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1장'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7.12.29 :: 에베소서 1장 15-23절
  2. 2017.12.29 :: 에베소서 1장 7-14절 말씀 묵상
  3. 2017.12.29 :: 에베소서 1장 1-6절 말씀 묵상
에베소서 2017. 12. 29. 15:35

에베소서 1장 15-23절


15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16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주 예수 안에서)

성도에 대한 사랑과 관심은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안에서 이루어져야한다.

성도들의 외적인 요소나 상황이 믿음을 넘어서서 작용 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현실은 외적인 요소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위에 작용되는 경우가 흔하다.

교회는 온전히 그리스도 안에서 외적인 요소에 영향을 받지 않고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져야한다.

사람의 외적인 요소들이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서의 사랑과 교제를 넘어서는 요인으로 작용 될 때는 교회의 변질을 초래할 수 밖에 없다.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

교회의 성도들이 과연 서로를 사랑할 수 있을까?

서로 배척하고, 파벌을 조성하고, 자기 중심적인 교회 생활이 이루어지는 것을 많이 경험하게된다.

교회 공동체는 세상의 공동체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본다.

에베소 교회도 어느 정도는 비슷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에베소교회의 부족함을 넘어서 그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보았고, 그 가운데 더 많은 결실을 위해서 간구하고 있다.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교회의 부정적 요소들로 인하여 교회에 대한 식상한 마음은 결국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약화시키게 된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대하여 보여준 것과 비교할 때 우리는 과연 얼마나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고 감사했는가?

선교지역에서는 박해를 무릎쓰고 목숨을 걸고서 교회를 세우려고하는데, 한국의 현실은 교회가 너무 많이 생기면서 변질되고 왜곡된 교회가 일반화되면서, 교회의 중요성과 교회에 대한 간절한 사랑이 식어버린 것이  현실이다.

교회는 오직 세상의 박해 가운데 깨끗해질 수 있기에, 세상과 타협하는 교회는 교회의 본질을 상실해가는 과정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부정적 상황 가운데에서도, 교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에, 교회는 복음으로 다시 일어서게되며, 부정적 상황을 통하여 죄를 깨끗게 하는 복음을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바울의 에베소 교회에 대한 격려의 말은 모든 부정적 상황을 극복하게 해주는 위로와 격려가 될 것이다.

이러한 위로와 격려는 교회에서 뿐만이 아니라, 자녀들에게도, 형제들에게도, 또한 모든 이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은혜의 말이 될 것이다.


(중보 기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위해서 기도한다.

일종의 중보 기도라고 볼 수 있다.

중보 기도가 논란이 되는 것은 중보자의 기도와 구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지만, 성도는 바울과 같이 중보 기도를 할 수 있다.

중보자는 수직적인 관계에 있지만, 중보 기도는 수평적인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중보 기도가 문제가 되는 것은 마치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재자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의 위치 문제 때문이다.

모세가 중재자가 되어 백성들을 위해서 하였던 기도는, 구별괸 제사장이 있던 제도하에서 가능하였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이후에 모든 성도는,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상실되었던,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직책이 회복되었다.

성도에게는 더 이상 모세와 같은 중재자가 필요하지 않다.

성도가 하는 중보 기도는 중재자의 위치에서가 아니라, 회복된 제사장의 직분으로, 다른 이들을 위해서 간구하는 수평적 관계에서의 기도라고 할 수 있다.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지혜와 계시의 성령은 우리의 육적인 능력 위에 계신다.

인간적인 이성과 논리로는 성령의 도우심을 알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다.

성도는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지혜와 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알아가는 축복을 누릴 수 있다.

성령은 창세 전 구속 언약에 참여하신 삼위 하나님 가운데 한 분으로서, 이 땅에서 창세 전에 예정된 이들 가운데 역사하시어 하나님의 자녀들로 만들어가시는 분이시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이 이러한 성령을 경험하도록 늘 중보 기도를 해왔다.


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마음의 눈)

성도들이라도, 눈이 어두운 상태에 있는 경우가 있다.

소망이 무엇이며,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능력이 지극히 크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신앙 생활을 할 수도 있다.

마음의 눈이 떠져서 이러한 사실들을 알고 경험 할 때 신앙생활은 많은 변화를 가져 올 수 밖에 없다.

교회의 많은 부정적 요소들은, 교인들이 아직 이러한 것들에 대하여 눈이 떠지지 않았기에, 이 땅에서 잘못된 것들을 구하는 과정 가운데 일어나는 것들이다.


(부르심의 소망)

일차적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소유주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의무가 있다.

하나님은 창세 전 구속 언약에 근거하여 이 세상에서 택하신 자를 사용하셔서 택하신 자를 부르신다.

먼저 부름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마음의 눈을 뜨고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야한다.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

성도가 기업을 물려받는 것은, 처음 아담 가운데 약속되어진 영원한 생명과 축복을,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공로에 의지하여, 받게되는 것이다.

성도에게 물려줄 영광이 풍성한 기업은, 원래의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며, 하나님의 기쁘신 뜻 가운데 예정하신 것이다.

이를 우리에게 알게하심은 이 땅에서 사는동안 소망 가운데 힘을 얻게하시려는 것이다.


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능력의 지극히 크심)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은 세상의 어떠한 것과도 비교가 되지 않는 능력이다.

세상은 자신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제압하려고한다.

세상의 힘은 파괴적이며, 권위적이며, 배타적이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은 세상 것과 같지 않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은 죄의 권세를 압도한다.

목을 곧게 세우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이는 단지 자신의 연약함을 감추기 위한 것이다.

진정으로 힘이 있는 자는 머리를 숙일 줄을 안다.

성도의 힘은 세상과 부딪치는 힘이 아니라, 그들을 수용하고 불쌍히 여기며, 용서하고, 사랑하며, 희생 할 줄 아는 힘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은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 어떠한 지를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20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만물이 교회는 아니다.

최초의 성전인 에덴은 만물과 구별된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며,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 되었던 곳이다.

성전으로서의 에덴과 에덴의 바깥은 구분되었듯이, 교회와 만물은 구분이 된다.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는 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교회를 세우기 위한 것이다.

바울은 성도 개개인보다는 교회에 초점을 맞추고있다.

지금은 교회가 비록 세상의 걱정이 되고, 세상으로부터 지탄을 받고, 세상에서 변방에 속하여있지만, 교회는 궁극적으로 만물 위에 우뚝 세워질 것이다.

그렇다고 교회가 세상과 아무런 경계가 없이 확장되어나가서는 안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택함받은 자들의 모임이다.

비록 유형적 교회는 불신자의 방문에 대하여 배타적일 수는 없지만, 교회 자체가 불신자들에게 다가가 그들과 같이 하나의 공동체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흔히들 미셔널 처치, 혹은 미션얼 처치라고 부르는 선교적 교회는 교회 자체가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흩어지는 교회의 형태를 취한다.

선교적 교회는 우주적 교회를 지향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에, 우주적교회를 지향하는 선교적 교회는 만유내재신론적 성향을 내포하고있다.

선교적 교회는 칼 바르트의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개념에서 출발된 WCC의 교회 형태이다.

교회는 어디까지나 세상과는 구별되어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를 전가받은 신자들의 모임으로 제한되어야 한다.

선교적 교회나 톰 라이트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세상을 바꾸는 동력으로 사용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들의 신론 중심적 교리는, 그리스도의 기독론을 배제함으로서 보편구원론적 성향을 보인다.

그렇다고 전통적 교회가 세상에 대하여 이원론적으로 배타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이 세상은 모두 다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다.

세상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구속을 받는 하나님 나라로 구분되어야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세상의 모든 영역은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이다.

교회는 이러한 세상을 다스릴 권세를 받았다.


(나가는 말)

왜 성도는 교회 공동체로 모여야 하는가?

성경을 개인적으로 읽고 개인적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겠지만 왜 모여야하는가?

교회는 처음부터 공동체적으로 시작되었다.

교회는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을 입은 아담 안에서, 성전으로서의 에덴 공동체로 시작되었듯이,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성전으로서의 교회 공동체가 시작된 것이다.

교회는 관계성과 공동체성의 완성이며, 이는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성의 표현이다.

이 땅에서의 교회 공동체는 위험과 희생을 요구되지만, 성도는 하나님께서 본성 안에 새겨넣으신 공동체성을, 교회 공동체를 만들어가는데 기울여야 한다.

posted by Wonho Kim
:
에베소서 2017. 12. 29. 15:34

에베소서 1장 7-14절 말씀 묵상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창세 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이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짐으로서, 성도는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받을 수 있다.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새관점의 경우에는, 그리스도의 성육신 이전의 역사적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가 이루어진 상태로 보고있다.

이러한 논리가 가능한 것은, 새관점에서는 하나님 나라에 거하기 위한  인간의 의가,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가 아닌, 성부 하나님의 의, 즉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개념은, 원래 불트만 학파의 케제만이 주장하였던 것으로서, 톰 라이트는 이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하신 약속을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신실하게 이행하셨다”는 의미의 의라고 말한다.

새관점에서는 역사적 이스라엘 자체를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로 보고있으며, 교회는 단지 확장된 이스라엘이라고 보고있다.

이는 역사적 이스라엘과 신약의 교회를 같은 속성을 가진 공동체로 보고있다는 것이다.

바울이,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과는 관계없이, 새관점에서 말하는 은혜는, 성부 하나님만의 은혜이다

새관점에서는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은 단지 이미 주어진 은혜 안에 머무르기 위한 수단이었는데, 이들이 이미 주어진 은혜 안에 머무르는데 실패한 이유는, 이들에게 주어진  음식법과 할례법을 이방인들과 구별하기 위한 민족적  우월주의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역사적 이스라엘은 원래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선교적 공동체로 세워졌는데, 이들이 선교적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만보더라도 새관점에서 말하는 역사적 이스라엘은 그리스도의 피가 없이도 구원받은 백성이 될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새관점의 이러한 주장은 그리스도를 배제하려는 유대주의적 색체가 농후한 발상이다.

이러한 내용들은 많은 새관점주의자들이 유대인의 장학금으로 공부를 했다는 주장에 설득력을 제공해주고있다.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단순한 희생이 아니라 죄에 대한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한 것으로서, 일종의 율법이 요구하는 값을 지불함으로서 율법의 요구에 마침표를 찍으신 것이다.

에덴에서  아담의 불순종에 대한 죽음의 요구와,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에게 요구되었던 불순종의 요구로서의 죽음은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 나시어 율법의 저주를 감당하신 것은 마지막 아담으로서 처음 아담의 범죄로 인한 죽음의 요구에 대한 값을 치루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은 에덴에서의 순종의 요구와 가나안에서의 순종의 요구를 모두 충족시키심으로 더 이상의 사망의 요구를 잠재우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에덴에서의 순종의 요구로서의 아담 언약과, 가나안에서의 순종의 요구로서의 시내산 언약은 동일하게 행위 언약의 범주에 속하여 있다고 볼 수 있다.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와 톰 라이트의 새관점이 비슷한 속성을 갖는 것은 둘 다 행위 언약을 인정하지 않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행위 언약을 인정하지 않을 경우 그리스도의 피는 속죄가 아닌 다른 뜻으로 해석 되거나, 혹은 구원론의 변화를 가져 올 수 밖에 없다.


(속량 곧 죄 사함)

그리스도의 구원은 속량의 개념이 있기에, 이스라엘의 출애굽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새관점에서는 출애굽을 이스라엘의 구원 사건으로 보고있으며,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을 구원의 은혜 안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보고있다.

하지만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한 광야에서의 시험이 요구되었으며, 불순종에 대한 속량 개념이 준비되어있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인하여 구원받은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40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하신 후에 마귀의 시험을 통과하심으로서, 더 이상의 시험이 요구되지 않는다.

새관점주의자들이나 펠라기우스주의자들에게는, 최종적 구원을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시험을 받았듯이, 시험이 요구된다.

이와는 달리 성도에게 요구되어지는 행위는, 구원을 위한 시험이 아니라, 마땅한 열매로서 요구되어지는 것이며, 이러한 열매가 없다는 것은 구원의 조건이라는 관점에서보다는, 구원받은 자의 증거라는 관점에서 문제가 있는 것이다.

구원은 죄의 결과와 죄의 요구와 죄의 속박으로부터 자유해지는 것이다.

죄의 요구와 속박은 인간의 죄성과 욕심과 관계가 있기에, 사는 동안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사단과의 영적 전쟁으로 말미암아 계속적인 시험에서 이길 수가 없다.

죄 사함을 받은 성도는, 이 땅에서 사는 날 동안에는, 성령의 도우심에 의지하여, 성령의 인치심으로 인하여,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달리, 구원에서 탈락되는 일이 없다.

속량은 죄에 대한 것이기에, 성도는 죄에 대한 분명한 의식이 있어야한다.

속량의 일차적 결과는 죄사함이다.

여기서 말하는 죄는 아담의 타락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새관점에서는, 아담의 죄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잠정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간주한다.

이렇게되면,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무의미한 것이된다.

대신에 새관점에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세상을 표현하는 로마와 어떻게 싸워나아가야 할지에 대하여, 삶의 본을 보여주기 위한 희생으로 대체한다.

개혁주의에서는 아담 안에서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하였다는 것을 말하지만, 새관점에서는 아담의 죄를 무시함으로서, 최종적 구원을 위해서 인간에게 선을 행하는 능력을 요구한다.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모든 지혜와 총명)

구원의 비밀을 알 수 있는 것은 택함받은 신자에게 제한된다.

신자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지혜와 총명으로 복음의 비밀을 알수 있다.


(비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것은 누구나 알 수가 있지만, 복음은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알 수가 없다.

복음은 행위를 요구하는 표면적인 모세 율법의 내면에 담겨있다.

복음은 율법이 진정 말하고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 자에게만 열려있다.

모세 언약은 표면적으로는 행위 언약에 속하여있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은혜 언약에 속하여있다.

목이 곧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 언약의 표면적인 속성만을 보았기 때문에 비밀에 가리워있는 은혜 언약의 속성을 가진 본질을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는 인간이 경험하는 자연법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구원의 은혜는 표면적으로 주어진 율법이나 자연법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율법이나 자연법은 정죄를 위한 것이며, 이를 통해서는 구원에 이를 수는 없다.

유대인들에게 감추어졌던 비밀은, 유대인과 이방인에 관계없이, 믿는 성도는 하나의 공동체로 완성되어, 하나같이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게 된다는 것으로서, 당시 유대인에게는 생각할 수조차 없었던 것이었다.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늘에 있는 것)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여기서 천지로 표현되는 하늘과 땅은 상위 구조upper-register와 하위 구조lower-register를 가리킨다.

상위 구조로서의 하늘에는 하나님이 계시며, 천사들이 있는 곳으로서 눈에 보이는 하늘과는 구분된다.


(땅에 있는 것)

땅은 육에 속한 하위 구조로서 여기에는 눈에 보이는 하늘도 포함된다.


(통일되게 하려 하심)

하늘과 땅, 모든 피조계가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구속되는 것이 예정되어있으며, 이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세상의 종말에 완성될 모습이다.

초림에서는 민족 간의 경계를 없애고, 재림때는 상위 구조upper-register로서의 하늘과 하위 구조lower-register로서의 땅을 하나로 통일 시키는 것이다.

메러디스 클라인Meredith Kline은 예수의 재림 때에 상위 구조로서의 하늘과 하위 구조로서의 땅이 연합된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 되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이로서 태초에 창조하신 하늘과 땅이 마지막 날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과 땅의 연합으로 통일될 것이다.


11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하나님께서는 계획하신 일을 성도들 가운데 행하실 때, 특히 부정적 상황을 통해서 일하신다.

이스라엘의 부정적 상황을 통해서 인간의 죄가 드러나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필요로 하였듯이,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택하신 자녀는, 아담의 자손으로서의 죄를 드러냄으로서, 구원의 손길을 뻗으신다.

성도는 부정적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어야 한다.

어리석은 자는 부정적 상황을 고치려는데 온 힘을 쏟아붓다가 결국 자신도 멸망의 구렁텅이에 빠지곤 한다.

현대문명은 인간이 뿌린 부정적 상황을 극복하려는데 온 힘을 쏟아붓지만, 결국은 자신들이 만든 또 다른 부정적 상황에 함몰되곤한다.

인간 사회의 부정적 상황은 내면 세계의 부정적 요소의 산물일 뿐인데도, 현대 문명은 결코 원인이 되는 내면적 접근을 하지 않는다.

인간 사회의 부정적 상황은 그 뿌리가 인간의 내면의 죄성으로 말미암은 것이기에, 표면적인 문제 해결은 결코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될 수는 없다.

역사적 이스라엘은 부정적 상황을 통하여 내면의 죄가 드러남으로서, 비록 표면적으로는 멸망하였지만, 그 가운데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도 될 수 있었다.

인간 사회의 부정적 상황은 결코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신자는 그 현상적 상황에 말려들어서는 안된다.

신자는 다만 주어진 역량 안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지, 역량 밖의 상황에 까지 들어가려고하면 안된다.

이는 마치 토네이도 속으로 들어가서 바람을 잠재우려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


(예정)

신자는 영원 전부터 계획하신 뜻에 따라 택함을 입은 존재다.

많은 철학자들이 인간의 존재에 대하여 고민하여왔지만, 영원 전에 삼위 하나님의 계획과 예정하심이라는 관점에서의 인간 존재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있다.

이는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한계점이다.

칼 바르트를 비롯한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자신의 현재적 존재를 인지적 사고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들이 해석하는 성경은 경험적이고 이성적이고 논리적이지만, 이러한 방식은 창세 전 구원을 계획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는 데 한계를 보일  수 밖에 없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해석은 하나님의 택하심과 예정하심 가운데 섭리로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의식하지 않고는 해석되어질 수가 없다.


12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진리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

복음은 일차적으로 구원에 관한 것이다.

신자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받는다.

현대에 들어와서 신학의 뚜렷한 변화 가운데 한 가지는 구원론 중심의 기독론에서 신론으로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구원에 관하여 이야기를 하면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구시대적 인물로 취급받는다.

구원론에서 신론으로의 전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분야로는 신칼빈주의, 신정통주의, 새관점등을 들 수 있다.

하지만 복음의 본질은 구원론이다.

구원론이 배제된 이들의 신학은 결과적으로, 택함과 예정이 배제된, 만인 구원론쪽으로 흐를 수 밖에 없다.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음)

인치신다는 것은 약속에 대한 보증이면서 동시에 소유에 대한 권한을 나타내는 것이다.

믿는 것과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는 것은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믿음을 가질 수가 없기에, 엄밀한 의미에서 믿음은 성령의 인치심의 결과물이다.

성령의 인치심으로 믿음을 갖는 것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소유권의 표시다.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은 이들은 더 이상 자신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 할 수가 없다.

신자는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과거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성령은 신자로 하여금 이러한 사실을 믿게끔 인치신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증거가 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새관점에서는 믿음도 구원의 근거가 아닐 뿐만 아니라 성령의 인치심의 결과물도 아니다.

이들이 보는 성령의 역할도 구원의 약속과는 관계가 없다.

그들이 말하는 성령은 단지 인간들로 하여금 죄를 회개하게 하는 일을 하시는  분일 뿐이다.


14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 기업의 보증)

기업은, 에덴에서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선악과 명령과 창조명령(창 1:28)이 완성되었을 때 주어질 예정이었던 종말론적인 축복과 영생에 대한 것이다.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첫 번째 아담이 실패 한 것을 다 이루셨기에,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명령을 다 이행한 것으로 간주되어, 영원한 축복과 영생을 기업으로 얻게된다.

이는 성령이 보증하시는 것이다.

성령의 내주하심은 마치 서류에 도장을 찍음 것과 같이 성령 하나님의 보증을 나타낸다.

보증이 되심은, 아직 우리가 죄의 육신 가운데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지을 수 밖에 없는 죄로 인하여, 우리가 구원에서 떨어질 것에 대한 염려를 없애준다.

성령은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며, 우리에게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알게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시험에 들지 않게 인도하심으로서, 구원받은 자로서 이땅에서 살아가는데 도움을 주시는 보혜사이시다.


(나가는 말)

우리의 삶 가운데 어떠한 것도 무의미한 것은 없다.

긍정적인 요소든, 부정적인 요소든, 삼위 하나님의 택정함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두 다 필요한 상황들이다.

인간은 누구나 아담의 후손으로서 전적으로 부패한 죄인이기에, 역사적 이스라엘이 겪었던 부정적 상황과 같은 유형의 부정적 과정을 거칠 수 밖에 없다.

다윗이 겪은 부정적 상황과 눈물은 그리스도를 만나는 동력이 될 수 있었듯이, 성도들이 부딪히는 부정적 상황은, 성도에게 꼭 필요한 연단의 과정일 수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금을 제련 하듯, 연단한 후에 정금같이 사용할 것이다.

비록 이 땅에서 성도의 삶이 고달프고 힘들더라도, 창세 전에 삼위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예정된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에 힘입어 어려운 환경을 충분히 감당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
에베소서 2017. 12. 29. 14:51

에베소서 1장 1-6절 말씀 묵상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의 부르심과 인간의 비전)


바울의 사도직은 본인의 선택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뜻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으며, 바울은 단지 부르심에 대하여 응답한 것 뿐이다.


이는 간접적으로 바울의 편지가 하나님의 말씀임을 표현하는 것이다.


인간의 비전과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자기 생각에서 출발한 열심은,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고 하더라도, 단지 자기의 일일 뿐이다.


바울은 하나님에 대한 열심으로 자신의 비전을 품었지만, 이는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었다.


인간의 생각에서 출발한 열심 가운데는 많은 경우에 하나님의 일이 아닌 자기의 일인 경우가 있다.


얼마 전 성추행 물의를 일으켰던 J 목사가 항상 외쳤던 말은, 젊은 이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비젼을  품어야하며, 이를 위해서는 자기가 속한 분야에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방식이고 인간의 욕심이며, 하나님을 하나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바울의 경우와 같이, 철저히 인간적인 꿈과 인간적인 자만과 인간적인 능력이 무너지는 가운데,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 의지하여서 할 수 있다.


유명한 신학자들과 저명한 목사들이 나름대로 성공하였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관점이다.


이들의 학문과 목회는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복음은 보편화 될 수 없는 소수를 위한 것이다.


참된 신학과 참된 목회에는 성공이라는 용어를 적용할 수가 없다.


신앙의 영역은 꿈을 이루거나 비전을 품을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길은 고난의 길임을 생각해본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된 바울)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는 자로서 분명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사도로 부름을 받은 후에, 바울은 자신의 생각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을 전하고 있다.


교회 생활을 하는 중에 가장 마음 아픈 것 가운데 하나는, 담임 목사가 강대상에서 자신을 사도라고 칭하고 바울을 목사라고 칭하면서 목사의 직책을 사도와 동등하게 만들면서, 강대상에서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남용한다는 것이다.


이는 그 사람 혼자만의 발상이 아니라, 목사들을 대상으로 목사교를 만드는 훈련과정에서 배운 이들이 공공연하게 써먹는 방법이다.


결국 교회는 내전을 겪었고, 오랫동안 몸담았던 많은 성도들이 난민이 되어 교회를 떠나는 것을 보면서, 자칭 사도라 칭하는 목사가 세상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가장 악독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눈으로 보았다.


사도라는 용어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말이기에, 누구의 보냄을 받았느냐가 중요하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도는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은 자이기에, 이미 말씀이 주어진 이 시대에 어느 누구도 자칭 사도가 될 수는 없다.


만약에 자신을 사도라고 부른다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자기의 말을 덧붙이는 자로서, 자신이 이단임을 선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도행전은 28장에서 끝난 것이지 29장이 계속 진행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아버지)


구약에서는 어느 누구도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었다.


이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만이 부를 수 있는 명칭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 개념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성도의 신분을 말해준다.


백성은 왕과의 관에서 친밀감의 한계와 관계성의 막연함을 보여준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용어는 사용해도 자녀나 아버지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는다.


이는 새관점이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인정하지 않기에, 그리스도와의 연합 개념이 성립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성도의 자격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신비 가운데 한 가지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자이지만,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역에는 가까이 갈 수가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이며, 궁극적으로 성도로 하여금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의 영역에 들어오게끔 하는 것이다.


끊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구속받은 신자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한 몸으로서 삼위 하나님의 긴밀한 공동체에 참여 할 수 있는 자격을 얻은 것이다.


이는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만 참여될 수 있는 영역이며, 그렇다고 성도가 신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신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걸맞는 거룩한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권한이 성도에게 주어졌다고 성도가 그리스도와 동등해 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피값으로 우리를 사신 우리의 주인이시다.


주(퀴리오스)는 어디까지나 종이 주인에게, 혹은 신하가 상전에게 사용하는 용어로서, 자신의 모든 것에 대한 소유권을 위임한다는 뜻이 내포되어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피값으로 사신 종에 불과하지만, 그리스도는 우리를 종으로서 부르지 않고, 자신과 연합된 자로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셨다.


이는 이 세상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놀라운 축복으로서 성도로서의 위치가 어떠한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해준다.


(평강)


평강은 전쟁이 그친 잠시동안의 샬롬의 상태를 말한다.


인생은 싸움의 연속이지만, 그리스도인은 영적인 싸움에서 잠시만이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평강을 누릴 수가 있다.


평강은 계속된 영적인 전쟁을 위한 막간의 휴식이며, 충전이다.


세상 사람들은 술에 취하거나, 취미 활동을 하거나, 여러가지 방법으로 삶을 충전하지만, 성도는 말씀과 기도, 그리고 찬양을 통하여서 하나님을 경험함으로 인하여 평강을 누릴 수 있다.


주일 예배는 성도들이 누릴 수 있는 대표적인 평강 가운데 한 가지다.


주일은 성도가 누려야 할 평강의 날이다.


평강을 누리기 위해서 모인 교회의 성도는 어떠한 세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어서는 안된다.


특히 목회자는 주일에 모인 성도들에게 평강의 시간을 제공할 의무가 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으로 성도로 하여금 이 땅에서 평강을 누릴 권리와 자격을 주셨다.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 하나님께로 갈 자가 없다.


그리스도는 길이시며, 진리이시며, 생명이시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성부 하나님과 성도가 연결될 수 있는 통로이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의 구조는 그리스도가 없이도 구원에 머무를 수 있는 구조다.


새관점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이미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아래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율법이 은혜의 구원 안에 머무르기 위한 수단이라고 말한다.


머무른다는 것은 이미 구원의 구조 안에 들어와있다는 말로서 “구원을 받는다”라는 말이 성립되지 않는다.


이러한 구조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가 없어도 성립되는 구조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예수는 단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민족적 우월주의로 인해서 은혜 안에 머무름에 실패하였기 때문에, 어떻게 은혜 안에 머무를 수 있는지 새로운 방법을 제시해준 모델로서의 인물일 뿐이다.


하지만 에베소서에서는 처음부터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 속한 모든 신령한 복)


창세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에 의해서, 택함받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되고,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가 되는 것이다.


신령한이란 말은 “하나님의 영에 속한”이라는 말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다.


성령의 내주하심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


오순절 성령의 강림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말미암는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성령이 이 땅에 임하시기 전인 역사적 이스라엘을, 이미  이 땅에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로 보는 새관점은 신령한 복으르받았다고 할 수 없다.


오직 성령으로 거듭난 자만이 하나님께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받은 자이기에, 구약의 소수의 믿음을 가진 이들 이외에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받았다고 말 할 수 없다.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에베소에 있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은 창세 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창세 전 영원 가운데 택정함을 입은 이들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이 요구되지 않는다.


창세 전 택정함을 입은 이들은 오직 하나님께서 메시아이신 그리스도께 맡기신 이들이다.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어야하는 것은 구원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된 구원을 받은 이로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한 것이다.


성도가 구원을 받는 것은 성도의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창세 전에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을 근거로 하는 것이다.


성도가 받는 구원은 현재적 환경에 의한 즉흥적인 구원이 아니며, 성도의 의지에 의하여 선택되어진 것도 아니며, 오직 창세 전에 미리 계획된 삼위 하나님의 택정함을 근거로하는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이다.


찰스 핫지는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창세 전 구속 언약 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언약적 연합federal union이 성도의 믿음의 고백을 통하여 실제적 연합actual union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말한다.(The Trinity and the Covenant of Redemption, J. V. Fesko, loc1995)


택한 자에게 요구되는 거룩함과 흠이 없음은 구원을 위한 선행 조건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이루신 능동적 순종과 십자가에서의 수동적 순종을 통하여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영원 가운데 결정된 삼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택한 자에 대한 사랑으로 이 땅에서 행하여진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고난은 성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마지못해서 할 수 없이 성자 하나님께서 감당하신 것이 아니라, 택한 자를 사랑하시는 삼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 담겨있는 사랑의 표현이다.


창세 전 구속 언약의 중심에는 메시아이신 그리스도께서 계신다.


그리스도께서 택함받은 자의 중재자가 되신 것은 이미 영원 가운데 성부 하나님의 택정하심에 근거를 두고있다.


이미 창세 전에 택정함을 받은 중재자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거룩할 수도 없고 무흠할 수도 없다.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새관점에서는 그리스도는 중재자도 아니시며, 창세 전에 택함을 받은 자는 있지도 않았으며, 오직 출애굽한 유대인만이 하나님 나라 백성이며, 교회는 단지 확장된 유대이스라엘일 뿐이다.


새관점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와 언약적으로 연합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하나님 앞에서의 중재자로 보지 않는 새관점주의자들은 받은 은혜를 행위로 유지함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이 되려고한다.


인간은 이미 아담의 범죄와 더불어 하나님의 영이 떠난 죽은 육신이 되었기에,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얻을 만큼 거룩하고 무흠할 수는 없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인간이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육신이 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데서부터 출발된 인본주의적 사고의 산물일 뿐이다.


새관점의 논리에서 그리스도는 삼위 하나님 가운데 아들 하나님이 아니라 따름의 본을 보여주는 유대 혁명가일 뿐이다.


창세 전 구속 언약을 인정하지 않으며, 성도를 거룩하고 흠이 없는 존재로 만드는 중재자이신 그리스도의 위격을 손상시키는 새관점주의자들은 결과적으로 이단의 판단의 기준이 되는 삼위일체의 개념을 손상시키는데까지 이르게된 것이다.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택한 자를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셔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들들이 되게하심은 창세 전에 있었던 구속 언약의 내용이다.


구속 언약은 창세 전 영원 가운데 삼위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결정된 세분 하나임 간에 약속이었으며, 이러한 약속은 인간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 주신 예정된 택한 자에게만 제한되는 것이며, 택함을 받은 예정된 자는 그리스도와 연합되게 하심으로서 하나님께서 아들로 양자 삼으신 것이다.


(기쁘신 뜻)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하는 법정적 개념에는 자칫 하나님의 인격적이고 따스한 성품이 결여되기도한다.


어떤 이들은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신 사건을 자녀에 대한 학대라고 표현하기도한다.


하지만 창세 전에 택한 자를 구속하시기 위한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은 삼위 하나님께서 모두 기뻐하심으로 결정하신 것이다.


창세 전에 택한 자를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신 것은 마치 아이를 낳기 위하여 준비하는 부부와 같이 기쁨 가운데 준비되어진 것이다.


남녀가 결혼하여 낳게 될 아이에 대한 기쁨은 삼위 하나님의 기쁨에 대한 그림자라고 할 수 있다.


아이를 낳기 위한 산모의 고통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고통의 그림자이며,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하와에게 잉태하는 고통이 더해진 것도 그만큼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고통을 알게하기 위한 것이다.


성도는 삼위 하나님의 잉태의 고통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담겨있는 존재이다.


부모로부터 사랑받은 아이가 갖는 자존감과 같이, 창세 전에 삼위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서 이 땅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비록 이 땅에서의 삶이 고통스럽고 비천하다고 하더라도, 자존감까지 손상되어서는 않될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담겨있는 존재이기에, 이 땅에서의 삶이 결코 허무하거나 부질없는 것이 아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기에, 삶을 결코 헛되게 살아서도 않되며, 신분에 걸맞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성도는 창조주이신 삼위 하나님의 기쁘신 뜻 안에서 구원받은 자이기에,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부러워 할 필요가 없는 가장 부요한 자이다.


(우리를)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제한되어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기로 예정되어있는 이들은 모든 이들이 아니다.


더군다나 레위 자손의 제사장을 중심으로 모인 유대인들도 아니며, 오직 멜리세덱의 반차를 따른 예수 그리스도가 제사장이 되시고 중재자가 되심으로, 믿음을 고백함으로서 구원에 참여된 이들로 제한된다.


예정된 이들은 모두가 아니며, 유대 이스라엘도 아니다.


모세는 중재자였지만 제사장이 될 수가 없었다.


새관점을 주장하는 제2성전 유대주의자들은, 유대인들이 가나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안에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바울이 말하는 우리는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 주신 택함받은 자들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삼위 하나님의 제2위격으로서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이 주어지는데 반하여, 그리스도의 제2 위격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나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만린 구원론적 방향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으며, 그리스도와 연합된 이들은 오직 믿음의 신앙고백을 하는 이들로 제한된다.


(예정하심)


성도에게 현재의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무계획적으로 상황에 따라서 즉흥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이 아니다.


모든 일들에는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의 부패와 타락을 하나님의 간섭하심이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부패한 자가 자기 길을 가도록 내어버려두셨을 뿐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부패를 그냥 내어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에서도 간섭하셔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시다.


에정론을 거부하는 이들은 아담의 타락에도 하나님의 책임이 있으시다고 주장한다.


어떤 이들은, 마치 결함이 있는 차를 리콜하듯이, 아담의 타락에 하나님의 책임이 있으시기에, 이에 대한 후속 대책으로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역을 감당하신 것이라고 말하기도한다.


그렇다고 아담의 타락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이며, 하나님께서 이에 대한 책임이 있으시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는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을 지닌 인격체이다.


인격체는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로서 자신의 결정에 대하여 간섭를 받지 않을 권리가 있으며, 자신의 결정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만 한다.


아담은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격적 존재이기에,  아담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결정권이 있는 동시에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져야만 하는 존재였다.


인격적 존재의 결정은 자유 의지에 의한 결정이었기에, 자신이 선악과를 먹고자 결정했을 때 간섭받지 않을 권리가 있었다.


하지만 아담의 타락은 하나님의 형상의 인격적 속성의 상실을 가져왔으며, 하나님의 형상이 손상되어 육신이 된 인간은 더 이상 자유 의지가 없는 사단의 종일 뿐이다.


타락한 인간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의 주체가 될 수 없는 사단에 종속된 존재이다.


하나님의 예정은 타락하여 자신의 주체가 될 수 없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셔서, 그들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들의 걸음을 인도하심으로서, 주의 기쁘신 뜻 안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도록 인도를 하신다.


성도가 하나님의 예정하심을 고백하는 것은, 자신의 구원이 오직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행위 구원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인간에게 스스로의 행함의 결정권이 있다고 말한다.


오직 믿음과 오직 은혜를 고백하였던 종교개혁자들은 하나같이 인간의 노예 의지를 강조하였다.


노예 의지 상태에 있는 이들은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없이는 구원에 이를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상황에 따라서 즉흥적으로 구원을 결정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아시기에, 인간의 행함과 공로에 영향을 받으셔서 그들의 행함을 보시고 구원을 결정하시지는 않으신다.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인간의 공로를 주장하고, 알미니안 주의자들은 구원의 자기 결정권을 주장하지만 이는 모두 인간의 노예 의지를 강조하였던 종교개혁자들의 주장과 상반된다.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강조하는 개혁주의 신앙고백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의 신앙고백이 되어야한다.


새관점주의자들이 종교 개혁자들에 대하여 비난을 서슴치 않는 이유 가운데 한가지는 노예 의지 개념에 대한 반발이 있다.


새관점주의자들은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행함으로 유지함으로서 최종적 심판에서 최종적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말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은혜를 인간의 행함으로 완성시킨다는 인본주의적 행위 구원론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행위 구원론은 그리스도의 중재 사역과 구원 사역에 대한 거부로 이어지기에,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전가 교리를 거부하는 새관점주의자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음)


성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양자 삼으신 것은 영원 가운데 그리스도를 아들로 지명하심으로 성도를 아들이신 그리스도와 연합되게 하심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그리스도와 연합되지 않고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수가 없다.


영원 가운데 예정된 성도는 이미 영원 가운데 언약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federal union되었으며, 그리스도의 경륜적 구속 사역과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성도의 신앙고백을 통하여 실제적으로 연합actual union이 일어난다.


이 모든 일은 영원 가운데 성부 하나님께서 택한 자를 메시아이신 성자 예수님께 주심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자는 영원 가운데 약속하신 구속 언약을 근거로 구원을 받는 것이다.


여기에는 인간의 주체적 행위가 들어갈 공간이 없다.


인간의 주제적 행위를 구원과 연관시키는 자리에는 그리스도께서 들어가실 자리가 없다.


성경의 모든 구속적 경륜은 영원 가운데 약속하신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을 근거로 하기에, 영원 가운데 아들로 지명을 받으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될 수없다.


새관점의 문제는 인간의 구속에 그리스도가 배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새관점에서의 그리스도는 단지 행동의 본을 보여준 혁명가일 뿐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는 구원을 주장하는 어떠한 논리도 영원 가운데 맺어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에 근거를 하고있지 않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는 구원을 주장하는 인간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스스로 교만한 자일 뿐이다.


이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죽은 존재임을 알지 못할 뿐이다.


(아들들이 됨)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시편 2:7-8)


하나님께서는 택한 자를 아들 삼으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들 삼으셨다.


그리스도의 아들되심은 삼위일체 개념에 혼돈을 가져오기도한다.


인간적인 생각에 아들의 존재는 아버지보다도 한 단계 뒤이기에, 시간 상 아버지만 존재하고 아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가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아리우스는 아들인 그리스도가 태어난 자라면 성부 하나님의 존재의 시작에 아들이 존재하지 않았을 때가 있었기에, 창조된 자로서 아버지와 아들인 그리스도가 동질일 수가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시편 기자는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는 말씀은 택한 자를 구원하시기 위한 삼위 하나님의 결정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들로 지명되셨음을 전하고있는 것이다.


경륜적 삼위일체로서의 성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육신 하셔서, 둘째 아담으로 모든 택함 받은 자의 맏형이 되셨지만, 존재론적 삼위일체로서의 성자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시다.


성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지명되셨음은 전적으로 택한 자를 하나님의 아들로 삼기 위하심이었다.


하나님께서는 택한 자를 아들 삼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들로 지명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들로서 성육신하셔서 이 땅에서 구속 사역을 감당하신 것은 택한 자를 아들 삼으시기 위해서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시지만, 택한 자를 구원하기 위해서 비천한 육신을 입으시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오늘 너를 낳았도다라고 하신 말씀은 영원 가운데 약정하신 구속 언약 가운데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들로 삼으셨음을 말하고있다.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들되심은 처음 아들인 아담을 대신하는 둘째 아담으로서의 아들되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들되심은 창조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자신의 피조 세계에 들어오셔서 창조를 완성하시기 위함이었다.


성부 하나님은 처음 아담의 아버지이셨지만,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서 더 이상 육신이 된 인간의 아버지가 되실 수가 없으셨다.


모든 인류는 처음 아담 안에서 아버지를 잃어버렸지만, 택함을 받은 자들은 다시 아들로 오신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성도의 구원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기 위한 것이며, 성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자이다.


아들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이 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이로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이어받을 자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이어받을 자에게는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순종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창세기 1장 28절의 지배 명령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하나님의 명령대로 다스림으로서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아담과 그의 후손에게 유업으로 주시기 위함이었다.


처음 창조된 아담은 아들로 창조되었지만 불순종하여 아들의 자격을 상실하였기에, 더 이상 창세기 1장 28절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을 실행할 수가 없었다.


창세기 1장 28절의 명령은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권을 선언하는 것이었지만, 불순종한 아담이 낳은 후손들은 하나님의 영이 떠난 육신일 뿐,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권을 실행할 능력이 없는 존재들이었다.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자는 순종하는 하나님의 아들이어야했지만, 아담의 후손들은 이 땅을 유업으로 받을 수가 없었다.


택함을 받은 자들은 둘째 아담 그리스도의 대표성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세되었다.


창세기 1장 28절의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셨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아들이 된 성도들은 장차 올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아 다스릴 것이다.


인간이 육신 안에서 경험하는 자식에 대한 사랑과 유산을 물려주는 일들은 육신에 남겨진 하나님의 형상의 그림자들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자식 이외에는 존재를 기뻐하고 유산을 물려주기가 쉽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택한 자의 존재 자체를 사랑하시고 아들 삼기 위해서 기쁨 가운데 구원하시는 고통을 감당하셨다


택함받은 성도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인식하면서 성화되는 삶을 살아야한다.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아이가 부모의 자녀가 된다는 것에는 어떠한 조건도 있을 수가 없다.


아이는 태어났다는 자체로 부모의 기쁨이 되며, 아이는 부모를 기쁘게 해주기만 하면 된다.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은 어떤 인위적인 행동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 부모에게 기쁘게 달려가는 아이가 하는 자연스러운 행동이면 된다.


부모가 자신을 기뻐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아이는 부모를 충분히 기쁘게 해 줄 수 있다.


우리는 자녀와 같이, 아무 공로도 없이 은혜를 입은 자들이기에, 그리스도로 의의 옷을 입은 이들은 마땅히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여야 할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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