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32장'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8.06.26 :: 신명기 32장 34-47절 말씀 묵상
  2. 2018.06.25 :: 신명기 32장 15-33절 말씀 묵상
  3. 2018.06.24 :: 신명기 31장 30절- 32장 14절 말씀묵상
신명기 2018. 6. 26. 21:43

신명기 32장 34-47절 말씀 묵상



34  이것이 내게 쌓여 있고 내 곳간에 봉하여 있지 아니한가
35  그들이 실족할 그 때에 내가 보복하리라 그들의 환난날이 가까우니 그들에게 닥칠 그 일이 속히 오리로다


마치 댐에 물이 고이듯이,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가운데 가득 채워지고있지만, 댐 아래에서는 하나님의 진노가 쌓여가는 것을 알 수가 없다.

그들의 환란 날은 이스라엘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날이며,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구속 사역으로 인해서, 사단은 하늘에서 별이 떨어지는 것과 같이 떨어져 버린 것이다.



36  참으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판단하시고 그 종들을 불쌍히 여기시리니 곧 그들의 무력함과 갇힌 자나 놓인 자가 없음을 보시는 때에로다


하나님의 때는 하나님의 백성이 완전히 무력해진 때에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백성이 조금이라도 자신들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있다면, 하나님의 때는 아직 이르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할 때 오는 것이다.

인간의 교만은 자신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데서 오는 것이다.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면,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 밖에 없다.

이것이 신앙이다.

어떤 선교회 대표는 자신의 어머니가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구원을 받았는지 걱정하면서, 불쌍하다고 고백을 한 것을 본 적이 있다.

신앙을 무엇인가를 하여야하는 것과 연관시키며, 행함을 구원과 연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장애인이나 중환자실에 있는 사람은 구원의 기회가 없는 것인가?

혹은 열심히 신앙 활동을 하다가 치매가 들어서 이상한 행동을 하게되면 구원은 취소되는가?

구원은 우리가 하나님께 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오시는 것이다.

우리의 의지와 자신감과 교만이 하나님의 길을 막고 있을 뿐이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교만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길을 막은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교만한 마음이 완전히 꺽이기까지 기다리셨다.

그리스도는 완전히 무기력해진 이스라엘 가운데 오셨으며, 열혈당과 같이 살아서 혈기를 부렸던 이들은, 예루살렘의 멸망과 더불어 완전히 파멸에 이르게 된 것이다.

진정한 구원은 오직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고백과 더불어 두 손들고 하나님의 다가오심을 맞이하는 것이다.



37  또한 그가 말씀하시기를 그들의 신들이 어디 있으며 그들이 피하던 반석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을 거부하는 이들은 믿는 구석이 있었지만, 실상은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들이 믿었던 신은 하나님을 대적할 뿐, 아무 것도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는허상이며, 오직 창조자는 하나님 한분 뿐이시다.

믿었던 것들은 때가되면 없어진다.

현대인들은 문명과 기술에 의지하여 자신을 믿는다.

신칼빈주의는 문명과 기술의 발전을, 원시적 에덴에서 종말론적 천국에  다가가게하는, 인간이 감당해야할 창조적 사명이라고 말하지만, 문명과 기술은 인간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할 뿐이다.

현대 문명의 기술과 힘은 더 이상 믿고 의지할 대상이 되지 못한다.

인간을 위한 문명 기술이 인간을 삼켜버릴 것이다.



38  그들의 제물의 기름을 먹고 그들의 전제의 제물인 포도주를 마시던 자들이 일어나 너희를 돕게 하고 너희를 위해 피난처가 되게 하라

39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 외에는 신이 없도다 나는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빼앗을 자가 없도다

40  이는 내가 하늘을 향하여 내 손을 들고 말하기를 내가 영원히 살리라 하였노라


아무리 패역한 민족이라도 구원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며,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곳에 구원의 길이있다.

상황이 어떠하든지 간에 모든 상황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상황이 좋지 않다고 그 곳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곳에서는 항상 문제가 문제로 드러나게 되어있다.

교회에서 많은 문제가 드러나는 것도, 교회는 인간의 문제를 드러내고, 드러난 문제를 해결받는 곳이다.

교회는 아무리 문제가 많이 드러나도 하나님이 승리하시는 곳이다.

교회가 아무리 부패하고 사회의 욕을 먹어도, 교회는 구원의 통로가 되는 곳이다.



41  내가 내 번쩍이는 칼을 갈며 내 손이 정의를 붙들고 내 대적들에게 복수하며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할 것이라
42  내 화살이 피에 취하게 하고 내 칼이 그 고기를 삼키게 하리니 곧 피살자와 포로된 자의 피요 대적의 우두머리의 머리로다

하나님의 구원은 대적을 멸함에서 성취된다.

이스라엘 자손들을 타락시킨 것도 대적들이다.

대적들은 이스라엘 자손들 한 가운데서 이스라엘 자손을 유혹하였으며, 이는 아담을 유혹한 사단의 무리였다.

아담이 사단에 미혹되어 그와 한 부류가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자손들은 대적들과 한 부류가 되었지만, 하나님의 승리는 대적들을 물리치심으로서 성취된다.


43  너희 민족들아 주의 백성과 즐거워하라 주께서 그 종들의 피를 갚으사 그 대적들에게 복수하시고 자기 땅과 자기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시리로다


노래의 말씀은 대적자들인 이방인의 구원을 선포한다.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을 구원에 참여시키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가나안에 들이시고, 예루살렘에 성전을 세우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서  구원을 성취하신다.

이스라엘을 조롱하고 대적하고 대적하였던 이들도, 이스라엘 백성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이 아무리 거역하고 다른 길로 간다고 하더라도, 예루살렘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실행하신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선택하신 것은 자신의 유업을 이을 백성으로 선택하신 것이며, 이스라엘 자손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자격이 갖추어진다.

유업을 이을 백성이 유대 이스라엘이나 아니면 신약의 신자들이냐는 톰 라이트의 새관점으로 말미암아 논쟁이 되기 시작한다.

톰 라이트의 주장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의 국가적 저주를 받음으로, 유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유업을 받는 나라가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심으로서 얻으신 적극적 순종의 의와, 아담의 범죄로 인한 인간의 죄값을 담당하신 십자가에서의 수동적 순종의 의를 이루시고서, 이 두 가지 의를 자신을 믿는 자에게 전가시키심으로서,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신자들을 부르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아담의 후손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 죄에 대한 것이며, 단순히 이스라엘의 행위적 죄를 위한 것으로 제한되지는 않는다.

톰 라이트의 주장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아가야 할 삶의 방식을 보여준 것이라고 하면서, 사역의 대상을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에 제한 시킴으로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 개념을 제거하여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무력화시키려는 것이다.

신명기의 주제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독수리의 눈동자와 같이 지키실 것이며, 만국을 벌하시면서, 찬양받으실 하나님의 구속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구속이 원수에 대한 보응과 더불어 이루어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사단에 대한 징계와 더불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미워하고 대적하였던 이방 나라는 궁극적으로 아담 안에서 이루실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방해하였던 사단의 세력과 한 무리였다.

원수에 대한 보복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사단의 세력을 물리치심으로서 이루셨다.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두 번째 아담으로서의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방해하기 위해서, 둘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처음 아담과 연계시키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이스라엘의 국가로 제한 시키며, 죄의 본질을 아담으로부터 이어진 죄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행위적 죄로 제한 시킴으로서, 그리스도는 구속주가 아니라 삶의 모범을 보여주신 분으로 본질을 바꿈으로서,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훼방하고 있다.


44  모세와 눈의 아들 호세아가 와서 이 노래의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말하여 들리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불러야할 이 노래는 원수에 대한 승리를 선포하는 노래이다.

이스라엘의 원수는 참 이스라엘되신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원수이며, 또한 그리스도의 모형인 아담을 대적하는 자였다.

대적자 원수는 비록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처음 아담을 실족시켜 자신의 수중에 넣었지만, 둘재 아담이신 그리스도는 처음 아담 안에서의 패배를 승리로 이끄셨다.



45  모세가 이 모든 말씀을 온 이스라엘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46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오늘 너희에게 증언한 모든 말을 너희의 마음에 두고 너희의 자녀에게 명령하여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
47  이는 너희에게 헛된 일이 아니라 너희의 생명이니 이 일로 말미암아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 차지할 그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생명은 삶과 동의어로서,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은 가나안에서의 삶의 조건이다.

성도에게 주어질 영원한 가나안에서의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하여야하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서, 말씀이 존재 자체에 새겨진 삶을 살게 될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
신명기 2018. 6. 25. 21:58

신명기 32장 15-33절 말씀 묵상



15  그런데 여수룬이 기름지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겼도다


하나님의 최선의 노력하심과 최상의 환경을 제공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외면한다.

하나님께서 제공해주시는 것이 부족한 때문은 아니다.

마치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빵을 얻기 위해서 예수를 따르는 무리를 보시는 예수님이, 이들을 떠나실 수 밖에 없으셨듯이, 이스라엘은 풍족한 공급이 있었기에 여호와 하나님을 섬겼지만, 일단 필요가 충족되면 더 이상 하나님을 따르려 하지 않는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이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셨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민족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계셨다.

필요를 위해서 따르는 이들은 배부르면, 혹은 필요가 충족되면 떠나게 마련이다.



16  그들이 다른 신으로 그의 질투를 일으키며 가증한 것으로 그의 진노를 격발하였도다


하나님의 마음과 이스라엘의 마음이 얼마나 어긋나 있는 상태인지를 볼 수 있다.

인간은 부모의 심정과 자식의 심정의 차이를 통해서 어렴푸시 이를 알 수 있다.



17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하지 아니하고 귀신들에게 하였으니 곧 그들이 알지 못하던 신들, 근래에 들어온 새로운 신들 너희의 조상들이 두려워하지 아니하던 것들이로다


필요에 의한 만남은 진실된 만남이 아니다.

이방신을 섬기는 것은 자신들의 필요를 위한 것이다.

인간은 물질적 공급 뿐만이 아니라, 속이고 거짓되고 음란한 것에 대한 소원을 이루고자 거짓된 것을 만들어 섬길 수 밖에 없다.

거짓된 신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부에 있는 것이다.

타락한 아담의 자손은 누구나 육신을 입고 있는 한에는 거짓된 신에 대한 소원이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울 수 밖에 없다.



18  너를 낳은 반석을 네가 상관하지 아니하고 너를 내신 하나님을 네가 잊었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상실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남으로서 자신들의 존립의 근거를 잃어버렸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와같은 속성은 모든 인간의 속성을 대변해주고있다.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도 자신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자들이라는 자신들의 정체성이 상실되어있다.


창조주 하나님을 잃어버린 현대인의 정체성은 포스트모더니즘으로 표현된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진리는 자기 자신이다.


아버지 하나님을 잊어버린 현대인에게 절대적 진리는 없으며, 이로 인하여 절대자의 존재도 들어설 수 있는 자리가 없다.


현대는 단적으로 상실의 시대라고 표현 할 수 밖에 없다. 


19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보시고 미워하셨으니 그 자녀가 그를 격노하게 한 까닭이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아들로 부르셨기에,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준비해주셨고, 완벽한 환경을 제공해주셨다.


더 이상 해줄 것이 없을 정도의 완전한 안식의 땅을 제공해 주셨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을 떠나게된다.


이스라엘 자손의 이와같은 모습은 모든 아담의 자손을 대표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오늘을 사는 현대인도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신들의 정체성이 상실되었다.


일반 은혜 가운데서의 삶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제공해주시는 오늘의 안식이다. 


하나님 아버지를 외면하는 이들의 진정한 모습은 사탄의 자녀일 뿐이다.


인간은 자신의 선택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존재이기에,  마땅히 하나님께 영광을 드려야한다.



20  그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얼굴을 그들에게서 숨겨 그들의 종말이 어떠함을 보리니 그들은 심히 패역한 세대요 진실이 없는 자녀임이로다

여호와 하나님의 한탄하심은 아버지로서 자녀에 대한 낙심이었다.


하나님의 낙심은 단순히 윤리와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불순종의 문제였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부르심은 아들에 대한 부르심이었으며, 장자에 대한 부르심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진실된 자녀이기를 바라셨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전에 이미 종말이 어떠한지 결론이 내려진 상태였다.


인간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가나안에서의 부패한 모습이 드러나지 않고는 자신들이 부패한 것을 인정하지 않기에 이를 증명해주시고자 가나안에서의 과정을 허락하실 수밖에 없으셨을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가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겠지만 가나안 생활에서 증명된 인간의 부패성은 인간이 존재론적으로 죄인임을 증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하나님 앞에 죄인인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갈수 없다.



21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내 질투를 일으키며 허무한 것으로 내 진노를 일으켰으니 나도 백성이 아닌 자로 그들에게 시기가 나게 하며 어리석은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일으키리로다

이방인인 이스라엘 자손에 대한 질투에서 구원이 시작되었다.

이방인들의 구원의 동기가 질투에 의한 것은 단순히 인간적인 표현만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신을 찾아 섬기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찾아 구원을 베푸시는 것과는 다르다.

이방인인 우리는 접붙여진 가지에 불과하다.

아브라함의 영적인 자손인 새이스라엘은 육적인 실패에 대한 대안이면서 실체가 되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인간의 열심 가운데 하나님께 향한 것은 좀처럼 찾아보는 것이 쉽지가 않다.

인간에게 하나님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현대인들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는 매우 위험한 상황에 처해있음을 인식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애써서 상황을 외면하려한다.


22  그러므로 내 분노의 불이 일어나서 스올의 깊은 곳까지 불사르며 땅과 그 소산을 삼키며 산들의 터도 불타게 하는도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외면하는 인간은 재앙 가운데 들어갈 수 밖에 없다.



23  내가 재앙을 그들 위에 쌓으며 내 화살이 다할 때까지 그들을 쏘리로다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는, 가나안의 이스라엘과 달리, 일반 은혜 가운데 일반 재앙이 나타난다.

현대인들은 이스라엘 자손 못지않게 하나님을 외면하는 생활을 한다.

모든 재앙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지만, 이는 인간이 심판받기에 합당한 모습을 갖춤으로서, 스스로 화를 자초한 것이다.



24  그들이 주리므로 쇠약하며 불 같은 더위와 독한 질병에 삼켜질 것이라 내가 들짐승의 이와 티끌에 기는 것의 독을 그들에게 보내리로다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할 때, 사람은 하나님이 감정도 없으시며, 진노하시는 분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마치 자판기처럼  신은 인간이 원하면 필요를 공급해 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분이시며, 분노하시는 분이시지만, 하나님의 분노로 인한 재앙은 인간들에게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게해주는 유익이 있다,

만약에 재앙이 없다면 문제를 문제로 인식할 수가 없다.

문제가 있는데도 아무런 문제가 나타나지 않거나 느끼지 못한다면, 더 두려울 수 밖에 없다.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다가오는 문명의 후유증들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시며,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어떠하였는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다.



25  밖으로는 칼에, 방 안에서는 놀람에 멸망하리니 젊은 남자도 처녀도 백발 노인과 함께 젖 먹는 아이까지 그러하리로다


하나님의 분노는 모든 이에게 임하는 것이다.

개개인이 자신은 개인적 잘못이 없다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모든 개인은 공동체적 책임이 있으며, 개인은 공동체의 운명과 긴밀하게 연관되어있다.

안팎에서 남녀노소 할것 없이 모든 이들이 모든 상황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은, 개인의 운명과 사회의 운명은 같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예외가 있을 수 없다.

사회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국가와 자신이 속한 사회를 위해서 기도해야하는 이유이기도하다.



26  내가 그들을 흩어서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에 대한 기억이 끊어지게 하리라 하였으나
27  혹시 내가 원수를 자극하여 그들의 원수가 잘못 생각할까 걱정하였으니 원수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수단이 높으며 여호와가 이 모든 것을 행함이 아니라 할까 염려함이라


인간이 가지고있는 즐거움 가운데 한 가지는 다른 이들의 낙담과 고통을 보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일본이나 중국이 잘못되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것이다.

아무리 잘못된 인간이라도 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이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신다.

하나님의 분노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이 잘못되는 것을 기뻐하면서, 더 나아가 하나님을 조롱하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영어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는 것은 거의 욕이 되었다.

이러한 욕은 그리스도인을 조롱하는 데서 나왔으며, 이제는 일상 용어가 되었다.

인간은 최소한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가 잘못되는 것을 즐거워해서는 안되며, 더 나아가 하나님에 대하여 함부로 말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인터넷 댓글을 보면, 현재의 상황이 바로 이러한 상황이다.

성도는 공동체적 책임을 가지고 이러한 자들을 비난하기에 앞서서, 이러한 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이다.

인간에게는 인간을 미워할 자격과 권리가 없다.



28  그들은 모략이 없는 민족이라 그들 중에 분별력이 없도다
29  만일 그들이 지혜가 있어 이것을 깨달았으면 자기들의 종말을 분별하였으리라

자신들의 종말이 어떠할 지를 알면 그렇게까지는 안할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논리로 자신들을 합리화시키지만, 그들의 논리는 자기 중심적인 사고에서 나온 헛점투성이의 논리이다.

이들은 천국을 보여줘도 거부할 이들이다.

사실 가나안의 이스라엘 자손도 천국을 거주하는 이들이나 마찬가지 였다.


30  그들의 반석이 그들을 팔지 아니하였고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주지 아니하셨더라면 어찌 하나가 천을 쫓으며 둘이 만을 도망하게 하였으리요
31  진실로 그들의 반석이 우리의 반석과 같지 아니하니 우리의 원수들이 스스로 판단하도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의지하는 반석은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의지하는 반석은 인간적으로 설득력이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불신자가 보기에 어리석은 자들이다.

하지만 이들과 논쟁할 필요는 없다.



32  이는 그들의 포도나무는 소돔의 포도나무요 고모라의 밭의 소산이라 그들의 포도는 독이 든 포도이니 그 송이는 쓰며
33  그들의 포도주는 뱀의 독이요 독사의 맹독이라


세상이 의지하는 것들은 결국 독이 된다.

중국은 급격한 산업화를 통해서 힘을 키웠지만, 그들의 대기는 항상 심각한 미세먼지로 뒤덮여있다.

그들은 힘을 키우면서 독을 마시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미세먼지는 보통 80이상 올라가면 머리가 아프기 시작한다.

중국의 미세먼지는 80이면 좋은 상태이고 보통 200에서 1000이상이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미세먼지는 눈에 보이는 한 가지 현상이지만, 휴대폰을 비롯하여, 가상 현실등 첨단 기술은 하나님에 대한 감각을 상실시키는 독성이 있다.

자연과 동떨어진 도시문명은 인간으로하여금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빼앗아 간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은, 종종 숲속을 산책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깊은 생각에 빠져들면서, 그때 그때 생각난 것들을 메모해서 옷에다가 꼽아놓고서 집에와서 정리하곤했다.

현대의 도시 공간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환경이다.

지하철 안에서나 운전하면서 묵상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도시에서의 노력은 파멸로 달려가는 기차안에서 거꾸로 뛰는 것과 같다.

모든 시스템이 경쟁과 힘을 향하여 달리는 도시구조에서 현대인은 독을 마실 수 밖에 없다.


posted by Wonho Kim
:
신명기 2018. 6. 24. 19:15

신명기 31장 30절- 32장 14절 말씀묵상



30  그리고 모세가 이스라엘 총회에 이 노래의 말씀을 끝까지 읽어 들리니라
1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내가 말하리라 땅은 내 입의 말을 들을지어다 


이스라엘 총회는 에덴에서의 하나님의 산에서의 총회를 기억하게한다.


에덴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곳으로서 하나님의 다스림이 이 땅에 선포되는 곳이며, 이 땅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곳이었다.


아담은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선언하는 왕으로서, 그리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제사장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


이스라엘 총회에서의 모세의 선포는 에덴에서의 아담의 선포를 재연하고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되는 모세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에덴의 하나님의 산에서  선포되었던 하나님의 말씀이 재연되는 것이었다.


에덴에서 선포되었던 하나님의 말씀은 이 땅에 대한 하나님 나라의 선포였으며,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서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왕권의 선포하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에덴을 지켜야만 했었다.


이는 에덴에서의 아담에게와 마찬가지로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되고 있는 것이다.


에덴에서 선악과 금령이 선포되었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 즉 율법은 궁극적으로 이 땅에 대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었다.


모세는 원론적으로 처음 창조의 때를 기억하며 하나님의 새창조를 선포하고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총회에서 선포되는 모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하늘이 귀를 기울이고 땅이 말을 들을 것을 선포함으로서 하늘과 땅의 연합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모세가 기록한 창세기 1장 1절의 천지는 하늘과 땅, 즉 창조주 하나님과 천사들의 거처가 되는 비가시적인 하늘과 하나님이 지으신 각종 피조물들의 거처가 되는 가시적 세계인 땅을 가리키고있다.


하나님의 창조의 궁극적인 목적은 비가시적인 하늘과 가시적인 땅의 연합에 있다.


이러한 연합은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왕권이 아담을 통해서 선포됨으로서 완성이 되었어야했는데, 아담의 불순종은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는 일에 실패를 가져온 것이다.


이스라엘 총회에서 선포되는 모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의 순종을 통한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왕권의 선포가 요구되는 것이었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순종은 에덴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통한 하늘과 땅의 연합에 궁극적 목적이 있었다.


모세의 입에서 선포되는 율법은 하늘과 땅을 연합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재창조가 이 땅에 선포되는 것이었다.


모든 피조세계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구원을 이루면서 또한 심판에 대한 선포인 것이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피조 세계에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피할 수도 없으며, 피해서도 안된다.


선포되어지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인간이 자신의 행적을 내세우는 것은 초라한 것일 수 밖에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지키려는 열심만큼이나 인간은 문명을 발전시킴으로서 자신들을 완성시켜나가려고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행함으로 자기 의를 이루려는 것과 같이, 인간의 문명의 발전은 하나님의 왕권에 대한 선포라기보다는 하나님을 배제한 인간이 스스로가 왕이 되기 위한 발버둥으로 보인다.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거스르면서 발전을 추구하는 인간의 모습은 어느덧 하나님의 왕권을 마주하는 반대편에 서있다.


인간의 문명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서, 하나님과 관계없이,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인 독립된 세계를 만들어간다.


스스로 만든 거대한 도시 문명의 톱니바퀴에 맞물려 돌아가는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스스로 교만해지면서, 스스로가 만든 거대한 톱니바퀴에 끼여 파멸의 길에 들어 설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율법에 대한 집착만큼이나 고도화된 도시 문명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유대인들의 발악처럼 점점 더 하나님을 배제하고 인간만이 우뚝서려고한다.


인간이 추구해야하는 진정한 발전은 눈에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 하늘과 눈에 보이는 가시적 땅의 연합을 위한 방향성을 가져야한하며 이는 오직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로만이 가능하다.


성도는 하늘 나라에 속한 백성이면서 동시에 이 땅을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다.


성도의 삶은 하늘 나라 백성으로서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2  내 교훈은 비처럼 내리고 내 말은 이슬처럼 맺히나니 연한 풀 위의 가는 비 같고 채소 위의 단비 같도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궁극적으로 사람을 위한 것이다.


모세는 창세기 2장 5절에서 땅을 갈 사람이 없었으므로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다고 기록하고있다.


이는 창세기 1장의 연대순과 모순이 되는 것 같지만 2장에서의 기록은 연대 순이라기 보다는 창조의 중심에 사람이 있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땅을 경작할 아담을 창조하심으로서 땅에 비를 내리시고 들에 초목이 나게하시며 밭에 채소가 나게하셨다.


에덴에서와 마찬가지로 가나안에 입성할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모세의 입을 통하여 교훈을 비같이 내리고, 모세의 말이 이스라엘 가운데 이슬을 맺히며, 연한 풀 위의 가는 비같이, 그리고 채소 위의 단비같이 내리게한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며 내리셨던 단비와 같이 가나안에 들어갈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의 입을 통하여 말씀의 단비를 내리신다.


모세의 입에서 선포된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서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한 단비로서 이스라엘을 흠뻑 적시는 것이었다.


범죄하기 이전의 아담과 달리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죄에 오염된 이들었기에 모세의 입에서 나오는 단비는 가시와 엉겅퀴를 내게 되었으며, 불타는 가시덤불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께 불로 심판을 받아야만 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토라를 외우면서, 격한 토론을 해가면서까지 자신들의 율법적 유대주의를 지켜나가고있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죄성을 인정할 수 없기에,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있다.


모세의 입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처음 창조와 아담의 범죄를 기억하기 함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인으로 부르심을 받았음을 기억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스라엘 가운데 선포되는 하나님의 율법과, 또한 세상 모든 이들에게 선포되는 자연법은, 궁극적으로 처음 창조의 때와 아담의 범죄를 기억하게 함으로서, 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서야할 당위성을 말해주고있다.


모세의 입에서 나오는 교훈은, 율법과 하나님의 자연법을 통해서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은혜의 법으로 이어져야한다.


율법과 자연법이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는 특별법으로 이어질 때 하늘의 생명에 이를 수가 있다.


땅에서의 풀과 채소가 비로 인하여 소생되어지는 것과 같이, 이 땅에서 경험되어지는 생명력들은 궁극적으로 하늘의 생명을 향하는 모형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말씀을 근거로 사는 성도의 삶은 천국에서의 삶이 이 땅에서 모형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모세 율법은 자연법의 원형이다.


자연을 지으신 하나님의 창조 원리가 모세 율법에 그대로 담겨있다.


모든 인간은 물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살아가는 성도는, 하나님의 자연법을 근거로 살아가야한다.


자연법을 거스르고, 자연법의 원리를 무시하면서 발전시켜나가는 인간의 문명은 필연적으로 인간을 파멸로 이끌 것이다.


퀴어축제, 동성결혼, 가상증강현실, 로봇 섹스등등, 말로 다 담을 수 없는,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역행하는 인간의 행태는 비같이 내리고 이슬같이 맺히는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 도전하는 인간의 교만한 행태들이다.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처음 아담의 실패를 기억하고, 모세의 입에서 선포되는 자연법으로서의 율법을 통하여 자신의 죄성을 생각하면서,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께 나아가야할 것이다.



3  내가 여호와의 이름을 전파하리니 너희는 우리 하나님께 위엄을 돌릴지어다 


여호와의 이름을 전파하는 것은 여호와의 왕권을 선포하는 것이다.


백성은 선포되어지는 왕에게 모든 위대한 일들의  근원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임을 인정해야한다.


가나안 입성을 앞둔 광야에서 선포되어지는 모세의 말은, 흑암 가운데서 세상을 창조하셨던 하나님의 왕권이 아담을 통하여 세상에 선포되어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되어진다.


하지만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에덴에서의 하나님의 왕권이 손상을 입었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은 가나안에서의 하나님의 왕권에 손상을 입히게된다.


하지만 하나님의 왕권은 포기되어질 수 없다.


처음 아담과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손상된 하나님의 왕권은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으로 말미암아 성취되어진다.


성도의 마땅한 도리는 하나님의 왕권에 대한 선포와 모든 공로를 하나님께 돌리는 찬양과 겸손이다.


타락한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께 위엄을 돌려드릴려고 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 세계에서 살아가면서도 정작 하나님 여호와를 애써 외면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려고도하지 않는다.


피조 세계의 완벽한 모습과 놀라운 운행 원리에는 감탄하지만, 정작 이를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을 찾으려고도하지 않는다.


인간의 이러한 하나님을 외면하는 모습은 아담의 타락 말고는 기원을 찾을 수가 없다.


모세의 말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모든 일의 공로를 하나님께 돌리라는 말도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하지 않는 인간이 하나님께 대하여 범죄하고 있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같이 스스로 영광을 취하려는 죄의 속성을 가지고있다.


이는 성도일지라도 마찬가지이다.


성도는 매사에 자신을 자랑하려는 교만한 태도를 조심해야한다.



4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 


모든 피조 세계의 존재 근거는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한다.


모든 피조 세계는 하나님의 터 위에 세워졌기에 견고하다.


하나님의 터 위에 세워진 피조세계는 물리적인 견고함 뿐만이 아니라 정의와 진실과 참되심과 공의와 올바름이라는 하나님의 속성이 반영되어있다.


처음 창조 때와 달리 아담의 불순종으로 타락한 인간 세계는 더 이상 하나님의 터 위에 서있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세상에서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자신의 터 위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신다.


이스라엘이 입성하게되는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직접 세우신 견고한 땅으로서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드러내며 정의와 진실과 공의가 실현되는 곳이어야했다.


가나안은 하나님께서 반석이 되셔서 완전하게 세우셨던 곳이지만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의 실패는 에덴에서 아담의 실패를 재연한다.


가나안에서의 실패는 에덴에서의 실패를 기억하게해주며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아담의 불순종을 기억하게해줌으로서 둘째 아담을 소망하게해준다.


모세의 선포는 행위 언약으로서의 아담 언약을 기억하게 해주면서 동시에 은혜 언약의 주체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준비하게해주는 반석의 터를 닦는 작업이었다.


교회는 반석되신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진 하나님 나라로서,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같이 완전을 추구해야하며, 정의와 진실과 하나님의 공의가 선포되어지는 곳이 되어야한다.


외형적인 교회는 에덴과 가나안과 마찬가지로 타락한 인간의 모습을 경험하는 파멸의 장소가 되어가고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진정한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서 점진적으로 완성되어가고있다.


5  그들이 여호와를 향하여 악을 행하니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흠이 있고 삐뚤어진 세대로다

정의롭고 진실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의 반석 위에 세워진 인간은 거짓 가운데 하나님을 대적한다.


악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지으시지도 읺으셨으며, 하나님의 형상에는 어떠한 악도 담겨있지 않다.


하나님께는 인간이 하나님께 대하여 악을 행할 어떠한 이유도 없다.


하지만 인간은 하나님께 대하여 악을 행한다.


인간의 가장 큰 악은 하나님의 왕권을 거부하며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이다.


세상은 하나님을 왕으로 생각하지도 않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더라도 이를 악이라고 부르지도 않으며 이것이 죄라고도 말하지 않는다.


사람이 생각하는 악과 하나님께서 보시는 악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아담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악을 행하였음에도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거나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다.


가인도 마찬가지였으며 라멕은 그 정도를 더하여 더욱더 악을 보편화시켰다.


노아 홍수 때 인간의 악이 관용한 것의 근본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그 육신의 욕심에 이끌려 사람의 딸들과 결혼하여 하나님을 배제하고 자기들만의 세상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즐거움에 취하여 무엇이 문제인지 인식을 못하였겠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이들의 악은 홍수로 쓸어버릴만큼이나 심각한 것이었다.


사람의 근본적인 정체성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왕이시면서 동시에 아버지이시다.


자신의 아버지를 망각하고 하나님의 왕권을 부정하는 일 자체가 가장 큰 죄악이다.


모세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죄악을 지적하고있다.


이러한 죄악은 하나님이 창조세계의 반석되심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이기에, 그리스도께서는 손수 반석이 되셔서 완전한 순종으로 하나님의 왕권을 회복하고 아들로서의 모든 신자의 맏형이 되신 것이다.



6  어리석고 지혜 없는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네 아버지시요 너를 지으신 이가 아니시냐 그가 너를 만드시고 너를 세우셨도다 


반석되시는 완전하신 하나님께 악을 행하는 어리석은 백성들이 바로 모세의 눈 앞에 있는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들이라고 모세는 선포한다.


모세는 가나안 입성을 앞둔 가장 희망적인 순간에 가장 절망적인 선포를 한다.


광야에서 보여주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이 가나안에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날 것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광야에서의 척박함이 가나안에서의 풍요로 바뀌는 것이 아니다.


자녀에게 아무리 좋은 환경을 제공해준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훈하지 않으면 죄성을 가진 인간의 타락만 가속화시킬 뿐이다.


인간은 환경이 바뀐다고 근본이 바뀌지는 않는다.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담이 타락한 후에 인간의 아버지는 사탄이 되었으며 인간은 독사의 자식이 된 것이다.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행함의 문제 이전에 신분의 문제에 있다.


유대인들이 토라를 외우고 율법을 지키며 많은 학문으로 자신을 치장하고 행함으로 자신을 완성하려하여도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죄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근본적인 문제로 인한 것이다.


이는 현대 신학도 마찬가지이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을 비롯하여 많은 현대 신학들은 인간의 문제에 대하여 존재론적인 접근이 아닌 행위론적 접근을 함으로서 문제의 핵심을 외면하고있다.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외면은 인간의 희망사항일 뿐이며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육신의 속성에서부터 출발된 생각들이다.


하나님의 새창조는 태초에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듯이  인간의 완전히 파괴된 상태에 새 생명을 불어넣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는 인간을 개조하거나 고쳐서 쓰시는 것이 아니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는 그리스도를  새로운 삶의 본을 보여주신 분으로 묘사함으로서 인간의 행동 방식을 고침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주장을 한다.


하지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리 광야에서 훈련을 받았다고하더라도 가나안에서 부패할 수밖에 없음을 알고있었다.


모세의 절망에 대한 선포는 구원자 그리스도를 예비하는 희망의 선포인 것이다.



7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하리로다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지는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른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과거에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지만 현대에 와서는 모든 정보 매체를 통해서 인간의 역사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현재는 과거의 역사를 통해서 판단할 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과거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 종착역은 아담에 이른다.


인간의 부정적 상황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은 것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근본적인 접근을 하기를 원한다.


모세는 율법을 통하여 축복과 저주를 선포하지만, 이미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인간에게는 저주 밖에 적용될 수 없음을 알고있었다.


모세는 가나안 입성에 동참할 수 없었지만 자신의 영원한 안식처는 눈에 보이는 가나안이 될 수 없음을 알고있었으며, 오직 둘째 아담으로 오실 그리스도 안에서만 안식할 수 있음을 알고있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좀 더 근원적인 접근을 하여서 자신의 존재가 아담 안에서 이미 죽은 존재인 것을 인식하고 그리스도를 소망하기를 바랬을 것이다.



8  지극히 높으신 자가 민족들에게 기업을 주실 때에, 인종을 나누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백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에 순복해야한다.


민족과 인종을 정하시는 것은 전적으로 왕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이다.


인간이 처하게될 환경은 태어날 자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노아의 아들들의 운명 또한 노아의 예언 가운데 결정되었으며, 모든 민족은 그 근원이 셈과 함과 야벳 가운데 한 가지에 속하여있다.


야곱과 에서도 태어나기 전에 그 기업과 백성들의 경계가 결정되었다.


자식이 부모를 선택하여 태어날 수 없는 것과 같이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정하심 가운데 자신의 위치에서 살아가야한다.


모든 인간은 그 근원이 아담으로부터 말미암았으며, 또한 아담의 범죄의 영향에서 자유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와 아담의 범죄를 기억하고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야할 것이다.


9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가 택하신 기업이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야곱을 기업으로 택하신 것은 하나님의 재창조를 위한 것이었다.


처음 창조시의 아담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기업이었다.


아담이 순종하는 가운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였더라면 땅에 사는 모든 인류는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아담의 후손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었다.


범죄한 아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세우시기 위해서 야곱을 택하셨다.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체성은 선택받은 야곱의 자손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이었다.


야곱의 자손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아담에서와 마찬가지로 순종이 요구되는 조건적 하나님 백성이었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기 위해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 요구 된다는 것을 알고있었지만  실상은 그들에게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고있었다.


모세의 말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백성을 염두에 둔 선포였다.


성도의 정체성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달리 하나님의 요구 조건이 충족된 하나님의 백성이다.


모세의 입에서 선포되어지는 말씀은 더 이상 성도들에게 요구되어지는 조건이 아니라 성도들이 맺어야할 결실들이다.


성도는 모세의 말이 실천되어지는 삶을 살아야할 의무가 지어지는 것이다.


10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하나님의 새창조를 위해서 선택되어졌던 이스라엘에게는 처음 창조의 환경이 반복적으로 나타나고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해있던 환경은 처음 창조시의 혼돈의 땅과 같은 황무지였다.


생명력이 상실된 황무지는 처음 창조시의 생명의 창조 이전의 혼돈과 공허의 땅을 기억하게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신 것은 혼돈 가운데서의 하나님의 창조를 기억하게하면서 이스라엘 가운데 하나님의 새창조를 이루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는 황무지 한 가운데서 호렙산에 나타나시어 혼돈 가운데서의 창조 사역을 시작하신다.


시내산은 황무지 한 가운데 있는 황량한 산이라는 의미에서 호렙산으로도 불리운다.


비록 죄가 없었던 아담은 평안했던 에덴에서 짐승의 유혹으로 불순종하였지만, 이미 아담 안에서 불순종하여 죄인이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덴의 환경과 달리 혼돈의 땅에서 짐승의 유혹과 싸워야만 했다.


광야에서의 짐승과의 싸움은 이미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보여줄 뿐이었다.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는 처음 혼돈 뿐만이 아니라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짐승의 영향력에서 자유 할 수 없었던 죄인들이 다시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부르심을 받는다는 것이 처음 창조보다도 더욱 힘든 여정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있다.


이는 처음 아담에서 요구되었던 능동적 순종과 달리, 그리스도의 구원을 위한 순종이 율법에 대한 능동적 순종 뿐만이 아니라 십자가에서의 희생이라는 수동적 순종이라는 두 가지 성격의 순종이 요구되는 것을 보여준다.


모세는 처음 창조시에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던 땅에서 수면 위를 운행하신 성령의 창조 사역을 기억하게하면서 이스라엘 가운데 운행하시는 성령의 창조 사역을 서술하고있다.


비록 아담 안에서 이미 타락한 존재였지만 혼돈의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호위하시고 보호하시는 성령의 창조 사역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추가적인 희생을 통하여 완성되어지는 것이었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희생이라는 값으로 사신 존재이다.


성도는 처음 창조시의 아담과 달리 하나님의 전적인 사랑과 희생으로 태어난 존재이다.


성도의 정체성은 처음 아담과 달리 하나님의 희생적 사랑 안에서 찾아야한다.



11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독수리가 보호하는 보금 자리는 아무도 간섭하거나 위협할 수 없다.


태초에 혼돈 가운데서 창조를 위해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를 운행하셨던 것과 같이 성령은 이스라엘 백성들 위에 운행하시면서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신다.


홍수로 인하여 모든 이들이 멸절된 상태에서 노아 가족을 보살피시고 바람으로 물을 말리시고 아라랏산에서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신 성령께서는 다시 죽음으로 뒤덮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 가운데 구원하신다.


독수리의 새끼들로 묘사되고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령의 보호하심으로 죽음이 뒤덮였던 애굽 땅에서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애굽의 군대와 싸우시고, 바람을 일으켜 홍해를 가르시고, 짐승이 우는 황무지 광야에서 새끼 위에 너풀거리는 독수리와 같이 신발도 헤어지지 않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셨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새창조의 시작이었으나, 이미 아담 안에서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순종함으로서 멸망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에초부터 불순종의 자녀들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되었던 것은 순종이 아니라 자신들의 죄성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구원을 바라게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세 언약은 표면적으로는 행위 언약이었으나 그 본질에 있어서는 은혜 언약의 속성을 내포하고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을 인도하셨던 성령의 사역은 단순한 실패가 아니라 이미 아담 안에서 불순종한 죄인들에게 죄를 깨닫게 함으로서, 그리스도를 예비하시는 새창조의 사역이었다.


성도에게는 처음 아담과 달리 순종이 요구되지는 않는다.


성도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죄를 깨닫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이르게 된 것이다.


성도에게 요구되었던 믿음은, 인간은 아담 안에서 불순종할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셔서 죽으시고 순종으로 의를 이루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12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창조주이시며 우리를 지으신 분이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어도 본능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대신하는 자신에게 좀 더 편한 신을 만들어 숭배하려고한다.


출애굽은 인간의 처음 창조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으셔서 자기 백성을 만드시는 하나님의 창조 과정이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고자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기를 원치않았다.


이적과 기사의 여러 증거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셨고, 시내산의 임재를 통하여 백성들 가운데 나타나시어 이스라엘 백성의 왕으로 등극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을 섬기는 죄를 범하였다.


이는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인간의 마음의 속성이 체질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의 속성에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만물의 질서와 창조 세계의 놀라운 조화는 창조가 오직 한 분 창조주로 말미암았음을 보여주고있지만 인간은 체질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하나님을 외면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지만, 그 이전에 인간은 사탄의 속성이 더 편한 체질로 바뀌어있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인간은 일상에서 사탄의 속성들을 즐기고있다.


타인을 미워하는 것과 복수심에 불타는 것과 게임을 즐기는 것과 타인의 불행을 즐기는 것과 자신의 욕심에 집착하는 것과 기타 등등… 인간의 삶의 많은 원동력들이 실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 즐거움을 주는 낙들의 상당 부분이 하나님의 속성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속성들은 대부분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탄에 종속된 결과로 나타나는 것들이다.


나무들에 박혀있는 가시들이 처음 창조시에 없었던 것이 생겨났듯이 인간은 타락과 더불어 체질이 바뀐 것이다.


거듭난 체질이 아니고서는 여호와 하나님만이 자신의 주인이시며 자신을 인도하신 분이라고 고백을 할 수가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체질적으로 거듭나는 과정이 없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을 주로 고백할 수가 없다.



13  여호와께서 그가 땅의 높은 곳을 타고 다니게 하시며 밭의 소산을 먹게 하시며 반석에서 꿀을, 굳은 반석에서 기름을 빨게 하시며 


땅의 높은 곳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산의 지상적 표현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땅의 높은 곳에 왕으로 등극하셔서 세상을 다스리신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산인 시온산에서 다스리시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온에 참여케하신다.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땅의 높은 곳인 시온산에 임하신 하나님께 제사들 드리며 하나님의 거룩함에 참여할 수 있었다.


시온산은 에덴에서 하나님께서 임하셨던 산이 재현된 것이다.


모든 강의 근원이 되는 높은 산이 있었던 에덴은 하나님의 산, 즉 하르 마게돈의 장소로서 하나님의 총회가 열렸던 곳이다.


하나님의 산은 땅을 다스리는 여호와의 총회가 열렸던 곳이며, 하나님과 천사들이 거하였던 곳으로서 하늘과 이 땅의 피조세계를 연결하는 곳이었다.


하나님께서 땅의 높은 곳을 타고 다니게 하실 분은 이 땅의 왕으로서 하나님의 왕권을 땅에 선포할 수 있는 존재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로서 이 땅에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며 하나님의 총회에 참여할 자로 부름을 받았지만, 아담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에덴에서 쫓겨나고 생명에 이르는 길이 막힘으로서 더 이상 땅의 높은 곳에 거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땅 위의 모든 생물이 죄로 말미암아 홍수로 멸망 당했지만 노아는 땅위의 높은 곳인 아라랏산에서 새로운 세상을 시작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아담의 범죄로 체질이 바뀐 인간은 땅의 높은 곳에 거할 자격과 능력이 없었다.


모세의 입에서 나오는 선포는 땅의 높은 곳을 다닐 하나님의 백성, 즉 이 땅을 다스릴 왕으로 부름을 받을 자들을 세우기 위함이었다.


이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되었으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총회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으며, 이는 모세를 비롯하여 시내산에 초대받은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하나님의 발등상에서 먹고 마시면서 하나님의 산에 참여하는 경험을 하게함으로서, 이 땅에서 실현될 하나님의 나라를 미리 맛보았던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초청을 받은 거룩한 이들로서, 성도의 삶은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시는 소산을 먹는 삶이며, 반석되신 그리스도로 인한 기쁨을 누리는 삶인 것이다. 



14  소의 엉긴 젖과 양의 젖과 어린 양의 기름과 바산에서 난 숫양과 염소와 지극히 아름다운 밀을 먹이시며 또 포도즙의 붉은 술을 마시게 하셨도다


가나안에서 경험하게될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고의 열매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풍요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는 에덴의 상황을 표면적으로 재현하고있는 것이다.


아담은 범죄 후에 수고하고 땀을 흘려야만 소산을 먹을 수 있었지만, 타락 이전에는 에덴에서의 풍요를 만끽하고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서 누리게될 풍요의 상실은 에덴에서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은 결과를 기억하게하는 것이었다.


인생이 누리는 풍요와 상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창조의 풍요로움을 경험하게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죄성을 깨닫게 해준다.


인생이 죄가 없는 상태라면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시는 풍요는 영원한 축복의 한 부분이겠지만, 죄악된 인간에게 주어진 풍요는 파멸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죄 가운데 사는 인생은 풍요 가운데 에덴을 기억하며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풍요를 바라보아야할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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