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1장 7-14절 말씀 묵상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창세 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이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짐으로서, 성도는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받을 수 있다.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새관점의 경우에는, 그리스도의 성육신 이전의 역사적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가 이루어진 상태로 보고있다.
이러한 논리가 가능한 것은, 새관점에서는 하나님 나라에 거하기 위한 인간의 의가,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가 아닌, 성부 하나님의 의, 즉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개념은, 원래 불트만 학파의 케제만이 주장하였던 것으로서, 톰 라이트는 이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하신 약속을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신실하게 이행하셨다”는 의미의 의라고 말한다.
새관점에서는 역사적 이스라엘 자체를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로 보고있으며, 교회는 단지 확장된 이스라엘이라고 보고있다.
이는 역사적 이스라엘과 신약의 교회를 같은 속성을 가진 공동체로 보고있다는 것이다.
바울이,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과는 관계없이, 새관점에서 말하는 은혜는, 성부 하나님만의 은혜이다
새관점에서는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은 단지 이미 주어진 은혜 안에 머무르기 위한 수단이었는데, 이들이 이미 주어진 은혜 안에 머무르는데 실패한 이유는, 이들에게 주어진 음식법과 할례법을 이방인들과 구별하기 위한 민족적 우월주의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역사적 이스라엘은 원래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선교적 공동체로 세워졌는데, 이들이 선교적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만보더라도 새관점에서 말하는 역사적 이스라엘은 그리스도의 피가 없이도 구원받은 백성이 될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새관점의 이러한 주장은 그리스도를 배제하려는 유대주의적 색체가 농후한 발상이다.
이러한 내용들은 많은 새관점주의자들이 유대인의 장학금으로 공부를 했다는 주장에 설득력을 제공해주고있다.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단순한 희생이 아니라 죄에 대한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한 것으로서, 일종의 율법이 요구하는 값을 지불함으로서 율법의 요구에 마침표를 찍으신 것이다.
에덴에서 아담의 불순종에 대한 죽음의 요구와,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에게 요구되었던 불순종의 요구로서의 죽음은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 나시어 율법의 저주를 감당하신 것은 마지막 아담으로서 처음 아담의 범죄로 인한 죽음의 요구에 대한 값을 치루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은 에덴에서의 순종의 요구와 가나안에서의 순종의 요구를 모두 충족시키심으로 더 이상의 사망의 요구를 잠재우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에덴에서의 순종의 요구로서의 아담 언약과, 가나안에서의 순종의 요구로서의 시내산 언약은 동일하게 행위 언약의 범주에 속하여 있다고 볼 수 있다.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와 톰 라이트의 새관점이 비슷한 속성을 갖는 것은 둘 다 행위 언약을 인정하지 않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행위 언약을 인정하지 않을 경우 그리스도의 피는 속죄가 아닌 다른 뜻으로 해석 되거나, 혹은 구원론의 변화를 가져 올 수 밖에 없다.
(속량 곧 죄 사함)
그리스도의 구원은 속량의 개념이 있기에, 이스라엘의 출애굽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새관점에서는 출애굽을 이스라엘의 구원 사건으로 보고있으며,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을 구원의 은혜 안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보고있다.
하지만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한 광야에서의 시험이 요구되었으며, 불순종에 대한 속량 개념이 준비되어있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인하여 구원받은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40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하신 후에 마귀의 시험을 통과하심으로서, 더 이상의 시험이 요구되지 않는다.
새관점주의자들이나 펠라기우스주의자들에게는, 최종적 구원을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시험을 받았듯이, 시험이 요구된다.
이와는 달리 성도에게 요구되어지는 행위는, 구원을 위한 시험이 아니라, 마땅한 열매로서 요구되어지는 것이며, 이러한 열매가 없다는 것은 구원의 조건이라는 관점에서보다는, 구원받은 자의 증거라는 관점에서 문제가 있는 것이다.
구원은 죄의 결과와 죄의 요구와 죄의 속박으로부터 자유해지는 것이다.
죄의 요구와 속박은 인간의 죄성과 욕심과 관계가 있기에, 사는 동안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사단과의 영적 전쟁으로 말미암아 계속적인 시험에서 이길 수가 없다.
죄 사함을 받은 성도는, 이 땅에서 사는 날 동안에는, 성령의 도우심에 의지하여, 성령의 인치심으로 인하여,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달리, 구원에서 탈락되는 일이 없다.
속량은 죄에 대한 것이기에, 성도는 죄에 대한 분명한 의식이 있어야한다.
속량의 일차적 결과는 죄사함이다.
여기서 말하는 죄는 아담의 타락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새관점에서는, 아담의 죄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잠정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간주한다.
이렇게되면,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무의미한 것이된다.
대신에 새관점에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세상을 표현하는 로마와 어떻게 싸워나아가야 할지에 대하여, 삶의 본을 보여주기 위한 희생으로 대체한다.
개혁주의에서는 아담 안에서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하였다는 것을 말하지만, 새관점에서는 아담의 죄를 무시함으로서, 최종적 구원을 위해서 인간에게 선을 행하는 능력을 요구한다.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모든 지혜와 총명)
구원의 비밀을 알 수 있는 것은 택함받은 신자에게 제한된다.
신자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지혜와 총명으로 복음의 비밀을 알수 있다.
(비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것은 누구나 알 수가 있지만, 복음은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알 수가 없다.
복음은 행위를 요구하는 표면적인 모세 율법의 내면에 담겨있다.
복음은 율법이 진정 말하고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 자에게만 열려있다.
모세 언약은 표면적으로는 행위 언약에 속하여있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은혜 언약에 속하여있다.
목이 곧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 언약의 표면적인 속성만을 보았기 때문에 비밀에 가리워있는 은혜 언약의 속성을 가진 본질을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는 인간이 경험하는 자연법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구원의 은혜는 표면적으로 주어진 율법이나 자연법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율법이나 자연법은 정죄를 위한 것이며, 이를 통해서는 구원에 이를 수는 없다.
유대인들에게 감추어졌던 비밀은, 유대인과 이방인에 관계없이, 믿는 성도는 하나의 공동체로 완성되어, 하나같이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게 된다는 것으로서, 당시 유대인에게는 생각할 수조차 없었던 것이었다.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늘에 있는 것)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여기서 천지로 표현되는 하늘과 땅은 상위 구조upper-register와 하위 구조lower-register를 가리킨다.
상위 구조로서의 하늘에는 하나님이 계시며, 천사들이 있는 곳으로서 눈에 보이는 하늘과는 구분된다.
(땅에 있는 것)
땅은 육에 속한 하위 구조로서 여기에는 눈에 보이는 하늘도 포함된다.
(통일되게 하려 하심)
하늘과 땅, 모든 피조계가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구속되는 것이 예정되어있으며, 이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세상의 종말에 완성될 모습이다.
초림에서는 민족 간의 경계를 없애고, 재림때는 상위 구조upper-register로서의 하늘과 하위 구조lower-register로서의 땅을 하나로 통일 시키는 것이다.
메러디스 클라인Meredith Kline은 예수의 재림 때에 상위 구조로서의 하늘과 하위 구조로서의 땅이 연합된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 되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이로서 태초에 창조하신 하늘과 땅이 마지막 날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과 땅의 연합으로 통일될 것이다.
11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하나님께서는 계획하신 일을 성도들 가운데 행하실 때, 특히 부정적 상황을 통해서 일하신다.
이스라엘의 부정적 상황을 통해서 인간의 죄가 드러나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필요로 하였듯이,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택하신 자녀는, 아담의 자손으로서의 죄를 드러냄으로서, 구원의 손길을 뻗으신다.
성도는 부정적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어야 한다.
어리석은 자는 부정적 상황을 고치려는데 온 힘을 쏟아붓다가 결국 자신도 멸망의 구렁텅이에 빠지곤 한다.
현대문명은 인간이 뿌린 부정적 상황을 극복하려는데 온 힘을 쏟아붓지만, 결국은 자신들이 만든 또 다른 부정적 상황에 함몰되곤한다.
인간 사회의 부정적 상황은 내면 세계의 부정적 요소의 산물일 뿐인데도, 현대 문명은 결코 원인이 되는 내면적 접근을 하지 않는다.
인간 사회의 부정적 상황은 그 뿌리가 인간의 내면의 죄성으로 말미암은 것이기에, 표면적인 문제 해결은 결코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될 수는 없다.
역사적 이스라엘은 부정적 상황을 통하여 내면의 죄가 드러남으로서, 비록 표면적으로는 멸망하였지만, 그 가운데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도 될 수 있었다.
인간 사회의 부정적 상황은 결코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신자는 그 현상적 상황에 말려들어서는 안된다.
신자는 다만 주어진 역량 안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지, 역량 밖의 상황에 까지 들어가려고하면 안된다.
이는 마치 토네이도 속으로 들어가서 바람을 잠재우려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
(예정)
신자는 영원 전부터 계획하신 뜻에 따라 택함을 입은 존재다.
많은 철학자들이 인간의 존재에 대하여 고민하여왔지만, 영원 전에 삼위 하나님의 계획과 예정하심이라는 관점에서의 인간 존재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있다.
이는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한계점이다.
칼 바르트를 비롯한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자신의 현재적 존재를 인지적 사고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들이 해석하는 성경은 경험적이고 이성적이고 논리적이지만, 이러한 방식은 창세 전 구원을 계획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는 데 한계를 보일 수 밖에 없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해석은 하나님의 택하심과 예정하심 가운데 섭리로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의식하지 않고는 해석되어질 수가 없다.
12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진리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
복음은 일차적으로 구원에 관한 것이다.
신자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받는다.
현대에 들어와서 신학의 뚜렷한 변화 가운데 한 가지는 구원론 중심의 기독론에서 신론으로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구원에 관하여 이야기를 하면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구시대적 인물로 취급받는다.
구원론에서 신론으로의 전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분야로는 신칼빈주의, 신정통주의, 새관점등을 들 수 있다.
하지만 복음의 본질은 구원론이다.
구원론이 배제된 이들의 신학은 결과적으로, 택함과 예정이 배제된, 만인 구원론쪽으로 흐를 수 밖에 없다.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음)
인치신다는 것은 약속에 대한 보증이면서 동시에 소유에 대한 권한을 나타내는 것이다.
믿는 것과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는 것은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믿음을 가질 수가 없기에, 엄밀한 의미에서 믿음은 성령의 인치심의 결과물이다.
성령의 인치심으로 믿음을 갖는 것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소유권의 표시다.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은 이들은 더 이상 자신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 할 수가 없다.
신자는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과거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성령은 신자로 하여금 이러한 사실을 믿게끔 인치신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증거가 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새관점에서는 믿음도 구원의 근거가 아닐 뿐만 아니라 성령의 인치심의 결과물도 아니다.
이들이 보는 성령의 역할도 구원의 약속과는 관계가 없다.
그들이 말하는 성령은 단지 인간들로 하여금 죄를 회개하게 하는 일을 하시는 분일 뿐이다.
14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 기업의 보증)
기업은, 에덴에서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선악과 명령과 창조명령(창 1:28)이 완성되었을 때 주어질 예정이었던 종말론적인 축복과 영생에 대한 것이다.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첫 번째 아담이 실패 한 것을 다 이루셨기에,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명령을 다 이행한 것으로 간주되어, 영원한 축복과 영생을 기업으로 얻게된다.
이는 성령이 보증하시는 것이다.
성령의 내주하심은 마치 서류에 도장을 찍음 것과 같이 성령 하나님의 보증을 나타낸다.
보증이 되심은, 아직 우리가 죄의 육신 가운데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지을 수 밖에 없는 죄로 인하여, 우리가 구원에서 떨어질 것에 대한 염려를 없애준다.
성령은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며, 우리에게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알게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시험에 들지 않게 인도하심으로서, 구원받은 자로서 이땅에서 살아가는데 도움을 주시는 보혜사이시다.
(나가는 말)
우리의 삶 가운데 어떠한 것도 무의미한 것은 없다.
긍정적인 요소든, 부정적인 요소든, 삼위 하나님의 택정함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두 다 필요한 상황들이다.
인간은 누구나 아담의 후손으로서 전적으로 부패한 죄인이기에, 역사적 이스라엘이 겪었던 부정적 상황과 같은 유형의 부정적 과정을 거칠 수 밖에 없다.
다윗이 겪은 부정적 상황과 눈물은 그리스도를 만나는 동력이 될 수 있었듯이, 성도들이 부딪히는 부정적 상황은, 성도에게 꼭 필요한 연단의 과정일 수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금을 제련 하듯, 연단한 후에 정금같이 사용할 것이다.
비록 이 땅에서 성도의 삶이 고달프고 힘들더라도, 창세 전에 삼위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예정된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에 힘입어 어려운 환경을 충분히 감당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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