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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1.07 :: 사도행전 3장 11~26절 말씀 묵상
  2. 2018.01.05 :: 사도행전 3장 1~10절 말씀 묵상
사도행전 2018. 1. 7. 00:08

사도행전 3장 11~26절 말씀 묵상



11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불리우는 행각에 모이거늘
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사람들은 놀라운 일이 일어나면 일차적으로 사람에게 주목한다.


하지만 참된 목자는 자신에게 주목된 상황을 하나님께로 전환시킨다.


목회자는 구조상 항상 딜레마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사람들이 처음부터 하나님께 관심을 가질 수 없기에 처음에는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더라도 목회자는 이를 하나님께 돌려드려야한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타난 영광을 자신이 취한다면 그 사람은 결국 교만하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도둑이 될 것이다.


이는 목회자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영역에 속하여 있는 모든 이들에게도 적용이된다.


교회의 직분자들은 더욱 더 조심하여야한다.


인간은 거듭났다고 하더라도 누구나 다 아담의 죄성을 가지고 있기에 스스로 높임을 받으려고 한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교만의 관점에서 보면서, 감사함으로 받아들였다.


13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그를 넘겨 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
14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필요하다.


하지만 성도가 부정적인 문제에 대하여 올바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쉽지가 않다.


생명의 주를 너희가 죽였다고 말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정죄이지만 이러한 말을 하여야지만 문제의 심각성에 직시할 수가 있다.


조상과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면서까지 정죄 당하였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회개 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는 달리 해석될 수가 없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정죄할 때 살해 위협을 당하였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베드로가 말하는 부정적 상황은 정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복음 전파를 위한 것이다.


하지만 부정적 상황을 정죄하는 많은 이들이 복음 전파를 위한 것이 아니라 정죄를 위한 정죄를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문제다.


이러한 방식은 구약만의 방식이다.


구약의 상황과 신약의 차이는 부정적 상황에 대한 정죄로 끝날 것이냐 아니면 복음에서 말하는 희망을 접목시킬 것이냐의 차이다.


현대 사회는 부정적 상황을 말하지 못하는 많은 이유들이 있다.


첫 번째는 결국 자기 자신은 예외로 둔다는 것이다.


부정적 상황의 현상은 본질적인 죄성이 겉으로 나타나는 것이기에 인간은 어느 누구나 그러한 환경이 조성이 되면 똑같은 죄에 노출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누구나 거미줄과 같이 얽혀있어서 바른 말을 하기가 쉽지 않다


또한 자칫 인간의 죄성에서 나오는 정죄에 묶이는 경우도 있다.


자신을 마치 정의의 사도처럼 꾸미며 정죄할 상황만 찾아다니면서 자신의 의로움을 나타내려는 이들도 있다.



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베드로는 믿음과 치유의 연관성을 드러냄으로서 믿음에 대하여 언금하기 시작한다


믿음으로 완전히 낫는다는 이야기는 유대인들에게는 상당히 낯설 수 밖에 없는 개념이지만 성령의 간섭하심으로 역사하는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17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


알지 못했다는 것은 면죄부가 될 수 없지만 위로는 될 수 있다.


자신의 악함보다는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서 알아야할 필요성을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18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자기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그리스도의 고난이 선지자의 예언을 근거로 한 것임을 밝힘으로써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알게한 내용들이 세례 요한의 말과 같이 그리스도를 예비하는 역할을 하게 함으로서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를 설명하고있다.


베드로가 언급한 조상들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고 신뢰하였던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좀 더 쉽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방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낯설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을 수 밖에 없다.


이는 이방인인 그리스도인들이 구약을 공부하여야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새롭게 되는 것은 이전 것이 개선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 나는 것이다


이는 사람에게서 나는 것이 아니라 주께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예수를 믿음의 대상보다는 따름의 대상으로 볼 경우에는 위로부터의 새로움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새로움이다.


판네베르크를 비롯한 독일의 신학들과 톰 라이트의 새관점의 특징이  아래로부터의 신학이라는 사실은 새롭게 됨이 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베드로는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르게 됨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20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21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모근 구속 사건은 창세 전부터 계획하신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러한 시간의 개념과 예정과 섭리를 인간이 어떻게 이해 할 수 있을까?


잘 이해가 안되는 부분은 억지로 이해하는 것보다는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님을 더욱 신뢰할 수 있는 방법이 된다.

22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의 모든 말을 들을 것이라
23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하였고
24  또한 사무엘 때부터 이어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 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


베드로는 이스라엘의 모든 근원이 그리스도께로 향하고있음을 말한다.


이는 구약 성경을 그리스도를 예비하는 역사의 기록으로 이해하는 근거를 제공해 준다.

25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언약이 그리스도께로 귀결됨을 말하고있다.


그리스도가 마지막 아담이신 것을 고려해 볼 때 아담 언약으로부터 이어지는 노아 언약과 아브라함 언약, 그리고 모세 언약을 그리스도의 새언약과의 연계성 가운데 정립해 볼 수 있다.

26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궁극적으로 베드로의 설교는 유대인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다.


베드로는 유대인들의 근거가되는 그들의 조상을 예수 그리스도와 연계시킴으로서 매우 설득력있는 설교를 하고있다.


이러한 방식은 오늘날 불신자에게 전도하기 위해서 그들이 전적으로 신뢰하는 상황들을 근거로 예수 그리스도를 연관시켜 전도하는 놀라운 방식이다.


이는 신자들이 불신자들을 존중해주면서도 전도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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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18. 1. 5. 23:53

사도행전 3장 1~10절 말씀 묵상

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간 것은 유대교의 제사를 드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선교 활동 영역으로 성전이 올라간 것이다.

베드로가 성전에 올라갔다고해서 교회당에 성전의 명칭을 사용하면 안된다.

교회당에 성전의 명칭을 붙이는 것은 성도를 속이는 삯군 목회자의 농락이다.

예루살렘의 제2성전은 70년 경에 로마군에 의해서 파괴가 되었으며 더 이상 성도에게 필요하지 않은 곳이다.

최근의 제3성전 건축과 관련된 논란은 잘못된 세대주의적 발상이다.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질병은 인간의 영적인 상태를 대변해준다.


인간은 아담 안에서 이미 영적으로 죽은 자이다.


육적인 질병의 증상들은 영적인 죽음을 현상적으로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나면서부터 불구인 자가 고침을 받는다는 것은 아담 안에서 죽었던 이들에 대한 희망을 제시해준다.


이는 나면서부터 일그러지고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을 예시해 주는 것이다.


나면서 못 걷게 된 이 사람은 불구가 계기가 되어 새생명을 얻게되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된다.


인생의 부정적 상황들은 종종 하나님 안에서 구원에 이르는 계기로 사용되기도 한다.


인간은 누구나 처음부터 본질적인 복음을 접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


대부분 다른 목적을 위한 기회들이 복음을 접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준다.


부정적 상황들은 멸망받을 자에게는 저주가 돠지만 하나님의 택함받은 이들에게는 구원의 기회로 사용된다.


이스라엘은 붕괴를 경험하면서 광야에서와는 달리 하나님께 열린 마음을 가지게 된다.


성도는 자신의 비참한 상태와 처지를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는 계기로 삼아야한다.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비록 잘못된 동기나 혹은 기복신앙을 가지고 교회 생활을 하더라도 교회 생활 가운데 하나님을 경험하는 기회가 주어질 수 있다.


베드로와 요한도 성전을 사람들을 만나는 장소로 택하였듯이, 성도는 비록 교회가 외적으로 변질되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복음을 올바로 전할 수 있는 기회의 장소로 사용하여야한다.

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와 요한은 고침받을 이에게 자신들을 직시할 것을 요구한다.


일방적인 베품보다는 최소한도의 반응이 요구되어야 한다.


준비가 안되고 관심도 없는 이들에게 일방적으로 베푸는 것은 오히려 자기 과시가 될 수 있고 독이 될 수도 있다.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사도시대에는 정경이 없었기에 복음 전파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능력을 허락하셨다.


만약 정경이 있는 지금 시대에 신자에게 이와같은 권능이 주어진다면 사람들은 말씀보다도 그 사람에게 집중하게 될 것이고 그는 반드시 교만하여 타락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도들에게 주신 또 하나의 권능은 그들이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하였던 자이기에 걷거나 뛰는 방식을 배울 기회도 없었다.


발과 발목이 힘을 얻고 걷기도하고 뛰기도하는 것과 같은 상황은 새로운 창조로서 치료나 개선의 차원이 아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결정적 차이는 무에서 유를 창조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다.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하던 자가 걷거나 뛰는 것은 무에서 유로의 창조이며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창조로서 성령의 새창조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다.


오순절 성령의 강림과 더불어 시작된 신약의 시대는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시대로서 아담 안에서 죽었던 인간에 대한 새로운 생명이 탄생되는 시대이다.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나면서 못걷던 자가 걷거나 뛰면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은 신자의 마땅한 도리이다.


교회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일어나는 곳이라면 교회는 모든 이들이 놀라는 역사가 일어나야한다.


교회가 사회의 근심이 되는 것은 행동 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하지만 교회개혁을 외치는 이들은 생명의 문제보다는 윤리적 문제로 접근하려고한다.


생명이 없어서 나는 썩은 냄새는 향수를 뿌린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삶의 방식의 전환


톰 라이트는 사도행전을 이스라엘의 삶의 방식을 전환시킨 기록으로 보고있다.


이스라엘이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들이 가난한 자와 재산을 공유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예수를 본받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회개는 삶의 방식에 관한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실패를 삶의 방식의 문제로 보았다.


톰 라이트에게 새로운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방식을 적용하는 삶의 변화를 요구하는 공동체이다.


베드로가 행한 기적은 단순히 획기적으로 더 좋은 것이 아니다.


회개한 자들의 삶의 방식의 변화는 단순한 삶의 개선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것이다.


사도행전이 보여주는 변화는 아담 안에서 일그러졌던 하나님의 공동체성이 이 땅에 구현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는 무에서(Ex Nihilo)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이 땅에서 다시 성령에 의하여 새창조의 과정이 시작된 것이다.


교회의 부패를 개선하고자 많은 이들이 톰 라이트의 책을 참조하지만, 교회의 문제는 행동 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의 문제이다.


톰 라이트는 구약과 신약을 윤리의 차이로 보고있기에 올바른 복음이라고 할 수 없다.


교회의 병패는 교회가 제대로된 복음 안에 있지 않다는 증거이다.


여기에다가 톰 라이트의 새관점을 접목시켜서 교인의 행동 방식을 고치려고하는 것은 그나마 남아있는 가냘픈 생명의 불씨 마저도 꺼뜨려 버리려는 위험한 행동이다.


톰 라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인정하지 않으며, 성도에게 전가된 의도 인정하지 않으며, 그리스도를 단지 삶의 방식을 개선시켜준 역사적 이스라엘의 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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