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24. 12. 29. 16:05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 묵상(6-독생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를 보고 살 자가 없느니라"(출33:20)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요한은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보았음을 증거하고있다.

이미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이신 독생자를 전하고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본 자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유대인들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말씀을 선포하고있는 것이다.

요한이 전하는 독생자의 영광은 이미 아담 안에서 죽었으며, 최종적인 죽음을 앞둔 어둠의 자식들에게 전하는 참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다.

어둠 가운데 매일 날마다 죽어가는 인생에게 전해지는 요한의 선포는 인생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말씀이며, 표면적이고 임시적인 생명이 아닌 근원적이고 영원한 생명을 전해주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신성을 가지신 독생자monogenes)

독생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인 아담과는 구분이 된다.

처음 아담은 비록 하나님의 아들로 지음을 받았지만 독생자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질을 가지신 유일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독생자이시며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독생자로서의 모노게네스monogenes는 유일한을 뜻하는 mono와 형질을 뜻하는 genes의 합성어이다.

즉 형질로서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형질을 소유하신 유일하신 분이시라는 것이다.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형질을 소유하고 있지는 않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아담은 아들로서 지음을 받았지만 그 형질은 피조물인 흙에서 취함을 받은 것이다.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아들되심은, 처음 아담의 하나님의 아들됨의 유형적 본체이신 것이다.

독생자이시며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는 믿는 성도와 연합을 이루는 분이시지만, 그렇다고 성도가 그리스도와 한몸을 이루어 신성을 소유하게되는 것은 아니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종종 소금이 바닷물에 녹아 바다의 일부가 되는 것과 같이 신의 일부가 된다는 주장을 하지만, 이는 넘지 말아야할 피조물의 범주를 넘어서는 것이다.


(아들의 원형으로서의 둘째 아담)

아담은 오실자의 모형(롬5:14), 즉 처음 아담은 둘째 아담으로 오신 독생자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 그리스도는 아들로 지음받은 처음 아담의 원형이시다.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것은 아들됨으로 지음을 받은 것으로서, 그 원형되신 그리스도와 연합될 때 비로서 진정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게되는 것이다.

인간은 아들로서 지음을 받았지만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아들의 지위를 상실했다.

비록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아들의 지위가 상실되었어도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을 다시 아들로 부르신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아들로서 부르신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바로에게 전하라고 하시면서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출4:22)”라고 선언하신다.

애굽에서의 이스라엘은 아들로서 부름을 받을만한 자격과 요건을 갖추지 못했지만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아들로서 부르신 것이다.

독생자 그리스도의 오심은 아들을 부르시기 위함이며, 이는 아들은 지역적으로 제한된 유대인이 아니라 지역적 제한을 넘어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선택받은 이들이다.


(은혜와 진리가 담겨있는 독생자의 영광)

요한이 본 독생자의 영광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

충만한 은혜와 진리에는 구원의 진리가 담겨있다.

아들을 부르시기 위함이었다.

인간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답게 살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영원한 형벌을 피할 방법이 없는 존재였다.

독생자는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생긴 문제를 해결 하실 수 있으신 유일하신 분이시다.

아담의 범죄는 아들로서의 범죄였기에 아들의 본체이신 독생자 그리스도께서 처음 아담의 실패한 역할을 대신하시고 형벌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독생자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신 아들의 원형이시면서 동시에 하나님이시기에 이러한 사역이 가능한 일이었다.

아들로 부름을 받았던 애굽에서의 이스라엘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미 범죄한 이들에게 순종은 불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아시고 계셨지만 인간은 철저하게 경험을 해보지 않고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도 인본주의 신학에는 행위를 통해 구원받으려는 사상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있다.

이는 독생자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축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본을 보여주시는 분, 혹은 따름의 대상으로 전락시켜버린다.

그리스도는 따름의 대상 이전에 믿음의 대상이시다.

신자가 독생자의 영광에 담겨있는 은혜와 진리를 소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믿음 뿐이다.


(하나님께서 낳으신 독생자의 영광)

요한이 전하는 독생자의 영광은 다윗의 시편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이미 선언 하시고 약속하신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낳으신 독생자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이 땅에서도 성취된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편 2:7)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행 13:33)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냐”(히1:5)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히 5:5)

요한이 전하는 독생자의 영광은 은혜와 진리가 가득한 하나님께서 낳으신 독생자의 영광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낳으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신자를 아들로 부르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현재적 삶의 영원성)

요한은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고 현재진행형으로 전하고있다.

하나님께서는 신자를 아들로 부르시기 위해서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셨고, 이를 통하여 신자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어둡고 험악한 이 땅은 죽음으로 귀결되지만 독생자 그리스도와 연합된 신자는 영원 가운데 현재적으로 계시는 하나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자로서 살아가게 된 것이다.

신자에게 주어진 현재적 삶은 절망과 좌절과 외로움에 종속되는 삶이 아니라, 소망 가운데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대하여 승리하신 것과 같이 이미 승리한 삶인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
요한복음 2024. 12. 29. 12:29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 묵상(5- 영광)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모세가 그렇게 보기를 원했던 하나님의 영광)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도 없었고 만약에 볼 수 있다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타락한 인간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않기를 원하고 대신에 자신의 소욕을 채우는데서 만족하면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소욕을 채울 수가 없고 반대로 극한 상황에 내몰리면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이는 타락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능의 양면이다.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울부짖었고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애굽에서 구해주셨지만 인간의 구함은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육신의 필요였던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그들을 구해주셨지만 출애굽이라는 과정은 시작에 불과할 뿐 완성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기 위한 정결이 필요함을 말씀하신다.

하지만 시내산에서의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숨죽이면서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맹세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곧바로 금송아지 앞에서 축제를 벌이는 죄를 범하게 된다.

시내산에서 내려온 모세가 보았던 광경은 출애굽한 백성들이 금송아지 앞에서 벌였던 광란의 축제였다.

다시 애굽 땅에서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이다.

모세는 억장이 무너졌으며  결국 금송아지 앞에서 축제를 벌였던 자신의 백성들을 칼로 멸절하는 과정을 경험하여야만 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목이 곧은 백성들로 인하여 그들을 진멸할까봐 그들과 함께 약속의 땅으로 올라가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하는 것과 같이 모세와 말씀하셨던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간청에 마음을 돌이키시고 친히 같이 올라가시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은총을 입지 않고는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고 하나님을 본 자는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모세는 자신이 은총입은 자임을 확인하기 위해서 주의 영광을 보기를 간청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등만을 보여주셨다.

은혜가 없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가 없는 것이다.

목이 곧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악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에 대한 인식도 없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고자 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출애굽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의다 광야에서 죽어야만 했다.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신자들 가운데 임한 것이다.

요한은 자신들 가운데 거하시는 육신이 되신 말씀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증거하고있다.

모세가 그토록 보기를 원했던 하나님의 영광을 요한은 은혜로 말미암아 진리 안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그 안에 충만한 은혜가 있기 때문이다.

모세가 은혜 입은 자이었음에 대한 증거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를 원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신자에게 보여지는 하나님의 영광은 신자들이 은혜 입은 자라는 사실을 증거해주고있는 것이다.

모세에게 부분적으로 보여주셨던 하나님의 영광은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는 증거의 표시였다.

신자들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은 신자들을 구원의 종착지인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인도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증거이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였던 구름 기둥과 불 기둥과 같이 진리의 말씀은 신자를 인도하는 등이다.

항상 진리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 어둠 가운데 있는 이 땅에서 실족하지 않는 것이다.

진리의 복음은 세상에서의 성공을 위해서 단순히 인간에게 제공되는 서비스의 일종이 아니다.

진리의 복음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거의 다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궁극적인 하나님 나라로의 초대이다.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었던 가나안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쉽게 허락이 안되었던 곳이었음을 생각해보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을 전하는 말씀은 영원으로의 초대라는 감격 자체일 수밖에 없다.

말씀을 거부하는 이들은 세상의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으며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이들은 세상의 부정적인 모습 가운데에서도 희망을 볼 수 있다.

삶의 여정 가운데 접하는 온갖 부정적인 상황들은 신자에게는 구원의 희망을 위한 것이며 불신자에게는 멸망을 위한 것이다.

어두운 상황일수록 빛으로 오신 하나님의 영광은 더욱 빛나게된다.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절망 가운데 희망을 볼 수 있으며 그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게된다.

절망 가운데 경험하는 하나님의 영광은 표면적인 것이 아니라 근원적인 것이다.

절망 가운데 경험하는 하나님의 영광은 이 땅을 사는 동안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경험하는 근원적 절망에 대한 희망을 제시해준다.

세상은 마치 성공한 자들만의 소유물 같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이러한 고정 관념을 무너뜨린다.

하나님의 영광은 신자의 삶에 근원적 혁명을 일으키는 놀라운 능력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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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24. 9. 2. 12:56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 묵상(4-우리 가운데 거하심)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사실은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 세계는 하나님의 거하심과 더불어 시작되었지만 아담의 불순종과 더불어 이 세상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곳이 되었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더 이상 거하시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에덴을 창설하시고 아담과 더불어 에덴에 거하셨던 사실은 에덴이 하나님께서 거하셨던 성전이었음을 보여준 것이다.

불순종과 더불어 범죄한 아담의 후손이 사는 이 세상은 더 이상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이 아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셔서 그들 가운데 거하셨으며 이제 요한은 모든 인류를 대상으로 하는 하나님의 거하심을 선언하는 것이다.

모든 인류를 대상으로하는 하나님의 거하심은 에덴의 확장이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둘째 아담이 되셨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이제 이 땅에 사는 모든 이들은 육신으로 처음 아담의 후손으로 남을 것이냐, 아니면 비록 육신으로는 처음 아담의 후손이지만 영적으로는 둘째 아담의 후손이 될 것이냐에 대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게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거하심은 아담의 범죄와 더불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원시복음(창 3:15)의 성취인 것이다.

하나님의 거하심은 구원과 동시에 심판이 임하였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모든 인류는 에덴에서 아담이 선택의 기로에 놓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둘째 아담의 역할에 의존하여 구원에 이르느냐, 아니면 처음 아담의 후손으로서 영원한 심판 아래에서 저주받읓 존재로 남느냐의 선택의 기로에 서게된 것이다.



(모든 인류의 하나님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말씀이 육신이 되심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더 이상 민족주의적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심을 선언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대상으로 시내산에 강림하셨던 하나님은 이제 모든 인류를 대상으로 육신으로 이 땅에 강림하신 것이다.

이스라엘 가운데 성전에 거하셨던 하나님께서는 이제 말씀으로 모든 인류의 성도들 가운데 거하신다.

성도들 가운데 거하시는 성령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님의 성전은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어서 모든 인류 가운데 확장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대위임령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성전의 확장이며 이는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의 강림과 더불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완성될 것이다.



(종말론적 선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요한의 선언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종말론적 선언이다.

이제 이 땅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완성, 혹은 자아 성취를 위해서 이 땅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서 살아가야하는 사명이 주어진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삶의 목적이 자아의 완성이나 혹은 성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서 이 땅에서 희생되어져 가는 삶을 살아야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왕으로- 승리자의 삶)

그리스도께 헌신하는 삶은 결코 자기 학대나 패배자로서의 삶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거하심은 이 땅의 권세자였던 사탄에게 패배를 안겨주신 것이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

말씀 안에 하는 신자는 이 땅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권세 아래있는 이로서 결코 이 땅의 패배자가 될 수 없다.

말씀 안에 거하는 이들에게는 학위나 성공, 지위나 명예, 돈의 많고 적음이 이 땅에서의 삶의 기준이 될 수 없다.

이 땅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말씀 안에 거하는 이들을 결코 내어버려두시지 않는다.



(근원적 외로움의 종결)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한 가지는 사람과의 관계성이다.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일들 가운데 한 가지는 사람들에게 배척받거나 소외되는 것이다.

인간은 소외되는 것과 배척받는 것이 두려워 세상과 타협하면서 살아가지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근원적인 외로움을 해결해주시는 분이시다.

아담의 후손은 관계성의 왜곡으로 사람들을 집단에 종속시켜왔지만, 이제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거하는 이들은 말씀 안에서 근원적인 관계성을 이루어 나아가야한다.

그리스도의 우리 가운데 거하심은 새로운 코이노니아를 이루어가시며, 인간을 더 이상 육적인 외로움에 종속되어지지 않게 하신다.

성도는 비록 이 땅에서 완전 혼자가 된다 하더라도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더불어 평안 가운데 거할 수 있기에 이 보다 더 큰 영광은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만이 진정한 평안과 안식을 주시는 분이시기에 말씀 안에 거하는 삶이야말로 가장 평안한 삶이 될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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