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018. 1. 18. 21:45

사도행전 8장 14~25절 말씀 묵상


14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하나님의 도성으로서의 성전의 확장)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빋았다는 의미를  처음 아담이 에덴에서 실패하였던 사역과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사역과의 비교를 통해서 생각해보고자 한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루어질 하늘의 도성으로서의 하늘의 예루살렘은 새예루살렘으로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이 거할 종말론적인 장소다.

처음 아담에게 주어져던 에덴에서의 목표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을 통하여 종말론적인 안식이 예정되어있었다.

하늘의 도성으로서의 하늘의 예루살렘은 에덴에서 예정되었던 종말론적인 안식의 장소와 일치된다.

이 땅에서의 예루살렘은 최종적인 하늘의 예루살렘에 대한 모형이다.

이 땅의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으로서 하나님의 임재가 계신 하나님의 도성이다.

처음 에덴도 역시 하나님의 임재가 있던 성전이었으며, 궁극적으로 완성될 하늘의 도성의 모형이었다.

에덴에서 아담에게 주어졌던 직책은 제사장으로서, 선지자로서, 왕으로서의 역할이었으며, 이는 그리스도의 3중직을 예표하는 것이었다.

에덴에서 아담에게 주어졌던 창세기 1장 28절의 명령, 즉 통치 명령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함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에덴 바깥의 모든 피조세계에 충만케 하는 것으로서, 장차 그리스도가 이루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예표하는 것이었다.

궁극적으로 에덴에서 주어졌던 하나님의 형상을 통하여 하나님의 왕권을 이 땅에 선포하는 것이었지만,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한 선악과 범죄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선포를 실현되지 못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두번째 아담으로서 처음 아담이 실패한 사역을 완전한 순종을 통하여 완성 시키셨다.

그리스도께서 직접 성전이 되심으로 그리스도께서 새예루살렘을 이 땅에서 시작하신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손수 성전이 되셔서 성도들과 연합된 한 몸으로 세우시는 하늘의 도성의 모형이다.

사도들이 핍박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을 지켰던 것은 지상에서의 예루살렘은 궁극적으로 하늘에서 완성될 도성이었기 때문이었다.

사마리아 성에 세례받는 자들이 더하여 지는 것은, 처음 아담이 순종을 통하여 확장 시켜나아가야 했던 영역을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것이며, 아담에게 주어졌던 통치 명령을 대체하는 지상 명령, 즉 대위임령(마28:19-20)으로 이 땅에서 실행되고있는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사마리아로 내려간 것은, 성전의 확장을 의미하며, 이는 에덴에서 실패하였던 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성취되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에덴 바깥이 에덴의 확장이되어야 했듯이 사마리아 성에서의 복음화는 새예루살렘의 확장을 보여주는 것이다.

새예루살렘은 그리스도께서 손수 성전이 되셨기에 더 이상 이 땅에서 건물로서의 성전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지상의 예루살렘 또한 영적인 새예루살렘의 실현으로 인하여 더 이상 유형적인 성전으로서의 의미가 없어졌으며, 이는 후에 로마 군인에 의하여 황폐하게된다.



15  그들이 내려가서 그들을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에덴의 확장은 성령의 창조 사역에 의한 것이다.

태초에 혼돈 위에 운행하셨던 성령의 창조 사역은 노아 홍수를 말리셨고,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셨으며, 이제 새예루살렘의 확장에 주체가 되셔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창조 사역을 직접 수행하신다.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 성도들에게 성령을 받게 한 것은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 성령 사역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었다.



16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더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영역만이 하나님 나라이다.

물세례는 사람이 행할 수 있어도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될 수 없다.

하나님 나라의 주체는 삼위 하나님이시며, 사람이 주체가 될 수 없다.

요즘 하나님 나라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교회 개혁을 실행하는 이들이 있지만, 운동이라는 개념은 사람이 주체가 되는 인본주의적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사람이 주체가 되는 운동으로 확장될 수는 없다.



17  이에 두 사도가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물 세례는 인간의 의지로부터 출발되어 행하여지는 것이지만 성령 세례는 하나님으로 부터 말미암는 것이다.

외적인 제도하에 있는 교회에서 성령 세례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을 내리기는 쉽지가 없다.

제도적 교회는 외적인 세례, 즉 물 세례만으로 교회를 구성해야하는 한계가 있다.

진정한 교회는 성령 세례를 받은 이들로 구성된 영적인 교회가 참된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제도적 교회가 우선시되는 상황에서는, 극단적인 경우지만, 로마카톨릭과 같은 권위 조직이 나타날 수도 있다.

교회의 대형화를 추구하는 한국 교회의 취약점은 성령의 역사가 없이 인간의 욕심으로만 확장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성령의 사역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성령은 창조주이시다.

사마리아 성 사람들에게 임한 성령은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과 같이 사람들을 통하여 역사하신다.

성도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으로서 아래로부터가 아닌 위로부터의 열매이다.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 임한 하늘의 영역과 땅의 영역이 만남으로서 이루어지는 나라로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통한 연합과 성령의 창조 사역을 통한 새창조로 이루어진다.

유대적 이스라엘은 하나님 나라의 모형일 뿐 하나님 나라는 아니다.

진정한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서의 거룩의 회복이며,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을 통하여 이루어지며, 이는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과 성령의 새 창조에 의한 것이기에 그리스도의 성육신 전에는 형성될 수 없는 나라이다.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유대주의적 하나님 나라는 오순절 성령의 사역과는 관계가 없는 유대주의적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은 창조 사역의 주체이시며 성령께서 사람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에 있다.

아담에 의하여 일그러지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하나님의 형상이 성령의 역사에 의하여 회복이 되었으며, 성도 가운데 역사하심으로서 성도로하여금 자신이 하나님 나라에 속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며 성령이 이를 보증하신다는 것을 확신하게 하신다.

사마리아 성에 임하신 성령은 성도들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시면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아가신다.



18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19  이르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20  베드로가 이르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선물은 공로를 기초로하지 않는다.

새언약을 통하여 임하신 성령은 오직 은혜를 근거로 선물을 주신다.

복음에 공로의 개념이 추가된다면 이는 시몬이 하나님의 선물을 돈을 주고 사려는 것과 마찬가지 개념일 것이다.

한 때 톰 라이트의 새관점을 가장 앞장서서 비판하였던 김세윤 교수는 최근에 자신의 강의록을 정리한 “칭의와 성화"를 통하여 새관점을 어느 정도 수용하면서  칭의 개념에 공로적 개념을 추가시켰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유대적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었으며, 율법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기 위한 수단이라는 언약적 율법주의, 혹은 신율주의 개념을 주장함으로서 칭의에 공로적 개념을 추가하였다.

김세윤 교수도 이러한 부분을 어느 정도 수용함으로서 성도의 의의 근거를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하여 이루신 공로적 의" 대신에 “하나님의 의" 즉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불트만 학파의 케제만이 주장한 개념을 수용한다.

이는 성도의 칭의의 근거를 그리스도에서 성부 하나님으로 옮긴 것이다.

이는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의 주장과 동일한 것이며, 새관점과 동일하게 최종적 칭의의 근거를 인간의 행위에 두고 있다.

새관점은 자신들이 은혜를 근거로한 신학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은혜에 인간의 공로를 추가하는 공로주의적 신학이다.

시몬이 하나님의 선물을 돈을 주고 사려했던 행위는 인간이 하나님의 선물, 즉 종말론적 안식과 영원한 축복에 참여되는 안식론적 구원을 행위라는 공로로 취하려고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21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22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시몬이 회개하고 기도한다고 하더라도 사함을 결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알미니안주의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의한 구원에의 참여는 최종적으로 사람에게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이를 결정할만한 권한과 능력이 없다.

오직 결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23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

시몬이 믿고 세례를 받았다고하더라도 그가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다는 것은 일단 신앙의 영역에 들어왔다고하더라도 자기 욕심에 끌려서 행동하는 잘못을 보이고 있다.

자기 욕심이 믿음을 넘어설 때 자신뿐만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상당한 피해를 주게된다.

더군다나 목회자가 성도들의 욕심을 부추기면서 열심을 유도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방법을 쓰는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목회자가 직업을 목적으로 신학을 하고서 교회를 자신의 성공의 수단과 발판으로 삼을 경우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이러한 경우가 너무 많다.

이들에게 성도는 유물론적 가치에 의하여 평가되는 존재일 뿐이다.

이는 매우 불행한 일이지만 이러한 일이 보편화되고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24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위하여 주께 기도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내게 임하지 않게 하소서 하니라

기도는 일차적으로 자신이 해야한다.

기도는 사람의 필요에 의한 것보다는 일차적으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다.

기도는 필요한 것을 채움받기 위한 수단이기 이전에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회복에 있다.

성도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회복된다.

시몬은 자신이 기도를 해야 할 상황이고, 베드로가 시몬에게 기도할 것을 요구하였는데도, 대신 기도할 것을 부탁한다.

요즘도 기도를 부탁하는 일이 매우 일반화되어있지만, 이러한 기도의 요청에 의한 응답은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성도는 기도 요청을 하기에 앞서서 반드시 자신이 먼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한다.


25  두 사도가 주의 말씀을 증언하여 말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갈새 사마리아인의 여러 마을에서 복음을 전하니라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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