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018. 1. 16. 22:16

사도행전 7장 54절~ 8장 3절 말씀 묵상



54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중국이 지배하는 티벳이 분리 독립이 거의 불가능한 이유 가운데 한 가지는 티벳을 움직이는 티벳 승려들이 대부분 중국과 연계되어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고행과 비움을 최고의 선으로 추구하는 승려들이 가장 부패한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아마 로마 지배하에 있던 대제사장 무리들은 표면적으로만 성직자일 뿐 실제에 있어서는 로마정부와 결탁되어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세력들일 것이다.

이들은 스데반의 설교를 신앙의 관점에서 듣기보다는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에서 들었을 것이다.

현시대에 신앙의 가장 큰 걸림돌이 있다면 각자가 자기의 입장에서 말씀을 대한다는 것이다.

사도행전의 초대교회 교인들은 자신이 처해있는 입장과 환경을 넘어서는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이루면서 교회를 확장시켰다.

이러한 공동체의 확장에 충돌하는 이들은 세상과 결탁되어있는 이기적 무리들일 것이다.

교회공동체는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 다양한 입장에서 공동체를 이루어가지만 각자의 입장과 이권을 넘어서지 못하면 서로 충돌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성도는 세상의 이권과 결탁되어있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설 때 진정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교회공동체를 이루어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성령은 성도를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게 하신다.

신자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다.

궁극적으로 임할 새 하늘과 새 땅은 이 땅과 하늘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 땅이 하늘과 하나가 되기 위한 전제 조건은 거룩이다.

거룩함이 없이는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가 없다.

세상과 결탁 되어있는 자는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가 없다.

성령 충만은 신비적인 개념보다는 거룩함에의 참여다.

성령충만을 강조하는 신비주의자들 가운데는 거룩함에 대한 개념이 없이 신비를 추구하는 이들도 있다.

관상기도를 수단으로 신적 존재를 경험하는 이들에게서 거룩의 개념을 찾아 볼 수가 없다.

관상기도는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의한 거룩함이 아니라, 플라톤의 이원론적 사고에 의한 성과 속의 개념에서 출발된  헬라 철학을 근거로하는 신플라톤주의 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기독교뿐만이 아니라 모든 종교에 관상기도가 있기에 카톨릭은 타종교와의 대화의 수단으로 관상기도를 사용하고있으며, 세계교회협의회 (WCC)에 참여하는 교회들도 관상기도를 수용하면서 이에 동참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스데반이 하늘의 신비를 볼 수 있었던 것은 육적인 신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속죄로 인한 거룩함을 기반으로하는 성령의 역사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57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무엇때문에 이렇게까지 큰 소리를 지르고 귀를 막고 달려들어야만 했는가?

단순한 정죄보다는 자신들의 이권이나 자신들의 자존감이나 철학이 무너지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자신들은 스스로 선하다고 생각했을 것인데 악하다고 하니 이를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은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자신을 악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름대로 단편적인 정의감에 사로잡혀 스스로 의롭다고 여긴다.

이는 특히 성직자들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하나님을 정면으로 대적하는 이들은 인간 중심적인 선을 행하는 이들이다.

특히 인본주의 신학을 하는 이들은 자신의 선에다가 신학이라는 칠을 덧입힘으로서 그럴듯하게 자신들을 포장한다.

이들은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선함을 증명하려한다.

하지만 선을 판단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진정 하나님의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선한 사람은 하나님이 증명해 주실 뿐이다.


스데반은 자신이 선함을 증명하려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의 악함을 드러내면서 진리만을 선포했을 뿐이다.


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이들은 인간이 정작 정죄 할 수 없는 근본적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마치 자신들은 거룩함을 지키는 자들인 것과 같이 스데반을 성밖으로 끌어내지만 정작 거룩하지 못한 자가 거룩한 자를 거룩의 이름으로 돌로치는 악행을 저지른다.

거기에 더하여 거짓 증인까지 합세한다.

신앙의 영역에서 정의를 외치는 이들 가운데 대중의 인기를 힘입어 정의의 이름으로 자기와 다른 이들을 사냥하는 이들이 종종 있다.

이들은 정작 자신이 의롭다고 자기와 다른 이들을 정죄하지만 지극히 인본주의적인 경우가 종종있고 이들은 정죄하면서 자신의 의를 드러내려한다.

하지만 정작 인간은 누구나 전적으로 부패한 아담의 자손으로서 인간에게는 정죄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는 것을 모르고있다.


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스데반은 자신을 박해하는 이들에 대항하지 않는다.

스데반은 자신이 정죄 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서 자기를 박해하는 이들 조차도 용서하지만, 정작 스데반을 박해하는 이들은 자신들이 정죄할 수 없는 죄인임을 알지 못한다.



1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하나님께서는 핍박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도한다.

예루살렘에 임한 핍박이 없었으면 이 땅의 예루살렘이 또 하나의 집단이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복음 전파는 세상적인 규모의 커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게 지은 교회의 명분은 중국에 대한 선교였지만 오히려 사회의 지탄만 받을 뿐이다.

진정한 하나님의 축복은 세상적인 관점에서는 블행인 경우가 종종 있다.

일제시대 평양은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할 정도로 부흥되었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영적으로 황폐해진 곳이 되었다.


평양이 박해를 받아 이북에서 내려온 이들로 인하여 남쪽에 많은 교회들이 세워졌다.

한 가지 예로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영월의 차득련목사는 소천하신지 이제 20년 가까이 되었지만 그가 처 자식을 이북에 남겨두고 강원도에 세운 교회는 무려 20개가 넘었다.

그에게 향한 하나님의 축복은 세상에서의 형통이 아니라 부인과 세명이나 되는 아들의 소식도 모른채 평생을 떨어져 살아야만 했던 고통이었지만 그가 맺은 수많은 생명의 열매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무한한 축복이었다.

하나님의 축복을 외적인 확장으로 생각하면서 교회 건물의 증축에 힘을 다했던 교회들은 그 외적인 규모만큼이나 욕심의 충돌로 인하여 침물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2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posted by Wonho Kim
:
사도행전 2018. 1. 15. 23:34

사도행전 7장 37~53절 말씀 묵상


37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38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스데반은 모세의 권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부터 왔음을 말하고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일을 행하시기에 모세에 대한 거부는 곧 하나님에 대한 거부가 될 수 있다.

모세는 하나님께 특별 은혜의 권위를 입었다면 세상에서의 권위자들은 하나님의 일반 은혜를 입은 것이다.

자연법에 지배되는 일반 은혜의 영역은 하나님의 통치 영역으로서의 하나님 나라이며, 이는 하나님의 구속 영역으로서의 하나님 나라와는 구분된다.

특별 은혜의 하나님 나라에 속하여 있는 신자는 동시에 일반 은혜의 하나님 나라에 속하여있기에, 자연법에 의한 이 세상의 권세자에게도 복종하여야한다.


39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하지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

하나님의 권위를 입은 모세에 대한 복종은 하나님에 대한 복종이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복종하지 않음으로서 하나님을 거부하였다.

이는 단순히 권위에 대한 불복종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거부이면서 동시에 사단의 권세 아래에 있는 애굽에 대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심각한 이유는 일반 은혜를 근거로하는 보편적인 권위가 상실된 시대라는 것이며, 동시에 권위에 대한 도전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이 보편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하고 세상 신에게 속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40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고

이는 이제껏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복종하였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심을 목적으로 하나님을 이용하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우상은 인간의 필요를 채워줄것 같은 허상이지만, 그래도 인간은 자신들의 필요에 의하여 신을 만든다.

시내산에 올라가기 이전의 모세는, 실상은 그들에게 하나님을 대변하는 역할을 못한 것이며, 이제껏 이스라엘 백성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이로 이용 당한 것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로 성도의 필요를 채워주는 방법으로 확장을 하려고 한다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만있는 우상 숭배의 장소가 될 것이다.

기회주의적이고 타협하는 것이 보편화되어있는 현재의 대다수의 교회들은 실상 아론의 송아지와 별다르지 않다.



41  그 때에 그들이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

출애굽의 과정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였던 모습은 어디에서도 발견 할 수가 없다.

그들이 유일하게 기뻐하였던 것은 송아지를 만들었을 때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여준 모습은 인간의 보편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도우심이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42  하나님이 외면하사 그들을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 두셨으니 이는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 바 이스라엘의 집이여 너희가 광야에서 사십 년간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로마서 1장에서도 사람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을 때 그들을 내어버려두심으로 그들이 어떠함을 증거하고있다.

하나님은 마음 중심에서 경배를 받으시길 원하신다.

하지만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인간의 마음을 잡아둘 수가 없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잡아당기시지 않으시면 고무줄과 같이 자신의 죄성이라는 본능으로 다시 돌아가게되어있다.

내버려 둔다는 것은 인간의 원래의 상태가 어떠한지,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어떻게 될지를  스스로 경험을 통해서 깨닫게 하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심판받기에 합당한 모습을 증명해줄 뿐이다.

끝까지 은혜를 거부하는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내버려 둠으로서, 세상은 자신들의 죄악을 스스로 증명함으로서 심판대 앞에 설 수 밖에 없다.



43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으로 옮기리라 함과 같으니라

사람을 제물로 바치게하는 가나안의 신과 토성이라는 별과 관련된 신은 다 아론의 금송아지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만든 신이다.

인간이 만든 신의 모습은 인간의 내적인 상태가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우상 앞에서 행하는 악행들은 전부 다 인간의 마음의 원함을 드러내주고 있는 것이다.



44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이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가 명하사 그가 본 그 양식대로 만들게 하신 것이라

하나님의 장막이 광야에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새 언약 시대인 신약에서는 성령께서 친히 신자 안에 내주하심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신자와 함께 하심을 증명해주고 있다.

성령이 내주하는 신자는, 심각한 갈등이 없이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우상을 만드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갈등은 성령이 신자 안에 내주하고 계심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45  우리 조상들이 그것을 받아 하나님이 그들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인의 땅을 점령할 때에 여호수아와 함께 가지고 들어가서 다윗 때까지 이르니라

광야에서의 증거장막이 가나안 땅에서도 계속적으로 이어짐을 말한다.

이는 한편으로 현재 우리의 삶이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앞으로 임할 영원한 천국에서 영원한 삶으로 계속적으로 이어질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46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하게 하여 달라고 하더니

은혜를 받은 자의 간구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달랐다.

자연인으로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코 하나님의 처소를 간구하지 않았다.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인간은 결코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다.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수 있었던 것은 다윗에게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47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솔로몬은 눈에보이는 성전을 지었지만 그는 자신이 지은 성전으로 말미암아 타락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스도가 손수 지으신 성전은 솔로몬이 지었던 성전과 달리 타락과는 관계가 없었다.

성전으로서의 에덴이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완성될 수가 없었듯이,  타락한 인간은 상실된 성전을 지을 수가 없다.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그리스도만이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상실된 성전을 완성시킬 수가 있으셨다.

성전으로서의 에덴은 그리스도에 의하여 완성되었기에 신자는 더 이상 에덴에서의 명령을 수행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는 완성된 성전으로서 신자에게 안식이 되시기에 신자가 에덴에서의 문화명령, 즉 창조명령 혹은 통치명령을 다시 시작하려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더군다나 다시 제3성전을 지으려는 행위는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이들의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기에, 이를 지지하는 세대주의를 성경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48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가 말한 바

49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50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스데반은 이사야 66장 1~2절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를 인용하여 적용하고있다.

성전되신 그리스도를 위한 비약적인 논리를 전개하지만 결코 괘변이나 억지 주장이 아니라 철저하게 성경을 근거로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유대 성직자들은 성경을 보더라도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본다.

성경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될 때 진리가 상실될 수 밖에 없다.

성경이 어떠한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될 때 제대로된 해석은 불가능하다.

성령은 신자에게 성경 자체를 증거해주고있다.


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담대하게 하나님의 진리를 전한다.

스데반은 기회주의적이지도 않았고, 타협 하지도 않았으며, 이에 따른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성령의 함께 하심은 지식과 능력을 넘어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을 주신다.

결국 그리스도를 거부하였던 유대 지도자들은 출애굽 후에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멸망한 이스라엘과 한 가지라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유대적 이스라엘이 참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라고 말하지만 성령에 의하지 않는 인간은 모두 다 멸망할 수 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참된 하나님 나라 백성은 오직 성령이 내주하시는 이들이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성령이 친히 내주하셔서 함께 하심을 증명해주시지는 않는다.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인정하지 않기에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인본주의적이고 유대적인 나라일 뿐이다.


52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심문하는 이들의 잘못을 정확하게 집어내고있다.

스데반의 말을 듣고있는 이들은 두 가지 가운데 한 가지를 선택 할 수 밖에 없다.

마음에 찔려서 회개하고 그리스도인이 되거나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자가 되거나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여야만 한다.

하지만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이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스데반을 공격한다.

인간에게 중립지대란 없다.

어느 누구나 두 가지 가운데 한 가지를 선택하여야 한다.



53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한다.

이방인인 인간에게도 마음에 새겨진 율법, 즉 자연법이 있다.

인간은 누구나 자연법 앞에서 결단을 요구하는 상황들을 접하게 되어있다.

무엇을 선택 할 것인가는 결국 인간의 몫이다.

posted by Wonho Kim
:
사도행전 2018. 1. 14. 23:58

사도행전 7장 17~36절 말씀 묵상


17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하여 많아졌더니

약속하신 때가 가까왔을 때의 상황은 오히려 절망적으로 치닫는다.

흔히들 무슨 좋은 일이 있으면 사단이 방해한다고 사단과의 싸움에 집중하지만 정작 하나님의 관심은 택한 자들에 대한 거룩과 성결에 있다.

베레아 아카데미나 축귀 사역을 하는 이들이나 세대주의자들은 많이들 사단의 활동에 관심을 기울이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이 다듬어지는 시간인 줄을 깨닫지 못한다.

하나님은 성도를 사용하시기 전에 악을 사용하셔서라도 성도를 깨끗하게 하는 작업을 하시기에 눈 앞에 닥친 어려운 상황에서는 일차적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 앞에서 정금과 같이 깨끗하게 되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하여야한다.



18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애굽 왕위에 오르매

누구나 상황의 혜택을 받는 이들은 자신을 알아주지 못하는 상황에 부딪히게  마련이다.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셉의 이름 덕을 톡톡히 보아왔지만 이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기보다는 세상에 의존하는 삶을 살아왔다.

세상에 의지하는 이들은 세상이 등을 돌릴 때 시험에 들 수 있기에 항상 주를 의지하는 삶을 살아야한다.

하지만 인간은,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기에,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강력하신 간섭이 없이는 적극적으로 세상을 선택하게 되어있다.


19  그가 우리 족속에게 교활한 방법을 써서 조상들을 괴롭게 하여 그 어린 아이들을 내버려 살지 못하게 하려 할새

사단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길 원하지 않아서 끊임없이 방해를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단의 속성을 역이용하셔서 자신의 뜻을 이루신다.

하지만 인간으로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알기 어렵기에 위기의 상황일수록 더욱 기도하면서 믿음 가운데 하나님을 의존하는 삶을 살아야한다.

현재의 대한민국의 긴박한 상황은 김정은이라는 악한 자의 계략을 역이용하셔서  대한민국을 향한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 이루어지는 시간이기에 성도들은 더욱 깨어서, 시험에 들지 않도록,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여야 할 때이다.


20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의 아버지의 집에서 석 달 동안 길리더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때가 가까이 오면서 하나님의 본격적인 개입이 시작된다.

하지만 모세가 태어난 후에 모세는 80세가 지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셨다.

80년이라는 시간은 인간이 한평생을 살아야하는 결코 짧지 않은 기간임에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왔기에 출애굽을 인도할 모세를 태어나게하셨다.

인간이 생각하는 가까움과 하나님께서 보시는 가까움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21  버려진 후에 바로의 딸이 그를 데려다가 자기 아들로 기르매

물에 빠진 요나를 위해서 물고기를 준비하셨듯이 버려진 모세를 위해서 바로의 딸을 준비하시는 하나님….

신자는 비록 자신이 사회로부터 버림받고, 동료로부터 버림을 받고, 심지어는 사랑하는 교회의 성도들에게 버림을 받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계획하신 택한 자의 삶을 위해서 더 좋은 환경을 예비해주신다.

신자는 어떠한 불행한 환경에서도 절망하지 말아야하며, 자신의 삶 가운데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경험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져가야한다.

역경 가운데 택하는 자살의 문제는 자신의 생명에 대한 살인보다도 하나님에 대한 불신에 더욱 큰 죄가 있음을 알아야한다.

자살을 생각하여야 할 정도의 역경이라면 물에 빠진 요나만큼이나 하나님을 경험 할 수 있는 놀라운 시간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22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

모세가 바로의 궁에서 지혜를 배웠던 시간은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장  괴롭히던 악한 시간이었다.

모세는 자신의 백성들이 가장 괴로웠던 시간에 가장 편안한 시간을 보내었다.

모세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할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악한 환경 가운데에서라도 하나님의 일반 은총에 의한 긍휼을 베푸시는 것과 같이 성도는 세상 학문에 대하여 배타적인 태도를 취해서는 않된다.

어떤 이들은 세상에서 배울 것이 없다고 일반 학문에 대하여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지만 일반 학문 가운데에는 하나님의 자연법이 가장 잘 나타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성도는 세상이 악하다는 이분법적인 이원론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연법에 의해서 운영되는 일반 은총의 나라와 하나님의 특별 계시에 의해서 운영되는 특별 은총의 두 나라에서 살고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어느 목사와 같이 사회법 위에 하나님의 영적 제사법이 있다고 사회법을 어겨도 된다는 몰상식의 행동을 하여서는 안될 것이다.



23  나이가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

나이 사십이면 가장 혈기가 왕성한 때이다.

가장 자신이 있는 나이에 가장 조심하여야한다.

사람들은 종종 40대에 들어서서 인생의 하프타임을 경험하게된다.

하프타임은 인생이 좌절되는 시간이다.

인생을 하프타임을 거치고나서 진정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아가게도

어있다.


24  한 사람이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 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 죽이니라

세상에는 정의의 사도처럼 활동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

이들의 행동 원리는 지극히 인간적이다.

블의를 참지 못한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다 옳은 일일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는 오히려 악이 될 수도 있다.

하나님 앞에서 선한 일은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구약에서의 사건들을 인간적인 관점에서 해석할 때 어떤 때는 하나님이 악한 분이 되실 수도 있다.

신자에게 선은 정의의 사도가 되기보다는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25  그는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통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더라

모세의 생각의 미숙함이다.

젊은 이들에게서 종종 발견 할 수 있는 현상이다.

문제는 시간과 상황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자신의 힘으로 하려고했다는 것이다.

신앙 생활하면서 주위에서 알아주지 않고 하나님께서도 함께하시지 않는다는 생각에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낙담되는 시간을 보내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정작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힘이 빠지기를 기다리시고 계신다.

성도는 자신의 힘으로 무엇인가 해보려고 하면서 잘 안될 때는 하나님을 원망하지만, 낙담의 과정을 통하여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하는 성숙된  시간이 될 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26  이튿날 이스라엘 사람끼리 싸울 때에 모세가 와서 화해시키려 하여 이르되 너희는 형제인데 어찌 서로 해치느냐 하니

모세의 생각은 단편적이다.

모세는 단순한 몇 가지 논리를 모든 상황에 적용시키려고한다.

나이든 사람들은 온갖 경험을 통하여 삶의 지혜가 많이 있지만 젊은 이들은 짧은 연륜으로 인하여 상황을 판단하는 논리가 단순할 수 밖에 없다.

특히 현대 사회는 젊은 이들이 자신들의 단편적인 생각으로 연륜이 있으신 분들을 쉽게 판단해버린다.

이는  아담의 후손인 죄인이 자신들의 단편적인 논리로 하나님을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다.

27  그 동무를 해치는 사람이 모세를 밀어뜨려 이르되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

자신의 논리를 모든 이들에게 적용시킬 수는 없다.

하나님의 법이 상실될 사회일수록 각자 자신의 법대로 살아가게된다.

고통 가운데 불의가 팽배했던 애굽의 상황은 심판을 앞둔 마지막 시대의 상황적 특징을 보여준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특징 가운데 한 가지는, 각자 자신이 진리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절대적 진리가 상실되어가는 시대일수록 심판이 가까이 왔음을 볼 수 있다.



28  네가 어제는 애굽 사람을 죽임과 같이 또 나를 죽이려느냐 하니

세상에는 비밀이 없다.

특히 마지막 때 일수록 다른 이들의 잘못을 노출시킨다.

온갖 언론과 SNS등은 다른 이들의 좋은 점보다는 부정적인 가십거리를 논한다.

부정적 정보들은 서로를 낙담시킨다.

마지막 때가 가까올 수록 사랑이 식어지는 이유이다.

하나님의 형상에는 삼위 하나님의 완전한 공동체적 형상이 담겨있지만 인간의 타락과 더불어 시작된 공동체의 파괴는 극단적으로 서로에 대한 공격으로 나타난다.



29  모세가 이 말 때문에 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거기서 아들 둘을 낳으니라

공동체로부터의 이탈은 자신의 선택과 관계없이 불가피한 경우가 있다.

공동체 내부에서 서로에 대한 공격이 있을 때 같은 공동체에서 지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교회 공동체에서의 분열은 종종 성도를 교회 바깥으로 내어 쫒는다.

고통 가운데 있던 애굽의 상황이 모세를 내어쫒았듯이, 진리가 없어질수록 사랑은 식어지고 분열은 증가된다.

이는 현시대에 가나안 성도가 증가하는 주요 요인이기도 하다.

서로에 대한 사랑과 용서와 이해가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때이다.



30  사십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 산 광야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사십이라는 숫자는 상황의 준비를 위해서 더 이상의 숫자를 요구하지 않는 상황의 가득함을 뜻한다.

가나안 입성을 준비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사십 년동안 애굽의 잔재를 털어냈어야했듯이, 모세는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광야에서 사십 년동안 왕족의 잔재를 털어내야만 했다.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을 위해서 사십 일 동안 광야에서 충만하게 금식을 하셨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를 예비하시기 위해서 사십 일 동안 충만하게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일을 말씀하셨다.

모세가 사십 년동안 자신의 혈기를 내어버렸을 때 보았던 가시나무 떨기는 불이 붙었지만 타지 않았다.

마치 알콜 램프의 심지가 알콜을 태우면 심지가 타지 않지만 알콜이 없으면 심지가 타듯이, 사십년 전의 모세는 자신을 태우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사십년을 준비하고서 모세는 자신을 태우지 않는 대신에 하나님을 태우는 법을 배우게 된다.

광야에서의 모세를 통해서 진정으로 사는 길은 자신이 죽는 것임을 보게된다.

신자는 육적인 자아를 죽일 때 진정으로 하나님의 심지가 될 수가 있다.



31  모세가 그 광경을 보고 놀랍게 여겨 알아보려고 가까이 가니 주의 소리가 있어

타지 않는 떨기는 놀랄 수 밖에 없는 현상이다.

모세는 이러한 놀라움을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면서 사십 년 동안 경험하게 된다.

진정으로 육적인 자아가 죽은 성도는 모세와 같이 남아있는 인생을 타지 않는 떨기와 같이 자신을 태우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놀라운 삶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32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신대 모세가 무서워 감히 바라보지 못하더라

무서웠던 하나님이 가장 친근한 하나님으로 바뀌게된다.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친근하게 다가갈 수는 없다.

인간적인 혈기가 다 빠지고서야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다가오셔서 모세와 가장 가까이계신 분이 되셨다.

신자는 인간적인 힘이 다 빠질 때까지 하나님을 두려워 할 수 밖에 없지만 혈기가 다 빠질 때 하나님의 온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33  주께서 이르시되 네 발의 신을 벗으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인간이 버려지거나 떠나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영역도 하나님이 주관하신다.

소외되었다거나 버려졌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 경험할 수 있다.

비록 상황 가운데서는 사회에서나 교회에서 아웃사이더로 있다고 하더라도 그곳이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있는 곳임을 생각하며 좌절하지 말아야한다.



34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음을 내가 확실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그들을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이제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톰 라이트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며 홍해를 건너는 출애굽을 구원으로 보았기에,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며, 이들의 가나안에서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무르는 삶이라고 규정한다.

이러한 논리라면 새관점에서 보는 보냄받은 구원자는 모세가 되어야한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은, 창세기 1~3장에서의 첫 번째 아담이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과 같이,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로, 새 언약의 주체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 안에서, 참이스라엘을 예표하는  모형이 되어야한다.

유대적 이스라엘은 새관점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 나라의 실체적 백성이 아니라 모형적 백성임을 인식하여야한다.



35  그들의 말이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 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으로 관리와 속량하는 자로서 보내셨으니

세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사단은 하나님의 사람을 거부하지만 하나님께서 손수 세우실 때는 아무도 이를 막을 수가 없다.

세움을 받고자 하는 이는 스스로 세움을 받으려고 하지말고 하나님께로부터 세움을 받아야한다.

특히 교회에서 세움을 받으려는 이들은, 젊었을 때의 모세와 같이, 인간적인 방법으로 세움을 받으려고해서는 안된다.


36  이 사람이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사십 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느니라

모세의 성공은 성공이 아니다.

인간에게 성공이라는 것은 없다.

오직 하나님의 쓰임을 받았을 뿐이며, 인간에게는 아무런 공로도 없다.

성공은 목적하는 바를 이룬다는 개념으로 지극히 인간적인 개념이다.

어떤 성도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라는 책을 몇 번씩 읽으면서 이를 신앙생활에 적용하는 이들도 있다.

신자가 성공하는 삶은 살기 위해서는 모세와 같이 광야에서 자신의 인간적 혈기를 완전히 제거하여야만 할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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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18. 1. 14. 01:48

사도행전 7장 1-16절 말씀 묵상


1  대제사장이 이르되 이것이 사실이냐
2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대제사장 앞에서 스데반은 자신의 변론을 듣는 이들에게 부형이라는 말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서 같은 유대인으로서  이스라엘 민족 안에서의 동질감을 근거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스데반이 아브라함부터 논술하고 있는 것은 듣는 이들이 동일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스데반이 우리 이방인들에게 이야기를 하였다면 이러한 방식이 아니라 창세기의 아담의 창조로 부터 시작하였을 것이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성경이 말하는 복음을 아브라함 이후로 부터 한정시키면 안된다는 것이다.

스데반은 복음이 아브라함 이후로부터 시작되었음을 말하기 위해서 아브라함부터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새관점주의자들은 스데반의 논술을 근거로하여 복음을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새관점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담의 범죄에 대하여 아브라함과의 약속을 통하여 일단 해결하신 것으로 간주하지만 스데반은 이러한 의도로 아브라함으로부터 진술하고있는 것은 아니다.


3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하나님의 복음은 거룩, 즉 떠남과 분리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지역은 떠났어도 그의 아버지로 인하여 가나안까지는 가지를 못하였다.

신자들은 자신이 속해있는 가족과 친인척, 그리고 학연과 지연등으로 인하여  발목을 잡힐 경우가 종종 있다.

특히 교회는 혈연, 학연, 지연에 의존하지 말아야한다.


4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인도된 것은 아브라함이 주체가 아닌 하나님이 주체가 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상황과 관계없이 무조건 길을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상황 속에서 자연스럽게 인도하신다.

자연법도 하나님의 법이지만 하나님의 특별법은 자연법을 일방적으로 무시하시지는 않으신다.

사회법을 어기면서까지 건축된 S교회의 건물에 대하여 담임목사가 사회법 위에 영적 제사법이 있다고 변명하는 것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자기 속에 갇혀 있는 목회자들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부끄러운 모습이다.

신자들은 자신의 마음으로 자신의 길을 계획하더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은 사회의 수치가 되는 방식으로 인도하시지는 읺으신다.


5  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 만한 땅도 유업으로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그와 그의 후손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하나님의 약속은 논리적으로 타당성이 있다고 설득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불신자들에게 전도할 때 믿음을 논리로 설득할 수는 없는 것이다.

현대문명은 논리를 근거로하는 과학시대이지만, 성경을 과학적인 논리로 접근함으로서 믿음을 산출해 낼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의 영혼과 생명은 그 사람을 해부한다고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방식으로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의 역사는 깊은 밤중이 지난 후에 오는 새벽녘의 빛과 같다.


6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후손이 다른 땅에서 나그네가 되리니 그 땅 사람들이 종으로 삼아 사백 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후손을 바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자리잡게하지 않으시고 애굽에서의 종살이 과정을 거치게 하셨을까?

이는 왜 아담 가운데 인류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바로 에덴에서 인간을 축복하셔서 천국을 만드시지 않으시고 타락의 과정을 통하여 아담의 후손을 애굽의 종과 같은 생활을 하게 하시는지에 대한 질문과 연관성이 있다.

이는 또한 가나안 땅에 자리잡은 이스라엘을 바로 축복하시고서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시키시지 않으시고 바벨론 포로의 과정을 거치면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드셨어야만 하셨는지에 대한 질문과 연결시킬 수 있다.

이 모든 것에 대한 답은 결국 모든 창조 세계를 그리스도 예수께 귀속시키시기 위한 창세 전 하나님의 구속 언약 가운데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7  또 이르시되 종 삼는 나라를 내가 심판하리니 그 후에 그들이 나와서 이 곳에서 나를 섬기리라 하시고

왜 종 삼는 나라를 심판하실까?

이는 타락한 아담의 후손을 종으로 삼았던 사단의 세력에 대한 심판을 예고하셨던 것이다.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많이 있겠지만 인간적인 관점은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관점이다.

애굽의 심판 후에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겼던 것은 궁극적으로 사단을 심판하신 그리스도를 섬기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을 예표하고 있는 것이다.

가나안에서의 실패는, 에덴에서의 실패와 마찬가지로,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인간의 노력으로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오순절 성령의 역사는 에덴에서의 실패와 가나안에서의 실패를 통하여 인간이 성령에 의지하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며, 스데반은 이를 직접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스데반과 같이 모함을 당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톰 라이트는, 유대적 이스라엘이 자신의 힘으로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으며, 예수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공해주신 분이라고 해석하며, 사도행전은 포로에서 해방된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님 나라 운동을 위한 역사였다고 자의적인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이다.



8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그가 이삭을 낳아 여드레 만에 할례를 행하고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우리 열두 조상을 낳으니라

아브라함에게 할례의 언약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인간이 타락의 구렁텅이에서 빠져 나올 수 없음을 보여주심으로서 하나님의 은혜의 징표로 할례를 행하게 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에 참여된 것이며, 오순절 성령의 역사는 이 땅에 은혜에 의한 새창조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이다.

참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성령의 새창조의 산물이며, 톰 라이트가 말하는 유대적 하나님 나라는 오순절 성령의 역사 이전의 이스라엘로서, 단지 하나님 나라를 예표하는 모형일 뿐이며, 실체가 아니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일반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와는 구별되어야한다.

새관점이 중심이 되어 벌이고있는 유대적 하나님 나라 운동은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근거로하는 하나님 나라 복음과는 다른 것이다.

복음은 행동방식에 의하여 규정되는 운동이 아니다.


9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판 이들은 마치 에덴에서 하와를 유혹하여 시험에 들게한 뱀과 같은 존재이다.

육체적 인간으로서의 아브라함 자손은 사단의 종노릇을 할 수 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참된 아브라함의 자손은 유대적 이스라엘이 아니라 믿음을 통하여 참이스라엘되신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이다.


10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그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통치자로 세웠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행적을 통하여 구원자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계신다.


11  그 때에 애굽과 가나안 온 땅에 흉년이 들어 큰 환난이 있을새 우리 조상들이 양식이 없는지라

하나님께서는 환란 가운데 길을 인도하신다.

인간은 완악한 마음으로 인하여 일단 육체적 충족이 있으면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가 어렵다.

성도의 삶 가운데 걸어야만 하는 수동적인 길은 종종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여야만 하며, 결코 상황에 대한 부정적 사고에 물드는 냉소주의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12  야곱이 애굽에 곡식 있다는 말을 듣고 먼저 우리 조상들을 보내고
13  또 재차 보내매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알려지게 되고 또 요셉의 친족이 바로에게 드러나게 되니라

하나님 안에 있는 자는 결국 하나님의 계획하심 가운데 인도를 받는다.

지혜자는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능동적으로 다가갈 필요가 있다.


14  요셉이 사람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 야곱과 온 친족 일흔다섯 사람을 청하였더니

공동체적 구원은 한 개인을 시작으로 이루어진다.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공동체적인 타락을 경험하였듯이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라는 공동체적 구원이 이루어진다.

신앙 생활은 항상 자신에 의하여 미치게 될 공동체적 영향력을 생각하여야만 한다.


15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 자기와 우리 조상들이 거기서 죽고
16  세겜으로 옮겨져 아브라함이 세겜 하몰의 자손에게서 은으로 값 주고 산 무덤에 장사되니라

인간은 결국에는 세상에서 죽지만 세상에서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결국 하나님의 자손은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야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원한 가나안 땅인 새 하늘과 새 땅으로 가게될 것을 말해주고있다.


(나가는 말)

스데반은 변론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의 무궁하심을 드러낸다.

억울함에 대한 정면 공격은 자신을 변론하기 위한 것이지만 스데반은 자신을 변론하기 위한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

자신을 위한 변론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이들은 결과적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종종 페북에서 자신을 변론하기에 바쁜 이들을 볼 때 오히려 그들의 미숙함을 보게된다.

신자는 대화 중심을 오직 하나님의 영광에 맞출 때, 스데반의 경우와 같이, 자신의 진실성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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