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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3.23 :: 예레미야애가 5장 11-22절 말씀 묵상 1
- 2018.03.22 :: 예레미야애가 5장 1-10절 말씀 묵상
- 2018.03.21 :: 예레미야애가 4장 11-22절 말씀 묵상 1
- 2018.03.20 :: 예레미야애가 4장 1-10절 말씀 묵상
- 2018.03.16 :: 예레미야애가 3장 1-18절 말씀 묵상
- 2018.03.15 :: 예레미야애가 2장 11-22절 말씀 묵상
- 2018.03.14 :: 예레미야애가 2장 1-10절 말씀 묵상
- 2018.03.13 :: 예레미야애가 1장 12-22절 말씀 묵상
- 2018.03.12 :: 예레미야애가 1장 1-11절 말씀 묵상 1
예레미야애가 5장 11-22절 말씀 묵상
11 대적들이 시온에서 부녀들을, 유다 각 성읍에서 처녀들을 욕보였나이다
12 지도자들은 그들의 손에 매달리고 장로들의 얼굴도 존경을 받지 못하나이다
13 청년들이 맷돌을 지며 아이들이 나무를 지다가 엎드러지오며
14 노인들은 다시 성문에 앉지 못하며 청년들은 다시 노래하지 못하나이다
(총체적 재앙)
부녀자, 처녀, 지도자, 장로, 청년, 아이, 노인이라고하면 사실상 유다 백성의 전부를 가리킨다.
선지자는 유다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구성원들의 총체적 재앙을 말하고있다.
사실 유다 공동체의 구성은 하나님의 명령과 축복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지만, 이러한 불행은 모든 공급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불순종하였기에 나타난 결과들이다.
불순종은 단순히 관계를 유지하면서 말을 듣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반역으로서 관계성의 파괴를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삶은 단순한 인간 성품의 경향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자체를 거부하는 반역인 것이다.
인간의 죄성의 심각성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있는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공동체는, 유다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와 공급하심을 기초로하는 것이다.
순종은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대한 순리적인 반응으로서 요구되는 것이다.
자녀가 부모로부터 모든 것을 공급 받으면서도 부모와의 관계성을 거부하는 것은 가족 공동체의 유지에 치명적이다.
가족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부모의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듯이, 하나님의 공급하심은 임시적인 것이다.
인간의 죄성의 본질은 공급받는 것과는 관계없이 하나님을 거부하며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것이기에, 유다 백성들과 같이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단절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인간의 성품에 담겨있는 공동체성은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성으로부터 온 것이기에, 순종이 동반되지 않는 공동체는 유다 백성들과 같이, 파멸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15 우리의 마음에는 기쁨이 그쳤고 우리의 춤은 변하여 슬픔이 되었사오며
기쁨과 춤은 여호와를 즐거워하는데서부터 출발한다.
다윗은 언약궤가 들어오는 날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을 추었지만, 이를 조롱하였던 미갈은 저주를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인간이 사는 동안에 기뻐 뛰노는 모습은 원래부터 순수하였지만, 어느덧 인간은 타락한 죄성으로 말미암아 음란으로 이어지는 문화를 만들었던 것이다.
16 우리의 머리에서는 면류관이 떨어졌사오니 오호라 우리의 범죄 때문이니이다
인간에게 부여되었던 면류관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로서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왕권의 표현이었다.
아담과 마찬가지로 유다 백성들이 누렸던 왕권은 불순종이라는 범죄 때문이었다.
현재의 인간들의 삶이 사단의 좀비 인생이 된 것은 원래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바가 아니었음을 생각해 본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된 성도는 이 세상에 대하여 왕으로서의 직책이 회복된 자들이기에, 더 이상 이 세상에 종속된 생활을 하지 말아야 한다.
17 이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피곤하고 이러므로 우리 눈들이 어두우며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인생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상실되어 어둠 가운데 헤맬 수 밖에 없다.
그리스도의 안식에 참여된 성도는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빛 가운데 걸어가는 축복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18 시온 산이 황폐하여 여우가 그 안에서 노나이다
하나님이 거하실 곳이 사단에게 내어준바되었다.
아담의 불순종은 에덴에서의 산인 거룩한 시온 산에서 사단이 하나님께 도전하도록 기회를 주었으며, 거룩한 예루살렘은 여우들의 거처가 됨으로서, 참 예루살렘 되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인간의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은, 사단의 하나님께 대한 반역에 동참한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이 아니고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없다.
19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오며 주의 보좌는 대대에 이르나이다
불순종한 인간은 파멸될 수 밖에 없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영원하시기에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은 하나님을 소망 할 수 밖에 없다.
20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잊으시오며 우리를 이같이 오래 버리시나이까
선지자의 탄식을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는 기도다.
이 땅을 나그네와 같이 살아가는 신자는, 항상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소망하면서 살아가야한다.
21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구속redemption은 회복redeem의 의미가 담겨있어서 옛적의 상태로 돌이키는 것을 말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은 단순히 에덴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에덴은 안식을 위한 과제가 성취되지 않은 곳이기에,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에덴에서의 과제를 성취하셔서 이루신, 영원한 생명과 축복이 보장된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다.
문화칼빈주의자들은 구원받은 성도는 범죄하기 이전의 에덴의 상태로 돌아간 것이기에, 에덴에서 아담에게 주어졌던 문화명령을 다시 실행하여야한다고 주장하며, 문화명령을 대위임령보다 상위에 두려고하지만, 이는 에덴과 그리스도를 철저하게 오해한 것이다.
창세기 1장 28절은 문화명령이나 창조명령의 개념이 아니라, 아담에게 부여된 직책을 표현하는 통치명령이나 대위임령으로 보는 것이 옳바르다.
아담은 에덴에서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직책을 부여받았지만, 아담의 불순종은 이러한 직책의 상실을 의미했다.
유다의 실패는 아담과 마찬가지로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직책의 실패였으며, 선지자가 간구하는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는 희망 사항일 뿐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제선지자의 희망 사항 이상의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둘째 아담으로서 아담이 에덴에서 실패한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직책을 회복하셨기에, 에덴에서 주어졌던 통치명령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완성된 것이다.
성도가 받은 구속은 에덴으로 돌아가 다시 아담의 직책을 수행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완성하신 에덴에서의 과제를 통하여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다.
성도는 일주일의 첫날인 주일을 안식일로 여기면서, 그리스도의 안식을 기반으로 한주를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22 주께서 우리를 아주 버리셨사오며 우리에게 진노하심이 참으로 크시니이다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상태이며,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이지만, 현재 누리는 축복은 오직 영원한 구속을 위해서 주어지는 임시적 은혜일 뿐이다.
주어진 임시적 은혜는 오직 그리스도께 나아가기 위한 것이다.
현재의 삶에서 감사드릴 일들은 오직 그리스도께 향하는 일들로 귀결되어야만 할 것이다.
예레미야애가 묵상을 마치면서
불순종한 유다와 멸망당한 예루살렘은 궁극적으로 우리 인간이 처하여있는 보편적 상태를 묘사하고있다.
에덴은 성전이었기에, 아담은 성전에서의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직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패망은 에덴에서의 아담의 불순종이 재연된 것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아담의 후손으로서, 율법 아래 있었던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과 마찬가지로, 자연법 아래에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놓여있다.
불순종한 유다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타락한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간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시면 인간 스스로가 주께로 나아갈 수가 없다.
새관점이나 신정통주의와 같은 현대 신학에서는 아담의 죄를 애써 무시하거나 축소시키려고하지만, 둘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율법 아래서 율법의 요구를 다 충족시키신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성취된 것이다.
하나님은 불순종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시고는 우리를 받아들일 수가 없으시다.
유다의 멸망과 성전의 파괴는 불순종으로 인한 것이며, 이는 아담의 후손인 인간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보여주시는 것이며, 아담의 불순종이 재연된 것이었다.
인간은 불순종의 심각성에 대한 의식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중요성을 알 수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심각한 이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인지에 대한 의식이 없는 이들일 것이다.
스스로 의롭다하며, 선함을 통하여 자신들의 의를 증거하려는 이들은, 자신들이 전적으로 부패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이들이다.
인간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들의 선함이나 선행을 증거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스스로 의롭다하는 바리세인의 심각성이 여기에 있다.
예수님께서는 선행을 증거하려는 이들을 가리켜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말씀하셨다.
스스로 의롭다하며 세상에서 선하게 살려는 이들은, 그리스도를 거부한다는 면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들이 될 수도 있다.
오히려 세리와 창기들은 자신들이 전적으로 부패한 죄인임을 인정하고 그리스도께 나올 수가 있었다.
불행한 환경은 오히려 자신들의 죄를 드러내면서, 복된 환경이 될 수도 있다.
유다의 총체적 불행은,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해석될 때,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축복이 될 수 있다.
현재의 삶의 환경 가운데 경험하는 부정적 상황들은 멸망받을 자에게는 재앙이지만 구원받을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위한 복된 환경이 될 수도 있음을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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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애가 5장 1-10절 말씀 묵상
1 여호와여 우리가 당한 것을 기억하시고 우리가 받은 치욕을 살펴보옵소서
아무리 하나님께서 범죄한 사람과의 관계를 단절하신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하소연 할 수 있는 대상이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다.
만약에 하나님께 하소연 할 수 있는 길이 완전히 막힌다면 이는 지옥이나 다름 없을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상태에서 선지자가 하나님께 하소연 할 수 있다는 것은 아직 완전한 지옥에 이른 상태가 아님을 보여준다.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로 인한 유다 백성을 상태는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마찬가지 상황이다.
이는 인간이 범죄한 아담의 자손으로서, 아직 완전한 지옥에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만약에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의 길 마저도 막힌다면 인간은 완전한 지옥에 이른 것이다.
2 우리의 기업이 외인들에게, 우리의 집들도 이방인들에게 돌아갔나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의 선택과는 관계없이 기업을 얻을 자이며, 거할 집이 주어진다.
이는 인간의 죄성과 죄인으로서의 위치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이미 결정되었음을 의미한다.
자신은 조상의 죄와는 관계없다고 선언할 수는 없다.
죄의 문제는 행위론적 문제이기보다는 존재론적인 문제인 것이다.
성경은 인간이 존재론적으로 죄인임을 보여주려는데 반하여, 인간은 자신들이 행위론적으로만 죄인임을 말하려고 한다.
예수님께서 바리세인의 죄를 심각하게 보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은 행위를 넘어서 존재에 대한 것이기에, 복음은 윤리적으로 접근해서는 않된다.
기독교 윤리는 행위를 넘어서 존재론적인 바탕 위에서 정립되어야하지만, 현대 신학자들은 이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인간의 삶의 환경은 이미 존재론적인 상황에서 기업이 외인에게, 집들이 이방인에게 돌아간 상태이지만, 인간은 자신이 잘못한 것이 없다고 항변하며 이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가 존재론적인 죄인이 아니라면, 우리에게는 태어나면서부터 에덴과 같은 환경에서 주어져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파괴된 예루살렘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접하게되는 에덴의 동쪽은 험난하기만 하다.
신자는 이러한 험난한 환경이, 공동체적 책임을 져야하는 죄인에게 주어진 환경임을 인정하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바라보며,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어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 것이다.
3 우리는 아버지 없는 고아들이오며 우리의 어머니는 과부들 같으니
아담의 범죄의 결과는 아버지의 상실이었다.
아담은 범죄한 이후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가 없었다.
누가는 예수님의 계보가 아담을 거쳐서 하나님까지 올라가고있음을 말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자들의 아버지이시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들에게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격을 주신다.
범죄한 유다는 아버지가 없는 고아였으며, 범죄한 아담은 아버지가 없는 고아가 되었으며, 아담의 후손은 모두가 진정한 아버지가 상실된 고아의 상태이다.
육신의 아버지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림자일 뿐이다.
육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참 이스라엘이 아니라 영적인 자손이 참 이스라엘이듯이, 하나님의 자손인 신자에게는 오직 하나님만이 참 아버지가 되신다.
세상일이 고달파도 참 아버지되신 하나님께 아뢸 때 진정한 평안을 누릴 수 있다.
성도는 오직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야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
참 아들은 신랑되신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의 구성원이 되어야한다.
아담은 그리스도의 표상으로서, 아담이 하와와 합하여 한 몸이 되는 것은 궁극적으로 신부된 교회와 한 몸을 이루실 신랑되신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었다.
성전을 상실한 유다는 타락한 아담과 마찬가지로, 신랑되신 그리스도를 맞이하기까지는 실질적 과부나 마찬가지이다.
4 우리가 은을 주고 물을 마시며 값을 주고 나무들을 가져오며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은 에덴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것으로 풍요를 누릴 수 있었던 에덴과 같다.
불순종하여 바벨론에 잡혀간 유다는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마찬가지로 수고하고 땀을 흘려야 소산을 먹을 수가 있다.
아담의 후손인 인간의 삶은 유다와 마찬가지로, 값을 치루지 않고 공급을 받을 수가 없는, 은혜가 상실된 세상을 살아가고있다.
5 우리를 뒤쫓는 자들이 우리의 목을 눌렀사오니 우리가 기진하여 쉴 수 없나이다
죄의 종노릇하는 인간들은 누구나 수고하다가 결국 죽음으로 종속될 수 밖에 없는 인생들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세상을 이렇게 비참하게 살아가는 것은, 오직 불순종으로 인한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상실 말고는 해석할 길이 없다.
6 우리가 애굽 사람과 앗수르 사람과 악수하고 양식을 얻어 배불리고자 하였나이다
7 우리의 조상들은 범죄하고 없어졌으며 우리는 그들의 죄악을 담당하였나이다
인간이 서로 악수하면서 서로를 돕는 것은 대부분 서로의 이익을 전제로하는 것이다.
원래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을 입은 인간은, 서로의 이익을 위해서 거래하도록 지음을 받지는 않았지만, 이익을 전제로한 거래 관계는 타락 이후에 생긴 현상이다.
타락 이후의 인간은, 예루살렘의 성전이 파괴된 후의 유다가 대적이었던 애굽과 앗수르에 그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손을 벌려야만 했던 것과 같이, 이익을 위해서 공존한다.
이러한 상황이 부적합하다는 것을 인식한 선지자는, 현재의 처지를 하나님께 호소함으로서, 하나님만이 상황을 근본적으로 해결해주실 수 있으신 유일한 분이심을 고백한다.
예루살렘 거민들은 성전의 파괴로 인하여 처참한 상태에 있었으며, 비록 이러한 상황이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손상에서 온 것이지만, 결국 하나님께 도움을 구할 수 밖에 없었다.
현재의 인간이 서로의 이익을 전제로 거래를 하는 상태가 죄악으로 인하여 생긴 불합리한 상황이라는 것을 선지자는 말하고있다.
경제라는 사슬에 얽매여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인생은, 현재의 상황을 당연한 것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선지자와 같이 하나님께 하소연하면서, 상황을 극복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익을 전제로 움직이는 상황은 결국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갈 뿐이다.
비록 이러한 상황이 조상들의 범죄로 인한 것이고, 우리가 그들의 죄악을 담당한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상황의 극복을 위해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간구하며 살아가야한다.
이익이 있는 곳에는 부정한 요구가 따르기에 어느 누구도 부정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을 것이다.
인간은 부정적 상황에서 살면서 자녀들에게도 부정적 상황을 물려줄 뿐이다.
죄가 전가되는 총체적 상황은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것이며, 인간은 본질적으로 죄악을 상황을 벗어날 수가 없다.
오직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지 않고는 깨끗하여질 수가 없다.
인간은 최종적으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이며, 궁극적으로 누구나 다 죽음을 직면하여야만 하며, 죽음을 피할 수 없지만, 인간은 죽음의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구함으로서 오히려 생명의 길로 들어설 수가 있다.
8 종들이 우리를 지배함이여 그들의 손에서 건져낼 자가 없나이다
(다스려야할 자로부터 다스림을 받는 상황)
예루살렘에 성전이 세워지면서 주변의 이방 나라들은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여호와를 경배하여야했으며, 이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부강하게되었다.
성전으로서의 에덴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통치명령(창 1:28), 즉 흔히들 문화명령이라 부르는 지배명령을 말씀하셨다.
창세기 1장 28절에서, 다스릴 대상에는 생물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창세기 3장 1절의 들짐승의 짐승은 생물과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음으로서, 들짐승인 뱀도 아담이 다스려야할 대상에 포함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아담이 다스려야할 대상으로부터 유혹을 받아 다스림을 받게 된 것과 같이, 유다는 주변 이방 나라의 우상을 받아들임으로서, 이방 나라의 다스림을 받게 된 것이다.
현재의 인간의 삶이 죄의 종노릇하면서, 죄에 종속된 것은 본래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서 스스로 화를 자초한 것이다.
아담의 선악과 범죄는, 그 이전에 다스려야 할 대상을 다스리지 않은 일차적 불순종에 의한 결과적 불순종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유혹하는 사단을 꾸짖으심으로서 사단을 다스리셨다.
현재의 성도의 삶은 세상에 종속되는 삶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만 의지하면서, 예수님께서 사단을 꾸짖으신 것과 같이, 세상의 다스림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적인 머리를 써서 인간적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것은 또 다시 하나님의 거룩한 곳을 세상의 다스림에 종속시키는 어리석은 행위이지만, 현재의 교회의 실상이 이러한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세상적 욕심으로 세상에 다스림받은 것에 대한 회개가 있어야 할 것이다.
9 광야에는 칼이 있으므로 죽기를 무릅써야 양식을 얻사오니
타락한 아담은 땅에서 가시와 엉겅퀴로 인하여 고생을 하여야만 했듯이, 타락한 유다는 광야에서 칼을 감당하여야만 했다.
아담의 후손으로 살아가는 우리 인간은, 생존을 위해서 세상의 험악한 상황들을 직면하면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10 굶주림의 열기로 말미암아 우리의 피부가 아궁이처럼 검으니이다
인간의 얼굴은 환경에 따라 변화되기 마련이다.
사람의 변화된 모습은 인간의 삶의 환경이 어떠한 지를 보여준다.
낡아질 헌옷을 입은 인생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새옷을 입는 날을 소망하며 살아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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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애가 4장 11-22절 말씀 묵상
11 여호와께서 그의 분을 내시며 그의 맹렬한 진노를 쏟으심이여 시온에 불을 지르사 그 터를 사르셨도다
하나님은 인간과 언약 관계에 있기 때문에 인간에 대하여 진노하실수 있는 관계성을 갖고 계신다.
유다는 하나님의 언약, 즉 행위 언약에 대한 책임이 있는 이들이기에, 자신들의 불순종에 대한 책임을 져야만 했다.
인간이 사는 환경 가운데 임하는 모든 재앙은 직간접적으로 인간에게 책임이 있다.
일차적인 책임은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한 것이며, 모든 인간은 아담의 후손으로서 사는 동안 재앙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현대 과학은 모든 재앙의 원인을 현상적이고 자연 과학적으로만 설명하려고 한다.
자연 과학은 그 뒤에 숨겨진 하나님의 손길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과학 맹신주의는 모든 현상을 현상적으로만 설명하기에 사람을 무신론으로 이끌 수 밖에 없다.
과학자들이 보는 성경은 과학이 제공해주는 현상을 넘어서지 못한다.
과학은 천상의 세계Upper-Register에 대하여 아무 말도 할 수 없기에 과학을 근거로 성경을 해석해서는 안된다.
인간이 보기에 이 세상의 어떠한 무익한 일들도 하나님의 섭리 바깥에 있는 것은 없다.
신자는 삶의 모든 현상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항상 의식하여야한다.
12 대적과 원수가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갈 줄은 세상의 모든 왕들과 천하 모든 백성이 믿지 못하였었도다
대적과 원수가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간 것은 에덴에 뱀이 하와를 속여서 아담으로 멸망당하게 한 것과 유사하다.
이는 궁극적으로 성전되신 그리스도의 몸을 십자가에 못박는 행위였으며,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종결 될 수 밖에 없었다.
세상의 교회도 마찬가지로 사단에 의하여 공격을 당하고있다.
사단의 공격이라기 보다도 교인들이 사단에게 문을 활짝 열어주는 행동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뱀에게 책임을 돌리고 있지만 이는 책임지지 않으려는 인간의 죄성에서 나온 것일 뿐, 실상은 당사자에게 책임이 있다.
신학교와 교회가 총체적으로 흔들리고있다.
신학교와 교회에 들어온 적대세력의 문제는 일차적으로 당사자에게 책임이 있다.
여기서 해결책은 책임을 외부에 돌리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 각자가 모두 다 스스로의 책임을 인정하고 회계하며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것 뿐이다.
인간적인 방법은 또 다른 부작용을 낳기에, 인간이 자신의 혈기로 앞서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 보다는, 오직 하나님의 간섭하심 가운데 문제를 풀어나아가야한다.
이를 위해 행동보다도 기도가 앞서야 할 것이다.
13 그의 선지자들의 죄들과 제사장들의 죄악들 때문이니 그들이 성읍 안에서 의인들의 피를 흘렸도다
교회가 내분이 있었을 때, 교단 신학교의 교수로부터 들은 한 마디는, 총회 재판국에 올라오면 돈이 많은 쪽이 이긴다는 것이었다.
교단 재판국의 구성원들이 얼마나 부패되었는지를 보여주는 한마디였다.
왜 성폭력 혐의로 고소된 목사가 총회 재판국에서 징계를 받지 않았는가를 곰곰히 생각해 본다.
이는 목회자들이 유다의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처럼 부패하였다는 증거이다.
이들은 인간 관계 혹은 돈에 의해서 판결을 굽게하거나, 아니면 자신들도 음란의 죄에서 자유하지 못하기에 동료의 음란 죄를 덮어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몇년 전에 새로 부임한 목사는 자신의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서 기존에 자리잡고 있던 성도를 쫓아내는데 온 힘을 쏟아낸다.
대대로 집안에서 교회에 뿌리를 내렸던 많은 성도들이 고통 가운데 교회를 떠나야만 하는 모습들을 봐야만 했으며, 지금도 진행형이다.
아무리 신학교에서 잘 배우고 지식이 많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세력을 굳히기 위해서 정관을 바꾸고,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쫓아내는 목사가 과연 하나님의 사람일 수 있는지 의심이 된다.
이러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해야한다는 것의 고통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유다의 문제는 일차적으로 선지자와 제사장에 있었듯이, 오늘의 교계의 현실에는 목회자들에게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목회자의 모습이 기이할 뿐이다.
14 그들이 거리 거리에서 맹인 같이 방황함이여 그들의 옷들이 피에 더러워졌으므로 그들이 만질 수 없도다
교회가 혼탁해지면서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할 곳이 상실되어가고있다.
진정으로 교회를 나가지 않는 성도들보다도 표면적으로는 교회에 속하여 교회 생활을 하는 이들이 실질적으로는 거리에서 맹인과 같이 방황하는 이들이 될 수도 있다.
교회가 신분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하나님의 자녀는 오직 하나님이 보증해주실 뿐이다.
15 사람들이 그들에게 외쳐 이르기를 저리 가라 부정하다, 저리 가라, 저리 가라, 만지지 말라 하였음이여 그들이 도망하여 방황할 때에 이방인들이 말하기를 그들이 다시는 여기서 살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어느새 목사와 장로라는 명칭은 교회 안에서만 통용될 뿐, 사회에서는 조롱 거리의 명칭이 되어버렸다.
많은 이들이 문화 변혁을 외치면서, 세상을 기독교화하자고 외치지만, 정작 이들은 내부적인 싸움에서 세상 못지않은 추태를 보이는 경우가 너무 많다.
이들은 성령의 사역을 말하지만, 이들이 말하는 성령의 사역은 윤리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성령은 세상을 변화시키기보다는 택한 성도를 변화시키신다.
자연법 아래에 있는 세상은, 율법 아래있는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심판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성령의 사역이 없는 변화는 인본주의적 발상일 뿐이다.
윤리적 기독교는 구약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며, 이방인의 조롱을 받는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세상 사람의 조롱을 받을 뿐이다.
오직 성령으로 거듭난 착한 행실이 세상에 빛을 발할 뿐이다.
16 여호와께서 노하여 그들을 흩으시고 다시는 돌보지 아니하시리니 그들이 제사장들을 높이지 아니하였으며 장로들을 대접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직분자들의 부패로 인하여 더 이상 제사장과 장로들이 존경 받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제사장과 장로들을 존경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도 책임을 물으신다.
바울은 대제사장이 자기의 입을 치라는 것에 대하여 회칠한 담을 비유하면서 하나님이 너를 치리라고 하였지만, 그가 대제사장인 것을 알고는 곧 알지 못했다는 변명을 한다.
아무리 부패한 제사장이나 장로라하더라도 그들에 대한 비방은 삼가야 할 것이다.
교회가 세상의 조롱거리가 된다고 하더라도 교회 자체를 비방해서는 안될 것이다.
교회에 그리스도의 이름이 있듯이, 제사장과 장로의 권위 뒤에는 하나님께서 계심을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17 우리가 헛되이 도움을 바라므로 우리의 눈이 상함이여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나라를 바라보고 바라보았도다
도움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으려는 것이 인생이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마음이 불편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하여 물으시기에, 죄에 대하여 책임을 묻지 않는 이들에게 도움을 바라는 것이 편한 것이 인생이다.
신자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불편하다면, 아직 죄에 대한 문제가 정리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18 그들이 우리의 걸음을 엿보니 우리가 거리마다 다 다닐 수 없음이여 우리의 끝이 가깝고 우리의 날들이 다하였으며 우리의 종말이 이르렀도다
하나님께서는 자유를 주시지만 악의 세력은 자신에게 종속시킨다.
자신의 모든 것이 노출되었을 때는, 자유함이 상실되고 영원히 종속되는 결국 사망에 이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아시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를 것이란 생각으로 자유를 누린다.
진정한 자유는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한 문제를 해결해 주셨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19 우리를 뒤쫓는 자들이 하늘의 독수리들보다 빠름이여 산 꼭대기까지도 뒤쫓으며 광야에서도 우리를 잡으려고 매복하였도다
모든 인간은 아무리 자유를 누리려고해도 대적에게서 피할 수는 없다.
모든 것이 통제받는 시대가 올 것이다.
마지막 때에는 통제가 보편화 될 것이다.
20 우리의 콧김 곧 여호와께서 기름 부으신 자가 그들의 함정에 빠졌음이여 우리가 그를 가리키며 전에 이르기를 우리가 그의 그늘 아래에서 이방인들 중에 살겠다 하던 자로다
주변의 힘있는 존재는 가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장미빛 청사진을 제시하며 다가오기도 하지만 일단 그들 안에 들어가는 것은, 그들에게 자신을 휘두를 수 있는 손잡이를 제공해 주는 것과 같다.
눈에 보이는 화려함 뒤에는 빠뜨릴 함정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21 우스 땅에 사는 딸 에돔아 즐거워하며 기뻐하라 잔이 네게도 이를지니 네가 취하여 벌거벗으리라
무엇이 고통인지를 모르는 이들은 자기에 취해서 스스로 파멸의 길로 갈 수 밖에 없다
세상 사람은 자기의 길로 가면서 즐거워하지만 그 길이 파멸의 길인줄을 알지 못한다.
비록 교회가 세상의 조롱거리가 된다고 하더라도, 교회를 조롱하는 이들도 하나님의 심판에서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22 딸 시온아 네 죄악의 형벌이 다하였으니 주께서 다시는 너로 사로잡혀 가지 아니하게 하시리로다 딸 에돔아 주께서 네 죄악을 벌하시며 네 허물을 드러내시리로다
율법을 받지 않은 이방인들은 자연법을 통해서 죄가 드러난다.
자연법에 비추어 자유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자연법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원의 필요성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율법과 마찬가지의 기능을 하지만, 또한 율법과 마찬가지로 모든 이들을 하나님의 심판의 자리로 나아가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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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애가 4장 1-10절 말씀 묵상
1 슬프다 어찌 그리 금이 빛을 잃고 순금이 변질하였으며 성소의 돌들이 거리 어귀마다 쏟아졌는고
금은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한다.
성막과 성전의 지성소는 금으로 장식되어있었다.
성전의 지성소가 그 기능을 하지 못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하는 금은 더 이상의 기능을 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진 곳에서는 금이 빛을 잃고 순금이 변질 될 수 밖에 없었다.
예루살렘 성소가 파괴된 것은, 타락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한계를 보여준 것이며, 궁극적으로 참된 성전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육신의 몸은 십자가에서 헐리심으로 참된 영적인 성전을 세우셨다.
그리스도 안에서 세워진 성전은 처음 아담 안에서 파괴되었던 성전이었다.
처음 성전은 행위를 요구하였으나, 마지막 성전은 은혜에 참여되는 것이었다.
예루살렘 성전은 처음 성전을 마지막 성전으로 이끄는 것이었으며, 행위의 요구에서 은혜의 베푸심으로 자리바꿈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인간의 어리석음은 아담과 같이 처음 성전, 즉 행위의 요구를 충족시키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행위의 자리에서 은혜의 자리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을 허락하신 것이었다.
이를 원론적으로 다시 말한다면, 처음 아담은 둘째 아담의 모형이었듯이, 에덴은 그리스도의 성전되심을 예표하는 장소였다.
예루살렘 성전은 에덴의 재현이었으며,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장소였다.
아담의 불순종은 유다의 불순종으로 재연되었으며, 행위 언약으로서의 모세 언약은 행위 언약으로서의 아담 언약이 재현된 것이었다.
아담 언약에는 오직 행위 언약만이 있었지만, 모세 언약에는 표면적인 행위 언약의 밑바탕에,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은혜 언약의 속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본질적으로는 은혜 언약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선지자의 탄식은 단순히 예루살렘의 파괴를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어야 될 존재들의 속성이 어떠하였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2 순금에 비할 만큼 보배로운 시온의 아들들이 어찌 그리 토기장이가 만든 질항아리 같이 여김이 되었는고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었던 유다는, 처음 언약 안에 있었던 에덴에서의 아담과 비교될 수 있다.
원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던 인간은 순금에 비할 만큼 보배로운 인간이었다.
불순종으로 질항아리같이 되어 포로로 잡혀간 유다는, 마치 불순종으로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같았다.
이는 현재의 인간의 상태가 어떠한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타락 한 후의 인간의 속성은 순금이 질항아리로 변질된 만큼이나 변질되었다.
3 들개들도 젖을 주어 그들의 새끼를 먹이나 딸 내 백성은 잔인하여 마치 광야의 타조 같도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상실된 백성은, 그 상실된 만큼이나 자신의 자녀들과의 관계가 상실되었다.
인간이 짐승만도 못한 것은, 짐승은 하나님의 자연법을 거스르지 않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자연법마져도 거스리면서, 심지어는 환경을 파과하면서 살아간다.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나, 불순종한 유다나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형상의 그림자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인간은 외부적 환경을 탓하기 이전에 인간이 어떠한 존재로 변질되었는가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4 젖먹이가 목말라서 혀가 입천장에 붙음이여 어린 아이들이 떡을 구하나 떼어 줄 사람이 없도다
젖먹이는 전적으로 부모에게 의존 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자신의 젖먹이에게 먹을 것을 주지 못함은 자신을 지으신 하나님을 떠난 까닭이다.
현재의 풍요는 우리의 잘남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근거로한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이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가는 생활을 하여야한다.
5 맛있는 음식을 먹던 자들이 외롭게 거리 거리에 있으며 이전에는 붉은 옷을 입고 자라난 자들이 이제는 거름더미를 안았도다
유다 백성들의 변화된 처지는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마찬가지다.
가나안에서 바벨론으로의 변화는 확연하였지만, 가나안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들에게는 실감이 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에덴을 기억하지 못하는 인류는 현재의 처지를 당연한듯이 살아가지만, 원래 하나님의 현상을 입고 에덴에서 살았던 존재인 인간의 존귀함을 알았다면, 현재의 삶의 심각성을 생각할 것이다.
희망을 상실한 인간들은 돈으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려고하지만, 이러한 노력으로는 원래 인간이 누려야할 창조 목적에는 도달되지 못할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은 에덴과 하늘 나라가 어떠한 곳인지를 설명하고있다.
복음을 접한 인간은 바벨론과 같은 현재의 문화를 변화시키기보다는, 현재의 삶을 발판으로 더욱 더 아름다운 하늘 나라를 소망하여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낡아질 헌옷을 갈아입을 새옷을 준비 하셨기에, 새옷을 입기에 합당한 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6 전에 소돔이 사람의 손을 대지 아니하였는데도 순식간에 무너지더니 이제는 딸 내 백성의 죄가 소돔의 죄악보다 무겁도다
사람에 의하여 무너진 것이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무너뜨린 것보다 결코 가볍지 않다.
삶의 환경 가운데 경험하는 여러가지 부정적 상황 가운데에는 직접적인든, 간접적이든, 아니면 나의 죄로 인한 것이든 타인의 죄로 인한 것이든, 우리의 죄를 드러나게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여야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알기를 원하시는 죄는 결코 가볍게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7 전에는 존귀한 자들의 몸이 눈보다 깨끗하고 젖보다 희며 산호들보다 붉어 그들의 윤택함이 갈아서 빛낸 청옥 같더니
8 이제는 그들의 얼굴이 숯보다 검고 그들의 가죽이 뼈들에 붙어 막대기 같이 말랐으니 어느 거리에서든지 알아볼 사람이 없도다
바벨론으로 잡혀간 유다의 모습이 예루살렘에서의 유다의 모습과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보여준다.
이는 타락한 인간의 상태가 지음받은 아담의 상태와 비교하여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선지자의 탄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식이며, 이는 그리스도가 십자가 사역을 통하여 회복시킬 성도의 모습이 어떠하여야하는가를 간접적으로 보여두는 것이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존귀함을 입은 자이기에 성도가 세상의 조롱거리가 된다면, 이는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행위가 될 것이다.
목회자나 신학자, 혹은 성도들의 추잡한 모습들은 그리스도를 얼마나 욕되게 하는 것인지 인식을 하여야 할 것이다.
성도는 자신의 변화될 위치를 분명히 인식하고서 세상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9 칼에 죽은 자들이 주려 죽은 자들보다 나음은 토지 소산이 끊어지므로 그들은 찔림 받은 자들처럼 점점 쇠약하여 감이로다
심판보다도 심판받는 과정의 고통이 얼마나 심각한 지를 말해준다.
이는 이 세상을 고통 가운데 탄식하며 살아가는 인생들의 고달픔을 말해준다.
건강하게 살다가 짧은 기간에 세상을 떠나는 것도 하나님의 축복일 것이다.
현대 의학의 발달은 인간을 자연스럽게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현대 의학은 인간을 건강하게 살도록 해주기도하지만, 약에 의존하면서 고통 가운데 살아가게도한다.
거의 식물 인간이 되기까지 살려놓고서 고생하게 만들기도하는 것이 현대 의학의 부정적인 모습이기도하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식으로 은혜를 누리기도하지만, 지나침으로 인하여 고통 가운데 들어가게도한다.
이는 의학 뿐만이 아니라 모든 문명의 속성이기도하다.
인간이 스스로 높아지려는 문명의 발전은 궁극적으로 고통스러운 심판을 자초하기도한다.
10 딸 내 백성이 멸망할 때에 자비로운 부녀들이 자기들의 손으로 자기들의 자녀들을 삶아 먹었도다
자녀를 삶아 먹는 모습은 극단적인 경우이지만, 이러한 속성은 삶 가운데 비슷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한다.
많은 이들이 자녀 교육에 목을 매지만, 자녀교육의 실상은 대부분이 자녀를 위한 것이 라기보다는 자신을 위한 것이다.
길들여진 자녀들은 표면적으로는 성공하는 것과 같아도 그들은 스스로의 삶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도 않도록 만들어지며, 내적인 능력도 상실되도록 만들어진다.
참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의 행동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살아가는 인간이 되어야한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 스스로가 책임을 지고 하나님을 직면하여야한다.
자녀로하여금 스스로 하나님을 경외하게하는 것만이 자녀를 살리는 행동이다.
부모의 과도한 개입은 자칫 자녀를 하나님 앞에서 가리우는 행동이며, 자녀를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자녀를 죽이는 행동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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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애가 3장 1-18절 말씀 묵상
1 여호와의 분노의 매로 말미암아 고난 당한 자는 나로다
선지자는 자신을 예루살렘과 동일시하고 있다.
선지자는 예루살렘을 향한 여호와의 분노와 매를 자신에게 향하게 하고있다.
선지자이신 예수님은 스스로 예루살렘이 되심으로서 예루살렘의 실체가 되셨으며, 더 나아가 범죄한 아담의 자리에 앉으심으로 처음 아담의 실체가 되셨다.
2 나를 이끌어 어둠 안에서 걸어가게 하시고 빛 안에서 걸어가지 못하게 하셨으며
하나님을 떠난 자는 빛 가운데 걸어갈 수 없다.
범죄한 예루살렘과 동일시된 선지자는 어둠 가운데로 이끌려 가야만 했다.
선지자이신 예수님은 광야로 이끌려가셔서 사단의 시험을 감당하셔야만 하셨다.
3 종일토록 손을 들어 자주자주 나를 치시는도다
하나님을 떠난 자에게선 고통이 멈추질 않는다.
고통은 일회성이 아니다.
존재 자체가 고통이 되었다.
하나님과의 분리 자체가 고통이다.
예수님은 육체적 고통 못지 않게 십자가에서 하나님과의 분리의 고통을 감당하셔야만 하셨다.
4 나의 살과 가죽을 쇠하게 하시며 나의 뼈들을 꺾으셨고
선지가가 실제로 뼈가 꺽였던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고통이 크다는 것을 표현하고있다.
채찍에 매를 맞으시고 십자가의 길을 걸으시면서, 하나님으로서의 권위가 꺽이신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5 고통과 수고를 쌓아 나를 에우셨으며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안식에 도달할 수 없었던 인간은 결과적으로 고통과 수고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인간은 사는 날 동안에는 근본적으로 고통과 수고가 에워쌈으로 안식을 누릴 수가 없다.
인간은 오직 그리스도가 주신 안식을 통해서만 둘러싸인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6 나를 어둠 속에 살게 하시기를 죽은 지 오랜 자 같게 하셨도다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로 인하여 어둠 속에 갇힌 선지자는 실상 지옥에 있는 상태와 다를 바가 없었다.
성전 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아담의 죄를 담당하심으로 우리 대신 음부에 내려가셨기에 신자는 영원한 죽음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7 나를 둘러싸서 나가지 못하게 하시고 내 사슬을 무겁게 하셨으며
타락하여 궁지에 몰린 인간에게는 선택의 폭이 많지가 않을 뿐 더러 돌파구가 없을 수도 있고 피할 길이 없을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 길을 막으시면 돌파구가 있을 수가 없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직면한 유일한 죽음의 길을 직접 걸으심으로서 신자에게 새로운 생명의 길을 열어주셨다.
8 내가 부르짖어 도움을 구하나 내 기도를 물리치시며
하나님께서 길을 막으시면 피할 길이 없을 뿐만이 아니라 하늘을 우러러 기도할 수도 없다.
예수님께서는 막힌 담을 허시고 우리에게 기도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
9 다듬은 돌을 쌓아 내 길들을 막으사 내 길들을 굽게 하셨도다
타락한 인간에게는 더 이상 생명의 길이 허락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이 가야만 하는 길로 가게하심으로서, 오직 인간에게 지옥에 도달되는 길만을 열어놓으셨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읺고는 스스로 곧은 길을 갈 수 없는 존재가 인간이다.
10 그는 내게 대하여 엎드려 기다리는 곰과 은밀한 곳에 있는 사자 같으사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자의적으로 가고자하는 길에서 기다리셨다가 더 이상 가지못하도록 인간을 공격하신다.
창조 때에 다스리라고 허락하신 모든 창조 세계를 더 이상 허락하지 않으시고, 오직 멸망의 길로만 가도록 허락하신 것이다.
11 나의 길들로 치우치게 하시며 내 몸을 찢으시며 나를 적막하게 하셨도다
사람은 스스로 가는 길이 실상은 자신의 의지대로 가고있는 것이 아님을 알지 못한다.
타락한 인간은 잘못된 길로 갈 수 밖에 없다.
신자가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듯이, 불신자는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은 파멸의 길로 갈 수 밖에 없다.
12 활을 당겨 나를 화살의 과녁으로 삼으심이여
인간은 허락되지 않은 길을 걸어갈 때 하나님의 표적이 되어 죽음에 이를 수 밖에 없다.
인간이 스스로 강성하여지길 원해서 쌓는, 하나님을 배제하는, 도시문명들은 재앙의 구렁텅이로 빠질 수 밖에 없다.
13 화살통의 화살들로 내 허리를 맞추셨도다
인간은 스스로 강성해지길 원했지만 오히려 화살을 허리에 맞은 것과 같이 무력하여 질 수 밖에 없다.
예수님도 옆구리가 창에 찔리심으로 모든 잘못된 인간적인 힘의 근원들로 인하여 죽으심에 이를실 수 밖에 없으셨다.
14 나는 내 모든 백성에게 조롱거리 곧 종일토록 그들의 노랫거리가 되었도다
조롱과 비웃음은 타락한 인간의 죄성에서나온 것이다,
하나님의 공동체는 서로를 기뻐하며 서로를 세워주지만, 타락한 인간은 서로를 조롱하며 서로를 허물 수 밖에 없다
예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의 조롱을 받으시면서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하셨다.
15 나를 쓴 것들로 배불리시고 쑥으로 취하게 하셨으며
죽음에 이르는 자에게 허락된 것은 쓴 것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주신 먹는 즐거움의 상실과 더불어 고통을 먹고 마시는 것이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쓸개 탄 신포도주의 맛을 보아야만 하셨다.
16 조약돌로 내 이들을 꺾으시고 재로 나를 덮으셨도다
치아가 상실된 인간은 죽음에 다다른다.
먹는 기능이 상실되고 죽음의 재를 뒤집어씀으로서 음부의 고통을 맛보는 것이다.
17 주께서 내 심령이 평강에서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내가 복을 내어버렸음이여
모든 절망을 짊어진 상태에서 평강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복음인 것은 인간이 절망 가운데 있는 존재임을 말하는 것이다.
18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 하였도다
하나님이 버리심으로 소망이 끊어진 인간에게 유일한 희망은 오직 은혜 가운데 임하는 그리스도의 복음뿐이다.
신자를 구원에 이르게한 복음은 소망이 끊어져 어둠 가운데 임한 복음이다.
(버림받은 중보자)
중보자되신 그리스도는 공생애 사역을 통하여 직접 중보 사역을 감당하셨다.
그리스도의 순종은 잃어버린 공동체를 회복하시는 것이며, 인간에게 남아있는 일그러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버리심으로 고통을 감당하셔야만 했다.
선지자의 고통이 자신의 육체적 고통보다도 중보자로서의 고통이었듯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고통은, 육체적 고통보다도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에 대한 고통이었기에 감당하시기 힘든 것이었다.
(공동체의 회복)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회복에 있다.
중보자는 하나님의 공동체성의 표현한다.
순종은 공동체를 구성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었다.
그리스도의 순종은 공동체의 회복을 위한 순종이었다.
예루살렘은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야만 했는데,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공동체에 참여 할 수가 없었다.
(공동체가 파괴된 현실)
우리의 현실은 불순종과 이익 공동체, 그리고 개인주의와 일그러진 하나님의 형상으로 표현될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환경적인 고통 이전에 존재론적인 고통 가운데 있다.
삶의 환경 가운데 나타나는 고통은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와의 분리로 인한 존재론적 고통의 현상일 뿐이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존재론적인 문제가 겉으로 드러났을 뿐이다.
파괴된 공동체에서는 다른 이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파괴된 공동체에서는 어느 누구도 선지자와 같이 남의 일을 자신의 일로 여기지 않는다.
다른 이들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려고 하지 않는 이들에게서 진정한 공동체를 기대할 수가 없다.
인간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이 일그러진 만큼이나 공동체 또한 일그러져있음을 본다.
(공동체 회복을 위한 성도의 자세)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아픔에 동참하여야한다.
공동체 안에서의 타인의 부정적 상황에 대한 비난을 멈춰야한다.
그보다 더 나아가 타인의 부정적 모습에 마음 아파해야한다.
또한 타인의 아픔에 대하여 기도하여야한다.
타인에 대한 지속적인 비난은 지옥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인간 사회에서 비난은 타락과 더불어 시작 되었다.
공동체의 일원이 행복을 용납하지 못하거나 타인을 조롱해서는 안된다.
공동체는 인간의 힘으로 될 수 없기에 매사에 기도로 참여해야한다.
일그러진 형상마져 없다면 완전한 지옥일 것이다.
이 땅에서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 목회자와 성도와의 관계, 직장 상사와의 관계, 정치인과의 관계, 더 나아가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인간 관계가 그나마 남아있는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그림자이기에, 성도는 교회공동체 뿐만이 아니라 사회 공동체를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모형으로 삼고서 일상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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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애가 2장 11-22절 말씀 묵상
11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끊어지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이는 딸 내 백성이 패망하여 어린 자녀와 젖 먹는 아이들이 성읍 길거리에 기절함이로다
선지자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보여주고있다.
선지자의 고통은 자신의 육체로 인한 것이 아니라 관계성에 대한 것이다.
인간은 타고난 공동체성을 가지고있기에 하나님과의 관계의 손상은 사람 간의 관계의 손상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관계성의 파괴에서오는 극단적인 정신적 고통은 그만큼 불순종으로 인한 관계성의 파괴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가를 일깨워준다 .
12 그들이 성읍 길거리에서 상한 자처럼 기절하여 그의 어머니들의 품에서 혼이 떠날 때에 어머니들에게 이르기를 곡식과 포도주가 어디 있느냐 하도다
어머니는 양육에 대한 책임이 있다.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받지 못하는 어머니는 자식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능력마져도 가질 수가 없었다.
자녀의 극단적인 굶주림 가운데서도 부모가 부모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오히려 어린 자녀를 자신의 먹잇감으로 삼기도한다.
이는 땅에서 부모와 자식 간의 육신의 깨어진 관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의 결과가 어떠한 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현재 누리는 평안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하며, 하나님의 징계를 받기 전에 하나님께 나아가야한다.
13 딸 예루살렘이여 내가 무엇으로 네게 증거하며 무엇으로 네게 비유할까 처녀 딸 시온이여 내가 무엇으로 네게 비교하여 너를 위로할까 너의 파괴됨이 바다 같이 크니 누가 너를 고쳐 줄소냐
딸이라는 위치는 시집가지 전까지는 아버지의 권위 아래에서, 아버지의 보호를 받아야한다.
선지자는 하나님 아버지의 권위에 힘입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이다.
선지자는 예루살렘과 시온에 대하여 진실된 말을 전하여야 하는데 이를 전할 수가 없다.
예루살렘과 시온은 자신들이 듣고 싶은 말에 익숙하였기에 더 이상 참된 선지자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가 없다.
이는 현 시대의 교회의 상황과 유사하다.
현시대에 교회의 설교에서 참 복음이 선포되는 것을 거의 들을 수가 없다.
설교의 대부분이 자신을 포장하거나 청중이 듣기 좋은 말로만 장식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온갖 철학적 사고로 포장되었기에, 참 진리가 선포되는 현장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선지자가 애통하는 것과같이 현실의 심각성이 제대로 선포되어야만 할 것이다.
14 네 선지자들이 네게 대하여 헛되고 어리석은 묵시를 보았으므로 네 죄악을 드러내어서 네가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지 못하였도다 그들이 거짓 경고와 미혹하게 할 것만 보았도다
거짓 선지자는 대부분 사람들의 필요에 의하여 생겨난다.
사람들은 거짓된 경고와 위안을 믿고싶어서 거짓 선지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참된 선지자는 스스로도 힘들 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힘든 존재이지만, 모두를 위해서 꼭 필요한 존재이다.
거짓된 선포는 적절한 구원의 기회를 놓치게 함으로서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참된 생명으로 인도하지 못하는 윤리적이고 철학적이고 도덕적인 가르침은, 종교의 모양은 있지만 그 안에 진리가 없으며 거짓된 평안과 자기 만족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께서 둘째 아담으로서, 선지자의 직책을 회복하셨듯이,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는 이 땅에서 참된 선지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할 것이다.
15 모든 지나가는 자들이 다 너를 향하여 박수치며 딸 예루살렘을 향하여 비웃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기를 온전한 영광이라, 모든 세상 사람들의 기쁨이라 일컫던 성이 이 성이냐 하며
마치 오늘날 교회가 사회의 조롱거리가 된 모습과 유사하다.
거짓 선지자로 유다가 멸망의 길로 들어섰듯이, 거짓된 목회자들로 인해서 교회가 사회의 조롱거리가 되고있다.
16 네 모든 원수들은 너를 향하여 그들의 입을 벌리며 비웃고 이를 갈며 말하기를 우리가 그를 삼켰도다 우리가 바라던 날이 과연 이 날이라 우리가 얻기도 하고 보기도 하였다 하도다
세상은 교회에 대하여 그냥 조롱하는 것이 아니라 대적하는 원수로서 승리을 외치는 것이다.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하면서도, 동시에 세상에 대하여 선한 싸움을 싸워야한다.
유다의 멸망은 세상과의 싸움에서의 패망이며,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 이들이 되었다.
현재 교회가 사회의 조롱거리가 된 것은 교회가 세상보다도 더 세상같이 되었기 때문이다.
교회는 복음이라는 하나님의 특별법만을 가지고 세상의 상식인 자연법을 무시하고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자연법의 기초 위에서 하나님의 특별법인 복음으로 운영되어야한다.
세상에서는 상식이 통하여도 교회에서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되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이 죄인인 것을 알아도 교인들은 자신들이 죄인들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산다.
세상은 잘못한 것에 대하여 책임을 질 줄 알지만, 교회는 잘못한 것에 대하여 책임의식 조차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교회에서 선포되는 왜곡된 복음은 죄에 대해서도 무감각하게 만든다.
왜 예수님께서 세리나 창기들보다도 바리세인들을 더 질책하셨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17 여호와께서 이미 정하신 일을 행하시고 옛날에 명령하신 말씀을 다 이루셨음이여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무너뜨리사 원수가 너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게 하며 네 대적자들의 뿔로 높이 들리게 하셨도다
유다의 재앙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이라면,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이렇게까지 고통 가운데 있게 하셔야했는지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하기가 힘이든다.
하지만 조금이나마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정하실 수 밖에 없으신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재앙은 아담의 범죄로 인한 인간의 죄성이 얼마나 심각하고 인간의 상태가 어떠한 지를 드러내시는 과정이다.
이러한 재앙을 통해서 인간으로하여금 죄의 심각성을 알게 하실 수 밖에 없으셨고, 결국 모든 인간을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 귀속시키기 위하신 것이었다.
이러한 일을 정하셨다고 이러한 불행을 하나님의 책임으로 몰아가서는 안된다.
불행에 대해서는 아담에게도 경고하셨고, 이스라엘에게도 경고하셨지만, 경고를 무시하고 굽은 길로 간 것은 전적으로 인간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인간은 이미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죽이기로 작정된 자이지만, 그나마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과정 가운데 이러한 상황들을 허락하실 수 밖에 없으셨을 것이다.
이러한 불행이 아니고서는 인간은 불순종의 심각성을 깨달을 수가 없고, 아담의 범죄가 얼마나 심각한 영향을 미쳤으며, 인간은 한 인간이기 이전에 공동체적 책임감을 가져야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은 오직 이러한 불행한 상황 가운데 자숙하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야만 한다.
인간에게 주어지는 여러가지 불행들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한 은혜의 방편이기에, 인간은 불행 자체를 가지고 하나님께 불평해서는 안된다.
영원한 것은 그 중요성에 있어서 순간의 것과 비교될 수가 없는 것이다.
18 그들의 마음이 주를 향하여 부르짖기를 딸 시온의 성벽아 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릴지어다 스스로 쉬지 말고 네 눈동자를 쉬게 하지 말지어다
19 초저녁에 일어나 부르짖을지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지어다 각 길 어귀에서 주려 기진한 네 어린 자녀들의 생명을 위하여 주를 향하여 손을 들지어다 하였도다
재앙은 상황을 직시하게 만든다.
재앙의 과정이 없었다면 무엇이 문제인지를 깨달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재앙의 상황은 문제를 문제로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재앙은 상황을 직시하게 만듬으로써 죄를 깊이 생각하며 하나님께 올바른 간구를 하게한다.
일반적 상황에서는 대부분의 기도가 욕심의 기도이지만, 재앙의 상황에서는 통회하는 심정을 가지고 기도하게된다.
절망의 원인에 대한 제대로된 인식만이 희망을가져온다.
절망 가운데 간구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의 요구를 하시지 않으시며 은혜 가운데로 죄인을 인도하신다.
20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주께서 누구에게 이같이 행하셨는지요 여인들이 어찌 자기 열매 곧 그들이 낳은 아이들을 먹으오며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어찌 주의 성소에서 죽임을 당하오리이까
21 늙은이와 젊은이가 다 길바닥에 엎드러졌사오며 내 처녀들과 내 청년들이 칼에 쓰러졌나이다 주께서 주의 진노의 날에 죽이시되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도륙하셨나이다
22 주께서 내 두려운 일들을 사방에서 부르시기를 절기 때 무리를 부름 같이 하셨나이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시는 날에는 피하거나 남은 자가 없나이다 내가 낳아 기르는 아이들을 내 원수가 다 멸하였나이다
극단적 상황을 있는 그대로 주 앞에 펼쳐놓아 아뢴다.
마치 죽음을 펼쳐놓는 것과 같다.
더 이상의 비극을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아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단순한 죄 용서가 아니라 우리가 감당했어야할 이러한 비극을 직접 담당하셨던 것이다.
(나가는 말- 하나님은 실패하셨는가?)
구약의 역사는 진멸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자녀 교육에 있어서 자녀의 성공은 부모의 명예와 직결된다.
자녀 교육이라는 관점에서만 본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루시는 모습이 힘겨워만 보인다.
노아 홍수로 인간들을 쓸어버리셔야했고,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 대부분을 끝까지 설득하는데 실패하셨으며, 가나안 땅에서의 이스라엘은 종말을 고해야만 했었다.
하나님은 사람을 설득하여 올바른 길로 갈수 있도록 하시는데 실패하셨는가?
아니면 인간은 말로서 설득될 수 없는 존재임을 증명하시기 위한 것인가?
서구 사회에서는 자녀에게 매를 들 경우 부모가 법적인 책임을 져야하는데, 하나님께서는 너무도 많은 인간들을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참하게 죽음으로 몰아가신다.
인간이 어떠한 존재이기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도 힘들게 인간을 재앙의 한 가운데로 몰아가셔야만 하셨는가.
안될 사람들이라면 애초에 시작을 하시지 말았어야했는데, 그런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뜻은 사람을 설득시켜서 좋은 세상을 만드시고자 하신 것이 아니라, 죄를 고발하시기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인간을 재앙 가운데 몰아가시는 것은 제대로된 사람을 만들기 위한 극단적인 자녀 교육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하나님께 문제가 있으시다고 할 수가 없다.
자녀 교육에 대한 비유는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관점이며, 인간적으로 성공한 자녀교육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성공한 자녀 교육은 없을 것이다.
교육을 시킨다고하더라도 인간에게서는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오직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이들에게 기대한다는 것은 100% 실패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죄에 대한 고발은 가나안에만 제한 된 것이 아니다.
자연법 아래있는 모든 사회는 결국 고발되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사회를 기독교화하려는 노력들이 있지만 이는 인간의 죄성을 간과한 것이다.
한 개인이 변화되는 것도 거의 기적에 가까운데, 그리스도인이라고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도 불신자들에게는 실패(?)를 하셨는데, 그리스도인이라고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가?
사회에서 중생된 자는 소수에 불과하며, 설령 다수가 중생되었다고 하더라도 주변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사회가 유지되는 것은 성도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연법과 일반 은혜에 의한 것이다.
결국 복음을 거부하는 모든 인간은 유다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에서 자유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다.
문화칼빈주의자들은 문화변혁을 위한 문화명령을 대위임령보다도 더 높은 수준의 것으로 설명하기도 하지만, 진정으로 인간의 죄성이 어떠한지를 인식하게된다면, 그리스도인이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대위임령(마 28:19-20)을 실행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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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애가 2장 1-10절 말씀 묵상
1 슬프다 주께서 어찌 그리 진노하사 딸 시온을 구름으로 덮으셨는가 이스라엘의 아름다움을 하늘에서 땅에 던지셨음이여 그의 진노의 날에 그의 발판을 기억하지 아니하셨도다
딸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다는 표현을 한 정도로 사랑을 받아야 하는 대상이다.
마땅히 사랑을 받아야 할 대상이 진노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인간의 관점에서는 믿었던 이로부터의 배신은 증오를 불러일으키겠지만, 하나님으로부터의 징계는 배신이 아니라 스스로 화를 자초한 일이기에 하나님께 항의를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심정은, 기대하였던 자녀에게 배신당하는 부모의 심정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다가오라고 성전이라는 발판까지 만들어 주시고 아름다움으로 입히셨는데,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기보다는 아담의 후손임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먼저 하나님을 소외시켰던 것이다.
딸 시온과 이스라엘에 대한 진노는, 기대하시고 원하셨던 것에 대한 실망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발판을 만들어 주셨지만, 유다가 이를 원치 않았기에 성전이 파괴되는 것을 허락하신 것과 같이, 에덴에서도 하늘과 땅의 연합을 위한 성전으로서의 발판을 저버린 아담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아담이 에덴에서 추방 될 수 밖에 없었다.
하나님께서 시온에 발판을 허락하신 것은 궁극적으로 하늘과 땅의 연합을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유다가 보여준 모습은, 아담의 후손이었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더 이상 하늘과 땅의 연합이 불가능함을 보여준 것이다.
현재의 상황은 그리스도없이는 하늘과 땅의 연합을 바라볼 수가 없다.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는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하여 하늘 문이 열린 곳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없는 유대 이스라엘을 하나님 나라의 실체로 보지만, 이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거부하는 사단이 좋아하는 이론일 뿐이다.
유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나라이기 이전에 이들이 아담의 자손임을 증명하고 있을 뿐이다.
2 주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들을 삼키시고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셨음이여 노하사 딸 유다의 견고한 성채들을 허물어 땅에 엎으시고 나라와 그 지도자들을 욕되게 하셨도다
야곱은 이스라엘로서 아브라함의 영적인 자손이라고 할 수가 없다.
인간의 본능적으로 육체를 위해 살기에,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마련해주셔도 인간은 이를 육체의 기회로 사용할 뿐이다.
야곱의 모든 거처가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필요할지라도 인간에게 이것은 스스로 힘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될 수가 없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성전이 파괴되도록 허락하심으로서, 야곱의 모든 거처, 즉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육체적 후손에게서 기대하셨던 제사장 나라로서의 기능을 소멸시키신 것이다.
삶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은혜의 방편은 하나님께 귀결되지 않고는 소멸될 수 밖에 없다.
3 맹렬한 진노로 이스라엘의 모든 뿔을 자르셨음이여 원수 앞에서 그의 오른손을 뒤로 거두어 들이시고 맹렬한 불이 사방으로 불사름 같이 야곱을 불사르셨도다
하나님의 진노가 맹렬하시다는 것은 불순종의 심각성의 한 단면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모든 뿔을 자르심으로서 이스라엘은 더 이상 자신을 방어할 수 없을 뿐더러, 대적들 앞에서 무력하게 당해야만 했다.
이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이들의 최후의 모습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하나님을 배제하는데 있어서 어느 시대보다도 탁월하다.
첨단 기술이 하나님을 대체하였고, 물질과 돈이 하나님보다도 더 의지할 뿔이 되었으며, 모든 시간과 공간에서 하나님을 철저하게 배제하고있다.
마지막 때의 마지막은 환경 재앙이나 갖가지 난관들이 우리를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도 없으며, 철저하게 하나님을 배제하는 인간의 죄성에 심각성이 있다.
하나님을 배제하면서 다가올 재앙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현대인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이들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4 원수 같이 그의 활을 당기고 대적처럼 그의 오른손을 들고 서서 눈에 드는 아름다운 모든 사람을 죽이셨음이여 딸 시온의 장막에 그의 노를 불처럼 쏟으셨도다
하나님께서 원수가 되셨다는 사실은 그냥 관계의 단절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대적이 되는 것이다.
불순종은 단순히 말을 듣지 않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과 적대적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면 이방인인 우리는 얼마나 순종하는가?
율법을 받지 않았다고 무책임 할 수 있는가?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자연법 아래에 놓여있다.
자연법은, 이스라엘에게 율법이 주어졌듯이,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법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자연법 아래에서 하나님과 관계없이 살아가는 것에 너무나도 익숙하다.
하지만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위치와 책임을 분명히 인식하여야 한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생은 자신의 삶의 목적을 인식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주신 삶의 목적은 분명하게 있는 것이기에 이에 대한 외면은 유다의 종말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5 주께서 원수 같이 되어 이스라엘을 삼키셨음이여 그 모든 궁궐들을 삼키셨고 견고한 성들을 무너뜨리사 딸 유다에 근심과 애통을 더하셨도다
버림받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원수같이 되심을 통해서 불순종의 결과가 어떠한지를 보여주신다.
인간에게는 하나님께 순종하느냐, 아니면 불순종하느냐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라도, 순종의 문제는 하나님께 매우 중요한 주제인 것이다.
율법이 아니라 자연법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있는데도 인간들은 끝까지 하나님을 외면하지만, 그 종국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 무너지는 가운데 비참해 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6 주께서 그의 초막을 동산처럼 헐어 버리시며 그의 절기를 폐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절기와 안식일을 잊어버리게 하시며 그가 진노하사 왕과 제사장을 멸시하셨도다
유다에 임한 파괴는 그동안 하나님께 나아가는 발판들에 대한 것이었다.
초막이 헐리고 절기가 폐하여졌음은 경고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이라는 결론의 차원이다.
더 이상 인간에게 주어진 수단으로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없어졌을 뿐만이 아니라 그 흔적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 나라이기 이전에 아담의 후손임을 증명하는 것으로서, 이는 아담의 후손인 인류 모두에게 해당되는 사항이다.
율법을 통하여 주어졌던 안식일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기에, 오직 안식의 주인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졌음을 인정하고, 그리스도께 참여된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7 여호와께서 또 자기 제단을 버리시며 자기 성소를 미워하시며 궁전의 성벽들을 원수의 손에 넘기셨으매 그들이 여호와의 전에서 떠들기를 절기의 날과 같이 하였도다
예루살렘의 모든 기능이 상실되었다.
하지만 제3성전에 집착하는 현재의 상황은 인간이 얼마나 자신들의 죄성을 인정하지 않으며, 자신들의 방식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려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제3성전에 대한 집착은 모든 인간이 자신의 방식으로 의를 세우려는 것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파괴를 통해서 인간에게 더 이상 기회를 주시지 않으신다.
오직 그리스도께 의지하며 두 손들고 나아가야만 될 것이다.
8 여호와께서 딸 시온의 성벽을 헐기로 결심하시고 줄을 띠고 무너뜨리는 일에서 손을 거두지 아니하사 성벽과 성곽으로 통곡하게 하셨으매 그들이 함께 쇠하였도다
인간을 통해서 세워지는 눈에 보이는 성전은 파괴될 수 밖에 없다.
제2성전의 파괴와 마찬가지로 솔로몬 성전도 파괴될 수 밖에 없었다.
아담이 오실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던 것과 같이 예루살렘 성전은 오실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모형일 뿐이다.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는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서 인간에게는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음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9 성문이 땅에 묻히며 빗장이 부서져 파괴되고 왕과 지도자들이 율법 없는 이방인들 가운데에 있으며 그 성의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묵시를 받지 못하는도다
보호받지 못하는 예루살렘은 바벨론 유배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하나님과 교통 할 수 없는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에 있는 것이며, 이는 인간의 상태가 사단의 종노릇 할 뿐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이 발전과 노력을 통하여 본능적으로 추구하는 평안은 근본적 해결책과는 거리가 멀다.
10 딸 시온의 장로들이 땅에 앉아 잠잠하고 티끌을 머리에 덮어쓰고 굵은 베를 허리에 둘렀음이여 예루살렘 처녀들은 머리를 땅에 숙였도다
이들은 자신들이 절망 가운데 있음을 인식하고있기에 그나마 희망이 있다.
이러한 절망도 인식하지 못하는 인간에게는 희망을 찾아 볼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이 땅에서의 고통은 절망적일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과 현재의 상태에 대한 인식의 출발이 되는 축복의 통로가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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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애가 1장 12-22절 말씀 묵상
12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나의 고통과 같은 고통이 있는가 볼지어다 여호와께서 그의 진노하신 날에 나를 괴롭게 하신 것이로다
예루살렘의 고통은 인간 모두의 고통이다.
선지자는 예루살렘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과 동일시하고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인간 모두의 상태를 대변하기에 모든 인간은 예루살렘의 고통에 동참하여야한다.
유대인의 불의는 인간 모두의 불의를 대변한다.
히틀러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였다고 유대인들에게 적대적 행동을 취하였지만, 유대인은 인간 모두의 대변자일 뿐, 자신들을 포함한 인간 모두가 예수를 죽인 불의한 자들임을 깨닫지 못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최후의 심판의 그림자이다.
하나님의 진노의 날에는 심판이 모든 이들에게 임할 것이다.
현재의 삶 가운데 불의를 행하는 자를 비난하기에 앞서서 인간 모두는 동일한 죄임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단지 그들과 같이 자신의 내면의 죄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악한 행위 이전에 우리의 본질적 죄성에 대한 근원적인 것이다.
우리의 행함은 악으로 드러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사랑이 없이 행하고 모든 생각과 행동이 죄악인 것이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죄악에서 자유할 수가 없기에 어느 누구도 정죄하는데 앞장설 수가 없다.
정죄보다는 다만 의사를 표현할 뿐이어야한다.
13 높은 곳에서 나의 골수에 불을 보내어 이기게 하시고 내 발 앞에 그물을 치사 나로 물러가게 하셨음이여 종일토록 나를 피곤하게 하여 황폐하게 하셨도다
어찌보면 선지자는 예루살렘의 반역과 관계없어 보이나 선지자 자신을 예루살렘과 동일시 함으로서 예루살렘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모습은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성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궁극적으로 예루살렘의 고통을 직접 담당하실 그리스도의 마음을 대변해준다.
선지자는 축복을 주실 분으로부터 저주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사랑하는 아버지로부터 받는 저주였기에 그만큼 고통이 컸다.
인간은 이를 이해할 능력이 없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는 자이며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자이기에, 오직 말씀 가운데서 희미하게나마 하나님의 사랑의 그림자를 볼 뿐이다.
14 내 죄악의 멍에를 그의 손으로 묶고 얽어 내 목에 올리사 내 힘을 피곤하게 하셨음이여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자의 손에 주께서 나를 넘기셨도다
(감당해야 할 죄악의 무게)
자신의 죄악의 무게가 가벼웠다면 목에 메어달린 죄악으로 인해서 그렇게 힘이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간은 근원적으로 자신의 죄악이 얼마나 큰지를 알지 못하며, 자신의 죄악을 감당한 능력이 없는 자이다.
주변의 부정적 상황과 원수들은 자신의 죄악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일 뿐이기에, 주변의 상황과 싸우기 이전에 자신과의 싸움이 우선이 되어야 할 것이다.
15 주께서 내 영토 안 나의 모든 용사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고 성회를 모아 내 청년들을 부수심이여 처녀 딸 유다를 내 주께서 술틀에 밟으셨도다
유다는 스스로를 보호하였던 수단들이 무력화됨으로서 더 이상 자신들을 보호해 줄 수가 없다.
표면적으로는 적들에 의하여 무력화된 것이지만 근원적으로는 유다의 불순종으로부터 인한 것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실력을 쌓고 세력을 키우면서 무장을 하지만 이들은 근원적인 방패가 될 수 없다.
국가가 아무리 무장을 하여도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면, 그 무장들은 휴지 조각에 불과할 것이다.
오히려 주변의 부정적 상황들과 적들을 일으켜 세워서 짓밟힌 포도송이와 같이 멸하실 것이다.
갈수록 커져가는 적대 세력의 위협의 근원에는 내부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불순종이 점증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현재의 평안은 우리의 실력과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을 깨닫고서 더욱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활에 힘을 써야 할 것이다.
16 이로 말미암아 내가 우니 내 눈에 눈물이 물 같이 흘러내림이여 나를 위로하여 내 생명을 회복시켜 줄 자가 멀리 떠났음이로다 원수들이 이기매 내 자녀들이 외롭도다
눈물과 고통의 원인이 근본적으로 자신의 불행에 대한 것이 아니다.
부모의 심정은 언제나 자식을 향하여 있는 것과 같이 신자의 고통은 사랑하는 자로 말미암아야한다.
신자는 사랑하는 자가 되어 주변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인식하여야 한다.
사랑하는 자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사실은 절망적인 상황이다.
사람들은 은혜 가운데 있으면서도, 고통이 임하기 전에는 축복을 축복으로 알지 못하고 감사하지도 않는다.
인생은 결국 파멸의 길을 걸어야할 수 밖에 없다.
파멸의 길이 택함받은 자에게는 구원의 길이며, 버림받을 이에게는 멸망의 길이다.
선지자의 애통은 그리스도의 마음으로서, 버림받게될 그리스도의 고통의 표현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는 세상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한다.
17 시온이 두 손을 폈으나 그를 위로할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사방에 있는 자들에게 명령하여 야곱의 대적들이 되게 하셨으니 예루살렘은 그들 가운데에 있는 불결한 자가 되었도다
하나님의 영광을 스스로 수치로 만들었다.
아름다운 생명이 역겨운 주검이 되었다.
탄생된 아름다운 인생은 주검으로 갈수밖에 없다.
이것이 인생이며, 인생은 오직 구원자의 손길을 필요로한다.
이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두 손을 폈을 때 임한 구원의 손길을 감사하자.
인생은 비록 썩어질 불결함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새 옷을 준비하셨기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자.
18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 그러나 내가 그의 명령을 거역하였도다 너희 모든 백성들아 내 말을 듣고 내 고통을 볼지어다 나의 처녀들과 나의 청년들이 사로잡혀 갔도다
선지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죄인임을 고백한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이나 자연법을 통하여 인생들에게 끊임없는 명령을 내리신다.
하나님의 명령은 인생들이 하나님의 의 안에 거하기 위한 조건이기에, 하나님의 명령은 정당하지만 인생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 할 수 밖에 없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의를 자랑할 수가 없다.
인생은 고발되어질 뿐이기에, 선지자의 고통을 통하여 백성들의 죄악이 고발되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구원의 길이면서 동시에 인생들의 죄악을 고발하는 것이다.
인생이 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구원의 수단이기에 앞서서 자신들의 죄가 고발되어지는 현장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19 내가 내 사랑하는 자들을 불렀으나 그들은 나를 속였으며 나의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그들의 목숨을 회복시킬 그들의 양식을 구하다가 성 가운데에서 기절하였도다
인생은 어려운 가운데서 그동안 가까이 지냈던 주변에 도움을 구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그들은 도움이 될 수가 없다.
환경적 도움은 근원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은 것이기에, 하나님을 떠난 인생들에게는 그들은 단지 우상일 뿐이다.
아무리 교회에서 직분을 맡은 자라고 할지라도 오직 도움은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20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내가 환난을 당하여 나의 애를 다 태우고 나의 마음이 상하오니 나의 반역이 심히 큼이니이다 밖에서는 칼이 내 아들을 빼앗아 가고 집 안에서는 죽음 같은 것이 있나이다
선지자는 유다의 반역을 비난하기보다는 이를 자신의 반역이라고 고백한다.
선지자는 유대의 죄악을 친히 담당함으로서 중보자로서의 역할을 하고잇다.
그리스도가 중보자되심은 우리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적 파괴였으면서도 동시에 공동체의 회복이었다.
선지자가 유다의 반역을 자신의 아들과 집 안의 죽음으로 묘사함으로서, 성부 하나님에 의한 아들되신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예표하고있다.
21 그들이 내가 탄식하는 것을 들었으나 나를 위로하는 자가 없으며 나의 모든 원수들은 내가 재난 당하는 것을 듣고 주께서 이렇게 행하신 것을 기뻐하나이다 그러나 주께서 그 선포하신 날을 이르게 하셔서 그들이 나와 같이 되게 하소서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동일하게 심판받을 자들이다.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적 책임과 사랑과는 반대로 대적자들은 오히려 선지자의 고통을 즐거워하고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이라도 멸망당하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으시기에, 성도는 악한 자의 불행에 대하여 기뻐하면 안된다.
22 그들의 모든 악을 주 앞에 가지고 오게 하시고 나의 모든 죄악들로 말미암아 내게 행하신 것 같이 그들에게 행하옵소서 나의 탄식이 많고 나의 마음이 병들었나이다
악인의 불행에대하여 기뻐하면 안되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중보자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악인을 정죄하고, 그들에 대하여 험악한 말들을 많이하지만, 자신도 마찬가지로 심판받을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쉬운 문제가 아닌 것이다.
우리는 다른 이들의 죄악을 보면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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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애가 1장 1-11절 말씀 묵상
1 슬프다 이 성이여 전에는 사람들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하게 앉았는고 전에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이 되었고 전에는 열방 중에 공주였던 자가 이제는 강제 노동을 하는 자가 되었도다
이스라엘의 풍요에서 빈곤으로의 추락은 풍요로웠던 에덴에서 추방되었던 아담을 연상시킨다.
예루살렘에서의 추방과 솔로몬 성전의 파괴는 성전으로서의 에덴의 종식과 유형적 유사성을 갖는다.
이스라엘이 성전에서의 기능과 절대적으로 연관되어있었던 것과 같이, 에덴도 성전으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었다.
아담은 그리스도의 모형이었으며,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와 같이, 에덴에서 제사장, 선지자, 왕의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였으며, 제사장의 나라였으며, 하나님을 세상에 알리는 선지자로서의 역할을 했어야만 했다.
이스라엘은 아담의 불순종과 마찬가지로, 불순종으로 인하여 더 이상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가 없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아담의 불순종과 성격을 같이 하며,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성전의 기능이 상실된 것과 같이, 아담의 불순종으로 에덴의 기능은 상실되었다.
불순종으로 인하여 예루살렘에서 추방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불순종으로 인하여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의 모습과 유사하다.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와 이스라엘 백성의 바벨론 유수의 상황은 표면적으로는 대적에 의한 것이지만, 근원적인 원인은 외부 상황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불순종이라는 내부적 원인에서 기인된 것이다.
이는 현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현재의 삶의 모습을 대변해준다.
현 시대의 상황적 어려움은 아담이나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외부적 문제가 아니라 내부적 문제에서 기인한다.
인간이 처한 상황의 어려움은 인간은 누구나 불순종한 아담의 자손임을 보여준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로서, 에덴이나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과 같이 풍요를 누리도록 지음받은 존재였으며, 마땅히 풍요를 누릴 자격이 있었지만, 불순종으로 인하여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여야만 하는 이스라엘과 같이, 죄의 종노릇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예레미아애가의 탄식은 비단 2500여년 전의 탄식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상황에 대한 현재적 탄식으로서, 인간이면 누구나 다 그리스도께 나아가야만 하는 당위성을 제공해준다.
2 밤에는 슬피 우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사랑하던 자들 중에 그에게 위로하는 자가 없고 친구들도 다 배반하여 원수들이 되었도다
(파괴된 공동체)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난 후에 구원의 소망 가운데 이브를 하와라고 칭했듯이,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 이외에는 어느 누구에게서도 구원의 소망을 담아낼 수가 없었다.
타락한 인간의 삶은, 관계성의 파괴로 인하여, 슬픔과 눈물이 뺨에 흐를 수 밖에 없는 인생이 되었다.
순종은 공동체의 존립을 위한 필수 조건이었기에, 불순종으로 인한 공동체의 파괴는 모든 관계성의 파괴로 나타날 수 밖에 없었다.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을 입은 인간이 타락한 후에는,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과 같이, 공동체를 파괴하는 현상이 심도깊게 나타날 수밖에 없었으며, 이로 인하여 인간의 눈에는 눈물이 마를 수가 없었다.
타락 후의 인간의 삶의 환경에서, 사람은 본질적으로 사람에게서 위로를 받을 수가 없게되었다.
시람에게서 받는 위로는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것이며, 인간에게는 근원적으로 눈물을 씻어줄 수 있는 능력까지는 없다.
인간이 삶 가운데 흘리는 눈물은 근원적으로 돌아가야할 에덴, 더 나아가서는 눈물을 영원히 씻을 수 있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담겨있다.
3 유다는 환난과 많은 고난 가운데에 사로잡혀 갔도다 그가 열국 가운데에 거주하면서 쉴 곳을 얻지 못함이여 그를 핍박하는 모든 자들이 궁지에서 그를 뒤따라 잡았도다
불순종의 결과는 환란과 많은 고난에 직면할 수 밖에 없다.
환란과 많은 고난은 불순종을 향한 인간의 죄성이 어떠한 지를 보여준다.
유다 백성은 사로잡혀가기까지 순종의 길로 들어서지 않았다.
이는 아담의 자손들이 가지고 있는 죄의 속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타락한 아담의 후손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없이는 본능적으로 사단의 종노릇을 하면서 환란과 고난 가운데 거할 수 밖에 없다.
궁지에 몰린 인간은 그 죄성으로 인하여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쉴 수가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수가 없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이미 궁지에 몰린 인생이기에, 인생은 아무리 수고를 하여도 근본적으로 뒤따라오는 어려움, 즉 죽음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4 시온의 도로들이 슬퍼함이여 절기를 지키려 나아가는 사람이 없음이로다 모든 성문들이 적막하며 제사장들이 탄식하며 처녀들이 근심하며 시온도 곤고를 받았도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향하여 있는 시온의 도로들은, 유다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파괴되었으며, 더 이상 생명에 이르는 길이 차단되었기에, 제사장이 탄식하며, 처녀들이 근심할 수 밖에 없었다.
이는 아담의 범죄 이후에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이 차단된 것과 같은 상황이다.
예레미야의 탄식 가운데에는 절망만 있는 것이 아니라 희망도 있다.
희망의 출발은 상황에 대한 인식이다.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이들에게 성전을 지으라고 명령한 것은 궁극적으로 오실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둘째 아담으로서 처음 아담의 실패를 되새길 때 희망이 있는 것이다.
시온의 도로는 궁극적으로 생명나무되신 그리스도께 이르는 길로서, 더 이상 율법에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긍휼로 인한 믿음으로 대체되었다.
5 그의 대적들이 머리가 되고 그의 원수들이 형통함은 그의 죄가 많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곤고하게 하셨음이라 어린 자녀들이 대적에게 사로잡혔도다
세상은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종종 하게된다.
악한 사람이 형통하고 의로운 자가 불행해지는 것을 종종 목격한다.
어떤 때는 아무 잘못이 없이 억울하게 당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관점에서 판단하는 것이다.
악한 이들과 불의한 자들에 대한 규정도 인간적이며, 모든 상황, 심지어는 인간의 근원적인 상황까지 생각할때 사람의 판단은 단편적이거나 부분적일 수 밖에 없다.
또한 표면적인 죄와 근원적인 죄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도 객관적이지 못하며, 하나님의 섭리조차도 알 수가 없다.
이 땅에서의 삶의 형통과 불행이 전부가 아니기에 이를 가지고 불평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것이다.
유다의 대적들이 머리가 되고 그의 원수들이 형통한 것의 근본 원인은 하나님께 불순종한 유다의 죄악에 있는 것과 같이, 인간이 모두 범죄한 아담과 마찬가지로 불순종의 자녀들이기에 모든 인간에게는 이와같은 상황이 일어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사람들 입장에서는, 자신은 의롭기에 억울하다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다.
인간의 삶에서의 불공평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으로부터 풀어나아가야한다.
순종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요구되는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순종 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에 상황의 불공정함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할 자격이 없다.
인간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사단의 종노릇 할 수 밖에 없다.
인간이 진정 싸워야 할 대상은 억울한 부정적 상황이나 사단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자리잡고있는 순종하지 않으려는 죄성인 것이다.
6 딸 시온의 모든 영광이 떠나감이여 그의 지도자들은 꼴을 찾지 못한 사슴들처럼 뒤쫓는 자 앞에서 힘없이 달아났도다
인간에게 임한 하나님의 영광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에 있다.
삼위 하나님의 형상의 근본은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성의 구현에 있다.
공동체성은 순종이 전제가 되어야했듯이, 예수님의 공생애의 사역은 순종에 있었다.
순종이 결핍된 곳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찾을 수도 없고 하나님의 영광도 사라져버린다.
시온으로서의 예루살렘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파괴가 되었듯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인간 사회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할 수가 없다.
모든 사회 구조의 운행 원리는 이익이며 사람은 이익의 구조에 평생 쫓김을 당하며 살 수 밖에 없다.
7 예루살렘이 환난과 유리하는 고통을 당하는 날에 옛날의 모든 즐거움을 기억하였음이여 그의 백성이 대적의 손에 넘어졌으나 그를 돕는 자가 없었고 대적들은 그의 멸망을 비웃는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옛날의 모든 즐거움을 기억하는 것은 구원의 소망의 갖게하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다 궁극적인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품고있다.
구원받을 자에게는 이러한 소망이 그리스도께 인도하며, 멸망할 자에게는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수단과 방법을 찾게되는 것이다.
인간은 소망이 있기에 슬픔이 있으며, 소망이 있기에 악인과는 구별된 생활을 할 수 있다.
아담도 에덴에서의 좋았던 추억을 간직하고서 구원의 소망을 품었다.
아담은 아들에 의해서 아들이 죽임을 당하는 가운데서도 구원에 대한 소망 가운데 하나님의 축복으로 아들 셋을 낳을 수가 있었다.
하나님으로부터 은혜가 임하지 않은 이들은 오직 비웃음과 조롱의 대상이 될 뿐이다.
8 예루살렘이 크게 범죄함으로 조소거리가 되었으니 전에 그에게 영광을 돌리던 모든 사람이 그의 벗었음을 보고 업신여김이여 그는 탄식하며 물러가는도다
예루살렘의 벗었음은 아담이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드러난 수치와 연관이 된다.
아담이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에덴에서의 우월감이 상실되었듯이 예루살렘의 백성들도 교만과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할 수 밖에 없었다.
인간은 옷을 입음으로 근원적인 수치를 가릴 수가 없다.
인간이 입는 옷은 수치를 가리우는 그리스도의 그림자일 뿐이다.
인간은 발전된 모습과 성공을 자랑 삼아 스스로 영광을 드러 내려고 하지만, 결과는 오직 인간의 교만을 드러낼 뿐이다.
수치를 가리기 위해서 인간이 이룩한 과학 문명은 오히려 화만 자초할 뿐이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인간의 교만은 결국 파멸로 귀결될 것이다.
9 그의 더러운 것이 그의 옷깃에 묻어 있으나 그의 나중을 생각하지 아니함이여 그러므로 놀랍도록 낮아져도 그를 위로할 자가 없도다 여호와여 원수가 스스로 큰 체하오니 나의 환난을 감찰하소서
하나님의 영광을 떠나 인간이 스스로 세우려는 것은 더러운 것이며, 이는 수치를 가리는 옷이 될 수가 없다.
이것의 나중은 파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 속이며 위안을 삼는다.
높아지려고하나 결국 낮아진 이들은 위로받을 수가 없다.
높아지려고 하면서 옷깃에 더러운 것을 묻히는 자들은 위정자나 고위직 공무원들 보다는 스스로 의롭다고하면서 정죄를 일삼는 자들이다.
오직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 자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입은 자밖에는 없다.
10 대적이 손을 펴서 그의 모든 보물들을 빼앗았나이다 주께서 이미 이방인들을 막아 주의 성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명령하신 그 성소에 그들이 들어간 것을 예루살렘이 보았나이다
대적이 빼앗은 보물과 대적이 침범한 성소는 대적의 문제이기 이전에 이러한 상황이 허락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 유다 백성의 불순종이 있었다.
인생은 부정적 상황을 끊임없이 고발하면서 투쟁을 하지만, 그러한 부정적 상황은 인간의 죄성으로 인하여 허락될 수 밖에 없었다.
부정적 상황의 일차적인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신자는 항상 하나님의ㅃ 은혜를 입은 죄인임을 깨달으며 겸손히 하나님께 나아갈 뿐이다.
11 그 모든 백성이 생명을 이으려고 보물로 먹을 것들을 바꾸었더니 지금도 탄식하며 양식을 구하나이다 나는 비천하오니 여호와여 나를 돌보시옵소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율법과 성소는 영적인 생명을 위해서 주어진 보물이었지만, 이들은 육적인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서 영적 생명을 위한 도구들을 팔 수밖에 없었다.
비록 타락한 인간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생명에 이르는 길을 끊임없이 제시하신다.
인간들에게 주어진 자연법과 일그러진 하나님의 형상에 담겨있는 희미한 하나님의 음성은 끊임없이 죄인을 부르지만, 인간들은 육적인 생명을 위해서 희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기회 마저 육적인 목적을 위해서 팔아 버린다.
자연을 접하며 하나님을 알만한 수단들을, 도시화의 이름으로 낮과 밤을 바꾸며, 하나님을 묵상하기보다는 인터넷을 통한 정보에 의지하며 모든 시간과 공간을 육적인 목적에 맞추어 바꾸어 버린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인간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점점더 삶에 종속된 노예가 되어갈 뿐이다.
지혜로운 자는 오직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며, 하나님을 묵상하며,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보존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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