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018. 1. 7. 22:04

사도행전 4장 1-12절 말씀 묵상

1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2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싫어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오히려 부활의 소식에 대하여 기뻐하면서 반겨야하지 않겠는가?


이들 성직이 직업이기에 때문인가?


아니다.


이들은 직업적 이권을 진리 위에 두기 때문이다.


교회도 규모가 커지거나 직업적 이권에 영향력을 미칠 정도가 되면 변질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이유로 교회의 규모를 키우는 것은 스스로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자살 행위이다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교회에서 진리를 위해서 직업적 이권을 포기하거나 양보하는 경우를 별로 보지 못했다.


이들 목회들은, 에서와 같이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파는 어리석은 자들이며, 순간의 이익을 위해서 영원한 것을 팔아먹는 믿음이 없는 자들이다.



3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


베드로와 요한이 갇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자가 급속하게 증가하는 것은 성령이 역사하고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는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5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반발하는 이들은 대부분 기득권자들이다.


기득권자들은 오히려 복음에 걸림돌이 될 수 밖에 없는가보다.



6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대제사장들이 오히려 영적으로 죽어있다는 것이 답답하다.


이들은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기득권이 위협받는다는 사실에서 위기 의식을 느꼈을 것이다.


성직이 직업인 이들은 전적으로 순수하게 진리를 변호하기가 쉽지가 않다.


이 시대에 복음의 진리를 가장 왜곡시키는 사람들이 신학자와 목사이며 또한 복음의 진리를 가장 잘 변호하고 전파할 수 있는 이들이 신학자이면서 목사들이다.


중요한 것은 성도들이 이를 구분할 수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가장 앞장서서 복음의 진리를 왜곡시키는 톰 라이트를 추천하는 신학자들과 목사들을 보면서 아무 생각없이 톰 라이트가 말하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이 슬프기만 하다.


톰 라이트는 그럴듯한 논리로 포장되어있어도,  복음을 유대교의 틀에다 집어넣고서 그리스도를 유대인의 한 사람으로 격하시키며 기독교를 유대교에 접목시키려는 친유대주의 학자이다.



7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권세와 이름은 왕권과 주권을 뜻하며,  하나님의 왕권이 이 땅에서 선포되고있음을 보여준다.


사도들이 행하는 권세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들은 아담이 실패한 이땅에서의 왕권에 대한 회복을 선언하는 것이다.


대제사장들이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알고있었다면 쉽게 이러한 질문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성령의 충만은 베드로가 지혜롭게 말을 하는데 힘을 실어주신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베드로의 입을 통하여 말하는 주체가 성령임을 나타낸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을 통한 성령의 새창조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9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베드로는 병고침과 구원을 동일한 관점에서 언급하고있다.


단순하게 병고침으로만 그친다면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베드로의 말은, 대제사장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자기들이 죽인 사람이 믿음의 대상이 되어야하는 기막한 상황역전을 전하고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름대로 생각이 있고 이유가 있어서 그리스도를 못박았을 것이다.


많은 불신자들이 정의의 이름으로 행하는 행위들이 실상은 하나님의 은혜를 악으로 갚는 경우들이 허다하다.


신자들도 불신자들의 행함에 대해서 문제 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동참하는 경우가 많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자신이 진리이면서 이를 근거로 행하지만 성경은 변치 않는 유일한 진리의 말씀이기에 신자는 자신의 생각을 넘어 진리를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성경 말씀이 기준이 되지 못하는 행함들은 결국 악으로 기울어 질 수 밖에 없다.



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뜻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인간 사회에서는 집단 이익이 곧 진리이기 때문이다


국가도 종종 진리보다는 국가에 이익이 되느냐 아니냐를 행동의 기준으로 삼는다.


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오직 기독교에서의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에 이르는 어떠한 길도 없다.


천주교에서는 다른 종교를 인정하면서 관상 기도를 통해서 타 종교와의 접촉점을 찾으려고하지만 이는 진리를 거역하는 행위이다.


나가는 말- 육체적 질병과 영적인 문


베드로와 요한은 육적인 문제를 통해서 영적인 문제를 해결한다


베드로와 요한은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였던 자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걷게하면서 병자가 병고침을 받는 것과 구원을 받는 것을 동일한 차원에서 설명하고있다.


이는 타락한 인간의 영적인 상태와 육체의 병적인 상태를 동일한 차원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질병의 요인들과 원인들과 특성과 결과들은 영적인 특성들과 밀접하게 비슷한 특징들을 보여주고있다.


질병을 일으키는 요인들로는 환경적인 외부적 요인들과 내적인 요인들이 있겠지만 이러한 요인들은 대부분 아담의 타락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질병의 증상과 특성들은 영적인 속성과 비슷한 속성들을 보여주는 경우를 종종 보게된다.


이러한 질병들은 결과적으로 인간으로하여금 죽음에 이르게 한다.


이는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에게 주어진 영적으로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의 결과일 뿐이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였던 자가 걷게된 것을 구원의 차원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사는 동안 경험하는 것이 결국 영원한 것의 모형이기 때문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함으로서 인간에게 부활의 소망을 갖도록 한 것은 이 땅에서의 경험들이 영원한 것의 모형이기 때문이다.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었고, 영적인 이스라엘은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 있는 참 이스라엘의 모형이었듯이, 삶 가운데 경험하는 현상들은 많은 부분 영원한 실체의 모형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고있다.


질병도 그 가운데 한 가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역 가운데 행한 많은 병고침의 기적들은 그 자체가 실체였다면 허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 병고침을 받았던 이들이나 베드로와 요한에게 병고침을 받았던 이나 결과적으로 죽는 것은 한 가지 이기 때문이다.


사는 동안의 경험이 영원한 것과 아무 상관이 없다면 인생은 모두 다 허무한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사는 동안의 경험이 영원한 것과 연계된다면 이 땅에서의 경험은 매우 귀중한 것이다.


신앙고백을 한 자들이나 불신자들이나 육체가 죽는 것은 매 한가지 이지만 결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신앙인의 일상이나 사회 활동은 복음과 구원의 문제로 연결되는데서 의미를 찾아야한다.


단순하게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선한 일을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구원과는 관계 없는 일반 은총의 영역으로 한정되는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보여준 치유사역은 일반 은총을 특별 은총의 영역으로 연결시키는 좋은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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