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3장 11~26절 말씀 묵상
11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불리우는 행각에 모이거늘
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사람들은 놀라운 일이 일어나면 일차적으로 사람에게 주목한다.
하지만 참된 목자는 자신에게 주목된 상황을 하나님께로 전환시킨다.
목회자는 구조상 항상 딜레마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사람들이 처음부터 하나님께 관심을 가질 수 없기에 처음에는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더라도 목회자는 이를 하나님께 돌려드려야한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타난 영광을 자신이 취한다면 그 사람은 결국 교만하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도둑이 될 것이다.
이는 목회자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영역에 속하여 있는 모든 이들에게도 적용이된다.
교회의 직분자들은 더욱 더 조심하여야한다.
인간은 거듭났다고 하더라도 누구나 다 아담의 죄성을 가지고 있기에 스스로 높임을 받으려고 한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교만의 관점에서 보면서, 감사함으로 받아들였다.
13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그를 넘겨 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
14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필요하다.
하지만 성도가 부정적인 문제에 대하여 올바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쉽지가 않다.
생명의 주를 너희가 죽였다고 말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정죄이지만 이러한 말을 하여야지만 문제의 심각성에 직시할 수가 있다.
조상과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면서까지 정죄 당하였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회개 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는 달리 해석될 수가 없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정죄할 때 살해 위협을 당하였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베드로가 말하는 부정적 상황은 정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복음 전파를 위한 것이다.
하지만 부정적 상황을 정죄하는 많은 이들이 복음 전파를 위한 것이 아니라 정죄를 위한 정죄를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문제다.
이러한 방식은 구약만의 방식이다.
구약의 상황과 신약의 차이는 부정적 상황에 대한 정죄로 끝날 것이냐 아니면 복음에서 말하는 희망을 접목시킬 것이냐의 차이다.
현대 사회는 부정적 상황을 말하지 못하는 많은 이유들이 있다.
첫 번째는 결국 자기 자신은 예외로 둔다는 것이다.
부정적 상황의 현상은 본질적인 죄성이 겉으로 나타나는 것이기에 인간은 어느 누구나 그러한 환경이 조성이 되면 똑같은 죄에 노출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누구나 거미줄과 같이 얽혀있어서 바른 말을 하기가 쉽지 않다
또한 자칫 인간의 죄성에서 나오는 정죄에 묶이는 경우도 있다.
자신을 마치 정의의 사도처럼 꾸미며 정죄할 상황만 찾아다니면서 자신의 의로움을 나타내려는 이들도 있다.
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베드로는 믿음과 치유의 연관성을 드러냄으로서 믿음에 대하여 언금하기 시작한다
믿음으로 완전히 낫는다는 이야기는 유대인들에게는 상당히 낯설 수 밖에 없는 개념이지만 성령의 간섭하심으로 역사하는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17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
알지 못했다는 것은 면죄부가 될 수 없지만 위로는 될 수 있다.
자신의 악함보다는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서 알아야할 필요성을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18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자기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그리스도의 고난이 선지자의 예언을 근거로 한 것임을 밝힘으로써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알게한 내용들이 세례 요한의 말과 같이 그리스도를 예비하는 역할을 하게 함으로서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를 설명하고있다.
베드로가 언급한 조상들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고 신뢰하였던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좀 더 쉽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방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낯설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을 수 밖에 없다.
이는 이방인인 그리스도인들이 구약을 공부하여야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새롭게 되는 것은 이전 것이 개선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 나는 것이다
이는 사람에게서 나는 것이 아니라 주께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예수를 믿음의 대상보다는 따름의 대상으로 볼 경우에는 위로부터의 새로움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새로움이다.
판네베르크를 비롯한 독일의 신학들과 톰 라이트의 새관점의 특징이 아래로부터의 신학이라는 사실은 새롭게 됨이 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베드로는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르게 됨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20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21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모근 구속 사건은 창세 전부터 계획하신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러한 시간의 개념과 예정과 섭리를 인간이 어떻게 이해 할 수 있을까?
잘 이해가 안되는 부분은 억지로 이해하는 것보다는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님을 더욱 신뢰할 수 있는 방법이 된다.
22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의 모든 말을 들을 것이라
23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하였고
24 또한 사무엘 때부터 이어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 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
베드로는 이스라엘의 모든 근원이 그리스도께로 향하고있음을 말한다.
이는 구약 성경을 그리스도를 예비하는 역사의 기록으로 이해하는 근거를 제공해 준다.
25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언약이 그리스도께로 귀결됨을 말하고있다.
그리스도가 마지막 아담이신 것을 고려해 볼 때 아담 언약으로부터 이어지는 노아 언약과 아브라함 언약, 그리고 모세 언약을 그리스도의 새언약과의 연계성 가운데 정립해 볼 수 있다.
26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궁극적으로 베드로의 설교는 유대인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다.
베드로는 유대인들의 근거가되는 그들의 조상을 예수 그리스도와 연계시킴으로서 매우 설득력있는 설교를 하고있다.
이러한 방식은 오늘날 불신자에게 전도하기 위해서 그들이 전적으로 신뢰하는 상황들을 근거로 예수 그리스도를 연관시켜 전도하는 놀라운 방식이다.
이는 신자들이 불신자들을 존중해주면서도 전도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사도행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도행전 4장 13-31절 말씀 묵상 (0) | 2018.01.08 |
---|---|
사도행전 4장 1-12절 말씀 묵상 (0) | 2018.01.07 |
사도행전 3장 1~10절 말씀 묵상 (0) | 2018.01.05 |
사도행전 2장 37-47절 말씀 묵상 (0) | 2018.01.05 |
사도행전 2장 14~36절 말씀 묵상 (0) | 2018.0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