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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12.29 :: 예레미야 7장 12-18절 말씀 묵상
- 2017.12.29 :: 예레미야 7장 16-28절 말씀 묵상
- 2017.12.29 :: 예레미야 7장 1-15절 말씀묵상
예레미야 7장 12-18절 말씀 묵상
12 영화로우신 보좌여 시작부터 높이 계시며 우리의 성소이시며
13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
14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15 보라 그들이 내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어디 있느냐 이제 임하게 할지어다 하나이다
16 나는 목자의 직분에서 물러가지 아니하고 주를 따랐사오며 재앙의 날도 내가 원하지 아니하였음을 주께서 아시는 바라 내 입술에서 나온 것이 주의 목전에 있나이다
17 주는 내게 두려움이 되지 마옵소서 재앙의 날에 주는 나의 피난처시니이다
18 나를 박해하는 자로 치욕을 당하게 하시고 나로 치욕을 당하게 마옵소서 그들은 놀라게 하시고 나는 놀라게 하지 마시옵소서 재앙의 날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시며 배나 되는 멸망으로 그들을 멸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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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피난처, 성소가 되신 영광스러운 보좌)
예레미야 선지자는 유다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의 재앙 앞에서 혼란스러워하다가, 유다 백성들을 버리시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 구원의 손길을 펴실 것을 깨닫고서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의 저주는,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라, 공의의 하나님이시기에,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언약을 신실하게 이행할 의무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변치 않았으며, 하나님께서 구원의 손길을 예비하고 계심을 깨닫고서, 오직 하나님만이 진정한 안식처가 될 수 있음을 찬양한다.
성소는 피난처, 안식의 개념을 포함하고있다.
태초부터 찬양 받으실 영광스러운 보좌는 유다 백성들을 넘어서, 우리 모두의 피난처, 성소, 안식이 되신다.
이는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통하여 이루어졌기에, 그리스도는 우리의 궁극적인 피난처, 성소, 안식이 되신다.
하지만 인간은 피난처, 성소, 안식이 되신 주님께 나아가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기에 실질적으로 주 안에서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인간은 누구나 죄인이기에, 권위자에 대하여 두려움이 앞설 수 밖에 없다.
권위자에 대한 두려움과 가까이하기 힘든 어려움은 전부 죄로 인하여 왜곡된 부정적 사고에서 나온다.
가까이 하기 힘들고, 어려운 것은, 마치 가인이 범죄하고서 하나님을 멀리 한 것과 같이, 자신의 죄에 대한 부담감에서 나오는 것이다.
권위자는 우리의 참된 안식이 되시며, 우리에게 평안을 제공해주시며, 우리의 위로와 힘이 되신다.
우리가 의지할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받아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두려움 없이 하나님 안에서 평안과 안식을 누리며, 예레미야와 같이 하나님을 찬양 할 수 있다.
하나님께 대하여 부담감을 갖는 것은 결코 좋은 것만은 아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무섭게 권위적으로 다가오시는 분이 아니시다.
우리가 죄인이기에 스스로 두려워 할 뿐이다.
두려움과 불안, 공포, 스트레스, 외로움, 분리, 혼란들은 다 아담의 범죄와 더불어 시작된 것이다.
비록 체질은 아직 죄악된 육신을 가지고 있지만, 신자는 두 번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자녀이기에, 첫 번째 아담으로부터 온 죄의 속성으로부터 자유할 필요가 있다.
두 번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안에서 평안과 안식을 누릴 권리와 자격이 있으며, 예레미야 선지자와 같이 주님을 찬양하면서, 주 안에서 평안과 안식을 누리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13, 흙에 기록된 자들)
인생은 눈에 보기에 아무리 화려한 것 같아도 시간이 지나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다.
인생은 누구나 흙으로 돌아갈 것이며, 그를 기억했던 자들도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주를 떠난 인생들에게는, 사는 동안 품었던 수 많은 알들이 품에서 떠나고 더 이상 품은 자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인생의 참된 가치는 오직 하나님께 기억된 자로서, 영원한 안식이 되시는 하나님의 품에 안길 때만 참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신자에게는 아담에게 순종의 조건으로 약속된 종말론적 축복과 영생을 누릴 자격이 주어진 것이다.
허무한 인생들은 없어질 것을 위해서 살지만, 신자는 영원한 것을 위해서 살아가야할 것이다.
영원한 것은 오직 하나님이 택하신 인생들에게만 주어진 것이다.
문화물의 천국보존을 위해서 문화 변혁 운동을 하며, 이 땅의 구속적 문화 변혁을 위해서 힘쓰는 인생들도, 그 문화가 더 이상 천국에서 보존되지 않는다면, 그 수고는 허무한 것이 될 것이다.
인생이 비록 임시적이고 짧은 기간을 살아가는 것이지만, 삶 가운데 문화물이 천국에서 보존이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문화는 성도를 성화시키는 수단으로서의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데 의미를 두어야 할 것이다.
(14, 구원자께 의뢰하는 삶)
예레미야는 병들어 있는 자신이 치유받기를 하나님께 간구한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몸과 마음이 병들어 있음을 보여주고있다.
인생은 연약하기에 하나님의 일이라고 할지라도 인간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육신은 피폐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더군다나 예레미야는 재앙의 저주를 선포하는 일을 맡았으니, 결코 쉽지않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안식이 없다면, 인생은 결코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안식은 고통을 능가하는 것이기에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서 자신이 고침을 받기를 기도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는 이 세상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다.
고달픈 인생이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안식은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놀라운 것이다.
(15-16,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
예레미야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충실하였지만 이로 인해서 좌절에 빠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위로가 없이는 인간은 낙담하게되어있다.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에게 결코 만만한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기 위한 기도가 반드시 병행되어야만 말씀을 전하고 선포하는 일이 가능할 것이다.
(17-18, 피난처가 되신 하나님)
예레미야의 기도는 마치 전쟁터에서 지원군의 도움을 요청하는 병사의 외침과 같다.
말씀을 소유한 성도는 이 세상과 전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성도의 삶에서 세상과의 싸움이 없다면 이들은 직무를 유기하는 자일 것이다.
모든 성도는 선지자로서의 직분을 가지고 있기에 말씀을 소유해야하고 또한 말씀을 선포해야만 할 것이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말씀을 전달받았지만, 모든 성도는 성령의 내주하심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대위임령(마28:19-20)을 수행할 의무가 있다.
말씀은 세상에 던지는 폭탄과 같아서 반드시 반격이 있게 마련이다.
하나님은 전쟁터에서 군사를 보호해주시는 피난처가 되시며, 적군을 물리쳐주시는 힘이 되신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생각하며, 사는 날 동안 성도로서의 맡은바된 선지자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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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7장 16-28절 말씀 묵상
16 그런즉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어 구하지 말라 내게 간구하지 말라 내가 네게서 듣지 아니하리라
17 너는 그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행하는 일을 보지 못하느냐
18 자식들은 나무를 줍고 아버지들은 불을 피우며 부녀들은 가루를 반죽하여 하늘의 여왕을 위하여 과자를 만들며 그들이 또 다른 신들에게 전제를 부음으로 나의 노를 일으키느니라
19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나를 격노하게 함이냐 자기 얼굴에 부끄러움을 자취함이 아니냐
20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나의 진노와 분노를 이 곳과 사람과 짐승과 들나무와 땅의 소산에 부으리니 불 같이 살라지고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21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희생제물과 번제물의 고기를 아울러 먹으라
22 사실은 내가 너희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령하지 아니하고
23 오직 내가 이것을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내가 명령한 모든 길로 걸어가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나
24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자신들의 악한 마음의 꾀와 완악한 대로 행하여 그 등을 내게로 돌리고 그 얼굴을 향하지 아니하였으며
25 너희 조상들이 애굽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되 끊임없이 보내었으나
26 너희가 나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 하여 너희 조상들보다 악을 더 행하였느니라
27 네가 그들에게 이 모든 말을 할지라도 그들이 너에게 순종하지 아니할 것이요 네가 그들을 불러도 그들이 네게 대답하지 아니하리니
28 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는 민족이라 진실이 없어져 너희 입에서 끊어졌다 할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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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 숭배에 대하여 분노하시는 하나님)
불순종은 다름 신에게 종속된 상태를 말한다.
인간에게는 자유 의지가 있는 것 같지만 실은 하나님의 종이든지, 아니면 사단의 종이다.
불순종의 문제는 아담에게서와 같이 처음에는 유혹, 그리고 그 다음 결과는 다른 신에게 종속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순종은, 우선 광야에서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시고, 그 다음은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가운데, 성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신을 희생 제사로 드린 것이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다 지키셨다는 성경 구절이 없다면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의를 거부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광야에서 금식 하신 후에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심으로서, 율법의 요구인 완전한 순종을 이루신 것이다.
예레미아를 통해서 보여주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이미 유혹받은 자로서의 삶이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에덴에서 불순종한 아담의 후손이기에, 결과적으로는 사단에게 종속되는 행동을 보여줄 수 밖에 없다.
예레미아서에서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보다는, 유혹받아 사단의 종노릇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가 어떠한 지를 고발하는 것이다.
이는 결국 모든 인간이, 오직 은혜를 통해서 그리스도께 나아가야만하는 인생임을 가르쳐준다.
(순종은 들음에서 나온다)
하나님의 관심은 순종이다(24, 26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초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생각이 없었기에 순종을 기대 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었기에, 자신이 판단의 주체가 되어 자신의 소견에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생각이 옳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데서 오는 결정은 불순종일 뿐이고 악일 뿐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최대의 관심사는 듣는데서 오는 순종이었다.
불순종하는 이들의 마음에 가득한 악한 마음의 꾀와 완악한 마음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가운데서도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다.
현대 첨단 문명의 기기들을 통하여 제공해주는 지식들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을 대신해준다.
첨단기기가 삶을 윤택하게해주는 것과 같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려는 이들에게 더 많은 불순종의 기회를 제공해주기도한다.
도구 자체가 악은 아닐지라도 악의 수단이 되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인간이 쉽게 스마트 폰에 중독된다는 것도, 스마트 폰의 기능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인간들에게 우상 숭배의 길을 열어주고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악한 마음의 꾀와 완악한 마음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첨단 기기에 의해서 더욱 활성화되고 있다.
인간이 개발한 첨단 문명은, 인간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에 합당한 모습을 제공해주고있다.
(부정적 상황들은 하나님을 외면한 결과에서 온다)
고도의 문명을 자랑하며, 뛰어난 학식을 가지고서, 최고의 지성이라 자는 이들이 가득한 현대인들도 우매하기는 마찬가지다.
현대의 삶의 환경 가운데서 발생하는 부정적 상황의 근본 원인이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의 결과라고 말하는 이들이 없다.
모든 부정적 상황은 하나님과의 관계 가운데 설명되어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부정적 상황의 근본 원인이 하나님을 외면한 결과에서 온다고 말하는 이들이 없다. (20절)
인간은 자신이 인식을 하지 못하더라도 악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유다 백성들이 조상들보다도 더욱 악을 행한 것과 같이 인간은 시간이 흐를수록 발전의 심도를 더해가게 되어있다.
문명의 발전은 마음의 소원을 이루는 방향으로 가게 되어있다.
하나님께서 내어버려둔, 우상 숭배하는 이들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결코 낙관적일 수 없다.
내어버려진 이스라엘의 종국과 같이, 하나님께서 내어버려둔 현대인들에게 임할 종국은 악마적이고 파괴적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순종하지도 않고 교훈을 받지 아니하려는 민족에게 외치는 말씀은 심판에 대한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간구할 뿐이다.
결론적으로 사람에게는 부정적 상황의 위협이 심각한 문제이겠지만, 이는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들의 마음을 두드리시는 표시라고 보아야한다.
인간은 스스로가 어쩔 수없는 죄인이라고 고백하면서 부터 길이 열리게 되어있다.
인간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한에는 인간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현대 문명은 창조적 발전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분리를 추구하는 인간의 욕심에 절대적 영향을 받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고 이들을 위하여 부르짖어 구하지 말고 간구도 하지말라고 하신다.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시겠다고 하시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희망은 그리스도에게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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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7장 1-15절 말씀묵상
1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이르시되
2 너는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예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 사람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3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 곳에 살게 하리라
4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5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
6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 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 뒤를 따라 화를 자초하지 아니하면
7 내가 너희를 이 곳에 살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무궁토록 준 땅에니라
8 보라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존하는도다
9 너희가 도둑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르면서
10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11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2 너희는 내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둔 처소 실로에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악에 대하여 내가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보라
1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제 너희가 그 모든 일을 행하였으며 내가 너희에게 말하되 새벽부터 부지런히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였고 너희를 불러도 대답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4 그러므로 내가 실로에 행함 같이 너희가 신뢰하는 바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 곧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준 이 곳에 행하겠고
15 내가 너희 모든 형제 곧 에브라임 온 자손을 쫓아낸 것 같이 내 앞에서 너희를 쫓아내리라 하셨다 할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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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의 종교가 아니지만 윤리는 열매로서 중요하다)
행위의 열매가 없는 예배의 문제점을 지적하신다(3절).
이들이 길과 행위에 있어서 바르지 못한 것은 이들에게 행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머리로는 알아도 이미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기에, 능력이 없는 죽은 자임을 증명해 줄 뿐이다.
행할 능력이 없는 이들에게 윤리를 말한다고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인들이 행함의 열매가 없는 것은, 이들이 참된 기독교인들이 아님을 증명해주는 것이며, 또한 성도들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사망의 몸에서 자유 할 수 없음을 증명해 줌으로서, 성도를 더욱 겸손케 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여호와의 말씀은, 이들의 길과 행위가 정도를 넘어서고 있음에 대한 것이다.
현재의 기독교인들의 문제도 마찬가지로, 근원적으로 그들의 잘못된 신앙에 있다.
하지만 더 큰 문제, 이러한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서 윤리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본질은 인간을 윤리적으로 만들기 이전에, 인간은 이미 윤리적으로 실패한 존재이라는 것을 고발함으로서, 그리스도께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에서는 윤리에 기초하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말하지만, 인간에게는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을 뿐만이 아니라 행위를 통해서 구원받을 능력도 없다.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볼 수 있는 행실의 문제는 기독교인 들에게도 같을 수 밖에 없다.
차이가 있다면 율법 아래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가 없기에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지만,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를 전가받음으로서 율법의 저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제시되어있다는 것이다.
또한 죄의 문제를 해결받은 신자에게는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인해서 성화의 과정이 요구된다.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성전에 대하여, 인간이 이를 여호와의 성전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하신다.
하나님께서 이를 인정하지 않으시고, 그들이 성전이라는 하는 말이 거짓말이라고 하신다.
이는 성전에 예배드리러 오는 이들에게 충격적인 말로서, 이보다 더 큰 충격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성전에 올라오는 이들이, 자신들이 진정으로 예배드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문제는 성전에 있지않고 성전에 예배드리러 오는 이들에게 있다.
오늘의 많은 교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많은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이용하여 거짓말을 하고있다.
가장 대표적인 거짓말은 교회를 성전이라고하면서 교회당을 신성한 곳으로 만들고서, 목회자만이 제사장인것과 같이 행하고, 성전 건축이라는 용어를 갖다붙이면서 예배당 건축을 독려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가 개인의 문제 이전에 목회자 전체의 문제인 것은, 이러한 용어 사용에 대해서 교단 차원에서는 전혀 문제 제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의 교회는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책임은 공동체적으로 있기에, 어느 누구도 자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예배당을 건축하면서도, 성전 건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거짓말을 한다.
문제는 이러한 거짓말이 보편화되어있고, 우매한 성도들에게는 먹혀들어간다는 것이다.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가 없다.
예레미아 선지자를 통하여 선언되는 하나님의 진노하심과 재앙은, 하나님을 속이는 것의 심각성을 보여준다.
성전 건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목회자는 전부 거짓 목회자라고 보면 틀림이없다.
이러한 이들은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이용하는 사악한 이들이다.
기독교는 자신을 포장하고 자신의 의와 욕심을 이루기 위한 종교가 아니다.
(가나안- 영원 무궁토록 준 땅)
가나안 땅에서의 영원한 삶의 조건은 말씀의 순종과 이에 따른 행위이다.
가나안은 에덴에서와 마찬가지로 행위 언약 아래 있다.
아담이 불순종으로 에덴에서 쫓겨난 것과 같이, 이스라엘의 바벨론 유수는 불순종의 결과였다.
불순종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가난한 자, 즉 이방인, 고아, 과부, 무죄한 자들을 압제하는 일은 긍휼의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의 종노릇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에덴과 가나안은 은혜 이전에 하나님의 공의에 의하여 다스림을 받는 곳이다.
(도둑의 소굴이 된 성전)
성전이 도둑의 소굴이 된 상황은 한국의 교회들과 너무나 유사하다.
하지만 이는 기독교 역사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이는 교회가 외적인 건물과 조직 위주로 형성되면 어쩔 수 없이 생기는 현상들이다.
참된 교회는 성도들 가운데 있는 무형의 교회이지 외적인 성전이 아니다.
성전을 강조하는 것은 건물과 조직에 권위를 부여함으로서 자신들의 이익을 누리기 위한 것이다.
교회의 중심은 건물이 아니라 성도들의 모임이 되어야 한다.
교회가 외적인 조직으로서의 규모를 추구하게되면 이곳에서는 세상의 온갖 악들은 다 나타나게되어있다.
서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부당한 권력을 행사하고, 자신의 사업을 위해서, 이익을 위해서, 욕심을 위해서, 세상 복을 위해서…...
교회는 외적인 건물이 아니라 신자들 가운데 임한 성령이 내주하시는 공동체가 되어야 그나마 이러한 일들을 줄여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들은 결국 인간이 구원받기에 합당하지 않은 존재임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오직 은혜만 있을 뿐이다.
(실로- 하나님의 생명 나무가 심겨졌으나 인간은 누릴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보여준다)
실로는 쫓겨난 아담에게 생명나무의 길이 차단될 수 밖에 없었음을 보여주는 곳이다.
실로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도, 하나님께 순종 할 수 없는 인간의 능력의 한계를 보여주었던 곳이다.
실로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외적인 자부심으로, 내적인 빈곤을 경험하였던 곳이다.
실로에서의 패망은, 인간의 욕심을 위한 수단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부적과 같이 사용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실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인간의 욕심으로 대체한 결과가 어떠한 지를 보여주는 곳이다.
실로는 자신이 하나님의 도구가 되었다고, 혹은 쓰임을 받았다고 자랑하지 말아야 할 것을 보여주는 곳이다.
실로는 자신이 쓰임 받고 언제나 버림받을 수 있음을 인식하는 겸손의 필요성을 일깨워주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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