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2017. 12. 29. 16:37

에베소서 5장 1-7절 말씀 묵상



1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자녀들이 부모의 사랑의 받는 이유 가운데 한 가지는,  그들 가운데 부모의 모습이 투영되기 때문이다.

자녀들이 부모의 흉내를 내는 것은, 부모의 모습이 자녀 가운데 투영되었다는 것이며, 이는 자녀를 낳은 부모의 기쁨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형상이 투영될 때 하나님의 기쁨이 된다.

인간 안에 남아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이미 아담 안에서 일그러져있지만, 다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자는,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로 인해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어야한다.


사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온전하게 회복될 순 없겠지만, 행위에 있어서는 마땅히 하나님의 자녀에 걸맞는 행동을 하여야한다.

이러한 행동은, 방법론적으로는 인위적이지만, 하나님을 본받는 방식의 행동을 취함으로서 어느 정도는 성화의 과정으로서의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신자는 더 이상 사단의 종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값주고 사신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하나님께서 신자들로 하여금 자녀에 걸맞는 행동을 요구하시는 것은, 이들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인정해 주시는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사랑에는 희생이 따른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기에 부모는 기쁨 가운데 자녀를 위해서 희생을한다.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은 말로만의 사랑이 아니라 실천으로 증명된 희생적 사랑의 결과이다.

사랑 가운데서의 희생에는 기쁨 가운데 자원하는 마음이 있어야한다.

희생에 기쁨과 자원하는 마음이 없다면, 억울함과 손해본다는 피해의식이 뒤따르게되기에, 이러한 희생은 또 다른 부작용을 낳을 수 밖에 없다.

교회생활에서 기쁨과 자원하는 마음이 없이 희생적 봉사를 할 경우, 그 후유증은 그대로 성도간의 갈등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택한 자를 사랑하시는 가운데, 이들의 구원에 대한 기쁨의 고통과 자원하는 희생이 있었다.

택함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기쁨이기에, 자원하는 희생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형상이 성도들 가운데서도 나타날 때, 이는 하나님의 기쁨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사랑하는 자를 위한 구속적 희생이지만, 성도 간의 희생은 구속적인 희생이 아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릴 수는 있어도, 이는 구속적이지도 않고 속량과는 상관없다.

새관점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으라는 것은, 단지 그리스도의 희생 정신뿐이다.

그들이 보는 그리스도의 희생은 구속적이 아니기에, 그리스도에 대하여 구속적 희생을 말하는 개혁주의의 관점과는 차이가 있다.


3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음행)

하나님의 창조 목적 가운데 한 가지는, 피조물이 하나님과의 완전한 연합으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아담의 불순종은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서 완전히 이탈하는 행위로서, 하나님과의 분리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음행은 정상적인 관계에서 이탈하는 관계성의 파괴 행위이다.

우상 숭배와 음행은 밀접하게 연관되어있으며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상속을 포기하는 것이다.

음행은 타락한 인간의 죄성과 깊게 연관되어있다.

아담의 범죄는 하나님을 떠난 행위였으며, 하나님의 말을 듣지 않고 사단의 말을 들음으로서, 모든 인류에게 음행의 문을 열어준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아담에게 명하신 행위 언약을 파기하는 범법의 행동이었다.

정상적인 관계는 약속을 근거로 한다.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는 약속이 없어도, 태어남 자체로 이미 약속이 형성되어있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자체에 하나님과 언약 관계가 내포되어있다.

사단의 말을 듣고서, 하나님께 불순종한 행위는, 약속 즉 언약을 파기한 행위였으며, 이는 음행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타락한 아담의 자손이기에,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은 물론, 서로에 대한 약속을 전제로한 결혼 문화에 대해서도 거부하려는 경향이 있다.

동거문화는 서로에 대한 의무적 관계성에서 벗어나려는 성향에서 생겨난 문화이다.

결혼은 서로에 대한 약속을 전제로하는 것이기에, 자신의 감정과 상황에 관계없이 서로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여야만 한다.

마치 시내산 언약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행위 언약 성격의 약속을 하였던 것과 같이 결혼도 상대방에 대한 의무를 다하여야한다.

이스라엘은 우상숭배와 음행의 연고로 인하여, 행위 언약을 파기했기에, 하나님의 저주로 바벨론 유배 생활을 하여야만 했다.

만약에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행위 언약 관계에 있지 않았었다면, 이스라엘의 음행의 연고로, 이스라엘을 저주할 수 없으셨을 것이며, 대신에 이스라엘은 이방 민족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동거문화에서는, 결혼과는 달리 계약 관계에 있지 않기에, 서로가 음행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다.

동거 관계는 마치 하나님과 이방 민족과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동거문화는 대부분 음행에 대한 부담감에서 출발한다.

서로에 대한 의무를 지키길 원치 않기에, 결혼하고서 음행한 연고로 책임을 지는 것보다는, 음행에 대한 부담을 덜고자 동거를 선호하게되는 것이다.

결혼문화는 시대에 뒤진 문화가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창조 법칙의 범주에 속한 것이다.

결혼은, 모형과 그림자로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예표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라는 재산의 공유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듯이, 결혼은 서로의 소유를 공유하는 것이다.

동거는 상대방의 소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가 없다.

동거 문화는 철저히 자기 중심적인 삶의 방식으로서, 희생적 공동체성을 추구하는 하나님 나라의 속성과는 부합되지 않는다.

동거 문화는,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천국의 상속자, 그리고 공동체를 위한 희생적 사랑의 행위라는 성경의 중요한 특징들과는 대립되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이들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에게 음행을 피하라고한 것은, 이스라엘의 음행으로 인하여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성도들의 음행은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행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온갖 더러운 것)

육체적으로도 더러운 것이 있고 생활 방식과 동기에 있어서도 더러운 것이 있을 수 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회칠한 무덤과 같이 더러운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그나마 최소 한도의 명맥을 유지하고있을 뿐이다.

인간의 존재 방식이나 동기는 원론적인 더러움이지만, 바울이 말하는 더러운 것은 특히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외적인 행동방식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바울이 말하는 온갖 더러운 것들은 주로 성생활과 관련이 되어있을 것이다.

성에 대한 무분별한 남용은 음행과 동거문화는 물론, 동성애와도 관련이 있기에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고 성도들에게 부탁했을 것이다.

에베소의 아데미 여신을 중심으로한 문란한 성생활에 대한 관점은 오늘날의 동성애자들에 대한 관점과 비슷했으리라 생각된다.

비록 인권이 하나님의 일반 은총의 영역에 속하여있다고 하더라도, 인권이 하나님의 명령과 정면으로 대립되는 경우가 바로 동성애에 대한 인권일 것이다.

동성애를 여러가지 생물학적인 인자로 정당화시키려고 하는 이들도 있지만, 동성애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말씀 뿐만이 아니라, 자연법에도 위배되는 더러운 것이다.

타락 이전에 여성으로서의 하와는, 아담을 위해서 지어졌고, 아담은 여자를 보고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라고 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다.

남자와 여자가 결합하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 법칙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세계를 보시고 특히 마지막으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고 하신 것은, 사람을 포함한 자연의 모든 운행 원리들이 하나님의 창조 법칙에 순종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만물 가운데 창조 질서에서 벗어난 것이 없었기에 보시기에 좋으셨을 것이다.

타락 이후에 인간의 속성은 많은 변질을 가져왔으며,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었으며, 삶의 환경에는 파괴적이고 부정적 요소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인간의 체질도 아담의 타락과 더불어 변화가 일어나면서, 성에 대한 왜곡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타락 이후에 창조 세계의 속성들에도 부정적인 요소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노아 홍수로 인한 환경의 급격한 변화는 많은 생물들의 생태학적 특성들에도  변화를 가져왔을 것이다.

타락과 자연 환경의 변화는 인간의 내적인 속성과 외적인 속성에 변화를 가져왔다.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죄성을 나타내게 되었다.

동성애 성향도 이러한 타락의 영향에서 생겨진 한 부분으로 볼 수 있다.

동성애자들의 변태적인 성행위는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정면으로 거역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의 모습에 더러운 짓을 하는, 하나님에 대한 모독행위라고 할 수 있기에, 바울이 말하는 바와같이,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아야 할 더러운 것에 속하여있다고 할 수 있다.


(탐욕)

탐욕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 이상의 것에 대하여 욕심을 부리는 것이다,

우상숭배나 온갖 더러운 것도 탐욕의 유형들이라고 볼 수 있으며, 정상적인 소득 이상의 것에 욕심을 부리면서 행하는 온갖 부정 부패들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탐욕은 인간 사회를 움직이는 원동력이다.

동문회 모임에서 동문들과 같이 식사를 하다보면, 접하는 잡다한 소리 가운데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 가운데 속하여 있지 않은 것은 거의 없는것 같다.

공적인 안건 말고는 거의가 이 세 가지 가운데 하나 이상과 관련이 되어있다.

이는 이 세상 문화가 얼마나 하나님을 떠나있는가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흔히들 그리스도인들은 문화변혁을 사명으로 사회를 변화시켜야한다고 말하지만, 이는 마치 먹물에 깨끗한 물을 붓는 것과 같을 것이다.

성도에게는 오히려 교회를 교회답게 만드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고,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4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마음에 가득한 것들이 입밖으로 나오기에,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들으면 그 사람이 어떠한 사람인가가 거의 파악된다.

불이 그 빛으로 증명이 되듯이, 사람의 성품은 말하는 것으로 증명이 된다.

음란한 말이나,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하는 말은 인간이 사단의 좀비라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만약에 성도의 입에서 이러한 부정적인 말들이 나온다면,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행위이면서, 동시에 성령의 사역을 가로막는 행위다.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대위임령(마 28:19-20)의 사명을 위임받은 자이기에,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항상 말씀을 전파하여야 할 성도의 입에서 이와같은 더러운 말이 나와서는 안된다.


5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우상 숭배는 엄연히 하나님을 떠난 자들의 행동 방식이다.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들은 앞에서 살펴 보았던 것과 같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가증한 자들이다.

교회 공동체에서 이들을 용납하는 것은 공동체 전체의 붕괴를 초래한다.

이스라엘의 멸망은 우상숭배자들이 가지고 들어온 이와같은 더러운 것들이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를 오염시킨 결과로 인한 것이다.

유다의 멸망을 초래한 므낫세의 죄악은, 이방인들의 우상 숭배를 성전 안으로 가지고 들어온 것으로, 유다의 멸망과 더불어 그 이름이 같이 기록되고있다.

성도는 우상 숭배자들의 교회 공동체에서의 행동에 대하여 심각성을 가지고 경계해야 할 것이지만, 어느덧 교회 안에서 이러한 모습들이 일반화되고있는 것보게된다.


6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속이는 것이 능동적 범죄라면, 속임을 당하는 것은 수동적인 범죄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우상이 진짜같아서가 아니라, 거짓인줄 알면서도 우상들이 마음이 원하는 것에 기회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스스로 범죄하면 명분이 없기에, 자신의 범죄에 대한 명분을 내세우기 위해서 속임을 당해주는 것이다.

속임을 당하는 자들은, 표면적으로는 자신도 피해자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속이는 자와 같은 부류라고 할 수 있다.

주식 투자를 하거나 부동산 투기를 할 경우 대부분이 다른 사람의 권유로 하지만, 실은 자신의 마음의 소원에 명분을 만든 것 뿐이기에, 결과에 대해서는 본인 스스로가 책임을 져야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르고 행한 것에 대해서도 책임을 물으신다.



7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라

이러한 이들과 함께하는 것은 같이 멸망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이방인에 대해서는 배타적이면서도, 그들의 우상 숭배는 그대로 가지고 들어옴으로서, 그들과 같이 멸망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는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속이게 내어줌으로서, 그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들도 불순종의 아들들이 된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