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2017. 12. 29. 16:00

에베소서 4장 17-24절 말씀 묵상


오늘 에베소 성도들에게 보내는 바울의 편지에는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받은 성도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지 우선 변화된 성도로서 갖추어야 할 모습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전반부는 옛 사람의 허망함에 대하여, 후반부는 생명에 참여하는 새 사람이 입어야 할 옷에 대하여 설명을 한다.


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주 안에서 증언한다)

증언을 한다는 것은 마치 재판관 앞에서 증인으로 말을 하는 것과 같다

증언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맹세하였던 것과 같이, 법적인 책임이 뒤따르는 행동이다.

말을 들은 사람은, 나중에 달리 행동하였을 경우에, 변명의 여지가 없이 행동에 책임을 져야한다.

바울은 새 사람을 입는 성도의 행함이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질 수 있는 행동이어야한다는 입장에서 증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있다.

바울이 에베소 편지를 통하여 전하는 앞으로의 내용들은 새 사람을 입는  성도가 갖추어야 할 행동 양식으로서, 그의 전하는 말을 들은 성도라면 누구나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마음의 허망한 것)

마음의 생각하는 방식이나 생각하는 내용, 생각의 방향성, 그리고 생각의 결과들이 모두 허망한 것, 즉 죽음으로 향하여있다는 것이다.

이는 에베소 사람만의 경우가 아니라, 하나님을 외면하는 모든 이방인들의 보편적인 모습이고, 현재 우리의 삶의 환경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있는 모습이다.

인간이 추구하는 화려함과 굉장함과 아름다움과 다양한 예술 활동들도 결국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로 연결되지 못할 경우에는, 허망한 것으로 마침표를 찍게 될 수 밖에 없다.



18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총명이 어두워짐)

총명이 어두워졌다는 말은 역으로 어두워지기 전에는 총명했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이는 하나님께서 주신 일반 은총을 역으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인간은 모두 아담의 후손이기에,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존재이다.

이들에게 주어진 총명은 그나마 인간에게 남아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희망을 걸고서, 하나님께서 주신  일잔 은총에 속하여 있는 것이다.

일반 은총은 구원의 은혜인 특별 은총으로 연결되지 않을 경우 결국 희망의 불꽃이 사그라들어 어두워 질 수 밖에 없다.

총명이 어두워지고 무지함과 마음이 굳어짐은 죄인으로서의 절망적 상황으로 빠져들어 가는 것이다.

어린 아이들 가운데 있던 총명도 어른이 되면서 더욱 어두워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는 누구에게 배워서가 아니라 인간 본성의 악을 제어할 만큼 성숙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죄성에 대한 제어력은 어른이 되어가면서 성숙해지지만, 주변의 사회 풍습의 집단성으로 말미암아 문제 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 제어가 쉽지 않다.

죄성은 의식적인 교육을 통해서 어느 정도 통제가 가능하지만,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회의 경우에는 인간의 죄성에 대한 통제가 안되어, 사회가 집단적 죄악에 빠져들기도 한다.

특히 에베소와 같이, 우상을 섬기는 사회에서는 인간의 죄성을 다스리기가 쉽지가 않지만, 현대 사회도 별반 다르지 않다.

총명이 어두워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일반 은총을 수용할 만한 환경이 조성되지 못함으로 인하여 나타나는 결과이다.

의식적인 제어로 인하여 사람이 의인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제어하지 못함으로 인한 결과는 돌이킬 수 없는 패망에 이르기 때문이다.

바울이 권하는 새 사람으로서의 행실은 그 자체가 삶을 의롭게 만들어주기 때문이 아니라, 사단에게 휘둘려서 시험에 들지 않게 하기 위함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기 위한 조건들이다.



(생명에서 떠난 삶)

인생을 열심히 사는 것은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정한 목적은 상실된 채, 현실에서 쫓기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인생은 육체적 욕구를 쫓아가는 삶이다.

하지만 육체의 죽음은 푯대를 상실하는 것이된다.

열심을 내었지만 정작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이 인생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는 보시기에 좋았던 세계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생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신다.



19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사람은 원래부터 감각이 없지는 않았다.

삶의 환경에 익숙하여지면, 감각이 무뎌진다.

에베소 사람들은 우상 숭배에 익숙하여졌기에, 방탕과 더러움이 잘못되었다는 의식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문화 충격은 대부분 다른 문화권으로 이동하면서 생기게 된다.

하지만 그 문화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서 문화에 동화되고, 그 문화에 일체감을 느끼면서, 충격이 아닌 친근감, 더 나아가 향수를 느끼게 된다.

인간은 사회적 본성을 가지고 있기에 문화를 수용하게되면, 그 다음은 그 문화의 주체가 되어버린다.

이러한 상황은 사회의 방탕함에 대해서도 감각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내어맡김으로서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게된다.

이러한 방탕은 결국 모든 것을 파멸로 이끌게된다.

에베소 지역의 우상 숭배는 주로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부터 유래되었다.

메소포타미아 주변 지역은, 하나님을 대체하는 신들의 본거지로서, 이들의 문화는 이러한 신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우상들의 급속한 전파는 인간의 체질이 우상의 속성과 들어맞기 때문이다.

우상들을 중심으로한 문화는 인간의 죄성을 자극함으로서 사람들로하여금 철저하게 사단의 노예가 되게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게 된다.

성도가 죄를 가볍게보지 말아야 하는 것은, 마치 어린 자녀가 아무 준비도 없이 사자굴에 들어가는 것과 같이 위험할 뿐만이 아니라, 면역력이 없는 환자를 세균에 노출시키는 것과 같다.

비록 구원에는 문제가 없을지라도, 그 삶은 열매를 맺지 못할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고자하는 삶의 아름다움과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소지가 없어지며, 하나님의 구원의 길을 가로막는 어리석은 자가 될 수 밖에 때문이다.

이는 전신갑주를 입고 싸워야 할 군인이 무장을 해제하고서 적진에 들어가 그들의 전투에 동참하는 지극히 어리석은 군인의 모습이다.

건실한 삶은 영적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어떤 신학자는 부인과 자식을 놔두고 여비서와 동거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관하여 방대한

술을 하기도하였는데, 과연 그렇게 쓰여진 저술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저술이었을까 의심이 될 수 밖에 없다.

삶의 변화를 외치던 “근원적 혁명”의 저자 존 하워드 요더도, 정작 자신의 성추행 사건으로 몰락하는 경우를 보기도 한다.

성추행 사건에 연루된  J 목사의 뻔뻔함과 이를 치리하지 못하는 교단의 부패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더럽히는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악행의 심각한 문제는, 이들이 다른 유사한 악행을 저지른 이들에게 악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악의 확산을 조장한다는 것이다.

아간의 범죄의 심각성은 아간이 숨겼던 물건이 우상 숭배하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시날산이라는 것이었고, 이것은 이스라엘을 손쉽게 부패시킬 수 있는 소지가 있었기에,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아간의 죄는 철저하게 다스려졌어야 했다.

교회 공동체에 들어온 악행들은 공동체 전체를 침몰 시킬 수 있다는 관점에서 결코 가볍게 다루어져서는 안될 것이다.



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옷입은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새 사람의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새 사람의 옷을 입는 것은 그리스도를 배움으로부터 출발되며, 이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움으로서 습득 될 수 있다.

의의 옷을 입은 것은 단 번에 성취된 칭의의 사건이지만, 새 사람의 옷을 입는 것은 오랜 시간이 요구되는 성화의 과정이다.

그리스도를 배우는 것은 성화의 꼭 필요한 과정이다.



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예수를 증거하는 진리에 대하여 듣고 가르침을 받는 것은 칭의를 위한 전제 조건이면서 동시에 성화의 과정에서도 필연적으로 따라주어야하는 과정이다.

진리를 듣고 가르침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다.

진리는 그리스도를 증거하고있기에, 그리스도를 증거하지 않는 것은 진리가 될 수가 없다.

Y대학교에서 건학 이념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이다.

하지만 학교의 표어와는 달리 학교에서는 진리를 제대로 가르치지도 않을 뿐만이 아니라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로 가르치는 인본주의 방식을 따르고 있다.

학문과 진리는 구분되어야한다.

진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기에 학문이 진리가 될 수는 없다.

진리는 상대적이 아니라 절대적이다.

진리는 문화에 따라서 변화되는 것이 아니다.

오랜 보수 전통 가운데 폐쇄적인 결혼문화권에서 생활하였던 청년들이  서구의 동거문화 가운데 들어가게되면 상당한 충격을 받는다.

생각의 변화를 거부하면 시대에 뒤 떨어진 사람이 된다.

이들에게 결혼문화는 구시대적 유물일 뿐이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결혼 문화만이 진리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의 편지를 받은 에베소 성도들이 듣고 가르침을 받아야 하였던 것은, 에베소의 풍요의 여신 아데미(아르테미스)의 영향으로 성적으로 문란하였던 풍조에서 떠나, 하나님의 자녀로서 진리 안에 거하며 올바른 결혼문화를 정착시키는 것도 한 가지 였을 것이다.

성도들에게는 문화와 진리가 충돌 할 때 항상 진리 안에 거하여야하고, 이를 위해서는 진리를 듣고 가르침을 받아서 죄악에 대하여 무감각한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전통과 권위와 권력을 거부하는 특징을 보여주는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에서, 진리 안에 거하는 것은 어느 시대보다도 지혜가 요구되며, 죄악에 대하여 무감각해지기 십상이다.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유혹의 욕심은 인간의 본성이 죄악과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보여준다.

10여년 전에 뉴욕에서의 정전 사태는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죄악에 친밀한 가를 보여주었던 사건이었다.

정전으로 인한 순간적인 어두움은, 많은 인간들이 서로를 해하면서, 성폭행과 도적질과 폭력이 난무하였던 아비규환의 시간이었다.

인간은 본성은, 하나님의 일반 은총으로 죄성이 억제될 뿐이지, 결코 선하다고 할 수는 없다.

비록 일그러져서 형체를 알아볼 수는 없지만, 인간에게는 그나마 하나님의 형상의 그림자가 남아있기에, 인간을 통해서 조금이나마 하나님을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모습은 사단의 종노릇하는 사단의 좀비라고 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셔서 거짓 것을 믿게 하시는 것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신다.(데후2:11-12)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에게 유혹의 욕심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고 하는 것은 그들과 같이 심판의 대열에서 벗어나게하려는 것이다.

현대인의 삶의 모습 가운데에는 썩어져 가는 구습에 대한 구분이 불분명한 것이 많기에, 성도에게는 많은 지혜가 요구된다.

사단은 성도를 미혹하는 방법으로서, 현대인들의 삶의 방식에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를 것을 요구한다.

이를 용납하는 행위는 사단에게 자신을 휘둘게할 손잡이는 제공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일단 롤러코스터에 탄 사람은 중간에 내릴 수 없기에 정지될 때까지 많은 고생을 할 수 밖에 없다.

사단에게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 현대 사회는 어느 때 보다도 성도들에게 많은 지혜가 요구된다.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칭의는 단번에 오지만, 칭의받은 자에게 요구되는 성화의 과정은 평생을 요구한다.

존 머레이John Murray는 성화를 두 가지, 즉 단번에 이루어지는 결정적 성화definitive sanctification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점진적 성화progressive sanctification의 두 단계로 나누지만,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새 사람은 입은 자, 즉 성화된 자가 아닌, 새 사람을 입어야 할, 즉 성화의 과정이 요구되는 자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 것은 신분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신분에 걸맞게 요구되는 행동이다.

성도 자체는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에는 죄성을 가진 육신 안에 거하기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사람의 옷을 입는 과정이 필요하다.

옷은 겉으로 드러나는 표현방식이다.

옷은 사람을 변화시켜준다.

마치 경찰관이 경찰복을 하고서 범죄에 가담할 수 없듯이, 성도는 새 사람의  옷을 입음으로서 자신 안에 내재해있는 죄성을 다스려야한다.



(나가는 말- 문화 변혁)

“새 하늘과 새 땅”의 저자 미처드 미들턴은 문화 변혁을 그리스도인이 해야할 대위임령보다도 더 고차원적인 행동 양식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에베소서를 통해서 에베소 성도들에게 권면하는 바울의 편지에는 어디에도 문화물의 천국보존을 위한 문화 변혁에 참여 할 것을 요구하는 구절이 없다.

바울의 권면은 문화의 변화보다는 성도의 변화를 요구한다.

우상 숭배가 가득했던 에베소에서 성도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문화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성도 자신이 새 사람으로서 행하여야 할 삶의 양식으로서, 바울은 이에 대하여 원론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성도에게 권면하는 삶의 변화는 변화된 신분에 걸맞는 행동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는 윤리 도덕의 변화도 아니며, 문화의 변혁을 위한 것도 아니다.

타락한 문화 가운데 유혹을 쫓는 구습은, 심판받을 자에게 심판 받기에 합당한 근거를 제공할 뿐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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