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장 12절 말씀 묵상(1)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영접- 관계성의 회복
영접한다는 것은 상대를 피하지 않고 자신의 삶 속에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적대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이는 상대방과의 관계성에 문제가 없다는 표시이다.
사람 사는 세상의 문제는 관계성에서 출발한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이며, 이는 관계성의 파괴로 인한 것이다.
인간들 사이의 관계성의 문제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파괴의 결과물이다.
인간사의 모든 문제의 근원에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문제가 있다.
복음은 아담의 범죄로 파괴된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회복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에게 요구되는 구원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회복에 있다.
인간이 가지고있는 모든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문제에서 출발되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이 부딪치는 삶에 있어서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로 인한 것이다.
인간은 이러한 문제들에 직면하면서도 그 문제의 근원이 되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출발된 이스라엘 백성들 조차도 삶에 있어서 하나님을 외면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이는 인간에게 하나님을 외면하는 본성이 있기 때문이다.
구원의 시간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이스라엘 땅에 오신 것에는 하나님의 오랜 기다리심이 있었다.
만약에 이 시간보다도 이른 시간에 예수님께서 오셨다면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대하여 공감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범죄한 후에 바로 구원 사역을 시작하셨을 수도 있으셨을 것이다.
인간은 자만심, 즉 스스로 높아지고자하는 마음과 스스로 구원의 길을 가려고하기에 경험을 통한 좌절이 없이는 자신의 무능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소망이 없음을 경험하고 이를 인정하기까지는 그 교만한 마음을 내려놓지 못할 것이다.
2000년 전의 시간은 이스라엘의 패망의 시간이었으며, 이스라엘의 패망은 인간 모두의 패망을 대변해주는 것이었다.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 인간 스스로 구원의 길을 가본 역사가 없었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에도 2000년의 인류 역사는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인간은 완전히 좌절되지 않고는 하나님께 나아올 수가 없는 존재이다.
이스라엘 역사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좌절되는 시간이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하나님의 실패가 아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초대하기 위한 준비의 시간이다.
바벨론 유수와 로마의 통치는 예수님의 초림을 준비하는 시간이었다.
이스라엘 성전은 인간의 육신의 욕심을 채우는 장소가 아니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을 자신들의 육적인 욕심을 채우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성은 보편적 인간의 죄성을 대변해주고있다.
이스라엘 백성에 의하여 인간의 죄성이 고발되지 않았다면, 인간은 자신들의 실패를 환경이나 외부요인들의 탓으로 돌렸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거룩한 백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패망은 원인이 인간의 내부에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오셨듯이, 모든 인간의 실패와 좌절의 시간은 하나님께서 심령 가운데 들어오셔서 하나님을 영접하도록 하는 초대의 시간이다.
이스라엘의 실패가 나의 실패가 될 때 비로서 영생의 길이 열린다.
인생의 좌절의 시간은 절벽 앞에 선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부르심의 시간이다.
행위에서 믿음으로
행위에 의한 의의 성취는 죄인인 인간이 자신의 죄를 가리기 위한 포장지와 같다고 할 수 있다.
행위에 의한 의를 추구하는 이들은 특히 외식하는데 익숙해져있다.
요한이 소개하는 믿음은 행위에 익숙해져있는 이들에게 낯설기만 한 것이다.
믿음을 위해서는 영접하는 행위가 있어야한다.
믿음의 행위는 수고하는 공로적 행위가 아니다.
영접하는 행위와 믿음의 행위는 몸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논리는 수고하여야만 소산을 먹을 수 있는 저주받은 인생의 논리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논리이다.
하나님의 자녀됨은 인간으로부터 출발된 공로적 행위로는 도달될 수 없는 권세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출발된 은혜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요한이 선포하는 믿음은 공로적 행위의 종식을 선포한다.
인간에게는 자신들에게서 출발된 인본주의적 의를 추구하려는 죄성이 있지만, 이로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인간은 어떠한 공로적 행위로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을 수 없다.
율법은 인간의 죄성을 드러냄으로서 인간에게 항복을 요구한다.
율법을 지킴으로서 의를 이루려는 이스라엘의 행동 방식은 결국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으며, 이는 인간이 하나님께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율법은 스스로 죄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교만한 인간에게 겸손을 요구한다.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영접하는 행위는 쉬운 것이지만, 교만한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것이다.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께 두 손들고 나아갈 수 없는 교만한 존재이다.
영접하는 행위는 하나님께 의존함으로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행위로서, 하나님께 항복을 선언하는 것이다.
아담이 범죄하고서 하나님을 피하여 나무 사이에 숨었듯이,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없이,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의를 이루고자했지만, 구원받기 위한 인간은 어쩔 수 없이 하나님께 나아가야만 함을 선언하고있다.
항복한 인간은 더 이상 자신이 자신의 주체가 될 수 없기에,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주 되심을 인정하여야만 한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존함으로서 자기 의를 포기하는 방식이다.
이 또한 더 이상 자신의 주체가 자신이 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됨
하나님의 아들됨은 아담에게 주어졌던 순종의 요구의 종식이면서 또한 아담에게 주어졌던 저주의 종식이다.
처음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는 아담을 통하여 하나님께 이어진다.
계보상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리스도는 둘째 아담으로서 처음 아담의 실패의 자리에 오셨다.
처음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순종과, 불순종에 대한 저주가 그리스도 안에서 충족되었기에,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리를 갖게되었다.
율법 아래있는 자들에게는 외적인 행위가 요구되었지만,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는 길이 주어진 것이다.
이는 육신적 인간의 부정이며, 사실 인간의 상태가 어떠한지 알았다면 당연한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이 완악한 인간은 스스로 좌절되기 전에는 자신의 죄성을 인정하려하지 않기에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의 실패의 시간에 오신 것이다.
그리고 로마군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종식됨으로서 사실상 이스라엘은 역사 속에 사라져버렸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스라엘만이 진정한 이스라엘로 남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로서,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의 아들됨이라는 지위를 얻게 된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으로 지으신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생각하게해준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는 더 이상 사탄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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