족을 독수리가 날아오는 것 같이 너를 치러 오게 하시리니 이는 네가 그 언어를 알지 못하는 민족이요
50 그 용모가 흉악한 민족이라 노인을 보살피지 아니하며 유아를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51 네 가축의 새끼와 네 토지의 소산을 먹어 마침내 너를 멸망시키며 또 곡식이나 포도주나 기름이나 소의 새끼나 양의 새끼를 너를 위하여 남기지 아니하고 마침내 너를 멸절시키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 지배를 당하며, 이전의 애굽에서의 상태보다도 더 비참한 상태가 된다.
사단의 세력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는 반대로 이스라엘을 압제 가운데로 몰아간다.
이스라엘 백성은 사단의 실상이 어떠한지 막연한 가운데 섬겨왔지만 실질적으로 다가오는 현실은 생각과는 달랐다.
사단의 악한 모습은 상대적으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
바닥이 없으면 높이를 알 수 없듯이, 악을 경험하지 않으면, 선을 제대로 알 수가 없다.
궤변일 수도 있겠지만 인간이 경험하는 세상에서의 악은,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이 어떠한지를 드러낸다.
52 그들이 전국에서 네 모든 성읍을 에워싸고 네가 의뢰하는 높고 견고한 성벽을 다 헐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의 모든 성읍에서 너를 에워싸리니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인간은 악의 세력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거두어 가시면, 악이 마치 제방이 무너져 쏟아지는 물과 같이 덮칠 것이다.
쓰나미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모습은, 결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인간이 무력할 수 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현재의 일반 은혜는 결코 당연하지도 않으며, 가벼운 것도 아니다.
53 네가 적군에게 에워싸이고 맹렬한 공격을 받아 곤란을 당하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자녀 곧 네 몸의 소생의 살을 먹을 것이라
54 너희 중에 온유하고 연약한 남자까지도 그의 형제와 그의 품의 아내와 그의 남은 자녀를 미운 눈으로 바라보며
55 자기가 먹는 그 자녀의 살을 그 중 누구에게든지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 적군이 네 모든 성읍을 에워싸고 맹렬히 너를 쳐서 곤란하게 하므로 아무것도 그에게 남음이 없는 까닭일 것이며
56 또 너희 중에 온유하고 연약한 부녀 곧 온유하고 연약하여 자기 발바닥으로 땅을 밟아 보지도 아니하던 자라도 자기 품의 남편과 자기 자녀를 미운 눈으로 바라보며
57 자기 다리 사이에서 나온 태와 자기가 낳은 어린 자식을 남몰래 먹으리니 이는 네 적군이 네 생명을 에워싸고 맹렬히 쳐서 곤란하게 하므로 아무것도 얻지 못함이리라
극단적 상황에서 인간이 얼마나 잔인하면서도 연약한 존재인가를 보여준다.
아무리 극단적인 상황이라도 인육을 먹은 사람은 사람이기를 포기한 수치를 감당해야만 한다
그것도 자식을…
이는 아담에게 주어졌던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의 극단적 반대 상황이다.
극단적 상황에서는 인간의 온유하고 연약한 것도 아무 의미가 없다.
가장 기본적으로 사랑해야할 사람이 미움의 대상이 된다.
가장 사랑해야 할 대상이 먹이감이 되며 자신을 가장 보호해주어야 할 사람이 자신을 해친다.
인간의 품위는 어느 정도의 환경이 조성이 되어야만 가능하며, 극단적으로 열악한 상황에서는 어느 누구도 예외없이 최악의 모습을 보여줄 수 밖에 없다.
인간은 자신의 성품과 기질을 자랑해서는 안된다.
가나안에서의 환란은, 마치 상품의 품질을 검사하듯이 극단적 테스트를 하는 것이며, 이러한 테스트에 통과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
원래 인간은 모두 다 아담 안에서 타락한 불량품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불량품은 아무리 좋은 환경이 제공되어도 만족하지 않으며, 주어진 환경 마저 파괴 할 수 밖에 없다.
가나안은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고발하는 곳이다.
불순종에 따른 저주는 문제를 문제로 드러내면서 해결책을 모색해보는 과정이다.
가나안에서의 저주는 사랑의 채찍이며, 완전한 멸망을 위한 것이 아니다.
현 시대에 보편적으로 주어지는 은혜 가운데 드러나는 삶의 문제들은 택함받은 자에게는 구원의 통로이며, 택함받지 않은 이에게는 멸망의 통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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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28장 15-35절 말씀 묵상
15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를 것이니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는 모두 완전하게 지켜 행하여야한다.
부분적인 행함으로는 모든 저주 가운데 들어갈 수 밖에 없다.
인간적으로 볼 때 너무 가혹하고 불가능한 요구이지만, 이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자연계의 질서는 어느 하나 자연의 법칙에서 예외가 되거나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없다.
하지만 누룩과 같이, 인간의 조그마한 범죄는 피조계 전체를 파괴할 수 있다.
하나님의 법은 엄격하고 완벽하다.
하지만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에서는, 이스라엘에게 요구되는 법은 엄격하지도 않았으며, 혹시 법을 어겼을 지라도 성전에서의 제사를 통해서 언제라도 회복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는 제2성전 유대교에서의 유대인들이 무척이나 성실하게 율법을 준수하였으며, 매우 신실한 믿음의 생활을 하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기준은 매우 성실하거나 신실하게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지키는 것이다.
행위 구원론을 말하는 톰 라이트가 이러한 주장을 하는 이유는, 최종적 심판을 위해서 요구되는 인간의 행위가 완전한 율법 준수라면, 어느 누구도 구원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16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성읍은 방어를 위한 곳이지만, 성벽에 의한 방어는 무용지물이 된다.
불순종한 이스라엘에게 성벽은 아무 역할을 하지 못하며, 어느 곳에 있던지 저주를 피할 수가 없을 것이다.
현대인은 자기 방어를 위해서 경제력을 키우고 힘을 키우지만, 그들의 내면의 실상을 보면 문제가 없는 이들이 없다.
겉으로는 평안해 보이지만, 콩가루가 된 집안도 종종 본다.
진정한 안식은 오직 하나님께 의지할 때 오는 것이다.
17 또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먹는 문제는 생존에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문제이다.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아들 여호람 때에, 아람 군대에 둘러싸인 사마리아 성 안에서는 자기의 아들을 쌂아 먹는 일까지도 일어났다.
가나안이 젖과 꿀이 흐르는 은혜와 안식의 땅이었지만,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은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왔다.
현대 사회가 일반 은혜 가운데 어느 정도의 풍요를 누리고있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거두어가시면, 인간은 비극적 재앙 가운데 들어갈 수 밖에 없다.
기상 재해와 메뚜기 때의 출현은 언제라도 인류를 굶주림의 저주 가운데 몰아 넣을 수 있다.
18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소와 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가나안에서 맛보았던 수고의 모든 결실들을 저주 가운데로 들어가게한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불순종과 더불어 모든 것을 다 빼앗길 수 밖에 없었다.
19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
들어와서 안식을 취할 수도 없고, 나가서 수고를 하여도 소용이 없었다.
하나님과 관계가 상실된 상태에서는 수고와 안식이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은혜는 단순히 잘먹고 잘살라고 주시는 것은 아니다.
모든 은혜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회복으로 귀결되어야한다.
20 네가 악을 행하여 그를 잊으므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여호와께서 저주와 혼란과 책망을 내리사 망하며 속히 파멸하게 하실 것이며
하나님을 잊은 악한 행동은 그대로 놓아둘 경우 주변의 이차적인 피해를 야기시킬 것이다.
마치 발사한 미사일이 궤도를 이탈했을 경우에는 중간에 파괴시키지 않으면, 이차적인 피해를 야기하는 것과 같다.
사람은 마땅히 행하여야 할 것이 있으며, 행함의 궤도가 있다.
주의 말씀은 인간이 마땅히 행하여야 할 궤도이기에, 여호와의 명령을 무시하는 행동은 스스로 궤도를 벗어나서 파멸을 자초하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하나님을 잊어버린 사회로서, 어디로 가야할지 궤도를 상실한 사회라고 할 수 있다.
21 여호와께서 네 몸에 염병이 들게 하사 네가 들어가 차지할 땅에서 마침내 너를 멸하실 것이며
다윗은 인구조사라는 불순종의 댓가로 백성들에 염병을 돌게하였다.
불순종과 염병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현대인들의 질병은 대부분 문명의 발달로 인한 후유증과 연관되어있다.
현대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욕심으로 대체시킨다.
현대인이 온갖 질병에 시달리는 것은 불순종이라는 욕심의 결과물들이다.
현대인은 약이라는 수단으로 질병을 통제하고있지만, 모든 약은 이차적인 부작용을 수반하게 되어있다.
22 여호와께서 폐병과 열병과 염증과 학질과 한재와 풍재와 썩는 재앙으로 너를 치시리니 이 재앙들이 너를 따라서 너를 진멸하게 할 것이라
예전에 서울에서의 생활 가운데 차 안에서의 냄새 문제가 해결이안됬는데 지방에서의 생활에서는 차의 냄새가 자연스럽게 해소되었다.
자연에서 발생하는 음이온의 부족으로 정화기능이 떨어진 것이다
도시 문명은 겉으로는 화려해보이지만, 부차적인 욕심을 위해서 인간이 필요로하는 필수적인 요소들을 파괴시킨다.
일반 은혜 시대에 다가오는 저주의 재앙은, 문명의 보편성 만큼이나 보편적으로 다가온다.
질병의 대다수가 인간이 자초한 보편적 저주와 연관되어있다.
현대인은 질병들을 과학적으로 해결하려고하지만, 과학까지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간섭하심에 대해서는 맹인들이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파괴하는 인간을 용납하는 것은 더욱 큰 재앙을 초래하기에, 인간에게 다가오는 질병의 재앙들은 인간의 생태계를 조절하는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23 네 머리 위의 하늘은 놋이 되고 네 아래의 땅은 철이 될 것이며
가나안에서 하늘과 땅이 주는 축복은 은혜에 의한 것이었다.
포괄적 은혜를 거부하는 이들에게 선택적 은혜만을 허락하시지는 않는다.
현대는 일반 은혜의 시대에 보편적인 은혜를 거부를 함으로서 스스로 화를 자초하고있다.
대기 오염은 인간의 욕심의 결과들이다.
중국은 발전과 더불어 대기 오염이 상상을 초월한다.
(미세먼지 분포도)
24 여호와께서 비 대신에 티끌과 모래를 네 땅에 내리시리니 그것들이 하늘에서 네 위에 내려 마침내 너를 멸하리라
비가 내려도 대기 오염으로 인한 산성비가 내린다.
온갖 미세먼지들은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없이 살려는 욕심의 결과물들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라도,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파멸의 길로 걸어가게끔 인도하시는 것이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언 16:9)”
미세먼지의 원인과 대책은 많이 나오지만, 인간은 어떠한 방법을 사용하더라도 상황은 점점 더 나빠질 것이다.
미세 먼지에 대한 대책은 또 다른 이차적 문제를 유발할 것이며, 이미 재앙의 굴레에 빠져들었기에,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는 한에는 재앙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것이다.
사람은 인간의 욕심으로 문제가 생기고 있다는 것은 알지만, 정확하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를 생각하려고 하지 않는다.
근본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단절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내어버리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내어버리신 이유는 심판받기에 합당한 모습이 되게끔 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데후2:11-12)”
현대인이 겪는 환경 재앙은 누구나 다 보편적으로 자신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에 합당한 자라는 것을 말해준다.
이러한 재앙조차도 사람이 스스로 자초한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거두어 가시는 주권적 간섭하심이 있었기에 생기는 현상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기에, 내어버려둠으로서 어떠한 결과가 생기는지 스스로 경험하도록 하신다.
가나안의 이스라엘도, 불순종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은혜를 거두어 가심으로서, 재앙 가운데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야만 했다.
25 여호와께서 네 적군 앞에서 너를 패하게 하시리니 네가 그들을 치러 한 길로 나가서 그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할 것이며 네가 또 땅의 모든 나라 중에 흩어지고
인간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어떠한 승리도 있을 수가 없다.
그리스도께서 사단에 승리를 하였어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이 세상을 이길 수가 없다.
재벌이나 학자들이나 성공한 이들은 승리한 자들이 아니다.
승리는 더 이상 사단의 간섭에 굴복하지 않는 것이다.
26 네 시체가 공중의 모든 새와 땅의 짐승들의 밥이 될 것이나 그것들을 쫓아줄 자가 없을 것이며
악한 이세벨 뿐만이 아니라 불순종한 유다의 멸망때 이러한 결과들을 볼 수 있었다.
27 여호와께서 애굽의 종기와 치질과 괴혈병과 피부병으로 너를 치시리니 네가 치유 받지 못할 것이며
“그 재가 애굽 온 땅의 티끌이 되어 애굽 온 땅의 사람과 짐승에게 붙어서 악성 종기가 생기리라 그들이 화덕의 재를 가지고 바로 앞에 서서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날리니 사람과 짐승에게 붙어 악성 종기가 생기고(출 9:9-10)”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피부병을 일으키셨지만, 일반 은혜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재는 환경 파괴와 면역체계의 약화로 인하여 각종 피부 질환에 노출되고 있다.
표면적 의료 기술의 발달은 임시적일 뿐, 근본적인 대책을 세워주지는 못한다.
이러한 방식의 해결책은 근원적인 문제를 외면하게 해주기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을 수도 있다.
28 여호와께서 또 너를 미치는 것과 눈 머는 것과 정신병으로 치시리니
미치는 것과 정상적인 것의 차이는 기준이 어디에 있느냐에 달려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기준이 되신다.
기준이 없다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판단 할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마음에 새겨넣으신 자연법은 오직 하나님을 기준으로 세워졌지만, 하나님을 멀리하며 기준이 사라진 인간의 마음은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자신이 진리의 기준이 된다.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저주는, 복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마땅한 결과로 인한 것이다.
현대인은 엄밀하게 말해서 정상적인 사람이 없다.
모두가 비정상이며, 정신질환자들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정신질환은 해결책이 있지만, 드러나지 않는 질환은 해결책이 없다.
자신이 정상이 아니지만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주변의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서 도움을 청할 수도 없다.
자신의 문제를 생각하지 못하기에 판단과 정죄를 일삼는다.
서로가 서로에 대하여 공격하는 현상은 공동체의 파괴를 초래한다.
하나님 나라는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성의 구현을 통해서 완성되기에, 서로에 대하여 정죄하기 바쁜 곳에서는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구현할 수가 없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가나안의 이스라엘이 맞이하는 결과들은,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현시대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29 맹인이 어두운 데에서 더듬는 것과 같이 네가 백주에도 더듬고 네 길이 형통하지 못하여 항상 압제와 노략을 당할 뿐이리니 너를 구원할 자가 없을 것이며
오직 하나님만이 빛이 되신다.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상황에서는 눈에 보이는 빛은 있지만, 영적으로 어둠 가운데 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빛이 없기에, 환란 가운데 도움을 청할 수가 없으며,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다.
현대는 문명의 빛은 화려하지만, 영적인 빛은 거의 사라진 시대이다.
하나님을 찾아도 볼 수가 없으며, 도움을 구하여도 도움을 받을 수가 없다.
정의는 사라지고 오직 힘있는 자만이 살아남는 약육강식의 시대가 되었다.
불순종했던 가나안의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현대는 점점 더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어가고있다.
현대는 오직 외적인 빛만 밝힐 뿐 마음에 빛이 비추어지지 않는 시대이다.
30 네가 여자와 약혼하였으나 다른 사람이 그 여자와 같이 동침할 것이요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에 거주하지 못할 것이요 포도원을 심었으나 네가 그 열매를 따지 못할 것이며
가정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사라진다.
사람과 재산을 잃게 됨으로서, 삶의 기반이 상실된다.
출애굽하여 들어간 가나안에서 얻은 모든 것이 다시 상실되는 것이다.
이는 출애굽하여 하나님과 약속하였던 것을 지키지 않음으로서, 더 이상 출애굽한 백성으로서의 의미가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이 모든 것을 회복시켜주신다.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한몸을 이루게 되며, 그리스도께서 마련해주시는 처소가 준비되어있으며,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영적인 양식을 제공해주신다.
31 네 소를 네 목전에서 잡았으나 네가 먹지 못할 것이며 네 나귀를 네 목전에서 빼앗겨도 도로 찾지 못할 것이며 네 양을 원수에게 빼앗길 것이나 너를 도와 줄 자가 없을 것이며
가나안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소산을 하나님께서 정하신 곳에서 형제들과 같이 나누어서 먹으면서, 하나님이 자신들을 어떻게 구원하셨는지 감사하면서, 풍요의 기쁨을 함께 누릴 수 있었다.
가나안 공동체에서는 자신의 재산을 잃었을 때 형제가 이를 찾아주었다.
재판은 공정하였기에, 자신의 재산을 보호할 수가 있었다.
하나님의 은혜가 상실된 가나안 공동체에서 더 이상 이전의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없다.
비록 안식의 땅으로 준비되었지만, 불순종으로 인하여 안식은 상실되었다.
현대 사회는 일반 은혜 가운데 보편적인 풍요를 누리고있지만, 그래도 세상은 힘있는 자에게 의해서 약자들이 희생될 수 밖에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표면적으로는 공정한 사회가 되는 것 같아도 실제적으로 약자는 점점 더 희생될 수 밖에 없다.
32 네 자녀를 다른 민족에게 빼앗기고 종일 생각하고 찾음으로 눈이 피곤하여지나 네 손에 힘이 없을 것이며
인간이 자신의 자녀를 상실해보지 않고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가 없다.
하나님은 자녀를 처음으로 잃어버리셨던 분이었다.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께 등을 돌렸으며, 하나님은 잃어버린 자녀를 찾으시기 위해서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잃는 고통을 당하셔야만 했다.
33 네 토지 소산과 네 수고로 얻은 것을 네가 알지 못하는 민족이 먹겠고 너는 항상 압제와 학대를 받을 뿐이리니
이스라엘은 불순종으로 인하여 바벨론에 모든 것을 빼앗길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이 수고한 것의 소산을 먹는 것은 당연하면서도 축복이다.
식민지배를 당하면 수고의 소산을 빼앗길 수 밖에 없다.
투기나 도박은 뺏고 빼앗기는 하나님을 떠난 방식이다.
주식도 벌은 만큼 손해보는 사람이 있으며, 수고로 얻은 모든 것을 잃는 통로가 되기도한다.
이익을 위해 매진하는 현대 사회는 자신의 수고를 담보로 다른 이들의 수고를 빼앗기도하는 하나님을 떠난 사회이다.
34 이러므로 네 눈에 보이는 일로 말미암아 네가 미치리라
도박이나 투기로 자신이 수고한 것을 다 잃어본 사람은 미치지 않으려고 많은 노력을 하지만, 고통의 시간은 좀처럼 짧지는 않다.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하심과 은혜가 없이는 회복되기 어렵다.
낙담하는 시간과 상실의 시간은 하나님의 구원을 간구하는 은혜의 시간이 될 수 있다.
이스라엘이 미치지 않았더라면, 제 정신으로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리스도의 구속을 기다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에 가장 친근하게 은혜로 다가오신다.
35 여호와께서 네 무릎과 다리를 쳐서 고치지 못할 심한 종기를 생기게 하여 발바닥에서부터 정수리까지 이르게 하시리라
철저하게 비참해진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보다는 자신의 힘을 더 의지하는 이들도 있다.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모르는 자들이다.
아무리 건강해도 몇십년 후에는 예외없이 도움을 받다가 흙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다.
차라리 젊었을 때 무릎과 다리에 고치지 못할 종기가 생긴다면,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는 기회가 있겠지만, 평생을 자신을 믿다가 하나님을 완전히 떠난 사람에게는 희망이없다.
일반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현재의 삶 가운데 당하는 고통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현상을 쫓아가는 시대
현시대는 가장 발달된 시대이면서 가장 무지한 시대이다.
불순종한 이스라엘이 당하는 고통은, 교만이 꺽이고 그리스도께 인도되는 축복의 계기가 될 수 있었다.
현대는 교만이 극치를 달리고 있는 시대이다.
현대인들은 모든 문제의 해결을 과학적으로 접근하려고한다.
현대인들은 도덕과 윤리로 사람을 바로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질병은 병원에서 해결하고, 사회 범죄는 언론과 법원의 몫이며, 배고품의 문제는 경제 활동으로 해결한다.
어느 부분에서도 하나님께 도움을 청할 여지가 없다.
가끔 자연 재해를 만나게되면, 인간의 연약함과 창조주의 위대함을 말해보기도하지만, 잠깐 뿐이다.
교만한 현대 문명의 뒤에는 교묘한 속임수가 자리잡고 있다.
질병에 대해서는 원인적 접근보다는 현상적, 즉 증상에 따른 치료만 있을 뿐이다.
인간이 왜 질병에 노출될 수 밖에 없는지 근원적으로 접근하려고 하지 않는다.
질병에 대한 근원적 접근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으로 귀결되며, 인간은 하나님을 떠난 것에 대한 회개와 함께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해야만 한다.
사회 범죄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뉴스를 장식하고 재판이 이루어지지만, 범죄의 총체적 분량은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인간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죄성은 어느 정도 환경만 조성이 되면 활성화된다.
죄악은 죄성이 활성화되어 나타난 것이다.
마치 화산이 내부의 마그마가 활동하면서 폭발하는 것과 같다.
현대 문명은 인간의 죄성을 더욱 자극하는 방향으로 발전된다.
예전에는 청소년이 인터넷의 음란물을 접하지 못하도록 컴퓨터를 거실에 놓아야한다고 대책을 세우기도했지만, 이제 컴퓨터는 손 안으로 들어가서 어린 아이들에게까지 세력을 확장하고있다.
내면의 죄성이 활성화되지 않을 수가 없는 세상이다.
배고픔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시작된 경제 활동은 더 많은 자본과, 더 많은 시간과, 더 많은 노력을 요구한다.
인간에게 주어진 제한된 시간과 공간은 경제의 굴레에 짓밟히며, 하나님께 향하여야하는 모든 시간과 공간을 빼앗아 간다.
현대인의 외적인 화려함과 달리 현대인은 빛을 잃은 눈 먼자가 되어가며, 자신이 어디를 향하여 가고있는지도 모르고 있다.
현대인에게 바쁨과 수고의 결론은 안식이 아니라 죽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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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28장 1-14절 말씀 묵상
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세계 모든 민족은 이미 타락한 아담의 후손들로서 결코 다스릴 자격이 없는 민족들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모든 명령을 지킨다면, 더 이상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불가능한 가정이지만, 원론적으로는 그렇다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회복하신 삼중직, 즉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직책이 회복되었기이에 다스림의 권세를 가짐으로서 더 이상 세상이 이기지 못하는 자가 되었다.
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창조 세계가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순응하듯, 사람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게되면, 창조 세계의 풍요를 누리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순종의 결과로 주어지는 복은 이미 아담에게도 약속되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조 하신 세계에서는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순응할 때만 하나님의 풍요를 누릴 수 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 삶의 원리는 창조 세계와 조화를 이루며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축복을 누리는 자가 될 수 있다.
3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스스로를 보호하는 성읍에서든지, 보호되지 않는 들에서든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보호자가되시며, 공급자가 되시기에, 하나님의 풍요를 누릴 수가 있다.
인간의 자기 방어에 관계없이, 거하는 모든 삶의 영역에서 복된 생활을 할 수가 있을 것이다.
복을 받는다는 것은,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순리적으로 누릴 수 있는 환경을 제공받는 것이다.
복에다가 인간적인 욕심의 관점을 접목시키는 것은 세상적인 생각이다.
4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은 원래 아담에게 주어졌던 명령이었으며, 하나님의 통치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확장하는 것이었다.
아담의 타락 후에 인간은 생육하고 번성했지만, 타락의 극대화만 초래하였을 뿐이고, 급기야는 방주에 타지 않은 모든 생물은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다.
순종을 전제로한 가나안에서의 생육은 원래 에덴에서 주어졌던 명령의 결과들을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또 다시 에덴에서의 실패를 반복하였지만,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영적인 자손들이 번성하게 됨으로서, 가나안에서 주어졌던 순종의 결과들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열매를 맺게된 것이다.
5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아담은 범죄한 후에 소산을 먹기 위해서 얼굴에 땀을 흘리고 수고하여야했으며, 밭의 채소를 먹어야했지만,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었기에, 수고를 하여도 더욱 힘들 수 밖에 없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한 땅의 저주에서 해방된 안식의 땅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면서, 영적인 갈증과 더불어 육적인 궁핍을 해결해주심으로서, 가나안에서의 약속이 실현되었음을 보여주셨다.
6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수고하러나가는 시간이나 쉬러 들어오는 시간이나 모두 안식의 시간이 될 수 있다.
일주일의 시작은 안식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주일로 부터 시작된다.
성도의 한주의 삶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안식 위에서, 안식의 삶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성도는 안식을 얻기 위한 삶이 아니라 안식을 누리는 삶을 사는 것이다.
7 여호와께서 너를 대적하기 위해 일어난 적군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라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대적하는 자와의 싸움은 여호와께서 함께 하실 때는 승리 밖에 없다.
인간이 사는 환경은 어디에나 대적자들이 있기 마련이다.
아담의 범죄로 인한 타락으로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인간은, 모든 역경을 스스로 헤쳐나아가야한다.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인간은 스스로 역경을 헤쳐나가면서 고생하다가 흙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
모든 것이 준비되어있는 안식의 땅 가나안에서, 오직 순종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대적자를 물리치시면서, 안식의 풍요를 누릴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사단을 물리치심으로, 사단은 이미 패배한 자가 되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사단과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승리를 선포하는 삶이 되어야한다.
성도는 비록 육체는 흙으로 돌아갈지언정, 하나님 앞에서 다시 새로운 승리한 존재로 세워질 것이다.
8 여호와께서 명령하사 네 창고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이며
사람이 하는 수고의 결실을 온전히 볼 수 있다면, 그 이상의 풍요는 없을 것이다.
인간이 수고를 하지 않았는데도 복을 받는다면, 부패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참된 복은 수고의 결실을 온전히 취할 수 있는 것이다.
현대 문명사회의 특징은 수고하는 이상의 문제로 인하여 수고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9 여호와께서 네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세워 자기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니 이는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할 것임이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서 온전하게 순종한다면, 안식의 땅인 가나안에 적합한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된 백성이 될 것이다.
만약에 가나안에서 온전하게 순종하였다면, 그리스도의 구속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불순종으로 인하여 성민이 될 수 없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은 이들은 하나님의 성민이 된 것이다.
10 땅의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이름이 너를 위하여 불리는 것을 보고 너를 두려워하리라
아담의 순종으로 에덴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하게 완성되었다면, 온 땅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은 소멸되었을 것이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은 더욱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하나님이 택한 민족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안에 있는 신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리우기에, 사단의 두려움이 될 수 밖에 없다.
11 여호와께서 네게 주리라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사 네 몸의 소생과 가축의 새끼와 토지의 소산을 많게 하시며
이스라엘에 대한 축복의 근거는 약속이었다.
구속의 역사는 창세 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에 대한 약속, 즉 삼위 하나님의 창세 전 구원협약을 근거로하여, 구속의 역사가 진행되며, 가나안에서의 순종에 따른 축복의 약속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실 축복을 예표하는 것이다.
12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적절한 비와 적절한 일조량은 풍성한 수확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사계절과 때에 맞추어 내리는 비와 적절한 일조량은 하나님의 은혜와 간섭하심을 나타내는 놀라운 자연의 현상이다.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없다면, 풍성한 수확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많은 자연 재해들이 인간의 무분별한 환경 파괴에서 기인된 것을 볼 때, 하나님의 축복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인간의 욕심이다.
인간의 욕심은 우상 숭배와 직결되며, 현대 문명은 인간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인 것을 볼 때, 현대 문명과 우상 숭배는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성도는 세상 문명을 통한 성취보다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는 복된 약속을 바라보면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13 여호와께서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아담은 에덴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로서, 하나님의 왕권을 대신 행사하는 왕의 역할을 하였다.
아담이 높은 자리에서 행사하는 권위는 하나님의 권위를 위임받아 행사하는 것이었다.
아담은 반역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하나님의 권위를 행사할 수가 없었고,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의 후손들은 두려움 가운데 유리하는 자가 되었다.
다시 안식의 땅으로 초대되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되는 순종은, 하나님의 권위를 드러내는 역할을 하였으며,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가 어떠한 복을 받는지 증거해주는 역할을 해야만 했다.
이스라엘 백성은 사실상 이러한 축복을 누릴 수 없는 자임을 증거하였을 뿐이며, 모든 인간은 구속주의 도움이 없이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는 자임을 증거하였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높임을 받는 자가 되었다.
14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
모압 땅에서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명령은 시내산 언약을 좀 더 구체화하는 것이었다.
모압 땅에서 주어진 명령은 분명하게 축복과 저주를 선언한다.
이는 아담에게 주어졌던 축복과 저주가 반복된다는 면에서, 모세 언약을 아담의 행위 언약이 재연되는 행위 언약으로 보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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