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2017. 12. 29. 16:38

에베소서 5장 8-14절 말씀 묵상


에베소 성도에게 보내는 바울의 편지는 에베소 성도들이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하기에 변화된 삶에 대한 구체적인 모습들에 대하여 원론적으로 언급하고있다.



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어둠)

어둠은 빛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어둠이 아니다.

어둠에는 빛이 전혀 없으며, 어둠의 상황에서는 갈길을 알 수도 없고 주변 상황도 파악 할 수가 없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어둠의 자녀라는 말보다는 어둠 자체를 인격과 동일시 하면서 사용하고 있다.

바울이 보는 불신자는 어둠의 희생자가 아니라 어둠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이에 반해 바울은 거듭난 성도를 빛 자체이면서 빛의 자녀라고 칭한다.

이는 성도를 그리스도의 자녀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의 빛 자체로 봄으로서, 빛 가운데 거하는 빛의 주체인 것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어둠과 동일시되고있는 불신자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영광의 그림자를 볼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빛의 자녀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어둠 가운데 주신 하나님의 일반 은총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은총, 즉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는 전적인 선물이기에, 받는 이들의 모습이나 성품과는 관계가 없다.

사람들은 종종 일반 은총으로 인해서 나타나는 선한 모습들을 인간의 인격 자체에 투영시키는 오류를 범한다.

사람들은 몇 가지 선한 것을 행함으로 인해서 마치 자신의 성품이 착하고 선한 것처럼 생각하지만, 선은 인간의 기준에서 볼 때 선한 것일 뿐이지 하나님의 기준에서는 선하다고 단정 할 수는 없다.

인간이 아담 안에서 죽었다는 개념이나,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했다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100% 죽어있고 부패해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인간이, 자신이 무엇인가 누릴 자격과 능력이 있어서 누린다는 생각은 전적인 착각이면서 교만이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이 잘나서 혹은 능력이 있어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고 착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유다 백성들의 이러한 교만을 계속적으로 질책하신다.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에게 빛의 자녀로서 행동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감사하면서 겸손하게 새 사람을 입을 것을 권면하는 것이다.


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공로적 댓가를 주장 할 수 없는 열매들)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은 은혜를 입은 성도들이 맺는 마땅한 열매로서 공로의 개념이 적용될 수 없는 결과물들이다.

착하게 살았고, 의롭게 살았고, 진실되게 살았기 때문에 이에 상응하는  어떠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공로적 사고방식이다.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새관점은 바로 이러한 방식의 사고를 가지고있다.

새관점에서는 최종적 구원을 위해서 공로적 행위가 요구된다.

새관점에서는 최종적 구원을 염두에 두고 은혜 안에 머무는 삶을 주장한다.

새관점에서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미 은혜 안에 머물고(staying) 있었지만, 행위의 부족함으로 인해서 최종적 구원에 이르지 못한 것으로 간주한다.

즉 은혜 안에 머물면서 착하게 살고, 의롭게 살고, 진실되게 살아야했는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최종적 구원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이 나온 것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 자체를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보기 위한 무리수를 둔 유대주의적 사고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완전한 것이기에 최종적 구원에 더 이상의 필요를 요구하지 않는다.

성도의 잘못에 의해서 최종적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면, 이는 행위 구원론으로서의 펠라기우스적 사고이며, 그리스도의 은혜는 불완전한 것이 된다.

성도는 마땅히 은혜의 열매를 맺어야하며, 그 열매를 가지고 어떠한 공로적 기대를 하거나, 댓가를 주장해서는 안된다.


10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시험한다는 것은 단순한 테스트가 아니라, 분별과 노력이 수반되어야하며, 과정 가운데 옳고 그른 것을 발견해 나아가야한다.

이를 위해서는 마음과 생각이 모두 집중되어야만 가능하겠지만, 그 보다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인간은 타락한 심성을 가지고있기에 시험의 기준을 제대로 가질 수가 있다.

성도는 마음과 뜻을 다하여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으로 분별해 나아가야 한다.

새 사람을 입은 성도는 옛 사람 아담의 실수를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아담은 선악과에 대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 이러한 시험을 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하와의 권고를 수용하였다.

하와는 뱀의 유혹을 시험하지 않고 뱀에게 시험을 당함으로서 타락의 굴레에 빠져들었다.

에덴에서의 실패로 인하여 아담의 후손들은 주를 기쁘게 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새 사람을 입으면서, 빛의 자녀가 되었으며, 하나님 나라의 상속이 약속된 이들은,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아담과 같이 분별력이 없이 다시 시험을 당하지 않도록 하여야한다.

사단의 유혹에 걸려들면 사단이 흔들 수 있는 손잡이를 제공해주기에,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성령을 근심시키는 행동을 할 수 밖에 없으며,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슬픔이 될 수 밖에 없다.


11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책망하라)

책망expose하라는 것은 “죄를 드러내어 보여줌으로서 그들이 회개하도록 권고한다”는 뜻이다.

이는 유다 백성들의 죄악이 극에 달하였을 때 예레미야 선지자가 하였던 역할이었다.

이스라엘이 구원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죄악이 드러남으로서 그리스도의 구원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만약에 이스라엘의 죄악을 통하여 인간의 죄성의 실상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당위성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였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죄악은 인간의 죄성에 근거한 열매없는 어둠의 일이었으며, 이는 보편적인 인간에게서 볼 수 있는 일반적 모습이다.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인간의 죄악을 드러냄(책망함, expose)으로서, 어둠에 있는 사람들을 빛으로 인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문제로 드러나야만 해결책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상황 가운데 발생하는 문제들을 문제로 드러냄으로서, 그 가운데 성령의 간섭하심을 경험하는 가운데 복음의 능력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12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은,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는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과 같은 류의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위였으며, 보편적인 인간들이 행하는 모습들이다.

은밀한 것은 어둠 가운데 있는 것이며, 빛을 피할 수 밖에 없다.

아담의 후손들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우상을 원하는 것은, 우상이 옳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 아니라, 우상이 어둠 가운데 있기에, 은밀한 것을 좋아하는 어둠의 사람들의 속성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바울이 이러한 은밀한 것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은, 이러한 것들이 에베소 성도들이 옛 사람을 입었던 이전에 접했던 모습이었기에, 새 사람을 입어야 할 입장에서 권고하는 것이다.

이는 현재의 모든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의 일이다.


13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


비록 성도들은 어떠한 형태로든 이러한 모습이 드러났던 것을 경험하였던 이들이지만, 아직 여전히 죽어있는 어둠의 사람들은 그들의 어둠이 빛 가운데 드러나 수치를 당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빛으로 비추시기에,  어둠 가운데 있는 이들은 드러난 것들로 말미암아 책망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이는 이스라엘이 책망을 받음으로 빛 가운데 드러났던 것과 같이, 인간 모두는 결국 어둠 가운데 행한 모든 은밀한 것이 빛 가운데 드러남으로서, 죄악에 합당한 책임을 지게될 것이다.

대부분의 악을 행하는 이들은 자신이 어둠 가운데 행한 것이 드러나지 않으리란 생각으로하지만, 이는 단지 인간의 생각일 뿐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연 법칙을 넘어서시는 초자연적인 분이시다.


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잠자는 자와 죽은자)

바울은 죽은 자와 잠자는 자를 대조시킨다.

죽은 자는 어둠 가운데 계속 있게되지만, 잠자는 자는 빛이 비추이면,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리스도께서 택하신 성도는, 죽은 자가 아니라 잠자는 자에 속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잠자는 관리의 딸을 일으켜 세우셨다.

"가라사대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들이 비웃더라"(마 9:24)

이 땅에서 육체가 잠자는 성도들은, 영으로는 천국에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면서,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완전한 빛 가운데 빛으로 존재하는 부활체로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빛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신자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어야한다.

성경은, 성도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어둠 가운데서의 옛 사람의 방식이 아니라, 빛 가운데서 새 사람의 방식으로 살아가야 할 것을 말씀하신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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