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장 12절 말씀 묵상(3)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육신의 소욕과 영적인 축복의 이중성
말씀, 생명,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어두움에 갇혀있는 세상과 그리스도께서 창조하신 땅과 그리스도의 백성이 알지도 못하였고 영접하지도 않았다.
만약에 말씀과 생명과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육신의 눈 높이에 맞추어 오셨다면 인간은 그리스도를 알아보았고, 그리스도를 따랐을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목적이 세속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세상의 인간은 영적인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영접하지도 않는다.
세상의 인간과 하나님의 세계와의 분리는 단순한 생각의 차원을 넘어선다.
유대 성전이 세속화되고, 교회가 세속화되는 것은 인간의 뿌리 깊은 육신적 죄성으로 인한 것이다.
인간의 죄성은 나쁜 짓을 한다는 개념이기 이전에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이다.
아무리 선한 일을 하여도 그것이 하나님과의 분리를 추구한다면 그것은 죄악이다.
바벨탑이 인간이 보기에는 선하고 좋을 것일 수도 있었겠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악한 것이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과의 분리를 추구하는 뿌리 깊은 악이 있다.
이는 인간이 의도적으로 하는 짓이라기보다는, 인간 자신에게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편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인간이 의도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자한다면, 이는 지극히 고통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인간의 육신의 원함은 하나님의 뜻과 충돌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육신 안에 갇혀있는 존재이다.
이는 아담의 범죄로 인한 것이다.
인간은 표면적으로는 생명이 있는 존재이지만, 영적으로는 죽은 존재이다.
영적으로 죽은 인간에게 영적인 것은 부담이 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죽음을 고발하는 고통스러운 것이다.
요한이 “그를 믿는 자, 곧 그를 영접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는 선언은 세상적인 사람에게는 별로 놀랍게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은혜는 인간의 체질에 맞지가 않다.
인간은 체질적으로 은혜를 거부한다.
아담은 범죄하고서 수고의 노동을 통하여 소산을 먹어야하는 저주를 받았다.
이는 세상을 보존하고자하는 하나님의 은혜이면서, 범죄한 인간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며 살아가야만하는 저주였다.
이러한 저주에 갇힌 인간은 하나님없이 살아가는 체질이 된 것이다.
모든 족속 가운데 있는 제단에서의 제사 행위는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것보다는 더 이상의 저주를 피하기 위한 것이 되었다.
이미 영적으로 죽은 인간이지만, 육신의 죽음의 문제를 피할 수 있는 구원을 위한 온갖 방식의 수고를 하지만, 결국 죽음의 문제를 극복할 수는 없다.
그나마 인간에게 익숙한 방식은 공로주의라는 방식의 구원관이다.
선행을 하면 더 나은 방식으로 다시 태어난다든지, 신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 아주 높은 천국에 올라가서 멋진 삶을 살 수 있다든지, 선행을 함으로서 의에 이르려는 행동방식 등은 인간 세계에 보편적이지만,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자녀됨이라는 놀라운 선언에 대해서는 낯설어하거나 실감이 나질 않는다.
율법주의에 갇혀있는 인간
세상에 갇혀있는 인간이 빛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고 자신을 창조하신 분도 거절하는 육신이 된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은 율법주의에 갇혀있는 유대인들에게서 볼 수 있다.
유대인들의 행동 방식은 유대인들만의 독특한 행동 방식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인간의 행동 방식을 대변해주는 것이다.
요한이 전하는 복음은 공로적 율법주의에 익숙해져있던 유대인들에게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요한은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서론을 장황하게 이어온 것이다.
어두움 가운데 있던 유대인들이 빛을 알지 못하였고 자신들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오셨는데도 이를 알지 못했다.
육체에 갇혀있는 유대인들은 율법의 목적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육신에 갇혀있는 인간은 육신에 대하여 절망하기 전까진 육신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가 없다.
율법은 육신에 죄를 정하고서 육신에 대한 절망을 선언하는 것이었지만, 육신에 갇혀있는 인간은 오히려 율법 안에서 희망을 가지려하는 것이다.
이는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인간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세상은 인간에게 결코 희망을주지는 않는다.
표면적인 희망, 즉 물질의 풍요와 명예와 성공은 결국 육신의 파멸로 이어진다.
세상에서 성공한 이들이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그들에게 성공은 결국 육신의 파멸로 이어질 뿐이다.
하지만 인간은 잠깐이라도 이러한 자들의 부류에 들고 싶어한다.
하지만 성공한 자나 실패한 자나 모두 한 가지로 생을 마감하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하나님 앞에 서는 날 가장 복된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입은 자들이다.
하지만 육신에 갇혀있는 사람들에게 이는 현실적인 것이 아니고 알 수도 없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갖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로 부터 말미암기 때문이다.
자신을 믿는 공로주의에 갇힌 모든 인간은 우상 숭배하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타락의 결과물로 짊어질 수밖에 없는 육신의 수고 안에서 인간에게는 오직 절망밖에 없다.
육신의 한계를 벗어나 영적인 축복에 참여하는 이들은, 이 세상에서의 삶이 있었기에 축복을 받을 기회가 있었던 것이다.
택함받지 못한 이들에게 이 세상은 육신의 소욕만을 체우는 곳이지만, 성도에게 이 세상은 하나님의 영원한 축복에 참여하기 위한 기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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