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018. 1. 22. 18:07

사도행전 9장 19-31절 말씀 묵상


19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사울이 다메섹에 있던 예수의 제자들과 함께 있는 것이 가능했던 것은 사울을 인도한 아나니아가  다메섹에 사는 모든 유대인들로부터 칭찬을 듣는 신뢰성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아마 사울이 아나니아가 아니라 별로 여론이 좋지 않은 사람으로부터 인도를 받았다면 사울도 다메섹에서 또 다른 어려움에 직면했을 것이다.

아나니아가 다른 유대인들로부터 칭찬을 듣는 이였기에 하나님께서 아나니아를 사용하셨다는 생각이 들기도한다.

이러한 면에서 하나님께 사용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사회로부터 비난받는 일은 없어야겠다.

현재의 많은 교회들이 사회로부터 비난을 받고있다는 사실은 이들 교회가 하나님께 사용되기 힘든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울은 자신이 이제껏 어떠한 일을 하고있었는지 상당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너무도 중요한 사실이면서 동시에 인간적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이지만, 이에 대한 확신이 없이는 바울이 앞으로 감당할 사역에 대한 준비를 할 수 없었기에, 예수님께서는 직접 사울에게 초자연적으로 말씀하셨던 것이다.

사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와 더불어 성령으로 말미암은 인식의 변화로 인하여, 유대인들이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다는 말을 담대히 할 수 있었다.

그러면 왜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유대인의 손에 죽으셔야만 했을까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일 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제 사울이 주장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죽였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싶어서 사울을 죽이고자 했을 뿐만이 아니라, 현재도 유대인들이나 유대적 이스라엘을 옹호하는 이들도 끊임없이 이러한 사실을 거부하며 왜곡시키고 있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이 대표적으로 이러한 입장에 동참하고 있다.

톰 라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은 세상 정부를 대변하는 로마에 의한 것이며, 로마와의 대립에서 생긴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속죄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동안 유대인들의 잘못되었던 행동방식을 고치기 위해서 세상에 대하여 어떠한 방식으로 살아야 하여야하는지 본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의 행동방식을 하나님께서 옳다고 인정해주신 증거라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의 의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하려는 일을 하시고 나면 모든 나라가 그분의 심판과 구원의 통치에 들어올 것이라는 바울의 선교적 소명의 토대였던 전형적인 유대적 개념과 완벽하게 맞아 떨어진다”(톰 라이트, 모든 사람을 위한 사도행전, 215)고 말한다.

톰 라이트가 보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유대적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시려는 일을 예수가 유대적 이스라엘의 메시아로서 수행한 것이라고 말한다.

톰 라이트가 보는 바울의 선교적 소명은, 모든 나라를 유대적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통치 안에 들어오게 하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바울의 소명은 모든 나라를 유대적 이스라엘 안에 귀속시키려는 유대주의적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사도들이 전하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중심으로 이해되어야한다.

사울을 박해하는 유대인들은 개인적 자격이 아니라 유대적 이스라엘을 대변하는 집단으로부터 온 것으로서, 이는 예수가 유대인들에 의하여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들은 유대적 이스라엘과 바울이 전파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서로 대립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예수의 역할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어도 행할 수 있는 수준의 역할이기에, 이는 궁극적으로 톰 라이트가 삼위일체를 부인한다는 말까지 나오게된 근원이 된다.


21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22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사울의 급격한 변화는 성령에 의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사람의 모든 변화가 성령에 의하지 않고는 불가능하지만, 사울과 같이 급작스러운 변화와 깨달음은 마치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서 모인 이들이 각 나라 방언으로 말함과 같이 획기적인 사건이다.

이러한 변화는 사도행전의 기록이 성령의 새창조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음을 증거해주는 것이다.


23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사울을 죽이기로 한 것은 개인으로서의 유대인이 아니라 유대 조직 가운데 있었던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체제가 위협을 받기 때문에 시작되었을 것이다.

사울의 싸움은 개인이 조직을 상대하는 것이었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로 인하여 이를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성도가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는 것은 거대 조직에 대한 싸움이 아니라 이미 승리하신 하나님 안에서의 싸움인 것이다.

비록 육체적으로는 해를 당할지라도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영원한 생명이기에 이러한 싸움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너무도 많은 신앙조직들이 이 세상의 조직의 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24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사울의 고난은 예고된 것이었다.

하나님께 사용되는 사람은 이미 받은 고난으로 성장이 다 된 다음에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용되어지는 가운데 고난을 감당해야한다.

성도가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생기는 여러가지 어려움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고난의 과정임을 생각하면서, 고난을 없애 달라고 기도하기보다는 고난을 잘 극복할 수 있게해 달라고 기도할 필요가 있다.


25  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리니라

사울의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쫓아가는 입장이 아니라 쫓기는 입장이된 것이다.

예수를 따름의 대상으로 보는 이들은 상황의 변화를 행동 방식의 한 가지로 보지만 방법론의 문제가 아니다.

예수를 따름의 대상으로보려는 이들은 사울의 행동방식까지도 따라서 하려고 한다.

지금의 상황은 방법론적 접근이 아니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세상과 충돌되는 현상을 보여준 것이다.

방법을 배우려거나 따라하려는 것은 제자도의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 아니다.


26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사울이 예루살렘에 간 시기는 다메섹에서의 회심 이후 삼년 만이었다.

사울은 분명 스데반 순교 사건과 관련하여 자신의 입장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의 잘못된 과거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다.

신앙인은 서로에 대한 이해와 용서가 없이는 진정한 사역의 진보를 가지기 어렵다.

이때까지 예루살렘에서는 사울의 회심에 대한 신뢰가 없었고, 사울 또한 적극적인 활동의 진전을 가지지 않았었지만 사울의 방문으로 인하여 공식적인 활동이 시작 될 수 있었다.

모든 과정은 생각이 있다고 바로 시작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심으로 인해서 많은 지혜와 능력을 소유했다고 하더라도 잠잠히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만 한다,

참된 순종은 자기 열심보다는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여야함을 본다.


27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성도의 친밀한 교제는 꼭 필요하다.

자신에 대하여 분명하고 객관적인 정보를 공유하면서도 아무 이해관계없이 하나님 안에서 서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이들이 필요하다.

성령의 역사는 공동체의 회복이기에 성도 간에 교제가 없이 혼자하는 신앙 생활은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28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29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30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사울의 사역이 처음에는 상당히 더딘 진보를 보인다.

예루살렘에서의 사역은 사울이 사역의 시작에 대한 공적인 선언하는 것이었지만, 그는 위협으로 인해서 자신의 고향인 다소로 돌아가 바나바가 다시 찾아 올 때까지 꽤 오랫동안이나 머문다.


다소는 나름대로 문명의 중심 가운데 있었기에 사울은 다시 자신의 고향으로 와서 자신의 변화된 관점에서 이전의 자신을 되돌아 보았을 것이다.


또한 자신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문명과 문화를 다시 한 번 변화된 관점에서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바울의 기록은 주로 서신서에 나타난 것이 전부였지만 그의 서신이 복음서 안에 제대로 정립되기 위해서는 성령 안에서 자신이 살았던 세상을 다시 새롭게 보는 충분한 시간을 가져야만 했을 것이다.


신앙 생활의 정립을 위해서는 성경에 대한 지식과 더불어  오랜 삶의 환경 가운데 형성된 세계관을 총체적으로 정립하는 시간들이 필요하다.



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성도는 고난과 환란 가운데 더욱 장성해진다.


고난과 핍박이 없는 환경에서는 나약해 질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원리는 우리가 축복에 대한 개념을 바꾸어야하는 근거가된다.


한국교회의 급성장과 핍박이 없는 환경은 축복이 아니라 불행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는 서양 선교사들이 들어온지 몇년도 안되어 급속한 성장을 하였다.


한국 교회 성장의 원동력은 고난과 핍박이었다.


현재와 같이 고난과 핍박이 없는 환경에서는 성장할 수 있는 원동력이 상실되었기에, 교회가 다시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쉽게 오지는 않을 것이다.

교회는 사도 시대와 같이 핍박과 평안이 교차하는 가운데 든든히 세워져 갈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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