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29장 14-29절 말씀 묵상
14 내가 이 언약과 맹세를 너희에게만 세우는 것이 아니라
15 오늘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우리와 함께 여기 서 있는 자와 오늘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한 자에게까지이니
이스라엘의 대표성은 시간적인 수직적 관계뿐만이 아니라 공간적인 수평적 관계까지 대표한다.
수직적 대표성으로는, 후대에 가나안에서 태어난 이들도, 비록 자신들이 직접 참여한 것이 아니어도, 선조들의 언약과 맹세에 참여한 자로 여겨짐으로 인해서 시간적 수직성의 영향하에 있다.
수평적 대표성으로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스라엘은 아담의 후손으로서 인류를 대표하여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간다.
마치 상품을 출하할 때 모든 상품을 검사하기보다는 대표되는 몇가지 상품을 검사함으로서 전체의 상태를 파악 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모세 언약이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 자손과만의 언약이라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새 언약도 이스라엘 자손에게만 한정 될 수 있다.
새 언약이 모든 인류를 향해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세 언약은, 모든 인류를 향하여 있으며, 이스라엘 자손은 선택적으로 모세 앞에 세워진 것이다.
모세 언약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수직적인 관계성으로만 대표성을 가진다면, 성경은 유대 중심적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새관점의 경우가 그러하다.
인류는 아담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이며, 이스라엘은 공동체의 대표성을 갖는다.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인간은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공동체적 대표성 아래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 대한 이해는 공동체적 인식 아래에서 진행되어야만 한다.
16 (우리가 애굽 땅에서 살았던 것과 너희가 여러 나라를 통과한 것을 너희가 알며
17 너희가 또 그들 중에 있는 가증한 것과 목석과 은금의 우상을 보았느니라)
구원은 거룩하지 못한 땅에서, 거룩한 땅으로의 이동 과정이며, 이러한 과정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룩하지 못한 이들을 경험한다.
이스라엘은 거룩하지 못한 자들 가운데서 구별되어 거룩함에 참여한 이들이다.
이들은 여러 나라를 통과하는 동안 그들의 가증한 것을 보았지만,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의 저주 아래에서, 자신들의 종말이 그들과 한 가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에 대하여 실패하신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이스라엘 자손은 자신들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감추어진 비밀을 알아야만 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다고 하더라도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인간의 내면의 한계는 하나님의 감추어졌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 사건을 통해 극복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구속 사역으로 인하여 거룩함에 참여한 이들은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거듭날 수 있다.
성령의 내주하심과 도우심이 없이는 성경의 감추어진 비밀을 알 수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새관점에서 부장하는 바와 같이, 단순히 삶의 본을 보여주여주신 분이 아니시다.
인간에게 기대할수 있는 변화는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는 내적인 변화로만 가능하다.
18 너희 중에 남자나 여자나 가족이나 지파나 오늘 그 마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서 그 모든 민족의 신들에게 가서 섬길까 염려하며 독초와 쑥의 뿌리가 너희 중에 생겨서
19 이 저주의 말을 듣고도 심중에 스스로 복을 빌어 이르기를 내가 내 마음이 완악하여 젖은 것과 마른 것이 멸망할지라도 내게는 평안이 있으리라 할까 함이라
설마가 사람잡는다는 말이 있다.
인간은 경험해보지 않고는 깨닫지를 못한다.
가나안 입성은 앞둔 이스라엘에게 선포되는 모세 언약은 이스라엘이 경험을 통해서 깨닫았을 때 기억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스라엘은 철저하게 무너졌고, 자신들이 얼마나 오만한 자였는지 경험함으로서, 비로소 그리스도께 마음의 문을 열수 있었다.
인생의 하프타임은 자신이 믿고 의지하였던 것이 무너지면서 오게된다.
인간은 짧은 인생을 살지만, 어느 시기엔가 무너질 수 밖에 없는 인생이다.
이스라엘이 무너진 후에 그리스도께 마음의 문을 열 수 있었듯이, 인생의 목표가 무너지고, 자신의 뜻대로 안되고, 극단적인 우울증과 삶을 포기하고 싶을 때, 그 때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가장 귀한 시간이 될 수 있다.
아담 안에서 타락한 모든 인간은 철저하게 무너지는 경험을 통하지 않고는 결코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 수가 없다.
어떤 의미에서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 자손은 모태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하였던 이들도 무너짐이 없이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주셔야지만, 깨닫고 보고 들을 수 있다.
모태신앙을 가졌던 이들도 언젠가는 무너지는 경험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다시만나는 기회를 가져야만 참된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보고 들을 수 있을 것이다.
20 여호와는 이런 자를 사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그 위에 여호와의 분노와 질투의 불을 부으시며 또 이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를 그에게 더하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천하에서 지워버리시되
하나님의 분노는 질투의 불로 이어진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하고 싶어하시지만, 하나님을 거부하는 인간을 억지로 생명책에 기록하시지는 않으신다.
잔치를 베푸느라 많은 수고를 하셨지만, 초대받은 잔치 자리에 참석하기를 거부하는 이들에 대해서, 하나님은 인격적이시기에, 마음에 없는 이를 강제로 앉히시지는 않으신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
오직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만이 하나님의 거룩함에 참여될 수 있다.
21 여호와께서 곧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그를 구별하시고 이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언약의 저주대로 그에게 화를 더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저주받을 이를 구별하시는 것은, 조밀한 헤파필터와 같다.
율법은 청소기 필터와 같이 악한 이들을 구별해 낸다.
흡입한 공기중에 깨끗한 부분은 통과시키고, 더러운 이물질은 걸러내어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것과 같다.
오염으로 더러워질수록 세밀한 청소가 필요하다.
예전의 청소는 빗자루로 충분하였다.
요즘은 먼지가 작아져서 빗자루로는 청소가 되지 않는다.
진공청소기도 이전과 달리 좀더 촘촘한 필터가 있어야만 한다.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은 결코 필터를 통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이 일으키는 먼지만큼이나 인간의 죄악은 점점더 조밀해지고, 율법의 필터를 통과하는 것은 더욱 어려울 수 밖에 없다.
악한 이들이 이스라엘의 지파중에서 철저하게 구분되어제거되듯이,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자신을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심판이라는 조밀한 필터를 통과할 수 없을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은 자만이 그리스도의 필터를 통과하여 오염되지 않은 거룩한 곳에 이르게 될 것이다.
22 너희 뒤에 일어나는 너희의 자손과 멀리서 오는 객이 그 땅의 재앙과 여호와께서 그 땅에 유행시키시는 질병을 보며
23 그 온 땅이 유황이 되며 소금이 되며 또 불에 타서 심지도 못하며 결실함도 없으며 거기에는 아무 풀도 나지 아니함이 옛적에 여호와께서 진노와 격분으로 멸하신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의 무너짐과 같음을 보고 물을 것이요
24 여러 나라 사람들도 묻기를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이 땅에 이같이 행하셨느냐 이같이 크고 맹렬하게 노하심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스라엘의 재앙은 모든 사람들에게 경고가 되며, 이스라엘의 희망은 모든 이들에게 희망이 된다.
만약에 이스라엘이 흥했더라면, 이방인들이 그 자리에 참여하기 위해서 몰려들었을 것이다.
여호와의 교훈은 모든 이들에게 경고가 되면서도, 이스라엘에게는 수치가 된다.
언약을 파기한 자는 수치를 감당하여야한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육체적 고통 뿐만이 아니라, 모든 모욕적인 수치를 감당하셔야만 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당한 수치와 모욕은, 이스라엘이 박아야했던 수치와 모욕이면서, 동시에 모든 인류가 받아야만 하는 수치와 모욕이었다.
톰 라이트는 예수가 이스라엘이 받을 국가적 저주를 받으시고, 이스라엘의 죄를 없애주면서 최후의 만찬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포로 생활의 종결을 선언하였다고 말한다.
여기서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예수의 역할은 아담의 죄와는 관계없이,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받을 저주를 직접 받음으로서 이스라엘에 대한 면죄부를 제공해주었다는 것이다.
이는 또 한편으로 유대 이스라엘의 정당성과 확장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며, 기독교를 유대교에 편입시키는 작업을 시도하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신약의 교회를 유대 이스라엘의 확장으로 규정하고서, 신약의 교회를 유대교의 틀에다 맞추는 시도를한다.
모세를 통해서 선포되는 이스라엘의 수치와 저주는 국가적인 수치와 저주를 넘어서 인간이 본질적 죄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이스라엘에 임한 저주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롭게 세워지는 신약의 교회라는 새로운 이스라엘, 즉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손들을 예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와 성도가 참 이스라엘로서의 실체이고, 구약의 이스라엘은 참 이스라엘을 예표하는 모형일뿐이다.
톰 라이트는 이와 반대로, 유대 이스라엘을 실체로 보고서, 신약의 교회는 이차적으로 파생되어 확장된 이스라엘이라고 보고있다.
톰 라이트는 이러한 작업을 통해 그리스도의 구속을 철저하게 왜곡시키는 작업을 함으로서, 그리스도를 대적하였던 유대인들과 마찬가지의 작업을 하고있는 것이다.
25 그 때에 사람들이 대답하기를 그 무리가 자기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에 더불어 세우신 언약을 버리고
26 가서 자기들이 알지도 못하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시지도 아니한 다른 신들을 따라가서 그들을 섬기고 절한 까닭이라
27 이러므로 여호와께서 이 땅에 진노하사 이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대로 재앙을 내리시고
언약은 이 땅에 인간이 존재하였을 때부터 시작되었으며,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의 언약 안에 있기에, 언약은 인간의 존재의 근거가 된다.
모든 인간은 이미 아담 안에서 언약을 어긴 자이며, 동시에 언약 안에서 이미 죽음이 선포된 자들이다.
생명되신 그리스도 없이는, 인간의 생명은 덧없는 것이며, 아무리 외적인 성공을 하였다하더라도, 심지어 재벌이나 왕, 대통령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죽음의 그늘에서 피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사명은 하나님의 구속을 예비하는 것이었으며, 이스라엘은 모든 인류를 대표하여 하나님 앞에 불리워 나간 이들이다.
이스라엘은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었기에, 인간의 타락한 모습의 전형을 보여주었으며, 하나님의 명령으로 제시된 울법을 지킬 능력이 없음을 보여주었다.
이스라엘을 향한 진노는 율법을 근거로 한 언약이 근거 기준이었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한 믿음의 요구가 앞으로 임할 진노의 재앙의 기준이다.
언약은 버린 이스라엘은 다른 신을 섬기는 결과를 가져왔듯이,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현대인은 스스로의 기술과 경제를 의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있다.
하나님을 거부하면서, 가인으로부터 시작된 도시 분명은, 모든 삶의 형태가 도시를 중심으로한 기술의 보편화와 인간 중심의 경제 구조 가운데 하나님을 필요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을 배제한다.
언약을 버린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심은 은혜의 자리로 인도하심이었지만, 은혜 안에서 선택을 요구받는 현대인들에게 그리스도를 거부함은 영원한 진노의 자리로 인도되는 것이다.
현재의 하나님의 침묵하심과 평안은 마치 폭풍 전야와 같이 결코 평안한 상태라고 볼 수 없다.
28 여호와께서 또 진노와 격분과 크게 통한하심으로 그들을 이 땅에서 뽑아내사 다른 나라에 내던지심이 오늘과 같다 하리라
하나님의 진노하심은 그때 그때 감정에 따라서 달라지시는 것이 아니다.
항상 일관성이 있으시며, 말씀은 변함이 없으시다.
이스라엘에 격노하심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라고 예외는 아니다.
하나님께서 일반 은혜 가운데 오래 참으신다고, 결코 하나님을 경히 여겨서는 안된다.
현대는 하나님의 침묵하심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29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표면적으로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보지만, 그 안에 하나님의 구속이 담겨있다.
하나님의 구속은 표면적인 인간의 일차적 이해를 넘어선다.
하나님의 감추어진 일은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를 허락하시지 않으시면, 알 수가 없다.
새관점을 주장하는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일을 깨닫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이들이다.
그들은 나름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하면서 자신들의 생각을 말하지만, 정작 자신들이 하는 일이 어떠한 일인지 알지를 못하고 있는 이들이다.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진 일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는 알 수가 없다.
새관점주의자들은 성령에 대하여 말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성령은 지극히 단편적이고 회개하는 일에만 치중되어있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회개에 대해서도 알지를 못한다.
회개는 행위적인 것은 넘어서 존재론적인 것까지 나아가야한다.
하지만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진 복음의 비밀을 알지 못한다.
새관점주의자들과 같이 복음을 표면적으로 보는 이들은, 복음을 율법의 연장선에서보며, 윤리적인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감추어진 일과 나타난 일은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책임이라는 양면을 보여준다.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예정을 너무나 강조한 나머지 인간의 책임에 대하여 소홀히 하며,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인간의 책임을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가볍게 만들려고한다.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지 않으면 인간은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알 수가 없다.
율법은 가나안에 들어간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것이지만, 그리스도께 인도되는 복음은 오직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에게만 한정된 것이다.
인간에게서 출발된 지식으로는, 하나님께서 깨닫는 지혜를 주시지 않으신다면, 아무리 깊이있는 철학적 사고를 가진다고하더라도, 하나님의 깊으신 섭리를 깨달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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