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23. 10. 4. 15:49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 묵상(1-말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 하나님의 자기 계시)

태초에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말씀이라는 방식으로 인간의 인식 체계 안에 들어오신 것은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라고 볼 수 있다.

어떠한 피조물도 누릴 수 없는 말씀에 대한 이해력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에 가능한 것이다.

칸트는 인간의 이성으로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며 철저한 인간 중심의 실존주의 사고를 정립함으로서 인간의 인식체계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배제시켜버렸다.

실존주의적 신학은 철저하게 인간 중심의 사고를 한다.

실존주의 철학자인 칼 바르트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기 보다는 인간이 하나님에 관하여 기록한 인간의 책으로 보고있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요한의 선포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식체계로 구체화시키는 것이 쉽지가 않게된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오심은 인간의 인식 체계로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구속사역에 참여할 수 있음을 증거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인간은  자신의 인식체계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재정립되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말씀 묵상 또한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꼭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역사 가운데 여러번 인간을 찾아 오신다.

인류가 타락한 이후에 하나님의 오심은 인간의 인식체계의 변화를 요구하시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번번이 하나님을 피해서 도망 갈 뿐만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을 소외시키는 삶을 살게된다.

말씀이 육신이 되심은 에덴에서 아담을 찾으셨던 하나님께서 다시 아담의 후손에게 찾아오신 사건인 것이다.

말씀으로 오신 하나님을 외면하고자 하는 인간의 속성은, 범죄한 아담이 나무 뒤에 숨어서 하나님의 낯을 피하였던 것과 같은 속성의 것이다.

하나님을 본능적으로 피하고자하는 인간의 죄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이기에 말씀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여야만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이기에 하나님께서 포기하실 수 없는 존재이며, 또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 만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에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인간의 인식체계 안에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이유로 하나님을 외면할 수 없는 존재이며, 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심판과 구원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영생을 위해서는 육신이 되신 말씀 앞에 반드시 가까이 다가가야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성경을 외면하고 말씀을 외면하면서는 구원에 참여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창조주로서의 말씀)

요한이 소개하는 말씀은 태초에 계신 분이시며, 하나님이시며, 창조주이시다.

말씀은 모든 만물의 근원이 되신다.

태초에 모든 만물은 말씀으로 말미암아 지어진 바 되었다.

구원자로 오신 육신이 되신 말씀은 모든 만물의 창조주이시기에 구원하심의 권위와 능력은 창조주의 권위와 능력이시다.

말씀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세상의 위인 가운데 한 사람이 될 수 없으신 창조주이시다.

구원자로 오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새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다.

말씀을 통하여 구원에 참여하는 신자는 새롭게 창조되는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새사람이다.

성경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수 5:17)"라고 기록하고있다.

신자는 창조주이신 그리스도에 의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다.

성경 말씀은 인간이 접하는 많은 글 가운데 한 가지가 아니라 인간을 전혀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시키는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요한의 선언은 피조 세계 안에 들어오셔서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실 창조주의 현현을 선언하는 것이다.

신자가 말씀을 대하는 일은 피조 세계 안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는 가슴 뜨거운 일인 것이다.

그리스도와 신자의 만남은 시간적 공간적 접촉점을 갖는 것이 아니라 한 몸을 이루는 연합의 사건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심은, 육신에 갇혀서 죄의 법을 쫓던 신자에게 창조주 하나님과 한 몸을 이루는 영광에 참여할 수 있게 해주는 놀라운 축복의 사건인 것이다.


(연합을 위해 육신으로 오신 말씀)

육신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모습이다.

육신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불가능하다.

노아 홍수는 육신이 된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한 실망에서 비롯되었다(창 6:3).

육신으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없다.

아담의 불순종은 하나님과의 분리를 가져왔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여야할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이들을 아내로 삼음으로서 더 이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고 하나님을 외면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육신이 됨은 근본적으로는 아담의 불순종에서 비롯되었지만 성경에서 이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은 창세기 6장, 즉 노아 때였던 것이다.

노아와 그 가족을 제외하고 모든 이들이 수장되었던 것은 그만큼 육신이 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실망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짐작케하는 사건이었다.

육신의 치명적인 문제는 하나님과의 분리이다.

아담의 타락 후에도 아벨은 하나님을 영화롭게하였고 셋의 후손들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지속해왔던 것이다.

하지만 육신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바울은 자신 안에 있는 육신이 죄의 법을 섬기고있음을 고백하면서 이를 사망의 몸이라고 규정하고있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며, 하나님과의 분리는 사망이다.

육신이 되었다함은 하나님과의 분리를 뜻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심은 이러한 근원적 분리의 문제를 해결하시고자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의 몸으로 오신 것이다.

인간의 육신은 죄에 묶인 사망의 몸이지만, 그리스도의 육신은 죄에서 자유케하는  생명의 몸으로 오신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심은 궁극적으로 택한 자와의 연합을 이루심으로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기 위함이다.

죄의 종노릇하는 육신의 세계는 분리로 규정지을 수 있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이며, 이는 연합이 아닌 분리를 가져오는 싸움이다.

전쟁으로 얼룩진 인간의 역사는 서로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에 발생하는 사건들이다.

말씀의 육신이 되심은 인류의 역사의 전환점이 된다.

그리스도의 오심 이후의 인류의 역사는 표면적으로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전쟁을 이어가지만, 내면적으로는 구속사가 진행되고있음을 볼 수 있다.

육신이 된 인간들은 연합을 이룰 수 없지만, 그 가운데 세워져가는 하나님의 나라는 연합이라는 결과물, 즉 교회를 이루어가며, 이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그 날에 완전체로서 하나님 나라를 이룰 것이다.

현재는 살아가는 성도는 바벨론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나그네와 이방인같이 세상과 분리된 자로서 살아가지만,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그 날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본향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모든 성도들과 연합을 이루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하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