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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10.17 :: 요한복음 1장 12절 말씀 묵상(1)
  2. 2021.10.01 :: 요한복음 1장 11절 말씀묵상
  3. 2021.09.25 :: 요한복음 1장 10절 말씀 묵상
요한복음 2021. 10. 17. 18:30

요한복음 1장 12절 말씀 묵상(1)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영접- 관계성의 회복

영접한다는 것은 상대를 피하지 않고 자신의 삶 속에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적대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이는 상대방과의 관계성에 문제가 없다는 표시이다.

사람 사는 세상의 문제는 관계성에서 출발한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이며, 이는 관계성의 파괴로 인한 것이다.

인간들 사이의 관계성의 문제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파괴의 결과물이다.

인간사의 모든 문제의 근원에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문제가 있다.

복음은 아담의 범죄로 파괴된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회복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에게 요구되는 구원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회복에 있다.

인간이 가지고있는 모든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문제에서 출발되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이 부딪치는 삶에 있어서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로 인한 것이다.

인간은 이러한 문제들에 직면하면서도 그 문제의 근원이 되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출발된 이스라엘 백성들 조차도 삶에 있어서 하나님을 외면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이는 인간에게 하나님을 외면하는 본성이 있기 때문이다. 

 

구원의 시간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이스라엘 땅에 오신 것에는 하나님의 오랜 기다리심이 있었다.

만약에 이 시간보다도 이른 시간에 예수님께서 오셨다면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대하여 공감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범죄한 후에 바로 구원 사역을 시작하셨을 수도 있으셨을 것이다.

인간은 자만심, 즉 스스로 높아지고자하는 마음과 스스로 구원의 길을 가려고하기에 경험을 통한 좌절이 없이는 자신의 무능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소망이 없음을 경험하고 이를 인정하기까지는 그 교만한 마음을 내려놓지 못할 것이다. 

2000년 전의 시간은 이스라엘의 패망의 시간이었으며, 이스라엘의 패망은 인간 모두의 패망을 대변해주는 것이었다.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 인간 스스로 구원의 길을 가본 역사가 없었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에도 2000년의 인류 역사는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인간은 완전히 좌절되지 않고는 하나님께 나아올 수가 없는 존재이다.

이스라엘 역사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좌절되는 시간이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하나님의 실패가 아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초대하기 위한 준비의 시간이다.

바벨론 유수와 로마의 통치는 예수님의 초림을 준비하는 시간이었다.

이스라엘 성전은 인간의 육신의 욕심을 채우는 장소가 아니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을 자신들의 육적인 욕심을 채우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성은 보편적 인간의 죄성을 대변해주고있다.

이스라엘 백성에 의하여 인간의 죄성이 고발되지 않았다면, 인간은 자신들의 실패를 환경이나 외부요인들의 탓으로 돌렸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거룩한 백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패망은 원인이 인간의 내부에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오셨듯이, 모든 인간의 실패와 좌절의 시간은 하나님께서 심령 가운데 들어오셔서 하나님을 영접하도록 하는 초대의 시간이다.

이스라엘의 실패가 나의 실패가 될 때 비로서 영생의 길이 열린다.

인생의 좌절의 시간은 절벽 앞에 선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부르심의 시간이다. 



행위에서 믿음으로

행위에 의한 의의 성취는 죄인인 인간이 자신의 죄를 가리기 위한 포장지와 같다고 할 수 있다.

행위에 의한 의를 추구하는 이들은 특히 외식하는데 익숙해져있다.

요한이 소개하는 믿음은 행위에 익숙해져있는 이들에게 낯설기만 한 것이다.

믿음을 위해서는 영접하는 행위가 있어야한다.

믿음의 행위는 수고하는 공로적 행위가 아니다.

영접하는 행위와 믿음의 행위는 몸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논리는 수고하여야만 소산을 먹을 수 있는 저주받은 인생의 논리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논리이다.

하나님의 자녀됨은 인간으로부터 출발된 공로적 행위로는 도달될 수 없는 권세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출발된 은혜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요한이 선포하는 믿음은 공로적 행위의 종식을 선포한다.

인간에게는 자신들에게서 출발된 인본주의적 의를 추구하려는 죄성이 있지만, 이로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인간은 어떠한 공로적 행위로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을 수 없다.

율법은 인간의 죄성을 드러냄으로서 인간에게 항복을 요구한다.

율법을 지킴으로서 의를 이루려는 이스라엘의 행동 방식은 결국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으며, 이는 인간이 하나님께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율법은 스스로 죄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교만한 인간에게 겸손을 요구한다.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영접하는 행위는 쉬운 것이지만, 교만한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것이다.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께 두 손들고 나아갈 수 없는 교만한 존재이다.

영접하는 행위는 하나님께 의존함으로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행위로서, 하나님께 항복을 선언하는 것이다.

아담이 범죄하고서 하나님을 피하여 나무 사이에 숨었듯이,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없이,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의를 이루고자했지만, 구원받기 위한 인간은 어쩔 수 없이 하나님께 나아가야만 함을 선언하고있다.

항복한 인간은 더 이상 자신이 자신의 주체가 될 수 없기에,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주 되심을 인정하여야만 한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존함으로서 자기 의를 포기하는 방식이다.

이 또한 더 이상 자신의 주체가 자신이 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됨

하나님의 아들됨은 아담에게 주어졌던 순종의 요구의 종식이면서 또한 아담에게 주어졌던 저주의 종식이다.

처음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는 아담을 통하여 하나님께 이어진다.

계보상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리스도는 둘째 아담으로서 처음 아담의 실패의 자리에 오셨다.

처음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순종과, 불순종에 대한 저주가 그리스도 안에서 충족되었기에,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리를 갖게되었다.

율법 아래있는 자들에게는 외적인 행위가 요구되었지만,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는 길이 주어진 것이다.

이는 육신적 인간의 부정이며, 사실 인간의 상태가 어떠한지 알았다면 당연한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이 완악한 인간은 스스로 좌절되기 전에는 자신의 죄성을 인정하려하지 않기에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의 실패의 시간에 오신 것이다.

그리고 로마군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종식됨으로서 사실상 이스라엘은 역사 속에 사라져버렸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스라엘만이 진정한 이스라엘로 남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로서,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의 아들됨이라는 지위를 얻게 된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으로 지으신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생각하게해준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는 더 이상 사탄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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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21. 10. 1. 12:26

요한복음 1장 11절 말씀묵상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언약공동체의 부패성

그리스도께서 오신 자기 땅은 세상과 구별되었던 곳으로, 언약 안에 있는 공동체였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언약공동체를 세우시고, 자신이 지은 세계에 대한 주권을 행사하신다.

하나님께서 언약공동체를 통하여 자신이 지으신 세계를 통치하시기에, 언약 공동체는 피조 세계 전체에 대한 대표성을 가지고있다.

언약공동체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성전을 지키고 보존하며,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역할을 하여야만 한다.

에덴이 최초의 언약공동체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은 언약공동체였으며, 아담이 최초의 언약 백성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은 아담의 역할의 역할을 재연하여 순종함으로서 언약공동체를 보존해 나갔어야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에덴을 거니시며 아담과 함께 하셨다.

아담이 범죄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다가오셨듯이, 그리스도는 육신을 입으시고 범죄한 이스라엘에게 다가오셨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땅에 오셨지만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아담이 범죄 후에  하나님을 피하여 숨었던 것과 마찬가지의 행동을 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범죄는 타민족과 달리, 왕으로서, 제사장으로서, 선지자로서의 역할에 대한 거부였다.

하나님께서 자기 땅에 오신 모습은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처음은 에덴에서 범죄한 아담에게 다가오셨지만 아담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는 행동을 하였었다.

두 번째는 시내산에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가 오셔서 처음 아담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언약을 맺으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 아담과 마찬가지로 금송아지를 만들고 우상을 섬기는 일을 하였으며, 이러한 우상 숭배는 가나안에서 생활하는 동안 지속되었다.

세 번째는 구속주로서,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육신을 입고 오셨다.

세번째의 파루시아인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에서 조차도 제사장 나라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정작 섬김의 대상을 영접하지 않는 일을 하였던 것이다.

이는 아담이 하나님의 낯을 피하였던 일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아담이 에덴 성전에서의 역할을 잘못하였듯이, 이스라엘은 성전에는 열심이 있었지만, 참된 성전이 오셨는데도 이를 거부함으로서, 자신들이 이제껏 성전에서 하였던 일들이 거짓된 것이었음을 증명해주었다.

이는 이제껏 자신들이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겼던 것이 아니라 우상을 숭배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처음 두 번과 달리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은 살기등등한 헤롯을 피하여 애굽으로 가셔야만 했다.

헤롯이 죽은 후에, 예수님의 공적인 사역의 시작과 더불어 사탄의 시험을 받으셔야했으며, 유대인들의 거부에 직면하셔야만 했다.

예수님을 받아들인 이들은 주로 연약하고 힘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육신적으로 더 이상의 희망이 없는 이들이 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였다.

예수가 정치적 메시아이기를 원했던 이들도 마찬가지로 예수를 떠나고 대적하였다.

그리스도를 거부한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예수를 육신적인 목적의 수단으로 보았던 것이다.

육신적인 목적이 있는 한 구속주로서의 그리스도를 영접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거부의 밑바탕에는 육신적인 욕심이 깔려있다고 할 수 있다.

육신의 소욕은 사탄으로부터 온 것이다.

높아지고자 하는 욕심, 좀 더 많이 소유하고자 하는 욕심은 우상 숭배로 귀결될 수밖에 없으며, 그리스도는 인간의 육신의 욕심을 채워주시는 분이 아니시기에 거부 당할 수밖에 없으셨다.

그들에게 성전은 여호와를 섬기는 장소가 아니라 인간적인 욕심을 채우는 장소였기에, 참 성전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배척 받으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이다.

디아스포라 언약공동체

교회는 이 땅에서는 핍박을 받는 디아스포라 언약공동체이다.

그리스도가 배척되었듯이 교회는 이 땅에서 배척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 8:20)"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이 땅에 머리 둘 곳이 없는 디아스포라 공동체이다.

자기 백성도 그리스도를 배척하는데 이방인들은 더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초기 기독교가 이방 사회에서 뿌리 내릴 때는 엄청난 핍박을 감당하여야만 했다.

바울의 편지를 받고 바울의 방문으로 더욱 강건하여진 로마교회는 네로의 박해라는 환란을 감당하여야만 했다.

박해를 뚫고 지역사회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교회는 불행하게도 일단 뿌리 내린 후에는 변질의 과정을 거치게된다.

핍박이 없는 교회는 변질 되어질 수밖에 없다.

교회는 사회에 대하여 하나의 세력이 될 수가 없다.

교회가 사회의 중심에 서있던 크리스텐덤의 시기동안 교회는 온갖 악행의 중심세력이 되었다.

교회는 세상의 필요를 채워주는 곳이 아니다

교회의 참된 외침은 세상의 저항을 불러 일으킨다.

개인의 욕심은 세상적이기에 교회가 이를 채워줄 수는 없다.

교회가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자 세상과 개인의 필요를 채워주는 곳이 될 때 교회는 그 수명을 다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 교회의 쇠퇴은 외부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세속화되었기 때문이다.

 

세속화된 한국교회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서 자신이 섬기는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던 사건은, 그리스도가 자신들의 육신적 욕구를 채워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이 성전에 오셔서 보신 성전의 모습은 장사하는 곳이었다.

많은 한국교회들도 마찬가지다.  

특히 메가처치에서는 이러한 모습이 어김없이 나타난다.

돈이 없이는 교회 생활이 거의 불가능하다.

어느새 교회의 중심은 참된 교회인 성도가 아닌, 성전이라 불리우는 건축물이 되어버렸다.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성공의 기준은 성전건축이다.

목회자들의 욕심이 그리스도의 몸된 성전을 화려한 건물로 대체시켜버린 것이다.

성전 건축 후에는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양심의 부끄러움도 없이 거짓말을 하기도한다.

진정한 성전은 그리스도의 몸과 그 지체들인 성도들이다.

교회 건축물은 성전이 아니라 참 성전인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모이는  장소로서의 예배당이다.

성전이라고 전축된 예배당을 건축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하게된다.

이러한 이유로 설교의 많은 부분이 세속적이 되어질 수밖에 없다.

교인들도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자 세속화되었기에, 목사와 교인이 하나같이 세속적이 되어져간다.

욕심을 가진 목회자들은 세속화된 교인들에게 죄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는다

죄에 대하여 설교하면 교인들이 싫어하기 때문이다.

죄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는 은혜와 복음에 대하여 제대로 말할 수 없다.

이미 대부분의 한국교회에서는,  죄에 대하여, 은혜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 것이 관례가 되어 버렸다.

이러한 세속화는 말씀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 행위와 같은 것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반복하고있는 것이다.

교회가 이익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때에만 교회는 죄에 대하여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다.

교회가 욕심에 이끌려 이익의 문제에 얽매이게 될 때 그리스도의 말씀이 제대로 선포되어질 수 없으며, 이는 자기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유대인들의 행동방식과 다를바 없는 것이다.

도시교회는 생존 자체가 쉽지 않은 구조로 되어있기에 더욱 시험에 들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익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한 교회는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주체가 될 것이며, 이는 이미 중세 유럽에서 보편화되었던 현상이었다.

이익의 문제에 묶여있는 로마카톨릭은 말씀을 왜곡하여 해석하고, 하나님의 성도들에 대한 박해도 서슴치 않는다.

진정한 교회는 이 세상에 대하여 디아스포라로 남을 수밖에 없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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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21. 9. 25. 18:04

요한복음 1장 10절 말씀 묵상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두 가지 극단적인 상황

그가 세상에 계셨다함은 세상에 거주하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재하셨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마치 범신론Pantheism과 범재신론Panentheism의 차이처럼 en-의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가 세상에 내재해 계셨다는 것이 범재신론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범재신론은 피조물 자체에 신적인 존재가 내재해 계신다는 유물론적 신관이며, 거룩하지 못한 인간과 거룩하신 하나님의 경계를 없애는 작업이다.

세상에 내재해 계신다는 것은 세상이 그리스도의 주권적 간섭하심의 영역에 있음을 의미하며, 또한 거룩하지 못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볼 수는 없지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신바 될 정도로 우리 가운데,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고 간섭하시고 주관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신다는 이러한 사실은, 거룩하시고 크신 창조주께서 거룩하지 못한 피조물을 사랑하셔서, 아끼시고 간섭하시면서 직접적으로 다가오신 놀라운 사실적 정황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는 창조주이신 그리스도께서 보이지는 않으시지만, 역사의 시간 속에서 자신이 지으신 사람들 가운데 이제껏 함께 계셨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세상은 그리스도께서 만드신 피조 세계로서 그가 세상에 계셨다함은 조물주가 피조 세계에 들어오신 놀라운 사건이다.

거룩하신 높으신 분이 죄악에 물든 가장 낮은 자리에 오신 있을 수 없는 파격적인 상황이다.

이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는 2절의 내용이 10절에서 반복적으로 서술되고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창조주라는 것을 강조하기보다는 자신이 창조하신 세상에  창조주께서 들어와 계신 상황에서의 피조세계의 마땅한 상황을 서술하기 위한 것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피조 세계인 이 세상은 너무도 당연히 요구되었던 것이 이루어지지 않고있다.

바로 이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다는 놀라운 상황이 벌어지고있는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의 놀라운 상황이 이 한 구절에 표현되어있는 것이다.

창조주께서 자신의 피조 세계에 들어와 계신다는 놀라운 상황과 인간이 자신을 창조한 창조주를 알지 못하였다는 또 다른 극단적인 상황이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얼마나 파격적인지 조금이나마 생각해 볼 수 있는 상황이다.

인간은 자신에 대하여 너무 모른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감사할 상황에서도 감사보다는 불만이 가득한 것이 인간이다.

복음은 있을 수 없는 극단적인 상황이 이 땅에서 일어난 것에 대한 것이다.

복음은 자식이 부모를 못 알아보는 상황에서, 부모를 거부하는 상황에서 부모를 죽이는 사건으로 이어지는 것이었지만, 부모는 자식에게 죽임을 당하면서까지 자식을 구해내는 사건에 대한 것이다.

복음은 부모의 놀라운 사랑의 행동과 자식의 악한 모습의 극단적인 대조를 동시에 보여주고있다.

변질된 지식

아담은 에덴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면서 하나님과 함께하였던 경험이 있었고,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알고 있었다.

아담이 범죄하여 에덴에 쫓겨난 다음에도 아담은 자신의 자손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담은 자신의 범죄로 인한 죽음의 문제가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창 3:15)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자손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전달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담이 범죄하고서 하나님을 피하였듯이, 타락한 아담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싶지 않았을 것이고, 하나님에 대하여 올바른 지식을 전달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담의 후손은 어느 누구나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구원에 대한 소망은, 하나님께 대한 왜곡된 지식으로 인해서 다양한 왜곡된 모습으로 나타나고있었다.

지구상의 족속 가운데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족속은 없지만,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지식을 근거로 하는 경우는 없었다.

인간이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는 것은 인간의 본능으로 창조주에 대한 인식에 근거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아담의 자손으로서 조상으로부터 전해들은 구속 사역에 대한 왜곡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타락한 인간은 자신이 편한대로 자신의 방식으로 신을 섬기지만, 족속마다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다양한 방법으로 섬겨왔다.

가나안 족속 가운데에는 자식을 불 가운데 드리는 족속도 있었고, 마야문명이나 잉카문명에서도  인신공양이 뿌리깊게 문화의 중심을 이루고있었다.

이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요구하셨던 방식과도 유사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 중심에 있어서는 구속주를 아는 지식에까지 이르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이 세상은 아담의 원시복음에 대한 기대감으로, 인간이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피의 제사가 요구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속죄양으로 오실 그리스도에 대하여는 알지를 못하였기에, 결론적으로 세상은 그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오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구속을 향한 인간의 자세는, 인간의 죄성으로 말미암아 왜곡된 모습으로 나타나고있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 중심적인 해석을 하기에, 은혜 가운데 구속주로 오신 그리스도를 따름의 대상으로 섬기거나, 기복신앙의 수단으로 이용하기도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한 왜곡은 죄성에 물든 인간이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계속될 것이다.

몰랐다는 핑계

하나님과 구속주에 대하여 몰랐다고 말하는 것은 핑계가 되지 않는다.

이러한 핑계는 인간의 직관적인 감각과 인식에 대한 것보다는 좀 더 근원적인 것이다.

인간의 죄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은 것이었듯이, 구속주에 대한 지식은 이미 원시복음(창 3:15)을 통하여 아담에게 말씀하여주신 것이다..

아담이 지식 전달을 왜곡할 수도있고, 그 후손들이 왜곡시켰을 수도있었겠지만, 결과적으로 그 영향은 현제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속의 언약을 믿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말씀하신 구속의 언약을 모든 사람이 마음에 담고 기다리기를 원하셨지만,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창조주이시며 구속주이신 그리스도를 알지를 못하였고, 마음으로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이들의 알지 못함은 구원을 위한 공로로서의 자기 의에 대한 추구로 이어졌으며, 인간은 자기 의를 추구하는 교만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인간의 비참함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소망을 거부하는 죄악에 있다.

자기 의를 추구하는 인간은 결국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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