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21. 9. 18. 22:16

요한복음 1장 5절 말씀묵상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어둠에 최적화 되어있는 인간의 모습

"깨닫지 못하더라"라는 번역은 참으로 이해하기가 어렵다.

헬라어 katalambano는 ESV에서는 encompass로, NIV에서는 overcome으로 번역하고있다.

깨닫다라고 번역된 katalambano는  "붙잡다, 파악하다, 이해하다, 감당하다"라는 뜻이 있다.

어둠이 깨닫지 못함의 주체로 표현되었지만 그 실상은 어둠의 세력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볼 수가 있다.

깨닫지 못함은 부족함의 문제라기보다는 능력과 상황의 문제라고 보여진다.

그렇다고 단순한 물리적 힘의 크기 만으로는 말할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빛과 어둠은 가시적인 현상이 아닌 영적인 실체이기에,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아담 안에서 죽은 모든 인간들의 영적인 상태에 적용시켜 생각해 볼 수 있다.

영적인 빛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이 땅에 존재하지가 않는다.

빛이 어둠에 비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이전의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어둠 가운데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 이전에는 모든 사람이 어둠 가운데 있었으며,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로 어둠 가운데 있었다.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이 인정하든지 인정하지 않든지 관계없이, 이 땅은 어둠 가운데 있었으며 빛을 필요로하는 세상이었다.

 

어둠이라는 근원적인 문제

그리스도께서 어둠의 세상에 빛으로 오신 것은 세상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시기 위한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이나 새관점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세상을 좀 더 좋게 만들기 위해서 윤리 도덕 차원의 삶의 본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시다.

세상 사람들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온갖 문제로 비명을 지르면서, 이 땅에 문제가 많다는것을 알면서도, 이 땅이 어떠한 성격의 어둠 가운데 있는지 알지를 못한다.

문제 해결의 가장 올바른 접근 방식은 원인적 접근 방식이다.

문제의 원인을 모르면 근원적인 해결책이 없다.

문제의 원인에 대한 해결책이 없이는 문제는 계속 반복될 뿐이다.

사람 사는 세상의 온갖 문제들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개선되어가는 것 같지만 문제의 총량은 늘어만 갈 뿐이다.

문제의 원인은 외부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부에 있으며, 인간이 바로 문제의 중심에 있는 것이다.

인간은 어둠의 세력을 비판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어둠을 쫓아간다.

빛이 비출 때 어둠이 깨닫지 못하는 것은 죄성을 가지고있는 인간의 모습에서도 볼 수 있다.

이는 모든 인간이 어둠에 최적화 되어있기 때문이다.

어둠에 갇혀 있는 인간은 빛이 낯설 뿐만이 아니라 감당할 수 없으며, 거부할 수밖에 없다.

이 빛은 인간적인 도덕의 기준에서의 빛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기준으로하는 빛이다.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어느 누구도 빛 가운데 노출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매일의 뉴스는 온갖 부정적인 상황들로 도배되지만, 정작 자신은 별개라는 생각을 하면서 스스로를 부정적인 상황과 분리시키고있다.

인간에게 주어진 부정적인 상황들은 사실  부정적인 인간에게 가장 합당한 상황들이다.

인간은 상황을 탓하기 전에 왜 자신이 이러한 부정적인 상황에서 살아가야만 하는가 생각해 보아야한다.

가장 무서운 암은 통증없이 진행되는 암이다.

통증이 없기에 발견되었을 때에는 이미 늦은 경우가 많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둠의 권세에 길여여졌더라도, 부정적인 상황들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해 볼 때 그리스도의 빛으로 인도되는 영광을 누릴 수 있다.

모든 상황이 좋기만 하다면 인간은 자신의 상태를 제대로 볼 수 없으며, 자신의 죄에 머물면서 결국 파멸에 이를 것이다.

 

빛으로 인도하기 위한 부정적 상황들

필요악이라는 말이 있듯이 부정적인 상황들은 긍정이라는 반전의 필수 요소가 되기도한다.

어둠 가운데 길들여진 인간은 본성적으로는 빛으로 나올 수 없지만, 절망적인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이 빛으로 나올 수 밖에 없게된다

아무리 주변의 사람들에 대하여 욕을 하고 비판을 한다 하여도 자신에게 부정적인 상황이 다가오지 않으면 남의 일일 뿐이다.

마치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고나서, 자신들의 정신적 모체였던 성전이 모독을 당하고, 로마의 압제라는 부정적 상황이 있었기에, 그나마 희미하게나마 그리스도께 나아올 수 있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 이전의 400여년은 하나님의 계시도, 예언의 말씀도 없던, 이스라엘에게는 깊은 암흑의 시대였다.

삶의 현장에서 겪게되는 깊은 좌절의 시간은 그만큼 빛으로 인도되기 위한 고난의 시간임을 생각해보면서 부정 속에 긍정을 보게된다.

 

사랑의 빛

어둠이 빛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사랑의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단순한 빛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는 희생적 사랑과 더불어 오신 것이다.

빛을 싫어하는 인간에게는 희생적 사랑이 없다.

자식을 사랑하는 희생적 사랑은 그나마 인간에게 남겨진 하나님의 형상의 희미한 그림자일 뿐이다.

만약에 자식이 범죄를 저지른다면 사람들에게 자식을 욕하면서 흉을 볼 수가 없을 것이다.

인간에게는 희생적 사랑이 없기에 남을 해하는 온갖 비방과 다툼과 전쟁에서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

인간은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육체적 본능 말고는 어느 누구도 타인을 죽기까지 사랑할 수가 없다.

참된 사랑은 오직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을 소유한 그리스도에게만 있다.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타인을 사랑하는 것은 원래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이 본래 가지고있었을 성품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희생적 사랑을 소유한 인간들 가운데서는 전쟁이 있을 수도 없으며, 어떠한 부정적인 상황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윤리적 기독교를 말하는 톰 라이트는 인간이 연습과 훈련으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 시킬 수 있다고 말하지만, 어떠한 연습과 훈련으로도 인간은 타인을 죽기까지 사랑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않고는 인간은 연습과 훈련으로 빛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자신을 포기하면서 자신을 희생하기까지 타인을 사랑할 수도 없고 또 그렇게 하기를 원하지 않기에 이러한 사랑의 빛을 타락한 인간이 원하지 않는 것이다.

 

빛의 출현-새로운 창조

그리스도의 탄생은 BC와 AD를 구분하는 역사의 새로운 기원이 된다.

어둠은 빛의 반대 개념이 될 수도 있겠지만,  태초에 빛을 창조하기 이전의 상태와 같이 빛의 부재 상태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빛으로 오신 것은 어둠의 혼돈 가운데 있는 세상에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신 것이다.

어둠은 빛과의 공존이 불가능하며, 싸움 자체가 안된다.

어둠은 빛을 원하지 않는다.

어둠은 그 자체가 사물이 아니듯 빛도 마찬가지이다.

어둠이 그 역할에 의미가 있듯이 빛도 그 역할에 의미가 있다.

그리스도의 빛은 처음 아담에서와 달리 영원한 구원을 약속한다.

처음 아담에게 영원한 안식의 나라는 조건적 약속이었지만, 빛 가운데 있는 둘째 아담의 후손에게는 영원한 안식의 나라가 무조건적으로 약속된다.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불순종으로 인한 더 이상의 실패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신자에게는 영원한 안식의 나라가 보장되어있다.

 

구속을 약속하는 빛

신약의 빛은 창조를 넘어선 구원과 결부된 계시다.

창세전의 혼돈 가운데있던 깊은 어둠은 불순종의 어둠이 아니지만, 이 땅을 살아가는 인간들 가운데 있던 어둠은 불순종의 어둠이었다.

그리스도의 빛은 단순한 결핍의 보충이 아니라 순종하심을 통하여 얻은, 어둠을 이기는 능력이다

불순종한 인간들은 자신의 행위가 악하기에 어둠을 사랑하지만, 그리스도의 빛은 어둠을 배척하고 구속을 약속해준다.

신자는 이제껏 자신을 지배했던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고, 그리스도의 승리를 힘입어, 어둠에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어둠은 빛을 감당할 수가 없다.

 

세상 철학자들의 결론

인류 역사 가운데 수많은 철학자들이 인간의 죄성에 대하여 연구를 하였어도 그들은 어떠한 결론도 내릴 수가 없었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죄성을 집단성에서 찾았지만, 집단의 죄성의 기원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가 없었다.

계몽주의와 더불어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인간은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더 나은 세계를 만들어 갈 수 있다고 말하였지만, 그 결과는 제1,2차 세계대전의 참담함이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도 어떠한 결론에도 이르지 못하였다.

이는 결국 모든 인간이 어둠 가운데 있는 소경이었음을 증명해주는 것이었다.

성경에 대한 과학적인 접근방식도 마찬가지였다.

성경에 대한 역사비평과 더불어 “역사적 예수탐구”라는 방식은 성경에 대한 또 다른 인간적인 해석을 하게된다.

슈바이처는 역사적예수탐구라는 방식을 통하여 예수와 바울을 대립시킴으로서 바울이 예수와 다른 어떤 종교를 가르쳤다고 생각했다.

불트만은 슈바이처와 달리 예수와 바울을 대립시키지 않지만, 전통적 칭의론에 심각한 비판을 가하면서, 윤리적 기독교를 만들어낸다.

불트만의 제자 케제만은 칭의의 근거를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하나님의 의에 둔다.

톰 라이트는 역사적 예수 탐구를 통하여 슈바이처의 “그리스도 신비주의”와 케제만의 “하나님의 의’를 결합시킨 새관점을 도출해낸다.

새관점의 결론은에수는 “세상을 대변하는 로마”에게 어떠한 “희생적인 삶”을 살아야하는지 본을 보여주시고자 혁명적인 삶을 살아가신 분이라고 말한다.

톰 라이트에게 에수는 따름의 대상일 뿐 믿음의 대상이 아니었으며, 창조자로서의 빛도 아니었다.

슈바이처, 불트만, 케제만, 톰 라이트 모두 다 어둠 속에서 성경을 해석하려했다.

말씀은 어둠 가운데서 올바로 해석될 수 없다.

어둠은 빛을 깨달을 수가 없다.

오직 말씀은 말씀으로 해석되어야지만 제대로 해석될 수가 있다.

 

언약적 신율주의와 빛

빛은 구원을 위한  구원하는 능력이다.

이 땅은 빛이 비추이기 이전에 어느 곳도 어둠에 덮여있지 않은 곳은 없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구원하시는 능력의 말씀이다.

그리스도가 유대 땅에 오실 때 유대 땅은 아직 구원의 빛이 비쳐지지 않은, 구원을 기다리는 어두운 땅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톰 라이트는 유대 땅이 이미 구원의 은혜 가운데 있었다고 주장한다.

톰 라이트는 “역사적 예수 탐구”라는 방법을 통해서 연구해본 결과, 1세기 제2성전 유대교는 이미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안에 머물러 있었으며, 율법을 지키는 것은 구원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구원의 은혜 안에 머무르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말한다.

율법에 대한 이러한 해석을 신율주의, 혹은 언약적 신율주의라고 말한다.

톰 라이트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는 과정을 통하여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말한다.

아담의 죄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구원을 약속할 때 이미 암묵적으로 해결된 것이라고 말한다.

톰 라이트는 최종적인 구원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케제만이 말하는 “하나님의 의”를 근거로한다고 말한다.

톰 라이트는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최종적인 구원을 얻기 위해서 예수를 따르는 삶을 살아야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최종적 구원을 위해서 인간의 공로가 추가적으로 요구된다면 이는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라고 말할 수 없다.

이 세상에 어느 누가 예수를 따르는 삶을 살아감으로서 하나님의 요구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을까?

살아가면서 짓는 죄의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은혜받은 인간에게 추가적인 공로가 요구된다면 그리스도는 더 이상 구원의 빛으로 오신 분이 아니시다.

이러한 빛은 희미하게 비치는 윤리적인 빛일 뿐이며 그 안에는 구원의 능력이 없는 것이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하여도 과학적인 접근방식으로는 하나님에 대하여, 생명에 대하여, 빛에 대하여 알 수가 없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에 의하지 않고는 어둠은 빛을 깨달을 수가 없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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