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3장 1~10절 말씀 묵상
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간 것은 유대교의 제사를 드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선교 활동 영역으로 성전이 올라간 것이다.
베드로가 성전에 올라갔다고해서 교회당에 성전의 명칭을 사용하면 안된다.
교회당에 성전의 명칭을 붙이는 것은 성도를 속이는 삯군 목회자의 농락이다.
예루살렘의 제2성전은 70년 경에 로마군에 의해서 파괴가 되었으며 더 이상 성도에게 필요하지 않은 곳이다.
최근의 제3성전 건축과 관련된 논란은 잘못된 세대주의적 발상이다.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질병은 인간의 영적인 상태를 대변해준다.
인간은 아담 안에서 이미 영적으로 죽은 자이다.
육적인 질병의 증상들은 영적인 죽음을 현상적으로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나면서부터 불구인 자가 고침을 받는다는 것은 아담 안에서 죽었던 이들에 대한 희망을 제시해준다.
이는 나면서부터 일그러지고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을 예시해 주는 것이다.
나면서 못 걷게 된 이 사람은 불구가 계기가 되어 새생명을 얻게되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된다.
인생의 부정적 상황들은 종종 하나님 안에서 구원에 이르는 계기로 사용되기도 한다.
인간은 누구나 처음부터 본질적인 복음을 접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
대부분 다른 목적을 위한 기회들이 복음을 접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준다.
부정적 상황들은 멸망받을 자에게는 저주가 돠지만 하나님의 택함받은 이들에게는 구원의 기회로 사용된다.
이스라엘은 붕괴를 경험하면서 광야에서와는 달리 하나님께 열린 마음을 가지게 된다.
성도는 자신의 비참한 상태와 처지를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는 계기로 삼아야한다.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비록 잘못된 동기나 혹은 기복신앙을 가지고 교회 생활을 하더라도 교회 생활 가운데 하나님을 경험하는 기회가 주어질 수 있다.
베드로와 요한도 성전을 사람들을 만나는 장소로 택하였듯이, 성도는 비록 교회가 외적으로 변질되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복음을 올바로 전할 수 있는 기회의 장소로 사용하여야한다.
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와 요한은 고침받을 이에게 자신들을 직시할 것을 요구한다.
일방적인 베품보다는 최소한도의 반응이 요구되어야 한다.
준비가 안되고 관심도 없는 이들에게 일방적으로 베푸는 것은 오히려 자기 과시가 될 수 있고 독이 될 수도 있다.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사도시대에는 정경이 없었기에 복음 전파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능력을 허락하셨다.
만약 정경이 있는 지금 시대에 신자에게 이와같은 권능이 주어진다면 사람들은 말씀보다도 그 사람에게 집중하게 될 것이고 그는 반드시 교만하여 타락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도들에게 주신 또 하나의 권능은 그들이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하였던 자이기에 걷거나 뛰는 방식을 배울 기회도 없었다.
발과 발목이 힘을 얻고 걷기도하고 뛰기도하는 것과 같은 상황은 새로운 창조로서 치료나 개선의 차원이 아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결정적 차이는 무에서 유를 창조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다.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하던 자가 걷거나 뛰는 것은 무에서 유로의 창조이며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창조로서 성령의 새창조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다.
오순절 성령의 강림과 더불어 시작된 신약의 시대는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시대로서 아담 안에서 죽었던 인간에 대한 새로운 생명이 탄생되는 시대이다.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나면서 못걷던 자가 걷거나 뛰면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은 신자의 마땅한 도리이다.
교회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일어나는 곳이라면 교회는 모든 이들이 놀라는 역사가 일어나야한다.
교회가 사회의 근심이 되는 것은 행동 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하지만 교회개혁을 외치는 이들은 생명의 문제보다는 윤리적 문제로 접근하려고한다.
생명이 없어서 나는 썩은 냄새는 향수를 뿌린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삶의 방식의 전환
톰 라이트는 사도행전을 이스라엘의 삶의 방식을 전환시킨 기록으로 보고있다.
이스라엘이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들이 가난한 자와 재산을 공유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예수를 본받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회개는 삶의 방식에 관한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실패를 삶의 방식의 문제로 보았다.
톰 라이트에게 새로운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방식을 적용하는 삶의 변화를 요구하는 공동체이다.
베드로가 행한 기적은 단순히 획기적으로 더 좋은 것이 아니다.
회개한 자들의 삶의 방식의 변화는 단순한 삶의 개선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것이다.
사도행전이 보여주는 변화는 아담 안에서 일그러졌던 하나님의 공동체성이 이 땅에 구현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는 무에서(Ex Nihilo)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이 땅에서 다시 성령에 의하여 새창조의 과정이 시작된 것이다.
교회의 부패를 개선하고자 많은 이들이 톰 라이트의 책을 참조하지만, 교회의 문제는 행동 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의 문제이다.
톰 라이트는 구약과 신약을 윤리의 차이로 보고있기에 올바른 복음이라고 할 수 없다.
교회의 병패는 교회가 제대로된 복음 안에 있지 않다는 증거이다.
여기에다가 톰 라이트의 새관점을 접목시켜서 교인의 행동 방식을 고치려고하는 것은 그나마 남아있는 가냘픈 생명의 불씨 마저도 꺼뜨려 버리려는 위험한 행동이다.
톰 라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인정하지 않으며, 성도에게 전가된 의도 인정하지 않으며, 그리스도를 단지 삶의 방식을 개선시켜준 역사적 이스라엘의 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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