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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16 :: 요한복음 1장 4절 말씀 묵상
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신구약 중간기의 종료
하나님께서 요한을 보내심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오랜 침묵을 깨뜨린 사건이었다.
400여년의 계시의 공백은 더 큰 일을 위한 하나님의 침묵의 시간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간섭해주시길 원했지만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의 상태는 마치 하나님께서 내어 버리신 백성과 같았다.
스룹바벨 성전은 파괴된 솔로몬 성전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초라하기만 하였다.
그나마 초라한 성전은 온갖 모욕을 겪어야만 했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예루살렘을 약탈하고 성전에서 돼지고기로 제물로 바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충격을 주기도하였다.
이는 결국 마카비 혁명을 일으키게된 동기가 되었지만, 이스라엘의 수치와 분노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침묵하심은 지속되었다.
격동의 시기에 침묵하신 하나님은 마치 이스라엘을 버리신 모습같이 보였지만 이는 어둠의 땅에 이르시는 빛을 위한 시간이었으며, 하나님께서 더 큰 일을 준비하시는 시간이었다.
보냄받은 요한과 하나님의 주권
요한의 존재의 근거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으로 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은 요한의 역할에 하나님의 권위를 부여한다.
요한은 모세나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았다.
한 나라의 왕이 다른 나라의 왕에게 사신을 보낼 때 사신의 권위는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보낸 왕에게서 나온다.
사신에 대한 도전이나 사신을 해하는 것은 그 보낸 왕과 그 나라에 대한 선전포고와 다름없다.
요한을 죽인 헤롯왕의 행위는 하나님께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인간의 정체성은 인간을 이 땅에 보낸 하나님께 찾을 수 있다
처음 왕으로서의 아담의 역할은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는 왕으로서의 권위가 주어진 것이었다.
아담의 불순종은 보냄받은 사신이 자신을 보낸 왕을 배신하는 행위와 같았다.
불순종한 아담은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일 수가 없었다.
하나님께서 요한을 다시 보내신 것은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왕권을 되찾으시기 위한 것이었다.
이스라엘이라는 배경에서의 요한의 역할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실 수도 있으셨지만, 예수님의 오심은 처음 창조 때와는 달리 잃어버린 왕국의 회복에 있었다.
요한은 모세나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이라는 역사적 무대를 배경으로 활동하였다.
선지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언하였지만 요한은 이제 현실적인 상황에서 직접적으로 예수님을 소개한다는 점에서 이전의 선지자들과는 구분된다.
예수님의 오심은 이스라엘이라는 잃어버린 이들을 찾기 위함이었다.
가나안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었다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께 자신의 귀신들린 딸을 고쳐주시기를 간절히 원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차적으로 상대하지 않으셨으며, 여인이 더욱 소리를 지를 때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마 15:24, 26)라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이 요한을 죽이고 예수님을 거절한 사건은 참감람나무의 가지가 꺽이는 사건이었다.
이방인인 우리 신자들은 꺽이운 가지에 접붙임을 받은 돌감람나무의 가지로서, 오직 은혜로 말미암은 감사만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침묵하심과 성도의 자세
가끔 들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이들과 논쟁을 하다보면 전혀 진전이 없는 상황을 경험하게된다.
들을 준비되어있지 않은 이들과 논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침묵하심은 이스라엘이 준비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성도는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없고 하나님의 침묵하심을 경험하게 될 때 종종 깊은 죄절에 빠지게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를 내어버리시지는 않으신다.
침묵의 시간은 자신을 준비시키시는 하나님의 간섭하심의 시간이다.
우리가 느끼고 알지 못할 뿐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내어버려 두시지는 않으신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나타나심으로 갈대아 우르를 떠났지만 그가 약속의 이삭을 경험하기까지 오랜 시간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하심이 없이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그는 약속하신 이삭에 대한 희망을 기다리지 못하고 86세에 이스마엘이라는 불신의 결과를 낳기도하였다.
하지만 이후에도 이어지는 오랜 침묵의 시간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감당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지는 시간이었다.
이스라엘의 400년의 침묵의 시간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말씀 가운데 침묵하시는 2000여년의 시간은 그리스도의 다시오심을 기다리는 침묵의 시간이다.
많은 이들이 하나님이 없다하는 이 시간이 바로 그리스도의 재림이 다가온 시간임을 생각해본다.
하나님의 침묵과 간섭하심
400여년의 침묵을 깨고 요한을 보내신 하나님의 간섭하심은 오직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완성을 위한 것이었다.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침묵하심에 대하여 고통스러워한다.
관상기도나 신비주의를 통하여 하나님을 경험하려하지만 이는 인간적인 생각의 결과물일 뿐이다.
하나님의 침묵하심과 간섭하심은 일차적으로 이 땅에 대한 구속과 완성을 위한 것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400여년의 침묵하심은 이스라엘을 준비시키기 위함이었다.
성도가 경험하는 하나님의 침묵하심은 신구약 중간기의 이스라엘에 대한 침묵하심과는 다르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신 신구약 중간기의 이스라엘은 어둠의 시기였다.
하지만 성도는 이미 말씀이 주어진 빛의 시기를 살아가고있다.
말씀의 빛 가운데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하심을 원하는 성도의 간절함은 종종 여러가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기도한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말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하심이 없으신 것에 대하여 하나님의 침묵하심을 말하지만, 이는 대부분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판단이다.
인간은 어둠 가운데 죄성에 길들여져있기에,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의 추구는 종종 잘못된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경우가 생기게된다.
삶 가운데 하나님께 예민한 필요가 있으며,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섭리에 대해서 민감할 필요가 있지만, 이러한 영적인 민감성은 종종 오류를 범하기도한다.
하나님을 경험하기 위해서 일차적으로 하여야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것이다.
인간은 삶 가운데 죄를 지으면서도 그것이 죄가 되는지에 대한 인식도 없는 경우가 많이있다.
하나님께 민감하는 것 이상으로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이를 자신에게 적용시켜볼 때 더욱 깊이 하나님을 경험하게된다.
컴퓨터가 그것을 운용하는 소프트웨어에 의해서 작동되듯이 인간은 어둠의 프로그램에 의해서 작동되는 본성을 가지고있다.
아직 죄성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간이기에 하나님을 경험하고 이를 깊이 생각해보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 되어야하며, 이를 보편화시켜서는 안된다.
죄인은 자기 자신을 말씀으로 포장할 때 자신이 멋있어 보인다.
요한의 증거는 하나님의 보내심이라는 근거가 있었지만, 많은 이들이 자신의 외침을 포장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기도한다.
사회정의를 외치는 많은 이들이 성경으로 자기의 정의감을 포장하기도하지만, 그 자신은 하나님의 의가 아닌 자신의 의를 근거로 정의를 외치고있는 경우를 종종 보게된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모든 상황에 대하여 간섭하시기를 원하시지만, 인간은 자기 방식으로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을 원하고있다.
이들은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자신의 사역에 간섭하고 역사하신다는 것을 자랑한다.
이들은 치유사역을 자랑하기도하고, 여러가지 간증을 하기도하지만, 정작 이들이 증거하는 말들이 하나님의 목적에 부합되는지 의문이 가기도한다.
이러한 자들은 자신을 높이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는 자들이다.
요한은 자신이 이 땅에 온 근거가 하나님이심을 알았지만, 자신을 증거하려하지 않았다.
오직 빛에 대하여 증거하였다.
성도는 위로를 얻기 위해서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경험하기도하지만, 이러한 경험이 자신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여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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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장 5절 말씀묵상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어둠에 최적화 되어있는 인간의 모습
"깨닫지 못하더라"라는 번역은 참으로 이해하기가 어렵다.
헬라어 katalambano는 ESV에서는 encompass로, NIV에서는 overcome으로 번역하고있다.
깨닫다라고 번역된 katalambano는 "붙잡다, 파악하다, 이해하다, 감당하다"라는 뜻이 있다.
어둠이 깨닫지 못함의 주체로 표현되었지만 그 실상은 어둠의 세력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볼 수가 있다.
깨닫지 못함은 부족함의 문제라기보다는 능력과 상황의 문제라고 보여진다.
그렇다고 단순한 물리적 힘의 크기 만으로는 말할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빛과 어둠은 가시적인 현상이 아닌 영적인 실체이기에,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아담 안에서 죽은 모든 인간들의 영적인 상태에 적용시켜 생각해 볼 수 있다.
영적인 빛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이 땅에 존재하지가 않는다.
빛이 어둠에 비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이전의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어둠 가운데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 이전에는 모든 사람이 어둠 가운데 있었으며,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로 어둠 가운데 있었다.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이 인정하든지 인정하지 않든지 관계없이, 이 땅은 어둠 가운데 있었으며 빛을 필요로하는 세상이었다.
어둠이라는 근원적인 문제
그리스도께서 어둠의 세상에 빛으로 오신 것은 세상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시기 위한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이나 새관점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세상을 좀 더 좋게 만들기 위해서 윤리 도덕 차원의 삶의 본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시다.
세상 사람들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온갖 문제로 비명을 지르면서, 이 땅에 문제가 많다는것을 알면서도, 이 땅이 어떠한 성격의 어둠 가운데 있는지 알지를 못한다.
문제 해결의 가장 올바른 접근 방식은 원인적 접근 방식이다.
문제의 원인을 모르면 근원적인 해결책이 없다.
문제의 원인에 대한 해결책이 없이는 문제는 계속 반복될 뿐이다.
사람 사는 세상의 온갖 문제들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개선되어가는 것 같지만 문제의 총량은 늘어만 갈 뿐이다.
문제의 원인은 외부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부에 있으며, 인간이 바로 문제의 중심에 있는 것이다.
인간은 어둠의 세력을 비판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어둠을 쫓아간다.
빛이 비출 때 어둠이 깨닫지 못하는 것은 죄성을 가지고있는 인간의 모습에서도 볼 수 있다.
이는 모든 인간이 어둠에 최적화 되어있기 때문이다.
어둠에 갇혀 있는 인간은 빛이 낯설 뿐만이 아니라 감당할 수 없으며, 거부할 수밖에 없다.
이 빛은 인간적인 도덕의 기준에서의 빛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기준으로하는 빛이다.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어느 누구도 빛 가운데 노출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매일의 뉴스는 온갖 부정적인 상황들로 도배되지만, 정작 자신은 별개라는 생각을 하면서 스스로를 부정적인 상황과 분리시키고있다.
인간에게 주어진 부정적인 상황들은 사실 부정적인 인간에게 가장 합당한 상황들이다.
인간은 상황을 탓하기 전에 왜 자신이 이러한 부정적인 상황에서 살아가야만 하는가 생각해 보아야한다.
가장 무서운 암은 통증없이 진행되는 암이다.
통증이 없기에 발견되었을 때에는 이미 늦은 경우가 많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둠의 권세에 길여여졌더라도, 부정적인 상황들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해 볼 때 그리스도의 빛으로 인도되는 영광을 누릴 수 있다.
모든 상황이 좋기만 하다면 인간은 자신의 상태를 제대로 볼 수 없으며, 자신의 죄에 머물면서 결국 파멸에 이를 것이다.
빛으로 인도하기 위한 부정적 상황들
필요악이라는 말이 있듯이 부정적인 상황들은 긍정이라는 반전의 필수 요소가 되기도한다.
어둠 가운데 길들여진 인간은 본성적으로는 빛으로 나올 수 없지만, 절망적인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이 빛으로 나올 수 밖에 없게된다
아무리 주변의 사람들에 대하여 욕을 하고 비판을 한다 하여도 자신에게 부정적인 상황이 다가오지 않으면 남의 일일 뿐이다.
마치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고나서, 자신들의 정신적 모체였던 성전이 모독을 당하고, 로마의 압제라는 부정적 상황이 있었기에, 그나마 희미하게나마 그리스도께 나아올 수 있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 이전의 400여년은 하나님의 계시도, 예언의 말씀도 없던, 이스라엘에게는 깊은 암흑의 시대였다.
삶의 현장에서 겪게되는 깊은 좌절의 시간은 그만큼 빛으로 인도되기 위한 고난의 시간임을 생각해보면서 부정 속에 긍정을 보게된다.
사랑의 빛
어둠이 빛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사랑의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단순한 빛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는 희생적 사랑과 더불어 오신 것이다.
빛을 싫어하는 인간에게는 희생적 사랑이 없다.
자식을 사랑하는 희생적 사랑은 그나마 인간에게 남겨진 하나님의 형상의 희미한 그림자일 뿐이다.
만약에 자식이 범죄를 저지른다면 사람들에게 자식을 욕하면서 흉을 볼 수가 없을 것이다.
인간에게는 희생적 사랑이 없기에 남을 해하는 온갖 비방과 다툼과 전쟁에서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
인간은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육체적 본능 말고는 어느 누구도 타인을 죽기까지 사랑할 수가 없다.
참된 사랑은 오직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을 소유한 그리스도에게만 있다.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타인을 사랑하는 것은 원래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이 본래 가지고있었을 성품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희생적 사랑을 소유한 인간들 가운데서는 전쟁이 있을 수도 없으며, 어떠한 부정적인 상황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윤리적 기독교를 말하는 톰 라이트는 인간이 연습과 훈련으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 시킬 수 있다고 말하지만, 어떠한 연습과 훈련으로도 인간은 타인을 죽기까지 사랑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않고는 인간은 연습과 훈련으로 빛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자신을 포기하면서 자신을 희생하기까지 타인을 사랑할 수도 없고 또 그렇게 하기를 원하지 않기에 이러한 사랑의 빛을 타락한 인간이 원하지 않는 것이다.
빛의 출현-새로운 창조
그리스도의 탄생은 BC와 AD를 구분하는 역사의 새로운 기원이 된다.
어둠은 빛의 반대 개념이 될 수도 있겠지만, 태초에 빛을 창조하기 이전의 상태와 같이 빛의 부재 상태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빛으로 오신 것은 어둠의 혼돈 가운데 있는 세상에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신 것이다.
어둠은 빛과의 공존이 불가능하며, 싸움 자체가 안된다.
어둠은 빛을 원하지 않는다.
어둠은 그 자체가 사물이 아니듯 빛도 마찬가지이다.
어둠이 그 역할에 의미가 있듯이 빛도 그 역할에 의미가 있다.
그리스도의 빛은 처음 아담에서와 달리 영원한 구원을 약속한다.
처음 아담에게 영원한 안식의 나라는 조건적 약속이었지만, 빛 가운데 있는 둘째 아담의 후손에게는 영원한 안식의 나라가 무조건적으로 약속된다.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불순종으로 인한 더 이상의 실패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신자에게는 영원한 안식의 나라가 보장되어있다.
구속을 약속하는 빛
신약의 빛은 창조를 넘어선 구원과 결부된 계시다.
창세전의 혼돈 가운데있던 깊은 어둠은 불순종의 어둠이 아니지만, 이 땅을 살아가는 인간들 가운데 있던 어둠은 불순종의 어둠이었다.
그리스도의 빛은 단순한 결핍의 보충이 아니라 순종하심을 통하여 얻은, 어둠을 이기는 능력이다
불순종한 인간들은 자신의 행위가 악하기에 어둠을 사랑하지만, 그리스도의 빛은 어둠을 배척하고 구속을 약속해준다.
신자는 이제껏 자신을 지배했던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고, 그리스도의 승리를 힘입어, 어둠에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어둠은 빛을 감당할 수가 없다.
세상 철학자들의 결론
인류 역사 가운데 수많은 철학자들이 인간의 죄성에 대하여 연구를 하였어도 그들은 어떠한 결론도 내릴 수가 없었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죄성을 집단성에서 찾았지만, 집단의 죄성의 기원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가 없었다.
계몽주의와 더불어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인간은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더 나은 세계를 만들어 갈 수 있다고 말하였지만, 그 결과는 제1,2차 세계대전의 참담함이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도 어떠한 결론에도 이르지 못하였다.
이는 결국 모든 인간이 어둠 가운데 있는 소경이었음을 증명해주는 것이었다.
성경에 대한 과학적인 접근방식도 마찬가지였다.
성경에 대한 역사비평과 더불어 “역사적 예수탐구”라는 방식은 성경에 대한 또 다른 인간적인 해석을 하게된다.
슈바이처는 역사적예수탐구라는 방식을 통하여 예수와 바울을 대립시킴으로서 바울이 예수와 다른 어떤 종교를 가르쳤다고 생각했다.
불트만은 슈바이처와 달리 예수와 바울을 대립시키지 않지만, 전통적 칭의론에 심각한 비판을 가하면서, 윤리적 기독교를 만들어낸다.
불트만의 제자 케제만은 칭의의 근거를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하나님의 의에 둔다.
톰 라이트는 역사적 예수 탐구를 통하여 슈바이처의 “그리스도 신비주의”와 케제만의 “하나님의 의’를 결합시킨 새관점을 도출해낸다.
새관점의 결론은에수는 “세상을 대변하는 로마”에게 어떠한 “희생적인 삶”을 살아야하는지 본을 보여주시고자 혁명적인 삶을 살아가신 분이라고 말한다.
톰 라이트에게 에수는 따름의 대상일 뿐 믿음의 대상이 아니었으며, 창조자로서의 빛도 아니었다.
슈바이처, 불트만, 케제만, 톰 라이트 모두 다 어둠 속에서 성경을 해석하려했다.
말씀은 어둠 가운데서 올바로 해석될 수 없다.
어둠은 빛을 깨달을 수가 없다.
오직 말씀은 말씀으로 해석되어야지만 제대로 해석될 수가 있다.
언약적 신율주의와 빛
빛은 구원을 위한 구원하는 능력이다.
이 땅은 빛이 비추이기 이전에 어느 곳도 어둠에 덮여있지 않은 곳은 없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구원하시는 능력의 말씀이다.
그리스도가 유대 땅에 오실 때 유대 땅은 아직 구원의 빛이 비쳐지지 않은, 구원을 기다리는 어두운 땅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톰 라이트는 유대 땅이 이미 구원의 은혜 가운데 있었다고 주장한다.
톰 라이트는 “역사적 예수 탐구”라는 방법을 통해서 연구해본 결과, 1세기 제2성전 유대교는 이미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안에 머물러 있었으며, 율법을 지키는 것은 구원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구원의 은혜 안에 머무르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말한다.
율법에 대한 이러한 해석을 신율주의, 혹은 언약적 신율주의라고 말한다.
톰 라이트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는 과정을 통하여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말한다.
아담의 죄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구원을 약속할 때 이미 암묵적으로 해결된 것이라고 말한다.
톰 라이트는 최종적인 구원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케제만이 말하는 “하나님의 의”를 근거로한다고 말한다.
톰 라이트는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최종적인 구원을 얻기 위해서 예수를 따르는 삶을 살아야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최종적 구원을 위해서 인간의 공로가 추가적으로 요구된다면 이는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라고 말할 수 없다.
이 세상에 어느 누가 예수를 따르는 삶을 살아감으로서 하나님의 요구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을까?
살아가면서 짓는 죄의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은혜받은 인간에게 추가적인 공로가 요구된다면 그리스도는 더 이상 구원의 빛으로 오신 분이 아니시다.
이러한 빛은 희미하게 비치는 윤리적인 빛일 뿐이며 그 안에는 구원의 능력이 없는 것이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하여도 과학적인 접근방식으로는 하나님에 대하여, 생명에 대하여, 빛에 대하여 알 수가 없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에 의하지 않고는 어둠은 빛을 깨달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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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장 4절 말씀 묵상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
요한은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으며,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설명하고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설명하신다(요 11:25)
여기서 소개하는 생명은 살아있는 육신과는 다른 영으로서의 생명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관점에서 본다면 살아서 움직이는 육신은 생명이 없는 주검일 뿐이다.
생명은 죽음에 대한 반대 개념이다.
마치 빛과 어둠의 관계와 같다고 할 수 있다.
태초에 생명이 없었던 흑암 가운데 땅에서 취하여진 인간은 생명이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심으로서 사람이 생령이 되도록하셨다.
흙으로 지어진 처음 사람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생명이 불어넣어짐으로 생령, 즉 생명이 있는 영으로 창조된 것이다.
흙은 죽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처음 아담은 불순종함으로서 다시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게되었다.
모든 인류는 처음 아담의 후손으로 처음 아담 안에서 불순종하였기에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말씀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흙으로 돌아간 사람에게 다시 자신 안에 있는 생명을 다시 불어넣으셔서 생령이 되도록하신다.
처음 아담 때와 달리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생명은 구원과 영생을 위한 것이다.
처음 에덴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처음 에덴에서 아담에게 주어졌던 생명은 구원과 영생이 보장되지 않았다.
처음 아담에게는 순종의 조건이 주어졌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은 완전한 순종으로 이루신 죽으심과 부활로 인하여 흙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인간에게 다시 처음 창조에서의 생기와는 차원이 다른 생기를 불어넣으시는 작업을 하시게된 것이다.
처음 아담은 불순종할 수도 있는 선택권이 있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부여받아 거듭난 신자는 다시 불순종 할 수가 없다.
신자의 생명은 신자의 순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얻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신자의 믿음 또한 자신에게서 출발한 믿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선택하심에 의한 선물이기에 신자는 구원하시는 생명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종종 보이는 배교행위는 원래부터 모양만 신자였던 불신자가 자신의 불신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은 영원하고 절대적인 것이기에 새생명을 얻은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할 수 있는 것이다.
실상은 죽은 인간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육적인 생명과 죽음은 매한가지일 뿐이다.
영적인 생명이 없는 인간은 실상 죽은 자들이다.
좀비는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움직이는 죽은 이들이다.
불순종한 인간은 좀비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처음 아담은 그 코에 불어 넣어진 하나님의 생기로 말미암아 생령, 즉 영적으로 살아있는 자였지만 불순종함으로서 영적으로 죽은 존재가 된 것이다.
바빙크를 비롯하여 많은 신학자들은 아담이 범죄한 날 죽지 않았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날 정녕 죽으리라한 약속이 은혜 가운데 실행이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아담이 범죄하고서도 은혜 가운데 수백년을 살아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담은 범죄한날 죽었다.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난 후의 삶은 영적으로는 죽어있는 육신만 살아있는 삶이었다.
생명과 죽음은 빛과 어둠으로 대비된다.
생명되신 예수님께서 빛으로 어둠 가운데 오신 것은 죽은 자들, 즉 처음 아담의 후손들 가운데 오신 것이다.
처음 아담의 후손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는 육으로 난 자들이다.
요한복음 3장 6절에서는 “예수님께서는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말씀하신다”고 전하고있다.
모든 인간은 육으로 난 자들이지 영으로 난 자들이 아니다.
영으로 난 자들만이살아있는 자들이다.
처음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이 둘째 아담 안에서 산 자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인간들에게 생명이 없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에 이를 수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자신이 죽은 자임을 인식하는 것은 생명을 얻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의 패망 후에 이 땅에 오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패망하고나서야 스스로 죽은 자임을 깨달을 수 있는 상황이 준비되었기에 오신 것이다.
만약에 예수님게서 솔로몬이나 다윗 시대에 오셨다면 그리스도께 나오는 자들은 인간 승리를 외치는 자들이었을 것이다.
인간 승리라는 것은 없다.
인간적으로 승리한 자들, 성공한 자들이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것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려는 것과 같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 만큼이나 힘들 것이다.
여기서 부자는 물질을 풍요를 누리는 자가 아니라 스스로 잘났다고 외치는 교만한 자들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성공 뒤에 오는 좌절과 패배,절망의으로 인하여 마음의 문이 열렸을 때 가까이 다가오신다.
자신이 살아있다고 자신을 믿어온 교만한 인간은 자신의 교만에서 꺽여서 깊은 좌절감으로 낙망하여있을 때에야 비로서 자신이 죽은 존재인 것을 깨닫게 된다.
더 이상 살 희망이 사라지고 내세울 명예와 권위가 없어졌을 때 비로서 자신의 실상에 대하여 깨닫게 된다.
자신이 죽은 존재라는 것을 실감하는게 되는 깊은 좌절의 시간, 낙망의 시간, 우울의 시간이 바로 주님께서 참 생명을 주시고자 손을 벌리시고 기다리시는 시간이다.
육신의 생각은 생명에 대하여 저항한다.
믿고 의지했던 육신이 죽음을 앞에 둘 때 육신의 교만에 의지하던 인생은 더 이상의 희망이 없는 깊은 좌절에 빠지게된다.
주님께서 주시고자하는 참 생명은 육신의 죽음을 전제로하는 생명이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생명을 주시고자 말씀 가운데 한 줄기 빛으로 다가오신다.
사람들의 빛
여기서 사람은 영적으로는 죽어있고 육신만 살아있는 사람이다.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본래부터 빛 가운데 있었던 자들은 아무도 없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요 5:26)
오직 육신으로 오신 그리스도만이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이 있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창세 전에 택하신 이들에게 생명을 주시고자 이 땅에 오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빛으로 다가오셨다.
그리스도께서 빛으로 다가오신 것은 인간이 어둠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어둠의 세계는 빛을 경험하지 못하기에 빛에 대하여 알 수가 없다.
빛을 경험하는 순간 더 이상 어둠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생명을 주시고자 사람들에게 말씀으로 다가오셔서 빛을 비추신다.
이 빛은 사람들로하여금 구원을 얻게해주는 계시의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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