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018. 1. 20. 17:33

사도행전 9장 1-9절 말씀 묵상



1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사울은 하나님을 위해서 정의에 사로잡혀있던 자이다.

정의를 위해서 누구보다도 정죄하는 일에 앞장선 자였다.

홍길동, 스파이더맨, 황금박쥐와 같이 정의의 사자는 인간의 희망사항이었으며, 어느 시대에나 누군가의 역할이 있었다.

이러한 이들로 말미암아 표면적인 정의는 실현되었을지는 몰라도 그리스도의 복음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잘못된 것에 대하여는 나서서 정리하는 이들이 있기에, 표면적으로는 이러한 이들로 인하여 사회가 안정을 찾는 면도 있다.

이러한 정의는 민주사회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공산권 국가인 예전의 중국의 영화들도 대부분 권선징악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들의 문제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정의가 사회를 깨끗이 하는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율법 아래에서의 정죄는 사회를 표면적으로는 깨끗하게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사회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정의를 외치면서 사회 개혁에 앞장서는 이들은 대부분 표면적인 깨끗함을 위해서 정죄하는 일에 앞장서곤 한다.

이와달리 복음은 표면적인 문제를 다루지도 않으며, 정죄하는 일에 앞장서는 도구로 사용될 수도 없다.

참된 복음의 진리를 아는 이들은 사회개혁이나 교회 개혁을 위해서 정죄를 일삼거나 마녀 사냥을 하지 않는다.

참으로 복음을 아는 이들은 정죄를 하는 구약의 율법의 방식을 넘어선다.

복음을 아는 이들은 인간이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본질적 죄인임을 일깨워준다.

복음을 아는 이들은 정죄보다는 사랑과 용서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상황 가운데 말씀하시는 것을 전한다.

참된 복음을 아는 이들은 사람이 주체가 되어 움직이는 것보다는 하나님께서 상황 가운데 직접 간섭하시는 은혜를 구한다.

복음을 아는 이들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지기를 간구한다.

준비되어지지 않은 본질적 죄인에게 아무리 정의를 외쳐받자 더욱 죄만 드러낼 뿐이다.

참된 복음을 아는 이들은 정죄하기보다는 사도들과 같이 기도하면서 말씀을 전하는데 전념한다.

어둠과 싸우기보다는 빛을 비추는 것이다.

사울의 잘못은 자신이 알고있는 것이 전부라는 생각에 율법의 틀 안에서 정의의 사도와 같이 정죄하는 일에 앞장 섰던 것이다.

현재 교회의 개혁을 외치는 이들도 사울과 같이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전부라는 입장에서 율법적인 방식으로 정죄하는 일에 앞장설 뿐, 정작 기도하면서 사랑하는 가운데 말씀의 빛을 비추는 일에는 소홀히 한다.

이들은 자신의 논리를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성경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만을 골라내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시키는데 능숙할 뿐이다.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사울의 박해는 공적인 집행이었다.

이는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이 하나님 앞에서 유대적 율법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구약의 이스라엘의 역사는 왕들의 역사였으며, 성직자들의 역사였다.

하나님께서 구약의 이스라엘에 대하여 하신 말씀은 왕들과 성직자들에 대한 말씀이었다.

하나님께서 구약의 이스라엘에 대한 결산은 왕들과 성직자들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에 대한 공동체적 관계성이었다.

사도들로 인하여 예루살렘이 복음화되고 사마리아 성이 복음화되었다고하더라도 이들이 이스라엘을 대변하지는 못했다.

예루살렘 성전과 예루살렘 성의 멸망은 역사적 이스라엘에 대한 공동체적 결산이었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신약의 교회를 역사적 이스라엘의 연속선상에서의  확장 개념으로 접근하지만 하나님과 역사적 이스라엘은 공동체적 관점에서 분명한 결산이 있었다.

예루살렘과 사마리아 성을 비롯한 이스라엘 곳곳에서의 개인적 복음화와는 달리 공동체로서의 역사적 이스라엘은 공식적으로 신약의 교회에 대하여 반대하는 분명한 입장을 취하였기에 톰 라이트의 주장과 같이 연속선상에 있다고 할 수는 없다.


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역사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하심이 있어야지만 획기적인 변화의 과정을 겪는다.

노아에게 나타나셔서 방주를 짓게하셨고,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가나안으로 인도하셨으며,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출애굽을 준비하게하셨으며, 다윗에게 나타나셔서 구속자를 약속하셨으며,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셔서 이 땅에 복음의 빛을 비추셨다.

이제 성령의 오순절 강림하심으로 새롭게 시작된 구원의 역사는 사도행전의 역사 가운데 직접적으로 나타나셔서 강권적으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다.

기세등등했던 사울에게 임한 하늘로부터의 빛은 이방인을 향한 전적인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은혜의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노아와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에 대한 부르심으로 인하여 약속된 하나님의 언약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하여 이 땅에 실행되었으며, 사울에게 비추인 하늘로부터의 빛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실현된 하나님의 언약을 이방인인 우리에게 향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빛인 것에 감사할 수 밖에 없다.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성도에 대한 박해는 그리스도에 대한 박해이다.

성도를 대함은 그리스도를 대하는 것이다.

성도는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일그러졌던 하나님의 형상이 그 안에서 회복되었기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와 연합된 존재이다.

막강한 권력을 가진 자의 자녀를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자녀이면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는 결코 함부로 대해서는 안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이면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는 모든 행함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대변하고있기에 행동에 있어서 무척이나 조심하여야만 한다.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하나님께 드려진 향기로운 제물이기에, 사회에서 비난을 받는 악취를 풍기지 않도록 자신을 잘 가꾸어야한다.



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청천벽력같은 말씀이다.

순간 상황 파악이 안될 것이다.

인생이 가장 비참하게되는 순간이다.

사람이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데로 살았는데 자신이 틀렸다고, 더군다나 틀린것이 아니라 자신이 바로 악인이었다고 판별될 때 이처럼 비참한 일이 없을 것이다?

사울의 행동은 구약의 이스라엘의 행동방식을 대변해준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에덴에서 타락한 아담을 대변하면서 동시에 아담의 후손인 인류를 대변해준다.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간은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를 따라 행동하지만 인간의 본능에 의한 정의는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불신자들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따라서 행동을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이러한 일들이 악으로 판가름 날 수도 있다.

인간이 보기에 좋은 문명의 발전과 의학의 발전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바벨탑이 될 수도 있다.

인간이 추구하는 인류의 평화와 공존이 하나님을 배제한 인간의 세계, 즉 하나님과  분리를 추구하는 악한 죽음의 세계를 구축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인간은 누구나 사울과 같이 정의를 위해서 투쟁하면서 이 땅에서의 삶을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이 모든 것이 악으로 결론 날 수밖에 없다.

사회에서는 가끔 희생 당하는 이들의 죽음에 대하여 무죄한 이들이라는 용어를 갖다붙이지만, 이 세상에 무죄한 이들은 아무도 없다.

모두 다 사울과 같은 이들이며, 단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죄가 억제된 삶을 살아갈 뿐이다.

은혜가 없이는 모든 인간의 삶은 최후의 심판 때 하나같이 하나님을 대적한 이들로 판가름 날 것이다.



6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사울 스스로의 변화를 말씀하지 않으시고 가르침을 받을 것을 말씀하신다.

사울은 모든 이들로부터 스스로 독립적이었던 교만한 사람이었지만, 졸지에 이름도 없는 사람에게서 배워야하는 나락으로 떨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눈이 안보여 무장해제된 사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철저히 무너진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성추행 혐의로 지탄을 받는 J목사는 예전에 항상 청년들에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기 위해서는 자기가 속하여있는 분야에서 최고가 되어야한다”고 말하곤 하였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좀처럼 각 분야의 최고를 사용하시지는 않으신다.

설령 최고의 사람을 사용하신다고 하더라도 모세와 같이 광야에서 자신의 교만을 완전히 꺽으시고 사용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낮은 자를 사용하시어 높은 자를 부끄럽게 하신다.

세상에서 잘되었다고 하나님께 복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모세와같이 꺽이고 사울과 같이 눈이 안보이는 것이 오히려 진정한 축복의 과정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간과한 아부일 뿐이다.



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같이 가던 사람들이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었더라면 여러가지 부작용이 생겼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에게나 들려지는 것이 아니다.

준비가 않된 이들이 구체적인 상황에 개입이되면 부작용만 낳을 뿐이다.

말씀으로 임하신 그리스도는 구약의 이스라엘을 통하여 준비가 도

어있었고, 또한 선지자들과 세례 요한을 통하여 예비가 되어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을 통하여 마음의 문을 연 이들에게 임할 때 부작용이 없을 것이다.

특히 말씀을 전하는 이들은 상대방의 마음 문이 열리도록 기도로 준비할 필요가 있다.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모세는 왕족의 기운을 빼는데 40년의 세월이 걸렸지만 사울은 그 혈기가 빠지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인하여 짧은 시간 안에 변화가 될 수 있었고 하나님의 능력을 입을 수가 있었다.

목회자가 되기 위한 신학의 과정은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사울이 바울이 도

는 시간은 길지가 않았다.

훌륭한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의 공부가 필요하겠지만 근본적인 변화는 오랜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오랜시간 공동체적 훈련 과정을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다.

인간이 만든 제도로는 결코 사람를 변화시킬 수는 없다.

모든 제도는 하나님의 은혜의 기반 위에 세워져야 할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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