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2017. 12. 29. 15:37

에베소서 2장 11-22절 말씀 묵상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에베소서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통합과 질서를 지향한다.

에베소서의 중심은 유대인도 아니며, 역사적 이스라엘도 아니다.

에베소서는 우주 만물뿐만이 아니라, 성도의 모든 관계성을 그리스도 안에서 통합시킨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부르심을 받았기에, 이방인의 위치와 상태에 대하여 분명한 입장과 관점을 표현하여야만 했다.

이는 에베소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이방인인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이다.

이방인의 개념은 어디까지나 육체적 관점에서의 유대인에 비추어 본 관점이다.

그렇다고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를 정당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비록 유대인에게는 외인이지만, 유대인들 가운데서 시작된 하나님의 영광의 열매에 참여하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이름이 처음 심겨진 유대인의 입장에서 논술을 시작하고자 하는 것이다.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스라엘의 참된 구원은, 이스라엘의 죄성이 어떠한지 드러남으로 인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에 참여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에베소 교인들도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어떠한 상태에 있었던 존재인지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있어야지만, 참된 은혜의 복음을 누리는 자가 될 수 있었다.

복음을 듣고 구원에 참여하는 자들은 어느 누구든지 간에 옛적에 자신이 어떠한 위치와 상태에 있었는지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있어야지만, 참된 복음의 은혜에 참여할 수가 있다.

에베소 성도나 우리는 구원에 참여할 수 있는 어떠한 정당한  근거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록 행위로는 구원에 이르지 못하였지만, 소망 가운데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이를 믿었던 이들에게는 구원이 약속되었던 언약 가운데 있었던 백성이었다.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은, 비록 율법이라는 행위 언약 안에 있었지만, 율법의 본질이 은혜 언약이었듯이, 은혜 언약이 약속된 민족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에베소 교인들은, 은혜의 복음에 과정적으로 참여된  역사적 이스라엘에 비추어보아도, 철저하게 외인이면서 이방인이었다.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다는 말이 중요하다.

에베소 성도가 멀리있던 자들이었기에 가까이 있던 자들인 역사적 이스라엘의 비중이 더욱 커질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통합이다.  

멀리있던 자들과 가까이 있던 자들의 통합이 이 시대에는 기독교와 유대교의 통합으로 발전되고있다.

기독교와 유대교를 통합시키려는 이들은 엉뚱하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축소시키거나 약화시켜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배제하려고한다.

현대신학자들도 마찬가지의 경향을 보이고 있다.

현대신학은 기독론 중심에서 신론 중심으로 위치가 이동되고있으며, 신학의 주제도 기독론 중심의 구원론보다는 신론 중심의 하나님 나라로 주제가 바뀌고 있다.

현대 신학의 이러한 경향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기독교를 정립하는 가운데 나타나는 현상이다.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유대인과 이방인의 갈등은 이스라엘의 오랜 역사를 통하여 계속되어 왔던 일이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지 않고 이방인들을 배척함으로서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였지만, 유월절 만찬에서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하고, 십자가에서 희생하심으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하나로 묶어 주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본문에서 말하는 막힌 담을 허신 것은, 유대 중심적인 편입과 확장이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의 새로운 건축물로의 통합이다.

예루살렘의 파괴와 이스라엘의 흩어짐을 생각할 때, 막힌 담은 단지 육체적인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경계를 넘어서, 불순종하는 이들 가운데 역사하는 사단의 세력에 의한 분열이 끝났음을 말하고있다고 보아야 한다.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의 궁극적인 목적은, 새관점의 주장과 같이, 유대인들을 이방인들과 구별되게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새관점에서는 유대인들과 이방인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산상수훈이라는 새로운 계명 아래에서 새롭게 통합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산상수훈을 또 다른 율법으로 규정하는 행위이며, 유대인과 이방인을 행위 공로 개념을 기반으로한 심판 아래 놓이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새관점의 해석은, 그리스도가 화평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율법보다도 지키기 어려운 산상수훈을 주심으로, 더욱 무거운 짐을 지우시는 분이 된다.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의 본래의 목적은, 아담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으며, 이방인들은 이미 자연법이라는 양심의 법 아래에서 하나님의 정죄 아래에 놓여있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지어진 새 생명은, 육체를 심판 아래에 묶어 놓았던 율법과 자연법의 요구가 그리스도의 보혈로 충족되었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화평이 가능한 것이다.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소멸하시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화목 뿐만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는 것이다.

처음 아담에게 심겨졌던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이, 이 땅에서 민족 간의 분열을 하나로 통합시킴으로서,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로 실현시키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의 취해야하는 행위는, 서로에 대한 정죄에 의한 분열보다는, 서로에 대한 용서와 기도와 위로를 통해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에 대한 저주를 소멸시킨 것이기에, 성도는 어떠한 경우에도 서로를 정죄하거나 저주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사람과 민족 간의 평화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나아가는 것이지만, 인류가 추구하는 평화가 그리스도가 배제된 평화일 경우에는 이것이 또 하나의 바벨탑이 될 수도 있다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그리스도는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에게 평안을 전하시는 분이시다.

현대의 민족주의적 분열과 배타주의는 그리스도를 떠난 이들 가운데서 나오는, 공중 권세 잡은 자의 작품이다.

민족주의, 배타주의에 호소하면서 자기들끼리 하나가 되려는 시도는 사단의 좀비로서의 집단 이기적인 행동일 뿐 그리스도께서 이루시고자하는 평안과는 거리가 멀다.

기독교를 민족주의적 애국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분명 성경적이라고 할 수 없다.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는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3, 24)”고 말씀하신다.

신자는 한 성령 안에 있기에 서로를 원망하거나 상처를 주어서는 안된다.

성령은 이 땅의 창조주로서, 삼위 하나님의 창세 전 구속 언약을 실행에 옮기시는 분으로서, 성도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만드시는 분이시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시고 일어난 첫 번째 사건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는 것이었다.

바울은 신자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어 한 성령 안에서 화목하여야만 할 것을 말하고 있다.

이는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것과 같이, 교회가 확장된 이스라엘로서 하나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이방인들도 이제 정정당당하게 하나님 권속이고 시민임을 말하고 있다.

그냥 바울이 선심쓰듯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진리이며, 창세 전에 삼위 하나님께서 계획하셨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명백한 사실이다.

이는 성도가 가져야 할 분명한 정체성이며, 이러한 정체성이 기반이 되어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워나아가야 한다.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모퉁잇돌이 없는 터는 무너질 수 밖에 없다.

현대의 콘크리트나 빔을 박는 철골 건축 방식은 모퉁이 돌이 없지만, 이전의 모든 건축물은 모퉁잇돌 위에 세워졌다.

역사적 이스라엘은 모퉁잇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진 건축물이 아니다.

톰 라이트는 역사적 이스라엘을 이 땅에 실현된 하나님 나라로서의 실질적인 건축물로 보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 대신에 “하나님의 의”라는 모퉁잇돌을 사용하고 있다.

톰 라이트가 시도하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통합에는 더 이상 그리스도가 모퉁잇돌이 아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순종의 의가 아닌, 불트만 학파의 케제만이 주장하는 “하나님의 의”를 모퉁잇돌로 삼는다.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주 안에서의 성전은 서로 연결된 건축물이다.

성도는 혼자가 아니라 공동체를 통하여 성전으로 세워진다.

최초의 공동체는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이며, 이 땅에 세워지는 공동체는 삼위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계획하시고 택하신 자들과 함께 세워져 간다.

이스라엘의 패망의 역사에는 개인의 범죄가 어떻게 공동체의 파멸을 가져오는 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아담은 인류 공동체의 대표이었듯이,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신자들의 머리이시며, 모든 신자를 대표하시는 분이시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공동체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나아감으로서, 아담이 실패한 에덴-성전을 대체하는 그리스도의 몸됨 새로운 성전으로서의 공동체가 되어져가는 것이다.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성령은 창조 주이시며, 성도들 가운데 역사하시어, 성도를 하나님의 처소가 되도록 그리스도 안에서 지어가신다.

불순종의 자녀들은 사단의 뜻대로 이 세상을 파괴해가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령의 간섭하심에 의해서, 최초로 세워진 에덴 성전을 이 땅에 구체화시키고 확장시키는 일을 해야한다.

리처드 미들턴과 같이 톰 라이트의 새관점의 기반 위에서 기독교세계관을 주장하는 이들은, 창세기 1:28의 문화 명령을 마태복음 28:19-20의 대위임령보다 상위 명령으로 해석한다.

이들은, 그리스도인은 이 땅을 변화시키는 문화 명령을 수행함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켜야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세워나가야 할 성전은, 창 1:28의 문화 명령을 근거로 이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만들어 가는것이 아니라, 마28:19-20의 대위임령을 근거로 하나님의 성전을 확장시켜나아가는 것이다,


(나가는 말- 교회는 과연 확장된 이스라엘인가?)

톰 라이트는 교회를 확장된 이스라엘이라고 말한다.

톰 라이트는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인을 이방인과 화해시킨 중재자로 본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행하신 최후의 만찬을, 유대인들이 이방인에 대하여 배타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서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였던 것에 대한 종료를 선언한 것으로 본다.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유대인들을 핍박하는 이방인들에 대하여 어떻게 행동해야하는지 본을 보여준 행동 방식이라고 규정한다.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유대인들이 못박은 사건이 아니라, 세상을 대변하는 로마에 의해서 못박힌 사건으로서, 로마와 이방인에 대해서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와 같이 희생적으로 나아갈 때, 이를 하나님께서 용납하시고,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신 것과 같이, 유대인들의 희생을 받아주셔서, 확장된 이스라엘 개념의 교회로 재탄생시키셨다는 것이다.

이들이 보는 신약의 교회는 유대교의 변형일 뿐이다.


오늘 에베소서의 본문의 주요 주제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해되었다는 내용이 관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화해 개념은,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화해 개념과는 다르다.

톰 라이트는 유대교를 율법주의 개념에서가 아니라 언약적 율법주의, 즉 율법이 구원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구원의 은혜 안에 머물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

톰 라이트의 언약적 율법주의는 성경을 해석해서 얻은 결론이 아니라 “역사적 예수 탐구”라는 모임을 통하여 1세기의 “제2성전 유대교”에서의 역사적 자료들에 대한 해석을 통해서 얻어낸 결론이다.

하지만 그는 일부 자료에만 치중하여 편협된 해석을 함으로서,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해석이 결여되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가 확장된 이스라엘로서의 교회에는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과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개념이 상실된, 하나님의 의, 즉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의를 근거로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차이로 인해서, 톰 라이트가 말하는 확장된 교회의 모퉁잇돌은 더 이상 그리스도가 아니시다.

홀로코스트의 아픔을 극복하려는 시도인지, 톰 라이트는 새관점을 통해서 유대교와 기독교를 하나로 통합시키려는 시도를 하려고 하지만, 이는 카톨릭과 개신교의 오랜 통합의 노력이 실패하였듯이, 실패 할 수밖에 없는 무리한 시도다.

기독교는,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바와같이,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과 그 피로 인한 죄 사함과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아 의인이 되었다는 전가 교리와, 오직 은혜로만 구원받는다는 개념이 배제된다면, 더 이상 기독교일 수가 없다.


posted by Wonho Ki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