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4장'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7.12.29 :: 에베소서 4장 25-32절 말씀 묵상
  2. 2017.12.29 :: 에베소서 4장 17-24절 말씀 묵상
  3. 2017.12.29 :: 에베소서 4장 1-16절 말씀 묵상
에베소서 2017. 12. 29. 16:35

에베소서 4장 25-32절 말씀 묵상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이 신분 변화에 걸맞는 행동을 할 것을 권하고있다.

이는 일반 사회에서 생각하는, 천민에서 귀족으로의 상승이나, 혹은 부자기 된 가난했던 이에게 요구하는 것과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새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새 사람은 입는 것으로서, 본질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바울이 권면하는 성화로서의 새 사람을 입는 행위는, 윤리와 도덕을 말하는 행동 양식의 변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내적인 변화를 위한 것이다.


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거짓)

거짓은 속임수라는 말의 의미도 있겠지만, 거짓의 구조는 진짜를 숨기고 가짜를 진짜처럼 포장하는 것이다.

일종의 사기를 뜻한다.

옛 사람이 아담에 뿌리를 두고 있다면, 새 사람은 그리스도께 뿌리를 두고 있다.

거짓은 생각과 말과 행동등 다양한 방법으로 침투해 들어올 수 있다.

거짓은 사람들의 생각을 사로잡아서, 사람들로 하여금 거짓을 진실로 믿게하면서 살게하는데, 거의 모든 사람이 이러한 거짓에 속고 있다.

거짓의 아비는 사단이며, 아담이 사단에 속아서 거짓에 참여한 연유로, 모든 인간은 거짓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삶의 방향에 무엇이 있는 것 같은데 실상은 아무 것도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단은 사람들을 유혹하기 위해서, 거짓을 진짜로 착각하게 만든다.

사람들이 욕심을 쫓아가는 많은 것들이 실상은 거짓에 이르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하지만 사람들은 거짓인 줄 알면서도 자기 욕심에 끌려서 거짓을 따라간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우상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쫓아갔듯이, 모든 인간들이 마찬가지다.

옛 사람인 인간에게 진실과 참된 것은 불편하기에, 오히여 거짓이 편하고 좋아서, 스스로 속는 줄을 알면서도 거짓을 쫓아간다.

거짓을 버리고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는 바울의 권면은 새 사람으로서 서로 마디가 되는 구조를 위해서 필요하지만, 이 땅에서는 불가능하기에, 모든 인간은 사는 동안에는 결국 죄인으로 증명될 수 밖에 없다.

복음은 결국 죄인으로 고발되는 이러한 인생에게 생명을 줄 수 있기에 복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분을 품는 것과 마귀에게 틈을 내어주는 것과 밀접하게 연관성이 있다.


분을 품는 것은 인간의 내면의 죄성을 쉽게 활성화시킨다.

인간의 행동 방식의 약점은 학습되어진 이상의 행동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악에 학습되어지거나 선에 학습되어진다.

인간의 내면의 죄성은 그 자체가 악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인간에게 죄의 소원이 있을지라도 이를 다스려야한다.

환경의 중요성은 인간이 어떻게 학습되어지느냐에 따라서 악에도 학습되어지고, 선에도 학습되어진다.

오늘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에게 전하는 진리는 학습되어져야 할 환경을 바꾸라는 것이다.

환경이 촉매제catalyst라면 인간의 죄성은 기저제base라고 할 수 있다.

기저제는 촉매제를 만날 때 반응을 일으키면서 결과물을 도출해 낸다.

기저제는 일정한 환경이 조성되면 활성화된다.

분을 품는 것은 마치 인간의 내면의 기저제에 열을 가해서 폭발시키는 것과 같다.

이러한 폭발 사고를 방지하고자 바울은 분을 품지 말라고 권한다.

환경으로 인간의 죄성을 바꾸지는 못하지만, 죄성을 활성화시키는 촉매제를 제거함으로서 어느 정도의 부작용을 최소화시킬 수 있다.


28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도둑질에는 합법적인 도둑질과 불법적인 도둑질이 있다.

불법적인 도둑질은 당연히 범죄 행위에 속하지만 합법적인 도둑질은 도둑질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문제가 있다.

자기 손으로 수고하지 않고 돈을 버는 행위도 도둑질의 범주에 속할 수 있다.

합법적인 도둑질 가운데는 카지노, 투기,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등이 있을 수 있다.

도둑질하는 것 못지 않게 자신을 도둑질 당하도록 내어 버려두는 것도 도둑질을 조장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신앙인이라면 한 번쯤 주식투자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주식은 자본주의 사회가 지탱되는 가장 기본적인 시스템이지만, 이는 합법적인 도박이라고 할 수 있다.

주식은 상황에 따라서 지속적인 등락을 반복하기에, 주식에 투자한 만큼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신앙인의 주식 투자의 가장 큰 문제점은, 주식의 등락에 대한 관심 집중과, 사고 파는 시점을 파악하기 위하여 기울이는 열정이, 하나님께 향하여야 할  마음을 다 빼앗아 가도록 자신을 사단에게 내어맡긴다는 것이다.

결국은 마음을 도둑질한 사단은, 성도를 잡고 휘두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갖게되는 것이다.

결국에는 성도라 할지라도 사단에게 휘둘려서 멸망의 구렁텅이에 빠질 수도 있음을 염려해야한다.

성경에서는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하리라(잠28:20)”고 말씀하신다.

주식 투자로 얻은 이익으로 가난한 자를 위한 구제 헌금으로 쓰여질 때 과연 이를 선하다고 할 수 있을까?


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그리스도인의 몸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다.

비록 아직 죄성을 가진 육체이지만, 성령의 내주하심은 성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증표라고 할 수 있다.

마음에 없는 말을 하는 것은 가식이며 위선이지만, 덕을 세우는 지혜로운 말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우러나오는 하나님께 드리는 성도의 예배라고 할 수 있다.

성도는 비록 죄인이지만, 죄악에 대하여 용서받은 죄인이다.

죄인인 것과 죄악은 차이가 있다.

죄인은 자신의 죄성을 인정하고 몸을 절제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다면  이를 악하다고 할 수 없지만, 더러운 말을 입 밖에 내는 것과 같이, 죄인이 자신의 죄성을 제어하지 않고 사단의 도구로 내어맡긴다며는 이는 하나님보시기에 악한 것이 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죄성에 대한 근본적 해결책을 제시해주지만, 죄의 소원을 다스리지 못한다면 이에 대한 징계를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성도는 사는 동안에는  죄성을 가진 육체를 지니고 살기에, 죄의 소원을 다스려야만 한다.

성도는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인하여, 몸이 거룩한 성전이 되었기에, 몸의 소욕을 다스리는 것이, 진정한 삶에서 드리는 예배라고 할 수 있다.

예배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듯, 선한 말로 듣는 자에게 은혜를 끼치는 것이 진정 우리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물로 드리는것이 될 것이다.



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성령의 역할 가운데 한 가지는 성도를 하나님의 자녀로 온전하게 만들어가는 것이다.

성도는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구원의 날까지 하나님께서 인을 치신다.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에 의한 것이지만, 성도에게는 100%의 책임이 주어진다.

구원은 인간의 행위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누구도 구원을 장담 할 수 없으며, 열매맺지 못하는 행위를 통하여 자신이 택함받지 못한 사람임을 증명해주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

성도의 악행은  마귀에게 틈을 제공 할 뿐만이 아니라 성도를 잡고 흔들 합법적인 손잡이를 제공해주는 것이기에, 자신이 믿었던 구원에 대한 확신이  거짓이었음을 증명해 줄 수도 있다.

거짓말이나, 분을 내는 것, 도둑질 하는것, 더러운 말을 내뱉는 것들은, 사단에게 잡고 흔들 수 있는 합법적인 기회를 제공하기에  성령께서 근심하실 수밖에 없다.

성령은 인격체이시기에, 비록 성도 안에 거하시지만, 성도의 행동 방식을 인격적으로 존중해주신다.

성령께서 근심하시는 것은, 성도가 어디까지 잘못될 수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며, 심지어 용서받을 수 없는 성령 훼방 죄에 이를 수도 있기에, 성도는 사단이 잡고 흔들 손잡이를 제공하지 않는 지혜가 필요하다.



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이러한 행동 방식은 옛 사람을 벗는 행위이면서, 새 사람을 입는 성화의 과정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행위들이다.

posted by Wonho Kim
:
에베소서 2017. 12. 29. 16:00

에베소서 4장 17-24절 말씀 묵상


오늘 에베소 성도들에게 보내는 바울의 편지에는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받은 성도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지 우선 변화된 성도로서 갖추어야 할 모습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전반부는 옛 사람의 허망함에 대하여, 후반부는 생명에 참여하는 새 사람이 입어야 할 옷에 대하여 설명을 한다.


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주 안에서 증언한다)

증언을 한다는 것은 마치 재판관 앞에서 증인으로 말을 하는 것과 같다

증언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맹세하였던 것과 같이, 법적인 책임이 뒤따르는 행동이다.

말을 들은 사람은, 나중에 달리 행동하였을 경우에, 변명의 여지가 없이 행동에 책임을 져야한다.

바울은 새 사람을 입는 성도의 행함이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질 수 있는 행동이어야한다는 입장에서 증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있다.

바울이 에베소 편지를 통하여 전하는 앞으로의 내용들은 새 사람을 입는  성도가 갖추어야 할 행동 양식으로서, 그의 전하는 말을 들은 성도라면 누구나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마음의 허망한 것)

마음의 생각하는 방식이나 생각하는 내용, 생각의 방향성, 그리고 생각의 결과들이 모두 허망한 것, 즉 죽음으로 향하여있다는 것이다.

이는 에베소 사람만의 경우가 아니라, 하나님을 외면하는 모든 이방인들의 보편적인 모습이고, 현재 우리의 삶의 환경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있는 모습이다.

인간이 추구하는 화려함과 굉장함과 아름다움과 다양한 예술 활동들도 결국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로 연결되지 못할 경우에는, 허망한 것으로 마침표를 찍게 될 수 밖에 없다.



18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총명이 어두워짐)

총명이 어두워졌다는 말은 역으로 어두워지기 전에는 총명했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이는 하나님께서 주신 일반 은총을 역으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인간은 모두 아담의 후손이기에,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존재이다.

이들에게 주어진 총명은 그나마 인간에게 남아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희망을 걸고서, 하나님께서 주신  일잔 은총에 속하여 있는 것이다.

일반 은총은 구원의 은혜인 특별 은총으로 연결되지 않을 경우 결국 희망의 불꽃이 사그라들어 어두워 질 수 밖에 없다.

총명이 어두워지고 무지함과 마음이 굳어짐은 죄인으로서의 절망적 상황으로 빠져들어 가는 것이다.

어린 아이들 가운데 있던 총명도 어른이 되면서 더욱 어두워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는 누구에게 배워서가 아니라 인간 본성의 악을 제어할 만큼 성숙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죄성에 대한 제어력은 어른이 되어가면서 성숙해지지만, 주변의 사회 풍습의 집단성으로 말미암아 문제 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 제어가 쉽지 않다.

죄성은 의식적인 교육을 통해서 어느 정도 통제가 가능하지만,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회의 경우에는 인간의 죄성에 대한 통제가 안되어, 사회가 집단적 죄악에 빠져들기도 한다.

특히 에베소와 같이, 우상을 섬기는 사회에서는 인간의 죄성을 다스리기가 쉽지가 않지만, 현대 사회도 별반 다르지 않다.

총명이 어두워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일반 은총을 수용할 만한 환경이 조성되지 못함으로 인하여 나타나는 결과이다.

의식적인 제어로 인하여 사람이 의인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제어하지 못함으로 인한 결과는 돌이킬 수 없는 패망에 이르기 때문이다.

바울이 권하는 새 사람으로서의 행실은 그 자체가 삶을 의롭게 만들어주기 때문이 아니라, 사단에게 휘둘려서 시험에 들지 않게 하기 위함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기 위한 조건들이다.



(생명에서 떠난 삶)

인생을 열심히 사는 것은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정한 목적은 상실된 채, 현실에서 쫓기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인생은 육체적 욕구를 쫓아가는 삶이다.

하지만 육체의 죽음은 푯대를 상실하는 것이된다.

열심을 내었지만 정작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이 인생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는 보시기에 좋았던 세계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생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신다.



19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사람은 원래부터 감각이 없지는 않았다.

삶의 환경에 익숙하여지면, 감각이 무뎌진다.

에베소 사람들은 우상 숭배에 익숙하여졌기에, 방탕과 더러움이 잘못되었다는 의식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문화 충격은 대부분 다른 문화권으로 이동하면서 생기게 된다.

하지만 그 문화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서 문화에 동화되고, 그 문화에 일체감을 느끼면서, 충격이 아닌 친근감, 더 나아가 향수를 느끼게 된다.

인간은 사회적 본성을 가지고 있기에 문화를 수용하게되면, 그 다음은 그 문화의 주체가 되어버린다.

이러한 상황은 사회의 방탕함에 대해서도 감각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내어맡김으로서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게된다.

이러한 방탕은 결국 모든 것을 파멸로 이끌게된다.

에베소 지역의 우상 숭배는 주로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부터 유래되었다.

메소포타미아 주변 지역은, 하나님을 대체하는 신들의 본거지로서, 이들의 문화는 이러한 신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우상들의 급속한 전파는 인간의 체질이 우상의 속성과 들어맞기 때문이다.

우상들을 중심으로한 문화는 인간의 죄성을 자극함으로서 사람들로하여금 철저하게 사단의 노예가 되게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게 된다.

성도가 죄를 가볍게보지 말아야 하는 것은, 마치 어린 자녀가 아무 준비도 없이 사자굴에 들어가는 것과 같이 위험할 뿐만이 아니라, 면역력이 없는 환자를 세균에 노출시키는 것과 같다.

비록 구원에는 문제가 없을지라도, 그 삶은 열매를 맺지 못할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고자하는 삶의 아름다움과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소지가 없어지며, 하나님의 구원의 길을 가로막는 어리석은 자가 될 수 밖에 때문이다.

이는 전신갑주를 입고 싸워야 할 군인이 무장을 해제하고서 적진에 들어가 그들의 전투에 동참하는 지극히 어리석은 군인의 모습이다.

건실한 삶은 영적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어떤 신학자는 부인과 자식을 놔두고 여비서와 동거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관하여 방대한

술을 하기도하였는데, 과연 그렇게 쓰여진 저술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저술이었을까 의심이 될 수 밖에 없다.

삶의 변화를 외치던 “근원적 혁명”의 저자 존 하워드 요더도, 정작 자신의 성추행 사건으로 몰락하는 경우를 보기도 한다.

성추행 사건에 연루된  J 목사의 뻔뻔함과 이를 치리하지 못하는 교단의 부패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더럽히는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악행의 심각한 문제는, 이들이 다른 유사한 악행을 저지른 이들에게 악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악의 확산을 조장한다는 것이다.

아간의 범죄의 심각성은 아간이 숨겼던 물건이 우상 숭배하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시날산이라는 것이었고, 이것은 이스라엘을 손쉽게 부패시킬 수 있는 소지가 있었기에,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아간의 죄는 철저하게 다스려졌어야 했다.

교회 공동체에 들어온 악행들은 공동체 전체를 침몰 시킬 수 있다는 관점에서 결코 가볍게 다루어져서는 안될 것이다.



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옷입은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새 사람의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새 사람의 옷을 입는 것은 그리스도를 배움으로부터 출발되며, 이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움으로서 습득 될 수 있다.

의의 옷을 입은 것은 단 번에 성취된 칭의의 사건이지만, 새 사람의 옷을 입는 것은 오랜 시간이 요구되는 성화의 과정이다.

그리스도를 배우는 것은 성화의 꼭 필요한 과정이다.



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예수를 증거하는 진리에 대하여 듣고 가르침을 받는 것은 칭의를 위한 전제 조건이면서 동시에 성화의 과정에서도 필연적으로 따라주어야하는 과정이다.

진리를 듣고 가르침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다.

진리는 그리스도를 증거하고있기에, 그리스도를 증거하지 않는 것은 진리가 될 수가 없다.

Y대학교에서 건학 이념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이다.

하지만 학교의 표어와는 달리 학교에서는 진리를 제대로 가르치지도 않을 뿐만이 아니라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로 가르치는 인본주의 방식을 따르고 있다.

학문과 진리는 구분되어야한다.

진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기에 학문이 진리가 될 수는 없다.

진리는 상대적이 아니라 절대적이다.

진리는 문화에 따라서 변화되는 것이 아니다.

오랜 보수 전통 가운데 폐쇄적인 결혼문화권에서 생활하였던 청년들이  서구의 동거문화 가운데 들어가게되면 상당한 충격을 받는다.

생각의 변화를 거부하면 시대에 뒤 떨어진 사람이 된다.

이들에게 결혼문화는 구시대적 유물일 뿐이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결혼 문화만이 진리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의 편지를 받은 에베소 성도들이 듣고 가르침을 받아야 하였던 것은, 에베소의 풍요의 여신 아데미(아르테미스)의 영향으로 성적으로 문란하였던 풍조에서 떠나, 하나님의 자녀로서 진리 안에 거하며 올바른 결혼문화를 정착시키는 것도 한 가지 였을 것이다.

성도들에게는 문화와 진리가 충돌 할 때 항상 진리 안에 거하여야하고, 이를 위해서는 진리를 듣고 가르침을 받아서 죄악에 대하여 무감각한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전통과 권위와 권력을 거부하는 특징을 보여주는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에서, 진리 안에 거하는 것은 어느 시대보다도 지혜가 요구되며, 죄악에 대하여 무감각해지기 십상이다.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유혹의 욕심은 인간의 본성이 죄악과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보여준다.

10여년 전에 뉴욕에서의 정전 사태는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죄악에 친밀한 가를 보여주었던 사건이었다.

정전으로 인한 순간적인 어두움은, 많은 인간들이 서로를 해하면서, 성폭행과 도적질과 폭력이 난무하였던 아비규환의 시간이었다.

인간은 본성은, 하나님의 일반 은총으로 죄성이 억제될 뿐이지, 결코 선하다고 할 수는 없다.

비록 일그러져서 형체를 알아볼 수는 없지만, 인간에게는 그나마 하나님의 형상의 그림자가 남아있기에, 인간을 통해서 조금이나마 하나님을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모습은 사단의 종노릇하는 사단의 좀비라고 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셔서 거짓 것을 믿게 하시는 것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신다.(데후2:11-12)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에게 유혹의 욕심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고 하는 것은 그들과 같이 심판의 대열에서 벗어나게하려는 것이다.

현대인의 삶의 모습 가운데에는 썩어져 가는 구습에 대한 구분이 불분명한 것이 많기에, 성도에게는 많은 지혜가 요구된다.

사단은 성도를 미혹하는 방법으로서, 현대인들의 삶의 방식에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를 것을 요구한다.

이를 용납하는 행위는 사단에게 자신을 휘둘게할 손잡이는 제공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일단 롤러코스터에 탄 사람은 중간에 내릴 수 없기에 정지될 때까지 많은 고생을 할 수 밖에 없다.

사단에게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 현대 사회는 어느 때 보다도 성도들에게 많은 지혜가 요구된다.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칭의는 단번에 오지만, 칭의받은 자에게 요구되는 성화의 과정은 평생을 요구한다.

존 머레이John Murray는 성화를 두 가지, 즉 단번에 이루어지는 결정적 성화definitive sanctification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점진적 성화progressive sanctification의 두 단계로 나누지만,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새 사람은 입은 자, 즉 성화된 자가 아닌, 새 사람을 입어야 할, 즉 성화의 과정이 요구되는 자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 것은 신분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신분에 걸맞게 요구되는 행동이다.

성도 자체는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에는 죄성을 가진 육신 안에 거하기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사람의 옷을 입는 과정이 필요하다.

옷은 겉으로 드러나는 표현방식이다.

옷은 사람을 변화시켜준다.

마치 경찰관이 경찰복을 하고서 범죄에 가담할 수 없듯이, 성도는 새 사람의  옷을 입음으로서 자신 안에 내재해있는 죄성을 다스려야한다.



(나가는 말- 문화 변혁)

“새 하늘과 새 땅”의 저자 미처드 미들턴은 문화 변혁을 그리스도인이 해야할 대위임령보다도 더 고차원적인 행동 양식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에베소서를 통해서 에베소 성도들에게 권면하는 바울의 편지에는 어디에도 문화물의 천국보존을 위한 문화 변혁에 참여 할 것을 요구하는 구절이 없다.

바울의 권면은 문화의 변화보다는 성도의 변화를 요구한다.

우상 숭배가 가득했던 에베소에서 성도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문화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성도 자신이 새 사람으로서 행하여야 할 삶의 양식으로서, 바울은 이에 대하여 원론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성도에게 권면하는 삶의 변화는 변화된 신분에 걸맞는 행동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는 윤리 도덕의 변화도 아니며, 문화의 변혁을 위한 것도 아니다.

타락한 문화 가운데 유혹을 쫓는 구습은, 심판받을 자에게 심판 받기에 합당한 근거를 제공할 뿐이다.



posted by Wonho Kim
:
에베소서 2017. 12. 29. 15:59

에베소서 4장 1-16절 말씀 묵상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바울의 갇힘은 희생이 따르는 신앙 생활이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준다.

많은 성도들이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다하면서, 신앙 생활이 자신의 생활에 손상이 되거나 제약이 될 때, 손해보는 것을 감당하지 못해서 세상과 타협하거나 분노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바울의 갇힘은 신앙으로 인한 삶의 영역에서의 희생을 보여주면서, 자신의 교회를 위한 신앙생활이 삶의 영역에 깊이 들어와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교회 생활과 일상 생활의 이원화를 추구하는 신자들에게 성도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교훈을 보여주는 모습이다.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이 네 가지 삶의 모습은 구약 이스라엘에서는 볼 수도 없었고, 생각 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희생과 바울의 투옥으로 이어지는 행동 방식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보기에는 저주의 결과이며, 수치스러운 것이었다.

구약 이스라엘에서 희생은 죄의 결과이며, 투옥은 죄값을 치루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희생적 삶의 모습을,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 성도가 갖추어야 할 마땅한 성품과 연계시키고 있다.


(겸손)

이스라엘 공동체의 패망은 교만과 관련되어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교만을 질책하셨는데,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것을 자기의 것으로 취한 때문이다.

신약의 성도가 받은 지위와 능력도,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이기에, 성도의  겸손은 교회 공동체가 실족하지 않기 위해서 꼭 필요한 과정이다.


(온유)

온유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에게서만 볼 수 있는 성품이다.

온유는, 하나님의 선택에 의하여 부름받은 자에게서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의 열매이다.

부드러움으로는 세상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해져야한다.

하지만 온유한 자는 세상에서의 희생을 감수하여야한다.

온유한 자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과 같이, 세상의 핍박에 대하여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아야한다.

온유한 자는 자신을 주장하지 않으며, 시기하거나 다투지 않으며, 희생을 각오하면서 이 세상을 살아간다.


(오래 참음)

오래 참음은 마치 고무줄을 당기는 것과 같이 언젠가는 움직일 것을 기다리면서,  움직임을 늦추는 것이 아니다.

오래 참음을 긴장감을 더욱 고조시키는 인내가 아니다.

오래 참음은 순간 순간 좌절과 포기와 낙담과 절망이 쌓여가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단순히 움직일 시간을 늦추거나, 참지 말아야 할 시간을 늦추는 것은, 살아있는 자의 내적 능력의 표현일 뿐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성도는 순간 순간 분노와 시기와 다툼의 생각을 죽임으로서, 온유한 모습을 드러내는 가운데 인간적인 행동 방식을 접어야한다.

움직임을 결정하고 행동하여야 하는 순간은,  오직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식으로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진행되어야 한다.


(용납)

용납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상황을 수용하는 것이다.

용납은 오래참음의 결과이다.

여기에는 분별력이 요구된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용납하는 것에 대하여 질책한다. (고후 11:4)

부정적 상황은 긍정적 상황을 위한 과정으로 용납될 수도 있겠지만, 불의를 좋아하는 자를 심판 위하여 허용된 것도 있기에 조심해서 용납하여야 한다.

자신의 욕심에 끌려서 미혹되는 것과 사랑 가운데 용납하는 것은 구분되어야한다.

서점에 나와있는 신앙 서적과 신학 서적 가운데는 진리의 영이 아닌 미혹의 영으로 쓰여진 책들이 많이 있다.

성도에게 요구되는 용납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의 영이 성도의 마음 가운데 역사하는데 따라서 이러한 것들이 그리스도의 하나됨 가운데 속하여 있는지 분별하여야 할 것이다.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성도는 교회 공동체의 하나됨을 위해서 평안의 연결로 성령의 하나됨을 유지하도록 열심을 내야한다.

하나됨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는 삼위 하나님의 하나되심이다.

하나됨은 공동체의 기본 요건이다.

아담은 지음을 받았을 때 삼위 하나님의 하나된 공동체적 형상을 부여받았다.

에덴에서의 순종은 궁극적으로 창조 세계에 대한 하나됨의 완성을 위해서 필수적인 요건이었다.

아담의 불순종은 하나됨의 파괴이면서, 동시에 공동체의 파괴라고 할 수 있다.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아간이나 다윗의 범죄와 같이, 한 개인의 불순종이 공동체 전체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던 것은, 한 개인의 불순종이 공동체의 하나됨에 미치는 파급력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준다.

신약의 교회는 상실되었던 공동체의 회복이면서, 하나로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이다.

성도는 삼위 하나님의 가족으로 부름을 받았기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으며,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서의 자격이 주어진다.

이 모든 것은 성령의 하나되게하는 역사로 말미암은 것이고, 성도는 성령 안에서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용납 그리고 평안의 매는 줄로 하나된 교회 공동체를 가꾸는데 참여하여야한다.

교회에서의 교만과 다툼과 분열은, 성령의 하나됨을 방해하는 일이라는데  심각성이 있다.


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이는 만유내재신론과 결부되어서는 않된다.

만유내재신론Panentheism은 하나님께서 만물 안에 계실 뿐만이 아니라 만물이 신이라는 개념까지 나아간다.

하나됨은 삼위 하나님이 하나이신 것과 같이, 궁극적으로 모든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성도도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몰몬교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성도가 신적인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은혜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선물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모든 이들에게 주시는 보편적인 일반 은혜와 택한 자에게 주시는 특별 은혜도 모두 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은혜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 땅에 교회를 세워나아가는 것이다.

성도가 사도로, 선지자로, 복음전하는자로, 목사로, 교사로 부름받은 것은 그리스도가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서 주신 선물의 분량대로 맡겨진 직책들이다.


8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인간들은 모두 다 사단에게 사로잡혔던 자들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단에 사로잡혔던 사람들을, 자신의 종으로 사로잡으시고서, 이들에게 선물을 주신다.

원래 아담이 에덴에서 받은 직분은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직분이었다.

이러한 직분은 성전으로서의 에덴을 관리하기 위한 직분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마지막 아담으로서, 사단에게 빼앗겨 왜곡되고 변질되었던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직분을 회복하시고서, 자신과 연합된 성도들에게 이러한 직분을 위임시키신 것이다.

성전으로서의 에덴은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직분만으로도 충분했지만, 타락한 세상 가운데 세워지는 교회 공동체에서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직분은 좀 더 다양해야 했기에, 사도로서, 선지자로서, 복음전하는자로서, 목사로서, 교사로서의 다양성이 필요했으며, 이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로 연합될 필요가 있었다.

그리스도의 승천은, 성령의 강림하심과 더불어, 성도들에게 이 땅에서의 교회의 사역이 맡겨졌다.

성도들에게 주어진 이러한 다양한 선물들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기 위한 공동체적 사역들이다.



9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땅 아래 낮은 곳에 지옥, 즉 하데스를 의미하느냐에 대한 논란이 있었지만, 지옥을 뜻한다면 이를 뒷받침할만한 성경의 다른 곳에서의 설명을 찾아야만 한다.

땅 아래 낮은 곳보다는  “낮은 곳인 땅으로”라는 표현이 문맥에 더 적합하다고 본다.


10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11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사도와 선지자는 신약 성경이 완성되기 이전에 필요한 사역자들이었다.

성경이 완성된 이후에도 사도와 선지자를 자칭하는 것은 완성된 성경에 더하려는 행위이다.

사도행전 29장이나, 목사에게 사도라는 명칭을 적용하려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다양한 은사들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은사주의는 오히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허물 수가 있기에 경계해야 한다.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믿는 것과 아는 일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성도들에게 많은 신학적 지식이 요구된다.

아직도 교회에서 성경이나 신학이야기를 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받는 분위기다.

한국 교회에 이단들이 쉽게 침투할 수 있는 것은, 교회에서의 충성 봉사에는 열심이지만 정작 성경을 체계적으로 알아가는 일에 대해서는 소홀하기 때문이다.

어떤 목사는 성도가 성경에 대하여 관심이 많으면 부담스러워한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교회는 목회자의 전유물이기 이전에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개념이 필요하다.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단과 거짓의 유혹에도 흔들림없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한다.

유독 한국 교회에 이단이 많은 것은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일을 등한시하기 때문이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과 아는 일에 균형을 이루어야만 한다.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진리는 논쟁을 유발할 소지가 많고, 자칫 성도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있다.

진리에 대해서 서로의 생각이 다를 때,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분열을 유발시키지 않기 위해서는, 이를 사랑 안에서 극복해 나아가야한다.

하지만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왜곡된 진리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상하게 할 수 있기에, 진리는 반드시 바로 세워져야하며, 이는 자칫 분열을 가져오기 십상이다.

하나의 진리 안에서 다양한 교단이 있는 것은,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그리스도의 터에 뿌리를 내리고 견고하게 세워져가는 일은 그리스도인에게 꼭 필요한 일이고, 중요한 일이지만, 그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다.

이를 극복하는 수단은 사랑이지만, 인간에게는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사랑은 구약의 이스라엘과 신약의 교회를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사랑에는 희생이 따른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희생이 없는 사랑은 능력이 없는 사랑이다.

교회의 분열과 교단의 분열과 성도 간의 분열은 희생이 없는 공허한 사랑을 외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의 희생을 통하여, 공동체의 회복을 위한 희생적 사랑의 본을 보여주셨기에, 성도는 자기 희생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워나가야 할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