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018. 1. 19. 23:07

사도행전 8장 26~40절 말씀 묵상



26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빌립의 행보는 철저하게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한 것이었다.

이는 성령께서 이 땅에서의 새창조의 역사를 주관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준다.

에디오피아 내시를 예루살렘에서 만날 수도 있었지만 박해 가운데 있었던 예루살렘보다는 광야에서 만나게하신 것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과는 구별된 광야에서 하나님을 예배하였던 것을 연상케한다.

더 이상 예루살렘은 축복의 장소가 아니었으며, 바로의 박해 가운데 있었던 애굽과 같이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음을 보여준다.

광야는 아무 것도 없는 무(ex nihilo)의 장소로서 성령의 창조 사역은 더 이상 유대적 이스라엘을 떠난 새로운 창조를 의미하였다.

성령의 새창조에 의한 역사가 유대적 이스라엘의 연장 선상에 있었다면, 성령은 예루살렘을 축복의 장소로 남겨놓으셨을 것이다.

이는 톰 라이트가 주장하듯이 사도행전의 역사가 이스라엘 하나님 백성의 이야기가 목적지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27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복음 전파는 선교사가 직접 전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가까이 있는 그 지역 사람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오순절 성령의 강림시에도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다가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각국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도록 하여듯이 성령께서는 각 나라에 복음이 전파되도록 적절하게 환경을 이용하시기도 한다.

후에 바울이 로마에 복음을 전했던 것도 유럽의 모든 나라들이 로마를 통하고있었던 것을 사용한 것이었다.

이러한 방법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임한 복음을 통하여 상황이 획기적으로 급진전되고있음을 보여준다.

현 시대는 혈통에 의한 민족주의가 붕괴되고있는 시대이다.

글로벌 경제는 세계 각국의 사람들과의 교류를 촉진시킨다.

이러한 교류는 복음 전파를 위한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다문화 가정들을 통하여 이슬람이 들어오기도 하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한다.

유럽에 밀려온 난민들로 인하여 기독교가 위협을 받기도하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무슬림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세계 각국이 민족주의의 틀에서 벗어나 서로 교류하는 것은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됨으로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대하여 결산하실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 수 있다.

사마리아를 넘어서 에디오피아로까지 전파된 복음이 이제는 소수 부족을 제외하고는 저의 전파가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유대적 이스라엘이 눈에 보이는 외적인 성전으로 인하여 자신의 세계 안에만 머물렀던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눈에 보이는 성전은 사람을 장소에 제한시키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되신 그리스도로 인하여 성도의 몸이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 됨으로서 성도는 각 족속과 불신자들에게 직접 찾아가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할 수 있게 된 것이다.



28  돌아가는데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성령께서는 각 사람의 조그마한 행동과 생각까지도 다 아시고 계신다.

내시가 이사야서를 읽는 것을 아셨지만, 내시가 이사야서를 읽게끔 마음의 동기를 부여하시기도 하신다.

성령께서는 에디오피아에서 나름대로 능력이 있는 자를 사용하셔서 강권적으로 역사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빌립과 내시의 관계처럼 성령은 성도의 교제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여 가신다.

성도의 교제는 자신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감동을 서로에게 나누어야한다.

성도가 그냥 만나서 세상 이야기나 하는 교제는 별로 의미가 없으며 공기만 진동시킬 뿐이다.

성도가 세상이야기를 하더라도 세상 이야기는 말씀으로 귀결되어야만 한다.



29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선지자는 사도 시대에도 있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받아서 전하였다.

정경이 갖추어지지 않은 사도 시대에는 성령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경우가 있지만, 성경이 갖추어진 지금은 성령께서 직접말씀하시는 경우가 드물다.

성령의 직통 계시를 받는다고하는이들은 대부분 이단들이다.

지금 시대에도 성령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에 집중한다면 사람들은 성경을 더 이상 보지 않게 될 것이다.

성령께서 빌립 집사에게 직접 말씀하신 것은 사도행전이 성령의 창조 사역임을 밝혀주는 것이다.

성령의 직접적 사역은 베드로나 요한과 같은 사도들만이 아니라 빌립과 같은 집사에게도 직접 관여하신 것을 볼 수 있다.



30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냐
31  대답하되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32  읽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33  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34  그 내시가 빌립에게 말하되 청컨대 내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 자기를 가리킴이냐 타인을 가리킴이냐

내시가 복음을 받아들인 것은 관심으로부터 출발되었다.

관심은 문제 해결의 시작이다.

내시가 관심을 갖는 것도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이지만 보편적인 관점에서 볼 때 관심은 문제 해결의 시작이 된다.

현대 문명의 발전은 하나님께 대한 인간들의 관심을 빼앗아 감으로서, 인간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죄성에 더욱 가둬놓는다.

스마트폰이 제공해주는 대부분의 정보들은 사람들의 관심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져가게한다.

현대 문명은 인간이 보기에는 발전이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아마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죄성을 고착화시키는 과정에 불과할 것이다.

요즘 젊은 이들에게 복음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면 일단 관심이 없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출석교인 수의 급속한 감소의 한 가지 원인은 현대 문명이 제공해 주는 인간의 편리함이 교회와 진리에 대한 관심을 빼앗아 갔기 때문이다.

문명의 급속한 발전은 오히려 인간의 죄성을 활성화시키면서 심판의 시기만 앞당길 뿐이다.  


35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가르침의 모든 것은 그리스도께로 귀결되어야한다.

복음은 그리스도로부터 인한것이다.

하지만 교회에서조차 그리스도의 복음이 소외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많은 설교가 교훈이나 윤리 도덕으로 바뀌고있다.

교회가 생명력이 상실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36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짧은 시간에 결실을 볼 수 있었다.

마음을 준비시키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구원을 이루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세례는 성령의 역사가 앞선 것이기에 인간의 의지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먼저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맺으시고 이에 대한 응답으로 아브라함이 할례를 행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역사가 먼저 있었기에 이에 대한 응답으로 세례를 받은 것이다.

모든 은혜의 과정은 인간의 행위로부터 시작된 공로의 개념이 적용될 수 없다.

성령의 간섭하심이 있었기에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내시의 행위와 같이, 선물을 받기 위해서 손을 내미는 행위조차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37  (없음)
38  이에 명하여 수레를 멈추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베풀고

오늘날 집사가 세례를 베푼다면 많은 비난에 직면했을 것이다.

사도들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전념하고자 구제하는 일등을 위하여 집사를 세웠는데 실제 빌립 집사의 사역은 사도들의 사역과 다를 바가 없었다.

요즘의 교회 직책을 사도시대에서 인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도행전의 예를 오늘에 그대로 적용한다면 집사도 세례를 줄 수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이를 잘못 적용하면 교회의 질서를 위한 직분이 오히려 혼란만 가중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39  둘이 물에서 올라올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사역자는 자신의 성도를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도로 만들어야한다.

성도들도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서 다른 교회의 성도들과 교제할 수 있다.

하지만 자기 교회의 울타리를 벗어난 사람을 외인처럼 대하는 분위기를 넘어서는 것은 쉽지가 않다.

물론 신천지같은 이단을 경개해야겠지만, 자기 교회 바깥에 있는 성도들과 교제를 단절하는 교회당 중심의 신앙을 넘어설 필요가 있다.


40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



(인도받았다는 간증에 대하여)

빌립과 내시의 움직임에는 성령의 강력한 간섭하심이 있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언 16:9)

결론적으로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없다.

성도는 상황 가운데 일어나는 일들이 하나님의 인도인지 사단의 간섭함인지 분별할 필요가 있다.

불신자들도 나름대로 자신들이 경험한 일에 대하여 간증을 하기도한다.

세상 사람들이 흔히들 하는 말 가운데 “귀신같이 안다"라는 말이있다.

일이 너무나도 잘풀리고 마음을 다 빼았겨서 “이건 하나님께서 나를 축복해주실려고 인도하는 거다”고 간증을 하며 기쁨 마음과 더불어 모든 마음이 빼앗겨서 올인을 하기도하지만 결과는 참담한 경우가 있다.

축복에 대한 간증도 넘쳐나지만 대부분이 세상적인 관점이고 이를 성령의 인도라고 보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모든 인간은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기에, 하나님의 특별 은혜가 아니고서는 사람은 자신의 욕심에 이끌려서 행동하게되어있으며, 사단은 이를 이용하여 사람들을 구렁텅이에 빠뜨리곤한다.

종교개혁자들은 인간의 의지를 노예 의지라고하면서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말하고있다.

이는 인간에게는 사단에게서 자유할 수 있는 영적인 분별력과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종종 자신의 행동에 앞서는 초자연적인 역사를 보고서 초자연적인 역사에 놀라곤 하지만 성도는 이러한 상황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사단으로부터 온 것인지 분별해야만 한다.

강남에 값비싼 예배당을 지어놓고서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간증하는 것을 보면 성도들이라고 할지라도 얼마나 영적인 분별력이 없는지를 보게된다.


(유대적 이스라엘과 신약의 교회와의 관계에 대하여)

톰 라이트는 빌립 집사의 사역에 대해서 이스라엘 하나님 백성의 이야기가 목적지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신약의 교회가 유대적 이스라엘의 연속선 상에서 확장된 것이라는 새관점의 입장에서 나온 것이다.

유대적 이스라엘과 신약의 교회가 연속선상에 있느냐, 혹은 불연속선상에 있느냐는 구약의 이스라엘과 신약의 교회와의 관계를 정의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관점이다.

연속성과 불연속성은 모세 언약의 속성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전부는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개혁주의에서 보는 모세 언약의 속성은, 표면적인 행위 언약과 본질적인 은혜 언약이 모두 다 내포되어있다고 본다.

행위 언약만을 놓고보면 유대적 이스라엘과 신약의 교회는 완전한 불연속선 상에 있지만 은혜 언약의 속성에서보면 구약의 이스라엘과 신약의 교회는 연속선상에 있다.

이는 구약의 인물들이라고 하더라도 오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참여한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모세 언약을 행위 언약이 배제된 은혜 언약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구약의 이스라엘과 신약의 교회는 연속선상에 있게 된다.

새관점에서 주장하는 언약적 율법주의(혹은 언약적 신율주의, 신율주의)는 모세 언약을 은혜 언약으로만 보기에 구약의 이스라엘과 신약의 교회를 동일한 선상에서 보고있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주장하듯이, 언약적 율법주의에서보는 신약의 교회는 확장된 이스라엘이면서, 동시에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이야기의 목적지라고 말하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것과 같이 빌립 집사의 에디오피아 내시에 대한 이사야서 해석은 에디오피아 내시가 유대인들의 무리에 참여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유대적 이스라엘은 인본주의의 극단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인간의 죄성을 보여줌으로서 그리스도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철저하게 유대주의적 사고에서 출발한 신학으로서, 기독교를 유대교의 틀에 맞춘 작업의 결과물일 뿐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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