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018. 1. 1. 23:20

사도행전 1장 12~26절 말씀묵상



12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제자들이 아직 유대 율법을 준수하며 생활하고있음을 볼 수 있다.


아직 그리스도가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율법은 아담에게 주어졌던 안식을 위한 한시적인 명령이 재연된 것으로서 두 번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가 다 이루시고 마침이 되셨기에 더 이상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었지만 아직 성령을 받지 못한 제자들은 아직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성도가 일주일의 첫 날을 주일로 지내는 것은 일상의 모든 삶이 그리스가 성취하신 안식을 기반으로 하고있기 때문이다.



13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14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제자들은 예수께서 명하신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하신 약속의 말씀을 믿고 성령으로 세례를 받기 위해서 오직 기도에 힘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제자들의 모임은 가룟 유다를 대신하는 사도를 뽑는 과정이었으면서 동시에 오순절에 임하실 성령의 강림하심을 기다리는 모임이었다.


처음에는 다락방에서 모였지만 모인 이들의 숫자가 백 이십명이나 되었던 것으로보아 다락방 모임이 좀 더 규모가 커진 야외모임으로 확장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맛디아를 뽑으면서 오순절을 준비하는 제자들의 모임은 여호와 하나님의 강림하심을 기다리면서 시내산에서의 모임을 준비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연상시킨다.


요한의 물세례와 성령 세례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것과 시내산에 여호와 하나님이 강림하심이 유비적으로 재연된 것이다.


마치 아담이 그리스도의 모형인 것과 마찬가지로 홍해와 시내산 강림은 실체로서의 믈세례와 성령의 강림하심에 대한 모형이라고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산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렵고 떨림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강림하심을 기다렸지만, 제자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떨림보다는 간절한 사모함과 기대감 가운데 오직 기도로 성령의 강림하심을 기다렸던 것이다.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임하심 하나님과 성령의 인도를 받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에서의 여정은 오순절 성령의 강림하심과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이루어지는 사도행전의 과정을 통하여 유비적으로 재연되면서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보여주고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에서의 여정은 이 땅에 실체적으로 임하게될 하나님 나라를 예비하는 모형이었으며 실체는 아니었다.


오순절 성령의 강림하심은 이 땅에 실체로서의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에서는 출애굽과 더불어 이 땅에 실체로서의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으며, 이스라엘을 실체로서의 하나님 나라로 보고있다는 것이 개혁주의와 다른 점이다.


새관점은 유대 중심적 신학이기에 오순절 성령의 강림하심을 역사적 이스라엘의 확장 개념에서 보고있다.



15  모인 무리의 수가 약 백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들 가운데 일어서서 이르되

제자들의 모임과 더불어 시작된 무리들의 모임은 힘써서 기도한 이후에 진행되었다.


자신들의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가 이루어지기 위한 순종의 행위인 것이다.



기도하는 가운데 마음 속에 하나님의 뜻이 심겨지고 이를 행할 수 있는 능력과 환경이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다.


기도는 아담에 의해 상실된 하나님의 왕권이 이 땅에서 다시 선포되면서 성도들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16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정의와 섭리는 일치하지 않는다.


인간은 항상 정의로운 행동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섭리를 통한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는 인간이 본질적 죄인임을 감안할 때 반드시 불의가 허용되는 경우도 있다.


유다의 배반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고해서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계획하셨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의 완악함과 본질적 죄성을 고려할 때 허용하실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이해하도록하여야 할 것이다.


개인의 삶의 여정에 있어서도 과거의 상처에 묶이기보다는 인간의 본질적 죄성 가운데 임을 수밖에 없는 상처들을 통하여 나를 향한 하나님의 주권적 간섭하심을 받아들이고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 참여되는 것이 복된 자의 길일 것이다.


가롯 유다는 자신의 인간적 이기심에 묶임바되어 그리스도를 가장 가까이 경험하면서도 사망의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신앙적 환경들을 자신의 욕심에 이용할 때 어느 누구나 가룟 유다의 길을 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성도는 과거에 집착하는 피해의식보다는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을 받아들이고 감사함으로 앞으로 행할 것에 대한 준비를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선을 이루기 위해서는 개인적 상처와 불행했던 과거들을 앞으로의 진보를 위한 계기로 삼는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17  이 사람은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여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숫자의 중요성은 성경 전체에 걸쳐서 나타난다.


창조 과정으로서의 7일과 이스라엘 열 두 지파로서의 12와 충만한 숫자로서의 40등 숫자의 의미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해서 구현되는 하나님의 나라는 모형으로서의 이스라엘을 통하여 제시되었던 숫자들이 구체화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도 부활하신 후에 사십일 동안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신 것과 같이 제자들도 열두지파를 대표하는 12사도를 필요로하였다.


이스라엘 열 두 지파 각각의 직무가 있었듯이 12사도도 각각의 직무가 있었다.


12사도는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대표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모형으로서의 이스라엘을 실체로서의 하나님 나라로 구현시키고있다.



18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19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리어져 그들의 말로는 그 밭을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20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가룟 유다는 그리스도를 팔아먹은 자이다.


가룟 유다는 죄인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보여주고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들은 가룟 유다와 손을 잡고서 예수를 죽인 자들이다.


가룟 유다의 죽음은 이스라엘의 죽음이었다.


가룟 유다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된 것은 이스라엘이 마땅히 감당했어야할 직분을 다른 민족들이 대신하여 감당하게될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도를 다시 세우는 것은 말씀을 응하게하기 위한 것이다.


예수님도 종종 성경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행하셨다.


신자의 삶은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 안에서 말씀에 응답되어지는 것이다.


신앙생활은, 유혹을 거부하면서, 말씀이 이 땅에서 실현되도록 신자의 삶이 말씀에 반응하여 하는 것이다.


멸망할 자들도 심판받기에 합당한 모습으로 유혹에 응답되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을 팔아먹는 자들도 유혹받음으로 자신의 길을 가고있는 것이다.


욕심이하는 유혹에 이끌려 이스라엘 성전에서 장사하였던 이들과 같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자신의 욕심이 성취되는 자신의 이익을 위한 곳이 되어서는 안된다.



21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요한의 세례에서 시작된 예수의 사역은 성령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다.


예수의 공생애 사역은 성령의 창조 사역이다.


예수의 사역이 요한의 세례와 더불어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심으로 사역이 시작되었듯이 사도들의 사역도 성령의 강림과 더불어 시작된다.


가룟 유다를 대신할 사도를 뽑는 일은 성령의 임하심과 더불어 시작될 성령과 함께하는 사도들의 역사를 준비하는 과정이었다.


신자의 신앙생활도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가운데 행해져야 할 것이다.



22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사도는 증인으로서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예수의 부활하심과 예수의 40일동안의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하신 말씀을 들은 자들 이어야 할 것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목회자에게는 사도라는 용어를 붙이면 안된다.


사도행전 29장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이들 가운데에는 자신들이 사도행전의 기록을 이어가는 사도들이라고 착각하는 이들이 있다.


가끔 이상한 훈련을 받은 목회자들이 자신 스스로를 사도의 위치에 올려놓는 것을 보게된다.


심지어는 베드로를 목사라고 부르고 자신을 사도라고하면서 목사와 사도를 동등한 위치에 올려놓으려는 이들도 있다.


이들은 단지 스스로 높아지면서 예수를 팔아먹는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이다.


성도는 비록 사도는 아니지만 성령의 쓰임받는 도구로서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이들이다.


23  그들이 두 사람을 내세우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
24  그들이 기도하여 이르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님께 택하신 바 되어
25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인지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26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그가 열한 사도의 수에 들어가니라


제비뽑기는 도박이 아니라 인간적인 선택을 완전히 배제하는 행위이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과 간섭하심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나타내는 행위이다.


하나님의 주권과 함께 하심에 대한 믿음이 없는 제비뽑기는 도박에 불과하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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