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장'에 해당되는 글 3건
- 2018.01.05 :: 사도행전 2장 37-47절 말씀 묵상
- 2018.01.03 :: 사도행전 2장 14~36절 말씀 묵상
- 2018.01.02 :: 사도행전 2장 1~13절 말씀 묵상
사도행전 2장 37-47절 말씀 묵상
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복음은 구걸하는 것이 아니다.
사도들이 전한 복음은 죄에 대하여 분명한 선포를 하였다.
어떤 이들은 복음을 마치 보험을 드는 것에 비유하면서 권하는데 이는 성경적인 방식이 아니다.
복음은 죄에 대한 심각한 인식에서부터 출발하여야한다.
한국교회의 타락은 죄에 대한 인식을 거부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교회의 설교들은 죄에 대한 선포가 없기에 그리스도의 복음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 할 수가 없다.
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죄사함의 결과로 성령을 받지만 사람들이 마음에 찔림을 받고 회개하는 것도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할 수가 없다.
회개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신자는 어느 누구도 자신을 자랑 할 수가 없다.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베드로는 먼 데 사람, 즉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을 것을 알고있었으며 이를 직접 경험하게된다. (행 8:14)
사도행전은 우리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게된 시초를 기록한 것이라는 점에서 많은 의미가 있다.
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유대인들에게 패역한 세대라고 말하는 것은 자칫 목숨의 위협을 받을 수 있는 말이었음에도, 이스라엘의 실질적 상태를 직언함으로서, 베드로는 담대함을 보여주었다.
이는 그리스도를 부인하던 상황과 확실하게 다르다.
어떤 이들은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함으로서 담대해졌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담대함은 인간의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가 행하는 표적과 기사도 베드로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며, 베드로의 변화는 가장 놀라운 표적과 기사 가운데 하나로서 성령의 창조 사역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복음은 윤리나 도덕도 아니며,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복음은 성령의 창조 사역의 근거로서 타락한 세대에서 새로운 창조가 시작되었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41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한 날에 삼천이나 되는 사람들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너무나도 힘든 출애굽의 과정을 겪었고 끊임없이 불평을 하였지만, 베드로의 세례를 받은 이들은 전혀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해 나아가고있었다.
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교제하고 떡을 떼며 기도하는 것은 이미 교회가 형성되었음을 나타낸다.
말씀이 선포되고 성령의 역사가 있는 곳에는 교회라는 실질적 공동체가 나타나게 된다.
이렇게 형성된 교회가 바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사도들 가운데 일어나는 기사와 표적은 성령의 창조 사역의 증거들이다.
사도시대가 끝나고 정경으로서의 성경이 갖추어진 이후에는 더 이상의 사도의 역할이 필요없으며, 사도들의 역할이 끝났기에 기사와 표적도 나타나지 않는다.
기사와 표적은 말씀이 정립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도들에게 권위를 입혀주기 위함이다.
오늘날 일어나는 신사도운동은 성경말씀에 더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는다면서 성경 말씀의 권위를 훼손시키고있다.
신사도 운동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다.
부흥이 일어나는 모든 곳에 거짓 영의 역사도 같이 일어나고있다.
이들은 한결같이 성경의 권위를 훼손한다는 점에서 영적 분별력이 요구된다.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현재도 이러한 일이 가능할까?
이러한 일도 일종의 기사와 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는 이와같은 기사와 표적을 좀처럼 찾아 볼 수 없다.
현재는 사도의 시대가 아니지만 이들의 행함을 본받아 지혜롭게 행할 필요가 있다.
이단들은 이 말씀을 근거로 모든 재산을 자신들의 공동체에 바치기를 강요하지만 이러한 강요는 분명 성격상 신사도 운동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다.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이 시대는 아직 교회의 형태가 갖추어지지 않았기에 성전에서 모였지만 교회와 성전을 혼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성전이라는 용어를 붙이면 거룩함과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는다.
오늘날 교회 건물을 지으면서 성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목회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 하나님을 팔아먹는 가룟 유다와 같은 삵군이다.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이들은 삶으로 복음을 전하고있다.
성령의 역사는 추상적이거나 이론적인 것을 넘어서 실질적 삶의 열매로 나타난다.
이는 사회의 근심이 된 한국의 교회와 대조를 이룬다.
사랑이 식어진 한국교회의 상황은 단지 교회의 상황이기 이전에 이 세대가 얼마나 패역한 세대인가를 보여주고있는 것이다.
세균의 내성이 강하지면 새로운 항생제를 개발하여야 하듯이 이 세대가 얼마나 악한지를 인식할 때에는 교회도 더욱 영적으로 무장 하여야한다.
하지만 현재의 교회는 전혀 방어능력을 가추지 못한 무력함을 보여주면서 허무하게 무너져가고있다.
이는 일차적으로 목회자들에게 책임이 있다.
이 시대는 어느 시대보다도 더욱 영적으로 무장되고 숙련된 목회자가 필요한 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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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장 14~36절 말씀 묵상
14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비록 베드로는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여러가지로 부족한 모습을 보였어도 이번 설교를 통하여 얼마나 베드로가 성숙되었는지를 보여주고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성격대로 사용하시지만 이번 베드로의 설교는 단지 성격에 의한 것만이 아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잘못을 깊이 깨달은 사도로서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대위임령에 대한 소명으로 사람들 앞에서 설교하는 것이다.
베드로의 증언은 단지 베드로의 성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함께 하심으로 인한 성령의 사역이다.
비록 부족한 성격이어도 수동적인 성격보다는 능동적이 성격이 낫다고 할 수 있다.
베드로나 바울이나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의 열심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고 있음을 본다.
인간은 누구나 시행착오와 실패를 경험하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앞에서 세워지는 과정일 뿐이다.
15 때가 제 삼 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오해에 대해서는 분명한 설명이 필요하다.
오해나 잘못된 이해는 모든 영역에서 일어나기 마련이다.
특히 성경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 대해서는 분명한 입장표명이 필요하다.
신학자들의 변증도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 꼭 필요한 논술 방식이다.
16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17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18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19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20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말세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말세에 하나님의 영이 모든 육체에 부어주신 것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모든 육체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다시 하나님과의 연합이 시작된 것이다.
예언하고 환상을 보고 꿈을 꾸는 것은 이 땅에 하나님의 영이 임함으로서 하나님과의 연합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사건이다.
오순절 성령의 강림은 요엘 예언의 성취를 말한다.
말세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 구원이 허락된 은혜의 시대이다.
22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마음이 굳은 자들이기에 권능과 기사와 표적으로 인하여 마음을 돌이키지는 않겠지만 마음의 찔림은 있을 것이다.
출애굽의 과정에서 증거되었듯이 타락한 이들은 하나님을 경험한다고하여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나아가지는 않는다.
다만 이들에게 성령이 임하여야만 마음에 찔림을 받고 회개할 수가 있는 것이다.
오순절 성령의 임하심은 마음에 찔림을 받은 이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허락하시는 은혜의 역사이다.
믿음은 증거를 통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얻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23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마음이 굳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권능과 표적과 기사를 보았음에도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박았다.
이는 타락한 아담의 자손이 어떠한 상태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은 결코 스스로의 힘으로는 그리스도를 믿을 수가 없다.
오직 하나님에 은혜가 인하여야만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성령이 임하기 전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리스도를 용납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그리스도를 배신하고 떠났다.
베드로는 예수를 죽인 자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인 것을 분명히 말하고있다.
유대인을 변호하는 톰라이트는 예수를 죽인 이들이 로마이며, 예수는 로마로 대변되는 세상 권력을 향하여 어떻게 희생하여야하는지 본을 보여주신 분으로 왜곡시키고있다.
하지만 베드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로마의 손을 빌려 그리스도를 죽였음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24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그리스도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는 것은 에덴에서 약속된 영원한 안식을 근거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마지막 아담으로서 처음 아담에게 에덴에서 약속되었던 영원한 생명을 상급으로 받으신 것이다.
처음 아담이 하나님과의 행위 언약 안에 있었듯이 그리스도의 순종의 행위는 행위 언약에 대한 응답이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부활은 행위 언약에 대한 공로적 축복으로 인한 것이었다.
25 다윗이 그를 가리켜 이르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26 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혀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도 희망에 거하리니
27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28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 주 앞에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므로
29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30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31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베드로는 다윗의 시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시16:8)”를 인용함으로서 다윗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설득하고있다.
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살리신 것은 에덴에서 요구되었던 순종의 성취에 따른 종말론적 안식이라는 선물이며, 이는 역사적 이스라엘 안에서 다윗을 통하여 증거되고있다.
사도들은 단지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다는 사실만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 약속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증거하는 것이다.
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성령은 그리스도의 사역, 즉 처음 에덴에서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사역을 충족시키심으로 안식을 성취하셨기에 성령의 창조 사역이 이 땅에서 시작될 수 있었다.
성령의 사역은 그리스도의 의를 근거로 하나님께서 이 땅을 축복하시는 통로이다.
34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이르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베드로는 시편 110편 1절을 인용하면서 다윗이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예비하였음을 증거하고있다.
다윗은 자신의 범죄를 통하여 눈물을 흘리는 가운데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보았다.
인생은 성공을 통해서가 아니라 패배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께 나아가게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세상의 성공을 위한 곳이 아니라 세상에서 패배한 자들이 새로운 소망을 발견하는 곳이다.
35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사단이 행동하는 근거와 정당성을 없애는 것으로서 사단의 패배를 선언 하는 것이다.
사단은 패배하였지만 그리스도의 발등상이 되기까지 끝까지 저항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공로를 근거로 사단을 소멸케하실 것이다.
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못박은 이들이 이스라엘인 것은 아담의 죄가 단순한 불순종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한 죄인 것을 보여준다.
인간의 죄의 속성은 하나님의 공동체를 파괴한다.
사단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로서 사단의 종은 사단의 좀비와 같은 존재로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동을 한다.
현대 사회는 마치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이 사는 것과 같고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는 것과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못하다.
세상의 불행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사단의 종노릇 하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다.
세상에서의 불행은 단지 불행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수단이 된다.
(그리스도에 대한 베드로의 증거)
예수를 증거하는 베드로와 달리 현대 신학은 기독론보다도 신론 중심으로 변화되고있다.
교회에서 그리스도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윤리와 도덕이 자리잡아 간다.
현대인이라고 광야에서 하나님을 거부했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르지는 않다.
칼바르트의 신정통주의 교회론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보다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신론 중심적 교회론을 보여준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그리스도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 즉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불트만학파의 케제만이 주장하는 하나님의 의를 근거로한다.
이처럼 현대 신학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사라지거나 변질되고있는 것은 현대인들이 얼마나 심각하게 하나님을 대적하고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사건은 단지 이천년 전의 사건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 내내 있어왔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와서 그리스도를 못박는 이들은 교회 바깥의 사람들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자들이다.
이스라엘에서 바리세인 서기관 율법사들이 주축이 되어 그리스도를 대적하였듯이 이 시대 교회에서는 목회자, 신학자, 직분자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스도를 대적하고있다.
겉으로 평온해보이는 이 시대에 교인수의 급격한 감소는 이러한 사실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마지막의 마지막을 살아가는 이 시대는 어느때보다도 더욱 기도하며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 기도가 필요한 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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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장 1~13절 말씀 묵상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7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12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13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오순절과 안식)
오순절은 언약, 즉 행위 언약과 밀접하게 연관되어있다.
오순절은 안식의 성취로서, 유대인들은 칠칠절, 혹은 맥추절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날이지만, 이는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실 안식을 예표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처음 아담과 마찬가지로 참이스라엘이신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율법에서의 안식은 그리스도의 안식을 예표하는 것이었지만 유대인들은 모형과 그림자를 통하여 실체인 그리스도의 안식을 보지 못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마지막 아담으로서 처음 아담의 실패를 완성시키신 분이시다.
처음 아담은 하나님과 행위 언약 안에 있었기에 안식을 위한 요구 조건으로서 통치 명령과 선악과 금령이 주어졌다.
그리스도가 안식의 주인이되신 것은 안식을 위해서 에덴에서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것을 완전히 성취하셨기 때문이다.
처음 아담은 범죄 후에 에덴에서 쫒겨남으로 하나님과 분리됨으로 죽음을 경험하였다.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는 율법의 요구에 대한 완전한 성취와 십자가에서의 속죄 사역으로 인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지만 하나님께서 살리셨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에덴에서의 한시적 요구의 충족에 대한 결과로서의 안식으로 주어진 것이다.
부활은 처음 아담에게 에덴에서 요구되었던 통치 명령과 선악과 금령의 성취에 대한 종말론적 축복과 영원한 생명이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되었음을 알리는 사건이다.
성령의 강림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성취된 안식을 기초로 시작되는 새로운 창조 사역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다.
오순절은 그리스도께서 순종을 통하여 이루신 안식으로서의 첫 열매인 부활로 인하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에게 임하게 될 보편적 안식의 표현이다.
오순절은 그리스도께서 순종을 통하여 이루신 안식으로서의 첫 열매인 부활로 인하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에게 임하게 될 보편적 안식의 표현이다.
에덴에서 아담에게 주어졌던 한시적 검증의 시간이 종결된 뒤에는 종말론적 축복과 영원한 생명이라는 안식이 예정되어있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마지막 아담으로서 처음 아담에게 주어졌던 명령을 완성시키셨기에 종말론적 축복과 영생이라는 안식을 자신의 백성들에게 주실 수 있으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후의 오순절은 부활과 더불어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안식이 오순절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짐으로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음을 보여주고있다.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는 성령의 창조 사역과 더불어 시작된다.
성령의 강림하심은 이 땅에 대한 하나님 나라의 선포이면서 성령의 새창조를 의미한다.
성형의 창조 사역은 사도행전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유월절 후 첫 안식일의 다음 날 보리의 첫 단을 드리는 초실절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관시킬 수가 있으며, 50일째 되는 날 밀 수확의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며 감사와 기쁨의 절기로서 맥추절, 칠칠절 혹은 오순절이라고 부르는 이 날은 바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였음을 선포하는 성령강림절이다.
오순절의 의미가 약화된 장로교에서의 오순절은 단지 맥추절이며, 맥추감사헌금을 내는 날로만 인식되고있는 것이 안타깝기만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처음 아담과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대비 관계 가운데 볼 때 처음 아담이 실패한 통치 명령 (문화 명령)은 그리스도에 의하여 성취되었기에 안식을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신칼빈주의로 표현되는 카이퍼의 후예들은 에덴에서의 문화 명령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성취되었다고 보고있지 않기에 문화 명령을 성도의 과제로 보고있다.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으로 대변되는 문화칼빈주의의 세계관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마지막 아담의 개념에서 접근하지 않는다.
이들이 권하는 문화변혁운동은 그리스도의 안식과 연결시킬 수 없으며, 성령의 새 창조 사역과는 동떨어진 개념이다.
알버트 월터스가 수용하는 새관점에서의 하나님 나라는 성령의 사역과 더불어 시작되지 않는다.
새관점에서 보는 하나님 나라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하지만 개혁주의에서보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하나님 나라의 모형과 그림자일뿐, 새관점이 주장하는 바와같이 실체로 보지는 않는다.
참된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안식과 더불어 시작된다.
하나님의 안식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더불어 시작되었으며, 성령의 사역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오순절 성령의 강림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성도들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 사역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다.
예루살렘에 모인 경건한 유대인들이 각 나라의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모든 나라들 가운데로 확장 되어야함을 알리는 사건이다.
하나님 나라는 신칼빈주의자들의 주장과 같이 문화변혁을 통해서 확장되는 것도 아니며, 이 땅에 성령이 강림하시기 이전의 역사적 이스라엘로부터 시작된 것도 아니다.
창세기로부터 시작된 성령의 창조 사역은 오순절 성령의 강림하심과 더불어 이땅에서 실체로서 구체화되고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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