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2017. 12. 29. 14:51

에베소서 1장 1-6절 말씀 묵상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의 부르심과 인간의 비전)


바울의 사도직은 본인의 선택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뜻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으며, 바울은 단지 부르심에 대하여 응답한 것 뿐이다.


이는 간접적으로 바울의 편지가 하나님의 말씀임을 표현하는 것이다.


인간의 비전과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자기 생각에서 출발한 열심은,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고 하더라도, 단지 자기의 일일 뿐이다.


바울은 하나님에 대한 열심으로 자신의 비전을 품었지만, 이는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었다.


인간의 생각에서 출발한 열심 가운데는 많은 경우에 하나님의 일이 아닌 자기의 일인 경우가 있다.


얼마 전 성추행 물의를 일으켰던 J 목사가 항상 외쳤던 말은, 젊은 이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비젼을  품어야하며, 이를 위해서는 자기가 속한 분야에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방식이고 인간의 욕심이며, 하나님을 하나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바울의 경우와 같이, 철저히 인간적인 꿈과 인간적인 자만과 인간적인 능력이 무너지는 가운데,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 의지하여서 할 수 있다.


유명한 신학자들과 저명한 목사들이 나름대로 성공하였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관점이다.


이들의 학문과 목회는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복음은 보편화 될 수 없는 소수를 위한 것이다.


참된 신학과 참된 목회에는 성공이라는 용어를 적용할 수가 없다.


신앙의 영역은 꿈을 이루거나 비전을 품을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길은 고난의 길임을 생각해본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된 바울)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는 자로서 분명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사도로 부름을 받은 후에, 바울은 자신의 생각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을 전하고 있다.


교회 생활을 하는 중에 가장 마음 아픈 것 가운데 하나는, 담임 목사가 강대상에서 자신을 사도라고 칭하고 바울을 목사라고 칭하면서 목사의 직책을 사도와 동등하게 만들면서, 강대상에서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남용한다는 것이다.


이는 그 사람 혼자만의 발상이 아니라, 목사들을 대상으로 목사교를 만드는 훈련과정에서 배운 이들이 공공연하게 써먹는 방법이다.


결국 교회는 내전을 겪었고, 오랫동안 몸담았던 많은 성도들이 난민이 되어 교회를 떠나는 것을 보면서, 자칭 사도라 칭하는 목사가 세상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가장 악독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눈으로 보았다.


사도라는 용어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말이기에, 누구의 보냄을 받았느냐가 중요하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도는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은 자이기에, 이미 말씀이 주어진 이 시대에 어느 누구도 자칭 사도가 될 수는 없다.


만약에 자신을 사도라고 부른다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자기의 말을 덧붙이는 자로서, 자신이 이단임을 선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도행전은 28장에서 끝난 것이지 29장이 계속 진행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아버지)


구약에서는 어느 누구도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었다.


이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만이 부를 수 있는 명칭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 개념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성도의 신분을 말해준다.


백성은 왕과의 관에서 친밀감의 한계와 관계성의 막연함을 보여준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용어는 사용해도 자녀나 아버지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는다.


이는 새관점이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인정하지 않기에, 그리스도와의 연합 개념이 성립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성도의 자격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신비 가운데 한 가지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자이지만,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역에는 가까이 갈 수가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이며, 궁극적으로 성도로 하여금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의 영역에 들어오게끔 하는 것이다.


끊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구속받은 신자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한 몸으로서 삼위 하나님의 긴밀한 공동체에 참여 할 수 있는 자격을 얻은 것이다.


이는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만 참여될 수 있는 영역이며, 그렇다고 성도가 신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신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걸맞는 거룩한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권한이 성도에게 주어졌다고 성도가 그리스도와 동등해 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피값으로 우리를 사신 우리의 주인이시다.


주(퀴리오스)는 어디까지나 종이 주인에게, 혹은 신하가 상전에게 사용하는 용어로서, 자신의 모든 것에 대한 소유권을 위임한다는 뜻이 내포되어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피값으로 사신 종에 불과하지만, 그리스도는 우리를 종으로서 부르지 않고, 자신과 연합된 자로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셨다.


이는 이 세상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놀라운 축복으로서 성도로서의 위치가 어떠한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해준다.


(평강)


평강은 전쟁이 그친 잠시동안의 샬롬의 상태를 말한다.


인생은 싸움의 연속이지만, 그리스도인은 영적인 싸움에서 잠시만이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평강을 누릴 수가 있다.


평강은 계속된 영적인 전쟁을 위한 막간의 휴식이며, 충전이다.


세상 사람들은 술에 취하거나, 취미 활동을 하거나, 여러가지 방법으로 삶을 충전하지만, 성도는 말씀과 기도, 그리고 찬양을 통하여서 하나님을 경험함으로 인하여 평강을 누릴 수 있다.


주일 예배는 성도들이 누릴 수 있는 대표적인 평강 가운데 한 가지다.


주일은 성도가 누려야 할 평강의 날이다.


평강을 누리기 위해서 모인 교회의 성도는 어떠한 세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어서는 안된다.


특히 목회자는 주일에 모인 성도들에게 평강의 시간을 제공할 의무가 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으로 성도로 하여금 이 땅에서 평강을 누릴 권리와 자격을 주셨다.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 하나님께로 갈 자가 없다.


그리스도는 길이시며, 진리이시며, 생명이시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성부 하나님과 성도가 연결될 수 있는 통로이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의 구조는 그리스도가 없이도 구원에 머무를 수 있는 구조다.


새관점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이미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아래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율법이 은혜의 구원 안에 머무르기 위한 수단이라고 말한다.


머무른다는 것은 이미 구원의 구조 안에 들어와있다는 말로서 “구원을 받는다”라는 말이 성립되지 않는다.


이러한 구조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가 없어도 성립되는 구조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예수는 단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민족적 우월주의로 인해서 은혜 안에 머무름에 실패하였기 때문에, 어떻게 은혜 안에 머무를 수 있는지 새로운 방법을 제시해준 모델로서의 인물일 뿐이다.


하지만 에베소서에서는 처음부터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 속한 모든 신령한 복)


창세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에 의해서, 택함받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되고,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가 되는 것이다.


신령한이란 말은 “하나님의 영에 속한”이라는 말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다.


성령의 내주하심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


오순절 성령의 강림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말미암는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성령이 이 땅에 임하시기 전인 역사적 이스라엘을, 이미  이 땅에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로 보는 새관점은 신령한 복으르받았다고 할 수 없다.


오직 성령으로 거듭난 자만이 하나님께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받은 자이기에, 구약의 소수의 믿음을 가진 이들 이외에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받았다고 말 할 수 없다.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에베소에 있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은 창세 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창세 전 영원 가운데 택정함을 입은 이들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이 요구되지 않는다.


창세 전 택정함을 입은 이들은 오직 하나님께서 메시아이신 그리스도께 맡기신 이들이다.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어야하는 것은 구원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된 구원을 받은 이로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한 것이다.


성도가 구원을 받는 것은 성도의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창세 전에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을 근거로 하는 것이다.


성도가 받는 구원은 현재적 환경에 의한 즉흥적인 구원이 아니며, 성도의 의지에 의하여 선택되어진 것도 아니며, 오직 창세 전에 미리 계획된 삼위 하나님의 택정함을 근거로하는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이다.


찰스 핫지는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창세 전 구속 언약 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언약적 연합federal union이 성도의 믿음의 고백을 통하여 실제적 연합actual union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말한다.(The Trinity and the Covenant of Redemption, J. V. Fesko, loc1995)


택한 자에게 요구되는 거룩함과 흠이 없음은 구원을 위한 선행 조건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이루신 능동적 순종과 십자가에서의 수동적 순종을 통하여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영원 가운데 결정된 삼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택한 자에 대한 사랑으로 이 땅에서 행하여진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고난은 성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마지못해서 할 수 없이 성자 하나님께서 감당하신 것이 아니라, 택한 자를 사랑하시는 삼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 담겨있는 사랑의 표현이다.


창세 전 구속 언약의 중심에는 메시아이신 그리스도께서 계신다.


그리스도께서 택함받은 자의 중재자가 되신 것은 이미 영원 가운데 성부 하나님의 택정하심에 근거를 두고있다.


이미 창세 전에 택정함을 받은 중재자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거룩할 수도 없고 무흠할 수도 없다.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새관점에서는 그리스도는 중재자도 아니시며, 창세 전에 택함을 받은 자는 있지도 않았으며, 오직 출애굽한 유대인만이 하나님 나라 백성이며, 교회는 단지 확장된 유대이스라엘일 뿐이다.


새관점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와 언약적으로 연합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하나님 앞에서의 중재자로 보지 않는 새관점주의자들은 받은 은혜를 행위로 유지함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이 되려고한다.


인간은 이미 아담의 범죄와 더불어 하나님의 영이 떠난 죽은 육신이 되었기에,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얻을 만큼 거룩하고 무흠할 수는 없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인간이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육신이 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데서부터 출발된 인본주의적 사고의 산물일 뿐이다.


새관점의 논리에서 그리스도는 삼위 하나님 가운데 아들 하나님이 아니라 따름의 본을 보여주는 유대 혁명가일 뿐이다.


창세 전 구속 언약을 인정하지 않으며, 성도를 거룩하고 흠이 없는 존재로 만드는 중재자이신 그리스도의 위격을 손상시키는 새관점주의자들은 결과적으로 이단의 판단의 기준이 되는 삼위일체의 개념을 손상시키는데까지 이르게된 것이다.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택한 자를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셔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들들이 되게하심은 창세 전에 있었던 구속 언약의 내용이다.


구속 언약은 창세 전 영원 가운데 삼위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결정된 세분 하나임 간에 약속이었으며, 이러한 약속은 인간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 주신 예정된 택한 자에게만 제한되는 것이며, 택함을 받은 예정된 자는 그리스도와 연합되게 하심으로서 하나님께서 아들로 양자 삼으신 것이다.


(기쁘신 뜻)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하는 법정적 개념에는 자칫 하나님의 인격적이고 따스한 성품이 결여되기도한다.


어떤 이들은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신 사건을 자녀에 대한 학대라고 표현하기도한다.


하지만 창세 전에 택한 자를 구속하시기 위한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은 삼위 하나님께서 모두 기뻐하심으로 결정하신 것이다.


창세 전에 택한 자를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신 것은 마치 아이를 낳기 위하여 준비하는 부부와 같이 기쁨 가운데 준비되어진 것이다.


남녀가 결혼하여 낳게 될 아이에 대한 기쁨은 삼위 하나님의 기쁨에 대한 그림자라고 할 수 있다.


아이를 낳기 위한 산모의 고통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고통의 그림자이며,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하와에게 잉태하는 고통이 더해진 것도 그만큼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고통을 알게하기 위한 것이다.


성도는 삼위 하나님의 잉태의 고통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담겨있는 존재이다.


부모로부터 사랑받은 아이가 갖는 자존감과 같이, 창세 전에 삼위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서 이 땅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비록 이 땅에서의 삶이 고통스럽고 비천하다고 하더라도, 자존감까지 손상되어서는 않될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담겨있는 존재이기에, 이 땅에서의 삶이 결코 허무하거나 부질없는 것이 아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기에, 삶을 결코 헛되게 살아서도 않되며, 신분에 걸맞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성도는 창조주이신 삼위 하나님의 기쁘신 뜻 안에서 구원받은 자이기에,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부러워 할 필요가 없는 가장 부요한 자이다.


(우리를)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제한되어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기로 예정되어있는 이들은 모든 이들이 아니다.


더군다나 레위 자손의 제사장을 중심으로 모인 유대인들도 아니며, 오직 멜리세덱의 반차를 따른 예수 그리스도가 제사장이 되시고 중재자가 되심으로, 믿음을 고백함으로서 구원에 참여된 이들로 제한된다.


예정된 이들은 모두가 아니며, 유대 이스라엘도 아니다.


모세는 중재자였지만 제사장이 될 수가 없었다.


새관점을 주장하는 제2성전 유대주의자들은, 유대인들이 가나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안에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바울이 말하는 우리는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 주신 택함받은 자들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삼위 하나님의 제2위격으로서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이 주어지는데 반하여, 그리스도의 제2 위격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나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만린 구원론적 방향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으며, 그리스도와 연합된 이들은 오직 믿음의 신앙고백을 하는 이들로 제한된다.


(예정하심)


성도에게 현재의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무계획적으로 상황에 따라서 즉흥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이 아니다.


모든 일들에는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의 부패와 타락을 하나님의 간섭하심이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부패한 자가 자기 길을 가도록 내어버려두셨을 뿐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부패를 그냥 내어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에서도 간섭하셔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시다.


에정론을 거부하는 이들은 아담의 타락에도 하나님의 책임이 있으시다고 주장한다.


어떤 이들은, 마치 결함이 있는 차를 리콜하듯이, 아담의 타락에 하나님의 책임이 있으시기에, 이에 대한 후속 대책으로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역을 감당하신 것이라고 말하기도한다.


그렇다고 아담의 타락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이며, 하나님께서 이에 대한 책임이 있으시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는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을 지닌 인격체이다.


인격체는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로서 자신의 결정에 대하여 간섭를 받지 않을 권리가 있으며, 자신의 결정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만 한다.


아담은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격적 존재이기에,  아담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결정권이 있는 동시에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져야만 하는 존재였다.


인격적 존재의 결정은 자유 의지에 의한 결정이었기에, 자신이 선악과를 먹고자 결정했을 때 간섭받지 않을 권리가 있었다.


하지만 아담의 타락은 하나님의 형상의 인격적 속성의 상실을 가져왔으며, 하나님의 형상이 손상되어 육신이 된 인간은 더 이상 자유 의지가 없는 사단의 종일 뿐이다.


타락한 인간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의 주체가 될 수 없는 사단에 종속된 존재이다.


하나님의 예정은 타락하여 자신의 주체가 될 수 없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셔서, 그들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들의 걸음을 인도하심으로서, 주의 기쁘신 뜻 안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도록 인도를 하신다.


성도가 하나님의 예정하심을 고백하는 것은, 자신의 구원이 오직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행위 구원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인간에게 스스로의 행함의 결정권이 있다고 말한다.


오직 믿음과 오직 은혜를 고백하였던 종교개혁자들은 하나같이 인간의 노예 의지를 강조하였다.


노예 의지 상태에 있는 이들은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없이는 구원에 이를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상황에 따라서 즉흥적으로 구원을 결정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아시기에, 인간의 행함과 공로에 영향을 받으셔서 그들의 행함을 보시고 구원을 결정하시지는 않으신다.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인간의 공로를 주장하고, 알미니안 주의자들은 구원의 자기 결정권을 주장하지만 이는 모두 인간의 노예 의지를 강조하였던 종교개혁자들의 주장과 상반된다.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강조하는 개혁주의 신앙고백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의 신앙고백이 되어야한다.


새관점주의자들이 종교 개혁자들에 대하여 비난을 서슴치 않는 이유 가운데 한가지는 노예 의지 개념에 대한 반발이 있다.


새관점주의자들은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행함으로 유지함으로서 최종적 심판에서 최종적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말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은혜를 인간의 행함으로 완성시킨다는 인본주의적 행위 구원론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행위 구원론은 그리스도의 중재 사역과 구원 사역에 대한 거부로 이어지기에,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전가 교리를 거부하는 새관점주의자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음)


성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양자 삼으신 것은 영원 가운데 그리스도를 아들로 지명하심으로 성도를 아들이신 그리스도와 연합되게 하심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그리스도와 연합되지 않고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수가 없다.


영원 가운데 예정된 성도는 이미 영원 가운데 언약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federal union되었으며, 그리스도의 경륜적 구속 사역과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성도의 신앙고백을 통하여 실제적으로 연합actual union이 일어난다.


이 모든 일은 영원 가운데 성부 하나님께서 택한 자를 메시아이신 성자 예수님께 주심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자는 영원 가운데 약속하신 구속 언약을 근거로 구원을 받는 것이다.


여기에는 인간의 주체적 행위가 들어갈 공간이 없다.


인간의 주제적 행위를 구원과 연관시키는 자리에는 그리스도께서 들어가실 자리가 없다.


성경의 모든 구속적 경륜은 영원 가운데 약속하신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을 근거로 하기에, 영원 가운데 아들로 지명을 받으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될 수없다.


새관점의 문제는 인간의 구속에 그리스도가 배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새관점에서의 그리스도는 단지 행동의 본을 보여준 혁명가일 뿐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는 구원을 주장하는 어떠한 논리도 영원 가운데 맺어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에 근거를 하고있지 않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는 구원을 주장하는 인간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스스로 교만한 자일 뿐이다.


이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죽은 존재임을 알지 못할 뿐이다.


(아들들이 됨)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시편 2:7-8)


하나님께서는 택한 자를 아들 삼으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들 삼으셨다.


그리스도의 아들되심은 삼위일체 개념에 혼돈을 가져오기도한다.


인간적인 생각에 아들의 존재는 아버지보다도 한 단계 뒤이기에, 시간 상 아버지만 존재하고 아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가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아리우스는 아들인 그리스도가 태어난 자라면 성부 하나님의 존재의 시작에 아들이 존재하지 않았을 때가 있었기에, 창조된 자로서 아버지와 아들인 그리스도가 동질일 수가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시편 기자는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는 말씀은 택한 자를 구원하시기 위한 삼위 하나님의 결정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들로 지명되셨음을 전하고있는 것이다.


경륜적 삼위일체로서의 성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육신 하셔서, 둘째 아담으로 모든 택함 받은 자의 맏형이 되셨지만, 존재론적 삼위일체로서의 성자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시다.


성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지명되셨음은 전적으로 택한 자를 하나님의 아들로 삼기 위하심이었다.


하나님께서는 택한 자를 아들 삼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들로 지명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들로서 성육신하셔서 이 땅에서 구속 사역을 감당하신 것은 택한 자를 아들 삼으시기 위해서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시지만, 택한 자를 구원하기 위해서 비천한 육신을 입으시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오늘 너를 낳았도다라고 하신 말씀은 영원 가운데 약정하신 구속 언약 가운데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들로 삼으셨음을 말하고있다.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들되심은 처음 아들인 아담을 대신하는 둘째 아담으로서의 아들되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들되심은 창조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자신의 피조 세계에 들어오셔서 창조를 완성하시기 위함이었다.


성부 하나님은 처음 아담의 아버지이셨지만,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서 더 이상 육신이 된 인간의 아버지가 되실 수가 없으셨다.


모든 인류는 처음 아담 안에서 아버지를 잃어버렸지만, 택함을 받은 자들은 다시 아들로 오신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성도의 구원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기 위한 것이며, 성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자이다.


아들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이 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이로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이어받을 자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이어받을 자에게는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순종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창세기 1장 28절의 지배 명령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하나님의 명령대로 다스림으로서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아담과 그의 후손에게 유업으로 주시기 위함이었다.


처음 창조된 아담은 아들로 창조되었지만 불순종하여 아들의 자격을 상실하였기에, 더 이상 창세기 1장 28절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을 실행할 수가 없었다.


창세기 1장 28절의 명령은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권을 선언하는 것이었지만, 불순종한 아담이 낳은 후손들은 하나님의 영이 떠난 육신일 뿐,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권을 실행할 능력이 없는 존재들이었다.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자는 순종하는 하나님의 아들이어야했지만, 아담의 후손들은 이 땅을 유업으로 받을 수가 없었다.


택함을 받은 자들은 둘째 아담 그리스도의 대표성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세되었다.


창세기 1장 28절의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셨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아들이 된 성도들은 장차 올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아 다스릴 것이다.


인간이 육신 안에서 경험하는 자식에 대한 사랑과 유산을 물려주는 일들은 육신에 남겨진 하나님의 형상의 그림자들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자식 이외에는 존재를 기뻐하고 유산을 물려주기가 쉽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택한 자의 존재 자체를 사랑하시고 아들 삼기 위해서 기쁨 가운데 구원하시는 고통을 감당하셨다


택함받은 성도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인식하면서 성화되는 삶을 살아야한다.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아이가 부모의 자녀가 된다는 것에는 어떠한 조건도 있을 수가 없다.


아이는 태어났다는 자체로 부모의 기쁨이 되며, 아이는 부모를 기쁘게 해주기만 하면 된다.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은 어떤 인위적인 행동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 부모에게 기쁘게 달려가는 아이가 하는 자연스러운 행동이면 된다.


부모가 자신을 기뻐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아이는 부모를 충분히 기쁘게 해 줄 수 있다.


우리는 자녀와 같이, 아무 공로도 없이 은혜를 입은 자들이기에, 그리스도로 의의 옷을 입은 이들은 마땅히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여야 할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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