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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9.22 :: 요한복음 1장 9절 말씀묵상
  2. 2021.09.21 :: 요한복음 1장 8절 말씀묵상
  3. 2021.09.20 :: 요한복음 1장 7절 말씀묵상
요한복음 2021. 9. 22. 21:36

요한복음 1장 9절 말씀묵상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참 빛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를 빛으로 소개하는 것은 어둠에 대한 필요였으며, 그리스도는 어둠의 문제를 해결해주신 분으로 묘사되었다.

참의 뜻은 진짜의, 실제의, 정당한, 신뢰 할 수 있는...등이 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가짜의, 신뢰하지 못할 모양만 빛인 가짜가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전까지의 각 사람을 비추었던 모양만 그럴듯한 거짓 빛은 많은 사람들에게 호소력이 있는 인간적이고 보편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참 빛은 일반적인 사람이 인간적으로는 알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고, 오직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은혜로 알 수가 있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었다.

이들은 자신이 영적으로 어둠 가운데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서 이들은 빛을 마땅히 알아 볼 수가 있다.

그리스도께서 어둠 가운데 빛으로 오셨는데도 빛을 알아보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은 자신들이 어둠 가운데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시적인 빛은 영적인 빛의 모형일 뿐이다.

빛을 인식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빛에 대하여 아무리 설명을 해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빛을 통해서 유형적으로 영적인 빛을 생각해 볼 수 있듯이, 삶 가운데 경험하는 다양한 부정적인 상황을 통해서 어둠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영적인 안목이 있다면, 그리스도께서 왜 이 세상에 빛으로 오셔야만 했는지 상황 가운데 알 수 있을 것이다.

육적인 문제의 근원에는 영적인 어둠의 문제가 있다.

근원적인 접근이 없는 육의 문제만을 위한 빛이라면 그것은 참 빛이 아니며, 신뢰할 수 없는 빛이다.

요한이 그리스도를 참 빛이라고 소개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지 전에 사람들이 육의 문제만을 위한 거짓 빛에 미혹되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말하고 교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활동하는 많은 영역들에서 육적인 문제만을 위한 활동들이 활발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들이 말하는 그리스도는 단지 자신들의 육적인 욕심을 이루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한때 유행하였던 비지니스 차원의 실용주의 교회들은 교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을 교회 성장의 원동력으로 삼았지만, 그 큰 교회들은 사실상 거의 다 실패를 하고 사라져버렸다.

이들은 참 빛이 아닌 세상의 거짓 빛을 따랐던 이들이다.

이러한 문제는 실용주의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 교회의 일반적인 현상이라는데 문제가 있다.

많은 교회가 실용주의적이 되었는데도 이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흔히들 교회는 많은데 나아갈 교회가 없다고 말한다.

이는 대부분의 교회가 참 빛이 아닌 빛의 모양을 한 거짓 것, 즉 영적인 어둠이 아니라 육적인 어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교회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이는 외형적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다.

참 교회인 신자라 할지라도 넘어서기 힘든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참 신자라하더라도 인간적인 연약함으로 인해서 참 빛보다는 세상의 거짓 빛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경우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신자는 이를 정당화시켜서는 안된다.

신뢰할 수 없는 거짓 빛들

인생은 끊임없이 성공을 추구한다.

이에는 살아남기 위한 인간의 본능을 넘어서는 인간의 욕구가 있다.

성, 명예, 권력은 인간이 추구하는 대표적인 것들이지만, 꼭 필요한 필수적인 것들은 아니다.

하지만 이를 쟁취하기 위한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그리스도께서 참 빛으로 오신 것은 이스라엘이 가장 절망적인 상태에 있을 때였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윗과 솔로몬 때에 오시지 않으셨다.

다윗은 자신의 성공 뒤에 숨겨있던 어둠의 문제를 안고서 고통스럽게 씨름을 하였다.

하지만 솔로몬은 자신의 성공을 통해서 이방 여인들과 이방 신들이 이스라엘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결국 세상의 거짓 빛을 따라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가 되고 이방인이 되고 나그네가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들이 어둠 가운데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이 추구했던 영광과 부는 세상의 거짓 빛이었다.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다시 영광과 부라는 거짓 빛을 제공해주시지는 않으셨다.

그리스도의 사역 후에 그들이 붙들고 있었던 세상의 거짓 빛들은 예루살렘의 멸망과 더불어 사라져버렸다.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신자들은 성공이라는 거짓 빛을 쫓아가서는 안 된다.

이것을 쫓아갈 때 교회는 거짓 빛을 추구하는 변질된 곳이 되어버린다.

예전에 어떤 목사는 젊은 이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자신이 속한 분야에서 최고자 되어야한다고 주장하며, 세상에서의 성공을 부추겼다.

수 많은 젊은 이들이 그의 설교에 매료되어 그를 추종하였지만, 그는 결국 성추행 목사의 대명사가 되어버렸다.

그의 성공을 향한 수 많은 설교들은 신뢰할 수 없는 거짓 빛들이었던 것이다.

 

어둠 가운데 만나는 참 빛

사람은 누구나 살면서 깊은 실패와 좌절을 맛보게 된다.

아무리 성공을 추구하고 세상적으로 성공하였다고 하더라도, 이로서는 내면 세계의 결핍을 충족시킬 수가 없다.

실패도 절망적이지만, 영광과 부의 끝도 타락과 절망뿐이다.

이는 인간의 본질인 죄성의 문제로 인한 것이다.

인간의 죄성은 근원적인 어둠의 문제이기에 그리스도의 참 빛이 아니고는 해결될 수가 없다.

하지만 인생의 꼭대기에서나, 혹은 성공을 추구하는데서는, 참 빛을 만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것은 자신들의 바램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자신들이 정치적으로 해방되어, 자신들의 승리를 외칠 수 있는 육적인 시오니즘 때문이다.

인생이 참 빛을 만날 수 있는 시기는 자신들이 절대적인 어둠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안 순간부터이다.

인생에 더 이상의 희망이 없고, 자신에게 재기의 기회가 주어질 가능성도 없고, 자신을 지탱해주었던 명예와 자랑은 다 사라져 버렸을 때 비로소 참 빛에 대하여 반응하게된다.

이는 빛을 알고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빛에 반응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 주셔서 마음의 문을 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육적으로 가장 절망적인 상황이 영적으로는 가장 희망적인 상황이다.

실패와 좌절과 낙망 가운데 경험하는 빛은 인생에 참된 안식을 가져다 준다.

더 이상은 거짓 빛을 추구하려하지 않게된다.

이 때에야 비로소 거듭난 자로서 참 빛 가운데 거하게 되는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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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21. 9. 21. 22:19

요한복음 1장 8절 말씀묵상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직분의 자리

처음 아담은 에덴에서 제사장으로서의 직분 뿐만이 아니라 피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여야하는 직분을 받았지만, 자신의 직분을 망각하고 하나님과 같이 높아지고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다

요한은 처음 아담과는 달리 빛에 대한 증거를 하면서 빛과 같이 높아지려고하지 않았다.

그가 이 빛이 아니라는 요한에 대한 소개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을 기록하는 것이었지만,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자신의 직분을 망각하고 자신이 자리에서 이탈하여 스스로 높아지려던 자는 사탄이었다.

일단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인간은 사탄의 종이기에, 사탄과 마찬가지로 기회만 있으면 높아지려고한다.

이러한 높아지려는 본능은 타락한 인간이 가지고있는 자연스러운 본성이다.

사탄은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고 빛과 같이 높아지고자 사람들에게는 스스로 빛의 천사로 가장한다

요한은 이러한 점에서 분명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며, 이는 아담의 범죄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요한을 가리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마11:11)"라고 말씀하신다.

그만큼 큰 일을 하면서도 겸손하게 자신을 낮춘다는 것이 쉽지가 않은 것이다.

모세도 하나님께 책망을 받았지만 요한은 그런 일이 없었다.

모세의 경우에 있어서는,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지 못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모세와 아론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징계를 받았다(민 20:1-2).

반석을 치는 일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대한 가시적인 표현이라고 본다면, 이는 빛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심각한 손상을 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요한은 존재론적으로는 첫 사람 아담의 후손이었지만, 교만하지 않고 철저하게 빛의 증인으로서의 직분을 감당하였다.

 

높아짐의 피동성

인간이 높아지고자 하는 것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본성에 속해있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높아지고자하는 이들의 싸움이 주도하였다.

섬기고 사랑하고 낮아지려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었다면 인류 역사는 전혀 다르게 전개되었을 것이다.

의지로는 높아지고자하는 본성의 방향을 바꿀 수가 없다.

인간은 생존경쟁의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높아져야만 한다.

마치 기술 경쟁 사회에서 낙후된 기술은 도태되는 것과 같이 경쟁력을 상실한 사람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

경쟁력은 높아짐을 수반한다.

기업에서의 생존력은 기업 가치의 높아짐에 달려있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러한 원리가 교회에 적용이 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목회와 생존 경쟁

조그마한 교회에서는 높아짐이나 교만의 문제는 다른 세계의 이야기일 뿐이다.

조그마한 교회는 생존을 위해서 필사적으로 커지려고한다.

하지만 조그마한 교회도 커지게되면 그만큼 목회자에게서도 교만해진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교만해진 목회자는 자신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이용한다.

자신의 말에 힘을 싣기 위해서 말씀을 사용한다.

이는 요한이 그리스도께 세례받으러 가는 이들에 대하여 자신이 쇠하여야할 것을 말하였던 것과는 대조가 된다.

그리스도의 빛을 약화시켜서라도 자신이 흥하고자 말씀 선포보다는 자신의 이야기를 말씀으로 포장한다.

큰 교회 목회자들은 교회 크기에 걸맞는 모습으로 자신을 포장하기 위해서 말씀의 빛을 약화시키는 범죄를 저지르면서도 이에 대하여 무책임한 모습을 보여주고있다.

확장된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십일조에 대한 강조, 교회에서의 충성 봉사. 주의 종을 섬기는 것등을 강조하는 교회 경영을 할 수밖에 없다.

목회자도 예수님과 같이 사단의 시험을 받을 수밖에 없다.

사탄은 예수님을 시험하면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릴 것을 요구하였다.

목회자도 마찬가지로 자신이 확장시킨 교회의 꼭대기에서 높아진 모습을 자랑하게끔 사탄의 시험을 받을 수있다.

기억 속에 오래전에 잠깐 다니던 아파트 상가의 개척교회에서 참으로 순수하고 열정적인 좋은 이미지를 가졌던 목회자가 뵌 일이 있었다.

어느덧 그 목회자는 수만명이 모이는 교회의 목회자가 되었지만, 그 교회의 재정담당 장로는 목숨을 끊는 일이 벌어졌고,  그는 자신의 비리를 숨기고자 무리하게 아들에게 교회를 물려주는 목회세습을 강행하면서 사회에 엄청난 물의를 일으키는 인물이 되었다.

처음의 순수하고 좋았던 이미지는 어느덧 숭배받는 교만한 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가 어느 순간에 그렇게 변질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목회자도 범죄한 첫 사람 아담의 후손이기에,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교인들의 숭배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사람들은 성경을 직접 읽고 묵상하며 주의 뜻을 따르는 것보다는 목회자의 말을 듣는 것을 좋아한다.

이는 뱀에게 유혹받은 아담의 죄성에서 나온 것이다.

대형교회 목회자들은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즐거움보다는 교인들의 숭배를 받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이 또한 아담을 유혹했던 뱀의 속성에서 나온 것이다.

스스로 빛이 되려고하지 않고 빛을 증거하는 요한은 그리스도께 큰 자라 칭함을 받았듯이, 그리스도와 연합된 신자는 그리스도의 빛을 발함으로서 겸손하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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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onho Kim
:
요한복음 2021. 9. 20. 21:48

요한복음 1장 7절 말씀묵상

7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요한의 증언에 준비되어진 이스라엘 공동체

요한의 증언은 구속을 위한 은혜로의 초대였다.

요한의 증언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은혜언약의 표현이었다.

요한의 증언에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담겨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에는 에덴에서 아담에게 말씀하셨으며, 그 다음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제 세번째로 말씀하신다.

에덴에서의 창조언약이 순종을 요구하는 행위언약이었다면,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은 구속으로 인도하기 위한 행위언약의 재연이었다.

이제 요한을 통하여 선포되는 믿음으로의 초대는 은혜언약의 구현을 위한 것이다.

에덴과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안식을 위해 행위가 요구되는 행위언약의 말씀이었다.

범죄 이전의 에덴에서와는 달리, 죄 가운데 있었던 이스라엘 공동체에 임하셨던 하나님은, 시내산에서의 권위와 위엄으로 모든 백성들에게 언약을 지킬 것을 요구하셨다.

모세를 통하여 위엄과 권위로 말씀하셨던 하나님께서는 이제 초라해진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요한을 통하여 온유하게 말씀하신다.

요한의 증언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을 요구하는것이며,  이는 창세기 3장 15절에서 약속 되어진 은혜언약의 표현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오랜 환란 가운데 좌절하고 낙망한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더 이상의 행위를 요구하시지 않으신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오랜 환란을 통하여 자신들이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행할 자격과 능력이 없는 존재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실패와 좌절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는 요한에게 마음의 문이 열려져있었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요한의 증언을 받아들이기 위해선 그에 대한 신뢰가 전제가 되어야했다.

그의 증언이 신뢰할만하다는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요한에게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과 기사를 행할 능력이 없었다.

요한은 오직 외침만이 있었다.

하지만 이스라엘 공동체는 자신들이 어떠한 실패자인지를 알고있었기에, 요한의 외침에 대하여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통해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었다.

요한을 예비하시고 요한의 외침이 효과가 있도록 준비시키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바벨론 포로, 400여년의 침묵하심, 로마의 압제등은 은혜를 베푸시고자 이스라엘 백성들의 강퍅한 마음을 비우는 시간이었다.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고자 하나님께서 준비시키신 환경이었다.

인격적이신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는데 있어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마음문을 열 수 있기까지 기다리신 것이다.

자신들의 모습을 볼 수 있기를 기다리셨다.

 

믿음으로의 초대

요한의 빛에 대한 증언은 예수를 믿게하려는 것이었다.

믿음은 궁극적으로 구원을 위한 것이다.

요한의 증언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 예수를 믿어야한다는 것을 단적으로 표현해주는 것이다.

요한은 회개를 촉구하였지만, 요한이 말하는 회개는 도덕적인 행함의 문제 이전에 자기 의에 대한 것이었다.

요한의 믿음에 대한 증언은, 그가 외쳤던 회개가 범죄에 대한 것 이전에 스스로의 행위를 통한 의를 추구하려는 율법주의에 대한 것이었다는 것을 추론해 볼 수 있다.

예수는 자기 의를 추구하려는 이들에게 또 하나의 행동방식을 보여주는 따름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불행히도 새관점을 주장하는 톰 라이트는 예수가 세상을 대변해주는 로마에 대하여 어떠한 방식으로 행하여야하는지 또 하나의 행동 방식을 보여준 혁명적 모델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속이는 자의 속삭임일 뿐이다.

 

최후의 심판을 기다리는 시간들

이스라엘에 대한 침묵하심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현 시대는 최후의 심판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하나님께서는 성경말씀을 통하여 말씀을 완성하셨기에 더 이상의 계시의 말씀을 하시지 않으신다.

인간은 이제 하나님을 배제하고 스스로의 길을 가고있다.

마치 집을 나간 탕자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산을 마음껏 써 버리듯이 현대인들은 마음껏 삶을 즐기고있다.

하지만 집을 나간 탕자의 종말과 같이 현대인들은 막다른 상황에 봉착했다.

현대인들은 스스로 막다른 길로 향하고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있다.

지구온난화, 핵무기, 플라스틱 공해, 미세먼지, 기상재해...등등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재난들에 직면해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기 이전에 스스로 심판받기에 합당한 모습이 되어가고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잘못된 모습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기에 요한의 외침에 순응하며 회개의 세례를 받았던 것이다.

종말의 재앙 앞에서 현대인들은 결국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하심에 대하여 아무 항변을 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격적이신 분이시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하여 기다리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현대인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모습을 보고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기까지 기다리신다.

세계 제1,2차 대전은 과학과 상업의 발달에 의한 인간 욕심의 결과물이었다.

인류의 역사는 욕심에 이끌리는 전쟁의 역사였지만, 핵이라는 무기로 인해서 제한되어진 욕망의 표현은 과학 기술과 산업의 극대화로 방향이 전환되었을 뿐, 인간의 욕망은 결코 줄어들지가 않았다.

현대인들은 마치 폭풍 전야와같이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재앙의 문턱에서 살고있다.

인류는 스스로 만든 재앙에 내어버려진 자들이다.

요한의 외침과 같은 회개의 외침들은 구원의 소리들이다.

요한의 회개의 외침에 세례를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과같이, 더 늦기 전에 요한이 증언하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최후의 심판을 준비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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