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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21.10.17 :: 요한복음 1장 12절 말씀 묵상(1)
요한복음 2021. 10. 17. 18:47

요한복음 1장 12절 말씀 묵상(3)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육신의 소욕과 영적인 축복의 이중성

말씀, 생명,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어두움에 갇혀있는 세상과 그리스도께서 창조하신 땅과 그리스도의  백성이 알지도 못하였고 영접하지도 않았다.

만약에 말씀과 생명과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육신의 눈 높이에 맞추어 오셨다면 인간은 그리스도를 알아보았고, 그리스도를 따랐을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목적이 세속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세상의 인간은 영적인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영접하지도 않는다.

세상의 인간과 하나님의 세계와의 분리는 단순한 생각의 차원을 넘어선다.

유대 성전이 세속화되고, 교회가 세속화되는 것은 인간의 뿌리 깊은 육신적 죄성으로 인한 것이다.

인간의 죄성은 나쁜 짓을 한다는 개념이기 이전에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이다.

아무리 선한 일을 하여도 그것이 하나님과의 분리를 추구한다면 그것은 죄악이다.

바벨탑이 인간이 보기에는 선하고 좋을 것일 수도 있었겠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악한 것이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과의 분리를 추구하는 뿌리 깊은 악이 있다.

이는 인간이 의도적으로 하는 짓이라기보다는, 인간 자신에게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편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인간이 의도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자한다면, 이는 지극히 고통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인간의 육신의 원함은 하나님의 뜻과 충돌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육신 안에 갇혀있는 존재이다.

이는 아담의 범죄로 인한 것이다.

인간은 표면적으로는 생명이 있는 존재이지만, 영적으로는 죽은 존재이다.

영적으로 죽은 인간에게 영적인 것은 부담이 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죽음을 고발하는 고통스러운 것이다.

요한이 “그를 믿는 자, 곧 그를 영접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는 선언은 세상적인 사람에게는 별로 놀랍게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은혜는 인간의 체질에 맞지가 않다.

인간은 체질적으로 은혜를 거부한다.

아담은 범죄하고서 수고의 노동을 통하여 소산을 먹어야하는 저주를 받았다.

이는 세상을 보존하고자하는 하나님의 은혜이면서, 범죄한 인간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며 살아가야만하는 저주였다.

이러한 저주에 갇힌 인간은 하나님없이 살아가는 체질이 된 것이다.

모든 족속 가운데 있는 제단에서의 제사 행위는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것보다는 더 이상의 저주를 피하기 위한 것이 되었다. 

이미 영적으로 죽은 인간이지만, 육신의 죽음의 문제를 피할 수 있는 구원을 위한 온갖 방식의 수고를 하지만, 결국 죽음의 문제를 극복할 수는 없다.

그나마 인간에게 익숙한 방식은 공로주의라는 방식의 구원관이다.

선행을 하면 더 나은 방식으로 다시 태어난다든지, 신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 아주 높은 천국에 올라가서 멋진 삶을 살 수 있다든지, 선행을 함으로서 의에 이르려는 행동방식 등은 인간 세계에 보편적이지만,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자녀됨이라는 놀라운 선언에 대해서는 낯설어하거나 실감이 나질 않는다.

율법주의에 갇혀있는 인간

세상에 갇혀있는 인간이 빛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고 자신을 창조하신 분도 거절하는 육신이 된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은 율법주의에 갇혀있는 유대인들에게서 볼 수 있다.

유대인들의 행동 방식은 유대인들만의 독특한 행동 방식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인간의 행동 방식을 대변해주는 것이다. 

요한이 전하는 복음은 공로적 율법주의에 익숙해져있던 유대인들에게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요한은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서론을 장황하게 이어온 것이다.

어두움 가운데 있던 유대인들이 빛을 알지 못하였고 자신들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오셨는데도 이를 알지 못했다.

육체에 갇혀있는 유대인들은 율법의 목적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육신에 갇혀있는 인간은 육신에 대하여 절망하기 전까진 육신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가 없다.

율법은 육신에 죄를 정하고서 육신에 대한 절망을 선언하는 것이었지만, 육신에 갇혀있는 인간은 오히려 율법 안에서 희망을 가지려하는 것이다.

이는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인간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세상은 인간에게 결코 희망을주지는 않는다.

표면적인 희망, 즉 물질의 풍요와 명예와 성공은 결국 육신의 파멸로 이어진다.

세상에서 성공한 이들이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그들에게 성공은 결국 육신의 파멸로 이어질 뿐이다.

하지만 인간은 잠깐이라도 이러한 자들의 부류에 들고 싶어한다.

하지만 성공한 자나 실패한 자나 모두 한 가지로 생을 마감하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하나님 앞에 서는 날 가장 복된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입은 자들이다.

하지만 육신에 갇혀있는 사람들에게 이는 현실적인 것이 아니고 알 수도 없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갖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로 부터 말미암기 때문이다.

자신을 믿는 공로주의에 갇힌 모든 인간은 우상 숭배하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타락의 결과물로 짊어질 수밖에 없는 육신의 수고 안에서 인간에게는 오직 절망밖에 없다.

육신의 한계를 벗어나 영적인 축복에 참여하는 이들은, 이 세상에서의 삶이 있었기에 축복을 받을 기회가 있었던 것이다.

택함받지 못한 이들에게 이 세상은 육신의 소욕만을 체우는 곳이지만, 성도에게 이 세상은 하나님의 영원한 축복에 참여하기 위한 기회인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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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21. 10. 17. 18:40

요한복음 1장 12절 말씀 묵상(2)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육신의 소욕을 쫓아가는 인생

요한이 전하는 파격적인 선언,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인간이 그 이상을 생각할 수 없는 놀라운 사실이지만, 육신적 인간에게는 별로 현실감있게 다가오지 않는다. 

육신을 가진 인간에게는 육신적 소욕이 현실적이다.

돈과 명예와 권력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가치이다.

돈 많은 부자는 모든 사람의 선망의 대상이다.

육신적 인간에게 영적인 것은 막연하고 추상적일 뿐이다.

심지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사실조차도 육신적 인간에게는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육신의 소욕은 쾌감을 주지만 영적인 충족이 주는 기쁨과 평안은 쾌감과는 다른 것이다.

감각적인 자극과 성취감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영적인 충족은 별로 흥미가 없는 것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물질과 부귀 영화와 풍요는 1차적 관심사였고,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을 이어받은 솔로몬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부귀 영화를 위한 이차적인 존재였을 뿐이었다.

솔로몬은 성별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체성을 망각하고, 자신의 육신의 소욕을 충족시키고자 이방 여인들을 정략적으로 데리고 들어왔으며, 그들을 위해서 그들의 신전을 지어주기까지 했다. 

솔로몬이 자신이 데리고 온 여인들을 위해서 이방신전을 지어줄 수 있었던 것은, 솔로몬이 영적인 것보다는 육적인 것을 우선시하였고, 자신이 하나님보다는 육신의 소욕을 쫓았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솔로몬이 지은 거대하고 화려한 성전은 자연스럽게 솔로몬이 했던 것과 같이 육신의 소욕을 위한 우상 숭배의 장소가 되어갔다.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은 우상 숭배의 길을 걸어가게되었고,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쫓아갔던 이스라엘에게 바벨론 유수는 당연한 것이었다.

바벨론 유수와 예루살렘의 멸망은 육신을 쫓아가는 인간들에게 주어질 최후의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어둠 가운데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자기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동 방식은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아담 안에서 타락한 모든 인간이 어떠한 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욕신의 소욕을 쫓아 가게 되어있으며,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의자녀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복된 것인지에 대하여 알 수가 없다.

육신의 소욕을 쫓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이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은혜로 말미암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육신을 쫓아가는 이들에게 영적인 것은 무의미할 뿐이다.

 

죽음의 권세를 넘어선 축복

인간은 육신의 소욕을 쫓아가지만 인간이 아무리 성공을 하였다하더라도 이는 한시적이다.

인간이 한시적 삶을 산다는 자체가 죽음의 형벌이다.

인간에게 영생이 주어진다는 것은 죽음의 권세를 넘어서는 생명으로 옮겨진 것이다.

죽음과 생명은 비교될 수 없는 전혀 다른 것이다.

아무리 건강하고 잘 생기고 물질이 많고 명예가 있다고하더라도, 죽음을 앞두고 초라해지지 않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

죽음을 앞둔 이들에게 물질과 명예는 아무 소용이 없다.

죽음을 앞둔 이에게 가장 큰 축복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을 갖는 것이다.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든 이들은 죽음을 앞둔 이들이다.

한시적 삶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가장 큰 축복은 한시적 삶의 시간 가운데 영원한 것을 소유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다.

이 생의 삶이 없다면 영원한 삶은 어질 수가 없다.

이 생의 삶은 저주이면서 동시에 축복이다.

한시적 삶을 살다가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인생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지고 영생이 보장된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이다.

인간은 죽음보다도 삶이 좋다.

이는 현재의 세상이 그래도 좋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시고자하는 영생의 삶은 이 세상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완전한 환경에서의 삶인 것이다.

다가올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수고하고 땀을 흘리지 않아도 먹는 것으로 인해서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된다.

미움과 다툼이 없고, 가시와 엉겅퀴가 나지 않는 곳이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를 믿는 자들에게 보장된 곳으로서 그리스도인은 그 곳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축복을 누릴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
요한복음 2021. 10. 17. 18:30

요한복음 1장 12절 말씀 묵상(1)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영접- 관계성의 회복

영접한다는 것은 상대를 피하지 않고 자신의 삶 속에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적대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이는 상대방과의 관계성에 문제가 없다는 표시이다.

사람 사는 세상의 문제는 관계성에서 출발한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이며, 이는 관계성의 파괴로 인한 것이다.

인간들 사이의 관계성의 문제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파괴의 결과물이다.

인간사의 모든 문제의 근원에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문제가 있다.

복음은 아담의 범죄로 파괴된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회복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에게 요구되는 구원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회복에 있다.

인간이 가지고있는 모든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문제에서 출발되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이 부딪치는 삶에 있어서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로 인한 것이다.

인간은 이러한 문제들에 직면하면서도 그 문제의 근원이 되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출발된 이스라엘 백성들 조차도 삶에 있어서 하나님을 외면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이는 인간에게 하나님을 외면하는 본성이 있기 때문이다. 

 

구원의 시간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이스라엘 땅에 오신 것에는 하나님의 오랜 기다리심이 있었다.

만약에 이 시간보다도 이른 시간에 예수님께서 오셨다면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대하여 공감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범죄한 후에 바로 구원 사역을 시작하셨을 수도 있으셨을 것이다.

인간은 자만심, 즉 스스로 높아지고자하는 마음과 스스로 구원의 길을 가려고하기에 경험을 통한 좌절이 없이는 자신의 무능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소망이 없음을 경험하고 이를 인정하기까지는 그 교만한 마음을 내려놓지 못할 것이다. 

2000년 전의 시간은 이스라엘의 패망의 시간이었으며, 이스라엘의 패망은 인간 모두의 패망을 대변해주는 것이었다.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 인간 스스로 구원의 길을 가본 역사가 없었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에도 2000년의 인류 역사는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인간은 완전히 좌절되지 않고는 하나님께 나아올 수가 없는 존재이다.

이스라엘 역사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좌절되는 시간이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하나님의 실패가 아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초대하기 위한 준비의 시간이다.

바벨론 유수와 로마의 통치는 예수님의 초림을 준비하는 시간이었다.

이스라엘 성전은 인간의 육신의 욕심을 채우는 장소가 아니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을 자신들의 육적인 욕심을 채우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성은 보편적 인간의 죄성을 대변해주고있다.

이스라엘 백성에 의하여 인간의 죄성이 고발되지 않았다면, 인간은 자신들의 실패를 환경이나 외부요인들의 탓으로 돌렸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거룩한 백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패망은 원인이 인간의 내부에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오셨듯이, 모든 인간의 실패와 좌절의 시간은 하나님께서 심령 가운데 들어오셔서 하나님을 영접하도록 하는 초대의 시간이다.

이스라엘의 실패가 나의 실패가 될 때 비로서 영생의 길이 열린다.

인생의 좌절의 시간은 절벽 앞에 선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부르심의 시간이다. 



행위에서 믿음으로

행위에 의한 의의 성취는 죄인인 인간이 자신의 죄를 가리기 위한 포장지와 같다고 할 수 있다.

행위에 의한 의를 추구하는 이들은 특히 외식하는데 익숙해져있다.

요한이 소개하는 믿음은 행위에 익숙해져있는 이들에게 낯설기만 한 것이다.

믿음을 위해서는 영접하는 행위가 있어야한다.

믿음의 행위는 수고하는 공로적 행위가 아니다.

영접하는 행위와 믿음의 행위는 몸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논리는 수고하여야만 소산을 먹을 수 있는 저주받은 인생의 논리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논리이다.

하나님의 자녀됨은 인간으로부터 출발된 공로적 행위로는 도달될 수 없는 권세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출발된 은혜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요한이 선포하는 믿음은 공로적 행위의 종식을 선포한다.

인간에게는 자신들에게서 출발된 인본주의적 의를 추구하려는 죄성이 있지만, 이로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인간은 어떠한 공로적 행위로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을 수 없다.

율법은 인간의 죄성을 드러냄으로서 인간에게 항복을 요구한다.

율법을 지킴으로서 의를 이루려는 이스라엘의 행동 방식은 결국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으며, 이는 인간이 하나님께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율법은 스스로 죄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교만한 인간에게 겸손을 요구한다.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영접하는 행위는 쉬운 것이지만, 교만한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것이다.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께 두 손들고 나아갈 수 없는 교만한 존재이다.

영접하는 행위는 하나님께 의존함으로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행위로서, 하나님께 항복을 선언하는 것이다.

아담이 범죄하고서 하나님을 피하여 나무 사이에 숨었듯이,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없이,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의를 이루고자했지만, 구원받기 위한 인간은 어쩔 수 없이 하나님께 나아가야만 함을 선언하고있다.

항복한 인간은 더 이상 자신이 자신의 주체가 될 수 없기에,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주 되심을 인정하여야만 한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존함으로서 자기 의를 포기하는 방식이다.

이 또한 더 이상 자신의 주체가 자신이 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됨

하나님의 아들됨은 아담에게 주어졌던 순종의 요구의 종식이면서 또한 아담에게 주어졌던 저주의 종식이다.

처음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는 아담을 통하여 하나님께 이어진다.

계보상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리스도는 둘째 아담으로서 처음 아담의 실패의 자리에 오셨다.

처음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순종과, 불순종에 대한 저주가 그리스도 안에서 충족되었기에,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리를 갖게되었다.

율법 아래있는 자들에게는 외적인 행위가 요구되었지만,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는 길이 주어진 것이다.

이는 육신적 인간의 부정이며, 사실 인간의 상태가 어떠한지 알았다면 당연한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이 완악한 인간은 스스로 좌절되기 전에는 자신의 죄성을 인정하려하지 않기에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의 실패의 시간에 오신 것이다.

그리고 로마군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종식됨으로서 사실상 이스라엘은 역사 속에 사라져버렸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스라엘만이 진정한 이스라엘로 남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로서,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의 아들됨이라는 지위를 얻게 된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으로 지으신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생각하게해준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는 더 이상 사탄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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